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마늘 캘 때 잠깐 와서 뽑아달라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허나, 일주일 넘도록 소식이 없기에 어머니 시골집으로 갔다. 우리 집은 대문이 없다. 차가 마당까지 거침없이 들어간다. 동네에 대문이 있는 집보다 없는 집이 더 많다. 창고문에도 시건 장치가 없고, 출타 중에도 방문을 잠그고 다니지 않는다. 그래도 여태껏 도난사고 한 건 없다. 우리 동네는 아직도 사람들이 인정이 많고, 평화로운 따사로움이 감돈다. 차 소리가 나면 방문을 열던 어머니인데, 아무 인기척이 없다. 들에 가셨나 적막하다. 주위를 보니, 이미 캐 놓으신 마늘이 건물 천장에, 한 접씩 묶어 횡렬로 걸어놓은 게 보인다. 어머니가 수족같이 여기는 똥구루마 손잡이에 뽀얀 흙먼지가 묻은 채, 덩그러니 서서 있다. 휴대폰을 행방을 추적하니 고추밭에 계셨다. 일이 거의 끝났다고 하신다. 비가 안 와서 큰일이라고 걱정을 하시더니, 결국 지하수를 퍼 올려 고랑에 물을 대시는 모양이다. 똥구루마를 그늘로 들여와 깨끗이 닦고 점검을 했다. 양 바퀴에 기름도 쳐주고 볼트를 조여 주었다. 어머님은 근 30여 년을 같이 손수레와 생활을 함께하셨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손수레를 똥구루마라고 부른다. 지금도 축사에서는 손수레로 두엄을 운반하기에, 그렇게 불리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손수레는 평생 똥을 묻힌 적도 없었는데, 축사의 똥구루마와 동급으로 호명되다보다. 먹물 좀 배운 사람들은 그를 보고 외발수레라고 부른다. 외발이라 하니까 장애성의 외발이 아니고, 독립된 완성품이다. 똥구루마와 수레가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똥'자가 들어가면, 왠지 지저분하고 품격에 비하성 발언이다. 그렇지만 어머니한테는 사랑을 받는 소중한 친구같은 물건이다. 어머니는 똥구루마와 함께한 지도 많은 세월이 흘렀다. 똥구루마도 나이가 들어서 몸 상태가 예전만 못하다고 레일이 녹슬고 있었다. 주인님이 젊어서부터, 일 욕심이 많은 탓에, 결국 농기계 수리점에서 용접 수술을 하여 간신히 고쳐쓰고 있다. 지금은 튼튼해져서 무거운 짐을 싣기는 하지만 각별히 조심을 한다. 비록 외발이지만, 쓰임새는 두발, 네발보다 훨씬 많다. 좁은 길, 또는 밭고랑에서도 아무 지장 없이 쏜살같이 다니고, 속도도 주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급히 출발도 할 줄 모르고, 유료가 들지 않아 걱정거리가 절대 없다. 동력이 아닌 사람의 근력에 따라 움직이기에 농사일에 참으로 편한 물건이다. 바퀴를 손질하고 있는 사이에 똥구루마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요즈음 들어, 주인님도 힘이 부치시는 거 같단다. 젊어서는 그의 등짝에 농자재를 잔뜩 싣고, 거뜬히 쏜살같이 다니셨는데, 이제는 비료 한 포대도 힘들어하신단다. 손잡이를 잡는 완력도 현저히 떨어지고 속도도 많이 느려지셨다. 운전 기술도 어눌해졌다고 속이 무척 상하다고 한다. 한 번은 비료 한 포대와 농자재를 잔뜩 싣고 비탈길을 올라가다가 힘이 모자라는 것 같아서, 보기에 너무 안타까워, 일부러 옆으로 쓰러져 물건을 나누어지게 했다고도 한다. 처음에, 철물점에서 주인님의 간택(?)을 받고 이 집의 구성원이 될 때다. 우리 주인님은 젊으 셨다. 일부종사의 심정으로, 주인님의 수족이 되어 명령을 따르고 복종하면서 생을 함께 마감하기로 일찌감치 작정했던 터라, 누구보다 주인님의 일상사를 잘 알고 있단다. 그 젊고 탱탱한 얼굴이 안쓰럽다. 세월에 못 이겨 얼굴에 팔자 주름과 굵게 패인 주인님의 인생 계급장을 보면, 말없이 가버린 지난날들이 서글프다. 붙잡을 수 없는 세월이 야속하고, 마음이 무척이도 아프다고 하며 추억을 들려준다. 젊었을 시절부터, 주인님은 자기를 많이도 이용했지만, 끔찍이도 아껴주셨다고도 한다. 멀리서 들판길을 부지런히 걸어오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일복 바지 옷에 장화를 신고, 급한 몸짓과 달리 속도를 내지 못하는 걸음걸이가 어둔하시다. 긴 세월, 이고 오신 삶의 무게가 이젠 힘이 부치시는 모양이다. 올해 88세 어머니. "어머니 이제 그만하세요" 자식들이 아무리 말려도 "나 일 못하게 하면, 죽으라고 하는 소리와 똑 가튼겨. 아직은 괜차너" 라고 하시는 어머니. 그러면서도 누우실 때는 "아이쿠 허리야…. 장부처럼 드세기만 하셨던 어머니께서 들리는 애잔한 소리다.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을 것 같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다는 건가. 나뭇가지가 많이 흔들리는데 바람이 없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콧등이 시큰해 진다.
모처럼 긴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다. 텃밭의 농작물들이 궁금했다. 고구마며 수박, 토마토, 참외, 가지, 오이, 옥수수 등이 단숨에 생기가 돈다. 비가 잠시 멈추고 햇빛이 채전(菜田)을 찿아드니 흙의 냄새, 비의 냄새, 풀의 냄새가 여름의 향기로 가득하다. 지하수가 없어 집에서 수도물을 배관하여 물통에 받았다가 하루나 이틀 뒤에 물을 주곤 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성장하지는 않고 특히 옥수수는 잎사귀가 배배 돌아갔다가 물을 주면 겨우 지탱하곤 했었는데 비가 오니 밤사이 몰라보게 훌쩍 커 버렸다. 퇴비를 주고 물을 매일 정성스레 주었어도 잘 크지 않던 작물들이 비를 맞으니 활기를 찿는다. 대자연의 섭리에 저절로 겸손해진다. 어디선가 벌떼의 소리가 적막을 깨고 들려온다. 자세히 보니 옥수수꽃에 꿀벌들이 수없이 매달려 꿀과 화분을 모으고 있다. 처음에는 꿀벌들이 너무 많아 분봉하는 줄 알았다. 그동안 무심해서일지 모르겠으나 벌이 아카시 꽃처럼 화려하지도 않은 옥수수 꽃에서 꿀을 채취하는 것은 처음 보는데 신기할 따름이다. 옥수수는 맨위에 멋진 수꽃을 피워내고 암꽃은 수염을 예쁘게 치장하고 수꽃의 꽃가루를 받아 수분 되어 열매가 서서히 영글어간다. 장마철인 지금은 아카시 꽃도 지고 밤꽃도 져서 꿀이 귀하니 옥수수꽃으로 모여 들었나 보다. 지난봄 가게 앞 화분에 앵두나무와 체리나무가 나란히 심어져 있는데 앵두나무는 꿀벌들이 많이 모이는 반면 체리나무는 가끔 한두 마리가 꽃에 앉았다가 바로 날아오르곤 한다. 꽃향기를 맡아보니 향기는 있다. 꽃은 수천개가 피었는데 열매는 겨우 네 개만 달렸다. 왜일까· 체리 전문 농장 이곳저곳에 알아보니 체리 나무에는 꿀이 없단다. 그러니 꿀벌이 접근을 하지 않았던 거였다. 다른 품종을 바로 옆에 심어 바람에 의해 수분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꿀벌이 우리 인류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봄에는 하우스 딸기밭에 꿀벌을 키워 암꽃과 수꽃이 수분되어야 맛있는 딸기를 생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종자식물은 수분과정을 거쳐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스스로는 수분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꿀벌이 대신해 준다. 하지만 지금은 과학이 발달해 배나무 과수원에서의 수분을 인력으로 했으나 지금은 드론으로 한다는 TV방송을 보았다. 그렇지만 꿀벌은 여전히 인류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는 중요한 존재이다. 근래에는 꿀벌의 수가 자꾸 줄어들어 농작물에 많은 영향을 준다고 우려하고 있다. 특히 밭에 뿌리는 제초제는 꿀벌들에게 치명적이라고 한다. 농업인들은 농사짓기 편리하기 위해서라지만 꿀벌은 목숨이 달린 문제이다. 미래를 위해서는 대책이 시급한 것 같다. 특히 개화기에 농약 사용을 자제하고 꿀벌에 미치는 영향들을 고려해서 농약 살포를 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농약 제조사들도 지금보다 다방면으로 연구 노력해 꿀벌에 최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농약을 제조 판매해야겠다. 꿀벌은 인류가 소비하는 농작물의 70-80% 가량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도 4년 안에 멸종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꿀벌이 사라져 벌통을 불태우는 안타까운 사연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무관심 해서는 안된다. 모든 인류의 큰 과제임에 틀림이 없으며, 지금 당장 절박한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꿀벌들이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관심을 갖고 꿀벌과 공생(共生)할 수 있는 방안을 찿기 위해 연구 노력하는 연구기관도 설립해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신이 내렸다는 선물 '꿀'을 모으는 꿀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가 먹고사는 농작물을 위함이니 꿀벌들의 미래를 위해 대비함이 당연히 시급하고 옳은 일이라 생각된다.
