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의 시는 따뜻하고 고요하고 울림이 깊다. 그는 전통 서정시의 계보를 이어가는 시인이다. 그는 자연의 풍경들을 넉넉한 품으로 포용하여 아늑하고 평화로운 서정으로 구현한다. 유년의 고향과 그 속에 깃든 삶과 죽음의 무늬들, 존재의 아픔들을 불교적 사유로 풀어낸다. 사물을 바라보는 세밀한 관찰력을 토대로 낮고 차분한 어조로 느림의 삶을 성찰하고 인생의 무상함과 생명에 관해 사색한다. 이를 통해 생명들이 생겨나서 성장하고 소멸하는 생의 여정이 수도(修道)의 길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꽃이 피고 꽃잎이 떨어지는 사이가 찰나(刹那)의 한 호흡임을 깨닫는다. 예순 갑자를 돌아 나온 아버지의 홍역 같은 삶도 한 호흡이고, 해가 뜨고 달이 지는 하루도 한 호흡이고, 개조개가 슬며시 발을 내밀었다 거두어가는 사이도 한 호흡이다. 즉 세계의 모든 존재의 일생이 한 호흡이고 찰나이자 무한이다. 시인은 이 무겁고도 장엄한 한 호흡을 묵언(·言)으로 견디려 한다. 이런 우주적 시간 인식이 시의 품을 넓게 하고 울림을 낳는다. 꽃도 풀도 돌멩이도 동물도 사람도 이 묵언의 견딤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기에 시인은 자연의 풍경들에게서 인간의 말로 기록할 수없는 장엄함과 숭고함을 느낀다. 그러기에 그에게 풍경은 세계의 비의를 사유케 하는 물음표이자 인간의 삶과 죽음을 성찰케 하는 느낌표다. 이런 풍경들 중에서도 시인은 유독 저녁의 풍경에 매혹된다. 하늘로부터 땅에 어둠이 내려앉는 순간 존재들은 자신의 형상을 어둠 속에 묻고 이때부터 어둠의 마술적 힘이 지상 가득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 황혼이 깔리는 저녁은 존재의 형상 변화가 시작되는 시간대고 존재의 성찰이 이루어지는 시간대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직관과 통찰이 싹트는 시작점이고 망각되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부활점이다. 이 저녁의 시간에 시적 자아는 고요히 움직인다. 존재의 변화와 죽음을 사유하면서 인간과 자연과 우주를 성찰하면서 천천히 움직인다. 이 느림의 미학은 맨발, 길, 연기, 흐르는 물 등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문태준 시인을 떠올리면 창가에 고요히 앉아 뜰의 나무와 풀과 나비를 관조하는 모습, 저녁의 들길이나 산길을 천천히 걷는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걸음도 빨리 걷는 것이 아니라 아주 느리게 천천히 걷는 걸음이다. 그의 몸이 그러하듯 그의 시는 동세대 시인들의 속도감 높은 시들과는 색채와 무늬가 확연히 다르다. 그의 시는 멀게는 백석, 가깝게는 장석남과 혈연관계라 할 수 있다. 그는 유년의 풍경에 자주 사로잡히는데 그만큼 유년은 시인 자신의 살갗에 붙어있는 살아있는 시간이자 시세계의 근원적 출발지다. 이 유년을 대표하는 공간이 뒤란이다. 뒤란은 대체로 밝은 빛의 낮의 세계가 아니라 그늘의 드리워지는 저녁의 세계, 어둠이 밀려드는 밤의 세계로 그려진다. 자연현상의 비의와 침묵을 간직한 곳, 존재의 비극적 실상과 아픔을 간직한 공간이다. 슬픔과 기쁨, 아픔과 환희가 공존하는 원형적 공간이다. 이 뒤란이 좀 더 넓게 확장된 공간이 유년의 마을이다. 그의 시에서 유년의 마을이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곳, 주검을 실은 상여가 지나가는 곳, 무당의 마술적 힘이 지배하는 곳으로 그려지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이 마술적 힘이 서정적 이미지들과 결합하여 독특한 기억공간으로 재탄생하는데 흥미로운 건 죽음과 무당의 힘이 존재하는 그곳이 두려움의 공간이 아니라 무심한 풍경들의 사색공간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는 시인이 죽음을 삶의 일상의 하나로 간주하고 죽음에 대한 주관적 감정들을 몸 안으로 삼켜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를 삶과 죽음의 의미를 파헤치는 도구적 수단으로 전락시키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서정의 풍경들 속에 자유롭게 풀어놓음으로써 역으로 삶의 의미, 죽음의 비의, 존재의 기원 등을 사유한다. 