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바람소리 숨막히는 그리움은 당신이 없는 또 다른 눈물인가요. 천국에도 계절이 있나요. 여기는 풍성한 여름이 푸르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에 향한 그리움 산 넘고 물 건너 어디엔들 못 가랴만 당신께 닿을 수 없어 가슴이 아파옵니다. 서러운 당신은 비운의 배를 타고 통곡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신이 없는 빈자리에서 내내 당신의 그림자를 찾고 있습니다. 웃기도 했다가, 울기도 했다가 어쩔 줄 모르는 시간의 얼굴들……. 구름 같은 인생 바람에 떠밀려 가다 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는 게 인생인가 보오. 냉혹한 세월 뼈마디 삭이며 세찬 비바람 이겨내고, 고통과 시련의 강을 건너 지금은 별이 된 당신의 사랑을 가슴에 담으며, 고인 하얀 눈물을 꽃잎에 새깁니다. 애절한 그리움 당신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립니다. 어느 시인은 "사람이 죽으면 은하수 건너 별이 된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까만 밤하늘 어느 별자리 어느 별로 떠서 영롱하게 불 밝히고 계신지요. 당신이 내 곁을 떠나 은하수 건넌 지도 벌써 4년이 되는군요. 그토록 맑고 밝던 당신의 명주 빛 웃음, 별처럼 아름답게 빛나던 모습이 그리워 아픈 눈물 흘립니다. 우수수 떨어지는 외로운 시간을 껴안고 당신의 생각에 젖다 보면 이 밤은 잠 못 이루는 밤이 되어갑니다. 창문을 열고 밤하늘에 별을 목타는 안타까움으로 바라봅니다. 풀잎처럼 내 안에 흔들리는 당신의 숨소리를 쓰다듬으며 하늘 바다의 고요한 섬으로 떠서 당신을 찾고 있네요. 지금 대체 당신은 어디에 계신 건가요. 당신만으로 가득 찼던 집 안에는 텅 빈 외로움만 파도처럼 일렁일 뿐, 그리운 모습은 보이질 않네요. 당신이 없는 이 세상 내가 존재함에 무슨 의미가 있나요. 당신은 산전수전 다 겪고 살아왔지요.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안 해 본 것 없이 온몸을 던졌지요. 보따리 장사, 삼복더위 비닐하우스 묘상(苗床)일, 건축업, 부동산까지…… 길이 없어도 길이 보이는 먼 미래 푸르름을 향하여 끝도 없는 가시밭길을 담담히 걸어왔어요. 당신의 온몸으로 일궈낸 순백의 자태! 우리 가정을 빈곤의 늪에서 구출해 놓고, 당신은 조용히 하늘로 떠나고 나니, 가슴에는 이렇게 찬비만 내립니다. 며칠 있으면 당신의 네 번째 기일이 다가오네요. 식구 모두는 정성껏 제례 준비를 하여 당신을 모시려 마중합니다. 그날만은 천국에서 내려와 차린 음식 마음껏 들고 당신의 애틋한 사랑 나누어주며 아련한 추억도 소환해 보구려. 추억도 길을 잃고 잠들었나 희미해 보이네요. 살아생전 시골은 산속이라 밤이면 무섭다고 늘 말해 왔지요. 당신이 천국에 가서도 무서워할까 봐 밤이면 묘역을 환하게 밝혀주려고 전깃불을 설치했어요. 타이머를 달아 자동으로 저녁 8시가 되면 불이 들어오고, 새벽 4시가 되면 꺼지게 했답니다. 갖가지 색깔에 점멸등도 달아 나뭇가지마다 깜박깜박 오색의 노래를 부른답니다. 태양광 램프도 묘역에 둘러앉아 예쁜 밀애를 속삭이네요. 당신이 좋아하던 도자기, 화분, 수족관까지 묘역에 옮겨다 놓았습니다. 당신이 외롭고 쓸쓸해질까 봐서입니다. 매일 밤 저녁 8시 묘역에 불이 들어오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커피 한 잔 타 가지고, 당신을 만나러 가는 시간이 유일한 기쁨이고 즐거움입니다. 고적한 인생길 속절없이 붉은 노을만 남긴 채 사라진 태양 아래, 당신을 위하여 죽는 날까지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까요. 우리 가정 이삿짐이라야 옷 넣는 고리 하나로 시작한 살림이 아닌가요. 그런 가난을 잊게 만든 당신의 헌신적이고 고달픈 삶의 고뇌가 아니었나요. 이 모두가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힘들었던 수많은 세월의 노래가 천상의 목소리로 외롭게 들려오네요. 여보! 평소 당신이 몸과 마음이 지쳐 있어도 따뜻하게 위로의 말 한마디 못했어요. 수고했다고 손 한 번 꼬옥 잡아주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게 뒤늦은 후회로 남아 바보처럼 살았다는 생각이 차오릅니다. 새소리도 피었다 지고, 이승 생명 다하고 영혼이 반갑게 당신을 만나는 날, 새벽 꽃잎에 맺힌 이슬에 입술로 살며시 이야기해요. 산새소리, 물소리, 솔바람소리 모두 끌어안고, 꽃구름 타고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시작하며 행복을 노래하자고요…….
사 년 전 어머님의 마지막 생신이 되었던 간월도에서의 일이다. 어머님의 생신이 음력 8월 4일이어서 추석을 보름 정도를 앞두고 일요일에 오 남매의 온 가족이 모여 어머님을 모시고 어머님의 고향인 간월도를 찾았다. 생신날만이라도 고향에서 점심 식사를 하시고 섬을 한 바퀴 둘러 보시며 편하게 쉬도록 하는 것이 효도일 것 같아 시작한 것이 십오륙 년이 되었다. 파도가 밀려와 부서지며 내는 소리와 하얀 포말, 그리고 햇살이 보석처럼 쏟아져 내리는 바다를 조용히 바라보시는 어머님은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하시곤 하신다. 썰물에 물이 빠지면 친구들과 간월암에 건너가 소꿉놀이를 하셨던 기억과 지금은 보호수로 지정된 사철나무 뒤에 숨어 술래잡기 놀이를 했었다며 미소를 지으신다. 파키슨병에 손은 물론 발까지 불편하신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식당에 들어서니 외증손자들과 거리를 두고 앉고 싶단다. 손이 떨려 수저에 밥이나 반찬을 올려드려야 겨우 드실 수 있으니 어린 손주들에게 불편하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셨으리라. 어머니와 나는 숟가락을 통해 정을 나누고 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모진 풍파를 모두 이겨내시고 오 남매를 잘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수저 위에다 반찬을 올려드리면 어머님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신다. 어머니는 외로울 때마다 달을 바라보시며 천수만에 달이 뜨면 더욱 아름다운 고향 간월도를 그리워 하셨으리라. 옥색 바닷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윤슬이 아름다운 바다를 그저 한없이 바라보시고 계신다. 돌 위에 핀 꽃(石花), 굴을 따서 어리굴젓을 담으시고, 추운 겨울 굴국을 끓여 추위와 배고픔을 달랬을 추억이 아련히 떠오르시는 것일까! 어느새 눈가에 이슬이 촉촉히 맺혀오고 상기된 얼굴에는 지난날 고단했던 삶을 뒤돌아보시는 듯 회한이 서려 있다. 어머님은 친정에 무척이나 가고 싶으셨으리라. 첫 아이인 형을 등에 업고 쪽배로 삼십 리 뱃길을 가야 하는 먼 길을 썰물 때 간조에 맞춰 걸어서 가시다가 바닷물이 밀려와 위험에 처하였으나 마침 지나가는 어선에 구조되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셨던 일을 가끔 들려 주셨었다. 바닷길은 성인들이 빠른 걸음으로 통과해야 가능한 일인데 갓난아이를 업고 섬으로 가는 길은 위험한 일이었다. 허리까지 밀려오는 거세고 맹렬한 바닷물에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야속한 바닷물은 갓난아이의 발목까지 차오르는 당황 속에 '살려 달라'는 소리조차 나오질 않고, 놀란 가슴은 밤새도록 잠이 오질 않으셨단다. 간월도에는 썰물 때 물이 빠지면 걸어서 갈 수 있으나 밀물이 들어와 만조가 되면 섬이 되어 배위에 떠 있는 암자처럼 보이는 간월암이 있다. 한 송이 연꽃이 아름답게 물 위에 피어 있는 듯해서 연화대라고도 했단다. 줄배로 관광객들이 오고 가는 모습에 제법 운치가 있어 좋다. 겨우 십여 명이 탈 수 있는데 줄을 이용해 간월암에 들어가고 나오고를 반복한다. 섬은 일출과 일몰 때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간월암에서의 낙조(落照)를 조용히 바라보면 아름다운 수묵화 속으로 내 영혼이 빠져드는 느낌이다. 간월도의 명물은 어리굴젓이다. 어머님은 우리 남매들이 방학을 하거나 휴가를 오면 으레 어리굴젓과 간장게장을 손수 담가 밥상에 올려 주셨었다. 결혼 후에도 명절 때나 부모님 생신 때에도 변함이 없으셨다. 간월도의 굴은 다른 지역의 굴과 달리 물날개에 미세한 털이 많이 있어 양념이 잘 배어들어 굴젓을 담그기엔 최상이었다.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을 만큼 맛이 으뜸이다. 간월도는 간척사업으로 석화가 많이 사라지자 이장과 어촌계에서 바위로 어장을 새롭게 만들어 어리굴젓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데 지금도 굴의 풍년을 기원하는 '굴부르기 군왕제'가 해마다 정월 보름날 만조 시에 어리굴젓 기념탑 앞에서 백여 년째 이어져 열리고 있다. 어머님께서 유명(幽明)을 달리하신 후에는 제삿날은 물론 명절 때나 가족들의 생일이 돌아오면 어머님 생각에 어리굴젓을 떠올리게 된다. 풍족하지 않은 살림에도 귀하고 값비싼 간월도 굴로 젓을 담그시어 수라상처럼 차려 주셨던 어머님, 과연 나는 어머님의 자식 사랑에 얼마만큼 보답해 드렸을까. 좀 더 잘해 드리지 못한 것에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때늦은 후회에 가슴이 아려온다. 간월도! 영원한 어머니의 고향, 파도에 옛 추억을 싣고 조용히 다가와 어머님의 향수(鄕愁)에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해 주고 있다.