우리의 생에는 얼마나 많은 비가 내릴까. 비의 한복판에 있을 때는 마음마저 눅눅해진다. 상념이 많아지고 그리움이 깊어진다. 하지만 영원히 내리는 비는 없다. 비는 그치고 또다시 모든 것은 변하고 흐른다. 마음을 가득 채운 소란한 빗소리를 잠재우고 본래 존재하지 않음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지금 어느 길에 있을까. 높지만 위압적이지 않아 골짜기마다 정겨운 마을을 품은 산. 그 산기슭 끝자락에는 소나무군락을 병풍 삼아 아담하게 자리잡은 천년고찰 안심사가 있다. 어느 곳에도 인위적인 멋을 내지 않은 대웅전. 나무를 베어 기둥을 만든 것이 아니라 나무가 있던 자리에 누각이 올라앉은 것처럼 보인다. 지붕을 이고 있는 나무들도 길이가 제각각이다. 꾸미지 않아서 담대해 보이고 꾸미지 않아서 그대로인 소박한 갈색이 구룡산의 푸르름과 어우러져 더욱 장엄하고 화려하다. 자연을 잠시 빌리면서 미안해했을 그 옛날 목공의 선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하다. 대웅전 문이 빼꼼이 열려 있다. 문고리 하나에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이 문틈 사이로 드나든 것이 어찌 바람과 햇볕뿐이었으랴. 법음(法音)을 듣기 위해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마음의 빗장을 열기도 하고 마음의 고삐를 다잡기도 했을 것이다. 아직도 깨달음에서 멀기만 한 중생들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계시는 석가모니 부처님. 기도하는 고개를 들어 부처님을 올려다보니 그 위로 천년세월을 버틴 천정이 눈에 들어온다. 오랜 시간 속에 단청의 빛깔은 퇴색되고 낡았어도 보이는 그 너머를 상상하면 그곳이 바로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정토이리라. 방 한가운데 놓인 찻잔 앞에서 두 도반(道伴)이 차를 우리고 있다. 다선일여(茶禪一如), 차를 마시는 것이 곧 수행이라는 뜻이다. 고려시대 지눌스님도 "불법은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셨다. 차가 갖은 그 무엇이 깨달음과 통한다는 것인가. 수행이란 본래 마음을 바로 보려는 노력인데 차의 은은한 향기에 마음도 맑아진다는 뜻은 아닌지. 물의 인연과 차의 인연이 만나 차 맛을 내듯 스님들의 저 찻잔 속에는 깨달음을 갈망하는 기도의 마음과 정진의 마음이 함께 들어있으리라. 자연 그대로인 주춧돌 위에 고즈넉하게 올라앉은 영산전. 십육나한을 모시고 있다. 나한(羅漢)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제자들이다. 그 옛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고, 전쟁이 나면 백성들의 안녕을 빌었던 곳. 경지에 이른 사람들에게 으레 있을법한 엄숙함이나 진지한 표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딘가 엉뚱해 보이고, 천진한 아이 같기도 하고, 심술구져 보이기도 하다. 내 마음을 닮은 얼굴이자 내가 닮고 싶은 얼굴들이다. 앞만 보고 달려가기에도 벅찬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의 일상에 지친 내 모습을 다시금 돌아보는 시간. 고독한 수행자에게 나한이 묻는다. 힘드냐고. 머지않아 지나갈 거라고. 주저앉고 싶으냐고. 천천히 돌아가면 다른 길도 있을 거라고. 텅 빈 절 마당. 암자가 구름에 물드는가 싶더니 이내 비가 되어 내린다. 빗소리는 두런두런 적막한 암자에 세상 이야기를 털어놓고 처마 끝 풍경은 제소리를 멈추고 조용히 빗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깨달음의 길은 어디인가. 극락으로 가는 길은 어디인가. 오고 감이 없고 시작과 끝이 없는 근원의 세계에 정도의 길이 따로 있으랴. 바람에 구름 가듯 흘러간 세월 앞에는 답이 없지만, 그 무상(無相) 속에서 우리는 존재하고 또 존재하지 않는다. 크고 작은 생명들이 어울려 도량을 이루는 곳. 향기로운 다선일여가 꽃을 피우는 곳. 십육나한의 나지막한 웅성거림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게 되는 곳. 오늘만큼은 속세의 번뇌 내려놓고 눈 밝은 스님들과 이곳 안심사에서 마음껏 법담을 나누고 싶다.