「수런거리는 뒤란」은 시인의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2000)에 수록된 표제작이다. 산죽(山竹) 사이에서 장닭이 애처롭게 우는 저녁 무렵, 하늘에 낮고 길게 깔린 구들장 같은 구름을 바라보며 시인은 무량한 시간의 흐름, 바람과 빛과 어둠의 근원에 대해 사색한다. 자연과 감각적으로 조응하면서 대답 없을 질문을 통해 시인 자신과 인간의 삶을 반추한다. 바람이 잦으면 산죽도 사람처럼 등이 둥글게 굽어질까, 이런 독백 투의 질문에는 생의 비애를 품어 안으려는 시인의 넓은 품이 드러난다. 캄캄한 밤, 어둠이 댓잎 뒤꿈치에 박아놓은 별이 반짝 하며 내게 눈짓하는 것만 같다. 함기석 시인
저녁 식사를 하고 집 가까이에 있는 도시공원인 장구봉에 올랐다. 하지가 얼마 남지 않은 때라 날씨도 후덥지근하다. 저녁 식사 후 봉우리에 올라도 해가 서쪽에 많이 남아있다. 낮이 길면 하루가 더 긴 것 같이 느껴진다. 장구봉은 가경중학교 정문 앞에 있는데, 산은 주택지로 개발되어 지금은 봉우리만 남아있다. 봉우리 바로 밑에 서너 동으로 된 빌라가 있었다. 지금은 재개발 중에 부도가 나서 공사를 중단하였다. 푸른 산 밑이라 삐져나온 녹슨 철근이 흉물스럽다. 공원 입구에 있는 샘물은 물맛이 좋아 주민들이 많이 찾았으나 지금은 맛이 변했는지 찾는 사람이 뜸하다. 공원에는 많은 사람이 산책과 운동을 한다. 가끔 나무 밑에 앉아 명상하는 사람도 있다. 가로등이 있어 밤에도 찾는 분이 있다. 도심의 숲 공원은 시외로 나들이가 어려운 나이 많은 분들에게는 좋은 휴식처다. 나뭇잎 사이로 내려앉는 햇빛을 보면서 새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나무가 풍기는 피톤치드로 생활 속에서 싸인 스트레스와 심리적 피로를 떨쳐버릴 수 있다. 봉우리에 어떤 분이 소나무에 줄로 화이트보드를 매달아 놓고 매일 새로운 사자성어를 적어 둔다. 잊혀가는 기억을 매달아 놓고 싶은 것일까. 옛 성인의 말씀을 다시 새기며 마음을 수양하고 싶은 것일까. 공원을 찾는 분들에게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싶은 것일까· 전직이 학교 선생님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제는 '초로인생(草露人生)'이라는 사자성어를 적어 두었다. 새벽에 생겼다가 햇볕이 나며 바로 수증기가 되어 공기 중에 사라지는 풀잎에 맺힌 이슬이 사람의 한 생애와 같다는 뜻이다. 과학자들은 138억 년 전 빅뱅이 있었고, 46억 년 전에 지구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사람의 수명을 100년도 잡아도 한 생애를 지구의 역사에 비교하면 이슬과도 같다. 이 사자성어를 쓰신 분은 인생을 예쁘게도 이슬과 같다고 했다. 티 하나 없는 이슬이라 했으니 그분의 삶은 맑고 깨끗했을 것 같다. 그 당시 삶의 터전도 맑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슬로(露)를 보면 길(路) 위의 비(雨)로 표현했다. 요즘은 길 위에 비가 오면 미세먼지가 섞인 흙물이다. 도시의 포장도로에서는 이슬을 찾아보기 어렵다. 살아가는 모습도 흙탕물 같다. 미성년자를 협박해서 성 착취를 한 텔레그램을 통한 n번방 뉴스, 아이가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아홉 살 아이를 여행용 가방에 가두어 죽게 한 뉴스, 집무실에서 여직원을 강제 추행한 어느 단체장의 뉴스뿐만 아니라 상처가 아물지 않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용하여 돈과 권력을 쥐려다 동티가 나기도 한 뉴스도 있다. 