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의 세인트앤드루스 거리에 생선장수 소녀 동상이 있다. 동상의 주인공은 홍합과 새조개 등을 팔던 어여쁜 소녀 '몰리말론'이다. 설화 속 가상의 인물이지만 영국의 식민통치에 시달리던 가난한 아일랜드 노동계급의 상징으로 사랑받는다.
생선수레의 손잡이와 조개 바구니를 잡고 있는 소녀의 표정은 생기가 없다. 먹고 살기 위해 낮에는 어물을 팔고 밤에는 트리니티 대학 주변에서 매춘을 했다는 소녀의 초점 없는 두 눈은 노인처럼 어둡고 슬퍼 보인다.
몰리말론 동상은 '매춘부와 수레(The tart with cart)상'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왜 그렇게 모욕적인 이름으로 부르는지 지나치게 솔직한 아일랜드인의 별난 정서가 영 마뜩찮다.
몰리는 상체를 조여 강조한 블라우스인 바스크를 입고 있다. 깊게 파인데다 너무 힘껏 조인 바스크 탓에 몰리의 가슴 대부분이 드러나 보인다. 17세기의 여성들은 쉽게 모유를 먹이기 위해 가슴을 노출한 드레스를 예사로 입었다고 하지만, 출산경험이 없는 젊은 여성에겐 설득력이 떨어지는 옷매무새다. 이마도 매춘부로 일한 그녀의 직업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 복장을 연출한 것일 게다.
몰리말론 동상의 유래는 아일랜드 전통 민요에서 시작됐다. 17세기 더블린에서 신산한 삶을 살다가 열병에 걸려 숨진 가엾은 소녀의 이야기가 민요의 노랫말이다. "새조개와 홍합이 왔어요, 살아있어요, 싱싱해요"라는 소녀의 외침이 후렴으로 반복된다. 소녀가 죽은 후 더블린의 거리에서 몰리의 유령이 끄는 생선수레 바퀴소리를 한동안 들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식민지의 한이 녹아있는 민요 '몰리말론'은 무장독립투쟁을 벌였던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광복 군가이기도 했다. 지난 2014년 마이클 히긴스 아일랜드 대통령이 1921년 아일랜드가 영연방에서 독립한 이후 처음으로 영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영국정부는 여왕이 주관하는 공식 만찬장에서 민요 몰리말론을 연주했다.
그런데 더블린의 시 승격 1000주년을 기념해 1988년 설치된 몰리말론 동상이 '조각상의 풍만한 가슴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퍼지면서 수난을 겪기 시작했다. 관광 가이드들이 '가슴 만지기'를 여행상품으로 다투어 선전하는 통에 몰리말론의 가슴은 마치 생살이 벗겨진 듯 색이 변할 정도의 심각한 훼손을 입었다.
이처럼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지자 '몰리를 내버려 두라(Leave MollyMalone Alone)'는 캠페인이 시작됐다. 행운을 빌기 위해 동상의 가슴을 만지는 행동은 몰리말론을 모욕하는 행위라며 '더블린에서 유일하게 가슴이 있는 동상이 어떻게 날마다 우리 아이들의 눈앞에서 폭행을 당하는가'란 비판이 이어졌다.
이와 비슷한 수난을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 무대인 이탈리아 북부 베로나에 설치된 줄리엣 동상도 겪고 있다. 동상의 오른쪽 가슴을 만지면 운명적 사랑이 이뤄진다는 소문 때문에 닳아서 구멍이 생긴 줄리엣 동상은 복제품이다.
1972년에 제작된 본 동상의 가슴 부위에 구멍이 생겨 2014년 현재의 복제품으로 교체한 청동상에 같은 문제가 발생한 터라 10여 년 전 교체당시 줄리엣 동상을 만질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찬반 논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베로나 시는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소녀 동상의 가슴을 만지는 행위가 저속한 성범죄라거나, 도시 문화재 훼손 행위를 막아야 한다는 반대의견보다, 관광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모양이다.
아름다워서 수난을 겪는다면 아름다움은 행운이 아니라 천형이다. 몰리말론과 줄리엣 동상의 딱한 처지가 그래서 더 가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