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의 시는 21세기 디지털문명이 지배하는 현대세계에서 전자사막을 떠도는 우리 존재의 좌표를 되묻는다. 스마트폰, 컴퓨터, 전자메일, 지하철, 엘리베이터, 주유소, 냉장고, 콘센트 등은 일상 속에서 우리의 몸을 지배하는 대표적 인공물들이다. 도시의 반복되는 기계적 삶을 재현하는 사물들이면서 시인의 주관적 해석과 사유에 의해 호출된 이미지 기호들이다. 시인 자신을 포함하여 현대인 또한 그런 왜곡된 기호, 불안과 고독을 느끼는 분열의 기호로 전락한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서정의 감정들을 건조하게 배제시키고 그 자리에 첨단과학이 낳은 무감정 기계들을 그로테스크하게 배치한다. 현대인의 황폐화된 육체와 영혼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함이다. 달은 몸속에 웹 브라우저를 내장한 채 자기 몸을 파먹는 존재, 신은 그런 인공의 기계 몸 속에서 배양되는 존재로 설정된다. 한 마디로 시인에게 현대는 욕망을 통해 죽음을 팔고 사는 백화점 매장(賣場)이자 자기 존재의 매장(埋葬)지고, 현대인은 아름다운 낭만성이 제거된 사이보그 기계다. 이 사이보그를 통해 시인은, 나는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형이상학의 물음을 던진다. 시인이 전자초원을 표류하는 사이버(Cyber) 족들의 현실과 삶을 탐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이버 바다의 대표적 항구라 할 수 있는 야후(Yahoo), 야후의 강물 위에 비치는 천 개의 달 이미지는 무수히 복제된 우리의 초상이며 시인의 실존적 질문이 담긴 천개의 의문부호인 셈이다. 거미줄처럼 복잡하고 정교하게 얽힌 전자네트워크 사막에서 인간의 존재는 실체가 없는 이미지, 증발되어 사라지는 허상의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기에 전자 사이버 세계는 단순히 첨단문명이 낳은 편리한 인공의 가상공간을 넘어서서 우리의 실생활을 지배하고 우리의 생각과 판단까지도 지배하고 조종하는 실재공간인 것이다.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시인은 자신의 존재 위상을 이렇게 요약한 바 있다. 현대문명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유목하는 존재, 디지털 기계의 숲에 함몰된 존재임을 승인한 사실적 발언이다. 이원의 시에서 관찰과 묘사가 강조되는 것은 이처럼 현실세계를 반성적으로 바라보고 사유하는 눈과 치열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전자문명의 실상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문명 속에 놓인 인간 군상들의 실존이 더욱 중요해진다. 결국 이원의 시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자 욕망이란 무엇이고 그 범주는 어디까지 뻗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내면탐색의 결과다. 이런 통찰의 사유와 진단 때문에 그녀의 시는 철학의 뿌리, 철학적 서정과 다시 만난다. 이원 시인에게 세계는 불확정성 공간, 유동성 장소다. 만물의 위치는 고정될 수 없으며 의미 자체도 불확실한 곳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섞임의 상태를 지향한다. 그래서 기계의 몸과 인간의 몸이 섞이고, 기계의 생각과 인간의 감정이 섞인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섞이고, 낮과 밤이 섞인다. 남자와 여자가 섞이고 흑백(黑白)이 뒤섞여 혼몽의 낯선 국경지대를 낳는다. 사물도 풍경도 사유도 가치도 모두 끊임없이 변하고 세계는 이런 변화를 위한 사건과 움직임의 연속 시간공이다. 그런 세계 속에서 시인은 지속적으로 자기 존재를 성찰하고 반성해야 하기 때문에 극심한 통증을 느낀다. 그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시인은 현실을 더욱 구부리며 변화의 속도를 높인다. 그런 끝없는 변화와 질주 욕망을 담고 있는 대표적 사물이 오토바이다. 오토바이는 디지털 세계의 끝없는 변속성과 시인의 욕망을 대리하는 운동성 오브제이자 사물 기표다. 이런 시간관, 세계관을 토대로 시인은 삶과 죽음의 접경지대에서 세계의 비밀들을 발견한다. 지상의 시간과 휘발된 시간들과 마주하기 위해 시인은 다양한 눈으로 세계를 응시하고 생각하고 감각한다. 어떤 때는 사선의 빛이나 빗줄기처럼 기울어진 각도에서 현상을 응시하고, 어떤 때는 사물들의 배후에서 세계의 뒷모습을 사유하고, 어떤 때는 해수면이나 허공 깊은 곳에 눈길을 둔 채 인간의 감정을 집요하게 감각한다. 시인에게 지상의 시간에 빛이 존재하는 것은 그 현상 자체로 고독한 행위인 것, 사물과 인간의 삶에 내재된 고독은 제거되어야할 어둠이 아니라 보존되어야할 빛과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에게 부여되는 모든 상처와 결핍은 역설적으로 존재의 출발지가 되고, 세계는 존재의 아름다운 유배지가 된다. 인간과 사물, 시간과 공간, 시인의 사랑은 그렇게 탄생한다.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이대흠의 시는 연민과 사랑에서 싹튼다. 그의 시 저변에는 비극의 삶과 세상에 대한 반성, 폭압적 역사와 문명에 대한 아픈 성찰이 깔려 있다. 첫 시집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1997)에는 이런 성찰의 시선이 잘 드러나 있다. 등짝 가득 땀이 흐르고 팔뚝에 굵은 힘줄이 보이는 근육질 시집으로 해머드릴이 울리는 건축공사장 같은 현실에서 시인은 바닥을 사는 자들의 눈물 속에서 거대한 희망의 고래를 본다. 두 번째 시집 『상처가 나를 살린다』(2001)에서도 시인은 비극의 삶에 굴하지 않고 굴러가는 바퀴들을 통해 삶에의 의지를 드러낸다. 아스팔트건 자갈밭이건 진창이건 온몸으로 부딪히며 닳아가는 바퀴는 인간의 슬픈 초상이자 생의 무게를 떠받치는 힘과 의지의 표상이다. 이대흠은 리얼리즘 세계를 추구하는 시인이다. 하지만 그에게 현실은 단순 모방된 현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화적 리얼리즘 세계, '있는 세계를 바탕으로 있어야 할 세계'를 그는 서정의 언어로 그린다. 대상을 관조하여 대상의 결핍과 상처를 읽어내고 대상에 감정을 자연스럽게 이입하여 그리움의 정서를 전한다. 이런 관조적 교감은 대상이 품은 사연과 상처를 구체적으로 끌어안는다는 점에서 사랑의 과정이기도 하다. 강, 숲, 꽃, 뱀, 바위 등과의 교감을 통해 그는 대상들이 간직한 속 깊은 내연의 이야기를 듣고 그걸 독자의 가슴에 먹물처럼 번져들게 한다. 번짐은 주로 물과 불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현실을 밀고 나가는 과정에서 시인은 때로는 더러운 물에 몸을 씻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을 불태워 깨끗하게 정화되기를 꿈꾼다. 그에게 물과 불은 삶의 격동이자 광기의 근현대사가 투영된 의식의 반영물들이다. 고통과 절망의 시대, 그 상처투성이 시간이 남긴 상처를 시인은 어머니를 통해 치유한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걸 끌어안아 삭히는 어머니의 품은 세상을 평화와 상생으로 이끌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이대흠 시에서 어머니는 고향마을의 핵심 풍경이다. 신산한 삶을 표상하는 애련의 기호고 손바닥에 천 개의 귀를 가진 신비로운 존재다. 힘없고 병들어 죽어가는 식물들이 입으로 쫑알대는 소리를 다 알아듣고 살려내는 존재, 시름시름 말라가던 오이며 호박이며 상사화도 기린초도 수 선화도 다 살려내는 생명의 존재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집약하는 어휘 중 하나가 바닥이다. 