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솜사탕처럼 피어오르는 봄날이다. 봄 햇살만큼이나 상큼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기어 다니는 쌍둥이 손자가 어느새 성장해 눈앞에서 달려오는 듯이 반가움이 앞선다. "뛰지 말고, 도서관이니 조용히 하세요." 인솔 선생님의 끝없는 당부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때뿐이다.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책을 고르기 시작한다. 서로서로 책을 권장하기도 하고, 인기 있는 책은 서로 먼저 차지하려 경쟁하는 모습이 귀엽다. 아이들은 성숙도에 따라 선호하는 책이 다르다. 고학년은 시집이나 동화책을 선호하고, 저학년은 만화책을 제일 좋아한다. 모두가 만화책이 진열된 책장 앞으로 몰려간다. 아이들은 제비새끼가 어미가 물고 온 먹이를 향해 노란 입을 벌리고 짹짹거리듯, 시선은 모두가 만화책에 향해있다. 만화책을 진열해 놓은 책장 앞에서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을 바라보니 어린 시절이 살며시 떠오른다. 어린이들이 만화책을 좋아하는 것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변함없는 것 같다. 초등학교 때에는 교과서 이외의 책은 볼 수 없었다. 중학교를 청주로 진학한 후에 만화방이라는 곳이 만화책을 빌려주기도 하고, 볼 수도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틈만 나면 만화방으로 갔다. 부모님들은 만화방에 가는 것을 싫어하셨다. 불량 학생들이나 가는 곳으로 인식하셨던 것 같다. 남주동 깡시장은 무심천에 두 개의 둑방 사이에 있었다. 안쪽 둑방 너머에는 시장골목이 있었고, 그곳에는 우리가 제일 많이 애용하던 시장만화방이 있었다. 어느 날이었던가. 시장만화방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는데 앞쪽에서 시끄러워졌다.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하나 생각하는데 "너도 빨리 일어나!"하며 내 눈앞의 만화책을 낚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바로 옆집에 사는 친구 엄마였다. 그 친구랑 나는 만화책을 빼앗기고 집에 끌려와 함께 꾸중을 들었다. 그 후로도 우리는 만화방을 어른들 모르게 들락거렸다. 서로 다른 만화책을 빌려다 바꿔보기도 하며 만화책에 흠뻑 빠졌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만화책이 나름대로 상상력을 키워준다든지, 책을 읽는 습관을 길러준다든지 긍정적인 면도 많은 것 같은데 어른들은 싫어했다. 어른들은 우리가 공부는 안 하고 만화책만 본다고 싫어하셨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때에는 책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겼던 생각도 난다. 학기 초에는 언제나 분주했다. 새 책을 받아오자마자 책을 포장할만한 큰 종이를 구하기 바빴다. 밀가루 포대나, 사용하다 남은 벽지 등, 그중에 커다란 달력이 최고였다. 책이 구겨지고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함으로, 그렇게 해야만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줄로 알았다. 4학년이 시작되는 학년 초였나 보다. 새 책을 받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벽에 걸려있는 달력을 떼어 책을 정성껏 포장했다. 책을 보고 공부를 할 생각보다는 새 책을 유지하면 공부 잘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열심히 책을 싸서 때 묻지 않도록 깨끗이 보존했다. 책을 포장할 생각만 했지 달력이 어른들에겐 중요하다는 것은 미처 몰랐다. 엄마께 사용하지도 않은 달력을 버렸다고 꾸중을 들었다. 책을 싸다보니 책 뒷면 표지에 "미래의 우리나라가 여기에 있다"라는 글귀를 보고 궁금해 책장을 넘기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책을 넘겨봐도 우리나라 미래의 그림이 보이질 않았다. 한참의 세월이 지난 후에야 글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린이들이 책장을 올려다보는 눈빛이 유난히도 반짝거린다. 책을 좋아하는 어린이들이 있는 우리나라의 미래가 환하게 밝아 오는 듯하다. 책을 고르는 모습을 한동안 흐뭇하게 바라보며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를 상상해본다. 금세 반짝이는 세상이 온 누리에 펼쳐지는 듯하다. 삼사십년 후에는 저 빛나는 새싹들이 우리나라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으리라. 그때쯤 이 사회는 어떤 변화된 모습일까. 세계 각국이 부러워하는 선진강국이 될 것으로 믿어진다. 해맑은 얼굴들이 우리나라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을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니 기쁨의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
아침 출근길 차량들의 물결에서 모두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나도 살아가기 위한 날갯짓을 수없이 퍼득이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매월 봉급을 받고 생활하는 근로소득자, 자신이 직접 경영해 매출을 창출하는 사업소득자 등 살아가는 방식은 다양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누구든 어려운 살림살이를 맞이하고 있다. 주말에 마트에 들렀는데 모든 과일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 있다. 특히나 사과의 경우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저녁 뉴스에서 들려온 경제의 어두운 현실이 귓가를 맴돈다. 사과값은 33년 만에 최고 가격 상승률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어떤 이유로 이렇게 가격이 올랐는지 알 수 없다. 아무튼 최근의 물가는 지금껏 볼 수 없던 모습으로 장바구니를 압박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주말 아침에 창 밖을 보면 사회적 기업에서 운영하는 식당 앞이 북적이고 있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들이 자전거를 타고 오거나, 유모차에 의지해 걸어오신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줄을 서서 식당 안으로 들어선다. 매주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다. 누군가가 이 각박한 세상에, 이 어려운 경제 상황에 주위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온정의 손길을 펼치고 있으리라. 아름다운 선행이다. 누군가의 수고와 희생이 타인이 살아갈 수 있는 의지를 갖게 한다면 그것으로도 선행을 펼치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웃을 돌아다 본 적이 있었던가? 나와 가족이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서 맴돌고 있지 않았던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더 어려운 이웃과 주변에 온정의 손길을 펼치는 사람을 자주 접한다. 평생 폐지를 주워 저축한 돈을 어느 대학의 장학 기금으로 기부하신 할머니. 수해 현장에서 죽은 소방관 아들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유족 연금과 자신이 모은 돈을 합쳐 소방청에 기부하신 아버지. 그런 숭고한 이야기는 생각 없이 살아가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좀 더 형편이 나아지면 그때 주변을 둘러보겠다는 알량한 변명으로 지금껏 생활해 왔다. 퇴근길에 라디오 방송에서 매주 한 번씩 듣게 되는 프로그램이 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치료가 필요한 상황에서 병원 진료비가 없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사연 소개와 도움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정말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가슴 시린 사연들이다. 그 와중에 삶에 대한 희망과 열정은 얼마나 강인한가! 매일 평범함 속에서 무디게 살아가는 나를 채찍질하게 한다. 도움의 손길은 경제적인 부유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공감에서 오는 것이리라. 공감의 마음은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하며 한 푼 두 푼 모은 작은 성의에서도 싹튼다. 그런 작은 손길과 성의로 사연 속의 주인공은 삶의 끈을 다시 힘차게 당기리라. 어느새 창밖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다. 겨우내 먼지와 오염으로 더럽혀진 흐릿한 창문을 씻어 주고 있다. 이제는 겨우내 움츠린 마음을 추슬러 기지개를 활짝 켜야겠다. 봄의 따스함을 온몸으로 느끼는 날, 이제껏 마음의 주머니에 채워져 있던 '나만을' 생각하는 옹색스런 주머니 하나를 멀리 던져 버려야겠다. 그 자리에는 '이웃을' 생각하는 넉넉한 마음 주머니 하나를 살며시 가져다 놓으련다.