"자기야 나 어디가 좋아서 결혼하자고 그랬어?" 아내가 '답정너'를 요구했다. "아니 뭐 당신 오빠가 노처녀 구제 좀 해달라고 사정을 하길래 적선하는 셈 치고…" 삐뚤어도 한참 삐뚠 대답으로 아내를 놀리며 티격태격 사랑싸움하던 신혼 시절이 아련하다. 고등학교 절친인 친구와 저녁을 먹고 술자리를 갖게 됐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친구가 심각하게 물어왔다. "도청에 괜찮은 총각 없니?" "응? 우리 회사엔 총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 웬 총각 타령이여?" "우리 집에 노처녀가 있잖아. 내 동생 말여." "가만있어 보자, 총각은 나뿐인데, 나는 어뗘?" 장남에 의지해 사시던 어머니가 내 나이 서른이 넘어가면서 장가는 언제 들 거냐며 걱정하셨다. "알아서 할게유." 하고 돌아섰지만 어머니는 내가 장가를 안 가면, 부모가 못나 큰아들 장가도 못 보내고 있다고 자책할 게 뻔했다. 주위에 결혼한 친구들이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아내와 산책하는 모습도 부러웠다. 내 처지를 이해하는 여자만 있으면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직장 상사나 어른들이 주선한 소개로 여러 번 맞선을 보기도 하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동생들과 같이 산다는 말을 듣고도 신혼집과 재산을 물으면 3백만 원짜리 전세금이 전부라고 들려주었다. 어쩌다 얘기가 잘 통한 여자는 부모님이 반대한다고 미안하단 통보를 받던 시절이다. 술김에 친구에게 호기를 부렸지만, 솔직히 기대보다는 체념을 하고 있었다. 며칠 후 친구가 답을 가지고 왔다. 동생이 한 번 만나보겠다고 한단다. 분명 고대하던 소식인데 걱정이 앞섰다. "너, 네 동생한테 내 사정 얘기했어?" "아니 그건 네가 말해야지. 아무튼 만나서 잘 얘기해봐. 나는 너를 아주 적극적으로 밀었으니까." 가급적 분칠을 하고 포장을 할 것인가. 양말 속을 뒤집어 보일까 고심하며 약속 장소로 나갔다. "오빠가 어떻게 내 얘기를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홀어머니와 동생 네명, 여섯 식구가 두 칸짜리 전셋집에 살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더라도 함께 살아야 하구요." "네, 오빠한테 들었어요. 저도 칠남매로 북적대는 집에서 커서 그런지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공무원 월급 적은 거 아시지요? 생활이 많이 쪼들릴 거예요." "절약하며 쓰면 되겠지요. 저도 다소나마 벌면 되고요. 저는 사업하시는 분보다는 공무원이나 선생님 같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분을 원했어요." '아! 인연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구나' 생각하며 쐐기를 박는다고 무슨 배짱이었는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삼국지의 장판파 전투에서, 조자룡이 적군 수중에 들어가 유비의 처와 자식을 구해오자 유비가 말했다는 '부모 형제는 수족이요, 처자식은 의복(夫母兄弟 爲手足 妻子息 爲衣服)이다'는 얘기를 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이 대목을 좋아하고 신봉한다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순간 '아! 이 여자구나. 이 여자를 붙잡아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 후 우리는 뜻이 맞아 결혼을 하였다. 많은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아내와 저녁 술을 한잔 나누며 그날을 회상한 적이 있다. 아내는 오빠의 권유를 믿었고 또 그동안 나를 보아왔기에, 어느 정도 마음이 기울었던 상태였단다. 해서 무슨 말이든 물어보면 "아, 네, 알겠어요. 그렇겠네요"로 대화를 나눴지만 조자룡은 이름만 어렴풋이 알았단다. 의복이니 수족 얘기는 알지도 못했거니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얘기를 듣고 시집을 왔겠냐며 펄쩍 뛰었다. '나 어뗘'를 피력한 지 4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지난 일을 되돌아본다. 살아오면서 산과 골이 없이 평탄한 길만 걸었겠느냐마는 결혼 전과 비교하면 한결 다복한 삶이었다. 서로가 등 돌리고 눕긴 했지만, 단 한 번도 각방을 쓰지도 않았고, 시장에서 고등어 한 손을 선뜻 집어 들진 못 했어도, 남들에게 돈 빌리러 가진 않았다. 모임에서 모두가 시어머니, 시동생 흉을 보는데 난 할 말이 없었다는 아내의 고백도 있었다. 어머니는 맏며느리 잘 들어와 형제 간 우애가 좋다는 말씀을 종종 하신다. 나는 고마운 마음을 내색하지 못하고 아내를 놀리느라 노처녀를 구제했다고 했지만, 실상 아내가 노총각인 나를 구제해준 셈이다. 이 모든 것이 아내의 덕분으로 새삼 고마운 마음으로, 하늘이 맺어준 백년가약 원앙새로 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리.
