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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관의 현대미술산책 - 임직순(1921~1996)

자신만의 색채 통한 주제 표현…회화의 자율성 높여

  • 웹출고시간2011.03.20 16:53:0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서양화가 임직순 화백은 충북 수안보가 고향이다. 수안보는 과거에 행정구역이 괴산이었기 때문에 임 화백을 괴산 출신 화가로 말한다. 그러나 수안보는 한때 중원군이었고 지금은 충주시에 통합되었으니 임 화백은 충주 출신 화가가 되었다.

임 화백은 1921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 그리고 비교적 일찍이 16살 때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20살이 되던 1940년에 일본미술학교에 입학하고, 일본 야수파의 거장 하야시 다케시(林 武) 교수의 지도를 받게 된다. 당시 조선의 미술학도들이 가장 많이 유학하였던 미술학교는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 태평양미술학교 그리고 일본미술학교 이렇게 세 개의 미술학교이었다. 일본미술학교는 그 중에 조선의 유학생이 가장 적었던 학교였으나, 일본 현대미술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재일동포 현대미술가 곽인식 화백도 이 대학 출신이다.

무등산

임직순 작, 1985년 작, 45.5×53cm, 캔버스 위에 유채

임직순 화백은 미술학교에 진학하던 그 해,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하면서 화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게 된다. 해방 직전이던 1943년 귀국하여 이듬해부터 서울여상, 인천여고, 숙명여고에서 교편생활을 하는데, 이 당시 임화백의 재능은 아카데미즘이 장악하고 있던 국전을 통하여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숙명여고 교사로 재직 중이던 56년 국전에서 작품 '화실'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더니 그 다음 해인 57년에는 작품 '좌상'으로 대통령상마저 수상하면서 공모전 작가로는 최고의 영예에 오르게 된다. 그 여세를 몰아 호남 미술계 서양화의 대부 이지호 화백의 눈에 띄어 그의 후임으로 61년 조선대학교 미술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호남미술의 서양화 구상화의 대가로 활약하게 된다.

임 화백은 그의 부모가족 모두가 해방 후 고향 수안보를 이향한 후부터 유감스럽게도 충북과의 인연을 거의 갖지 않은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충북 출신 서양화 구상계열 화가를 말할 때, 안승각, 박석호, 임직순 이 세 화가의 작품의 미술사적 가치에 이를 수 있는 화가는 아직 없다고 할 수 있다.

임 화백의 작품 세계는 그의 작품의 모티브가 대부분 현실 속의 소재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인상파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구상계열 화단을 주도하던 '창작미술가협회', '목우회' 등 어떤 미술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아마도 조용한 그의 성품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필자가 정창섭 화백과 함께 '재경충북작가회'를 창립하고 이 모임에 참여해줄 것을 권유했으나 거절당했던 것도 그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작가의 모티프는 대체로 작가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가 다룬 소재는 대부분 인물, 정물, 풍경이다. 서울에서 주로 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50년대의 주제는 인물이 많았지만, 61년부터로 내려온 후에는 광주의 무등산 풍경, 호남의 시공 풍경 등 남도의 풍광에 몰입하였다. 매우 한정적 소재만 다루기 때문에 소위 아카데미적이고 보수적인 작가로 비평을 받기도 한다. 회화에서 색채는 공간을 지배하고 선(線)은 형태를 결정한다. 따라서 현대미술에서는 공간은 예술가의 자유로운 정신의 표상이 되며, 형태는 제한된 정신의 의미로 해석되어진다.

임 화백의 회화의 특징은 주제에 있기보다 색채에서 찾을 수 있다. 근대회화에서 신고전주의는 형태를 추구하였으며, 낭만주의는 색채의 자율성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임직순 회화의 역사적 배경은 색채가 회화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낭만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그림에서 보여 지는 예각된 터치, 독특한 색채를 머금고 있는 진득한 마티엘에서 우러나는 즉흥적인 분위기는 가히 압도적이다. 여기에 소개 '무등산' 풍경화는 힘에 넘친 간결한 터치와 완숙하고 세련된 색채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임 화백은 고독하고 조용한 작가였지만 색채를 통하여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고 회화의 자율성을 높이려 한 창의성이 뛰어난 구상화가임을 알 수 있다.

14년간의 조선대학교에서의 교수생활을 마치고 다시 서울에서 작품 생활을 하였지만 심장마비로 76세에 운명하였다. 그러나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고향을 지척에 둔 경기도 장호원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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