아내는 힘겨운 항암 과정을 잘 견뎌내고 있다. 3주마다 시행되는 항암치료는 받을 수만 있어도 다행이다. 혈액검사에서 백혈구 수치가 일정한도를 넘어야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한번은 호중구 수치가 0인 상태가 돼 외래 진료 중에 바로 입원을 하는 상황도 겪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놀라 어쩔 줄을 몰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항암 할 때 병가를 내고 함께 생활했다. 주사액이 피부에 닿으면 위험해 잠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질 때마다 온갖 신경이 곤두서게 된다. 제발 무탈하게 치료가 마무리되길 빌면서. 항암은 계속될수록 힘들다. 약물이 몸에 축적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6차 항암 치료를 무사히 마친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우리는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집으로 가기위해 짐을 싸면서 그동안 잘 견뎌내고 고생한 아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의료진들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다시는 입원하지 말라는 덕담도 들었다. 마무리가 잘 됐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집에 도착한 아내는 긴장도 풀리고 지친 상태라 침대에 누워 계속 잠을 잔다. 얼마나 고될까 하며 기다리는 방법 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 까라져 먹지 못하는 상태가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가게 되자 나의 불안감은 점점 증폭됐다. 내가 할 수 있는 요리는 몇 가지가 되지 않기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허둥지둥대기만 한다. 아내의 입맛을 빨리 돌아오게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의 부족한 음식 솜씨가 야속하다. 김치 냉장고에서 꺼낸 묵은지를 여러 번 헹구고 적당한 크기로 썰어 쪽쪽 찢어놓고, 멸치와 다시마, 마른 표고버섯 육수를 낸 물에 된장을 풀고 푹 끓인 찌개를 차려 주었다. 이제야 밥을 먹기 시작한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아내가 조금씩 밥과 찌개를 오무작거리며 먹는 모습을 보니 안도의 미소가 지어진다. 반포기 정도로 끓인 찌개를 삼시세끼로 먹으면서도 아내는 질려하지 않으며 조금씩 식사량을 늘려간다. 연거푸 3번이나 끓인 나의 정성이 듬뿍 담긴 묵은지 된장찌개를 먹고 조금씩 기운을 차려가니 날아갈 듯 기뻤다. 그 요리의 이름을 모르기에 특별히 나의 정성을 가득 담은 묵은지 된장찌개라 줄여서 정가묵 찌개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내는 정가묵 찌개를 자신을 살린 음식으로 첫 번째 소울 푸드(soul food)라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그럴 때면 덩달아 나의 어깨도 으쓱해진다. 아내는 지금도 치료 중이다. 향후 2년은 매우 조심해야 하고 5년, 10년, 아니 평생을 관리해야 한다고 마음먹으며 음식과 운동, 수면을 조절하고 있다. 묵은 김치가 떨어져 설날에 처가에서 다시 얻어 와서 가끔 정가묵 찌개를 끓이고 있다. 특별한 맛은 아닐지라도 갓난아기에게 우유를 타주는 부모의 심정으로. 뾰족한 방법이 없기에 이것저것 애쓰는 남편이 가여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만든 김장김치와 남편의 어설픈 손맛이 들어가서 아내의 입맛을 돌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기운을 차려야 남편과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아직도 예전처럼 건강을 회복하려면 갈 길이 멀지만 아내는 잘 버텨내고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다. 웃으려고 노력하고 그간의 잘못된 식생활이나 수면 습관들을 고치려고 애쓰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에 푹 빠져있다. 자신의 그림 사진을 가족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보여주면서 즐거워한다. 정해진 식단도 잘 챙겨 먹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맨발걷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는 것은 나를 놀라게 한다. 몸을 규칙적으로 움직이니 잠도 푹 자고 있다. 잠잘 때가 가장 예쁘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따금 아내가 힘이 없거나 기운이 쳐지는 기미가 보이면 나는 긴장하게 된다. 평생 눈치 없이 살았는데, 이제는 아내의 심기를 살피려고 애쓴다. 아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이면 말없이 조용히 묵은지를 썰고 있다. 내가 해줄 수 있고 아내가 좋아하는 일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지금은 아파트 주변에서 산책하고 있지만 봄이 오면 함께 여행을 가려고 한다. 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해변을 걸으며 아내가 좋아하는 맨발걷기를 하고 싶다. 싱싱한 해산물도 풍성하게 먹었으면 좋겠다. 그간 힘들었던 지친 몸과 마음을 시원한 바닷바람에 날려 보내길 바란다. 마음이 즐거우면 몸도 편안할 것이기에 아내의 컨디션이 허락하는 한 경치 좋고 편안한 곳으로 함께 가고 싶다. 그것이 내가 명퇴를 한 이유다. 따뜻한 봄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코로나 이후에 사회의 모든 생활환경이 변화됐다. 학교의 강의실 분위기마저 그야말로 얼어붙은 냉동고와 같다. 어두운 교실에서 학생들은 머리를 숙이고 휴대폰만 열심히 보고 있다. 수업을 시작하지만 학생들은 집중하지 못한다. 학생들에게 돌아가며 발표하게 시켜본다. 그제 서야 겨우 마지못해 더듬거리며 읽고 해석한다. 지금까지 젊은 학생들이 노력은 안하고 게으르다고 비난만 하며, 내 입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그러나 MZ세대들은 기성세대가 모르는 많은 것을 더 많이 알고 있다. 요즘 세대의 학생들은 온전한 디지털세대로서 전자식 교육에 더 잘 훈련돼 있다. 이들은 앞으로 나라를 짊어질 미래이며 국가의 보물이다. 서로서로 이해해야 하는 공동의 운명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세대와 소통하기 위해서 인터넷 채팅방에서 유행하는 유머나 그들의 용어를 수업시간에 활용했더니 학생들은 뜻밖의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난 30여 년간 나의 교수법을 회상해 봤다. 그것은 다분히 일방통행적인 주입식 교육이었다. 교수는 가르치고 학생은 받아 적는 안일한 교육이었다. 코로나로 힘들어하는 학생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 넣어줄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지난 학기부터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교실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수업중간에 영어명언, 조크나 유머 그리고 팝송을 가지고 수업을 진행했다. 영어명언을 이용해 자신의 좌우명을 정하니, 영어도 배우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었다. 유쾌한 팝송을 듣고 거기에 나오는 영어표현을 강의했다. 영어유머를 통해서 한국문화와 다른 서구문화의 일면을 알렸다. 학생들의 굳어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재미있는 소재를 활용했더니 학생들의 집중도를 더 높일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코로나로 냉동고가 됐던 강의실 분위기가 바뀐 값진 경험이었다. 학생들의 수강 분위기도 달라졌다. 또한 따뜻한 격려의 말 한마디는 닫힌 마음을 녹여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것은 상대방의 노력과 장점을 인정하고,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는 계기가 됐다. 상대방의 자존감을 높이고, 동기부여를 했으며, 긍정적인 사고를 갖게 되는 촉매제의 역할이었다.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한 것이 또한 사람의 특성이 아니던가? 특히 경직된 논문을 쓰려면 기존 논문의 문제점을 파악해야 하는 직업상의 특성 때문인지,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했다. 남을 격려하고 칭찬의 말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칭찬을 받기만 했지, 남에게 많은 칭찬을 하지 못한 것을 요즘 와서 알고 후회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에 학생들의 취업은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 남의 나라말인 영어를 열심히 배우는 젊은이들이 희망의 푸른 등불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듬직하게 느낀다. 인생의 선배로서 내가 경험하고 깨달은 생각을 몇 마디 들려주고 싶다. 강의를 하면서 요즘 느끼는 것은 학생들이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개념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 경우에는 "기본으로 돌아가라(Be back to the basics)"라는 말을 강조한다. 영어를 배우는 것은 기초가 매우 중요하다. 진도를 나가다가 중간에 모르는 것이 있으면 과감하게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사상누각이 되지 않도록 제대로 기초를 다져야만 멋진 집을 지을 수 있다. 또한, 학생들은 영어단어암기와의 전쟁을 벌여야 한다. 영문법은 짧은 기간 내에 마스터 할 수 있으나 단어는 평생을 외워도 다 외울 수 없다. 단어를 암기하지 않고는 영어를 잘 할 수 없다. 영문법은 요리 기구에 영어단어는 요리재료에 비유할 수 있다. 요리재료처럼 단어는 무궁무진하다. 단어를 암기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인터넷 사전사이트에서 제공하는 하루 한 단어를 쓰라고 추천한다. 나는 영어단어 하나를 쓰고, 의미와 예문을 쓰는 일을 15년 이상 계속하고 있다. 실제로 내가 쓴 노트를 보여주면서 시도를 해 보라고 권고하고 싶다. 진정한 교육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실감한다. 무조건 칭찬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적절한 훈계나 따끔한 조언이나 일침도 필요하다. 따라서 모범적인 교육자가 되기 위해서는 칭찬과 조언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지혜를 발휘해야 함을 이제야 깨닫는다.