아들 둘에 막내로 딸을 낳아 좋아서 자랑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막내딸이 어느새 대학 3학년이 됐다. 딸은 1991년 교육부 시책의 일환으로 일본 연수생으로 전국 각 대학생 공모에서 선발됐다. 딸을 배웅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대합실을 가득 메운 남녀 대학생들의 패기 넘치는 분위기에 사람 사는 맛이 그곳에 있는 것 같아 즐거웠다. 딸의 발랄하고 생생하면서도 청바지 차림의 수수한 모습과 밝은 얼굴에 구애됨이 없는 당당한 젊음을 부모로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했다. 딸을 배웅하고 귀가 중에 공항에서 보았던 하얀 모시 중의 적삼을 입고 딸과 대화하는 남학생 모습이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았다. 아내에게 말을 했다. 아내도 같은 생각이었다고 했다. 딸의 연수가 끝나고 한동안 시간이 흐른 뒤에 모르는 번호의 전화가 왔다. 낯선 청년의 목소리이었다. 부산에 산다며 신상을 간단히 밝혔다. 주인공은 모시 중의 적삼을 입은 학생이었다. 주저함도 없이 "딸과 결혼을 허락하여 달라"는 내용의 전화다. 싫지는 않았지만 웬지 망설여졌다. 그래도 자신만만한 부산 사나이 용기가 가상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딸의 의견을 듣고 신랑감 가정의 근황을 알아보려고 아내와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부산역에서 신랑 될 사람에 안내를 받았다. 부산의 산중턱 아담한 건물에 시할아버지 시할머니와 건장하신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함께 기거하신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아내는 딸에게 고생하려 시집을 가느냐고 공부나 더하라고 말렸다. 나와 함께 살아오며 대식구 생활의 힘듦을 잘 알기에 걱정이 많았다. 딸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때 가야 한다"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귀가해서 딸에게 평소 아버지가 말했듯이 "시집가서 어른 모시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 잘 산다"라고 타이르고 층층시하 종가 맏며느리로 시집 보냄을 아쉬움으로 남기고 결혼 준비를 했다. 양가가 오고 가는 예물은 마음으로 주고받기로 하고, 검소한 결혼식을 올렸다. 사위가 청주에서 직장을 갖고 생활하는 동안은 외손자 둘이 유치원 다닐 무렵까지는 한 동리에 살았다. 사위가 부산으로 발령나게 돼 부산 시집으로 이사를 했다. 딸은 부산에서 맏며느리 역할로 90세의 시할아버지 모시는데 어려움 없이 지낸다는 전화를 친정엄마인 아내에게 가볍게 전해왔다. 기력이 없고 변비로 고생하는 시할아버지의 변을 손가락으로 파낸다 했다. 굳은 변을 파낸 후 시원해 하시는 모습을 보면 불편한 마음보다 편안하다고 했다. 딸의 효행은 고마웠으나 어려움을 보이지 않으려는 딸이 가엽게 생각돼 마음이 쓰라려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시할아버지 대·소변을 받아 내고 목욕을 정성들여 한다는 밝은 전화 목소리 너머로 딸의 해맑은 얼굴을 보는 것 같았고, 또한 넉넉함이 묻어나 듣기에 부담은 줄었으나 가슴 한편 아려옴은 어쩔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시할아버지의 치매 정도가 심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민망했고, 역겨운 냄새가 코를 들고 숨 쉴 수 없어도 며느리가 담담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지켜본 시아버지는 미안해 하셨단다. 그 이후부터는 시중을 못 들게 하고 시아버지께서 직접 모시었단다. 거동이 불편한 시할아버지가 96세에 돌아가시기까지 시부모님께서 돌보시는 일을 같이 옆에서 거든 것뿐이라고 말하는 딸. 철부지라고 생각하고 걱정해왔으나 어려움을 극복하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시집살이 잘 견디어 주어서 고맙기도 하고 가슴이 아리기도 해 눈물이 났다. 아내가 시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조문 갔을 때다. 딸의 막내 시아버지는 손자며느리 잘 두게 해 고맙다는 인사로 아내에게 큰 절을 해 황송하게 받았다고 하였다. 평소 두 아들과 딸에게 "불우한 이웃을 보면 측은지심을 잊지 않고 이웃들을 잘 보살펴야 한다"고 늘 말을 해왔었다. 막내면서 외동딸로 말썽 한번 없이 잘 성장해주고 시집을 가서도 시할아버지를 극진히 보살펴드려 시댁에서 귀여움을 받고 사니 부모 된 도리로서 마음이 가볍다. 늘 건강하게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도리를 잘 지키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부모된 마음이다.
고무줄을 팽팽히 잡아당긴 듯한 긴장감이 요 며칠 새 떠나지 않는다. 이틀 간격으로 두 아이들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전화 때문이다. 언어 특수 재능아로 선발됐다는 큰애의 소식은 마음이 환해지는 기쁨을 주었지만, 둘째 때문에 받은 전화는 상담을 요하는 것이었다. 반장을 하면서 아이들이 무서워하고 지적사항도 고쳐지지 않는데다 학습도 부진하다는 것이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과잉 행동장애나 충동 장애로까지 염두에 두고 계신 듯했다. 두 아이를 키우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은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럴 때면 어김없이 "너 닮은 자식 낳아서 길러봐라"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가슴을 후려친다. 그리고는 등줄기 한 대 오지게 맞은 듯 나도 모르게 손이 등 뒤로 간다. 부지깽이로 호되게 맞았던 일이 생긴 건 중학교 입학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면 소재지에 있는 학교는 속리산 관광지에 사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차비를 아끼려고 시오리 길을 걷거나 자전거로 통학을 하는 우리와는 씀씀이가 너무 달랐다. 그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늘 돈이 필요했고 가난하고 농사일이 많은 집이 싫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술 취해 들어오신 아버지가 송아지 판 돈을 안방 농 서랍 속에 넣는 것을 보았다. 침을 삼키며 지나치던 학교 앞의 간식거리와 친구들 앞에서 기를 펼 생각에 기어코 종이돈 한 장을 빼 들고 말았다. 며칠을 써도 남았던 돈이 발각 났는데, 남동생에게 인심 쓰느라 마을 어귀 구판장에서 주점부리를 몇 번 사주었더니 끝내 고자질을 했던 것이다. 내심 아버지의 술값 탓이라 여기셨던 어머니는 부엌 한구석에 세워져 있던 부지깽이로 내 등을 사정없이 치기 시작했다. 나는 무조건 뒷산으로 도망가 금잔디 깔린 낮은 산소에 엎드려 울었다. 처음엔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아서 밉고, 가난하고 농사일이 많은 집이 싫어서, 나중엔 모질게 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아픈 마음 때문에 다시금 쪼그리고 앉아서 울었다. 산소에 내려앉은 저녁 안개가 무서워 슬금슬금 내려와 부엌 뒷문을 여니 아궁이 불 때문인지 발개진 어머니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때리면 맞으리라는 생각으로 다가 앉으니 부지깽이 든 소맷귀가 젖어 있었다. 그동안 농사일에 치이며 4남매를 키우고 살아오면서 얼마나 적시고 말렸을까. 그을음 낀 까만 아궁이 불길 속에 부지깽이 휘둘러 긴 한숨을 불꽃처럼 날려 보내기도 하고 흥얼대는 노랫가락에 탁탁 치며 장단 맞춤은 힘을 얻는 신앙 같은 것이었나 보다. 쭈뼛거리고 있자니 "너 같은 자식 낳아서 길러봐라" 하는 어머니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부지깽이 불붙었다. 물에 담가야겠다"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부엌 한쪽에 꼿꼿이 세워져 있던 끝이 까만 부지깽이가 단순하게 아궁이 속 불길만 다독였던 것이 아님을 자식을 키우며 알아 간다. 작은 아이가 학교에서 올 때가 됐는데 시간이 왜 이리 더디 가는지 부지깽이라도 있으면 어머니처럼 마당에 깔린 멍석을 턱턱 두들기거나, 담장 위에 앉은 닭이라도 쫓아내고 싶은 심정이다. 적극적이고 호기심 많은 아이로 자라는 것이 내심 다행이다 싶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병명을 붙인다. 집중력 강화제라는 치료제가 아이들을 그리 보고 있는 어른들에게 필요한 약은 아닐는지…. 살아가다 보면 마음의 집중을 하지 못해 상처받는 일이 다반사다. 기다리는 일도 집중을 요하는 일이요. 타인이 마음을 헤아리는 일도 그러하고 뜻을 이루고자 할 때도 필요하다. 어쩌다 한번 휘두르던 어머니의 부지깽이가 그 약이 아니었나 싶다. 열 손가락 깨물어 더 아픈 손가락은 사랑과 관심이 좀 더 필요한 자식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어머니가 부엌 한쪽에 세워두신 부지깽이처럼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아이를 기다려 주리라.