삶의 바닥, 고통의 바닥, 상처의 바닥, 울음의 바닥에서 샘솟는 생의 의지와 사랑, 그것이 어머니를 통해 발현하고자 하는 이대흠 시작(詩作)의 요체다. 시작의 원천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시인은 자기만의 사전을 가진 자(者)라는 전제에서 제 시의 에너지는 제가 알고 있고, 제가 운용하는 '언어'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전라도 태생이고, 전라도에서 살고 있는 저에게는 전라도 사투리가 제 시의 에너지원이라 봐야겠지요. 제 시는 전라도라는 지역의 풍토를 바탕에 두고, 나와 내 주변인들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사람들의 삶을 자양분으로 삼고 자라는 나무나 풀이겠지요." 이대흠 시의 가장 도드라진 특질은 질퍽한 전라도 사투리와 억양이다. 허뿍허뿍, 또륵또륵, 타랑타랑, 씌룽씌룽, 알눈알눈, 과냥과냥, 자응자응, 랑랑랑 등 다양한 의성어와 의태어를 사용하여 걸쭉한 웃음을 자아낸다. 그의 향토색 짙은 전라도 사투리 말맛을 느낄 수 있는 시집이 『귀가 서럽다』(2010)이다. 「수문 양반 왕자지」도 이 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시집 곳곳에는 삶의 현장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시인의 따스한 눈길이 해학의 문장으로 풀어져 있다. 남도 특유의 한(恨)과 어머니의 애잔한 사랑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시의 지향점을 '꽃섬'으로 집약한다. 배를 타고 가다보면 멀리 보이는 섬들은 전부 먹색이지만 그 섬에 들어가 보면, 거기엔 아름다운 풀이 있고 나무가 있고 새와 나비도 있다. 그에게 꽃섬은 '끝내는 아름다움이고야 말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올봄엔 나도 꽃섬에 가고 싶다.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겨울비가 내린다. 비를 맞으며 산길을 걷는 것은 처량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산길이 절을 찾아가는 길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나목들 사이의 텅 빈 공간을 뚫고 사선을 그으며 내리는 빗속을 걷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구름은 바람의 얼굴이 되고 앞산은 뒷산의 배경이 된다. 나목이 늘어선 숲에는 왠지 모를 고독이 있고 곡선의 길 위에는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있다. 남이면 사동리, 구룡산 자락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절 안심사. 나는 지금 겨울비를 맞으며 안심사 가는 길을 걷고 있다. 야트막한 산 속에 천년 고찰을 찾아가는 길이지만 거칠지 않아서 좋다. 이 길 위에는 상처 난 마음을 보듬어 주는 자연의 손길이 있고, 깊고 그윽한 대지의 얼굴이 있다. 골짜기 마다 마을이 품고 있는 풍경들이 한없이 너그럽다. 축축한 마음 한 자락 널어 말리기에는 이 보다 좋은 길도 없을 성 싶다. 산길을 걸을 때에는 삼보일배의 마음으로 걸어야 한다. 그렇게 걸어야 사색의 안목과 생각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떨어지는 빗소리에 귀 기울이고 불어오는 바람과 대화도 하면서 나는 이 길을 천천히 걷는다. '서두르지 마라, 한번 가는 인생길 인데…' 지나가는 바람이 속삭여 준다. 산길을 걸으며 나에게 묻는다. "한번 가는 인생길, 어떻게 살아야할까." 중국의 작가 위화는 '인생'이라는 소설에서 "인생은 무거운 등짐을 지고 머나먼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삶은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고달픈 건가. 빨리 가야하고, 많이 알아야 하고, 높이 올라야 하고, 모두 가져야 하는 세상. 행복이든 불행이든 삶은 고민의 강이요 번뇌의 산이다. 눈물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조금은 부족해도 만족할 줄 아는 삶이 행복한 삶 아닐까. 목표 보다는 과정에 충실한 삶을 살고 싶다. 물이 흐르듯 순리를 따라서 살고 싶다. 왕의 행차, 삼국통일의 힘찬 기운이 사라지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귀족들의 암투가 치열하던 시절. 신라 혜공왕은 왕궁(지금의 경주)을 비우고 오랜 기간 청주에 머물렀다. 그리고 안심사를 지었다. 그 분도 이 길을 걸었을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부처님의 공덕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는 않았을까. 왕권을 회복하고 옛 영화(榮華)를 되찾는 그런 세상. 안팎으로 위기를 맞은 왕에게 부처님은 구원의 손길이자 닮고 싶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무명의 서예가도 대웅전 현판에 명문(明文)을 쓰기 위해 이 길을 걸었고, 화승(畵僧) 신겸도 괘불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그리려고 이 길을 걸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예술혼이 머물던 길 위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지금 나는 그 길을 밟으며 또 다른 내 길을 걸어가고 있다. 길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해탈한 스님의 염불소리로도 들리고 청정한 자연의 독경소리로도 들린다. 움푹 파인 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는 아픈 마음을 파고드는 낙숫물 소리로도 들린다. 간절한 마음으로 이 길을 걸었을 선인들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니 어느새 절 입구다. 보통 절을 들어서려면 일주문을 지나야 하는데 이곳에는 둘러친 담장도 절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도 없다. '참 좋은 인연입니다.'라고 쓰여 있는 표지판 하나와 높다랗게 자리 잡고 서있는 두 그루의 노송이 오고 가는 길손을 맞이할 뿐이다. 솔솔 불어오는 산바람을 따라 빗길을 걸으니 끊어질 듯 이어지는 풍경소리가 정겹다. 저 멀리 천년 묵은 소나무처럼 머리를 하얗게 깍은 비구니스님, 그 뒤로 마음이 편안한 절, 안심사가 보인다. 구룡산 능선위로 흰 구름 둥실 흘러가고 있는데 지금 나는 어디에 서있는가. 불심에 기대어 마음을 털고 스님이 베푸는 차향(茶香) 속에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소박한 행복을 누리고 싶다. *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 국보 제297호(청주 안심사)