카페에 홀로 앉아있다. 대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을 혼자 차지하고 앉아 오랜만에 여유를 가져본다. 테이블 위에는 작은 화분이 놓여 있고 이름 모를 선인장이 갓 꽃망울을 터트리며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 앙증함에 펜으로 윤곽을 잡아 보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그리던 종이를 쓰레기통으로 던지고 말았다. 버려진 종이처럼 나도 쓸모없다 생각하며 지낸 적이 있었다. 최선을 다하며 생활하던 첫 직장에서의 갑작스러운 해고는 나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게 했다. 첫아들을 낳은 아내의 얼굴을 처음 대면한 순간,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웠다. 몇 시간의 산고의 고통에서 쏟아 낸 땀과 눈물로 얼룩진 모습은 지난 30년의 세월에서 가장 숭고한 순간이었다. 한 생명을 탄생시켜 사랑으로 성장시키려는 하나의 가치를 가지고 오롯이 집중한 그 시간은 성스럽기만 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생각하며 예고 없이 찾아 온 아픔을 참고 일어설 수 있었다.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지나온 시간들을 반성하고 또 새로운 다짐을 하며 나아가게 한 원동력이 됐다. 어떤 단체든 그 구성원은 각 개인의 역할이 있다. 그 역할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스스로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한다. 드러내 보이는 것과 감춰져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나름의 책임과 의무로 그 역할을 성공시키려 온갖 노력을 쏟는다. 나 역시 최선을 다하며 40대 중반까지 하루하루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불운은 나의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하게 소리 없이 다가왔다. 첫 직장에서 20년 만에 강제로 떠밀려 난 그날은 평생의 쓰린 기억으로 남아있다. 한동안 집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혹시 예전의 직장동료나 지인들을 만날까 봐 낮에는 집에서 머물고, 밤에만 잠깐씩 외출하던 때가 있었다. 스스로 위축되고 초라해져 남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였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무수한 별들이 무심하게 세상을 밝히고 있고, 그 많은 별 중에 어느 별 하나도 나의 마음을 몰라 주는 듯해,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다. 그때의 아린 마음이 지금도 가슴에 밀려 온다. 지인의 소개로 파주의 새로운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월요일 새벽이면 파주로, 금요일 저녁이면 청주로 그렇게 6년을 주말부부로 지냈다. 그런 시절에 만났던 사람 중에 K라는 친구가 있었다. 파주에 다니던 회사의 계열사 직원으로 근무하며 가끔 얼굴을 익혔고, 어느 순간 계열사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내가 다니던 곳으로 이직해 왔다. 나름 능력있고 예의 있는 후배로 생각하며 지내었는데, 일순 또 나갈 처지가 돼 어느 날 축 처진 어깨로 나를 찾아왔다. 그의 모습에서 지난날 나의 쓰라린 기억이 떠올라, 동병상련의 마음이 일어났다. 수소문 끝에 다른 직장을 소개해 줬다. 나도 이제 60을 문턱에 두고 있다. 첫 직장을 떠난 이후 몇 번의 이직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회사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낯선 생활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어느새 정년을 바라보는 지금, 세월의 무심함과 무상함에 이제는 예전의 마음이 많이 치유됐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무겁다. 그때의 기억들은 인생에서 하나의 교훈으로 남도록 마음을 굳게 다잡는다. 매년 1월에는 여러 결심을 해왔다. 30~40대에는 외국어 배우는 것을 우선으로 뒀고, 50대는 자격증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시도해 보려 했으나, 매년 12월이 돼 그 해를 뒤돌아보면 막상 이뤄 놓은 게 하나도 없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계획과 실패의 반복이었다. 1월에는 뭔가 해 보겠다는 굳은 결의로 계획을 세우며 뿌듯해하고, 12월에는 나약한 의지와 게으른 자신의 모습에 좌절하면서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해 왔던 것이다. 이제 생각을 바꿔야겠다. 지금까지는 사회생활의 방편으로 필요에 의해 억지로 했다면, 갑진년 새해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것에 관심과 열의를 가지고 제대로 실행해 보련다. 기타 배우기, 붓글씨 쓰기, 수필 쓰기 등…. 그중에서 중도에 포기한 것도 있지만 최근 새로운 시작과 도전을 해 꼭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 몇 년 후 나의 추억과 감정을 오롯이 담아낸 한 권의 수필집, 서예와 수묵화를 실은 도록집을 내는 것이다. 이제는 지난날의 어둠을 밀어내고 새벽의 일출을 두 팔 벌려 맞아야겠다. 한때의 아픈 기억은 성장의 디딤돌로 나를 키운 자양분이라 생각한다.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지금, 순간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며 그 시간들을 소중하게 간직하련다.
밤새 바람이 불다가 새벽이 되니 고요해졌다. 이른 새벽 아내 대신 가게 문을 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찬 기류에 의해 이동된 눈구름은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다. 소리없이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보니 지나온 날이 떠오른다. 23년 전 아내는 아파트 단지 내 상가를 분양받아 문구점을 열었다. 어린이들의 순진무구하고 해맑은 모습들을 보면 욕심도 미움도 다 떨어 버리고 정직하게 살아야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며 아내는 어린이처럼 좋아했었다. 코흘리개 돈으로 많은 돈을 모을 수는 없지만 일자리가 있고 착한 어린이들을 주 고객으로 한다는 것이 큰 즐거움이고 보람이란다. 오늘같이 눈이 오는 엄동설한에 다니던 회사가 부도처리 되면서 나는 갈 곳을 잃었다. 아침이면 허전한 마음에 축 늘어진 어깨를 추스르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 보지만 여전히 막막할 뿐이었다. IMF 여파로 건설 시장은 얼어붙어 취직하기가 쉽지 않은 때여서 사업을 하기로 했다. 워낙 불경기여서 어려움은 계속됐지만, 지인들의 도움으로 사업은 그럭저럭 잘 됐다. 하지만 공사대금으로 받은 수억 원의 어음이 부도가 나면서 빚을 지게 됐다. 하는 수 없이 살고 있던 시내 아파트를 팔고 내수로 이사를 오게 되고, 아내는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이른 새벽부터 가게 문을 연지가 이십여 년이 됐다. 시골이고 평수가 작은 아파트다 보니 홀로 외롭게 사시는 어르신들이 계신다. 수도가 얼어 물이 나오지 않거나 물이 내려가지 않으면 가게로 연락이 온다. 아내는 긴급으로 전화 요청을 하고, 나는 최대한 빨리 와서 해빙기로 언 수도를 녹여주면 금세 물이 나온다. "멀리 사는 아들딸 다 필요 없네. 사장님이 최고여 정말 고마워요" 하신다. 우리 가게에서 구하지 못하는 물건을 시내에서 구해달라고 부탁도 한다. 어르신들의 부탁이 있는 집에 들어서면 집안이 썰렁하다. 한겨울의 냉기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난방은 전기장판에 의지하나 춥고, 외롭고, 쓸쓸하게 노년을 살아가고 계신다. 기술은 재능기부를 하지만 부득이 자재값은 받는데 가끔은 받지 않고 돌아올 때도 있다. 숨겨 두었던 꼬깃꼬깃한 돈을 한참을 바라보면 쓸쓸함이 묻어 있는 그 돈을 도저히 받을 수가 없어 "어르신 물 한 사발만 주세요. 오늘 일은 이 물 한 그릇으로 대신할게요"라고 하면 어르신은 내 두 손을 꼭 잡고, 고맙다며 복 많이 받을 거라며 눈물을 글썽이신다. 나도 어려웠던 때가 있었기에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나야 다음에 돈을 벌면 되지만 어르신은 목숨과도 같은 돈일 것이다. 돈보다도 더 값진 하루였다. 그 돈을 받았더라면 몇 날 며칠이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골에서 공사를 하다 보면 저렴하게 잘해줘 고맙고 미안하다며 밭에서 풋고추며 깻잎 등을 따서 주시고 된장, 고추장까지 싸서 주신다. 이럴 때면 대학 다닐 적에 자취하던 생각이 난다. 어머님이 이것저것 빠짐없이 한 가방을 싸 주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높고 깊은 사랑을 주셨던 부모님 생각이 나면 가슴이 저리며 그리워진다. 부모님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게 살고자 애쓰고 있으나, 살아 계셨을 때 은혜에 보답을 못 해드려 너무나 죄송하다. 아내는 손에 든 것을 보면서"오늘도 좋은 일 하셨구려"하며 잘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어넘긴다. 한두 번이 아니니 으레 그러려니 한다. 어르신들은 온종일 TV만 보다가 지루하면 딸이 사는 집을 찾아온 것처럼 우리 가게를 찾아와 차 한잔을 마시며 담소하고 외로움을 달래다가 가시곤 한다. 그 뒷모습을 보면 돌아가신 친정어머니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며, 교대 시간이 되면 우울했던 마음을 전해준다. 