해마다 나이테가 생겨나 나무의 나이를 가늠할 수 있듯이 어느덧 팔순을 몇해 앞두고 있다. 지나온 세월에 내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한 가족이 있다. 자식이자, 아내로 세 자녀의 엄마로 살아온 지난 시간이 힘들고 고단했지만 흐뭇하고 보람도 있었다. 내 삶의 역사를 같이 써내려온 가족이 있었기에 그들이 없는 내 인생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여러 가지 호칭과 직분으로 살아왔지만, 그중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세월이 제일 소중 나날로 매우 힘든 시간이기도 하였다. 어느덧 자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부모의 숙제를 끝낸 후련함도 잠시였다.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삶의 역경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자식들의 미숙한 판단으로 긴 세월 뼈아픈 고통을 안고 살아가면서 인내하며 자성의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나에게 닥친 시련을 받아드려 평정심을 얻기까지 참으로 힘든 시간을 버텨낸 듯하다. 꽃길만 걸으며 행복하길 기도하였다. 자식이 긴 세월을 자책하며 괴로움을 견디며 살아갈 때 내 삶도 흔들리고 무너졌다. 실타래 같이 얽혀버린 자녀의 인생을 바라보는 어미의 심정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고난은 자식에게 닥친 시련이었다. 자녀의 결혼을 통해 새 가족을 맞이하는 과정에는 크나큰 축복도 있지만 숨은 갈등도 많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남녀가 융합하여 다른 생활방식에 적응하는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였다. 각기 다른 매력에 끌려서 사랑하고 적응해가는 과정이 결혼생활인 듯하다. 인생의 결합은 두 나무가 자라면서 하나로 합쳐지는 연리(連理)처럼 서로 이어지는 연리지(連理枝)와 같다.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결혼생활이 연리지처럼 한 몸을 이루듯 가정을 이루었다.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며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감이 결혼이다. 진정한 가족이 되는 과정에서 부모, 자식, 배우자 등 서로에게 주는 상처가 아물고 회복되기까지는 길고 긴 세월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부부란 진정성 있게 다가가고 마음을 나누는 노력,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인내함이다. 닫힌 마음이 열리고 상처가 아물려면 시간이 흘러야 한다. 묵묵히 서로가 노력하면서 기다리고 기다릴 때 마음이 서서히 움직인다. 인격적인 성숙이란 시련의 아픔을 경험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면서 깨닫게 된다. 상대방의 아픔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되고, 이해하면서 배려함이 부부다. 인연은 선택한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회피하지 않고 해결해 나가려는 노력과 경험들이 쌓여 성숙함이 부끄럽지 않음이 부부의 삶이다. 산업과 과학의 발전 속에 빠르게 적응하고 살아가야 하는 게 현재의 세상이다. 정작 눈부신 성장과 발전 뒤에는 빠른 실적주의 성과주의에 빠져 남들보다 늦 되거나 느려지면 무능하다는 잘못된 인식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것 같다.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 인생은 심신(心身)이 망가지고 난 후에 멈춘다. 나의 자녀들아! 미리 멈추는 연습을 하길 바란다. 멈추면 지나치고 못 봤던 것을 보게 된다. 좀 더 느리게 천천히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나를 돌아보게 되면 알게 된다. 물질적인 것보다 마음의 여유와 평안을 찾아라. 삶이란,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소박함에서 행복하단다. 요즘 사회는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워라벨, 일과 생활의 균형을 중요시 하는 삶이 다가온다.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없으면 장애물에 부딪쳐 사고를 내듯이 인생의 고난은 삶의 브레이크이다. 멈춰서 삶을 돌아보라는 경고다. 느리게 가면서 인생의 소중한 것을 잃지 않게 에너지를 충전해야 한다. 나무 의사 우종영 저자는 "겨울이 되면 가진 걸 모두 버리고 앙상한 알몸으로 견디는 그 초연함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매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 한결같음에서, 평생 같은 자리에서 살아야 하는 애꿎은 숙명을 받아드리는 그 의연함에서 삶의 가치를 배운다고" 하였다. 부부의 삶이란, 한결같은 의연한 나무처럼 힘들고 아프기도 하겠지만 서로가 항상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기 바란다. 푸른 오월의 자연처럼 그렇게...
3년째 계속되는 코로나 역병사태를 바라보며 인생의 삶을 관조(觀照)한다. 인간의 삶은 늘 시련과 함께 하는 과정이다. 코로나 사태도 우리 인생길에 함께 가는 시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평탄한 인생의 삶에는 걸작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은 결핍, 그리고 고난과 역경을 극복할 때 성공을 이루어 낼 수 있다. 사람 살아가는 세상에는 언제나 시련이 있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드리고 대처하느냐가 문제다. 지혜로운 사람은 주어진 시련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실패의 구실로 삼을 따름이다. 유대인들의 정신적 기둥인 탈무드에 나오는 격언이 있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 말에 귀를 기울여라. 지혜가 그들에게서 나올 것이다." 유대인들은 전 세계 인구의 0.25%에 불과한데 노벨상 수상자는 3분의1을 차지할 만큼 뛰어난 인물을 배출하고 있다. 유대인의 성공 비결중 하나가 부족, 결핍(Lack)에 있다. 유대인들은 부족함을 최고의 선물로 삼아 두뇌 개발을 위한 교육에 집중하여 오늘의 성공을 이루었다. '부족함'은 어떤 이에게는 실패의 핑계가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성공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부족함 때문에 실패했다'는 표현을 쓸 것인지, '부족함 때문에 성공했다'는 표현을 쓰게 될 것인지는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 있다. 2천400여 년 전 동양의 성현 맹자께서는 "어려운 상황은 사람을 분발하게 만들지만, 안락한 사람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하셨다.(生于憂患 死于安樂) 맹자의 가르침은 인간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등 동물 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응되는 것 같다.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이 논에 미꾸라지를 키워 왔는데 몇 번 실패를 했다. 미꾸라지 키우는 논에 메기를 함께 넣어 사육 했더니 미꾸라지들이 활기를 되찾고 잘 자랐다는 것이다. 천적이 있는 동물은 스스로 각성해 점점 강해지고 웬만한 공격은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지는 걸 알 수 있다. '생우우환' 즉, 우환을 극복하기 위해 분발 하면 잘 살게 된다는 의미다. 프랑스의 '삶은 개구리 요리' 이야기도 시사(示唆)하는 게 있다. 살아있는 개구리 요리는 손님들 보는 앞에서 만든다고 한다. 이때 물이 너무 뜨거우면 개구리가 펄쩍 튀어 나간다. 그러나 개구리가 가장 좋아하는 온도의 물에 넣어 놓고 매우 약한 불로 물을 점점 데운다. 개구리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가 질식해서 죽는다. '사우안락' 즉, 안락한 환경에 처하면 무기력해져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죽음에 이른다는 뜻이다. 인간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는 동족상잔의 전쟁 끝에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경제발전과 산업화, 정치적 민주화를 가장 빠른 기간에 이루어 전 세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었다. '생우우환'의 정신 자세로 살아온 결과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사회상은 큰 시련의 소용들이에 빠지고 있는 것 같다. 힘든 일 싫어하고, 노력은 적게 하면서 보수는 많이 받으려 한다. 이기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 사회에는 무상복지, 포퓰리즘이 만연되고 근로정신이 혼미해지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주어진 시련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실패의 핑계거리'로 삼는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나아지지 않는 코로나 사정이 많이 걱정스럽다. 단계적 일상 회복으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모두 더 조심하며 살아야겠다. 그칠 줄 모르는 코로나 변이를 보며, 이 어려운 상황이 우리 모두에게 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야겠다.
