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3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교수

이맘때쯤, 그러니까 한 해가 설핏 저물어 갈 즈음엔 시간의 흐름을 정리하듯 문득 떠오르는 인연들이 있다. 한없이 그리운 인연도 있고 다시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악연도 있다. 스쳐지나간 수많은 인연들 중에서 유독 이 때를 틈타 기억의 저편에서 꿈틀대며 되살아나는 인연이라면 아직 주고받아야 할 무언가가 남았다는 뜻일까. 아니면 지나간 인연들을 재생해 봄으로써 삶에 묻혀버린 '나'를 찾으려는 무의식 작용일까.

올해에는 찬란한 봄을 기다리다가 입춘의 문턱에서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머니가 홀연히 가신 후 마음의 안식처였던 고향이란 인연도 희미해져 감을 느낀다. 내가 가르쳤던 제자들의 소식도 궁금하다. 다음 과정에서 모두들 열심히 비행을 하고 있겠지만 모든 교육과정을 무사히 마쳤으면 좋겠다. 40여년 만에 다시 만난 고등학교 때 친구와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났던 인연들도 생각난다. 참!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산 정상(4,095m)에서 맞이했던 장쾌한 일출 또한 잊히지 않는 인연 중의 하나이다.

나는 인연에 대해 덤덤하고 무심한 편이었다. 가깝고 소중한 인연인데도 잘 감당해내지 못했다. 심중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내향적인 성격 탓도 있지만 늘 시간에 쫓기다보니 어지간하면 일단 뒤로 미루면서 살아 온 것 같다. "언제 밥 한 번 먹자", "조만간 같이 운동하자", "곧 연락 하겠다"라는 말로 어물쩍 넘기곤 했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난 뒤에 그동안 무심했던 잘못을 깨닫지만 뒤늦게 연락하기도 어쭙잖아 그냥 놓아버리고 말았다. 중학생 시절 단짝이었던 친구도 그랬고, 고등학교 때 같이 자취했던 친구는 다투고 난 뒤 헤어졌는데 그게 끝이었다. 나이가 든 지금도 그러한 후회는 없어지지 않았다. 다만 가까운 사람 중에서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인연들이 늘어나면서 인연의 소중함을 재삼 인식하게 된 것이 그나마 철이 조금 들었다는 증거이다.

지난 가을 우연히 가깝게 지냈던 후배를 다시 만났다. 중국 트레킹 여행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피곤한 몸으로 비행기에 좌석에 앉자마자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기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이 항공기는 황산에서 인천까지 가는 ooo편이며 저는 기장 ooo입니다."

평상시 그냥 흘려듣던 기장의 이름이었는데 그날은 무심결에 귀가 쫑긋 했다. 잘 아는 후배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목소리의 음색이 그와는 다른 것 같아 무시해버리고 곧 잠에 빠져들었다. 깜박 졸았나 싶었는데 난기류가 있으니 좌석벨트를 매라는 주의사항이 다시 흘러 나왔다. 그때, 특유의 사투리가 섞여있는 그의 목소리임을 확신했다. 객실승무원을 통해 간단한 메모를 전달했더니 곧바로 답이 왔다. "착륙 후 짐 찾는 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벌써 13년의 세월이 흘렀다. 예전과는 달리 중후하고 세련된 민항기 기장의 모습이었다. 전투조종사로서 뿌리는 같았지만 그동안 각자의 길을 걸으며 달라진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나더러 옛날과 똑 같은 모습이라며 인사치례의 말부터 꺼냈다. "그럴 리가…·" 사실 그가 전역하여 민간항공사로 간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전후 사정을 묻기보다 냉랭하게 대했던 것 같다. 그땐 군인으로서 소명을 저버리고 시류(時流)에 영합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거기까지가 우리의 인연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조종하는 비행기를 타고 다시 만나게 되다니, 아마 그와의 인연은 세월이 지워버리기엔 아쉬운 부분이 아직 남아있었나 보다.

인연은 우연히 다가오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면 운명이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한 순간의 인연만으로도 수많은 것이 변하고 바뀌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인연이 '삶의 흔적'이란 점이다. 그물처럼 얽히고설킨 인연으로 인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이 세상에 왔다갔음을 알린다. 그래서 인연은 소중한 것이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