깨끗하고 고귀한 삶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도심의 도로에서 이슬을 찾는 것 같다. 어릴 때 아침 일찍 시오리를 걸어 학교에 가면 논두렁 밭두렁의 풀에 맺힌 이슬에 신발이 다 젖었다. 신발에 이슬이 묻지 않도록 조심해서 걸어도 소용없었다. 이슬에 젖은 신발은 길바닥의 흙으로 범벅이 되었다. 양발을 하나 더 준비해 가서 학교에서 갈아 신어야 했다. 사막에 사는 전갈은 햇볕이 강한 낮에는 바위 밑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기온차이로 생긴 이슬로 수분을 섭취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주말 농사를 지어보니 이슬이 새삼 고맙다. 여름철 덥고 가물 때는 농작물이 타 죽을 것 같은데, 그럴수록 아침에 이슬은 더 많이 생긴다. 농작물은 잎에 맺혀 떨어지는 이슬로 생명을 유지한다. 풀잎에 맺힌 이슬은 아침 햇살에 보석처럼 빛난다. 영롱하여 영혼에 울림을 준다. 장구봉을 돌면서 찰나 같은 인생이 흙탕물 같지 않고 이슬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짧지만 이 세상의 일을 다 마치고 갈 때는 이슬같이 맑고 깨끗한 모습으로 가고 싶다. 가물 때 누군가에게 양분이 된다면, 덧없는 인생이라 했지만 분에 넘치는 한 생애가 될 것 같다.
김선우는 여성의 몸, 특히 자궁을 신전(神殿)으로 승화시켜 생명의 향연을 관능적으로 펼친다. 그녀에게 자궁은 생명의 발아 장소이면서 관능의 시원(始原)이자 수원(水源)이다. 그녀의 시에 어머니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자궁 속의 물에 대한 무의식적 지향성 때문이다. 주목되는 점은 어머니가 시인의 사적 차원에 한정되지 않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어머니들, 삶의 고난과 애환을 짊어진 여성들, 나아가 우주로 확산된다는 점이다. 그렇게 시인은 여성의 몸에 중심을 두고 불교의 윤회사상, 자연과 우주의 생멸원리, 시간의 순환론으로 사유를 확장해나가는 에코페미니즘의 시세계를 펼친다. 이런 점에서 김선우의 시는 모성적 부드러움과 생명의 잉태를 주로 다루었던 한국 여성시의 영역을 일정 부분 확장시키며, 여성의 몸에서 벌어지는 생리와 배변 등 그 동안 우리 시에서 소홀히 취급되었던 소재들을 재발견한다. 에코페미니즘의 세계에서는 몸의 감각과 영성(靈性)이 중요하게 취급된다. 정신과 육체를 하나의 대상으로 보고 몸 자체를 사유하는 주체로 승격시킨다. 김선우의 시에서도 여성의 몸은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나누어진 분열과 갈등의 장소가 아니라 합일과 조화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남성적 이성중심주의, 수직적 논리중심주의, 근대적 데카르트 사고와 원근법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 즉 시인에게 여성의 몸은 이성적 로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육체가 아니라 자연의 계절순환 원리를 생태적으로 재현하는 실체적 대상, 즉 자연이고 우주다. 따라서 시인에게 여성적 글쓰기는 단순히 시를 쓰는 주체가 여성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여성의 몸에 대한 전면적 확대와 재편 행위고 이성적 경계를 지우고 뛰어넘어 만물의 열락, 주이상스(jouissance)의 세계로 진입하는 행위다. 오늘 소개하는 시 「완경(完經)」은 김선우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이 시에서 수련과 엄마는 동일시된다. 닷새에 걸쳐 꽃잎을 열고 닫는 수련은 엄마의 몸, 몸의 시간과 직접적으로 연계된다. 수련의 하루는 엄마의 십 년에 해당하므로 닷새라는 짧은 시간은 오십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과 동일하다. 