"아이구 콩나물 아주머니가 여기는 웬일이세요?" 어머니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 말이다. 여고 때 일주일 동안 학교에서 합숙을 하며 예절교육을 받았다. 토요일엔 어머니를 모셔다 다과상을 대접해 드리며 배운 것을 실습으로 보여드리는 날이었다. 그날 이웃에 살고 있던 친구 어머니가 하신 말이었다. 콩나물이나 팔고 시장에서 열무나 파는 아주머니가 어쩐 일이냐고 의아해서 물었을 게다. 재래시장하면 제일 먼저 수많은 아픔을 가슴에 간직하고 사셨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지금은 시장 거리만 남아있는 남주동 시장, 그곳에서 좌판도 없이 열무 몇 단을 길거리에 펼쳐놓고 파셨던 어머니. 집에서는 옹기 시루에 콩나물을 직접 길러서 파셨고, 새벽에는 밤새 불린 콩을 맷돌에 갈아 두부를 만들어 팔았다. 오래전 어느 해 빚잔치를 하고 청주로 이사를 나온 후 일곱 식구의 생계를 꾸리신 것은 어머니였다. 열 명이 넘는 학생들 하숙을 치르면서도 밤을 새워 힘들게 두부를 만들고 콩나물을 길러 팔았다.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들어간 노랗고 통통한 콩나물과 야들야들한 두부는 아는 사람만 사서 먹는 안전하고 맛있는 먹을거리라 금방 팔려나갔다. 그것만으로는 하숙생을 위한 반찬값도 부족한 터라 봄부터 가을까지는 앞마당에서 열무를 길러 틈틈이 시장으로 들고 나가셨다.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살기만 했던 어머니가 시장 바닥에서 열무를 판다는 것은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일이었다. 내일 아침이면 학교에 가면서 필요한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 자식들이 있었기에 용기를 냈고 창피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쉽게 빨리 팔고 돌아오려고 열무 단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크게 만들라치면 아버지는 손해 본다고 화를 내셨단다. 아버지는 열무를 팔기는커녕 시장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분이셨다. 할 수 없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게 열무 단을 만들어 이고 나가신 곳이 남주동 시장 채소전이었다. 얼른 팔고 돌아와야, 학생들과 가족을 위해 저녁을 할텐데 때론 늦게까지 팔리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엔 늘 저녁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대는 시장으로 해서 왔다. 어머니가 그때까지 시장 어귀에 열무 몇 단을 놓고 계실 것 같아서였다. 낮이 점점 길어지는 어느 봄날 흙 묻은 고무 다라를 머리에 이고 걸음을 재촉하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도 왜소한 체구에 흰 수건을 머리에 쓴 어머니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하얀 교복에 갈래 머리를 땋은 나는 쫓아가서 어머니 머리 위에 얹힌 다라를 번쩍 들어 이고 책가방을 한 손에 들고 앞서 갔다. 어머니는 어서 내려놓으라고 뒤따라오며 만류하셨다. 추래한 옷과 울퉁불퉁한 손마디에 흙 묻은 어머니가 부끄럽지 않았다. 교복이 더러워진다고 내려놓으라고 핑계를 대며 쫓아오시던 어머니 목소리가 아직도 맴돌아 가슴이 찡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할머니를 도와드리는 착한 학생으로만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길에서 만나면 모른척하라고 당부를 하셨다. 행여 딸이 친구들에게 창피 당할까봐 어머니가 먼저 모른척하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단다. 어머니가 그립고 보고 싶어 옛날 남주동 시장거리로 나갔다. 거리는 변함없이 그대로 있으나 옛날 시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더욱 열무 단을 늘어놓고 부끄럽게 앉아계신 내 어머니의 모습도 찾을 수가 없었다. 우두커니 서 있으려니 얼굴만 차례차례 파노라마 되어 허공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때의 곤궁했던 삶은 보이지 않고 그저 하얀 추억일 뿐이었다. "골라 골라 두 장에 만 원 두 장에 만 원" 귀에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드니 육거리시장이었다. 언제나 삶의 진수를 볼 수 있는 곳이지만 시장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할머니들이 자리를 편 난전으로 갔다. 그곳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콩나물도 한 줌 사고 향이 진한 냉이도 샀다. 애써 캐온 냉이를 덤으로 더 주신단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 선뜻 받아오질 못했다. 어머니가 시장에 계셨던 탓에 지금까지 시장에서 한 번도 깎아 달라고 조금만 더 달라고 해 본 적이 없다. 늘 주는 대로 비싸면 비싼 대로 샀다. 고생하시던 내 어머니 생각에 서러워서다. 재래시장 거리에 앉아계시던 그때의 내 어머니가 눈물겹게 보고 싶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점점 위축돼가는 요즈음 세상이다. 고귀하지만 한편으로는 난감하기도 한 것이 '밥벌이'라는 아버지의 역할이다. 가족을 위한 생활 전선에서 분투하는 아버지들은 점차 가족 밖 타인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메마르고 비정한 세상에서 아내에게, 또 자식들 에게도 낯설고 어색한 존재가 된 아버지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정치 계절이 되니 정치하는 사람들이 또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대통령 후보라는 한 정치인이 '자식은 남' 이라는 발언을 해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본인의 정치에 지장이 있다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아들을 남이라고 궁색한 변명을 한다.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진정한 가족관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이다. 인간사회의 기본인 가족관계를 왜곡하는 정치인을 보며, 얼마 전 읽었던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나는 아버지입니다'(딕 호이트, 던 예거 공저) 라는 책명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 전역을 눈물바다로 만든 아버지 '딕 호이트'와 아들 '릭 호이트'의 이야기다. 아들은 목에 탯줄이 감긴 채 태어나 뇌성마비와 경련성 정신마비가 됐다. 의사는 아이를 포기하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수년의 세월이 흘러 아들은 컴퓨터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게 됐다. 아들 '릭 호이트' 바람은 단순했다. "달리고 싶어요!" 그날부터 아버지는 아들의 휠체어를 밀며 달리기 시작했다. 아들이 15세가 되 던 해, 그들 부자는 처음으로 8 킬로미터 달리기 대회에 나가 뒤로부터 2등을 했다. 하지만 경기 후 아들이 말했다. "오늘 처음으로 내 몸의 장애가 사라진 것 같았어요" 아버지와 자식 부자는 서로를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들의 도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라톤은 물론 철인 3종경기에도 참가했다. 사람들은 미친 짓 이라며 말렸지만 이들은 마침내 철인 3종경 기를 완주하고 '철인'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도 받았다. 그 후로도 이들 부자의 도전은 계속됐다. 마라톤 64회, 단축 철인3종 경기 206회, 보스턴 마라톤 24회 연속 완주의 대기록을 세웠다. 마라톤 최고 기록은 2시간 40분 47초, 정상인도 내기 힘든 엄청난 기록이었다. 또한 달리기와 자전거로 6000 킬로미터에 이르는 미국 대륙을 횡단도 했다. 대기록을 이루고난 후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이에 아버지는 말했다. "네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하지 않았다" 장애를 가진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아버지. 100만 킬로미터를 달리며 아버지라는 존재를 새롭게 일깨운 '딕 호이트' 에게 세상은 보이지 않는 명예로운 훈장을 수여했다. 그 훈장의 이름은 '기적의 아버지', '최고의 아버지' 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딕 호이트와 릭 호이트 부자는 달리기로 '팀 호이트' 가 됐다. 이미 팀 호이트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는 무엇보다 이런 부자의 전설이 필요하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겠다며 어떤 이는 정치를 하고, 의사가 돼 활동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자선사업을 하며 인류를 위해 봉사한다. 