보리 수확이 끝난 비탈밭 산길을 오른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오르는 산길에 하얀 적삼 고름 바람에 여미며 달큰한 젖내에 젖어 있는 꽃, '어서 오너라', 찔레꽃이 산 마중을 나왔다. 길섶에 비켜서서 두 팔을 벌리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눈부시다. 어머니를 뵌 듯 웃음 지으며 인사를 하였다. 종다래끼에 보리 이삭을 주워 담으며 해찰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다독이듯 채근하듯 말씀하셨다. "이삭을 많이 주워야 참외를 많이 살 수 있는데…." 그럴 때면 시무룩한 느림보 대신 산등성이 너머 뻐꾸기가 뻐꾹 뻐꾹 울었고, 가랑잎을 스쳐 온 산들바람이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을 씻어 주었다. 밭고랑을 벗어나면 숲 가 어디쯤 산딸기가 익었을 것 같고, 또 어디쯤에는 붉은 보석처럼 산 앵두가 익어 나뭇잎 속에 숨어 있을 텐데… 자꾸만 눈길은 밭고랑을 지나 찔레꽃 핀 밭둑을 넘어갔다. 눈치를 채신 어머니는 "그래, 좀 쉬었다가 하거라…. 뱀 조심하고…." 찔레꽃 필 무렵이면 무논에 모내기도 시작되었다. 무논에 철퍽철퍽 흙물 튀기는 써레질 소리에 놀란 개구리가 사선으로 달아났다. 농부들의 거친 손끝에서 한 배미 한 배미마다 연초록 색감이 더하여질 때 어머니는 똬리 위에 광주리를 이고 잰걸음으로 걸었고 나는 앞장서 가며 길가에 핀 풀꽃을 보거나 막걸리 주전자 뚜껑을 열어 쿰쿰한 냄새를 맡아 보곤 하였다. 모내기 철은 농부들에게 가장 바쁜 시기이다. 이 시기에 배추흰나비같이 희고 흰 작은 나비 떼가 모여 앉아 있는 듯이 찔레꽃이 핀다. 어머니가 산나물을 뜯으러 가는 길 물가에도 피고, 약초를 찾아나선 아버지가 오르는 뒷산 언덕배기에도 찔레꽃이 피었다. 풋풋한 찔레 새순을 사근사근 씹으면 봄바람과 봄볕의 맛이 났다. 그런 찔레 순을 꺾으려면 적잖은 조심성과 주의가 필요했다. 조금만 눈길을 달리하거나 쉬이 보면 영락없이 긁히거나 찔리고 만다. 그럴 때면 가시 찔린 손가락을 바라보며 호아호아 더운 입김을 불어주거나 무명천을 찢어 싸매어 주던 어머니가 나타나실 것만 같았다. 찔레꽃은 은은한 향기가 자극적이지 않아 좋고 꽃잎 색이 수수하여 야단스럽지 않아 좋다. 아침에 보아도 좋고 저녁에 보아도 친근하다. 이웃집 누님처럼 소리 없이 미소 지어 좋고, 인심스러운 마을 아주머니들의 웃음 같아 좋고, 어머니의 향취가 나는 듯하여 좋다. 찔레는 가시가 자꾸만 찔러 '찔레'라는 이름이 생겼다는데, 원나라 시기 몽고에 공녀로 간 찔레가 고향에 두고 온 아버지와 동생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는 슬픈 전설이 있어, 또 한 번 아리게 마음을 찌른다. 찔레가 고향에 돌아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리움의 눈물을 떨구며 가족들을 찾아 헤맨 자리마다 하얗게 꽃이 피어나니 사람들이 일러 '찔레꽃'이라고 하였단다.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꽃, 찔레꽃의 꽃말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다. 해마다 오월이면, 장미꽃이 화단과 울담에서 짙은 향기로 손짓을 하면, 아, 나는 찔레꽃을 연상한다. 유년의 고향 산천에, 어머니 잠들어 계신 좌구산 기슭, 그리움이 겹겹이 쌓인 양지 녘 산길에 피어 있을 찔레꽃을 떠올리게 되고 보고 싶은 마음이 연등처럼 줄을 잇는다. 마음이 달아 산길에 접어들면 '어서 오너라', 마중하는 꽃, 올해도 변함없이 반겨줄 것이다. 어머니께는 예전처럼 눈이나 한번 마주 보고 웃으면 그뿐, 약주 한잔 사과 하나 앞에 놓고 절이나 하고 나면 그만이다. 한마디 정다운 말은 끝내 속으로 하고, '어머니, 사랑합니다' 입안에서 맴돌기만 하다 벙어리가 되고, 냉가슴 알 길 없는 무정한 산바람이 무심하기만 하다. 산길 되짚어 내려오는 길에, 따라나서 배웅하시는 흰 웃음이 희미한 그 길에, 그날은 따끔 따끔 빨갛게 피가 나고 싶은 꽃, 피가 나서 그리움의 알갱이 같은 빨간 열매가 맺혀도 좋은 꽃, 찔레꽃이 회한의 눈물이어도 꿈결처럼 피어나길 기다리는 오월, 사뭇 어머니가 그립기만 하다.
오늘 아침은 구름이 낮게 드리운 흐린 날씨다. 농사 가뭄이 걱정이라는데 다행히 내일은 비가 온다고 하니, 비를 부르는 아침바람이 반갑고 상쾌하다. 어머니의 아침운동을 위해 무심천을 함께 걷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벚꽃과 개나리꽃이 밤낮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봄을 물들게 하더니, 벌써 잎은 한여름으로 무성하다. 어머니는 걸음걸음마다 올해의 계절 모습을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개나리 꽃나무 아래 풀숲에 숨어 핀 이름 모를 조그만 하얀 꽃이 예쁘다며 가리킨다. 푸른 잡초 풀 속에서 청초하고 예쁘게 핀 흰 꽃이다. 다행히 아주 작은 꽃이 나보다도 어머니를 먼저 반긴 것이다. 어머니는 여전히 이름 모를 하얀 꽃을 바라보며 얼굴표정으로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계신다. 5월의 무심천에는 6∼70년이 훌쩍 넘은 고목의 벚꽃나무들이 나지막하게 푸른 숲 터널을 이뤘다. 봄 벚꽃 못지않게 초여름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구십을 넘긴 고령의 세월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어머니는 이곳에서 살면서 무심천과 함께해 살아오신 지도 벌써 60년이 되었다. 무심천 벚꽃나무 아래 서 있는 백발의 어머니 뒷모습을 보니, 어머니도 무심천의 예쁜 인생의 흰 꽃이다. 46년 전 4월 외아들인 내가 군인 입대로 논산훈련소로 떠나가던 날, 무심천 벚꽃 아래서 어머니와 작별했었다. 그때 45살의 어머니는 무심천 징검다리를 건너 사직동 터미널 쪽으로 가는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며 손을 흔드셨다. 세월과 함께 지금은 무심천도 어머니도 나도 많이 변했지만, "어서 가라"며 밀치는 손짓을 하시던 어머니의 젊었던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남다른 불행과 복잡한 가정사로 가족과 자식에 대한 집념과 애정이 강했다. 그 시절의 가난이야 누구나가 다 겪는 일이라지만, 어린 시절 어머니의 힘든 고통과 아픔에서도 지금까지 오직 우리 4남매에게 베푸신다. 어머님의 헌신적인 남다른 사랑이 있음을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는 9살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시집을 올 때까지 두 분의 계모 밑에서 살았단다. 어릴 때부터 학교도 제대로 못 가면서 정말 동화 속 이야기 같은 혹독한 계모살이를 했단다. 시집와서 시어머니와 맏동서의 층층시하 시집살이보다도 더 힘든 어린 시절이었다고 회상할 때면 우리는 숙연해진다. 그래서 어머니는 언제나 우리가 어릴 때부터 가족 사랑과 형제애를 유난히 강조해 오셨다. 아침 찬바람을 뒤에서 막아서며 꼭 잡은 어머니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소변을 보신 것이다. 어머니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항상 기저귀를 차고 계신다. 바람에 날린 흰 머리를 쓰다듬어 드리자 괜찮다는 듯이 내 손을 다시 꼭 잡으며 가자고 하신다. 어머니는 화단과 화분에 물을 준다. 내일 비가 온다고 해도 방금 막 물을 주었는데도 가끔씩 기억을 하지 못 하신다. 이제 5월이다. 5월은 녹음이 짙어가는 꽃의 달이며, 어버이날이 있는 가정의 달이다. 꽃을 좋아하는 어머님이시기에 이번 5월에 필 꽃을 어떤 색깔로 기쁘게 하여 드릴까 고민이 된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배롱나무(목백일홍)꽃을 좋아하셨다. 올해는 배롱나무를 2그루 새로 사다가 심었더니, 벌써 새순이 예쁘게 돋아났다. 새순을 보면서 즐거워하시는 어머니 모습에 우리 4남매는 어머니가 우리 가족의 '행복 꽃'이라고 하자, 어머니는 눈웃음을 지으시며, 우리 집안의 진정한 행복 꽃은 3명의 증손자들 재롱이라며 밝게 웃으신다. 올 어버이날에는 지난해보다도 더 예쁜 빨간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 드려야겠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증평 율리 등잔길을 찾았다. 물가로 난 길을 따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다. 늦가을이다. 저만치에 몇 마리 오리들이 자유로이 물 위를 떠다닌다. 잎사귀를 땅으로 돌려보낸 나무들은 앙상하다. 산을 내려오는 바람도 드문드문 끊겼다 이어진다. 바람결이 많이 순해졌다. 물 위에 만들어진 테크길을 걷다가 이제 막 땅 위로 올라서는데, 옆으로 어떤 조형물이 눈길에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한 구의 석불, 아니 돌부처가 덩그러니 서 있다. 거무튀튀한 돌부처는 키가 크고, 살집이 많은 모습이다. 맨발로 땅 위에 서 있는데, 도톰한 발등에 다섯 발가락이 또렷하다. 