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 페스티벌에서 천년의 사랑을

2017.11.12 14:43:13

류경희

객원 논설위원

 지난 2015년 동아시아문화도시로 선정된 청주시는 숫자 '1'이 4번 겹치는 11월 11일을 젓가락의 날로 선포했다. 그리고 한·중·일의 공통 문화콘텐츠인 젓가락을 주제로 한 젓가락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

 동아시아문화도시 사업은 한·중·일 3개국이 매년 1개 도시를 선정해 연간 문화교류를 진행하는 사업이다. 당시 명예조직위원장을 맡았던 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이 젓가락의 날 제정을 제안했다고 알려졌다.

 '젓가락 문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11월 11일을 젓가락 데이로 정하여 지켜오고 있다. 11월 11일을 상업적이 아닌 건전한 의미의 날로 보내자는 취지에서 움직인 바람직한 캠페인이다.

 그렇다면 이어령 전 장관이 '젓가락 데이' 제정에 대한 민간단체의 생각을 청주시에 전한 것이 아닐까. 이 전 장관은 '젓가락 페스티벌'을 청주에서 개최하는 등 청주의 가치를 높이는데 기여한 공으로 청주시 명예시민이 됐다.

 젓가락 데이와 비슷한 기념일도 있다. 숟가락 모양을 연상시키는 숫자 '9'와 젓가락 모양을 연상시키는 숫자 '11'이 만난 9월 11일을 '건강한 숟가락 젓가락 데이'로 기념하는데, 올바른 식생활 실천을 위해 서울시가 지난 2012년 지정했다.

 젓가락 페스티벌의 젓가락 중에 마음을 잡는 젓가락이 소박한 분디나무 젓가락이다. 분디나무는 산초나무의 다른 이름이다. 항균성이 있어 썩어도 벌레가 생기지 않는데다가 속이 차 있고 여문 나무의 성질 덕에 젓가락 만들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산초나무는 분디나무 외에도 별칭이 많다. 천초, 향초자, 야초, 항초유, 상초, 애초 등이 모두 산초나무의 다른 이름이다. 낙엽 관목으로 쓰임새가 많아 버릴 것이 없는 이 나무를 영어권에서도 Toothache tree라 부른다. 치통을 멎게 한 나무의 약효를 신통히 여겨 붙인 이름일 게다. 산초나무의 가시와 냄새를 귀신이 두려워한다고 믿어 울타리를 삼기도 했다.

 분디나무 젓가락을 만드는 과정은 공이 많이 든다. 나무의 수분이 적은 한겨울에 분디나무를 꺾어 삶은 다음 가시와 껍질을 제거한다. 이십여 일을 그늘에서 말려 성형하는데 열을 가해 구부러진 가지를 편 다음 다듬고 사포질을 하면 젓가락 모양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몇 차례의 염색과 옻칠과정을 거치면 젓가락이 완성된다. 젓가락 한 벌을 만들기 위해 한 달 이상의 시간과 수고를 바쳐야 하는 것이다.

 고려속요 '동동(動動)'에 분디나무 젓가락에 대한 가사가 있다. 고려인들이 분디나무 젓가락을 쓰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기록이다.

 '동동'은 여인의 애절한 마음을 옮긴 상사의 노래다. 13장으로 구성됐는데, 초장은 서사의 말이고 뒤의 열두 장은 정월부터 십이월까지 월령체를 빌려 이루지 못한 남녀의 아픈 사랑을 담았다.

 궁중에서 즐겨 연주되던 동동은 조선 중종 때 이르러 정읍사와 함께 남녀상열지사로 찍히면서 퇴출됐다. 폐기하라 명을 받은 동동의 노랫말 중 특히 사대부들의 심기를 불편케 했던 내용이 분디나무 사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분디나무 사연은 제일 마지막 연인 십이월 령에 등장한다. "십이월에 분디나무로 깎은 아아, 소반 위의 젓가락 같구나. 임의 앞에 들어 가지런히 놓으니 손님이 가져다가 뭅니다"

 임께 드릴 음식을 소반에 차려 집어 드시기 좋게 분디나무로 젓가락을 깎아 가지런히 올렸더니만 엉뚱한 손님이 젓가락을 냉큼 집어다 물었다는 내용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지 못하고 낯선 사람에게 가게 된 얄궂은 운명이 짠하다.

 그런데 자신을 잘 깎아 소반에 올린 젓가락에 비유한 표현은 천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봐도 아슬아슬한 수위다. 내 님이 쓰라 놓았더니 손님이 가져다 물었다는 노랫말에 화들짝 경기를 일으킨 조선시대 점잖은 사대부들의 표정이 어떠했을까.

분디나무 젓가락을 보며 천 년 전 고려 여인의 사랑과 좌절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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