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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관의 현대미술산책 - 하종현(1935~)

'평면화 된 오브제로서의 회화'를 그리다

  • 웹출고시간2011.07.24 18:22:54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하종현 화백은 경남 산청출신으로 진주사범을 졸업한 후 홍익미대를 입학한 엘리트 작가이다. 그는 이미 32세이던 청년작가 시절 한국 대표작가의 이름을 걸고 1965년 파리비엔알레에 참가하였다. 지금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대단한 사건이다. 그 당시 그의 작품은 2차대전 이후 유럽의 미술을 상징하던 앵포르멜(비정형) 화풍이었다. 이것은 전후(戰後) 파괴되고 무너져 버린 유럽의 문명을 상징하듯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무겁고 어둡고 칙칙하게 화면이 두터운 물감으로 짓 이겨진 그러한 풍의 회화를 말한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초까지 지탱해오던 사실주의 류(類)의 회화의 몰락을 촉발하였고, 한편으로는 회화에 대한 관심을 이미지에서 물성(物性)의 문제로 전환하게 되는 미술사적 가치를 갖는다. 청소년 시절 한국동란을 목격한 하종현의 감성은 유럽의 젊은 예술가들에 의해 제기된 앵포르멜의 세계에 쉽게 빠져버렸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앵포르멜 회화는 60년대 후반까지 한국 추상회화의 단면을 이루면서 지속되었다. 이 당시 현대미술에 눈을 돌렸던 젊은 작가들 중에서 앵포르멜 회화의 늪에서 가장 빨리 빠져나온 작가가 하종현이다. 34세에 일약 모교 홍익대학의 서양화과 교수(전임강사)로 부임을 하던 해인 1967년부터 기하학적 추상의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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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 ; 95×150cm, 재료 ; oil on and pushed from back of hempen cloth, 제작 연도 ; 1997년 작

그리고 새로운 추상작품으로 같은 해 당시 가장 권위를 자랑하던 쌍파울로 국제비엔날레에 한국대표 작가로 참가한다. 필자가 하종현 교수와 첫 만남이 이루어지던 시기가 이 때이며, 초기 추상미술을 앵포르멜 풍으로 배우던 필자가 기하학 화풍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절대적 영향을 끼친 사람이 당시 지도교수였던 하종현 화백이다. 또 하나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청주중·고등학교 미술부 활동을 하던 시절, 필자의 미술선생님이었던 이건옥 선생님(작고)과 하 교수와 서양화과 동기생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건옥 선생께서는 청주사범을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 재직 중 입대하여 군생활을 마친 후 다시 홍익대학으로 진학한 학구열과 작품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분이었다. 이 두 분은 필자가 정년을 앞두고 있는 지금 45년 작가생활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신 스승이다. 67년 기하학적 추상 이후 하종현 교수는 조금은 색다른 오브제와 매체에 관심을 갖고 몇 개의 중요한 오브제·설치 작품을 남긴다. 이 당시 제시된 '오브제'는 서양미술사의 양식의 유행이라는 문제를 넘어 '하종현 미술사'의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된다. 하종현은 앵포르멜 시대의 물성과 달리 오브제를 통한 사물로서의 물성을 인식하게 되며 회화 속에서 오브제를 해결하려는 도전으로 발전된다. 한국모더니즘 미술의 가장 위대한 평론가 이일교수(1996년 작고)는 하종현의 새로운 회화에 대하여 '평면화 된 오브제로서의 회화'라고 평하였다. 그의 대표 작 중 하나인 1967년 작품 「탄생 67」은 이미 오브제로서의 회화에 대하여 하 교수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80년대 이후 그의 회화작품은 마대 천으로 만든 캔버스와 마대 색과 유사한 중성적인 물감 뿐 다른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의 회화는 일반적으로 서양회화가 바탕(캔버스) 위에 물감을 바르면서 그림이 만들어지는 중첩식 방법과 달리 마대 천의 뒷면에서부터 작업이 시작된다. 캔버스를 대신한 마대 천 뒷면에 물감을 바르고 구멍난 올들을 뚫고 밀려나온 오톨도톨한 물감들을 다시 바르고 휘젓고 하는 회화적 몸짓으로 만들어내는 매우 독창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다. 바탕(지지체)의 특성은 그대로 유지된 채, 물감은 물감대로 그대로의 있으면서 작가의 몸짓들에 의해 남긴 흔적들이 기호처럼 남아 있음을 보게 된다. 젊은 시절 한국전위미술협회(A·G그룹) 회장으로 활약했던 하종현 화백은 교수 재임 중,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하고 미대학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2001년 2월 홍익대학교 교수 34년을 마치고 정년하였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행정능력은 다시 서울시립미술관장으로 발탁되어 몇 해 전까지 두 차례 연임 임기를 마쳤다. 바쁜 와중에도 작업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는 76세의 노 화백은 새로운 변화를 위해 자신의 그림에 새로운 색채로 옷을 입히고 있다. 이제부터 진정한 예술을 위한 자신만의 사제가 되기 위해 고뇌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작가이다. 필자를 비롯하여 엄기홍, 이완호(작고), 연영애, 김동조, 진익송, 김정희, 윤갑용, 박희복 등 청주에 연고를 둔 적지 않은 작가들이 하종현 교수의 제자이니 충북의 미술의 발전에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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