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이 저지른 보통 아닌 테러

2024.01.09 15:53:22

류경희

객원논설위원

"이라크에서도 다치지 않은 아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한국에서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이 큰 충격이다." 지난 2015년 3월 5일 주한미국대사 마크 리퍼트가 조찬행사장에서 피습을 당한 상황에 대해 리퍼트 대사 아버지는 이렇게 아들을 걱정했다.

당시 리퍼트 대사는 범인 김기종이 휘두른 과도에 오른쪽 안면부와 왼쪽 손목 등 다섯 부위에 자상을 입었는데 난자되어 피범벅인 모습이 끔찍했다. 리퍼트는 피습 후 병원으로 후송되는 중에도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놀란 주변을 침착하게 달랬다고 한다.

치료 중에도 환자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웃는 모습을 보였지만 상처는 가볍지 않았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이 얽혀있어 웃음으로 상황을 뭉뚱그렸겠으나 아마도 리퍼트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 이상 테러에 안전하지 않은 대한민국

미 대사를 공격한 범인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황당함 일색이었다. 서울 도심에서 소위 시민단체의 대표라는 인간이 미국대사를 칼로 공격한 것은 가슴이 내려앉는 범행이었다. 범인은 '남북 대화 가로막는 전쟁훈련 중단하라'는 유인물을 범죄현장에 지니고 있었다. 전쟁반대와 평화통일을 입으로 외치면서 몸으로는 비평화적인 칼부림을 자행한 꼴이다.

지난 2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개조한 등산용 칼로 공격한 김모씨의 범행은 9년 전 리퍼트 대사 피습 범행과 묘하게 오버랩이 된다. 특히 자신이 저지른 테러행위를 '역사적 사명감'이라 우기며 마치 열사라도 되는 양 당당히 구는 태도가 닮았다. 범행을 준비하며 확신에 찬 문서를 작성한 점도 비슷하다.

김씨는 자신이 준비한 문서를 '변명문'이라 했다. 변명(辨明文)이라니, 하긴 범죄행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선언문'이나 '성명문'으로 불렀다면 더욱 기가 찼으리라.

변명(辨明)은 벌인 일에 대한 잘, 잘못을 나름대로의 구실과 이유를 들어 설명하는 행위다. 사안을 분별하여 해명한다는 의미도 깔려 있지만 변명을 한다 함은 명백한 잘못에 대한 구차한 핑계의 이미지가 크다. 즉 잘못을 저지른 자신의 입장을 포장하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변명을 글로 작성한 변명문이란 것을 공개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제 잘못을 제 식대로 포장하여 사안을 가볍게 만들고자하는 일종의 사과문이다. 그렇다면 잘못을 저질러 놓고 사과와 반성이 따르지 않은 글을 변명문이라 할 수 있을까.

***무서운 정치 이데올로기

김씨가 준비한 '변명문'은 작정하고 쓴 8쪽의 장문이다. 그는 역사적 사명감에서 이 대표를 죽이려 했다는 내용을 적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명을 들먹인 그의 변명문은 아무리 뜯어봐도 논리에서 벗어난 글이다.

문제인 정부 때 쑥대밭이 된 나라 경제를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이 대표 살리기에만 올인하여 나라 경제가 파탄 나게 됐기 때문에 이 대표를 공격했다는 내용이니 말이다. 그는 야당 대표를 제거하여 국가경제를 살리겠다는 망상적 신념으로 저지른 범행을 정당한 행동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 반성이 아닌 계획범죄를 정당화하고자 쓴 글이라면 더욱 변명문이라 부르는 것이 가당찮다.

이재명 대표 피습사건을 대하며 가장 충격적이었던 점은 어느 나라보다 안전하다고 믿는 대한민국, 그것도 공개된 장소에서 이런 테러가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리퍼트 대사 아버지의 심정을 절절히 공감하게 된다.

더구나 지극히 평범한 보통사람이라는 범인의 신상이 머리를 세게 친다. 중간쯤 되는 키에 말수 적은 중년의 아저씨는 착하고 점잖은데다가 성실했다고 한다. 옆집에서 이웃들과 순하게 어울리며 조용히 살던 사람이 한순간에 테러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의 돌연한 행동을 정치 이데올로기의 책임이라고 이야기한다. 잘못된 신념처럼 무서운 우상은 없다. 특히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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