작지만 사랑방 같은 가게가 있어 행복하다. 몇 해 전부터 아내는 여름이면 채마밭에서 상추나 깻잎을 홀몸노인이나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조금씩이나마 나눠 준다. 동짓달이 되면 텃밭에서 가꾼 배추로 넉넉하게 김장김치를 담가 역시 나눠주곤 한다. 외롭게 사시는 어르신들은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서로가 마음의 의지가 되는 삶이다. 자식들이 드시라고 사준, 과자나 과일이 생기면 손에 들고 꼭, 문구점을 찾아오신다. 내리던 눈은 어느덧 쌓였어도 햇볕은 따사롭다. 이 한겨울, 하루빨리 화사한 봄이 와서 가난한 이웃들이 추위에 떨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도 서로 돕고,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관계는 어머니와 자식의 사이가 아닐까? 인간이든 짐승이든 온갖 위험과 역경으로부터 인고의 시간을 감내하고 생명을 탄생시키는 어머니. 어머니는 그 자체로 한없이 존경과 추앙을 받아야 한다. 어머니의 고통과 희생으로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자식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어머니와 자식은 억만겁의 인연으로 만나 함께 보낸 시간들은 소중한 추억이요, 더없는 행복이 아닐까? 가난했던 농촌에서 겨울철 최고의 요깃거리는 고구마나 토란이었다. 겨울밤이면 커다란 가마솥에 삶아 이웃과 나눠 먹으며 보낸 지난날들이 새록새록 그립다. 또 배추뿌리나 무를 꺼내다 깎아 먹기도 했다.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밤이 깊어 가도록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며 새끼도 꼬고 맷방석을 만드셨다. 어머니는 뒷방에서 찰그탁 찰그탁 베를 짜셨다. 그런 나의 유년 시절의 추억과 함께 문득 어머니의 일생을 영사기 되감기 하듯 회상해 본다. 어머니는 사십 초반에 유방암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수술을 막 끝내고 입원실에 누워계셨다. 어린 자식들은 어머니 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걱정스러운 눈망울로 불안에 떨었다. 어머니 가슴의 아픈 상흔은 어린 자식들의 마음을 무척이나 아프게 했다. "나는 괜찮다"며 어린 자식들을 안심시키는 어머니도 고개를 돌려 흐르는 눈물을 말없이 삼키셨다. 다행히 어머니는 퇴원을 하셨다. 살아가며 할머니와 가끔은 고부간의 갈등이 있어도 이겨내는 내공(內功)이 쌓이셨다. 할머니께 싫은 내색을 못하지만 마냥 천사 같던 어머니도 마음의 소리를 하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도 며느리였구나, '며느리는 딸일 수 없다'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머니가 육십 중반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젠 오롯이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있는 위치가 됐지만, 자식들의 안위와 안녕을 빌며 마음 졸이시고 외롭게 생활하셨다. 어머니께 전화할 때면 "나는 너희들이 건강하면 그뿐이다"라고 항상 말씀하신다. 무어라 더 말할 수 있을까? 그리움은 가슴에 묻고 얼른 전화를 끊는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이 가슴에 저며 왔다. 팔십을 바라보시며 지내던 어머니는 아픈 다리를 끌고 이웃 아주머니와 도시의 정형외과를 찾았다. 그동안 참고 있던 다리가 아파도 자식들에게 걱정 주지 않으려 말도 없이 병원을 찾아가 다리 수술을 받으셨다. 수술 경과가 좋지 않아, 또 다른 합병증으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대학병원에서 요양 병원으로 또, 대학병원으로 오고 가며 2년여간의 지루한 병원 생활을 하셨다. 병원 침상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천정만 쳐다보시던 어머니다. 자식들이 병실을 찾아오고 병실을 나설 때도, 그 정이 많고 다정했던 어머니는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한 얼굴만 하고 계셨다. 이제는 소생의 희망이 없던 어머니셨다. 어느 날 어머니를 보살피던 큰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먼저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병원에서 꼼짝하지 않고 누워만 계시던 어머니가 침상을 털고 퇴원하셨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큰 형이 어머니 곁에서 정성을 다하여 간호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아무런 삶의 의욕도 없던 어머니가 기운을 차리고 활동을 하셨다. 시골에서 생활하시다, 어머니는 또 병원에 입원하셨다. 그동안 잦은 병환으로 병원 진료를 받아 왔지만, 이제는 근력이 없어 삶의 끈을 놓으셨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올여름에 회복할 여유도 없이 입원 중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운명을 하셨다. 어머니는 가난한 촌부(村夫)의 아내로, 층층시하 시부모의 시집살이에 사랑하는 자식들을 마음껏 안아 보지도 못하고, 눈치로 살아오셨던 삶이었다. 더구나 자식들을 공부시키느라 어릴 적에 외지로 떠나보내 놓고, 즐겁고 소중한 기억보다 그리움과 애달픔만 가득 남은 일생이었다. 외식이다, 여행이다, 남들 다하는 일상의 소소함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항상 부엌에서 들에서 종종걸음치며 일생을 보낸 세월이셨다. 우리들 어머니의 모습이 유사할 진데, 유독 내 어머니가 더 불쌍하고 가련하시다. 어머니의 일생이 가슴 아프게 스며든다. 나는 까마귀만도 못한 자식이다. 나는 숭고한 '어머니'란 단어조차 부를 자격이 없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한 해가 저물며 어머니께 죄스럽고, 더없이 그립고 보고파 진다. 어머니! 부족한 자식을 용서하시고 "이제 마음껏 웃고, 훨훨 날으셔요"
오늘은 산악회에서 한탄강의 주상절리를 감상하기 위해 순담계곡의 잔도 길을 걷는 날이다. 한껏 기대를 품고 새벽 일찍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짙은 녹색의 목도리를 목에 둘러주며 잘 다녀오라고 배웅을 한다. 이른 새벽의 찬 공기를 막아주며 따스함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자세히 보니 큰딸이 고등학교 다닐 때 손수 떠서 생일선물로 준 것이다. 한탄강에 도착하니 최전방에 강바람이 더하여 모두 몸을 움츠리며 춥다고 야단법석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 추운 줄을 모르겠다. 무척이나 다행이다 싶다. 어릴 적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저녁, 시장에 가신 어머니 마중을 나갔던 생각이 난다. 허름한 옷에 맨손으로 광주리를 이고 오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커서 돈을 많이 벌어 어머니께 두툼한 털목도리와 따스한 장갑을 꼭 사드려야지 하고 마음만 먹고는 실천하지 못했다. 중학교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어머니와 나는 솔방울을 따서 시장에 팔았었다. 등록금은 1천110원이었는데, 솔방울 한 가마니에 80원에서 100원을 그날그날 시세에 팔았다. 등록금과 교복 등 학비를 마련하고서는 더는 솔방울 따는 것을 하지 않았다. 일하는 김에 몇 가마니 더 해서 고생하신 어머니께 목도리와 장갑을 사드려야 했는데 철이 없어 그 생각을 미처 못한 아쉬움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오후가 되니 바람이 많이 불고, 추워지니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농사일이 끝나고 겨울이 되면 산에서 땔감을 해 시장에 내다 파시곤 하셨다. 한시도 쉬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엄동에도 허름한 작업복에 추위를 잊으신 채 산을 오르내리셨다. 사랑방에 항상 군불을 지펴 따뜻하게 해 주셨다. 밤이 늦도록 우리 사형제가 호롱불 밑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시곤 하셨는데 어린 마음에 아버지는 으레 추위도 피곤함도 외로움도 모르는 줄만 알았다. 모처럼 춥지 않은 즐거운 산행을 하고 왔노라고. 아내에게 말을 하니 그러지 않아도 이번 생일선물로 번갈아 두를 목도리를 하나 떴다고 한다. 하얀 털실에 밤색 무늬가 살짝 들어있어 보기에도 좋다. 가늘면서 길게 그리고 세련되고 멋지게 짠 목도리를 나의 목에 감싸준다. 어린아이처럼 좋으면서도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한 올을 짜면서 우리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또 한 올을 짜면서 뜻하는 모든 일이 소원성취 하기를, 또 한 올 짜면서 무병장수하기를, 기도하며 온 정성을 들였으리라. 눈이 내리고 바람이 많이 불어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면 부모님 생전에 목도리를 사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죄스럽다. 자식들을 위해 추위를 견디시며 시장을 다니시느라 고생하시던 아버지 어머니를 위해 목도리를 사드렸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생각하니 후회와 죄책감에 가슴이 아려온다. 그동안 추위가 기승을 부려도 아버지 어머니께 목도리를 해드리지 못한 자식의 죄송함에 딸이 선물한 목도리를, 부모님 생각에 평생을 목에 두르지 않았다. 어머님 나이에 이르러서야 딸이 해준 목도리, 아내가 생일선물로 떠준 목도리를 두르게 됐다. 요즈음 외출할 때면 언제고 흰색과 녹색 목도리를 번갈아 두른다. 