부처님이 걸친 옷은, 어깨에서부터 발끝까지 드리워져 있는데, 옆으로 그어진 옷 주름이 아래로 내려와서는 타원형을 그리고 있다. 가장 완연한 조각은 두 손이다. 왼손은 등을 보이며 땅을 향하여 늘어뜨렸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보이며 하늘을 향하고 있다. 머리에는 어떤 관(冠) 같은 것을 썼던 것처럼 보이는데, 조각이 어렴풋하다. 귀는 얼굴에 비례해 두껍고 길다. 한참 동안 돌부처를 바라본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얼굴 부위에 조각이 없다. 그냥 울퉁불퉁한 자연스런 돌이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떤 신비감마저 든다. 안내판 해설에는 이 불상은 관음보살이며, 고려 전기에 만들어지는 불상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석불이라는 것이다. 얼굴 모습이 없는 것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닳아 없어진 거란다. 나는 해설에 동의가 되지 않았다. 머리에 쓴 관도, 옷 주름도, 손과 발의 조각까지 오랜 세월 비바람에 닳은 모습이 역력하다. 그렇다면, 저 부처님 얼굴에서도 그윽한 눈과 오뚝한 콧등, 도톰한 입술이 어렴풋하나마 남아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말이 있다. 용(龍)을 그릴 때, 눈동자에 점을 찍으면서 용 그림이 완성된다는 말이다. 이 불상을 조성하면서 마지막으로 부처님 얼굴에 눈, 코, 입을 새겼을 터인데, 흔적이 없다. 얼굴을 새기다가 그만둔 어떤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니, 아예 얼굴을 새기지 않은 것인가· 저 멀리 엄숙한 모습으로 이곳을 굽어보고 있는 좌구산은 사연을 알고 있으리라. 물치 폭포에서 발원하여 보강천으로 흘러가는 저 냇물은 그 인연을 알고 있으리라. 아마도… 지금은 물에 잠긴 저 아래 마을에 착한 사내가 살았을 것이다. 동네 앞에 있는 커다란 돌을 보고, 그 속에 웃고 있는 부처를 보았을 것이다. 그는 스님도 아니요, 석수쟁이도 아니었다. 그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어지러웠고, 그가 사는 삶이 배고프고 고단하였다. 동네 어귀에 부처님을 조성하면, 부처님의 가호를 받는다, 그리 믿었을 게다. 사내는 큰 바윗돌을 다듬는다. 돌을 떼어내고, 자르고, 새겼다. 달이 가고, 철이 바뀌면서, 바위 속에서 부처님이 서서히 나타났다. 정(釘)이 목탁이었고, 바람 소리 새소리가 염불이 되었다. 이제 얼굴을 새겨야 하는 때다. 바로 그때. 그때에, 돌부처와 사내의 '현재'라는 시간이 정지된다. 순간은 영원하다는 말이 있다. 내 마음에, 의문과 추측이 난무한다. 갑자기 동네에 엠병이 돌아서 사내도 그렇고, 사람들이 깡그리 다 죽었나 보다. 아니, 오랑캐가 쳐들어와 사내가 전쟁터로 끌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였나 보다. 생각이 어지러워진다. 인류 최고의 그림이라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눈썹을 그리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했다는 미로의 비너스상은 두 팔이 없다. 불완전하지만, 관능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한다. 가만히 돌부처를 올려다본다. 새겼느니, 새기지 않았느니, 죽었느니 끌려갔느니 하는 미혹에 빠져서, 손에 못이 박히도록 부처를 새기던 어느 사내의 마음을 나는 읽지 못하고 있다. 뒤로 돌아가 돌부처의 뒷모습을 본다. 아무런 장식도 조각도 없다. 아늑하고 푸근한 느낌이 든다. 원래 저 돌부처는 십여 미터 저 아래 마을 미륵댕이에 서 있다가, 이곳에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두 번 자리를 옮겨서 지금의 자리에 세운 것이다. 그곳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만해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가 생각났다. 감히 흉내를 내보았다. 큰 귀로 듣고, 빈손을 보이시며, 맨발로 천년을 걸어오시는 당신은, 언제쯤 그 자비한 얼굴을 보이시렵니까?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10월 어느 날 정북동 토성에서 노을빛 아리랑이라는 공연이 열렸다. 소나무 몇 그루가 서있는 토성 언덕을 무대 삼아 휘황찬란한 조명은 배제하고 석양의 실경에서 펼쳐지는 실루엣 뮤지컬이다. 서산을 넘어가는 태양이 눈높이에서 마주치니 역광이 되어 사물이 검게 실루엣으로 보여 진다. 그러면 배우들의 몸동작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윤곽으로 보여 분명하고도 세밀하게 내 안으로 다가온다. 공연의 내용은 바람 앞에 놓인 등불처럼 위태로운 나라의 운명 그리고 그 속에서 피여 나는 청춘 남녀의 사랑과 전쟁으로 구성됐다. 결혼을 하자마자 국토를 침략하는 적군을 맞아 장렬히 산화하는 영원한 이별을 다룬 숭고한 이야기를 절절히 표현한다. 가상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지만 나의 아버지와 선조들이 겪었던 이야기들을 잔잔히 보여준다. 안타깝고 애절하고 가슴을 후벼 파듯 아프다. 해가 힘든 하루를 마무리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시간, 길게 아쉬움의 그림자를 늘이고 노을이 붉음을 토해낸다. 하늘과 토성은 물론 주위의 벌판과 하천, 배우와 관객 모두가 황금빛으로 물이 든다. 아침빛이 희망이라면 노을빛은 그리움이 바탕이 된 감성의 빛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따스한 어머니의 품속 같다. 어느 조명이 이처럼 부드럽고 웅장하고 멋질 수 있을까. 어느 누가 배우뿐 아니라 관객과 주위 모두를 아름다운 조명으로 비추면서 황홀한 공연을 만들 수 있으랴. 언젠가 토성의 공연처럼 자연환경에서 펼쳐진 멋진 가무극을 본적이 있다. 중국 리장에서 인상여강(印象麗江)이라는 공연이었는데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장이머우 작품이라고 했다. 5천500여 미터의 높은 옥룡설산을 배경으로 거대한 노천 무대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관람석에서 바라보니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파란하늘과 산 정상에 만년설의 하얀 눈, 암갈색 산허리와 진초록의 벌판 그리고 좁다랗고 먼 길을 재현한 붉은 무대가 조화를 이룬다. 배우는 500여명으로 현지 주민이며 그들의 전통의식과 차마고도에 대한 애환과 삶을 보여준다. 직업배우들이 아닌데도 연기가 일품이다. 공연 줄거리는 남자들이 운송과 장사를 하는 마방을 조직하여 차마고도를 왕래하며 차를 팔고 말을 사왔던 모습들이다. 그 과정에서 가파르고 험준한 산길과 시시각각 변하는 고산지대의 매서운 날씨와 위험하고도 혹독한 환경을 이겨낸 가슴 찡한 이야기다. 윈난성의 인상여강이나 정북동토성의 노을빛 아리랑은 줄거리가 삶의 대서사시다. 사람이 태어나 살아남기 위해 척박하고 가혹한 환경을 이겨내며 내 가정과 이웃을 위하여 삶을 내던지는 휴먼 드라마다. 어떤 지역, 어느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며 누구라도 이해되고 공감하는 우리들의 인생살이 이야기가 아니던가. 무대를 통해 바라본 그들의 삶이 한없이 존경스럽고 숭고하다. 자연의 경이로움 속에 살아가는 진솔한 인생사를 조명을 멀리하고 실경에서 예술로 바라보니 그 의미가 마음에 진하게 파고든다. 사람들은 누구나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삶을 원한다. 하지만 특별한 삶과 커다란 업적을 이루었던 위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평범하게 살아간다.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또 하나하나를 보면 같지는 않은 삶을 이어간다. 인생이 꼭 특별하거나 남보다 돋보여야만 하는 것일까. 어쩌면 다른 것 없이 살더라도 나름의 철학으로 내 삶을 사랑하고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노력하는 인생이라면 어떻게 바라볼까. 수없이 봐왔던 토성의 노을빛을 오늘도 바라보면서 문득 내 인생의 노을빛 아리랑을 생각해 본다.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시나리오에 따라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게 연극이라면 조명이 없고 시나리오가 없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도 어쩌면 연극이지 아닐까. 그러면 나의 이야기는 어떻게 써서 보여줘야 할까. 오늘도 어제 같은 노을이 삶의 여정처럼 붉게 물들며 아리랑 고개를 쉬엄쉬엄 넘어가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그 아리랑 고개를.