[충북일보] 권혁웅은 현대사회의 일상을 희화화하여 해학의 문장으로 보여주는 시인이다. 그에게 세속의 일상은 시의 가장 일차적인 현장이며 핵심적 육체다. 그러기에 그는 주관적 관념이나 몽상으로 삶에 접근하지 않는다. 현실의 비루한 인간들, 권태로운 사건들을 시로 풀어내면서 현실이 은폐한 것들을 폭로하고 비판한다. 그의 시는 풍자와 유머, 신화와 환유가 뒤섞인 실험적 비빔밥 텍스트로 코믹한 인물과 정황을 통해 삶의 슬픔과 허위를 드러낸다. 켄타우로스, 미노타우로스, 늑대인간, 기린, 이무기, 유니콘 등 신화 속의 상상 동물이나 역사 속의 이야기를 펼칠 때도 신화나 역사 자체를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현실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기 위함이다. 현실을 비틀거나 균열시켜 현실의 틈을 엿보고 현실의 외관이 가린 그로테스크함과 빈곤함을 직시하기 위함이다. 그의 시는 대체로 세속의 번잡하고 코믹한 사건들로 채워진다. 재밌고 웃긴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삶의 애환을 담고 있는 코믹 난센스 장면들은 역설적으로 삶의 권태와 텅 빈 허무를 부각시킨다. 따라서 코믹한 장면들 자체보다 그런 장면을 가능케 하는 일상의 배후들이 중요해진다. 그의 시에 반어와 역설, 유머와 모순어법 등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이런 중층적 시선과 겹의 구조 때문이다. 주목되는 점은 일상의 사실들을 병렬하는 방식이다. 그는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점층적으로 확장하는 수직적 전개방식을 취하지 않고 수평적 병렬방식을 취한다. 사실과 사실을 토막토막 끊어서 시간의 계기적 흐름을 휘발시키고 서로 다른 시간들이 수평적으로 몸을 섞게 한다. 이런 시간의 혼용과 사건의 무순열적 나열 때문에 시 속의 사건은 과거의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와 미래로 확장된다. 즉 그의 시에 나타나는 다양한 병렬배치 기교들은 시간에 대한 시인의 순환인식과 삶에 대한 보편적 통찰이 낳는 방법론이다. 현실의 실상과 치부를 드러내는 시인 특유의 발현 형식, 관계 탐구 방법인 것이다. 첫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2001)가 비애의 정서를 탄탄한 묘사력으로 그려낸 시집이라면, 두 번째 시집 『마징가 계보학』(2005)은 유년의 만화영화나 애로영화 등을 활용하여 펼친 기억의 아라베스크 퍼즐이다. 농도 짙은 유머와 위트의 발현 이면에 생에 서린 비애와 공포와 허무가 안개처럼 깔려 있다. 1970~80년대의 소시민의 지배문화인 만화영화(마징가 시리즈, 독수리 오형제 등)와 성인잡지(선데이 서울, 애마부인 등)를 주요 소재로 삼아 일상의 애환과 폭력을 코믹하게 풀어낸다. 오늘 소개하는 시 「마징가 계보학」 또한 지나간 시대의 일상과 사람살이의 애환을 코믹 난센스 코드로 재밌게 풀어낸 작품이다. 기운 센 천하장사로 묘사된 술주정뱅이 남자와 날마다 그의 폭력에 시달리는 아내, 그리고 옆집의 오방떡 파는 정의파 사내 등이 등장하여 도시 소시민의 일상사, 가부장적 남성 권력과 공포, 흉터로 얼룩진 여성의 암울한 삶을 사실적으로 부각시킨다. 현실에 대한 사실적 규명과 해석이 애니메이션 감각, 코믹 카툰의 상상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주요 특징이다. 권혁웅은 시 작업과 함께 비평 작업도 병행하고 있는데 우리의 비평이 주제론과 분류에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주제를 담는 시인의 의식만 중요하게 취급되고 주제를 담아내는 언어형식이 홀대받는 현실, 작품 자체에 대한 정밀한 분석은 뒷전이고 분류를 앞세우는 권위적 비평 태도를 꼬집은 것이다. 시에 대한 엄정한 평가는 주제나 이념의 분류 이전에 시 자체에 내재된 감각, 이미지, 리듬, 형식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균형감 있게 평가해야 한다. 시의 역사는 주제의 변화 역사이기도 하지만 언어, 감각, 형식의 변화 역사라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타당하다. 시와 비평 사이의 길항의 힘, 공존 관계를 새롭게 모색해야할 시점이다. /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빈 겨울 숲에 싸락눈이 내린다. 얼마나 고대하던 첫눈인가? 유리 벽 앞에 서서 손님을 맞이하듯 아이처럼 눈을 반겼다. 기억의 서랍에 담긴 숱한 추억들이 눈처럼 포근히 내려온다. 나목 새로 살포시 내리는 눈발에 어느새 숲은 산길을 드러내고 내 마음은 능선을 따라 고향 집으로 향한다. 앙상한 고욤나무 가지 사이로 삭풍은 불어오고 혹한에 맺힌 처마 끝 고드름은 동장군의 사열식을 거행하는 듯 예리한 날을 세우고 있다. 이엉 위에 얹어놓은 오빠의 새 덫에는 참새 두어 마리만 기웃거릴 뿐 짧은 겨울 해는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에 일찍 어둠을 내린다. 고적한 농가의 저녁, 가느다란 빨랫줄에 팔을 늘어뜨리고 마른 장작처럼 얼어있는 아버지의 회색 내복은 왠지 서글퍼만 보였다. 덕장에 널린 마른 명태를 그리며 유년의 눈가를 적시던 그 옛날의 단상들이 어느덧 마음의 텃밭을 다독여 준다. 나직한 굴뚝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연기는 어린 가슴을 감싸며 무채색 하늘로 번져갔다. 그즈음 사랑채 부엌간에 앉아 쇠죽을 쑤시던 아버지는 암울했던 세대에 태어나셔서 가난의 고리와 오대 독자라는 외롭고도 힘겨운 멍에를 짊어지셔야만 했었다. 노심초사 자식을 위해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삶의 터전을 가꾸시던 고단한 모습을 떠올릴 때면 밀물처럼 서러움이 밀려온다. 우리 집엔 늘 소(牛)를 기르던 기억이 난다. 심성이 순하고 우직한 소는 당시 일손을 대신해주며 우리의 학자금을 위해서도 큰 몫을 감당해주었다. 그러니 가난한 아버지에게 소는 한 식구이며 분신과도 같았을 게다. 겨울이면 볏짚이랑 풀과 등겨를 버무려 여물을 안치시던 아버지, 아궁이 앞에 앉아 한 손으로 왕겨를 뿌려가며 풍구 질을 하시던 모습과 덜덜거리던 풍구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맴돌다 간다. 빨갛게 피어오르는 불꽃과 켜켜이 쌓여가는 검은 재 그리고 허연 김을 날리며 가슴으로 파고들던 구수한 쇠죽 향기는 아버지 몸에서 풍기던 냄새 같았다. 겨울이면 자전거로 마을을 찾아다니는 생선 장수가 있었다. 짐 자전거 뒤에 생선 궤짝을 싣고 우리 마을에도 들렀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오징어나 동태를 사서 국을 끓이셨다. "영희야, 밥 먹어라" 담 너머 부르시는 어머니 목소리에 고무줄놀이도 끝이 나고 마침내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앉아 이른 저녁을 먹는다. 초라하던 겨울 밥상에 모처럼 비릿한 생선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생선 한 마리로 온 가족이 먹기에는 뻘건 국물이 전부였지만 따끈한 국물 한 대접만으로도 꿀맛이었다. "소리 내지 말고 먹어라, 앞에 놓인 것만 먹어라, 맛있다고 혼자만 먹지 말아라, 다른 사람 위해 남기고 먹어라" 끝없는 잔소리를 하시다가도 넌지시 밥숟갈 위에 생선 살을 얹어주시던 밥상머리 풍경에 웃음이 난다. 삶의 가치와 기준이 달라지면서 타인으로부터 간섭받기를 싫어하는 신세대는 마침내 혼족 (혼자족) 혼 밥(홀로 밥) 혼 술(홀로 술)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혼자 즐기는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풍요에서 오는 오류는 아닐까? 오빠 밥그릇을 탐하며 흰 쌀이 많아 보인다고 투정을 부리다가 부모님의 꾸지람에 마음을 고쳐먹던 어린 날의 결핍은 아마도 나에게 삶의 교훈과 심미안을 갖도록 나를 가르쳐준 셈이다. "고난은 신비로운 숫돌 이랬던가." 시름을 달래가며 매일 쇠죽을 쑤시던 아버지 그리고 사랑을 지으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나를 철들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무쇠솥 언저리에 시루 번처럼 누워 있던 젖은 양말과 달그락 거리던 우리의 밥상이 오늘따라 더욱 간절해지는 겨울 아침이다.
