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내 기초단체의 막내는 증평군(曾坪郡)이다. 2003년 8월 30일 군청이 정식으로 개청됐다. 지금의 증평지역은 고려시대에는 도안현,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주로 청안현에 속했다. '증평'이라는 지명이 처음 생겨난 것은 일제 강점기 때인 1914년이었다. 일제는 이때 청안군 일부지역과 청주군 산외이면 일부지역을 합쳐서 '증평면'이라는 새로운 면을 만든 후 괴산군에 편입시켰다. 따라서 증평이라는 행정지명은 올해로 98년을 맞고 있는 셈이다. 증평이라는 행정지명은 의외로 '증'과 '평'이 두 글자가 합성된 지명이다. 먼저 증평할 때의 '증'은 현 삼기천(三岐川)의 옛이름인 증자천(曾子川·혹은 증천)에서 유래했다. 증평군 동편 하천인 증자천은 초정고개, 송오리고개, 반탄천 등 세 갈래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현재 이름이 삼기천이다. 이 삼기천은 여지도서나 대동지지에는 한자 '일찍이 曾', '아들 子'인 '증자천'으로도 표기돼 있다. 증평 할 때의 '증' 자는 여기서 왔다. 나머지 '평' 자는 들(野)과 관련이 있다. 증평에는 '장평리'라는 마을이 있다. 순우리말로는 '장뜰'이라고 한다. 증평할 때의 '평'은 바로 '장평'할 때의 뒷말 '평'에서 유래했다. 장뜰 할 때
태조 연간에 조준이 올린 상소문에 이런 표현이 보인다. '경제육전의 예에 의하여, 매양 목(牧)에만 주(州)라 칭하고, 부와 군에는 일체 주를 칭하지 못하게 하여, 주·부·군·현으로 하여금 각기 명실상부하게 대소 군현간에 큰 것으로 작은 것을 부리고, 아랫 것으로 윗 것을 이어받게 하면….' 세종도 경제육전을 명분삼아 행정지명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때의 개혁은 단순히 '州자' 남용을 바로잡는 것만이 아닌, 작은 고을을 하나로 묶는 것이었다. 고을 수는 많으나 그곳에 파견할 인재가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고을에 인재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인재에 고을을 맞추는 셈이 됐다. 도승지 안숭선의 상소다. '본국의 주군의 수는 327군(郡)이나 되오니, 한정이 있는 인재로 어떻게 공수·황패같은 재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메꾸어 임명할 때에 인재를 얻기 어려우므로 도리어 자주 체임시키는 걱정이 있게 되오니, 작은 고을들을 병합하여 사람을 가려서 임명하여 보내면…."- 이같은 조치에 따라 경기도 교하현(현 파주시)이 지도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교하현은 고양(高陽)과 원평(原平)에 끼어 있어 형세가 궂은살과 같으며, 남쪽으로 고양과의 거리가 일식
조선전기 '고을 州' 자가 들어가 있지 않은 행정지명으로는 보은 외에 영동, 음성, 단양 등도 있다. 3개 지명은 '州' 자가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 태종의 행정지역 개혁 대상에서 제외됐다. 먼저 행정지명 영동(永同)이 만들어진 과정이 흥미롭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영동군은 본시 길동군(吉同郡)인데 경덕왕이 영동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 이때가 신라 경덕왕 16년(757)이다. 따라서 영동군이라는 행정지명이 생긴 지는 올해로 1255년이 된다. 꽤나 오래 된 편이다. 이와 관련, 어떤 어문학자는 인용문에 등장한 '길동군'과 지금의 '영동군'은 그 뿌리가 같은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영동군 할 때의 '길영' 자를 이두식으로 훈차(뜻만 빌림)하면 '길'이 되기 때문이다. 행정지명 음성(陰城)이 태어난 과정도 앞서 언급한 영동군과 역사적인 분위기가 거의 비슷한 면이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음성현은 원래 고구려의 잉홀현(仍忽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바로 음성이라는 행정지명도 영동군과 같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태어난 지명이다. 이를테면 '지명 동기'
카리스마가 강했던 조선 3대 임금 태종은 행정지명 '州' 자 인플레이션 현상에 대해 과감한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그 결과, 큰 고을이 아니면서 '州' 자가 붙은 제주(堤州), 진주(鎭州), 옥주(沃州), 괴주(槐주) 등은 각각 지금의 제천, 진천, 옥천, 괴산 등으로 개명됐다. 그러나 처음부터 '州' 자를 갖고 있지 않은 행정지명은 태종의 개혁 대상에서 제외됐다. 명산 속리산을 끼고 있는 보은군이 이에 해당한다. 행정지명 '보은'에 대한 시원은 고려시대로 거슬로 올가간다. 고려사 지리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보령군은 원래 신라의 삼년산군인데 경덕왕이 삼년군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는 보령군(保齡郡)으로 고쳤다." 이때의 '보령군'이 바로 지금의 보은군이다. 인용문 중 고려 초기는 태조 23년(904)을 일컫고 있다. 이 '보령군'이 지금의 '보은군'으로 개명된데는 약간 해프닝적인 면이 있다. 익히 알다시피 충남에도 발음이 똑같은 '보령군'(保寧郡)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 때문에 당시 '보령군'이 지금의 '보은군'으로 바뀌게 됐다. '군현의 칭호를 고치었다. 이조에서 소리가 서로 비슷한 각 고을의 칭호를 고치도록 청하니, 이에 청주(靑州)를 북청(北靑)이