입춘이 지나 우수다.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며 맨 먼저 봄소식을 전한다는 매화를 화선지에 그려본다. 매향은 묵향과 어우러져 집안 가득 고요로 다가온다. . 발코니에는 매화나무 분재가 두 개가 있다. 정월이면 백 매화가 먼저 봄소식을 전한다. 봄의 전령사인 것이다. 한 달 동안을 그윽하고 청아한 향기가 집안 가득 고요로 찾아 든다. 백색의 매화꽃과 그 향이 봄소식을 다할 즈음 또 한그루의 매화나무가 꽃망울을 터트린다. 꽃은 백색인데 꽃받침은 붉은색이어서 또 다른 멋을 선사한다. 밤이 깊어 달빛과 별빛만이 매화나무를 비추면 매화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해묵은 줄기에 고고한 자태의 하얀 꽃은 은은히 빛을 발하는데 낮보다 더 화사할 뿐만 아니라 은밀하면서도 요염하다. 그래서 월매(月梅)라 부르는가 보다. 누구라도 이 청아함에 반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얀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리움이 애잔하게 밀려온다. 이년전 여름, 더위가 극심하였었다. 십수 년을 마음으로 위로를 주고받으며 함께 했던 매화는 나의 곁을 떠났다. 온전히 나의 잘못이었다. 화분이 조금 작아 큰 화분으로 분갈이 해야지 하며 미루어 오던 차에 일을 당하고 만 것이다. 몇 날 며칠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였으나 소용이 없다. 슬픔으로 보낸 백매화와 같은 매화를 지난해 봄 입양을 했다. 정이 들어서 일까, 떠나 보낸 매화가 여전히 눈에 삼삼하다 선비들은 사군자 중에서도 매화를 으뜸으로 여겼는데 특히 매화와 대나무를 이아(二雅)라 했으며 이아에 돌(石)을 합쳐 삼청(三淸)이라 하고 사군자에 연꽃을 더해 오우(五友)라 하여 항상 가까이 했다고 한다. '양화소록'의 저자 강희안은 화목9등 품론을 통해 매화를 1등품으로 분류하고 '매화는 높고 뛰어난 운치로 가히 취할만 하다' 고 극찬하였다. 매화의 꽃말은 '고결한 마음' 그리고 '인내'이다. 매화는 청렴하고 곧은 절개로 선비와 같은 기풍이 있다. 이른 봄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 하여 춘고초(春告草)라는 애칭을 얻었다. 퇴계 선생이 유언으로 "매화 나무에 물을 주어라" 라고 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매일생 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매화는 한평생 춥게 살아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는 상촌 선생의 시구(詩句)는 서예인이라면 한 번쯤은 써 보았을 것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30대에 금오산에 기거, 매화를 가꾸면서 시를 쓰며 참선을 했다고 전한다. 매월당(梅月堂)이란 호도 이때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달빛이 흐르는 밤에 은은히 풍기는 매화향을 맡으며 학문을 닦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매화를 얼마나 사랑하였으면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삼아 매처학자(梅妻鶴子)로 불렸다는 송나라 임포의 일화는 매화 사랑이 각별했음을 알 수 있다. 매화나무를 끔찍이도 사랑했던 조선시대의 화가 단원 김홍도의 화선(畵仙)다운 고결한 인품을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충청북도 연풍 현감 시절,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나무를 팔려고 하는데 김홍도는 그 매화가 썩 마음에 들었으나 돈이 없어 살 수가 없었다. 이때 마침 어떤 사람이 그림을 청하여 그 사례로 삼천량을 주자 김홍도는 이천량으로 매화를 사고 팔백 냥으로 술 여러 말을 사다가 친구들을 불러 매화를 감상하며 술을 마셨는데 그 술자리를 매화음(梅花飮)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이백 냥으로 쌀과 나무를 들였으나 겨우 하루 지낼 것 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매화를 얼마나 사랑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에서는 매화를 국화(國花)로 지정하고 있다. 눈 속에서도 핀다고 하여 설중매(雪中梅)라 하였다. 얼마나 희고 고우면 '눈이 꽃과 같고 꽃이 눈과 같다'고 하였을까, 자태를 잃지 않고 피어있는 의연한 모습에서 매화의 기개를 알 것 같다. 매화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고, 사군자인 매난국죽(梅蘭菊竹)중에서도 으뜸이다.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 정신의 표상이다. 추위에 잘 견디는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한폭의 그림에 담아서 세한삼우(歲寒三友)'송죽매'라고 하는데 나는 '매송죽'이라고 부르고 싶다. 오랜 세월 선비들과 함께해온 한국의 4대 매화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백양사의 '고불매', 오죽헌의 율곡매', 화엄사의 '들매'. 선암사의 '선암매'이다. 며칠 있으면 매화꽃이 피어 선비의 절개답게 고운 자태에 향기 또한 가득하리라. 매화나무의 꽃이 언제 피고 언제 지는 줄도 모르고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이지만, 한 번쯤은 청렴하고 곧은 절개가 있는 매화를 가까이하여 꽃이 피는 모습을 보며, 향기를 느끼고, 매화를 사랑하며 꽃말처럼 고결하게 살아가고 싶다.
연일 언론에서는 지구상의 큰 재난인 튀르키예 지진 소식이 뉴스를 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다. 진도 7.8이라는 강진으로 수많은 인명피해와 건물이 붕괴되고 재산상의 손실이 엄청나다. 또한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여, 극한의 상황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정부 차원에서 긴급재난구조대를 급파하여 인도주의에 따라서 인명 구조 활동에 동참하고 있으며, 적십자사는 물론 기업에서부터 일반시민들까지 튀르키예 국민들을 돕자는 운동들이 SNS 등을 통하여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일요일에 휴식을 하면서 아내에게 민간차원에서 튀르키예 이재민을 돕고 있는데, 같이 동참하자고 하니, 세계는 하나의 꽃이라면서 적극적인 마음으로 찬성을 한다. 필요한 구호 물품 중에서, 나와 아들의 입지 않고 있는 옷가지들을 정리하여 비닐 포장을 하고, 튼튼하게 생긴 절임배추를 담았던 박스에 점퍼, 셔츠, 바지 등의 옷들을 차곡차곡 담았다. 두 박스를 만들어서 테이핑 작업으로 박스를 포장 하였다. 비록 큰 것은 아닐지라도, 또한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작은 정성이라도 함께 보탠다는 심정으로,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이재민들에게 전달이 되어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위안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아내와 함께 의기투합하여 움직이니 금방 마무리가 되었다. 박스에 주소를 쓰려고 하니, 우체국에 가서 작성하여 붙이자고 한다. 나는 지정장소까지 선불 택배 발송하면 그만이지만, 이것을 모으고 분류하고 보관하고 현지까지 운반하기 위해서는, 또한 누군가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수고하고 봉사하는 그 손길들에 따뜻한 응원의 마음을 보태고 싶다. 사실 튀르키예라고 하면, 국가 이름이 아직 낯설다. 정식국가명은 "튀르키예공화국"이라고 하며, 그동안 터키(TURKEY)라는 영어식 이름으로 부르다가 얼마 전부터 튀르키예로 바꾸었다고한다. 수도는 앙카라이며 가장 큰 도시는 이스탄불이다. 튀르키예는 1950년 6월25일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유엔 16 개국과 함께 전투병과를 파병 하였다. 이때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튀르키예가 네 번째로 큰 규모이다. 또한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수백명의 전사자와 실종자가 발생하였는데, 참전국 중에서 두번째로 큰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이는 그만큼 용감하게 전투에 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2002년 월드컵때는 월드컵 4강전에서 3, 4위 결정전을 우리나라와 경기를 했다. 이때 우리나라 응원단에서 대형 튀르키예국기 퍼포먼스로 응원을 함께하면서 튀르키예 국민들 사이에서 형제국가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튀르키예인들은 스스로를 튀르크라고 부르는데, 튀르크는 한자가차(假借)로 쓰면 돌궐이라고 한다. 돌궐과 고구려는 동맹을 맺은 역사가 있다. 투르크계인 흉노와 한민족의 고조선이 긴밀한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근래에는 서울시와 앙카라시의 양국 수도끼리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2020년 6월에는 이스탄불 총영사관과 튀르키예한국대사관에서는 튀르키예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에게 마스크를 전달했다는 훈훈한 소식도 있었다.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위험에 처한 형제국가를 돕기위해, 튀르키예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목숨 바쳐 용감하게 싸운 고마운 마음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오늘의 우리가 처한 안보 현실은 완벽하게 튼튼한가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또한, 나비의 작은 날갯짓보다도 적을 수 있는 정성이지만, 어려움에 닥친 이재민들에게 힘이 되고 용기가 되기를 응원하는 휴일 오후이다.