2019년 양력으로 마지막 날에 안양에 사는 셋째 삼촌에게 전화가 왔다. 둘째 숙모님이 갑자기 선종하셨단다. 서울 서초동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는 숙모님은 감기에 걸렸어도 이를 예사롭게 여기고, 성탄절을 맞아 무리하셨다고 한다. 숙모님은 운명 전날 밤에도 일을 늦게 마치고 집에 돌아와 쓰러져서 삼촌은 놀라 119를 불렀으나, 자고 일어나면 피곤이 풀릴 것이라 하여 되돌려 보냈단다. 잠시 후에 다시 119에 실려 갔지만 안타깝게도 깨어나지 못하셨다는 비보였다. 2020년 새해 첫날을 장례식장에서 지냈다.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고 희망을 품으면서 해맞이하는 시간에 애가 녹는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있었다. 장례식장은 이별의 장소이다. 그리운 정과 아쉬운 한을 서로 섞여 녹아내는 이별이다. 망자(亡者)의 살아생전 잘못을 용서하고 천국 낙원으로 인도하시기를 성당 신자들이 줄을 이어 구슬프게 연도 했다. 새해 첫날이요 십 년의 첫날에 새해맞이도 뒤로하고 함께 바친 많은 분의 기도가 숙모님의 천상여행길에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출관에 이어 서초동 성당에서 레지오 장(葬)으로 장례미사를 드렸다. 레지오 단원들은 깃발을 도열하였다. 할아버지 출상(出喪) 때 상여 뒤로 줄을 지어 따르던 만장(輓章)을 보는 느낌이었다. 50여 개 팀의 500여 명 단원이 대부분 참석했는지 8백여 석의 성당 안이 꽉 찼다. 칠순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서인지 영성체 예식 때에는 친분이 깊은 교우들이 영정과 관을 쓰다듬으면서 지나갔다. 이세상과 저세상으로 갈라져 헤어지는 슬픔과 아픔을 그렇게 풀어갔다. 작별의 인사도 없이 육신의 모습으로 만날 수 없는 이별이라 더 안타까워했다. 살아생전 이웃들에게 소중한 정을 많이 주지 않고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화장예식 시간에 점심을 먹으라고 한다. 밥을 먹을 생각이 없다. 야속한 요청이다. 세상을 달리한 지 3일 만에 육신이 불에 타는 시간에도 산자는 먹어야 한다. 그래야 힘을 내어 죽은 자를 보낼 수 있다. 죽은 자에게는 영혼의 양식이 필요하지만, 산자는 육신의 양식이 필요하다. 산자는 살아서 힘을 내야 죽은 자의 양식인 기도를 드릴 수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할 수 있다.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 납골당에 모셨다. 납골당은 아파트 같은 모습이다. 죽으면 땅으로 들어가 썩는다는 말을 쓰기가 혼란스럽다. 그리스 신화의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하데스 신(神)이 지상으로 영역을 넓힌 것 같다. 납골당에 먼저 입주한 망자(亡者)의 봉안문에 영영 헤어진 이를 그리워하는 사진과 그림과 글이 보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3일 만에 한 줌의 재가 된 어머니를 품에 안고 납골당에 모신 사촌 동생들의 모습이 애처롭다. 자리를 뜨지 못한다. 한동안은 밥을 먹으러 숟가락을 들어도, TV 드라마의 슬픈 장면을 보아도, 조용한 음악을 들어도 눈물이 나올 것이다. 가장 큰 걱정은 짝을 먼저 보낸 삼촌이다. 어떻게 위로를 드릴 말이 없다. 삼촌이 숙모께 "잘 가라!"고 인사했다. 때가 되면 따라가겠다는 말로 들렸다. 조카가 결혼했다고 집으로 불러 쑥국을 끓여 주시던 숙모님이 생각났다. 봄도 아닌데 쑥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사촌 매제에게 말했다. 사촌 동생이 한동안 이해 못 할 정도로 울어도 이해하고 위로하라고 했다. 좀 덜 슬픈 자가 더 슬픈 자를 위로하며 살아야 한다. 비단결 같은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뵌 지 며칠 되지 않았으니 천국의 낙원으로 들어갔으리라. 어릴 때 설날을 기다리던 섣달그믐날 밤에 할머니와 어머니는 대문과 창고와 화장실에 촛불을 밝히고 새해를 기다렸다. 다가오는 2020년 경자년(庚子年) 음력 섣달그믐날 밤에는 세상을 달리한 가족들을 위해 대문과 현관과 화장실에 새 해가 뜰 때까지 불을 밝혀야겠다. 음력 정월 초하루는 살아있는 가족들을 위한 날이 되기를 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 연도: 연옥(천당을 가기 위해 영혼을 정화하는 곳) 영혼을 위한 기도 * 레지오: 가톨릭의 사도직 신심 및 활동 단체 중 하나 * 영성체 예식: 가톨릭 미사 중에 성체를 받아 모시는 예식
이수명의 시는 미지(未知)와의 만남이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생각과 느낌, 새롭고 낯선 초현실적 사건을 경험하는 언어놀이터다. 인간과 사물의 세계를 직관적으로 통찰한다는 점에서 세계의 존재방식을 그리는 현상학적 지도이자 인식의 해부도(圖)다. 그녀는 시를 쓰기 위해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시간, 공간, 사물, 현실의 이름들로부터 멀어진다. 대상들과의 밀착을 거부하고 점점 틈을 넓게 벌인다. 기존의 지각, 감각, 기억, 사고를 버리고 정신의 무장해제, 어떤 통념도 가치도 의미도 제거된 황무지 상태가 되려한다. 이수명의 시는 이런 토대 위에서 펼쳐진다. 언어를 다룰 때 그녀는 맨손으로 진흙덩어리를 만지작거리며 노는 영특한 아이와 닮았다. 이 아이는 혼자 놀면서 아무도 만들지 않은 어떤 것, 아직 이 세상에 없는 물건이나 장난감, 어떤 미지의 것들을 끊임없이 만들고 싶어 한다. 이 모험놀이 발명놀이에 의해 획일화된 세계의 질서는 전복되고 새롭고 낯선 세계, 환각의 풍경들이 탄생한다. 그것이 이수명의 시다. 이수명은 풍경의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응시한다. 외부는 사물들로 구성된 현상 세계로 시인은 하나의 사물이 어떻게 그 사물로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으며 다른 사물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생각한다. 해부학 의사처럼 사물들의 고착된 관계를 치환하거나 사물들을 제자리에서 이탈시켜 우리의 관습적 인식에 충격을 가한다. 돌발성, 우연성을 통해 사물들의 고정된 위치와 기능을 역전시킨다. 즉 그녀에게 사물은 단순히 현실에 존재하는 물적 대상을 넘어서서 사고와 상상 속에서 재구성된 오브제이자 새로운 미(美)와 시공을 탄생시키려는 정신의 대리물들이다. 이수명은 사물의 구성요소인 빛, 색채, 음향, 질감, 냄새, 속도, 움직임 등을 자유롭게 조절하여 그 사물과 사물이 놓인 공간을 재탄생시킨다. 즉 그녀에게 사물은 늘 탈주 중인 사물이고, 기존의 역할과 의미로부터 끊임없이 이탈하려는 과정 속의 존재물이다. 끊임없이 자기존재를 부정하고 배반하려는 부재의 대상들로 인간의 서정이 도려내진 차가운 오브제들이다. 그러기에 그녀의 시에서 투명한 사물은 끊임없이 불투명해지고 그 불투명해진 사물들은 기존의 의미와 질서와 인과를 무화시킨다. 이때 사물들은 사물 자체의 속성을 상실하므로 대상 없는 언어로 전락하고 기호화된 언어들의 기표놀이가 시작된다. 이수명의 사물 응시와 언어 표현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현실에 속한 사물들을 응시하여 언어화하는 방법이다. 현실의 코드 안에 합류된 가시세계의 사물들을 가시세계의 자아가 응시한다. 이때의 사물은 부재와 소멸로 이동 중인 시간의 흐름을 찰나적으로 자른 상태의 사물이고 언어는 쉼 없이 사물들 사이에 틈을 만들어 의미를 무한히 확장한다. 다른 하나는 현실로부터 이탈한 사물들을 응시하여 언어화하는 방법이다. 현실의 코드 안에 합류되지 못한 비가시세계의 사물들을 가시세계의 자아가 응시한다. 이때의 사물은 현실의 논리와 합리적 질서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에 시간의 변화와 이동, 공간의 굴절과 겹침 등이 자유롭게 일어난다. 시인의 꿈과 무의식이 삼투되어 사물들은 일상의 고정된 위치와 의미를 상실하고 이상하고 충격적인 초현실적 오브제로 변신한다. 사물의 고정된 위치, 획일화된 역할, 단일한 의미가 부정되는데 이것이 독자의 눈에 시니피앙 놀이로 비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시인의 몸 속을 떠돌던 이미지들이 말이 되고 말은 사물보다 선행한다. 말들이 발산하는 에너지는 문장 전체로 퍼져나가고 이 스밈과 운동에 의해 이수명 특유의 형식, 문체, 운율이 태어난다. / 함기석 시인