도내 기초단체 중 내년에 지명이 탄생한지 10갑, 즉 600주년이 되는 곳은 제천시와 괴산군 외에 진천군과 옥천군 등도 있다. 600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태종실록 13년(1413) 10월 15일자 기사에 이런 내용이 보인다. '무릇 군현의 이름 가운데 주(州)자를 띤 것은 모두 산(山)자, 천(川)자로 고쳤으니, 영주(寧州)를 영산(寧山)으로 고친 것이 그 예다.' 도내 4개 기초단체도 이에 해당됐다. 그 해에 '제주'(堤州)가 지금의 제천, 괴주(槐州)는 괴산, 옥주(沃州)는 옥천, 진주(鎭州)는 진천으로 각각 행정지명이 바뀌었다. 4곳 지명에 '내 川'이나 '메 山' 자가 들어간 것은 해당 지역의 지형과 관련이 있다. 의림지라는 큰 저수지가 있는 제천에는 '내천' 자가 들어갔다. 평야가 비교적 발달한 옥천과 진천에도 '川' 자를 붙였다. 반면 백두대간이 지나가 산이 많은 '괴산'에는 '山' 자를 붙였다. 조선 태종 정권이 600백년 전에 이같은 조치를 취한 까닭은 대읍(大邑)에나 붙일 수 있는 '고을 州' 자가 직전(고려말)에 너무 남용됐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州자 인플레이션' 현상이다. 고려 후기에는 권세가나 승려 심지어 원나라에서 귀국
제천시와 괴산군이 내년 지명 탄생 6백년이 되는 것을 기념,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시와 군의 상위 개념은 '도'(道)이다. 우리나리에 도제(道制)가 처음 도입된 것은 고려 성종 때이다. 이때의 '도'는 특정지역 두 곳을 '길'로 연결했을 때 그 안에 포함되는 공간적인 범위를 의미한다. 경상도는 남쪽 경주목과 북쪽 상주목 사이에 포함되는 공간이다. 마찬가지로 충청도는 북쪽 충주목과 남쪽 청주목 사이의 공간을 의미하고 있다. 혹자는 충주목 북쪽에 단양군이 있었고, 청주목 남쪽에 영동현이 있었지 않았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물론 그렇기는 하나 조선시대 단양군과 영동현은 각가 충주목과 청주목 소속이었다. 따라서 충청도라는 도명의 성립에는 무리가 없다. 지금의 이름인 '충청북도'는 1896년에 13도제를 실시하면서 얻어진 행정지명이다. 이때 충청도에서 충남과 충북이 분리됐다. '충청도'라는 지명은 고려 예종 1년(1106)에 '양광충청주도'라고 한 것에서 그 이름이 처음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지속적으로 불려진 것은 아니었다. '충청도'라는 이름이 고정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태조 3년(1394) 태부터 였다. 태조 이성계는 '양광도'에 예속된…
조선의 송이는 중국 황제도 매우 좋아했다. 세종 때 '윤봉'이라는 중국 사신이 조선에 와서 생송이를 받고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실록은 기록했다. "이미 잡은 진응(陳鷹)과 침송이(沈松茸)·연어 알젓 등을 구하여 얻었으니, 천추(千秋)가 가는 편에 보내어 진상해야 되겠다. 연전에 바친 침송이를 황제가 심히 좋아하고 아끼셨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진응은 매, 침송이는 생송이, 천추는 중국으로 향하는 조선 사신을 말한다. 심전고는 순조 때 박사호(朴思浩)라는 신하가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쓴 사행일기로, 그 안에 유서관기(楡西館記)라는 글이 있다. 이 글에서도 조선 송이가 대화 주제로 등장한다. '운객(雲客)이 묻기를, "귀국의 송이(松茸)가 그 이름이 매우 좋은데, 그 맛은 어떠합니까"하기에, "맛이 향기롭고 산뜻하며 연하지요"하고 대답하였다.'- 전회에 전국 팔도 중 충청도에서도 송이버섯을 임금에게 진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를 통해서도 각 임금의 성격이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다. 폭군 연산군에 대한 내용이 다소 재미있다. '승지 김준손이 금표지도를 올리니, 전교하기를, "듣건대 백운산에서 송이버섯이 난다 하니, 모두 금표 안에 들게 하라." 하였다.'-금표(禁
