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숲이 알린 항공대 동영상 유출사건

2018.05.13 14:20:15

류경희

객원 논설위원

홍대 누드크로키 수업 몰카 사건에 이어 터진 항공대 동영상 유출 논란은 저자거리가 아닌 신성한 대학가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한층 충격이 크다.

최근 한국항공대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에 '37천262번 송골매'라는 항공운항학과 남학생이 글을 게재했다. 학과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21초 분량의 남녀 성관계 영상이 올라왔다는 고발 내용이었다.

페이스북에 해당 동영상의 전모를 세세히 밝힌 작성자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촬영한 영상인 듯했다고 주장했다. 남녀의 얼굴은 식별이 가능하게 드러나 있었으며 심지어 촬영자는 여성의 머리채를 잡아 카메라 쪽으로 상대의 얼굴이 향하게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취했다고 했다.

대나무숲 게시자는 "내 가족, 내 누이의 일이라는 생각에 손이 떨릴 만큼 분노가 치민다"며 불법 음란물을 촬영하고 유포한 같은 학교 재학생을 비난했다.

게시자의 주장처럼 성관계 과정을 촬영해 유포했다면 어떤 범죄보다 파렴치한 성범죄다. 상대 여성이 자신이 얼굴이 드러난 동영상이 유포된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은 살인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사건의 심각성이 예사롭지 않다.

동영상을 열어 본 학생들은 이 동영상이 여성을 망신주려는 복수심으로 배포한 '리벤지 포르노'가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다.

현재 이 게시글은 한국항공대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삭제된 상태지만 단톡방에 올랐던 동영상이 얼마나 퍼졌을지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사태에 당황한 항공대 측이 피해 확산을 막기 위해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며 유포 방지를 당부하고 있으나 이미 퍼질 대로 퍼진 동영상을 막기는 역부족인 듯싶다.

사건이 사회적 공분을 사자 한국항공대 측은 경찰 수사 의뢰를 검토 중이라며 300명 가까이 모인 공개된 단톡방에 불법 음란물을 유포한 것은 다른 학교에서 발생했던 성폭력 사건보다 사안이 심각하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그런데 동영상을 올린 학생이 재학생으로 확인되자 항공대의 입장이 학생을 동정하는 쪽으로 기울었음이 느껴진다. "학생 지도위원회가 해당 학생 A씨를 상대로 1차 조사를 벌였는데 상담을 해보니 A씨가 억울한 상황이다. A씨가 큰 상처를 받고 위축돼 있다"며 애써 학생을 변명했다.

동영상 유출자가 자기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일이 벌어지고 있어 이성적인 판단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설명 역시 자기 학교 학생의 입장만을 감싸는 티가 역력하다. 성관계 동영상을 유출한 남학생은 항공대 측에 '재학생이 아닌 여성과 합의 하에 동영상을 찍었으며 유출은 실수'라는 입장을 전했다고 한다.

합의하에 찍었다는 말에 썩 신뢰가 가지는 않지만 합의하에 촬영한 영상이라 할지라도 몇 백 명이 모인 단톡방에 성행위 동영상을 유출한 것은 배포자의 책임을 묻는 성폭력범죄 특례법에 따라 사법처리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SNS 페이스북 채널인 '대나무숲'이 대학생들의 소통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밖으로 내놓기 힘든 속내를 털어놓는 재학생들의 소통의 창구인 대나무숲은 신라 경문왕의 설화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이름을 따왔다. 사회적 약자들이 마음껏 답답한 속사정을 풀어내는 소통의 공간에 맞춤처럼 어울리는 이름이다.

'왕위에 오른 경문왕의 귀가 갑자기 당나귀처럼 길어졌다. 홀로 왕의 비밀을 가슴 속에 담고 있었던 모자를 만드는 복두장은 죽을 때가 되자 인적 없는 도림사의 대나무 숲을 찾아 대나무를 바라보며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 숲에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영원히 간직될 비밀은 없다. 언젠가는 모든 대나무가 일어서서 임금님 귀를 외쳐대는 난처한 꼴이 되기 십상인 것이다. 그래서 감당치 못할 비밀은 만들지 않는 것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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