새해 아침 이른 시간인데 핸드폰엔 딩동 딩동 문자 오는 소리가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지난해의 감사와 다가오는 새해에 복 많이 받고, 건강하고 소원 성취이루소서. 행복을 기원하는 덕담이 전파를 타고 내게 전달된다. 그 감사한 마음에 보답을 하고자 옵바위에서 촬영한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는 일출 사진 파일을 찾아 균형에 맞게 2020을 쓰고 밑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글을 넣어 답장으로 보낸다. 이런 덕담을 주고받을 때면 늘 덕담의 의미와 지난해와 앞으로 함께할 금년의 세월들이 중첩되어 내 앞에 나타난다. 지나간 시간 속에 이루지 못한 후회와 더 노력하지 못한 아쉬움에 새해는 더 잘하리라는 다짐을 해본다. 생활하면서 좋은 일이 생기면 주위에서는 덕을 쌓아서 복을 받았다는 말을 듣는다. 복이란 삶에서 누리는 큰 행운과 거기서 얻는 행복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늘 주고받는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덕담 속에는 덕도 같이 쌓아야 한다는 주문을 함께 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덕이란 진실과 믿음 그리고 정의를 합한 말로 후덕한 심성으로 믿음을 갖고 남을 위한다는 말이다. 덕을 쌓아서 복을 받았다는 말은 복을 받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의미와 같다고 해야겠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모두 똑같이 갖고, 동일하게 누리고 살지 못하고 여건과 처지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나보다 못한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좋은 일들이 모두 덕을 쌓는 일이며 최고의 미덕이 되는 일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산다는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진솔하고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사는 게 삶의 진정한 모습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 1년을 훌륭하게 보냈다는 것은 평범함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하루하루를 알차고 소중하게 살아온 거다. 늘 바쁘고 힘들고 지친 일상이지만 그런 생활 속에도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삶의 색깔이 더욱 분명해지고 깊이가 있지 않을까. 세월을 보내고 나서 그 시간을 되돌아보면 누구는 흐르는 시냇물을 가두어 큰 호수를 만들었고, 나는 흐르는 시냇물 옆에서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상실감이 드는 아침이다. 시간도 흐르는 물과 같아 조금씩 담아 큰 호수를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그대로 흘려보내 공허함만 가득히 남는 기억속의 시간이 될 수도 있지 않는가. 이제 새해가 밝았다. 희망찬 태양이 순금보다 진한 황금빛을 뿌리며 힘차게 떠오른다. 그 빛은 꿈이고 사랑이며 용기다. 모두가 태양의 황금빛을 가슴에 담고 마음이 따뜻한 한해를 만들어 봐야겠다. 금년 2020년을 지내고 돌이켜 보았을 때 지난 시간에서 달콤한 향기가 가득한 후회되지 않는 그런 한해로 만들어야 겠다는 다짐을 하여 본다. 어느 해 보다도 복되는 일들이 내 옆에 행하여지는 일들이 많아져 덕을 쌓았으면 하는 기원을 해본다. 무언가 결실을 맺으려면 오늘 씨를 뿌리고, 날마다 더 부지런히 가꾸어야 하겠지. 아침에 해가 뜰 때 가슴속 뜨거운 열정을 크게 외치고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이 불 때 사랑을 노래하며 저녁 붉은 노을이 질 때면 희망 가득한 꿈을 키워야겠다. 새해에는 꿈과 사랑과 용기 그리고 늘 건강이 함께하는 한해가 되고 내 주면의 모든 이들이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차창룡은 세속의 삶을 살다 불가(佛家)로 떠난 시인이다. 그의 시는 일상에 대한 해학적 성찰이자 욕망의 근원을 향한 사유다. 그의 시의 큰 특징은 현실에 대한 풍자와 익살이다. 현대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비꼬아서 키득키득 웃게 만드는 시적 풍자는 날카롭고 통쾌하다. 똥의 상상력을 통해 그는 정치권력을 비꼬기도 하고 농촌의 현실을 신랄하게 폭로하기도 한다. 자조와 울분, 공포와 분노, 통렬한 웃음과 반성으로 세상에 대한 경멸을 드러낸다. 이때의 경멸은 세상에 대한 애착과 번뇌의 반영으로 세상을 저주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 뜨겁게 사랑하기 위한 역설적 의식이다. 차창룡 시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삶과 죽음, 비속함과 고상함, 생물과 무생물 등 상반된 세계를 하나로 아우르는 통합적 사유다. 그의 시 전반에는 만상은 하나의 몸이라는 불교적 세계관이 짙게 깔려 있다. 주야(晝夜)도 남녀도 하나의 몸이다. 따라서 생성은 소멸로 가는 길이고 소멸은 또 다른 생성을 위한 연기(緣起)의 여정이다. 고요한 산사의 정적을 깨는 목탁소리, 그 소리에 의해 만물은 갈라지고 깨지고 교감하여 다시 하나의 몸이 된다. 이처럼 그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늘 사색하고 성찰한다. 자연의 저 무량한 것들 속에 깃든 지수화풍(地水火風), 끊임없이 외국말로 지껄이는 계곡물소리, 햇빛에 증발해가는 염불소리를 들으며 깊은 사색에 잠긴다. 그의 시는 동양의 신화, 철학, 불교의 영향이 매우 크다. 여러 소재들 중에서 특히 나무와 물고기는 고통의 문제, 구원의 문제와 연계되어 자주 등장한다. 인도 신화 속의 마누 이야기, 덕이 높은 고승의 목탁 이야기, 중국 황하의 용문(龍門)협곡 이야기 등을 통해 고통과 구원의 문제를 파고든다. 그에게 나무는 고통의 수행자고 물고기는 신의 화신이자 어리석은 인간의 상징이기도 하다. 세속에서 열반의 세계로 인도하는 목어나 목탁 같은 일종의 이행(移行) 오브제들이다. 이 소재들은 고행(苦行)을 암시한다. 고행은 마음에 깃든 애욕과 물적 욕망을 자르려는 몸의 수행이고 시인은 그것을 고통을 치르는 겨울나무에게서 본다. 동상에 걸린 채 머리를 땅에 박고 눈을 이불 삼아 덮고 명상에 빠져든 겨울나무에게서 시인은 자신을 보고 희망을 본다. 겨울나무는 곧 수행정진 중인 붓다의 몸이자 경전인 것이다. 이런 소재들을 호환할 때 그는 과거의 인도여행을 통해 보고 들은 것, 온갖 생각들을 겹쳐놓는다. 그의 시에서 과거는 반복적으로 호출되는데, 이때 시인이 호출하는 기억 속의 과거는 명백한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 현재의 사유와 의식이 투영된 복합시공간이다. 즉 시인은 시를 통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불러들여 과거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의 많은 시가 인간의 육체 내부로 사색과 상상을 펼쳐지는 것은 만물에게서 인간을 보고 소멸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과거를 다시 만드는 걸까· 육체 내부로 침잠하여 육체의 실상, 육체의 허위와 싸워 육체의 실상인 무(無) 또는 공(空)과 마주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육체는 항시 소화불량을 일으키는 곳, 수심이 가득한 곳, 허위로 가득 찬 환영(幻影)의 세계다. 차창룡은 시가 인간의 구원, 사회의 구원과 긴밀히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시인이다. 시가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제한되어서는 안 되고 우리 자신의 삶까지 구원해야 한다고 믿는 시인이다. 2010년 3월 봄, 그는 마침내 불도(佛道)를 걷기 위해 속세를 떠난다. 속세에서의 마지막 말을 남기고 해인사로 들어간다. 법명은 동명(東明). "실로 꿈같은 길을 걸어서 나는 여기까지 왔다. 시인으로서 꽤 긴 세월을 살았다. 긴 세월 책과 씨름하면서 많은 것을 깨우치고, 문학을 가르치는 것에도 큰 재미를 느꼈다. (…) 부처님이 그러하셨듯이 나는 앞으로 끊임없이 길을 갈 것이고, 길에서 꿈을 펼칠 것이며,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하리라." / 함기석 시인