조선후기 문신으로 이명응(李明應·1827∼?)이 있다. 그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사촌동생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충청도경시관으로 임명됐다. 경시관은 지방에서 치루어 지는 향시(鄕試)를 감독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를 말한다. 그는 순조롭게 승진하여 1878년에는 지방장관직인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됐다. 그는 2년반 동안 재임하면서 치적이 있어 한 차례 연임되기도 했다. 그는 이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장계를 올린다. 장계는 지방에 나가 있는 신하가 자기 관하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충청 감사 이명응(李明應)이 장계에, "진상할 이른 홍시(紅枾)와 생송이(生松茸)가 계절이 너무 일러 기한 안에 하여 올릴 수 없습니다. 황공한 마음으로 대죄합니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이유승에게 전교하기를 "대죄하지 말라고 회유(回諭)하라"하였다.'- 조선시대 임금은 매월 초하루에는 팔도에서 올린 산물로 식사를 했고 이를 '삭선'이라고 불렀다. 충청도 음력 8월의 삭선은 바로 '생송이'와 '올홍시'였다. '올홍시'할 때의 '올'은 '이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정조실록에는 호서, 즉 우리고장 충청도에서 임금에게 진상하는 한 해의 음식 규정이 보다 구체
이색은 목은집에서 '솔 바람에서 중추가 가까움을 느끼더니 선물을 받고 보니 늙어 병든 몸 입맛을 잃지 않았음을 확인한다'라고 적었다. 전문가들은 송이버섯 채취의 적기를 추석 전후의 보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고장의 10월 중순은 끝물 송이도 거의 자취를 감추는 때가 된다. 송이와 관련해서는 이른바 '저온 자극'이라는 표현이 있다. 국내 산림학자들이 정밀 조사를 한 결과, 송이는 땅속 5cm 정도의 지온이 19도 이하로 떨어지는 '저온 충격'이 있은 후 그로부터 평균 16일 후에 땅위로 돋아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관찰됐다. 물론 송이의 생육에는 수분과 토질도 큰 영향을 미친다. 전문가들은 "토양수분은 15-20%, 토질은 마사토가 많은 곳에서 송이버섯이 잘 자란다"고 밝히고 있다. 산삼은 최초 발견자가 소유권을 갖게 된다. 워낙 희귀하기 때문에 선점자의 노력을 인정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송이는 민법상 토지에서 분리되지 않은 토지의 정착물로 규정된다. 아무리 심산유곡에 자생하는 송이버섯이라고 해도 무주물이 아니다. 때문에 신문에는 가끔 일부 문중의 '송이 채취권 입찰 공고'를 볼 수 있다. '송이 채취 기간은 2012년~2014년까지 3년간의 자
군령(軍令)은 전쟁이 일어나면 그 엄정함이 서슬이 퍼럴 정도가 된다. 장수들은 개전 초기에 군기의 엄정함을 보여주기 위해 이른바 '시범 케이스'를 의도적으로 보여주 경우가 있다. 상주전투에 참전한 이일(李鎰·1538 ~ 1601)이 그랬고, 충주 탄금대 전투에 패한 신립에게도 그런 사례가 발견된다. 이일이 상주에 도착하자 그날 저녁 무렵 개녕(開寧) 사람 하나가 와서 적들이 가까이 왔다고 보고했다. 개녕은 지금의 경북 김천시 개녕면 일대를 말한다. 이일은 이 자가 민심(民心)을 현혹시킨다 해서 죽이려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애걸한 것으로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적었다. "그렇게 내 말을 믿지 못하십니까. 그렇다면 나를 잠시 동안 가두어 두고 기다려 보십시오. 내일 아침이면 적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올 것입니다. 그때 보아서 내 말이 거짓이거든 죽여 주십시오." 이날 밤 적들은 장천(長川)까지 와서 주둔했다. 장천은 상주에서 불과 2리의 거리다. 그러나 이일의 군중에는 척후(斥候)가 없었다. 적이 근접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개녕 사람은 애국심으로 보고했으나 되레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전쟁이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유성룡은 후속 내용을 이렇게 적었다. '
이일(李鎰·1538∼1601)의 진영은 힘도 못쓰고 크게 무너졌다. 그러자 그는 전회에 밝힌대로 우리고장 충주로 도피했다. 선조실록은 이 부분을 '이일은 단기(單騎)로 달아나 죽음을 면하였다'라고 짧게 기술했으나 징비록에는 매우 상세히 표현돼 있다. '이일은 말을 버리고 의복을 벗어 버린 채 머리털을 풀고 알몸뚱이로 달아났다. 문경에 도착한 그는 종이와 붓을 찾았다. 우선 자기가 패한 내력을 임금께 급히 아뢰고, 물러가서 조령을 지키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신립이 마침 충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충주로 달려갔다.' 충주 탄금대 전투 장면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상주가 무너진 것은 1592년 음력 4월 24일이고 이후 왜군은 3일만에 조령, 즉 문경새재를 돌파했다. 탄금대 전투는 하루 뒤인 4월 28일 벌어졌다. 징비록은 신립이 배수진을 친 곳이 탄금대 산이 아니라 그 앞쪽의 진흙벌판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신입은 탄금대 앞의 두 개천 사이에 진을 쳤다. 이곳은 좌우에 논이 있어 벼가 무성하게 자랐고 또 잡초도 우거져 있어 말과 사람이 달리기에는 몹시 불편한 곳이었다.' 이어 징비록은 '적들은 단월역으로부터 쳐들어왔다. 길을 나누어 진군해 오는데