나이를 먹으니 말없이 고생하며 가족들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헌신하고, 남편이 하고자 하는 일이면 묵묵히 내조를 잘해준 아내가 한없이 고마웠음을 느낀다. 그리고 외손자들을 만나면 네 엄마가 고등학교 다닐 때 외할아버지한테 생일선물로 만들어준 목도리라며 은근히 자랑한다. 함박눈이 내려 아름다운 순백의 세상이 되면 부모님께 사드리지 못한 목도리와 장갑을 외손자들에게 사주고 눈사람을 만들며, 부모님에 대한 사랑 이야기와 내 어릴 적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달달한 모닝커피로 하루를 시작한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 밖으론 휘이익… 쉬이… 바람 소리와 함께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이 공중에서 곡예를 부린다. 이미 땅으로 떨어진 낙엽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황소가 안간힘을 쓰듯 바스락거리며 시멘트 바닥을 뒹굴고 있다. 헛헛한 기분을 달래며 커피잔을 드는데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중학교 친구의 부음 소식이다. 순간 머리와 가슴에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온다. 고향에 정착해 마을의 이장까지 하며 활발하게 농사를 짓던 친구가 벌써 세상을 떴다니….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상념에 빠져들었다. 퇴직할 때만 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20~30년을 보내나 걱정을 했었다. 헌데, 한 해 한 해 계절이 바뀌고 떨어져 나가는 달력을 보며 인생의 덧없음이 느껴지곤 한다. 지금 내 인생은 어디쯤 와 있을까. 떨어지는 낙엽같이 언제 이 세상을 하직할지 모르는 허무한 인생인데, 지나온 삶에 지나친 욕심은 없었는지. 남에게, 내가 사는 사회에 해악은 끼치지 않았는지. 장남으로 가장으로 살면서 책임은 다했는지 곰곰이 과거를 돌이켜 본다.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들었던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생각해본다.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있어서는 안 될 사람 중에 난 어떤 사람이었나. 당시 꼭 필요한 사람은 못되더라도 적어도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은 되지 말자고 다짐을 했었는데, 이쪽 편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덤비다가 저쪽 사람에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낙인찍힌 건 아닌지. 장남으로, 가장의 책임을 다한답시고 동생들, 아내 자식에게 윽박지르며 내 생각을 강요한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을 해본다. 얼마 전 고향 사람 모임에서 후배에게 들은 "형은 무슨 재미로 살아유· 담배도 안 피지. 술도 못 먹는다고 하지. 노래방도 안 가지. 그렇다고 애인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라고 한 것처럼 재미도 없고 행복하지도 못한 삶을 살아온 걸까. 아니면 아내와 함께 아들딸의 재롱을 만끽하며 자립까지 시켰으니 나름 행복하고 보람된 삶을 보낸 걸까. 똑같은 삶을 다시 산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지만, 좀 더 재미있게 즐기며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살짝 들기도 하는 오늘이다. 퇴직하고 나이를 먹다 보니 성공에 대한 관념도 달라지는 것 같다. 젊었을 땐 돈을 많이 벌고 승진을 하고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 즉 다른 사람보다 앞서가는 것이 성공인 줄 알았다. 나이가 들으니 이제는 평범하게 사는 것 자체가 성공이라 느껴진다. "나쁜 짓 하지 말고 남에게 얻으러만 안 가고 살면 된다"고 입버릇처럼 하시던 어머님의 말씀이 젊었을 땐 마뜩잖았었는데, 평범하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는 어머님 나름의 가르침이 옳은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러고 보면 나름 성공한 인생이다. 첫 직장에서 무탈하게 훈장까지 받으며 정년퇴직했고, 한 여자와 헤어지지도 사별하지도 않고 살고 있으니, 복이라면 복이요, 성공이라면 성공이다. 또 요즘 친구들끼리 농담 삼아 "자식들 다 결혼시켰으면 성공한거여"란 말을 하는데, 아들딸 모두 제 짝을 찾아 손자, 손녀까지 안겨 주었으니 이 또한 행복이고 큰 성공이라고 자위도 해본다. 봄 여름을 보내고 가을의 문턱에서 선 지금 이 가을을 어떻게 보낼까 깊이 생각해본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백년을 살아보니 인생의 황금기는 65세부터 75세까지라고 했다. 지금 내가 이 황금기 인생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부터라도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허무한 감상에만 빠져있진 말아야겠다. 지금까지 살면서 아쉬웠던 점을 채워나가야겠다. 사람들이 죽기 전에 '그때 좀 더 즐길걸, 참을걸, 베풀걸' 이것을 못 했다고 가장 많이 후회한다고 한다. 이 세상을 하직할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좀 더 참고, 베풀고, 즐기면서 이 황금기 가을을 보내야겠다.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가꾸어 거무튀튀하고 우중충한 낙엽이 아닌 초록과 빨강 노랑이 은근하게 어우러진 감나무 잎같이 곱게 물들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
요즈음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인지 조그만 말에도 서운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또는 내가 한 말에 대해 상대방이 반감을 갖고 항의하면서 본인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일이 가끔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친한 사이인 부부와 만나서 얼굴도 보고 이런저런 옛 추억을 더듬어가며 즐거운 대화를 하면서 밥을 먹었다. 식사비는 내가 계산했다. 그리고 얼마 후 둘이 만나서 밥을 먹었다. 역시 계산은 내가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말은 "밥 먹고 싶을 때 전화해"였다. 순간, 그래 내가 친구한테 밥 얻어먹고 싶으면 전화하자고?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서로 얼굴 보고 싶을 때 만나서 대화도 하고 밥도 같이 먹는 것이지 밥만 먹자고 전화한다고? 자존심이 강하게 발동해 두 해가 지나도록 밥 먹자는 전화는 하지 않고 안부를 묻는 전화만 가끔 한다. 이런 한자 글이 생각난다. 백규지점 상가마야 사언지점 불가위야(白圭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 우리 말로 표현하자면 흰 옥의 흠결은 언제든지 갈아서 없앨 수 있지만, 내뱉은 이지러진 말은 어찌할 수 없다. 즉, 말은 신중히 해야 한다는 격언이다. 말하기 전에 하고 싶은 말에 어떠한 파장이 있을까? 생각해 본 뒤 상하좌우를 막론하고 가리고 다듬어서 말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친한 사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들 사이에는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문구가 들어갈 수가 있겠다. 차라리 아무런 의미가 없는 여자들의 수다가 서로 간에 부담이 없고 상처를 줄 만한 말이 없을 것 같다. 물이 가득 들어있는 항아리가 흙바닥에 넘어져 흘러버린 물은 흙탕물이 된 채로 어느 정도 쓸어 담을 수 있겠지만 완벽하게 본래의 모습의 물을 담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 같다. 말이란 잘만하면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다. 교훈적인 말을 늘 마음속에 쌓아두고 살아가기를 스스로 내 자신에게 부탁한다. 요즈음 색소폰 동아리에서 연주 지도하면서 틀리는 부분에 대해 지적하면서 하나씩 교정을 해 나간다. 나이가 많은 선배들에게 나도 잘 안되는데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하라고 연주 방법을 수정하라고 말한다. 어떻게 하면 서운하게 들리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했었다. 즉시 교정을 하겠다는 표정을 보이는 분도 있지만 기분이 언짢은 듯한 표정을 보이는 회원도 있다. 동아리가 단합된 모습을 늘 지닐 수 있게 대화의 방법을 강구한다. 쉬는 시간에는 언짢은 표정을 보인 회원에게 슬쩍 기분이 풀릴만한 농담을 던져 웃음을 보이도록 말을 건네기도 했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다. 말은 적게 할수록 허점을 보일 확률이 낮아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적어질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살아가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이런저런 일로 만나서 대화해야 하는데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니 최대한 말실수 없게 조심을 하는 것이 상책이다. 상대방이 기분 좋게 들리는 말, 웃음을 주는 말, 사랑을 주는 말, 나아가 행복을 담아주는 말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살피며 말을 해야 하겠다. 재삼 다짐한다.