가을걷이를 끝낸 들판을 달리다 보면 고추를 매단 채 먼 밭에 외로이 서 있는 마른 고춧대 모습이 눈에 띈다. 봄볕에 촉을 띄우고 여름내 푸르러 마침내 열매를 맺은 식물 에게도 주어진 시간의 길이가 있을 텐데, 주인은 여태 뭐 하느라 저대로 버려두는 걸까· 아니면 새들의 먹잇감으로 남겨두는 걸까, 저물어 가는 한 해의 끝자락에 빈 밭을 홀로 지키는 고추밭 풍경이 적막하고 쓸쓸하기만 하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새로운 희망을 선사하듯 달력을 주고받으며 서로 복을 빌어 주고 훈훈한 온정을 나누던 우리만의 정겨운 세모풍습이 추억처럼 떠오른다. 두루마기 사이로 새하얀 달력을 허리에 끼고 신작로 길을 걸어오시던 아버지의 겨울이 저만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홀로 사시는 노인세대가 운집한 마을에서 약국을 하다 보니 부모님 생각에 12월이 되면 그간 이용해 주신 고마움의 표시로 달력을 선물하고 있다. 아직 이르다 싶은데 입동이 되자 어느새 신년도 달력을 찾는 노인들이 꽤 있었다. 벌써 달력을 찾다니 어떤 연유에서일까, 유한한 인생에 얼마 남지 않은 연로한 삶이 초조하게 하나, 아니면 달력 구하기 어렵던 시절을 살아온 가난의 굴레 탓인가. 마지막 보루처럼 달력에 집착하는 노인의 왜소한 모습에 마음이 시려온다. 하는 수 없이 주문해둔 달력을 보내 달라고 출판사로 연락을 하니 단걸음에 새 달력이 도착했다. 수백 개 쌓아놓은 달력 더미에서 멀어져간 종이 냄새와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가 풍긴다. 먼 기억의 모퉁이를 지나, 때 묻은 추억의 숫자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고 속절없이 가버린 세월은 아쉬움만 쌓인다. 내가 처음 달력을 본 건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정**국회의원의 얼굴 사진과 삼백예순 닷새가 깨알처럼 적혀있던 한 장짜리 달력에는 농사 절기와 주자 십회훈(朱子十悔訓)이 쓰여 있었다. '불효부모사후회, 불친가족소후회, 소불근학노후회 안불사난패후회….' 안방 아랫목 벽에 벽보처럼 붙어서 아무런 말도하지 않고 인생을 교훈하던 달력의 묵시와 방 귀퉁이 세워놓은 나무 둥지에 조랑조랑 매달린 메주들…. 그리고 때늦은 후회는 소용이 없다하시며 어린 나에게 주자의 명언을 또박또박 읽어 주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내 유년의 방에 아스라이 스치고 지나간다. 문명의 물결이 우리 곁으로 흘러 들어오면서 우리 집 달력도 진화하기 시작했다. 칙칙하고 어둡던 농가에 산수화와 명작그림 달력들이 도배지처럼 걸리자 액자를 걸어 놓은 듯 방 안 분위기가 밝아져 보였다. 마침내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속살을 드러낸 요염한 여배우 달력이 시내버스 안 운전대 옆에도 손바닥 만 하게 걸리면서 문화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호황을 누리는 기업마다 홍보용 광고 달력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더니 문명은 어느 틈엔가 전자우편 전자책 전자 신문을 출현시키며 달력의 수요는 점점 미미해져 간다. 로그인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신세대의 자주적인 사고 방식은 삶의 질을 향상 시켜준 이면에 우리만의 감성과 미풍을 앗아가는 현실이 때로 서글퍼진다. 나는 성현들의 잠언이 담긴 달력을 넘기며 한 구절 읊조려 보기도하고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추억을 더듬어가며 동그라미 그려진 기념일을 기릴 수 있는 종이 달력이 좋다. 하루 한 장씩 떼어내는 일일 달력, 식탁위에 걸어놓은 3개월짜리 긴 달력, 책상에 얹어 놓은 탁상 달력…. 내 평생에 지나온 세월의 흔적마다 인연을 맺었던 수많은 달력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한 장 남겨진 달력 앞에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한해를 돌아보니 잃어버린 것에 대한 슬픔과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상실감이 앞선다. 유수와 같은 세월에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을 뒤로하며 새 달력을 펼치고 영원히 간직해야할 나만의 시간에 다시 동그라미를 그린다. 석양을 향해 가는 나의 뒷모습에 달력 너머 희망의 노래가 그림자처럼 비추인다.
이영광은 독특한 시적 형식이나 방법보다 인간의 내적 고뇌와 몸부림에 끌리고 삶의 진실에 열정적으로 가 닿으려 애쓰는 시인이다. 이런 번민과 고뇌의 과정에서 남겨지는 눈길 위의 거친 발자국들, 그게 그의 시편들이다. 이영광의 시는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된 몸의 시학을 통해 세계를 직시하고 사색하고 통찰한다. 생사(生死)의 순환, 물과 불의 병존을 통해 상반되는 것들이 뒤엉켜 공존하는 일체(一體)의 세계를 담아내려 한다. 그의 시 밑바닥에는 붕괴된 옛날 집터처럼 언젠가 부서져 없어질 것들에 대한 연민과 회한의 감정이 깔려 있다. 이런 폐허의 정서는 주로 유년기의 궁핍한 생활과 죽음 체험에서 발생하고 이것이 소외와 우울을 유발한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죽음의 테마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죽음에 대한 인식, 삶과 죽음의 상관성 문제는 그의 시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유년의 성장과정에서 목격한 죽음들, 가족사와 연계된 육친의 죽음들, 자연 생명체의 죽음들 등 그는 죽음을 통해 삶을 사유하고 고뇌한다. 그가 반복적으로 죽음을 사유하는 까닭은 죽음의 기억을 통해 삶의 의미, 삶의 근원을 응시하려 하기 때문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두려움을 누르고,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죽음들도 정시할 수 있게 되고, 죽음을 현재의 시간에서 살아낼 수 있다. 죽음이 중요한 건 이렇게 삶 속에 들어왔을 때가 맞는 것 같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암을 몸에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다른 앎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일상의 무수한 죽음들을 담담하게 수용한다. 가족들의 죽음을 기록할 때조차도 그는 주관적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죽음을 허무와 절망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보지 않고 자연의 순환적 현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의 그늘 속에서 삶의 비애를 목격하면서도 그것을 반어적 언어로 직조해낸다. 죽음에 대한 천착은 시집 『그늘과 사귀다』(2007)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죽음을 통해 시인은 시대의 비밀과 존재의 어둠을 누설한다. 절망과 희망, 밤과 낮의 경계(境界)에서 시인은 죽음을 반추하고 사색한다. 세상의 수많은 아픔과 죽음, 아름다과 슬픔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는 시집 『아픈 천국』(2010)도 세상에 내놓는다. 이 시집에서도 죽음에 대한 천착이 계속 나타나는데 이전의 죽음과는 다소 달라진다. 이전의 시집들이 개인적인 차원의 죽음을 다루었다면, 이 시집에서는 세상 곳곳에 넘치는 수많은 죽음의 기미들을 감지해 유령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죽음의 범위가 넓게 확장되고 사유 또한 깊어진다. 위의 시 「길」에도 시인의 죽음에 대한 관찰과 사유가 묻어 있다. 순댓국집 앞 대로에서 로드 킬 당한 개와 두 블록쯤 떨어진 곳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 이 둘이 남겨놓은 죽음의 흔적 위로 무수히 자동차 바퀴들이 지나가고 지나간다. 시인은 그 광경을 무덤덤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죽음에 이르는 길을 사색한다. 아무도 없는 밤, 사람의 눈을 피해 슬며시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다시 길은 가는 죽은 자의 모습은 삶이 낳는 환영(幻影)이다. 이처럼 시인은 개나 사람의 죽음을 유령이미지로 처리하여 우리의 일상사 곳곳에 퍼져 있는 죽음의 의미를 되묻는다. 죽음의 현장을 통해 죽음을 낳는 폭력적 현실, 비애의 현실을 종용히 폭로한다. 이 유령들은 죽은 자의 그림자이면서 우리 주변의 소외된 자들의 아픈 초상이기도 하다. 늦은 밤에 폐지를 줍는 노인, 취객들에게 시달리는 대리운전기사, 절망에 사로잡혀 폭탄주를 마시는 사람, 실직의 몸이 되어 빈 방에서 홀로 기침하는 사람 등 이 모두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아픈 유령들이다. / 함기석 시인
