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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관의 현대미술산책 - 유영교 조각가(1946~2006)

돌에 새긴 움직임…조각에 남긴 '살아있는 숨결'

  • 웹출고시간2011.06.26 17:03:3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조각가 유영교는 만 60세를 지나고 그 해 6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46년 1월 제천시 청풍에서 태어나 청풍초등학교 6년 과정을 마치고, 충주중학과 충주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그를 충주출신 작가라고 흔히 말한다.

유영교 작가는 필자와도 개인적 인연이 많은 작가이다. 유영교 작가와 필자는 출신 고등학교는 다르지만 1년차 선후배 관계인데 그도 나도 1년 늦게 진학을 하는 바람에 홍익대학에서 다시 1년차 선후배 사이로, 동향 친구로 40년을 지냈다.

서양미술사에서 60년대 중반 이후는 모더니즘 미술이 끝나고 개념미술이 등장되던 시기였지만, 여전히 한국에서는 전통적 개념의 조각이 유행하고 있었다. 유영교 작가는 조각과 2학년 과정에서 그의 예술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스승을 만나게 된다. 그는 다름 아닌 한국 현대조각사에 가장 빛나는 석조(石彫)의 달인이라 할 수 있는 전뢰진 교수(현재 예술원 회원)이다.

고대 동양 삼국의 미술의 특징을 말하자면, 중국은 벽돌(塼)의 문화요, 일본은 나무(木)의 문화요, 한국은 돌(石)의 문화라고 할 만큼 대조적인 특징으로 비교할 수 있는데, 현대조각에서 한국의 돌의 문화가 조각가 전뢰진의 예술에 계승되어 빛나고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석조에 관심이 많던 유영교는 전뢰진 교수의 수제자로 성장하게 된다. 대학을 마치고 청년작가로 활동하던 유영교는 약관의 나이 27살 되던 해에 석조 '운무(雲霧)'로 국전에서 조각부문 최고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 이듬해인 1974년에는 한국 구상미술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목우회에서 조각부문 최고상인 JP상(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씨에 의해 수여된 상)을 수상하고, 다시 국전에서 국회의장상을 수상하면서 조각가 유영교는 단번에 한국 조각계의 최고의 스타가 된다.

잠시 방향을 돌려 충북의 조각의 역사를 말하자면, 근·현대 한국미술의 신화적 존재인 정관 김복진 이후 오랫동안 충북인의 조각사는 침체의 시대을 거쳐 현대조각에서 대표적인 조각가로 김봉구(전, 이화여대 미대 교수), 유영교, 김경화(현재 공주대 교수) 이렇게 세 사람의 스타 조각가가 등장된다. 이들 중 김봉구 교수가 가장 선배 작가로 충북 현대조각의 대부라 하겠다.

김봉구와 김경화는 일찍이 추상조각에 입문하면서 최고의 작가의 위치에 이름에 대조적으로 유영교는 구상조각의 정상에 이르게 된다. 당시까지 고등학교 교사로 교편생활을 하던 유영교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대학은 후배이지만 대학원 입학동기인 이은기(미술사 전공, 현재 목원대 교수)씨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된다.

대학원에서 조선시대의 석인(石人), 석수(石獸)상(像)을 연구하면서 유영교의 구상조각은 점점 단순화되고 반추상의 형태로 변해가게 된다. 만 31살 되던 1977년 국전의 초대작가 지위에 오른 후, 유영교는 미켈란젤로의 예술을 탄생시킨 조각의 성지(聖地)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다.

로마의 국립미술대학 '아카데미아 디벨레 아르티 로마'에서 조각을 전공한 이후, 국내와 이탈리아를 오가며 작품활동을 하다, 이탈리아 카라라 지방에 정착하고 전업작가로 조각에만 전념하게 된다.

그러나 1987년 그가 충남 연기군에 작업장을 마련하고 대전에 정착하게 된 것은 그의 부인 이은기 여사가 목원대학 미술과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약 20년 가까이 대전을 거점으로 작품을 해오던 그는 그 때까지 해오던 조각의 모든 형태를 포기하고 새로운 조각예술에 대한 의욕과 집념을 불사르게 된다. 소위 모더니즘 조각세계와 단절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조각예술로 전환한 것이다.

샘 Fountain

유영교 作, 청오석(靑烏石), 2000

1997년부터 그는 새로운 조각, 자연석 속에서 원형 공(球) 형태의 돌이 물을 뿜어내며 움직이는 조각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정지된 조각에서 '움직이는 조각'으로의 개념의 변화를 말하며, 유영교의 조각예술이 새로운 예술의 경지에 오르고 있음을 반증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그가 운명하기 한 해 전, 필자는 파리의 서양화가 신성희(2010년 작고)씨의 가족과 함께 조각가 유영교 자택에서 예술가로서의 삶의 행복을 즐기며 삼겹살 파티를 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슬픈 운명처럼 불과 몇 년 사이 두 작가 모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렇지만, 조각가 유영교는 그의 빛나는 조각예술 '살아있는 조각' '샘 Fountain'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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