서애 유성룡(柳成龍·1542∼1607)은 종전이 되자 고향 안동으로 낙향, 임진왜란 동안 보고 들은 사실을 책으로 기록했다. 징비록(懲毖錄)이다. 징비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을 가장 사실적으로 기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때문에 전적류임에도 불구하고 국보 제 132호로 지정돼 있다. 책제목 '징비'는 중국고전 시경 소비편에서 따온 말로, 징(懲)은 '지나간 일을 경계한다', 비(毖)는 '뒷날 근심이 있을까 삼간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징비록은 훗날 필사본 형태로 일본에도 전해져 열도 서사문학의 주요 소재가 되기도 했다. 유성룡이 임진왜란을 객관적이면서 폭넓게 기록할 수 있었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병조판서(오늘날 국방장관)였다. 이후 선조가 평양에 이를 때는 영의정겸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됐다. 조선시대 도체찰사는 전시에 임명되는 총사령관으로, 군정을 물론 민정도 함께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그런 환경에서 쓰여진 징비록에는 유성룡 자신과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申砬·1546∼1592) 장군의 대화 내용까지 수록돼 있다. 유성룡은 왜군의 조총(鳥銃) 위력을 꽤나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중국 명나라 원병들은 임진왜란을 종식시키는데 분명히 공헌한 면이 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주둔지 한반도에 적지 않은 폐해를 남기기도 했다. 조선 백성들은 그들의 말발굽 아래 놓이면서 약탈의 대상이 됐다. 오희문(吳希文·1539-1613)은 쇄미록 1593년 음력 5월 8일자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또 들으니 중국군사가 호남으로 내려간 곳은 길가 민가에서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 끝이 없어 마치 적의 변을 당한 것과 같고...' 쇄미록의 또 다른 일기에는 '노비 덕노가 닭을 면포와 바꾸기 위해 서울로 갔다가 중국 군사들이 말을 빼앗아기고 이를 되찾기 위해 항변하다 심하게 얻어맞았다'라는 내용도 등장한다. 선조실록에도 비슷한 내용인 '하물며 이미 철수한 중국 병사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자 수천 리의 지방에 어느 곳이고 그 해독을 받지 않는 곳이 없어서 백성들이 가슴을 치며…'라는 표현이 보인다.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수 중에 팽신고(彭信古)라는 인물이 있다. 특히 그가 이끄는 병사들의 약탈행위가 심했다. 당시 사관이 그에 대해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악평했다. '원래 적을 토벌할 뜻은 없이 공리(功利)만을 위해서 온 자이
전쟁은 참혹한 것으로, 인간심리의 여러 단면들이 노출된다. 임진왜란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른바 가왜(假倭), 부왜(附倭), 항왜(降倭) 현상을 낳았다. 가왜는 내국인 즉 조선인이 왜군을 가장해 노략질했던 사건을 말한다. 우리고장 영동이 외가인 오희문(吳希文·1539-1613)은 '쇄미록'의 1593년 음력 7월 14일자 일기를 이렇게 썼다. '구례를 분탕질한 적은 왜적이 아니고 곧 우리나라 사람이 왜적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왜인의 목소리를 냄으로 목책을 지키던 군사가 모두 흩어지고 거기 사는 백성들도 이 까닭에 놀라 움직여서 역시 모두 도망해 달아나니….' 비슷한 현상으로 숨진 우리나라 사람을 왜군의 시체로 변장시켜 정부 포상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기록정신이 유별났던 오희문은 쇄미록의 1592년 음력 9월 13일자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진 밖의 망대에서 숙직하는 왜병을 쏘아 죽이고 머리를 베어다 바쳤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다시 들으니 사실은 왜병이 아니고 무주 백성이 목화를 따고 있다가 적에게 죽어서 버려두고 거두어 가지 않았던 시체를 그 머리털을 깎아버리고 머리를 베어가지고 왔는데 의병은 그런 줄을 알지 못하고 진짜 왜병이라고 하여 순찰사에게 바쳤다고