재작년 팔순의 노모를 모시고 제주도로 여행을 갔었다. 한라산 중턱 인적이 드문 숲길을 산책할 때의 일이다. 어머님은 힘이 부쳐 숲길 초입에 머물고 계셨다. 아내와 둘이서 산책을 하고 돌아오니 낯선 중년의 여성이 어머님과 대화를 하다 자리를 떴다. 어머니께서 그 간의 경위를 설명하신다. 너희가 보여 "우리 아들 며느리가 저기 내려오네유" 하니까 그제 서야 가더란다. 정신이 희미해진 노모와 제주도에 여행을 함께 와서 부모를 버리고 갔다는 방송을 본 적이 있다. 아까 그 중년의 여성도 혹 버려진 노인이 아닐까 걱정이 앞섰던 모양이다. 간혹, 효도와 불효에 대하여 생각을 해본다. 나는 효자일까, 불효자일까. 어머니는 내 자식들은 다 효자란다. 어머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부끄럽고 지난 일이 생각난다. 비교적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 크게 속을 썩인 일은 없는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어머님을 모시고 동생들을 돌보며 나름 주위에서 효자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사실 난 부모님 속을 크게 상하게 한 일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겨울방학 때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졸업 후 곧바로 입대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 아버지께서 입대일자를 물어보았다. 나는 아직 영장을 못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아마도 일찍 군대에 가야만 하는 처지를 부모님을 원망하며 소심한 반항을 한 게 아닌가 싶다. 입대 전 한 달 남짓 동안은 집에도 잘 안 들어갔다. 들어가는 날도 술이 취한 채 늦은 시각에 들어갔다. 언제 입대 할지 모르는 아들의 눈치를 살피는 부모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입영날짜 하루 전에야 내일 군대 간다고 영장을 내밀었을 때 부모님께서 가슴에 대못을 박히는 아픔을 겪었으리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입대 2년 후, 휴가를 왔을 때다. 부대로 귀대하는 마지막 날 술에 취해 들어와 밤새도록 토하고 숙취로 고생하는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주었다. 이튿날 아버님이 '안주 없이 술 마시지 마라'는 나에게 하신 말씀이 마지막 유언이 된 후회 막심한 불효를 저질렀다. 불효의 사전적 의미는 어버이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섬기지 못하여 자식 된 도리를 다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되어있다. 지금도 어머님께 정성을 다하여 섬기지 못하는 나는 불효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어머님께서는 나를 비롯한 형제들에게 왜 효자라고 칭할까 생각하다, 부모의 입장에서 내 자식을 떠올려본다. 가아들은 나와 아내에게 큰 걱정을 끼치지 않았다. 대학졸업과 동시에 대기업에 취업해서 적정 나이에 결혼까지 했다. 취업하고, 결혼만 하면 효도했다는 세상이니 이만하면 효자다. 그렇다고 아들은 나와 아내에게 정성을 다하여 섬기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난 아들이 불효라고 생각진 않는다. 저희들끼리 부모 걱정 안 끼치고 잘 사는 것이 효도한다는 생각이 우리 부부의 솔직한 심정이다. 어머니께서도 내 생각처럼 당신의 자식들이 큰 속 썩이지 않고 나름 잘 살고 있는 것이 효도라고 여기시는 모양이다. 속칭 불효방지법이라는 것이 국회에 계류 중에 있다. 부모가 전 재산을 자식에게 증여했는데, 자식이 증여를 받은 후에 부모를 방치하는 경우, 증여재산을 되돌려 받을 수 있도록 민법을 개정하자는 법안이다. 재산을 받고도 부모를 돌보지 않는 자식들이 늘어가는 세태가 씁쓸하다. 인륜을, 천륜을 법으로 통제해야만 하는 세상이 두렵기까지 하다. 또 속칭 불효방지법이라고 명명하는 사회가 못마땅하다. 불효방지법이란 단어에서의 불효란 사전적 의미하고는 거리가 멀다. 어머님과 내가 생각하는 불효와 비교해도 차이가 많다. 능력이 있음에도, 증여받은 재산이 있음에도 부모를 방치하는 것은 불효가 아니라 패륜이라는 생각이다. 패륜방지법으로 명명함이 타당할 것이다. 아울러 재산을 증여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능력 있는 자식은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게 하는 새로운 진짜 불효방지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아! 작금의 세태를, 세상을 탓하고 타인을 비판하기에 앞서, 나부터 적어도 어머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불효는 저지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이윤학의 시는 상처와 폐허의 풍경들로 채워진다. 폐허 속에서 시인은 견디며 연민의 시선으로 사물과 풍경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바라본다. 기억 또한 암울한 상처이므로 그의 눈길은 현재에서 끝없이 과거로 옮겨간다. 고통스런 옛 기억들을 현재로 호환하는 이 추억의 과정에 상처 받은 자아상들이 나타난다. 풍경과 인물을 통해 시인은 기억의 시간대로 이동하고 그것을 다시 현재로 호환한다. 즉 시인에게 시는 폐허를 이미지로 확인하는 처절한 초상화 작업인 셈이다. 풍경에 대한 이미지 묘사는 시인의 실존적 고통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시인의 육체는 온통 폐허로 가득 찬다. 그의 시에 벌레나 곤충이 인간의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구더기, 달팽이, 잠자리, 제비, 염소 같은 존재들을 시인은 자신과 동일시하여 버려진 존재, 견디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구더기는 몸담고 살던 구덩이가 싫어졌다/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기어올라가야 했다/ 구덩이에서 알을 깔 수는 없었다/ 더러운 生을 물려줄 수는 없었다/ 알이 눈이 띄게 커지고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너희들만은/ 깨끗한 곳에서 먹이를 찾아야 한다/ 목숨을 위해 더러운 곳으로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터질 듯이 부른 뱃속에 알을 끌고/ 수렁을 벗어났다 구더기는/ 목숨이 다 할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 알을 낳았다 구더기는 빈 몸이 되어/ 눈부셨다// 호기심 많은 눈을 뜨고 빛을 몰고/ 밖으로 나가는 새끼들(시 「구더기의 꿈」 전문) 위의 시에서 구더기는 새끼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성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윤학의 시는 성스럽고 처절한 고해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자를 통한 고해는 또 다른 절망을 가져온다. 시는 안주의 집이 아니라 늘 새로 시작되는 무덤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 화자가 속한 장소들은 대부분이 화자를 압박하고 가두어 폐허를 낳는 죽음의 공간으로 설정된다. 무덤, 염전, 저수지, 과수원, 상엿집, 녹슨 함석지붕 등 시인의 기 억이 가 닿는 곳 대부분이 폐허의 모습을 띤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집과 길의 방향성이다. 집과 길은 수평으로 몸을 늘여 세계의 끝까지 지평을 넓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무처럼 수직으로 상승하여 하늘의 신성에 도달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집과 길은 줄기차게 시간을 역류하는 과거의 방향으로 음울하게 흐른다. 태초의 시간부터 세상은 상처로 덮여 있었고 만물에 근원적 죽음이 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삶은 상처로 얼룩진 폐허의 집이고 그 폐허를 견디기 위해 그는 시를 쓰며 생을 반추한다. 저물녘 창문에 기대어 더듬더듬 말하려다 말을 감추던 시인의 모습, 그의 눈에 비친 노을은 끔찍하다. 왜 그럴까· 아름다운 일몰의 풍경에서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고 죽어간 사람들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독과 사색은 그의 천형이고 운명일 수밖에 없다. 무료하고 적막한 시골 둑길을 혼자 걷다 문득 뒤를 돌아보는 시인, 그의 눈동자에 비친 황량한 들과 산과 강, 그렇게 시인은 누추한 삶의 저층을 바라보며 독자에게 다가간다. 이윤학은 폐허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 육신과 영혼에 깃든 상처를 쓸쓸한 서정으로 그려내는 시인이다. 때로는 예민한 감수성의 문장으로 때로는 끔찍하리만치 사실적인 문장으로 삶의 질곡을 드러내고 자본주의 사회의 추악한 이면을 드러낸다. 시인의 진솔한 자기응시, 삶에 대한 반성적 태도가 낳은 결과이리라. 그처럼 나도 자꾸 아픈 곳에 손이 간다. 외모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가려진 흉터에 자꾸 눈길이 머문다. 앙상한 뼈만 남은 낡은 다리 위에서 고추를 널고 있는 저 노파, 그녀의 어깨에 얹힌 삶 무게와 굽은 등을 짓누르는 죽음의 무게를 가늠해본다. 가을 산천과 들녘이 저토록 아름다운 건 가을이 남긴 상처의 다양한 무늬들 때문 아닐까. / 함기석 시인