어느덧 가을 달빛도 고요하다.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은은하다, 새벽녘엔 제법 서늘한 기운이 창문 틈으로 파고들어 이불깃을 당긴다. 아파트단지 둘레의 나무에는 아직 신록이 남아 있지만, 잎사귀들은 곧 제빛을 잃고 울긋불긋 고운 색을 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낭만적인 단풍이 되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가으내 쓸고 치워야 하는 낙엽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서글퍼진다. 오늘따라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아도, 청소하는 아주머니의 인기척은 들리지 않는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냅다 달리는 차 소리가 소음이 되어 간간이 귓전을 스친다. 묵은 대추를 푹 끓여 만들어 두었던 음료를 커다란 대접에 담아, 쟁반에 조심스레 받쳐 들고 아예 찾아 나섰다. 14층부터 내려가는 계단은 주전자에 덜 풀어진 미숫가루 물 한가득 담고, 들판에서 일하는 부모님을 찾아 동구 밖을 향하던 길처럼 느껴져 발걸음이 빨라진다. 한참을 내려가다가 3층에서 아주머니를 만났다. 서로 반가워하며 바닥에 같이 주저앉았다. 그녀가 말할 적마다, 태어날 때부터 보이지 않았다던 한쪽 눈이 추임새처럼 찡긋댄다. 무심결에 생각이 나서 찾아 나섰건만 이렇게 대화를 나누니 반갑다. 함박꽃처럼 활짝 마음을 열고, 젊어서 남편 여의고 홀로 자식들 키우며 살아온 고달픈 인생을 들려준다. 오며 가며 인사만 나누었는데 그것도 알게 모르게 든 정이었나 보다. 이렇게 한잔의 음료라도 주는 이의 작은 마음이 얹어지고, 받는 이가 조금이라도 성의를 알게 된다면 어느 명품 차가 좋다 한들 이것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혼자 마시는 차는 고독을 달래며 아취(雅趣)를 더하지만,둘이 나누는 차는 그윽한 차향 속에 스스럼없는 담소로 서로의 경계를 없애준다. 그녀와 따듯한 대화가 이어지면서 저절로 맑고 향기로운 차처럼 마음이 유순해진다. 한쪽 눈으로 살아온 세상을 원망도 없이, 속내를 찬찬히 풀어내고 웃음 지어주던 모습에 일상에서 안달복달하며, 감정조절도 잘하지 못한 자신이 괜스레 부끄러워진다. 그녀는 다른 쪽 눈도 시력을 잃고 있어 다음 달에 수술 날짜를 잡아 놓았단다. 이제 더는 이 일을 할 수 없다며 주머니에서 꺼내 손에 쥐여 주는, 눅진한 사탕 때문인지 가슴 한편이 서늘하다. 만났다 언젠가는 헤어지는 게 인생이라 하지 않았던가. 순간 회자정리(會者定離)의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윽한 차는 향의 성품도 좋지만, 달큼한 음료를 만들고 있노라면 숭얼숭얼 피어나는 정 같아 누구라도 찾아가 함께 마시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선인들처럼 자연에 동화되어 외로움을 다스리듯, 정을 나누며 잠시나마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앞만 보고 바쁘게 살던 일상의 답답함은 어느새 저만치 달아난다. 별생각 없이 나섰지만 짧은 시간에 한 사람의 삶을 대하며 늘어진 정신과 나태해진 생각을 다시금 추스른다. 아주머니는 어렵사리 장가 간 장남에게 짐이 될까 봐 걱정이 깃들어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일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마중 온다는 아들의 살가운 전화 목소리에, 보이지 않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금세 얼굴이 환해진다. 그 모습을 보니 오히려 은은한 차 한잔에 마음 담아 대접받은 듯, 괜한 동정심은 사라지고 어느새 가슴이 훈훈해진다. 그녀는 삶의 격정을 이겨내고 찻상 앞에 돌아와 차분히 앉아 있는 어머니 모습이다. 나는 멀리서, 아니면 책 속에서 나름대로 가치 있는 삶의 방법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고개 들어보면 내 주변 여기저기에 흩어져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동안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며, 명예와 이익을 따지느라 마음의 눈을 한쪽만 뜨고 세상을 바라본 것 같다. 살아오면서 늘 가까이 있는 것에 익숙해져 소중한 줄도 모르고 지나치며 살아온 건 아닌지, 비워진 대접 안쪽을 살피는 것처럼 나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보련다.
어머니가 그리운 날이면 촛불을 켜고 싶다. 나는 철없는 딸이었다. 속내를 드러내지도 않고 무심하게만 보이는 어머니가 야속하여, 불평불만이 많았다. 얼마나 걱정이 되셨으면 혼수를 장만하시면서 내게 좋은 촛대를 꼭 사주고 싶다고 하셨을까. 불현듯 어머니의 촛대에 촛불을 밝히고 싶었다. 첫날밤을 밝혔던 촛대를 꺼내 닦아 선홍빛 초를 꽂고 불을 당겼다. 백합꽃을 좋아하셨던 어머니의 온화한 미소가 어른거리고 "잘 살아라" 하시던 음성이 귓가를 맴돈다. 결혼식을 하고 바로 시댁으로 들어가 폐백을 올리고 새댁 노릇으로 하루를 보내고 처음으로 생긴 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자그마한 화장대 위에 선 삼단 은빛 촛대에 꽂힌 선홍 촛불이 방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어서 오렴. 힘들었지!" 나는 그만 '어머니!' 하고 털석 주저앉았다. 멍하니 촛불을 바라보며 흐르는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시집가면 친정에 올 생각을 하지 말아라" 하시던 말씀이 서럽고 야속했다. 어머니는 내게 집안의 빛이 되라고 딸의 신방을 촛불로 밝혀 주고 싶으셨나 보다. 촛불은 소원을 담고 근심 걱정을 해소하며 축하와 행운의 뜻이 있다고 했다. 모두가 잠든 이 밤, 어머니는 지금 무얼하고 계실까.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실까. 딸 걱정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고 계실까. 신혼의 달콤한 꿈에 빠진 큰딸의 첫날밤을 상상하며 행복해 하실까. 단정하고 흐트러짐이 없으신 어머니는 짧은 옛이야기나 속담, 수수께끼를 즐겨 들려주시는 지혜로움으로 우리를 가르치셨다. 딸이 많으니 항상 조심스럽고 걱정스러움에 노심초사하신 속 깊은 어머니의 사랑을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을까. 어머니는 하루를 항상 기도로 여셨다. 너희도 아버지 같은 신랑을 만나면 좋겠다고 늘 말씀하시던 어머니. 금실이 좋으신 부모님의 모습은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소천하시자 어머니는 건강을 잃고 외롭고 허약한 심신의 고통으로 병원을 전전하며 10여 년을 고생하셨다. 집은 허술해도 병원이 가깝고 교통도 편리하여 편해하시는 어머니를 모셨지만, 겨울이 오면 외풍이 심한 허름한 집이라 새로 짓기 전까지, 여건이 좋은 인천의 여동생이 모시기로 했다. 어머니를 배웅하고 돌아와 나는 그만 터지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전화 받침 아래 살짝 넣어두고 가신 하얀 봉투 '집 잘 짓고 너의 내외 만수무강하여라. 엄마 두 손 모아 빈다.' 가슴이 뭉클했다. "어머니!" 송수기를 들고 울먹이는 내게 "나는 좋기만 한데 애처럼 왜 울어. 돈은 필요한 사람이 쓰는 거여. 난 이제 돈이 소용없어. 울지 말아" 다독이며 어루시는 모정이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새집을 마련했을 때 어머니는 "참 잘했다. 축하한다"는 말씀뿐 오실 수가 없었다. 위독하시다는 전화에 달려간 병실에서 산소마스크를 쓰신 얼굴에 "엄마아!" 얼굴을 맞대고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다. 자애로우신 눈빛을 단 한 번이라도 뵈었으면 원이 없을 것만 같았다. "외롭다. 사람이 그립다. 너의 집에 가고 싶다" 하시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마음을 진정하고 어머니 가슴에 손을 얹고 흐느끼며 성가를 조용히 부르던 날이 회상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장례미사와 촛불 고별예식으로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참 평화와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는 없었다. 한 생의 무거운 짐을 벗어놓고 불길을 따라 하늘로 오르시는 어머니의 초연한 모습이 서러움보다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촛불은 어머니의 기도를 담았나 보다. 어려움도 근심 걱정도 잊게 하는 치유의 신비가 나를 다독인다. 어머니와 함께하던 말놀이며, 윷놀이, 전통 꽃 맞추기로 환하게 웃으며 즐거워하시던 고우신 모습이 불빛에 어른거린다. "어머니! 어머니처럼 기도하고 사랑하고 보듬으며 잘 살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참 평화와 영원한 복락을 끝없이 누리소서" 가만히 손을 모은다.
