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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희

중원대학교 초빙교수

식탁 위에 뭉툭하게 생긴 머그잔 하나가 있다. 꽃그림에 잔 받침까지 갖춘 찻잔과 반짝이는 유리컵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고 마당발로 활약한다. 생긴 것과는 달리 속에 무언가를 담고 있는 시간이 많고, 개수대에서 설거지를 기다리는 시간도 다른 그릇에 비해 많은 편이다. 그러나 아내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연유는 다른 데에 있다. 널찍한 속과 푸짐한 궁둥이의 안정감이 무기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예쁜 분위기를 집착하는 아내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없다. 다름 아닌 통짜로 된 허리에 아들과 사이좋게 찍은 사진을 담고 있어서다.

팔짱을 낀 아들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댄 아내는 마냥 행복하게 웃고 있다. 커피나 물을 마실 때 큰 귀 모양의 손잡이를 잡고 잔을 들면 엄마와 아들의 다정한 모습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거실의 몇몇 액자에도 비슷한 분위기의 가족사진들이 있지만 그것들과는 다른 느낌이다. 카메라에 맞춰진 웃음이 아니라 봄바람이 앞 머릿결을 살랑살랑 흔들 때의 환한 모습이다. 머그잔이 그릇의 기능을 넘어서 가족들에게 따스한 온기를 전하는 전령사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현역시절 미국 국방성 펜타곤에 출장을 갔다가 선물로 커다란 머그잔을 받았다. 집에 갖고 와서 꺼내보니 멋진 펜타곤 사진을 표면에 담고 있어 무척 값어치가 나가는 선물로 여겨졌다. 그런데 막상 그 큰 컵에 담아서 먹을 만한 것이 없었다. 미군들이 한나절 먹을 커피를 담아 들고 다니며 일하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우리 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거실 장식장에서 펜타곤방문 기념품으로 폼 나게 지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나라에 대한 동경이 사그라지듯 의미가 퇴색되기 시작했고 결국 건넌방 책상 위로 옮겨졌다. 지금 여러 가지 필기구를 담고 있는 필통의 역할을 십 수 년째 하고 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되리라는 운명은 아니었겠지만 버려지지 않고 이차적인 역할에 만족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 문학을 하는 지인들과 함께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카페에 간적이 있다. 카페에서는 커피를 머그잔에 담아 주었다. 골판지 목도리를 한 일회용 종이컵 대신 무색의 표면에 자그마한 로고가 들어있는 머그잔이었다. 색다른 느낌을 안겨준 것은 제각기 다른 모양을 가진 머그잔들이었고, 똑같은 종류의 커피를 담고 있어도 조금씩 그 맛이 다를 것 같았다. 머그잔은 대부분 비슷비슷한 모양이란 관념이 깨져서 그런지 속에 담긴 커피의 맛은 특별했다.

사실 나는 커피의 깊은 맛을 잘 모른다. 오히려 커피의 맛은 향이 퍼져 있는 주변 공기의 맛이고 앞에 앉은 사람과 주고받는 정다운 대화의 맛이라고 생각한다. 그날은 약간 둔하게 생겼으면서도 나름대로의 개성을 가진 머그잔이 커피의 또 다른 감미를 더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끼며 마신 커피가 바닥을 보이고 잔을 탁자에 내려놓는 과정에 작은 소리가 느껴졌다. 신기해하며 잔을 흔들었더니 잔속에서 투명한 소리가 났다. 아마 머그잔을 만들 때 아랫부분에 빈 공간을 만들고 그 속에 작은 구슬 하나를 넣어 둔 것 같았다. 목을 타고 내려간 커피의 잔향이 더욱 진해지는 순간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정류장 유리벽에 울상을 짓고 있는 커다란 곰이 눈에 띄었다. 그림 아래 써 놓은 글은 나를 그 자리에 잠시 서 있게 만들었다. "왜 그렇게 사니? 미련곰탱아!"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주장하면서 살라는 어느 사회단체의 선전 문구였지만 앞만 바라보며 살아온 나에게 던지는 말 같았다. 평생 다양한 분위기에서도 잘 어울리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머그잔처럼 살고 싶었다. 내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조금은 특별한 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그 직업으로 인해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렇게 살아온 나는 지금 머그잔인가? 미련곰탱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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