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이정희

수필가

선머슴도 그런 선머슴은 드물다. 벼이삭 금 빛깔도 아니고 불콰하니 칙칙하다. 모두가 익고 물드는 들판에서 남우세스러울 정도이다.'곡식은 익을수록 숙인다'고 한 마디씩 뽐내는 판에 멋대가리 없이 뻣뻣하다. 엉성한 줄기에 삐죽삐죽 돋아난 잎은 성글기만 하고 익는다면서 꼿꼿한 것도 짜장 민망했는데……

금물결 출렁이는 들판이었어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남들은 익을수록 숙이는데, 무슨 저 따위 곡식이 있느냐고 눈살을 찌푸렸건만 키가 커서 그렇지 얼마쯤은 숙였다. 비알밭에서 더 우악스러운 꼴은 식겁을 할 정도였으나 겉으로는 저래도 다소곳 익으려는 나름 속내는 있을 거다.

절친한 동무 하나가 그랬다. 그림은 물론 음악적 소양도 뛰어나서 팝송이든 클래식이든 막히는 데가 없다. 예술가적 기질대로 무척 활달했으나 비라도 추적이면 들판을 쏘다닌다는 카톡이 날아온다.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게, 척척 늘어지도록 말랑한 수수팥떡 수수와 판박았다. 선머슴 기질도 다분해서 부드러운 속내는 어찌되었든 억세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다.

문동리에서 본 수수도 장대 끝에 붉은 벙거지를 씌운 듯 망측했다. 가을맞이라고 수수밭골 헤매다 보면 새앙재까지 넘실대던 금빛 수채화. 곱게 물든 잎을 책갈피 넣다 보면 참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하지만 수수 이삭은 겉도는 느낌에 바람이 불면 와스락 와스락 출동이라도 할 듯 누군가 낫을 들고 오면 덤비기라도 할 것처럼 험상궂다.

하지만 털어서 께끼면 전혀 부드럽다. 수수전병과 팥떡과 수수부꾸미를 보면 겉으로만 왈패일 뿐이다. 교양이든 지식이든 어느 수준에서는 겸손의 차원을 떠나 소탈해진다. 우듬지 이삭이 차분해 보이는 것도 수숫골 서정이다. 그래서 더 향수적으로 다가오곤 했던 것일까.

고구마 통가리도 천장과 맞닿게 울타리를 치는데 낟알을 털어낸 수수깡이다. 덕분에 썩지 않고 겨울을 났다. 빗자루도 엮는다. 마당을 쓸면 알갱이가 사방에 흩어졌다. 붉으죽죽한 빛깔은 악귀를 물리친다고 수수 빗자루에 수수경단까지 만든다.

수수는 척박한 땅에서도 자란다. 이래저래 서민들에게는 친숙하고 몸에 좋은 약곡이 되었다. 수수깡 추억은 많기도 했다. 가을이면 또 가장 먼저 익는다니 배고픈 서민들은 찹쌀과 수수가루를 반죽해서 팥 앙금을 넣고 반달 모양으로 지져 먹었다. 그렇게 만든 부꾸미'전병'은 또 형편없다는'젬병'의 어원이다. 지나치게 부드럽고 말랑해서 잠깐 새 들러붙는 바람에 모양을 잡아 다시 지져야 했다. 핀잔 같지만 그럴 수 있다.

콩 위에 놓고 찌는 수수옴팡떡도 있다. 웬만치 익으면 반죽 밑에 콩이 달라붙고 뒤집어서 다시 김을 올린 뒤 반죽을 눌러 만든다. 그 모양이 오두막 지붕 같아서 옴팡떡이다.'수수콩떡'이라면 될 것을 1년에 한번 먹을까 말까 귀해서 그리 이름 붙였나 보다.

잘 익은 수수이삭은 알갱이가 흠뻑지고 꽃처럼 화려하다. 거기서 나온 이름 수수꽃다리는 꽃다리와 수수가 합쳐진 말이다. 다리는 머리채를 탐스럽게 보이도록 장식했던 딴머리이다. 다리 중에서도 꽃다리가 예쁘고 뭉쳐나기로 핀 수수꽃이 풍성하다. 처음 모양을 유지하자니 뻣뻣해야 좋을 거라면서 이름도 예쁜 야생화 수수꽃다리가 되었다. 우리 말의 향기가 물씬물씬 참으로 예스러운 표현이었건만……

이맘 때 느티재 돌밭으로는 수수가 익어갔었지. 이삭이 부딪칠 때마다 가을 아래뜸에서 와스락대던 그 소리. 익을수록 숙인다면 동떨어지는데 바람 끝이 선선한 때그 소리는 심란할 때처럼 수수롭다. 수수를 보면 생각보다 부드럽고 약해 보이면서도 강한 게 있음을 알게 된다. 세상이 수수의 속내처럼 딴판이라면 맞출 수 있는 변수가 필요하다. 단지 쳐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깎아내리곤 했으나 이제는 뜻밖에 부드러운 수수팥떡과 부꾸미를 생각한다. 세월도 많이 갔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