오늘도 또 떠나간다. 벌써 몇 년째인지 2월이면 떠나보내기를 하고 있다. 어떤 이별이든 이별은 슬픈 일이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마치 내가 졸업하는 것처럼 늘 눈물을 쏟아냈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떠나는 친구들에게 새로운 출발을 축하해 주어야 하는데 언제나 눈물로 헤어졌다. 2월이 오고 있다. 40년 동안 보냈던 2월이 영화처럼 지나간다. 그날도 내일, 모레면 떠나보낼 친구들의 마지막을 정리하던 때였다. 일요일 아침 학교에 도착하여 교실에 있는 작은 서류 상자를 열었을 때 깜짝 놀랐다. 480명을 졸업시키려고 준비해 놓은 상장과 졸업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어제 퇴근하면서 분명히 여기에 넣어두었는데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깨끗했다. 내가 착각했나 하면서 교무실로 내려왔다. 사색이 된 얼굴로 교무실 캐비닛을 열었을 때도 아무것도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이럴 수가 없다. 가슴이 턱 막혀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새로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문제였다. 상장이야 밤을 새워 쓰면 되겠지만 직인도 찍어야 하고 절차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학년 주임께도 이야기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여기저기 찾아볼 곳은 모두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 새로 쓰는 수밖에 없다. 새로 쓰는 것도 문제는 많다. 인쇄소에 맡겨 따로 인쇄해 온 것이라 여분의 상장이 없다는 것이다. 전체 내용을 붓으로 쓰려면 밤을 새워도 안 될 일이니 걱정이 태산이다. 그냥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묘안도 대책도 없다. 난감하여 창문 너머 하늘만 보고 있었다. 드르륵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다. 돌아보니 우리 반 아이 둘이 들어선다. 두 녀석이 간식까지 싸 들고 선생님 혼자 근무하는데 심심할까봐 놀러 왔단다. 마음도 심란한데 크게 반갑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깔깔대는 아이들 옆에서 우거지상을 하고 억지로 태연한 척 영혼 없이 교육잡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때 A가 마치 무엇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선생님,무슨 걱정거리 있으세요? 도와드릴까요?"한다. "응, 뭐 없어진 것이 있어서…" 했더니 함께 찾아보자고 한다. 내가 넣어둔 곳은 분명 서류 상자 속이었기에 우선 교실 먼저 다 뒤졌지만 쓰다가 버린 몇 장의 상장 외에는 흔적도 없다. 밖에도 찾아보자고 하는 A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따갑고 빽빽한 향나무 밑도 살펴보고 학교의 후미지고 외진 곳은 모두 다 찾아보았다. 상장 비슷한 것도 없었다. 희망 없는 패잔병처럼 운동장을 지나오는데 2월의 찬바람이 사정없이 볼을 때린다. 꺼이꺼이 속울음을 울며 어찌해야 하는지 겁이 났다. 옆에 따라오던 아이들이 화장실도 찾아보자고 한다. 보기만 해도 역겨운 재래식 화장실을 한 칸 한 칸 문을 열고 속까지 들여다보며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지를 못했다. 화장실 정화조 속은 얼음이 얼어 넓은 썰매장 같아 냄새는 덜했지만 켜켜이 쌓인 분변들은 각자 다른 색깔 층으로 탑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학교를 뒤지고 다니던 친구들이 돌아갔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전달부와 다시 찾아보기로 했다. A가 처음 문을 열었던 화장실 그 칸을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문을 열었다. 분변이 탑처럼 쌓여 있는 사이로 지저분하고 더러워 구역질이 났지만 허리를 최대한 굽혀 자세히 속을 살펴보았다. 멀찍이 바람에 날린 듯한 깨끗한 종이가 마이산 탑사 같은 똥탑 사이로 여러 장이 보였다. 전달부가 다시 확인을 하더니 이내 화장실 뒤로 가서 사다리를 놓고 화장실 정화조 안으로 내려갔다. 생각한 대로 상장들이 그곳에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겨울이라 오물들이 꽁꽁 얼어 고스란히 걷어 가지고 올라왔다. 몇 장은 분변이 묻기도 했지만 대부분 깨끗하여 그대로 쓸 수가 있었다. 순간 팔과 다리에 힘이 쭉 빠지고 떨려 지탱하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 분변 더미에서 꺼낸 것을 꼭 안고 교무실로 왔다. 찬바람에 왜 그리도 교무실이 멀기만 하던지 한 장 한 장 확인하며 닦은 후 정말 못 쓰게 된 것만 새로 쓰기로 하고 정리를 했다. 어떤 범인이 든 범인은 꼭 사고 장소에 다시 나타난다는 설이 있지 않던가. 그날 담임 선생님 혼자 근무해서 심심하다고 놀아주러 왔던 A가 저지른 일이었다. 전혀 의심하지 않았는데 찾고 나서 생각해 보니 A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이 그랬다는 힌트였던 것이었다. 본인이 버렸던 그 장소까지 함께 확인했지만 찾지 못했으니 분명 졸업식은 하지 못할거라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돌아갔을 게다. 속으로 얼마나 통쾌했을까? 그 똑똑한 선생님, 무엇이든 다 해결해주던 선생님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도 있구나 속으로 조롱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정된 날 졸업식은 진행이 되고 난 또 울면서 보냈다. A는 본인이 졸업식 날 학업상을 받지 못하는 것을 알고 부모님이 실망할까봐 그런 짓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인생은 성적순이 아닌데, 지금도 점수의 노예로 살고 있는 젊은 청소년들이 많이 애처롭다. 인생은 점수가 아니라 내 안에 들어있는 생각과 그 생각에 따른 건강한 실천인데 나를 많이 좋아했던A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2월의 찬바람이 휭 지나는 거리 어디선가 졸업식 노래가 들려온다. 떠나는 이 계절이 되면 그때 그 순간이 많이 그립다.
살다가 보면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질 때가 있다. 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시구절이 생각난다. 혹독한 겨울인생을 살면서 소규모 프레스공장을 할 때의 일이었다. 거래처에서 1t 트럭에 금형을 싣고 공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거의 다 와 가는 지점인데 도로가 왼쪽으로 급커브를 이루고 있다. 맞은편에서는 검은색 RV차가 내리막길을 달려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위험한 상황임을 직감했다. 내리막길을 저렇게 빠른 속도로 달리면 급커브 길에서 정상적으로 우회전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이 들었다.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니 걱정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의 선택을 결정해야 한다. 우선은 내가 중앙선을 넘어 피하는 방법이다. 도로에서 1~2미터 정도의 낮은 논으로 뛰어드는 방법이다. 이 경우 내가 전적으로 피해를 당해야 할 일이다. 아니면 내가 그 자리에서 그냥 부딪히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내 몸과 차에 실린 금형이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지만, 중앙선을 넘지 않고 충격을 견디면 되는 것이다. 짧은 순간에 수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친다. 불과 몇 초의 시간 안에 나는 선택하고 결단해야 했다. 순간적으로 후자로 결심했다. 부딪치기로 결심 하자마자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동시에 이를 악물고 핸들을 꽉 잡고 온몸으로 버티었다. 이때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차량의 파편들이 튕기고 차 앞부분이 밀려들어 오며, 핸들과 의자 등받이 사이에 내 몸이 끼이는 상황이 되었다. 하늘이 노랬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잠시의 공황상태를 견디고 정신을 차려서 억지로 몸부림치듯이 차에서 빠져나왔다. 상대 차량은 내 차와 부딪힌 후 그대로 직진 방향으로 논을 향하여 십여 미터를 날았다. 다행으로 전복은 되지 않았다. 운전자인 듯한 남성이 차에서 내려서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도 나보고 괜찮으시냐고 걱정을 한다. 동승한 여성분은 많이 다친듯하다. 운전자는 논에서 도로로 나오자 누구에겐가 급하게 전화를 한다. 병원 이름을 말하며 빨리 가서 다친 여성분이 도착하면 2층으로 안내하라고 한다. 운전자 부인이 도착하기 전에 서로 만나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 같다. 부부가 아니고 연인 사이인지, 불륜관계인지 알 수 없지만 정신을 다른 데 써서 본인들은 물론 남에게까지 피해를 입힌 것이다. 때마침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에 의해 신고가 되고, 119와 경찰과 견인차가 출동하여 사고현장은 수습되고 있었다. 상대 차량의 탑승자들은 병원으로 실려 갔다. 나는 가슴에 피멍이 들고 타박상으로 전체적으로 불편한 정도이었다. 차량은 보험처리를 하고 별도의 치료절차 없이 추후에 약간의 위로금을 받고 사고처리는 마무리되었다. 운전할 때는 전방주시가 중요하다. 불필요한 행동보다는 자신의 안전운행에 집중해야 한다는 원칙을 크게 확인하였다. 과거나 현재도 중앙선은 물론 흰색 실선도 철저히 지키고자 노력한다. IMF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절박한 삶에서 입원치료도 하지 못하고 바로 일에 집중해야 했다. 대기업의 1차 협력업체에 세탁기 부품을 납품하는데 품질은 물론 납기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파도, 다쳐도 입원할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차에 실린 금형도 지키고 나도 살아남기 위해 정면으로 부딪치는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직 앞만 보고 가열차게 달리던 내 인생의 삶. 숲인지 늪인지도 모르고 빠져버린 연대보증이라는 늪에서 살아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던 지난 세월이 회상된다. 아파할 시간도 없이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했던 내 중년의 겨울로 남아 있다. 인생의 삶은 꿈을 안고 착하고 정직하게 꾸준히 달려야 한다.