그런데 아들 하나 잘 키우는 일이 그에 못지않음을 '딕 호이트'는 보여주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가족 사랑의 기적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또 이 세상에서 가족이라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검은 호랑이의 새해가 밝았다. 호랑이는 우리 인간에게 첫 인상은 무서운 존재다. 약육강식의 상위 포식자로서 사람도 잡아 먹혔다는 옛 이야기들을 들어와 산속에서 만나면 두려운 존재라는 인식이 뇌리에 박혀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검은 호랑이 인가 그것이 주는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왜 많은 사람들이 좋은 해라고 말들을 할까? 예로부터 조상들은 두려움과 동시에 경외의 대상으로 알려져 왔다. 2022년은 60갑자를 돌려쓰는 壬寅年이다. 여기서 任자는 9번째 天干이며 젊어지다, 아첨하다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젊음이란 머리 색깔이 검은색으로 표현 된다. 壬方은 이십사방위의 하나로 정북에서 15각도로 기울어진 방향이며 壬時는 이십사의 이십사 번째로 오후 10시반에서 11시반까지를 나타낸다. 그리고 寅자는 십이지의 셋째이며 범을 상징한다. 寅方은 정북에서 동쪽으로 15각도로 기울어진 방향이다. 寅時는 오전 3시에서 5시이다. 壬과 寅을 합해보면 검은 호랑이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십사방위에서 정북에서 좌우 15각내를 나타낸다. 조상들은 일반적으로 북쪽을 최상으로 방향으로 알고 있다. 조상들에 대한 제사도 북쪽을 향해 지낸다. 또한 시간으로 보면 오후 10시반부터 오전 5시가지를 포함하고 있다. 사람이나 호랑이는 한참 잠들어 있는 시간이다. 즉 아무런 걱정도 없이 세상모르고 평화스러울 때이다. 검은 호랑이를 좋아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젊음을 나타내고 있으니 정력이 왕성한 시기이므로 어떤 고난과 어려움을 이기고 진취적으로 자기가 맡은 직무나 자신의 개인적인 목표를 향해 언제나 힘차게 전진을 할 수 있다. 미래가 밝고 희망이 가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이런 해에 태어나는 아기는 활기가 호랑이처럼 왕성하며 지치는 않는 진취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으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이 타고 재능에 따라 각자의 분야에 지식에 관하여 해박한 전문 지식을 갖춘 과학자가 될 수도 있고 , 예술인이 될 수도 있고,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시키면서 민초들이 자기 생업에 자유롭게 행사를 할 수 있도록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가 될 수도 있다. 밤에 잠을 설친 사람은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무엇을 하든 실수를 하거나 일을 망가트릴 가능성이 높다. 다른 사람과의 대인관계도 짜증이 날 수 있다. 이런 사람에게 누가 많은 일을 맡길 수 있을까. '아! 잘 잤다' 하면서 기지개를 펴는 사람을 보라 얼마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지, 한 밤중에 잠을 잘 잔 사람은 심신이 건강하고 차분히 가라앉은 감정으로 매사에 신중을 기하고 사회적 인간관계도 부드럽게 가질 수 있다. 잠을 잘 잔 검은 호랑이의 형상과 강력한 힘을 자랑이라도 하듯 산천을 주름잡는 호랑이처럼 나타나면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경외의 마음을 가지게 돼 리더로서의 위치의 반열에 올라선 것과 같다. 긴 기간 동안 코로나 사태나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올해는 이런 모든 어려움이 해소가 되고 보다 더 나은 세상이 펼쳐지리라 믿는다. 누구나 맛 볼 수 있는 조그만 행복부터 목표 달성의 기쁨을 누리는 큰 행복까지 한 개인이나 단체, 더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가 강력한 힘을 가진 검은호랑이처럼 정직하고 믿음직하고 패기가 넘치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壬寅年 초하루 아침에
차가워진 바람을 맞으며 친구 딸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다. 초등학교 졸업한 지 54년,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 한 친구들을 만나려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알아볼 수 있을까? 더구나 마스크까지 썼으니 설레는 마음에 혼란스럽다. 한 시간 일찍 식장에 도착하였다. 친구와 친구 부인에게 축하의 인사를 나누고 동창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두 명씩 모여들었다. 동창 한 명이 나를 보고는 "너 세현이 맞어 마스크 벗어봐 아 옛 모습이 살아 있네, 까무잡잡 했었지 하하하" "그래 나는 통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미안한데 이름이 뭐냐" "너와 절친이었는데 기억이 안나니? 서운하다" "마스크 벗어봐 아 이제 생각난다. 선영이지 맞지, 장교로 군생활 하고" 열 명 중에 서너 명은 알겠고 나머지는 전혀 머리에 떠오르질 않는다. 혼주와 나는 초등학교는 물론 중·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녔고 군대도 한날 한시에 입대 해서 훈련도 같이 받았다. 초등학교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 동창까지 만났다. 감회가 더욱 새롭다. 예식이 어느 정도 진행되자 친구들은 하나둘 피로연 식당으로 모였다. 반갑다며 주거니 받거니 술을 권한다. "고맙다 나를 반겨줘서, 동창 모임에 한 번도 참석 못 해 그동안 미안하다"며 회포를 풀었다. 반세기 만에 만나는 친구들의 얼굴을 미리 익히고 가고 싶었지만 나는 초등학교 졸업 앨범이 없다. 중학교 입학금과 교복, 책, 공책, 등을 살 형편도 그랬지만 동생들이 세 명이 있어 학비도 문제지만 막내 삼촌과 고모가 결혼을 앞두고 있어 부모님과 할머님이 고심하며 노심초사 하시는 모습을 보니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졸업여행도 말씀은 드렸지만 조르지는 못했다. 졸업여행비가 100원이었다. 중학교 입학금이 1110원이었으니 큰돈이었다. 1960년대의 우리네 삶은 일제 강점기의 수탈과 한국 전쟁의 폐허 속에 무척이나 고달펐다. 중학교 진학은 졸업생 중 삼분의 일 정도였다. 입학금과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솔방울을 따서 시장에 팔았다. 민둥산에 리기다소나무를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린 내가 솔방울을 따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한 가마니에 80원, 오일 정도는 따야 한 가마니다. 나는 지게에 지고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 십리 길을 걸어 시장으로 향했다. 아버님은 일을 하라는 말씀은 자주 하셨지만 공부하라는 말씀은 별로 없으셨다. 하지만 아버님의 속마음은 '열심히 공부해라' 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나라 잃은 설움, 배우지 못한 설움, 배고픈 설움에 대해 장날 막걸리를 거나하게 드시고 말씀하셨던 것을 나는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청첩장을 받아 들은 다음 날 지나치기만 했던 모교를 찾았다. 옛 건물은 없고 새로 지은 학교건물이다. 운동장은 파랗게 인조 잔디로 정리되어 있고 소나무가 빽빽하던 풍치원風致園은 세월의 흔적을 보여준다. 소나무 가지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잘려나가고 죽어 베어진 나무의 밑둥은 세월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한여름 무더위를 피해 소나무 그늘에 들어서면 시원함과 매미의 울음소리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었다. 송림松林 숲은 운동장 옆에 이백여평 쯤 되었다. 교장 선생님은 다른 학교에는 없는 소중한 자산이라고 자랑삼아 말씀하셨었다. 풍치원의 소나무를 보니 논어에 나오는 '세한지송백歲寒知松柏'이란 글이 생각난다.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안다'는 뜻으로 어떠한 역경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지조와 의리를 지키는 군자의 마음을 말한다. 앨범을 갖고 있는 친구가 카톡방에 빛바랜 흑백앨범 열 여섯장의 사진을 올려놓았다. 돋보기를 쓰고 오십사 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선생님들과 120명의 친구들이 말없이 반긴다. 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들, 뭐 그리 바삐 떠났는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으니 허망하고 애잔하다. 노란 은행잎이 소리 없이 빙그르르 내려앉는다. 늙음에도 미학美學이 있지 아니한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 일에만 매달리지 말자. 여유를 갖고 인생을 건강하게 살아보자. 동창들을 자주 만나고 취미생활도 하면서 이웃에 봉사하며, 황혼黃昏의 시간을 느껴야겠다.
