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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관의 현대미술산책 - 박래현(1920~1976)

운보 김기창 화백 아내로 살며 '예술의 혼' 불태우다

  • 웹출고시간2011.08.07 17:55:5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여류화가 박래현은 운보 김기창 화백의 아내로 살다 인생을 마친 비운의 여성이다. 그의 아호는 우향(雨鄕)이다. 운보(雲甫)가 구름이라면 우향은 비(雨)를 의미하듯이 이 두 사람은 하나의 삶을 스스로 운명지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구한 두 사람의 만남은 일제치하의 불행한 시기에 만나 우향 부모님의 완곡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순애보적 사랑을 꽃피우며 결혼을 성사시켰다. 그들의 결혼의 첫 번째 조건은 피차간의 예술을 존중하자는 상호예술불간섭조약(?)이었다. 그 만큼 이들은 청년시절부터 상대방의 예술의 가능성을 느끼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운보를 이야기할 때 우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듯이 우향을 이야기하면서 운보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청주 근교 초정리에 있는 '운보의 집'에는 1976년 이 곳으로 운보가 화실을 짓고 내려온 후 운보가 운명할 때까지 우향은 없었다. 그것은 우향이 그 해 1월 2일 5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운보는 1914년 서울 운니동에서 태어난 서울 사람이다. 그럼에 비해 우향은 평남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우향은 부친 박명수씨가 호남의 대지주로 성공하면서 성장기를 전북 군산에서 유복하게 보내며 자랐음에 비해, 운보는 보통학교 입학식 후 얼마 안 되어 장티푸스를 앓고 바로 청각장애자가 되면서 고난의 인생여정을 걷게 된다.

운보의 학력은 보통학교 졸업과 이당 김은호 화백의 문하에서 도제식 교육을 받은 것이 교육의 전부였으나, 우향은 경성관립사범학교에 진학한 후 일본인 미술교사(江口 敬四郞)의 권유로 미술을 시작하게 되고, 졸업 후 2년 간 교사생활을 하지만 곧 바로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운보가 도제식 교육을 받았음에 비해 우향은 엘리트 미술가의 정규과정을 밟은 셈이다. 가정환경도 교육과정도 분위기도 다른 운보와 우향의 숙명적 만남은 선전(鮮展:총독부가 주최한 조선미술전람회로 당시에는 유일한 등단의 무대였다.)에서 이었다. 운보는 이미 선전의 추천작가의 반열에 오른 시기이었으나 여섯 살 아래인 우향은 동경 유학중이던 1943년 '장(粧)'이라는 작품으로 '총독상'을 수상하면서 미술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운보와 우향이 친일파 화가로 몰리는 가장 큰 이유도 이들이 선전을 통해 등단했기 때문이지만, 그들의 작품 세계를 유심히 관찰해보면 불가피했던 그들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우향은 동경 유학시절 조선총독상을 수상한 작품 '장(粧)(기모노를 입은 일본 소녀의 모습)'을 제작하기 이전 1942년에 한복 입은 한국여인의 뒷모습 '여인'과 중국 의상을 입은 중국소녀를 그린 '소녀'라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우향은 모든 대상을 단순히 예술의 소재로서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6.25동란 시 군산에서의 피난생활은 두 사람이 새로운 예술을 위한 실험과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고 현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운보의 회화가 전통적 동양화의 굴레를 뚫고 나와 새로운 구성주의적 실험이 계속되고 있을 때, 우향은 운보보다 먼저 반추상적 동양화와 입체적 작업에 대한 실험이 이루어진다.

운보의 화풍이 매우 역동적이고 정확한 필선으로 다양한 용묵의 기량을 거침없이 과시하는 스타일이라면 우향은 필선과 색면의 조화를 매우 감각적으로 처리하면서 '세련된 장식감각'과 '완벽한 절제의 미'를 만들어 내는 '내면의 환상'을 뿜어내는 작가이다.

젊은 시절 화법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화풍을 시도하던 우향은 1956년에 곤궁했던 도시 풍경을 소재로 한 작품 '노점(露店) A'로 제 5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된다. 일제시대 '조선총독상'을 수상하고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우향의 재능과 운명이 참으로 아이로니컬하지 않을 수 없다. 운보가 1963년 쌍파울로비엔날레 출품작가가 되고 난 후 우향은 1967년 쌍파울로비엔날레 출품작가가 되면서 추상세계로 접어든다.

작품 17

박래현 作, 1967, 121.5 × 104.2cm

여기에 게재된 '작품 17'은 우향의 작품세계가 정점에 이르던 시기의 작품으로 그의 예술이 얼마나 뛰어난 심미성을 지녔는지 잘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듯 한 오묘한 구성적 질서 속에 노란색과 흰색 사이로 조금씩 비치는 붉은색과 검정색이 신비감을 증폭시킨다.

우향은 60년대 이후 새로운 양식을 만들기 위해 해외에서의 활동이 잦아진다. 그리고 동양화의 경계를 넘어 직물과 판화의 기법까지 작품에 도입하면서 우향의 창작세계는 끝없이 넓어진다.

그러나 운보의 아내로서의 역할과 과다한 창작활동은 결국 그의 건강을 해치게 되고 불치의 병(간암)으로 쓰려진 후 운보의 곁을 떠났다. 어쩌면 우향은 심사임당 이후 한국여성으로는 가장 뛰어난 여류작가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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