야윈 겨울이 봄을 기다리듯 우리가 천년의 세월을 기다리는 세상이 있다. 그 환희로운 세상을 약속한 이는 누구일까. 도심을 가로지르는 물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면 무심천 언덕 위에 미륵도량 용화사가 있다. 용화사의 가람배치는 그대로가 자연이다. 전각은 둘인 듯 하나로 이어져 있고 공간은 분별과 대립 없이 두루 통하여 능선처럼 흐른다. 자연에 순응하며 살고자 했던 조상들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오랜 세월 절 마당을 지켜온 삼층석탑도 무언의 가르침을 전한다. 자신을 바로 보고, 마음을 바로 보라고. 마음이란 지혜를 가리키는 것. 부처님의 참모습은 고요한 마음이다. 암자에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가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져 메아리로 퍼지고 거기에 바람 소리마저 더하니 세상 근심이 잠시 사라진다. 용화사의 주불전은 삼불전이다. 그 중심에 미륵불을 모셨다. 네모진 얼굴에 그윽한 미소. 듬직하고 편안해 보이는 몸 위에서 매끄럽게 흘러내린 옷 주름. 가슴은 숨을 들이쉴 때처럼 자연스럽게 부풀어 올라 그 품이 더욱 넓어 보인다. 담백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고려시대 불상이다. 누가 이곳에 미륵불을 세웠을까. 당시 사람들에게 미륵신앙은 열심히 수행하면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현세에는 없는 이상세계. 삶이 힘들고 괴로울수록 내생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수많은 염원이 저 미륵불 속에 담겨있었을 터, 미륵을 기다리는 그 옛날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한 손에는 감로병을, 다른 한 손에는 약합을 들고 조용히 안심법문을 전하고 계신 약사여래 부처님.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그렇게 경책(輕責)하면서도 약사여래 부처님은 몸의 아픔, 마음의 아픔, 중생들의 모든 아픔을 치유해 주고자 오늘도 한결같이 미륵불 옆에 서 있다. 삼불전 옆 적묵당, 스님들이 수행하는 공간이다. 출가자의 바람은 비워도 비워지지 않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세상일 뒤로하고 고독하게 홀로 앉은 수행자는 흐르듯 열린 공간에서 비우고 채우는 일을 반복한다. 법구경에 '녹은 쇠에서 생기는데 녹이 점점 쇠를 먹는다.'는 말이 있다. 사람도 쇠와 같아서 마음이 그늘지면 심신도 서서히 녹슬고 만다.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 이것이 녹슬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유마힐 거사는 생멸이 둘이라 하지만 법은 본래 생도 없고 멸도 없는 것이라 했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도량에서 과거와 현재가 둘이 아니고, 자연과 문명이 둘이 아니며, 정과 동이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법문을 되새겨본다. 구름도 잠시 갈 길을 멈춘 듯 적막한 암자에 고요가 깃들고, 고독한 영혼을 달래는 하얀 연등만이 바람에 나부끼며 도량을 장엄한다. 바람이 흔들리는가. 연등이 흔들리는 것인가. 흔들리는 것은 그대의 마음뿐, 마음밖에 다른 것이 없다던 옛 선사의 가르침에도 중생의 눈에는 여전히 바람이 흔들리고 연등이 흔들린다. 중생이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한 것인지. 저 멀리, 우암산 자락을 병풍처럼 펼쳐놓고 스님이 붓을 들었다. 정갈하게 써 내려가는 글씨 하나하나에 수행자의 정신을 담는 동안 스님은 묵향삼매에 빠져들었다.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 한번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고, 백번 참으면 가정에 평화가 깃든다. 스님이 종종 불자들에게 전하는 생활의 가르침이다. 암자는 말한다. 생명을 다한 나무가 새 생명을 키워내듯, 우리네 인생도 아픔과 상처를 딛고 일어설 때 비로소 새로운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고. 우리가 몇 겁을 거듭하더라도 흔들림 없는 불심으로 구도행을 실천해야 갈 수 있는 미륵의 세상. 그 간절함이 바위를 쪼아 미륵불을 만들었다. 무심천 언덕 위에 작은 절도 지었다. 부처님 열반 후 오십육억 칠천만 년 후에 이 땅에 오신다고 했던 미륵의 약속. 이곳 용화사에서 오늘도 기다린다. 미륵이 말한 약속의 그 날을.
김군, 이름이 영식이었지? 우리가 처음 만난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군. 처음 김군을 만났을 때 충북대학교 국문과 2학년이라고 했었지. 내 장녀와 동갑이라고 하니 아버지뻘이라고 많이도 어려워했었지. 자그만한 체격에 뽀얀 피부를 지니고, 말 한마디라도 조심스럽게 하며, 점잖고 예의바른 김군이, 처음 인력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기억이 생생하구먼... 어떻게 알고 그 먼 사직동에서 가경동 여기까지 왔는지, 또한 무슨 사연이 있어서 이런 험한 곳까지 왔는지,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눴지. 그래, 아버지는 아직도 약주 많이 드시는가? 그때 자넨, 아버지 원망을 많이도 했었지. 무위도식하며 매일 폭음에 어머니를 괴롭히고, 구멍가게마다 외상값이 대추나무 연 걸리듯 해서, 동네 사람들 보기가 창피해 죽겠다고, 차라리 아버지가 눈앞에서 안 보였으면 좋겠다고 까지 하지 않았던가? 어머니는 공장에 계속 나가시는가? 내수에 있는 작은 공장 다니시는데, 야간 수당이 짭짤하다고 늦은 밤까지 근무를 해서 몸도 많이 쇠약해졌다고 했었지. 설상가상 월급이 세달이나 밀려서 방세도 못냈다고 걱정도 했었지. 형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는가? 대학 졸업후 공무원 시험에 삼 년 동안 열정을 쏟아부어도 결과는, 매번 식구들 한숨만 나오게 했고, 없는 살림에 염치도 없다고 푸념도 많이 했었지. 아무데나 취직해서 월세 방삯이라도 내면 생활이 한결 여유가 있었을 거라고... 조금 있으면 대학교 방학이 시작 되겠구먼. 이맘때면 자네 생각이 더 난다네. 방학 기간에, 다른 학생들은 알찬 계획을 세웠을텐데, 자넨 이른 새벽에 안전화를 신고 내게로 왔었지. 사직동에서 여기까지 시간반이나 걸리는 거리임에도 자넨 걸어 다녔지. 버스비라도 아낀다고 말이야. 여름방학 때 400만 원, 겨울방학 때 400만 원, 일년에 800만 원으로, 등록금 내고 나머진 용돈으로 일년을 버틴다고 했었지. 여유 있으면 가끔 형에게 용돈도 준다면서, 매사에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살았던 자네가, 새삼 자랑스럽게 느껴지고, 다른 학생들과 자꾸 비교가 되는군. 요즈음 자네 같은 학생들을 보기 힘들다네. 가끔 4~5명이 와서 의기양양하게 하루를 시작하지만, 저녁나절엔 기진맥진해져 만사가 귀찮은 듯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친다네. 김군, 자네 집안 사정 얘기할 땐, 나도 마음이 짠하더군. 어린 나이답지 않게, 닥친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세상일에 순응하려는 자네였지. 남들이 꿈나라에 있을 때 새벽달을 바라보고 별과 대화하며,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한 채, 터벅터벅 시계탑 고개를 넘으며서, 세상사 불공평에 대해서도 많은 원망을 했던 자네 아니던가.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목적도 목표도 없는, 자네 인생 자체가 거센 파도에 밀려나는 잔해 같기에... 자네는 매일매일 부딪치는 힘든 현실에, 부정적 시각보다 항상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며 생각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었지. 말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보여줬던 자네 아니던가· '어둠이 지나야 새벽이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내가도 몇 번씩 얘기해준 기억도 있구먼. 김군, 자네가 첫 일 나가서 힘들게 일하고 받은 일당을 몇 번씩 세어봤던 그 모습이 왜 이렇게 아른거리는지· 일머리를 모른다고 해서 고참들 사이에 끼워서 '쇠파리도 소꼬리에 붙어 천리를 간다'는 심정으로 다녔었지. 김군,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고 벽이 있으면 반드시 문이 있는 법일세. 난 항상 김군의 그 굳건한 의지를 믿네. 물론 지금 좋은 직장에, 사회의 한 분야에서 책임감 있게 중추적인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도 믿네. 김군, 대학시절 가정을 원망하며 힘들게 공부한 사연은, 좋은 추억으로 포장해 담아 보관하게나. 그것은 분명 자네의 인생에, 소중한 자산이 됐으리라 믿네. 김군, 지금쯤은 아버지 어머니 모두 건강하시고, 형의 일도 잘 풀렸을 거라 믿네.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해 보네. 부모님께 잘 해 드리게. 더 잘해드리고 싶어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또 기다려 주지도 않는다네. 돌아가시면 땅을 치고 백 번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네. 풍수지탄이란 말이 있잖는가· 언젠가는 우리도 만나겠지· 옛 추억을 떠올리며 소주 한잔할 수 있으려는지? 김군, 옛 추억이 그립고, 보고 싶은 심정으로 두서없이 몇 자 적어 봤네. 항상 건강하게 지내고, 모든 일을 낙천적으로 보면서 우리 앞길을 걸어 가보세. - 한때, 자네의 인생 멘토였던 사람이 씀 -