붉은 궤적을 그리며 자동차가 어둠에 덮힌 은행나무길로 들어간다. 아직 먼동이 트지 않은 이른 시간이라 불빛이 안개와 어울려 조명등을 켜 놓은 것처럼 환상의 분위기를 만든다. 어둠이 조금씩 밀려가니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듯 물안개가 피어나는 모습이 몽환적이다. 안개가 산자락을 감싸고 저수지를 내려와 수면을 덮고 은행나무길을 천천히 덮는다. 희미한 하늘엔 아침 해가 고개를 들어 안개를 비추며 주위를 하나둘 돌아본다. 은은한 아침빛이 저수지에 펴지면 모든 사물들은 온통 나를 봐달라는 소리없는 아우성에 시선을 둘 곳을 몰라 헤멘다. 우선 눈길이 가는 건 길 옆으로 길게 늘어선 노란 은행잎이다. 시선을 압도하는 노란 잎들이 가을이 깊어가는 이맘때가 되면 이른 봄 연초록의 새싹에서 초록으로 또 검푸른 초록으로 변한 나뭇잎이 황금의 꽃으로 호칭이 바뀌는 시점이다. 안개가 짙어졌다 옅어졌다를 반복하며 은행잎을 가렸다 보였다를 반복한다. 보일 듯 말듯한 그 모습이 진한 빛을 발하며 더욱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은행나무 길을 걷는다. 길게 늘어선 은행나무와 물 위의 낚시좌대 노란 은행잎이 물속으로 내려와 안개와 조화를 이룬다. 이건 풍경이 아니라 화가가 그린 완전한 그림이다. 수채화 속에 내가 있다. 나 뿐만이 아니다. 은행길을 걷는 사람도 물 가운데 좌대에서 낚시를 하는 낚시꾼도 그림의 한 부분이다. 낚싯대를 드려놓고 물 속을 바라보면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은행나무가 고운 빛으로 내려와 보이니 고기도 낚고 계절도 낚으며 풍경 또한 낚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아래로 길게 뻗은 나뭇가지에 정렬한 듯 줄지어 노랗게 매달린 은행잎들이 정겹고 사랑스럽다. 물위에 떠있는 주황색 낚시좌대와 너무 잘 어울려 멋스러움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참을 서서 바라보고 있다. 바람이 분다. 내 얼굴을 스친 바람이 나무 꼭대기를 흔들더니 강한 힘으로 가지를 흔들어 나뭇잎이 하늘로 날아 오른다. 아니 꽃잎이 노랑나비가 되어 하늘을 난다. 아마도 푸른잎으로 살아갈 때는 많은 걱정을 하고 매달려 있었는지 모른다. 내 나무를 키워내야 하는 잎들이 병이 걸리거나 벌레가 먹어 나무가 잘 크지는 않을까. 열매가 잘 영글지는 않을까. 다른 잎들도 잘 자랄까 하는 수 많은 걱정을 하면서 지나오지 않았을까. 그런 시간 속에 황금색으로 익어져 있는 제 모습을 돌아보며 어느 순간 깨달음을 얻었는지 모른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모든 걸 내려 놓으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져 마음껏 하늘을 날아 오른다. 한참을 나른 황금나비는 물위에도, 길위에도, 길옆 통나무 의자에도 사뿐히 내려앉는다. 물위에 은행잎은 돛단배처럼 바람 따라 물결 따라 궤적을 그리며 세상을 주유하고 길 위에 은행잎은 영변의 약산 진달래처럼 살며시 즈려밟고 가라한다. 통나무 의자 위의 은행잎은 조각같은 예술작품이다. 은행나무가 만든 작품인지 바람의 작품인지 구분이 어렵지만 소녀의 감성을 자극한다. 나무에도 물 위에도 길에도 물 속에도 온통 노란빛이다. 그 많은 은행잎이 아니 황금나비들이 하나하나 숨은 이야기를 내게 말해주려 하는 것 같다. 아무 생각없이 걸으려 해도 은행잎이 내게 사색의 시간을 자꾸만 밀어 넣는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네 인생의 계절은 어딘지, 무얼 덜어 내려고 하는지 묻는 듯하다. 은행나무 길을 걸으며 이 은행나무 속의 가을을 이 은행나무 속의 가을의 빛을 이 은행나무 속의 가을의 색깔을 그대 손에 꼭 쥐어주고 싶다.
날씨가 점차 더워지니 소나기 소식이 그리워진다. 매일 아침 걷던 운동도 더위 핑계로 겨우 이삼일에 한번 걷게 되고 무기력증에 밥맛도 없고 기운도 쇠약해지는 것을 느끼는 요즘이다. 모든 일이 시작은 하였으나 마무리를 못하고 있다. 오늘은 동네 뒷동산 정상에 산책하며 쉬는 곳에 백일홍꽃을 심은지 2주가 되는 날이다. 이날은 가장 덥다는 대서大暑였다. 나약해진 마음과 몸을 추스르고 싶어 생각 끝에 열한 포기를 정성스레 심고 물을 주었다. 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나태한 마음이 몸을 무겁게 하여도, 이제는 꽃에 물을 주기 위해 하루도 산을 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산에 꽃밭을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대학 은사님이시자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에서 지도해 주시는 교수님이 삼년 동안 온갖 정성을 들여 만들어 놓으신 율봉공원 꽃밭에 감동을 받아서이다. "꽃 이름이 뭐예요" "물 주시려고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더운데 고생하시는데 꽃이 아주 예쁘네요" "왜 이 산속에 꽃을 심으실 생각을 하셨어요" "꽃을 보니 마음이 즐거워져요" "아저씨 멋져요 최고예요" 산을 즐겨 찾는 동네 주민들이 물을 주는 나에게 하는 말이다. 백일홍을 선택한 것은 삼복더위 땡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고하게 한여름을 잘 견디는 꽃이어서이다. 꽃이 100일 동안 핀다고 해서 백일홍이다. 꽃말은 '순결' 백일초라고도 부르는데 분홍, 빨강, 노랑색등 꽃색이 다양해서 더욱 좋다. 나무에 피는 백일홍이라 부르는 배롱나무의 꽃은 목백일홍 이라 불러야 좋으리라. 엊그제 채종한 접시꽃, 채송화, 금계국, 백도라지꽃 등 몇 가지의 꽃씨를 햇빛이 잘들고 보기 좋은 곳에 정성스레 파종하였다. 엄동설한의 추위를 이겨 내고 내년이면 예쁜 모습으로 싹이 트고 꽃이 피어서 주민들의 지친 심신을 안정시켜주고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정신이 함께하여 매일 와서 마음껏 즐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에서다. 또한 더위가 지나가고 생육이 멈추는 가을에는 등나무를 심어 내년부터는 그늘을 만들고 향기가 좋은 꽃을 피워 이곳을 찾는 모든 이에게도 아름다운 마음의 꽃도 피울 수 있게 하리라. 또한 튼튼한 나무로 의자를 만들어 사색思索을 하며 정담情談을 마음껏 나눌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리고는 이곳을 찾는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산이름과 꽃밭이름도 지어야겠다. "나 여든한살 밖에 안 되었어 저렇게 예쁜꽃을 보면 지금도 마음이 설레이지" 오십대의 젊은 아낙이 비록 지팡이 하나를 의지하지만 매일 이곳을 찿아 산책하시는 어르신의 연세를 묻자 의미 있는 듯한 대답을 하시는 모습을 보며 역시 꽃을 잘 심었구나 싶다. 어릴적 어머니와 뙤약볕에서 고구마밭의 잡초를 제거할 때 흐르는 땀을 훔쳐주시며 "참을성을 길러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던 생각이 난다. 어머님 세대의 삶은 너무도 많이 힘드셨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전쟁에, 고달픈 인생 여정은 지금처럼 배불리 먹고 여행을 가고 꽃밭을 가꾸는 것은 사치였으리라. 백일홍꽃은 청아하고 소박해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꽃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행복을 준다. 또한 거짓을 하지 않는다. 가뭄에 시달려 잎이 축 늘어져 있다가도 물을 주면 금새 깨어나 방긋 미소를 짓는다. 인생도 꽃과 같다. 꽃의 향기와 꿀은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고 열매를 맺듯이 우리 인생도 사랑과 배려로 고달픔을 몰아내고 미소를 짓게 하며 희망과 용기를 준다. '가을은 성큼 다가온다' 고 했다. 한바탕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코스모스와 들국화도 심어 추색秋色에 추향秋香으로 벌과 나비를 불러 모으리라. 그리고 사색思索의 계절 가을이 익어가면 미처 몰랐던 야생화들의 꽃씨를 모아 율봉산 꽃밭과 무명산 꽃밭에 정성스레 파종해야겠다. 