지루한 장마가 몇 주째 계속되고 있다. TV에선 폭우로 인한 산사태 피해와 물이 불어나는 실시간 소식을 알리고 있다. 하천 범람으로 침수된 마을과 논밭의 처참한 현장을 보여준다. 망연자실하며 진흙에 쌓여 있는 가재도구를 바라보는 이재민들의 슬픈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하고 우울하다. 폭우로 한동안 운동도 못했으니 몸이 찌뿌둥한 느낌이다. 기분을 전환하려고 우산을 챙겨서 무심천으로 향했다. 밤새 내린 비로 하상도로가 잠겼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사람들이 오고 간다. 무심천의 하상도로 인도길! 온갖 잡풀과 금계국, 붉은토끼풀이 지천으로 피어 있고, 군데군데 달개비꽃이 수줍게 미소 짓고 있다. 머리에 빗방울을 머금고 힘에 겨워 흔들거리는 강아지풀이 수해를 입은 이재민처럼 애처롭게 느껴진다. 양옆으로 빼곡히 늘어선 운치 있는 갈대숲을 거닐며 왜 진작 나오지 못하고 집에만 있었나, 하는 후회가 살짝 들기도 한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대부분 우산을 썼지만 쓰지 않은 사람도 이따금씩 지나간다. 나도 우산을 접었다. 어차피 땀으로 젖나 비를 맞아 젖나 샤워는 해야 하고 세탁도 해야 할 터, 비를 맞기로 했다. 촉촉이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걷노라니 어느덧 인적이 뚝 끊기고 작천보의 물소리가 거세다. 주변 둔치에는 며칠 전 범람으로 갈대를 비롯한 작은 나무들이 납작 누워 있고, 그 위로 시커먼 부유물과 진흙들이 엉켜 있다. 가난에, 빚에 찌들어 허리 한 번 못 피시고 버거워 하시던 아버지의 축 처진 모습이 투영된다. 백로 떼가 끼룩끼룩 소리 내며 갈대밭 위를 낮게 날며 먹이를 찾고 있다. 긴 다리를 물에 담그고 유유자적 거닐며 물고기를 잡는 것이 백로의 본래 모습일진대 갈대숲 진흙을 긴 부리로 헤집으며 먹이를 찾는 모습이 더없이 안쓰럽고 애처롭다. 백로의 가쁜 날갯짓에서 아버지의 비장함이 교차한다. 예닐곱 개로 이뤄진 다랑논이 긴 장마와 태풍 끝에 논두렁이 무너져 진흙으로 뒤덮이고 벼가 물에 잠겼을 때다. 술을 전혀 못 하시는 아버지는 막걸리에 취해서 논가에 쓰러지셨다. 꼬박 이틀을 누워계시던 아버지께서 이웃 마을 머슴살이를 가겠다고 선언을 하셨다. 엄마는 젖먹이 동생을 안고 울고만 계셨었다. 어린 육남매의 호구지책을 해결하러 집을 떠나셨던 아버지처럼 백로도 어린 새끼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 위해 진흙더미를 헤집고 있는 것이겠지. 그때의 아버지의 단호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듯하다. 후드두둑 소리가 커지면서 빗줄기가 굵어지고, 작천보의 물소리는 더욱 거세게 들렸다. 흠벅 젖은 몸이지만 다시 우산을 펼쳤다. 끼룩끼룩 울면서 갈대숲을 헤집던 백로 떼도 어느덧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어린 새끼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겠지. 한낮 짐승도 밤이 되면 새끼가 있는 집으로 향하는데 고된 일을 마치고도 주인집 문간방에서 기거하신 아버지는 얼마나 가족의 품이 그리웠을까. "일이 힘들고 고단해서 또 곰살맞은 새끼들이 너무나도 보고 싶어서 뛰쳐나오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역설적으로 자식을 생각하며 참고 또 참으면서 서로를 위로하며 버티었다"는 함께 머슴살이를 떠났던 동네 아저씨의 말씀이 빗소리를 타고 울려 온다. 자식을 먹이고 공부를 시키려고 그렇게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셨는데, 그런데 나는 아버지가 머슴살이를 갔다는 얘기가 싫고 창피해서 서울로 일하러 가셨다고 담임 선생님께 거짓말까지 하지 않았던가. 회한이 몰려온다. "나중에 네가 커서 고생하신 아버지께 잘 해야한다"는 그 아저씨의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한데… 효도를 받기는 커녕 자식의 성장도 보지 못하시고 젊디젊은 불혹의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셨으니 한이 된다. 더욱이 아버지의 임종도 못하였다. 훈련시간에 유격장에서 뒤늦게 관보를 받고 귀가했으나 끝내 아버지의 장례식도 못 치른 불효가 천추의 한이 되어 가슴이 미어진다. 비와 뒤범벅이 된 뜨거운 눈물 앞에 망태가방 달랑 메고, 이웃 마을로 떠나시던 아버지의 검게 탄 모습이 떠오른다. 결코 자식들을 굶주리게 할 수 없다는 입술을 꽉 깨문 비장한 얼굴이 먹구름 속에서 슬프게 밀려온다.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는 우리가 원하면 무엇이든 가져다주고, 맛있는 음식도 금세 만들어주셔서 요술을 부리는 줄 알았다. 밤낮없이 일만 하시는 어머니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어 글을 모르는 줄 알았다. 그렇게 철없는 생각을 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 달이 더 지났다. 불현듯 솟아오르는 슬픔을 억누르느라 칠 남매 중, 누구도 먼저 유품을 정리하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저 아버지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 새벽, 마음먹고 어머니 집으로 갔다. 어머니 물건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보니 모두가 어머니 손길들이라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어보니 칸칸이 말끔하게 정리된 옷들이 어머니의 외출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주인 잃은 옷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사연이 담긴 것들이라 어머니의 추억과 체취를 느끼며 눈물이 났다. 그날, 옷을 정리하며 어머니의 정까지 모두 버리는 것 같아 가슴이 너무 아리고 아팠다. 다 버렸나 싶었는데 방 한쪽 구석에 있는 화장대가 보였다. 화장대 서랍을 여니 잘 정리된 물건 위에 놓인 공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파란색 그림이 그려져 있는 초등학생들이 쓰는 칸이 넓은 줄 공책이었다. 공책을 펼치니 큰집, 작은집 대소사는 물론 형제들의 생일과 당신 손주들의 생일까지 세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큰집의 조카들과 조카며느리들의 생일까지도 모두 적어 놓으셨다. 그야말로 가족의 역사를 기록해 두신 우리 집안의 보물 같은 공책이었다. 공책 속에는 아버지와 함께 제주도에 다녀오시고 써 놓은 기행문도 있었다. 늘 바쁘게 일하는 모습만 보았는데 어머니는 언제 이런 글을 다 쓰셨을까. 제주도에서 본 그 많은 것 중 유채꽃이 제일 곱더라고 써 놓은 소박한 어머니 마음에 코끝이 찡했다. 그 글을 읽고 또 읽으며 고단했던 어머니의 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했던 딸이기에 울고 울었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해 피곤하실 텐데도 늦은 밤 글을 쓰시던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혹시, 어머니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는 딸에게 서운한 생각을 하시지는 않았을지. 칠남매나 되는 자식을 두셨지만, 어느 자식 하나가 어머니 마음을 살피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공책을 한 장 더 넘기니 가수 전미경 씨가 부른 '장녹수'라는 노래 가사가 2절까지 적혀 있다. 사는 동안 나는 어머니가 노래 부르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니 콧노래를 흥얼거리신 적도 없었다. 