강릉 소나무 숲길을 오른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 쭉쭉 뻗은 금강송이 위용을 자랑한다. 사열대를 향하여 나열하고 있는 병사들처럼, 계곡을 향하여 위엄 있게 서서 우리를 반긴다. 뾰족뾰족 하늘을 향한 이파리는 햇살을 향해 마음껏 피어나고 있다. 마치 따스한 봄날, 거실 깊숙이 스며들어 펼쳐지는 햇살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처럼 피톤치드 입자들이 내 몸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금방 기운이 솟아오르는 듯하다. 쭉쭉 뻗은 금강송은 불규칙하게 휘어진 여느 소나무들과는 외모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 보통 소나무는 수피(樹皮)가 검고 거칠며 질서 없이 허름하지만, 금강송의 수피는 갑옷처럼 정교하며 단단하다. 그 모습이 늠름하기 까지 하다. 색깔도 붉은빛으로 우아하고 기품이 있다. 아마도 높고 험준한 태백산 준령의 정기를 받고 자라서 인가보다. 그 정기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 빛난다. 나무들 사이에 서서 그 향에 취하고 있다. 우러나오는 그 신선함이 대단하다. 그래서 쓰임도 국보급이다. 왕궁이나 사찰 건축에 이용되고, 나라에서 보호하는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나무가 있다면 금강송이 아닐까 싶다. 계곡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로 이루어져 그 사이로 투명하고 깨끗한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차가운 물이 닿는 바위들은 시린 몸을 웅크리고, 하얗게 질린 상태로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서있다. 계곡 중간 중간에 낙차가 큰 곳으로는 크고 작은 폭포가 자리하고 있어 청명하고 투명한 물이 흘러내린다. 계곡물 흐르는 소리는 어떤 유명한 교향악단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보다 더 청아하게 들려온다. 도시에서의 찌든 삶의 찌꺼기들을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맑은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씻겨주어 우리를 새롭게 한다. 소나무향기와 계곡물에서 우러나오는 투명한 공기를 가슴속 깊이 밀어 넣어 찌든 때를 씻어낸다. 내면의 깊은 곳에서 부터 시려오며 상쾌함이 온몸으로 퍼진다. 폭포수 아래 물길이 흐르는 곳에 누군가가 일부러 파놓은 듯 정교하게 만들어진 커다란 항아리처럼 움푹 파인 물웅덩이가 있다. 폭포수로 쏟아진 물이 내려오다 웅덩이로 빨려 들어가 한 바퀴 돌아 다시 아래로 쏜살같이 밀려 내려간다. 투명하고 깨끗한 물이 탐스러워 돌아나가는 물에 손을 담가본다. 예상대로 손이 에이듯 차다. '어딜 감히 때 묻은 손으로 더럽히려 하느냐' 하듯, 사춘기 소녀의 앙칼스럽게 토라지는 모습처럼 냉랭(冷冷)하다. 물웅덩이에는 둥근 돌이 물의 흐름에 따라 같이 돌고 있었다. 몇 만 년을 갈고 닦았는지 해변 모래밭에서나 볼 수 있는 자갈처럼 반들반들하다. 애초 물웅덩이로 처음 굴러들어 왔을 때는 모나고 각진 울퉁불퉁한 평범한 돌의 모습이었으리니. 수백 년 이든, 수만 년을 물길의 흐름에 따라 몸을 맡겨 웅덩이를 돌며, 모난 곳은 부딪쳐 깨지고 갈리고 하여 지금처럼 매초롬한 주먹돌로 다시 만들어졌으리. 웅덩이 역시 오래전에 볼품없는 평범한 바위에 우연히 웅덩이로 생겨나, 그 위로 폭포수가 흐른다. 어느 때인가 커다란 모난 돌이 장마 때 굴러들어와 웅덩이 안에 갇혀, 물살에 떠밀려 돌아가며 부딪치고 갈리고 깨지는 아픔을 견디고 깎기며 다듬어졌으리. 육감적인 여인의 둔부와 같이 매끈한 모습으로 변하여 큰 바위 아래에 수줍은 듯 숨어 항아리 모양이 되었으리라. 그 세월이 얼마인가. 살아있는 생명이었다면 부딪치고 깨지는 아픔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처음으로 모난 돌이 웅덩이로 굴러들어 왔을 때는 물길에 흘러 부딪치는 아픔 속에서 얼마나 서로를 원망했을까. 몇만 년을 그렇게 인고의 세월을 보냈으리니. 덕분에 날카롭던 돌도, 볼품없던 웅덩이도 어느 이름 있는 장인이 깎아놓은 것처럼 동그란 도자기 모습으로 환생하여, 항아리 속에 커다란 알을 품고 있는 듯하다. 아기자기한 장식품같이 변신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감까지 느끼게 한다. 물웅덩이 속으로 낮에는 금강송이 가득 차고, 밤이면 별들이 가득 넘쳐흐르리. 웅덩이 옆에 표주박 하나 갖다 놓아, 별들이 웅덩이 속에 가득 찰 때면 별을 한 바가지 퍼서 그리운 사람 품에 안겨주고 싶은 마음 넘쳐난다. 자연에서 존재하며 우리를 경이롭게 만드는 모든 작품들이 그렇게 인고의 세월없이 만들어진 것이 있을까.
내 어릴 적에는 먹을거리가 부족하여 나무순을 잘라 먹기도 하였다. 찔레나무 순이나 삘기라 하는 띠 풀이 자란 꽃대가 피기 전에 뽑아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 맛은 달짝지근하기도 하고 떨떠름하기도 하였다. 봄에 아버지가 소를 이용하여 쟁기로 논을 갈면 그 뒤를 졸졸 쫓아 다니며 올무를 주워 먹기도 하였다. 콩알 정도의 큰 알갱이로 껍질은 검은색을 띠지만 속은 흰색으로 단백질 덩어리였다. 이 순간 달짝지근한 그 맛이 생각나 침이 입안에 고인다. 농업사회 시대에는 단 한 평의 땅이라도 개간하여 먹을거리 생산을 위하여 논밭으로 이용되어 왔었다. 지금은 눈부신 경제 발전의 영향으로 맛있는 먹을거리가 외국으로부터 엄청나게 수입되고 있다. 우리나라 농업기술도 첨단 기술과 융합하여 맛좋고 보기 좋은 과일이나 야채를 많이 생산한다. 시장엘 가보면 먹을거리가 지천이다. 그러니 경쟁력이 떨어지는 땅은 묵어 쑥대밭으로 변하는 곳이 눈에 많이 뜨인다. 그런 와중에서도 일부 도시민들은 자투리땅을 일구어 채마밭을 만들어 손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재미를 맛보기도 한다. 이는 경제활동 시간은 줄고, 휴식이나 취미활동 등 자유로운 시간이 늘어나면서 농사의 기쁨을 맛보기 위한 활동이라 생각된다. 가족 간에 유대 강화를 위하여 주말 농장을 찾아 가족 단위로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직접 농사 체험도 하고 자기가 심어 저농약으로 키운 농산물로 한 끼의 반찬을 준비도 한다. 나도 텃밭을 가꾸어 보자는 마음을 정했다. 퇴비를 사다 뿌리고 주변 가축농장에서 소똥도 얻어다 뿌렸다. 때로는 주변의 썩은 낙엽도 긁어다 뿌렸다. 일체의 농약이나 제초제는 사용하지 않으니 토질은 날로 좋아지고 지렁이도 많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파헤친 십여 평 정도는 거름기 없이 두둑을 만들고 그 곳에는 쥐눈이 콩을 심었다. 콩은 거름기 없이 심어야 한다고 들었다. 콩과식물은 뿌리에 박테리아를 거느리고 산다. 잎에서 산소 동화작용으로 공기 중에 있는 질소를 모아 뿌리에 보내서, 콩이 자라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천연비료를 만드는 역할을 하고 땅을 기름지게 하기 때문이다. 콩은 싹을 잘 티우고 무럭무럭 자랐다. 콩은 가지치기를 많이 해야하기 때문에 순도 자주 잘라주었다. 너무 무성하다 싶을 정도로 컸다. 제법 콩 꽃도 많이 피었다. 여름내 비를 맞고 잘 자라 열매를 맺는 콩꼬투리가 더덕더덕 달렸다. 가을이 되어 콩꼬투리를 따서 까보았다. 어쩐 일인가· 콩알이 자라지 못하고 그냥 있거나 속은 벌레가 들어앉아 있었다. 농업인한테 물어보니 콩 꽃이 필 때 살충제를 뿌려 벌레가 꽃속에 알을 낳지 못하게 하여야 한단다. 살충제를 뿌리지 않았으니 알들이 콩꼬투리 안에서 부화되어 콩속의 수분을 빨아먹으니 콩알이 생기지도 못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농사도 사전 지식을 습득하여 때에 맞추어 작업을 해야 함을 알았다. 모든 것이 쉬운 일이 없다. 이렇게 첫 콩 농사는 실패하였다. 내년에는 심을 작물을 사전에 계획을 세우고 농사짓는 방법을 미리 숙지를 하여야 겠다. 작업할 시기를 기록해 두었다가 잊지 않고 실행을 해서 수확의 기쁨을 맛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