진천군 초평면 양촌마을에 완위각(宛委閣)위치하고 있다. 본래는 여러 용도의 7동 한옥으로 구성된 조선후기 전통건물이었으나 지금은 상당부분 망실, 사랑채 1동만 존재하고 있다. 완위각의 최초 건립자는 이하곤(李夏坤·1677~1724)이다. 그는 속종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기사환국으로 정국이 어지러워자 더이상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기사환국은 장희빈 아들의 원자 책봉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남인이 숙종의 환심을 사 서인을 대거 몰아낸 사건을 말한다. 그는 선대 고향인 초평으로 내려와 학문과 서화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이때 건립한 건물이 완위각으로, 당시에는 만권루라고도 불리었다. 조선 후기에는 장서각을 겸한 사립 도서관이 존재했다. 이정구의 월사고택, 유명천의 청문당, 유명현의 장성당 등이 그것으로, 조선 4대 사립 장서각으로 불렸다. '두타초'(頭陀草)라는 이하곤의 저서를 보면 당시 완위각에는 의학, 천문, 지리, 서예, 그림 등과 관련된 책이 1만권 가량 보관돼 있었다. 책이 워낙 많다보니 당대 문인과 각계 지식인들이 이하곤의 진천 초평의 완위각을 찾아 토론을 즐겼다. 화가였던 정선·윤두서(尹斗緖)와도 교유했다. 따라서 그의 문집에는 윤두서의 자화상과 공재화
조선시대 노비의 종류는 의외로 많았다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양반가에서는 이런 노비를 경제적인 시각으로도 분류했다. 별득노비, 구활노비, 환퇴노비, 전당노비 등의 명칭이 이에 해당한다. 별급노비는 과거급제, 생일, 병간호 등 특별한 사유로 인해 받는 일종의 '선물형 노비'를 말한다. 넓은 의미의 상속 노비로 볼 수 있다. 구활노비는 기근, 질병, 이산가족 등의 이유로 생계가 어려워진 사람을 거두어 먹여살리는 대신 노비로 삼은 경우을 일컫는다. 환퇴노비는 매도를 했지만 '어떤 이유'로 본래의 집으로 환원된 노비를 말한다. 이때의 어떤 이유로는 문중 동의없이 몰래 팔았다가 들통난 경우, 보이지 않던 질병이 발견된 경우, 새주인에게 복종하지 않는 경우(일명 완노비) 등이 있다. 이밖에 전당노비는 쌀, 곡식, 돈 등을 빌리기 위해 담보로 제공한 노비를 말한다. 식사를 전담하는 여종은 취비(炊婢) 또는 주비(廚婢)라고 불렀다. 취비는 문자 그대로 '불을 때는 여종', 주비는 '부엌노비'를 의미하고 있다. 이들은 밥에 돌이 섞여 있거나 밥찬이 정갈하지 않을 경우 양반에게서 손찌검을 당하곤 했다. 괴산 이문건의 누에치기 기술은 전문가 경지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바다와 하늘이 함께 걸었다. 암벽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 '끼룩끼룩' 갈매기의 울음소리. 자연과 하나 됨이란 바로 이런 건가보다.올해 전국 명품길을 순회 탐방하고 있는 충북일보 클린마운틴. 벌써 52회째를 맞았다. 이번엔 산을 떠나 바다로 갔다. 22일 하루 동안은 신선(神仙)이 아닌, '해신(海神)'이 돼 보기로 했다.출발 여정은 다소 힘겨웠다. 버스로 무려 4시간여를 달렸다. 2015년 청원~상주에서 영덕을 직접 잇는 고속도로가 개통된다는 소식을 위안거리로 삼았다.동해의 망망대해를 낀 블루로드는 총 3개 코스로 나뉜다. 50㎞를 모두 다 돌려면 17시간이 걸린다. 조만간 1개 코스가 더 추가된다고 한다. 우리는 B코스를 택했다. 해맞이 공원~석리~경정리(대게원조마을)~죽도산(축산항)에 이르는 15㎞ 여정이다. 출발지인 해맞이 공원에서 바라보는 죽도산은 까마득했다. '어느 세월에 도착하려나.' 걱정도 잠시, 오른쪽에 펼쳐진 동해의 푸름에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오랜 시간 풍파를 온 몸으로 받아낸 기암괴석도 눈을 호강시켜줬다. 왼쪽엔 80m 높이의 바람개비(풍력 발전기)가 시원하게 돌아갔다.한참을 걸어 '대게원조마을'이라 불리는 경정3리(차유마을)에 도착했다
전회에 이문건의 젖어멈 노비를 언급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노비들의 명칭과 역할은 의외로 세분화돼 있었다. 먼저 미산(未産) 노비, 잉임(孕任) 노비, 복중태(腹中胎) 노비 등의 명칭을 꼽을 수 있다. 미산노비는 출산하지 않은 여종, 잉임노비는 임신한 여종, 복중 태노비 역시 뱃속에 아이를 갖고 있는 여종을 의미하고 있다. 태아는 종모법에 따라 성별에 관계없이 숙명적으로 노비가 돼야 했다. 이밖에 육아와 관련된 노비로는 '업저지'가 있다. 업저지는 주인집의 젖먹이 아이를 업어주며 하루종일 함께 놀아주는 어린 종을 일컬었다. 노비의 자식들이 주로 이 일을 맡았다. 계집종 중에는 성장해서도 결혼한 주인 아씨를 따라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계집종은 '교전비'라고 불렀다. 시댁 예의범절을 조언하고 말동무가 되는 것이 교전비의 주된 역할이었다. 그러나 교전비는 대체로 얼굴이 곱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자칫 남편과 눈이 맞아 첩으로 들어앉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장례까지도 노비의 힘을 빌렸다. 이른바 '곡비'(哭婢)가 존재했다. 곡비는 그 지역 양반이 죽었을 때 빈소는 물론 무덤까지 따라가 대신 슬피 울던 노비를 말한다. 동네에서는
