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애 어린이의 이상한 시스루

2024.08.20 15:43:25

류경희

객원논설위원

망사처럼 얇은 천을 사용하여 속살과 몸의 실루엣이 드러나 보이도록 연출한 패션을 시스루(see through)라고 부른다. 단어 그대로 투명한 천을 통해 속이 비쳐 보이는 효과를 노린 야릇한 옷인 것이다.

고대 이집트 벽화에서도 시스루를 걸친 여성이 발견될 만큼 역사가 유구한 이 패션을 나폴레옹의 부인 조세핀이 즐겨 입었다고 한다. 여인들은 희한한 황후의 드레스를 흉내 낸 실크 시스루 드레스를 너도나도 따라 입기 시작했다. 몹시 추운 겨울에도 유행의 열기가 식지 않아 독감과 폐렴으로 목숨을 잃은 여인들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니 목숨과 바꾼 무모한 패션열정이 기가 차다.

시스루는 1960년대 이브생로랑 쇼를 통해 대중 앞에 부활했다. 이브생로랑은 속옷을 전혀 걸치지 않은 알몸의 모델에게 시스루 드레스를 입혔는데, 이처럼 파격적인 패션에 대해 다수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영혼을 자유롭게 만드는 패션'이라며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다양한 형태의 시스루 룩이 시즌 런웨이에 다시 등장했다. 1960년대 풍의 관능적인 스타일에 아름답고 정교한 패턴의 미학을 더한 망사 레이스 디테일의 슬립 드레스들이 시스루 유행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맨살은 아니지만 한 겹 천을 통해 슬쩍 노출 효과를 볼 수 있어 신경 써서 걸치면 맨살보다 더 매력적인 옷이 시스루다. 연예인처럼 특별한 사람들이나 입는 것으로 알던 시스루를 일반인들도 거부감 없이 입고 있다. 하지만 시스루는 아무래도 누구나 소화하기엔 무리가 있는 패션이다.

북한 여성들도 시스루에 관심을 보이고 있나 보다. 시스루가 유행을 타자 북한당국은 최근 '살이 보이는 옷'에 대한 단속을 예고했다고 한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회주의 제도를 흐리고 체제를 좀 먹는 반사회주의, 비사회주의적 현상으로 뿌리 뽑아야 할 대상인 '살이 보이는 옷'을 입지 말 것"을 강조하는 영상강연을 실시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단속에 적발되면 머리카락이 잘리고 3개월에서 6개월의 노동단련대형 등에 처한다는 으름장까지 놓고 있다.

북한당국이 애써 막고 있는 속살 비치는 차림새는 김정은의 딸 김주애가 공식석상에 입고 나와 시작된 유행이다. 지난 5월 아버지 김정은과 함께 북한 평양 북쪽에 새로 생긴 전위거리 준공식에 참석한 김주애는 팔 부분이 훤히 비치는 짙은 감색 시스루 리본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탄식이 나올 정도로 너무나 어색한 모습이었다.

북한 주민들이 '사랑하는 자제분'으로 떠 받드는 김주애는 2013년 2월생으로 알려져 있다. 만으로 11살이니 겨우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 또래다. 보수적인 북한에서 어린 소녀가 속살이 비치는 옷을 입는 것이 매우 드문 일이라는 평을 하지만, 옷차림에 규제가 없는 자유분방한 나라에서도 어린이는 시스루를 입지 않는다.

발랄하고 귀여운 어린이가 입을 옷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뛰어다닐 어린이가 시스루 블라우스라니, 행사장의 김주애는 마치 엄마 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북한 관영매체가 공개한 사진 속의 김주애 어린이의 패션은 왜 저러나 싶게 가관 일색이었다. 복부인 아줌마 선글라스로 얼굴을 덮는가하면 언니들도 어설플 무거운 가죽 코트와 할머니들에게나 어울릴 살구색 모피코트를 걸치기도 했다.

화성-17형 발사훈련에 참관했던 지난 해, 10세 대상 사이즈의 제품 가격이 2천800달러(한화 365만 원)에 달하는 크리스챤 디올의 명품 패딩을 입었다 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으나 후드가 달린 패딩은 그전 패션에 비해 훨씬 어린이옷 같았다.

혹자는 어린이에게 어른의 옷을 입혀 성숙해보이도록 하는 이런 짓거리를 권력승계를 위한 레거시(legacy)라고 말한다. 시대를 초월한 느낌을 주려는 정치적 연출이라는 것이다.

살이 보이는 옷을 제재하는 북한당국의 이번 처사를 두고 주민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은 듯하다. 그러나 당당히 따지지 못하고 "원수님의 자제분이 입는 옷을 왜 인민들이 입으면 반사회주의, 반체제가 되냐"며 속으로 분을 삭인다는 북한여성의 소심한 저항에 웃음이 비어진다. 어린이가 걸친 턱없는 시스루 블라우스가 자꾸 연상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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