꿈에서 돈은 근심·걱정을 상징하기도 한다. 반면 똥은 재물을 상징하기도 한다. 가을 어느 날 민망하게도 바지에 똥을 가득 싸는 꿈을 꾸었다. 일어나 핸드폰으로 똥 누는 꿈의 해몽을 검색했다. 돈이 많이 들어오는 꿈이란다. 며칠 후 1등 당첨이 잘 되는 판매점에서 로또 복권을 샀다. 복권을 사면 허황한 생각이 들까 봐 평소에는 잘 사지 않는다. 그렇지만 꿈이 생생한지라 큰마음을 먹었다. 내게 갑자기 돈이 들어올 곳은 복권밖에 없다. 복권을 추첨하는 날에 기대를 안고 번호를 맞추었다. 로또 복권 3개의 18개 숫자 중에 1개도 일치하는 것이 없다. 노력해서 번 돈 이외에는 공짜 돈이 없는 팔자를 잊고 분수에 맞지 않은 짓을 했다. 숫자가 하나도 맞는 것이 없는 복권을 보고 아내는 실없이 웃었다. 똥이 똥이 되어 버렸다. 똥과 관련된 속담이 많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듯 한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 '아끼면 똥 된다.' 등이 있다. 이때 똥은 더러운 것을 뜻한다. 그런데 돈을 똥으로 생각한 훌륭한 분이 계셨다. 300년 부를 지켜온 경주 최부잣집 최준님은 "재물은 똥과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된다"고 했단다. 똥을 밭에 뿌리면 우리가 먹고 살아갈 양식의 거름이 된다. 돈을 똥같이 여기라는 것은 돈을 더러운 것으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똥이 썩어서 거름이 되고 거름이 농작물의 영양분이 되며, 농작물의 열매가 사람의 양식이 된다. 또한 돈은 우리 몸의 피와 같다. 우리 몸에 피가 돌듯이 돈이 이 세상에 돌아야 한다. 모두가 잘살아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다.'라고 한다. 돈 자체가 죄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 돈은 죄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구원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돈이 죄의 도구가 아니라 구원의 도구가 되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 부자는 돈을 나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도구로 생각했다. 내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내가 가진 것 중에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것이 있는가? 내가 가진 성품과 재능도 다 받은 것이다. 재물이 있다고, 재능이 있다고, 지위가 있다고, 그것이 다 내 것이란 말인가? 때가 되면 돌려주어야 할 것들이다. 나의 생명까지도 내 것이라 할 수 없다. 하느님이 거두어 가시면 그만이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부자가 되려는 마음으로 인하여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에 빠지기 쉽고,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지기 쉽다. 어떤 스님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산도 돈이고 물도 돈이라고 한다. 저마다 다른 시선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욕심은 손잡이가 없는 칼과 같다. 움켜쥘수록 나에게 더 큰 상처를 준다. 또한 욕심의 안쪽에는 손잡이가 없다. 바깥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안에서 열 수 없는 문과 같다. 욕심의 수렁에 빠지면 헤쳐 나오기가 어렵다. 모두 받은 것이니 그저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마음 같이 쉽지 않다. 매년 3월이면 성당에서 레지오 단원으로 아치에스 행사 때 성모님께 나 자신을 봉헌한다. "저의 모후, 저의 어머니시어, 저는 오직 당신의 것이 오며, 제가 가진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옵나이다." 그러나 입으로만 봉헌하고 돌아서면 다시 내 것은 내 것이다. 심지어 남의 것도 내 것인 양할 때도 있다. 루가복음에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가 있다. 부자는 그의 집 대문 앞에서 빌어먹고 사는 종기투성이의 라자로를 돌보지 않았다. 그러다 죽어서 지옥으로 갔다. 재물을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사용했다. 돈을 순환하는 똥으로 보지 못했다. 꿈에서라도 똥을 돈으로 생각하지 말고, 돈을 똥으로 생각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박형준은 풍경 속에 놓인 사물들의 비애를 사색하는 시인이다. 이때 풍경은 주로 사라진 기억의 시간대에서 건져온 것들이다. "아주 오래전 유년의 어느 한순간, 그 과거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시인은 고백한 적이 있다. 그만큼 그는 기억 속으로 사라진 덧없는 것들이 아름답게 성화(聖化)되는 순간을 시로 포착하려 한다. 기억은 소멸과 죽음의 공간이지만 역설적으로 그곳에서 비상을 꿈꾸고 생명의 약동을 꿈꾼다는 점에서 박형준의 시는 죽음과 생명이 동거하는 혼례(婚禮)의 우주라 할 수 있다. 그는 주로 감각적 이미지로 삶과 죽음 전반을 성찰하는데, 시인은 왜 시적 수사(修辭)에 집중하는 걸까· 수사적 문장에 사색적 관조와 성찰이 덧입혀져 사유가 극대화될 때 시적 울림과 공명을 낳기 때문이다. 즉 감각과 사유가 하나의 몸으로 현현할 때 시의 아름다움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은 첫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1994)부터 짙게 나타난다. 이 시집은 작은 존재들의 비애감을 감각적 이미지로 채색한 시집이다. 시인은 지층 깊은 곳에서 살아나오는 추억들을 목격하면서 죽지 않는 유년을 생각하기도 하고, 나무 뒤에 숨어 집을 바라보며 또는 집 뒤에 숨어 나무를 바라보며 슬픔을 관조하기도 한다. 연못을 바라보며 하루 내내 침묵 속에서 소멸과 폐허를 생각하고 실존적 물음에 잠기기도 한다. 유년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이미지로 구현한 것이 두 번째 시집 『빵 냄새를 풍기는 거울』(1997)이다. 시인은 한밤중 물이 고인 웅덩이를 거울로 보고 그 거울 속에서 독특하게도 빵 냄새를 맡는다. 현실과 차단되어 있는 것 같지만 현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과거의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유년에 대한 심적 고통을 낭만적 꿈 이미지로 풀어낸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2011)는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일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결곡한 회한의 감정으로 풀어낸 다섯 번째 시집이다. 이전까지 어머니와 누이의 세계에 천착하던 시인이 아버지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회귀 가능한 공간이라면 아버지의 세계는 회귀 불가능한 공간으로 설정된다는 점이다. 그만큼 아버지 상실의 아픔이 크고 상처가 깊었다는 반증이다. 「홍시」는 이 시집에 수록된 시다. 뒤뜰 감나무에서 홍시가 철퍼덕철퍼덕 떨어지는 늦가을 밤, 돌아가신 아버지가 누워 계시던 큰방에 누워 시인은 바깥 풍경에 고요히 귀를 열고 있다. 현재의 자기 몸으로 과거 아버지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보며 시인은 임종 직전 아버지가 느꼈을 적막과 비애를 느끼고 마을을 가로질러 가는 기차소릴 듣는다. 시인은 애써 몸 저층에서 돋아 오르는 슬픔과 통증을 풍경으로 분산시키고 있지만, 아버지의 애잔한 눈동자에 어렸을 저승길과 그 눈길을 애처로이 바라보며 농을 던지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속으로 한없이 울었을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아버지의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뻣뻣한 손을 가슴에 가만히 얹어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면 참으로 눈물겹다. 늦가을 감나무 집터를 배경으로 시인의 기억과 아픔이 잘 형상화된 홍시 같은 작품이다. 먹먹한 서정의 울림이 깊고 고요하다. / 함기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