조선시대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다시 구분된다. 지금도 식구와 같은 표현으로 '식솔'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다. 솔거노비는 주인과 한 집에 살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비를 일컫는다. 외거노비는 문자 그대로 집밖에 거주하는 노비를 말한다. 자유가 조금 더 주어진 대신 매년 일정한 노동력과 농산물을 바쳐야 하는 신공(身貢)의 의무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한 해 농사는 사실상 노비와 관련된 행사로부터 시작됐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말 중에 '종날'이라는 연례 행사가 있었다. 이는 음력 '이월 초하룻날' 온 집 안의 먼지를 떨어낸 후, 노비들에게 떡 대접을 했던 풍습을 일컫는다. 겉으로는 양반 주인집이 노비를 격려하는 날이지만, 노비에게는 한 해 고된 노동의 시작을 의미했다. 농사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음력 정월에도 '문안비'라는 풍속이 존재했다. 조선시대 양반가 부인은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다.따라서 음력 정월 초이튿날부터 보름 사이에 어린 계집종을 친척집 등에 보내 대신 새해 문안인사를 드리게 했다. 그래서 '문안비'다. 이때 문안비의 새해 인사를 받은 양반가에서는 그 계집종에게 세배 음식상을 후하게 차려주고, 또 세뱃돈을 두둑히
조선시대 노비들은 여러 계층이 존재했다. 양반가 상전들은 이중 노동과 출산 능력을 동시에 갖춘 젊은 계집종을 가장 선호했다. 당시에는 임신한 계집종이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 역시 어미를 따라 노비가 돼야 했다. 이를 '노비종모법'이라고 불렀다. 암소가 송아지를 낳을 경우 그 집안에 재산증식이 이뤄지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실록에 노비 몸값에 대한 구체적인 수치가 적시돼 있다. '남종의 경우 나이가 15세 이상 60세 이하이면 값이 베 100필, 15세 이하 60세 이상이면 50필이고, 여종의 경우는 나이가 15세 이상 50세 이하이면 120필, 15세 이하 50세 이상이면 650필로 하라.'- 적어도 조선 성종대 만큼은 15세 이상-60세 미만의 연령대에서는 여종값이 20필 정도 더 비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여종이 자주 상전의 '잠동무'로 불려갔던 점도 고려됐던 것으로 보인다. 의외지만 조선시대에도 노비 휴가제도가 존재했다. 당시에는 휴가를 '말미'라고 불렀다. 비슷한 표현인 '겨를'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오희문은 1594년 음력 12월 21일자 쇄미록을 이렇게 썼다. "승노에게 말미를 줘 오는 정월 10일 전에는 돌아오도록 일러 보냈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쓴 쇄미록에는 총 24명의 노비 이름이 등장한다. 우리고장 영동 황간이 외가인 오희문은 이들 노비를 세습, 매득(買得), 별급(상속이나 증여) 그리고 유망비를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확보했다. 유망비는 주인집을 도망쳐나와 떠돌아다니는 노비를 말한다. 이들은 상전의 수족(手足)이 되어 농삿일, 누에치기, 물품교역, 편지와 안부전달, 상전의 나들이길 수행, 밥짓기, 땔감나무 마련 등 집 안팎의 온갖 궂은 일을 다 해야 했다. 오희문 노비들의 물품교역에는 우리고장 지명도 등장한다. 지금은 휴전선 이북에 위치하고 있는 강원도 평강에서 외가가 있는 영동으로 목화를 사러온 사례가 기록돼 있다. 1596년 음력 윤달 8월 16일자 쇄미록을 보면 '덕노'라는 노비가 외가가 있는 영동 황간에 와서 목화 12근을 구매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 소요된 시간은 총 15일이었다. '덕노'는 오희문 집에서 충성도가 가장 높았던 노비로, 이듬해 겨울에 서울로 미역을 팔러 갔다가 동상으로 엄지 발가락을 잃기도 한다. 조선시대 노비들이 매번 어떻게 그 먼 거리를 걸어다녔는가는 아직 완벽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주막이 대중화됐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괴산 연풍은 지금은 일개 면(面)에 불과하지만 일제가 1914년에 전국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기 전까지는 현(縣)의 지위를 유지했다. 연풍현은 고구려시대에는 상모현, 고려시대 때는 장풍현으로 불렸다. '연풍현'이라는 행정명칭을 처음으로 얻은 것은 조선 태종 3년(1403) 때였다. 이후 세종 11년에 충주의 동촌(東村)을, 성종 7년(1476)에는 충주의 수회촌(水回村)을 흡수하면서 행정 면적을 넓혔다. 그러나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연풍현은 1600년부터 1615년 까지 약 15년간 지도 위에서 사라진 적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현이 너무 피폐해졌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2년 후의 기록에 '지금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충원이 말하기를 "연풍 읍내와 서면(西面) 수회촌(水回村)은 땅이 지극히 비옥한데 지금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으니, 파수군(把守軍)으로 하여금 둔전(屯田)케 하여 농사를 지어 군량을 마련했으면 한다."'- 인용문에 등장한 '충원'은 신충원을 지칭하고 있다. 그는 우리고장 충주 출신으로 조령 제 2관문인 조곡관을 축성했다. 왜군이 완전히 물러가자 조정 대신들 사이에 피폐한
