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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관의 현대미술산책 - 정강자 화백(1942~ )

실험적인 작품으로 60년대 보수적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키다

  • 웹출고시간2011.08.21 17:27:3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서양화가 정강자는 1967년 홍익대학을 졸업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류작가 중 한 사람이다. 일찍이 대학 시절부터 숱한 화제를 뿌리면서 독특한 예술가로서의 유명세를 만든 화가이다. 그가 대학을 다니던 1963년부터 67년까지는 5. 16 군사혁명 이후 군부 통치의 서슬이 시퍼렇던 독재 정권 시대였다. 그 당시 대학은 전국적으로 돌발적인 데모와 연합 데모로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던 아주 험난한 시기였다. 그런 가운데 대학은 군사정권 투쟁하던 반 독재 세력의 피난처였다. 일반 대학과 달리 미술대학은 해프닝, 퍼포먼스, 이벤트 등의 전위예술의 형식으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의사 표현을 하는 나타나던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 홍익대학의 미술과 교수들은 대부분 여전히 구상화, 사실화의 대가들인 이마동, 김원, 김창억, 이봉상 교수들에 의해 구성되었던 시대였다. 이 시기에 대학을 다니던 정강자는 캠퍼스에서의 교육보다 일찍이 현대미술에 눈떠 전위작가로 활동하던 선배들, 정찬승(작고), 강국진(작고) 등과 어울리면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대학시절 정강자는 교수들에게 골치 아픈 학생이었지만, 다른 모든 동기생들보다 일찍이 60년대 유럽과 미국의 현대미술의 동향을 인식하고 있었다. 젊은 여류작가로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그의 용감한 도전은 한국 현대미술사의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로 기록될 것으로 생각된다. 서양화과의 3년 후배였던 필자는 재학시절이던 67년 정강자 선배의 삼선동 화실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의 작업실은 페인팅(회화적 그림) 재료뿐만 아니라 각종 실험적인 소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해프닝과 설치 작가이기도 했던 그를 연상하기에 충분하였다.

정강자가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한 것은 그가 대학을 막 졸업하던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부터이다. 그는 이 행사에 <신전> 동인으로 참가했는데 여기서 매우 실험적인 작품을 출품하여 화단의 신선한 문제 작가로 주목을 받게 된다. 이 당시 정강자는 강국진, 정찬승 등의 선배작가들과 공동으로 참가한 '해프닝' 작품을 선보이는데, 68년 <투명 풍선과 누드>, <한강변의 타살>, 69년 <한국 문화인의 장례> 등은 그 당시 보수적인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을 만큼 쇼킹했던 '해프닝'으로 한국현대미술사에 중요한 기록 가치를 갖는 예술 활동으로 평가된다. 특히 <투명풍선과 누드>는 정강자 자신이 20대의 젊은 여성으로 누드로 실연(實演)함으로써 여성해방을 갈망하던 그 당시 시대적 반영을 실천한 대 사건이었다.지금도 여전히 청년작가 시절의 정신과 이미지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정강자는 올해 칠순에 이르는 원로작가이지만 작업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그의 말처럼, "'무엇(What)'을 그릴까 보다 '어떻게(How)' 그릴까?"를 생각하는 정강자의 작가정신은 자기 앞에 보이는 세계를 그 만의 특유한 화풍으로 거침없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한복과 부유하는 야누스

정강자作, 130×162cm, 캐버스 위에 아크릭칼라

1970년 국립공보관에서 가졌던 첫 개인전 <그림 없는 그림 전>은 관람객을 '오브제'로 제시하는 파격적인 해프닝으로 정보기관으로부터 반사회적 작품이라며 강제 철수 당한다. 그러나 그 해 경향신문은 그의 개인전을 "올해의 최고 발광상"으로 선정한다. 1978년 동남아 여행을 시작으로 서남아시아, 남태평양, 멕시코 중남미, 아프리카를 향한 여행이 시작된다. 그것은 그의 자연에 대한 탐험이기도 하지만, 폴 고갱과 르네 마그리트가 그랬던 것처럼, 정강자 만의 상상의 초현실과 환상의 마법(魔法)을 만들어내기 위한 성지순례(聖地巡禮)일지 모른다. 그의 세련되지 않은 듯한 거침없는 붓질과 간결하게 생략되고 변형된 이미지는 보는 사람에게 끝없는 상상력을 유발시키는 마법을 지니고 있다. 원색을 사용하여 원형(原形)에의 접근을 시도하는 과감한 색채는 뜨거운 이국 풍경의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여기서 보여주고 있는 작품「한복과 부유하는 야누스」는 1997년에 완성된 작품으로, 그의 열두 번 째 개인전 "한국적 이미지 전"을 개최하고 난 이후의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 속의 야누스(Janus)와 한복을 매치시킨 것이 매우 이채롭다. 부유하듯이 수평으로 배치되어 있는 야누스가 한복의 이미지로 형상화 되어진 숲을 지나는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여행의 체험을 통하여 깨달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와 이치를 신화 속의 여인과 전형적인 한국여성의 고유의 이미지 모티프로 선택하여 표현한 매우 경이로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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