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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민자

봉정초등학교 교감

남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가지 빈 손짓 분주하더니 어느새 봄 한가운데 있습니다. 운동장 목련꽃 사이로 넘실대는 햇살이 개구쟁이 어린 몸짓을 훑고 지나며 냉기를 걷어내고, 웃음 돋는 얼굴에 녹아든 초록빛이 보일 듯 말 듯한 생동감이 넘치는 봄입니다.

청명한 봄날이면 논과 밭에서 소 몰고 쟁기질 하던 동네 어르신들의 '이럇 오저저젓!'하던 소리가 들리는 듯한 4월, 지금도 봄이면 문득문득 그 소리가 생각납니다. 시나브로 잔설 떠난 산등성이 아래 빈 공간이 허허롭다 싶더니 부드러운 봄 냄새가 개천에 진동하고, 작은 물이끼의 색채는 진해져 그 곁을 흐르는 물소리가 사뭇 정겨운 봄날입니다.

오늘처럼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봄날이면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평생 손에 쟁기 한번을 잡으신 적이 없는 아버지, 평생을 살면서 낫이라든지 곡괭이 한번 잡지 않고 살아오신 아버지를 이제와 어슴푸레 이해하게 되었다면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뜻일까요·

수화기 너머로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언제 올거냐?" 발음도 부정확하고 힘마저 빠져 낮은 떨림까지 느껴지는 물음에 퇴근 후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시골집으로 향합니다. 해가 길어진 들녘에는 논밭을 가는 농부들의 농기구 소리가 요란하고 산등성이 여기저기 노란 산수유 꽃핀 봄날 저녁입니다.

"왜 이제 와?" 구부정한 몸을 지팡이에 기대고 선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열 번도 넘게 대문을 들락거리셨다는 엄마의 말씀에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그리움이 담겼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는 가까이 갈 수 없는 부담, 그 자체였습니다. 헛기침에 가슴이 콩닥거리고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음에도 괜스레 긴장하던 어린 시절, 아버지와 마주치지 않으려 눈을 피해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자라면서 한번도 품에 안겨보거나 따스한 눈길 받은 적이 없을 정도로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다 생각하시는 분, '자식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지 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아버진 언제나 자식들로부터 한 발짝 멀리 계셨고 냉정하셨습니다.

몇 년 전부터, 멀리 사는 손주 보기를 지나치리만큼 애달파하고 목소리 한번 더 듣고자 애쓰는 아버지를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띠지나 싶은 환한 웃음을 자식에게 보낼 때 도무지 낯설어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아서였습니다. 일상적인 일에 대한 물음에도 관심두지 말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거나 모르셔도 된다고 잘라버린 적도 많았습니다. '왜 그러지? 이제 와 왜 새삼스럽게', 어색함에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굽은 어깨, 굽은 등을 어루만지며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집으로 들어갑니다. 헐거운 틀니를 비집고 희미한 미소가 아버지 얼굴에 번집니다. '쯧쯧 힘들어서 어쩌누?' 혀 차는 소리에도 반가움이 묻어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듯 정을 듬뿍 담아 쳐다보는 눈길에서 아버지의 사랑이 샘물처럼 고입니다.

움푹 들어간 눈, 쭈글쭈글한 손등에서 아버지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흰 싸래기 앉은 것처럼 온톤 새하얀 머리카락에서 아버지의 세월도 지납니다. 한결 따뜻해진 봄임에도 두툼한 외투속에 가려진 아버지의 몸은 아직도 한겨울이지만 그 어느 때 보다도 자식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애잔합니다.

시골집 대문 앞에는 낡은 의자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등걸이며 다리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지만 앉는 자리만큼은 반들반들 윤이 납니다. 얼마나 앉아계셨을까요? 특히나 주말이면 해질녘까지 대문 밖 의자에서 하루를 보내신다는 엄마의 말씀에 땅거미가 길게 드리운 밤, 마음에 눈물이 흐릅니다.

돌아가야 하는 길, 어두운 밤길 가는 자식 걱정에 어서가라 재촉이십니다. 좁아지고 굽은 아버지 어깨에 봄꽃은 다시 필까요? 아버지의 봄날을 기다리는 봄밤이 깊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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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