'신각은 그(조헌 지칭) 말을 옳게 여겨 기계(器械)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성내에 봇물을 끌어들여 큰 못을 만들었다. 뒤에 왜란이 일어나자 이정암이 성을 지켜 온전할 수가 있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신각이 사전에 준비한 공로를 추모하여 아울러 비석을 세워 그 공을 기렸다.'-선조수정실록 임진왜란 때 조헌의 충언을 유일하게 실천한 인물은 신각(申恪·?~1592)이라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신각은 자신이 대대적으로 수리한 성(城), 즉 인용문에 등장하는 성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역인 다른 경기도 양주의 해유령(蟹踰嶺)이라는 곳에서 왜군의 머리 70~80급을 베었다. 신각 대신 '대대적으로 수리한 성'에서 승리를 거둔 인물은 그 후임자인 이정암(李廷·1541∼1600)이다. 인용문 안에 이정암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성의 본래 이름은 연안성(延安城)으로, 지금은 북한 지역이 된 황해도 연안읍에 위치하고 있다. 연안성 전투는 청주성보다 꼭 한달 늦은 1592년 음력 9월 1일에 있었다. 그날의 전투는 소규모 충돌이 아니었다. 왜군 수만명이 성벽에 달라붙었다. '초토사(招討使) 이정암 등이 흩어진 장수와 졸병을 거두어 죽기로
청주성 전투에는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陸戰) 승리'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 붙고 있다.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는 1592년 음력 8월 1일에 있었다. 그러나 청주성 전투를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 승리로 보는데는 다소 무리가 있다. 충남 금산 진산면에는 이치대첩비가 존재한다. 권율은 그해 음력 7월 8일 금산 이치(梨峙·배재)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했다.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보다 먼저 승리한 전투가 있다. 이른바 경기도 양주 해유령(蟹踰嶺) 전투로, 1592년 5월 16일에 있었다. 실록에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당시 전투를 지휘한 인물은 신각(申恪·?∼1592)이다. '마침 응원하러 온 함경병사 이혼을 만나 군사를 합쳐 진을 결성했는데, 여염에 흩어져 약탈하는 왜병을 양주의 게재(蟹嶺)에서 요격하여 패배시키고 70급을 참수하였다. 왜적이 우리 나라를 침범한 뒤로 처음 이런 승전이 있었으므로 원근에서 듣고 의기가 용동하였다.'- 인용문에 등장한 '게재'는'해유령'과 같은 지명이다. 어류 '게'를 한자로 쓰면 '蟹'(해)가 된다. 실록 다른 곳에도 숫자가 다소 다르나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신각(申恪)은 사력을 다하여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격전하여 사졸(士
안내면 답양리 채운산에 가산사(佳山寺)라는 절이 위치하고 있다. 법주사의 말사로,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창건자는 정확하지 않다. 가산사는 조선시대에는 비교적 작은 암자 규모를 유지되다 정조 대에는 일시적으로 폐사됐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 때 발간된 여지도서(1765년)는 가산사에 대해 '옥천군 북쪽 25리에 위치한다'고 적었다. 신경준도 '가람고'에서 거의 같은 내용을 적었다. 그러나 정조 때 발간된 범우고(梵宇攷)는 '북쪽 25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됐다(今廢)'라고 적었다. 사찰에 영정각이 존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가산사에는 영정각(도기념물 제 115호)이 존재하고 있다. 영정의 주인공은 임진왜란 의병을 이끌었던 영규대사와 조헌이다. 영정각이 건립된 직접적인 이유도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조헌이 의병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하였고, 영규대사 또한 연합작전을 펴면서 가산사를 승병의 훈련장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사실 관계가 약간 불명확한 면이 있다. 두 인물이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에서 의·승병을 훈련시켰다면 청주에도 함께 입성했다고 보는…