삼복더위에도 굳건하게 꽃을 피우고 고유의 향기를 잃지 않는 꽃들을 보면서 나약했던 나를 깨우고 좀더 정진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쓱 쓱 쓱 쓱… 고요한 아침 체육 공원 등나무 쉼터 마당을 쓰는 빗자루 소리가 경쾌롭다. 쓱 쓱 쓱! 나는 몇 달 전 아파트 앞 체육공원으로 산책을 나왔다, 얼마 남지 않은 보랏빛 등나무 꽃이 질 무렵 시들어가는 꽃이지만 아직은 그윽한 깊은 유향(幽香)이 단아한 중년 여인의 은은하고 기품(氣品) 있는 넓은 치마폭으로 휘어 감싸 안을 것 같은 향취를 연상(聯想)하며 상념에 젖어들 때 아뿔싸, 주위는 온통 잡풀과 쓰레기 담배꽁초 그리고 개똥. 왜 이리 허접하고 황당한가? 멍하니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누구를 탓 해야 하는가! 동네 사람들은 다 무엇을 하고, 내 일이 아니니 나는 모른다. 무려 천여 세대가 사는 아파트 한 쪽 터, 온 주민이 운동하고 쉬는 쉼터 마당이… 이럴수가? 읍내 주민 센터로 민원을 낼까? 아니다, 그렇게 떠들 일도 아니다. 그래, 내가 쓸면 되지 않은가? 누가 더러운 것을 치우지 않는다고 탓하지 말고 '내가 하자.' 나는 내수읍 내 가게에서 마당 빗자루를 샀다. 쉼터 마당을 한참 쓰는데 매일 아침마다 동쪽 언덕 산자락 숲에선 소쩍새가 울어 댄다. 솥적 솥적. 우리 조상들은 배 고프고 굶주린 설음의 한을 새 울음 소리에도 구실을 붙여 '솥적 솥적' 솥 적다, 솥 적다. 식구는 많은데 솥이 적어 밥이 없어 배가 고프다고 울어 대는 슬픈 민화(民話)로 전해질까? 오십여 평 넓은 쉼터 마당 그리고 오백여 세대가 버스를 타기위해 많이 다니는 쪽문에는 10여 개의 계단 있다. 거기도 쓸어야겠다. 이른 아침, 일터로 가는 길 깨끗이 쓸어 있으면 기분이 참 좋으리라, 그렇게 생각되어 아파트에서 내려오는 계단까지 함께 쓸었다. 온 몸은 땀에 흥건히 젖어 있고 몸은 힘들어도 머리는 맑고 마음은 흐뭇하기 그지없다. 누구를 위한 행위인가· '남을 위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위함이요, 이것이 자신을 위한 수신(修身)이 아닌가. 남을 위한 선행도 결국 자기를 위한 선(善)인 것을. 누가 이 상쾌함을, 누가 이 뿌듯함을 알겠는가· 이른 아침 이 파랑으로 꽉 채운 넉넉한 칠월의 아침을! 어떤 이는 힐끗 힐끗 쳐다본다 아마 낮 설은 모양이다. 웬 수염 달린 늙은이가 공원을 쓸고 있으니, 의아한 눈 빛이다. 뚱뚱한 아주머니가 개를 여러 마리 끌고 와 할아버지 "수고하시네요. 깨끗이 쓸어 놓으니 이제 와도 되겠네요. 전에는 개를 데리고 운동하고 싶어도 더러워서 올 수 없었는데 이제 좋네요." 한다. 깨끗하게 쓸어낸 넓은 정원이 좋은가 보다. 강아지들이 이리 저리 마구 뛰어다니고 아주머니도 환하게 활짝 웃는다. 고전(古典)에 '일일 지계는 재 어인'(一日之計 在於寅)이라는 말 즉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다는 말처럼 이른 아침 땀을 내니 정신이 맑고 마음은 상쾌하고 하루의 시작이 칠월의 녹음(綠陰)처럼 싱그럽고 힘이 넘친다. 다음날 아침에 등나무 마당을 쓰는데 한 젊은이가 한참을 쉬었다 갔다, 그 젊은이가 앉았다가 떠난 자리 앞에 담배 꽁초가 일곱개나 흩어져 있다. 미안한 기색도 없이 떠났다. 삶에 무게가 그리 무거워 훠이 훠이 그렇게 불태워 연기로 내 뱉어 냈을까? 갓 쓸어낸 마당을 어질러 놓은 젊은이가 밉다기보단 측은(惻隱)한 마음이 든다. 적어도 조금은 미안해하면 안될까? 우거진 녹음으로 감싸 안은 쉼터를 깨끗이 쓸고 의자에 걸터 앉으니 아늑하고 상큼하다, 내가 기분이 좋으니 다른 사람도 기분이 좋으리라, 조금 수고하면 이렇게 깨끗하여 찾는 이 모두가 좋은 것을! 여러사람이 쉬고 마음 추스리는 이곳을 앞으로도 계속 쓸어야겠다. 작은 내 행동이 헛된 수고가 아니고 힘든 이의 조금의 안식이 되었으면 좋겠다. 쓱 쓱 쓱 쓱, 빗자루 소리 아침을 깨우면 찬란한 햇살이 칠월을 채운다.
탁. 탁. 탁 탁 탁.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도량찬 도량청정 무하예 삼보천룡 강차지…. 목탁소리가 고요한 산사를 울리고 있다. 그때 나는 하던 일이 잘되지 않아 일을 접고 허접한 마음 달랠 겸 가방에 조각도 몇 자루와 재료를 담아 불상을 조성하러 깊은 산사를 찾아다녔다. 나는 60~70년대는 작은 암자에서 종종 흙으로 빚은 부처(土佛)을 봉안하였다. 나는 부처를 조성할 줄 알았기에 깊은 산골 산사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허허한 마음 가눌 길 없고, 가는 곳 정함 없어도 나는 걸었다. 걷고 또 걷고 인적이 없어 쥐 죽은 듯한 고요가 무겁게 나를 짓누르고 봇물처럼 밀려오는 외로움이 번져와도 담담히 걸었다. 이렇게라도 살아야겠기에 걷고 또 걷고. 때때로 청아한 산새의 지저귐과 시원한 계곡물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잔잔하여진다. 나는 어제 여기 암자에 와 쉬고 있었다. 저만큼 허리가 꺾인 늙으신 할머니가 등에 조그마한 봇짐을 지고 찾아오신다. 보살님이 나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불공을 드려 달라고.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스님도 아닌데…. 그때 스님과 동자승은 탁발을 나가고 없었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데, 내가 도와드리고자, "보살님, 공양을 올리시죠." 하고 스님이 하던 대로 촛불 켜고 청수 올리고 향불 붙이고 숙연한 자세로 독경을 한다. 고요한 산골 조그마한 암자에 승복도 입지 않고 평상복 차림에 스님도 아닌 내가 목탁을 치며 독경을 하고, 그 뒤에선 허름하고 늙으신 노파가 온몸으로 정성 들여 절하며 기도드린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탁 탁 탁탁탁…. 독경 소리와 서투른 목탁 소리가 법당 안의 고요를 가른다. 내 등 뒤에선 할머님이 정성을 다해 절을 하며 기도드린다. "우리 아들 며느리 잘살게 해 주십시오.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석가모니불 우리 아들 며느리 잘되게 해 주십시오. 나무…." 나는 예불 책 1권을 다 읽었는데 할머니의 기도는 계속된다. 예불을 멈출 수가 없어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얼마나 지났을까? 예불은 끝이 났다.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있고 얼굴에는 쉼 없이 땀이 흐른다. 법당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고뇌에 찬 고통의 번뇌가 어디 갔는가? 더위가 무섭게 느껴졌던 7월의 햇살이 찬란하게 빛나고 이 싱그러운 신록과 자연은 이리도 장엄하고 위대하다! 형언할 수 없이 가슴 벅차오르는 기쁨, 잠시 나를 잊어버렸던 무아경! 보이는 모든 것, 마음이 놓여진 어디에도 평안하고 고요하다. 잔잔하게 가득 채워진 이 황홀함이여, 모두가 아름답고 신비롭다. 온 정성 바친 어머님의 기도 덕일까? 삶의 고뇌가 어디에도 없구나! 할머니는 조용히 험한 산비탈 길을 천천히 내려가셨다. 보살님이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젊어 청상과부 되어 품을 팔아 남의 집 문간방에서 어렵게 살며 아들을 키웠다. 아들이 성장하여 성혼시켜 함께 살았다. 한데 어느 날 밤 아들 내외가 야반도주를 하였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의 젊은 열정을 주체 못 해 늙으신 어머니를 버리고, 야반도주라니… 휑하니 뚫려버린 마음이 허허롭고 차갑게 내려앉는다. 어머니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구걸을 하여 자식을 위해 부처님 전에 묵묵히 온몸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는가! 이 얼마나 성스러운가! 이 순전하고 투박한 어머님이 살아계신 부처(生佛)가 아닐는지! 요즈음 효라는 말을 들어본 지가 오래다. 동방 예의지국으로 자부하며 살아온 우리 전통의 미풍양속이 보이지 않는다. 어른이 된 내가 부끄럽다. 사는 게 힘들다고, 시간이 없다고 핑계 대며 살아왔던 부끄러운 내 모습을 보며 아련한 세월 저 너머 그 할머니 생각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