그런 어머니가 노래 가사를 적어 놓으셨다니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노래 가사를 읽어 가는데 자꾸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마치, 어머니의 인생을 그려놓은 것처럼 절절한 노랫말에 손가락으로 밑줄을 그어본다. 어머니도 이 노래 가사가 당신의 삶과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이 노래가 좋아서 적어 놓았을까. 어머니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 같아 공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도 터놓고 하소연할 수 없었던 노년의 외로운 삶을 글로라도 풀어내려고 애쓰셨던 어머니. 자식들 때문에 당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사셨던 어머니의 삶이 절절히 느껴져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어머니의 인생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린다. 어머니는 평생 무슨 낙으로 사셨을까. 어머니 마음이 담겨있는 공책을 가슴에 안고 돌아왔다. 어머니를 만난 듯 가끔 꺼내 보려고 가져왔는데, 그날 저녁 아버지는 공책을 가져오라고 불호령을 내리셨다. 아버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신 듯했다. 적적한 밤이면 아버지는 텅 빈 집에서 어머니 생각에 눈물지으시며 밤마다 읽어보던 공책이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나니 가슴이 철렁했다. 혼자 계시는 아버지가 아직도 어머니의 빈자리를 힘들어하신다는 생각에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 죄스러웠다. 어머니가 써 놓은 노랫말처럼 어렵고 힘들게 살면서도 마음대로 떠날 수도 없었던 어머니가 지금은 하늘나라에서는 좀 편안해지셨을까. 조금 더 일찍,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공책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내가 어머니한테 글쓰기 편안한 새 공책을 선물해드렸을 텐데. 아니, 공책을 함께 공유하며 어머니 삶을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해드렸을 텐데. 살갑게 딸 노릇 하지 못한 것이 더욱 후회스러웠다.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달을 바라보며 만사를 잊고 달빛에 젖어본다. 온 세상이 밝고 훈훈한 바람이 분다. 꽃잎의 날갯짓을 보며 마음속에 벅찬 감동이 인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것임을 느껴본다. 오랜만에 달을 보니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아스라이 밀려왔다. 당뇨로 고생하는 딸을 매우 안타까워하시던 어머니는 어느 날 검은색 물병을 들고 오셨다. 그 속에는 오래 묵은 똥바가지를 어렵게 찾아서 씻고 또 씻어 삶은 물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도 믿기지 않지만 병이 나았다는 사람이 있으니 한번 먹어 보라고 하셨다. '얼마나 노심초사했으면 이런 수고를 하셨을까'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어머니를 끌어 앉고 서러운 마음에 목 놓아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눈시울을 적신다. 요양원에 계실 때 모시고 와서 한두 달이라도 어머니의 몸과 마음을 보듬어 드리고 싶었다.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어 드리며 옛날 고향 이야기도 나누고 맛있는 음식도 대접해 드렸으면 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다음에, 나중에"라며 미루셨다. 어머니의 마음은 알고 있지만 서운하다 못해 원망스러웠다. "서울에 언니와 동생이 있으니, 이 어미 걱정은 하지 마라. 몸 아픈 네가 마음 써 주는 건 고맙지만 내 마음이 불편해서 그런다"며 내 손을 꼭 잡으시고 눈물을 글썽이시던 어머니. 지금도 마음이 아려온다. 사별하고 나서야 어머니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언제나 튼튼한 울타리가 되어 주시며 희망을 주셨던 어머니의 사랑이 어둠을 밝히는 은은한 달빛으로 젖어 든다. 그 달빛 아래 기억을 더듬으니 옛 생각이 하얗게 피어오른다. 머릿속에 새겨 두었던 망각의 시간으로 빠져들었다. 정 두고 떠나온 세월의 그리움은 어린 시절 고향에서 보낸 아련한 기억들로 이어졌다. 어머니가 읍내 오일장에 오시는 날은 학교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터로 달려가 어머니를 만난다. 아침에 뵙건만 반가운 마음에 어머니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어머니는 외할머님 댁과 작은 집에 들르시다 보니 늘 장보기가 저물었다. 오늘도 어머니가 장짐을 머리에 이고 읍내에서 집으로 향할 때는 달이 떠 있었다. 달빛 속에 어머니와 함께 밤길을 걸으니 편안하고 행복했다. 고향 집으로 가는 길에는 징검다리가 있었다. 어느새 따라왔는지 개울물 속에 달이 떠 있었다. 개울물을 건너갈 때 물결 위에 달이 웃고 있다. 일렁이는 물결 따라 달이 일그러지더니 물속에 잠겨 버렸다. 달을 건지고 싶다. 물결에 달이 사라졌다. 달은 정겹고 신비롭기만 하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달을 두고 가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밤하늘에 떠오르는 달만 보면 왠지 가슴이 멍해진다. 끝없이 달빛 어린 밤길을 더듬고 싶어진다. 나는 추석이 되면 보름달을 맞으러 뒷동산 언덕에 올라 달 뜨기를 기다렸다. 달은 가끔 지나는 구름 속에 몸을 숨겼다가 나와 지긋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달님과 눈이 마주치면 어린 시절 어머니와 가족의 바람인 남동생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기도 했었다. 여느 때보다 크고 밝은 보름달이 뜨면 정성드려 큰절을 했다. 소원도 다른 날보다 더 크고 간절했다. 언제나 같은 달인데 추석의 보름달이 뭐가 다를까마는 달의 영험함에 힘입어 언젠가는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을 믿었다. 달은 무한한 생명력이기도 했다. 나도 내일은 좀 더 좋은 날이 올 거라고 하는 기대감으로 기도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밝은 달을 한참 들여다보노라면 그 안에 어린 시절이 두둥실 나타난다. 고달프셨던 어머니의 모습과 함께 떠오르는 정겨웠던 친구들과의 추억으로 빠져들었다. 어머니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동네 어귀에 있는 우물로 향했다. 한낮에 일하느라 흘린 땀을 씻었다. 둥근달은 어머니의 물동이에도 떠 있다. 달을 머리에 이고 모퉁이 길을 돌아서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튿날 새벽 장독대 하얀 정화수그릇엔 새벽달이 담겨 있었다. 두 손을 합장하고 간절히 기도하셨다. 마음에 서린 한(恨)의 기도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삶이 고단하고 괴로울 때, 달을 보며 눈물 속에 불러 보는 따뜻한 이름, 어머니다. 달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영원한 것은 없다. 삶은 짧을수록 더 소중하고 살아 있는 시간이 내 것임을 실감한다. 덧없이 느껴지는 삶, 남은 생을 잘 정리하고 싶어진다. 서럽도록 힘들게 허둥대며 달려온 세월이다. 오늘 밤처럼 휘황찬란한 달빛에 젖어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쉬엄쉬엄 거닐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