[충북일보] 청주시의회의 후반기 원구성에 후보등록제를 도입하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결국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시의회 운영위원회는 지난 26일 국민의힘 김태순 의원이 대표 발의한 '청주시의회 회의규칙 일부 개정안'을 심사한 뒤 부결시켰다. 당초 운영위 10명의 위원 중 5명이 이 개정안에 공동서명해 상임위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높았지만 최종적으로 진행한 표결에서 반대표가 과반을 넘어섰다. 결국 이 개정안은 상임위의 문 턱을 넘지 못했지만 본회의에서 재차 다뤄질 여지도 있다.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했더라도 지방자치법 81조에 따라 재적 의원 3분의 1인 13명의 서명을 받아 본회의에 직접 안건을 상정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이 개정안에 공동으로 이름을 올린 의원만해도 18명에 달해 가능성도 높다. 당초엔 19명이 공동 발의를 했지만 국민의힘 이상조 의원이 찬성표를 거둬들이면서 18명이 공동 발의하게 됐다. 다음달 2일 열리는 3차 본회의에서 이 개정안이 다시 도마위로 올라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 의원이 제안한 후보등록제 방식은 후보등록과 정견발표, 본회의 무기명 비밀투표로 의장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국민의힘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정부가 30일 글로벌 혁신특구 지정을 확정 발표하는 가운데 충북은 첨단재생의료 특구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이 분야의 최종 후보 지역으로 선정된 청주 오송은 인프라가 잘 갖춰졌고 바이오 개발 전주기를 지원할 수 있는 국내 유일한 클러스터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혁신특구는 규제를 최소화하는 네거티브 규제가 적용된다. 오송이 유치에 성공하면 바이오와 첨단재생의료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하는데 탄력이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28일 충북도와 충북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중소벤처기업부는 30일 규제자유특구위원회를 열어 글로벌 혁신특구를 신규 지정할 예정이다. 앞서 중기부는 지난해 12월 충북(첨단재생바이오), 부산(차세대 해양모빌리티), 강원(AI 헬스케어), 전남(에너지 신산업) 4곳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위원회는 규제·실증·인증·허가·보험 등 글로벌 기준에 맞는 제도가 적용되는 특구 지정을 결정해 5월 고시할 방침이다. 1차 관문을 무난히 통과한 충북은 최종 지정도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청지인 청주 오송은 연구개발 등의 기획 단계부터 실증, 사업화까지 원스톱 추진이 가능한 것이 최대 강점이다. 국내 바이오산업의 메
[충북일보] ◇올해 충북청주FC의 목표는. "지난해 리그는 목표였던 9위보다 한 단계 높은 8위로 마감했고 14경기 무패 기록도 세웠다. 그 배경에는 최윤겸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의 훌륭한 전략과 빈틈 없는 선수 관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스포츠 경영 리더십을 바탕으로 올해는 조금 더 높은 목표인 플레이오프를 향해 달려보려 한다. 13개 팀 중 5위 이상의 성적은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달성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매주 목요일 감독·코칭 스태프를 중심으로 선수 강화팀, 대외협력팀, 마케팅 홍보팀 등 사무국의 모든 팀이 모여 PPT 발표를 한다. 이 발표를 통해 지난 경기를 분석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경기에 대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야할 구단 운영 방향은. "단순하게 축구 경기 한 경기, 한 경기로만 끝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스포츠는 막강한 힘을 품고 있다. 스포츠 경기 활성화로 작게는 건전한 가족문화 형성부터 크게는 지역 소통, 나아가 지역 경제 성장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홈경기 날이 되면 가족 단위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는다. 경기 관람을 통해서 여가 시간에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