이 오십 년은 그 동안 엄마의 몸에서 수없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생리와 아픔, 임신과 유산, 출산과 수유 등 고통과 슬픔과 희열을 대리하는 장엄하고 숭고한 시간이다. 닷새의 시간이 지나고 진분홍 꽃잎을 초록 연잎 위에 떨군 수련을 시인은 선정에 든 와불 같다고 말한다. 선정(禪定)이란 한마음으로 사물을 생각하여 마음이 하나의 경지에 정지하여 흐트러짐이 없는 상태를 말하니, 시인에게 수련은 몸과 마음을 닦아 초월의 경지에 도달한 와불(臥佛)과 다를 바 없다. 엄마 또한 쉰 살부터 생리가 그치고 급격한 몸의 변화를 거쳤으니 적의의 화두(話頭)마저 걷어버리고 몸의 중심에 허공을 들인 수련과 동일한 존재다. 그래서 시인은 꽃을 거둔 수련(엄마)에게 온 사랑을 담아 속삭인다. 폐경(閉經)이 아니라 완경(完經)이라고! 이 시의 놀라운 점은 바로 이 역치된 시선을 통해 발견해낸 숭고미에 있다. 김선우의 시가 종종 주이상스의 세계로 진입하는 건 이러한 영성적 시선과 사랑의 주체의식 때문이다. 다시 읽어도 아름답고 아픈 시다. / 함기석 시인
따스함을 머금은 맑은 하늘엔 흰구름이 살며시 얼굴을 내밀고 기지개를 켜고 일어선 무뚝뚝한 산은 초록빛 푸르름으로 단장하고 창 너머 저멀리서 나를 부른다. 텅빈 공간 같던 천지에 봄기운이 촘촘히 차오르면 세상은 포근함으로 가득 채워져 초목이 새생명을 하나 둘 살포시 밀어 올린다. 땅끝에서 용광로 보다 뜨겁게 퍼올린 생명의 파도가 세상과 눈 맞추고 연두빛으로 투영되어 이슬보다 영롱하고 별보다 찬란하다. 싱싱하고 힘차게 올린 그 새 순은 주먹을 굳게 쥐고 꿈을 이루고 신화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꼼꼼히 하는 화창한 봄날이다. 무작정 나왔는데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 가끔 가보는 호수를 찾아 물가에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물속을 바라본다. 물빛이 참 곱다. 물속은 투명하고 맑다. 그 맑고 투명한 화선지에 하늘의 푸른 기운이 호수에 내려와 파란 바탕을 칠하기 시작하자 주위의 풍경들이 서로 온몸을 끌어안고 어울리며 조화를 이룬다. 산이 내려와 맑은 색들을 호수에 풀어 놓을때면 마을도 함께 내려와 자리를 잡는다. 그야말로 봄날 빛으로 그린 수채화다. 손이라도 닿으면 자국이 묻어날 것같은 싱그러운 연두빛. 꼭 안아주고 깨물어 주고 싶은 연초록 색감. 아직 잠에서 덜 깬 짙은 녹색. 파란 물빛에 비친 산빛. 노랑과 연두와 초록을 환상의 비율로 가미한 앳된 연노랑이 꿈결에서 만난 듯한 빛의 세계를 만든다. 하늘과 산과 나무 그리고 물과 연초록의 경계가 한없이 맑으며 분명하지만 또 한묶음이고 서로의 경계를 뛰어 넘기도 한다. 어쩜 이렇게 고울수 있을까. 어떤 물감이기에 이런 색깔을 낼 수 있을까. 어느 꽃이 이보다 더 이쁠수 있으랴. 어느 보석이 이보다 더 빛날 수 있으랴. 화려하지도 번쩍이지도 않지만 이렇게 맑고 깊고 깨끗한 아름다움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말로 전할 수 있을까. 이런 풍경을 볼때마다 늘 겸손해지는건 왜일까. 호수위로 바람이 분다. 나무는 기다린 듯 노래를 부르고 물속의 나뭇잎은 봄의 화음이라는 곡조에 맞추어 몸을 흔든다. 아니 춤을 춘다.그 춤사위는 화려하지 않지만 독보적이고 무아지경이다. 누구든지 그냥 빠져든다. 감정도 이성도 모두를 잊게한다. 그러나 바람이 멎고 수면이 잔잔해 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춤추는 모습은 사라지고 화두를 안고 깨달음을 얻고자 선정에 든 수행자의 모습이다. 한치 흐트림도 없이 그저 묵묵히 제 모습을 지키고 있다. 바라보는 내가 물속 수채화인지 물속 수채화가나인지 모른다. 무념무상이라고 해야할까 무언가 비워지는 느낌이 있고 물에 비친 맑은 기운이 내 몸을 파고든다. 명경지수라고 했던가. 사색을 즐기는 고요한 마음이 봄날 물속의 푸르름을 보고 생긴 말은 아닐까 싶다. 얼굴을 씻고간 바람이 물결을 출렁이며 손에 잡힐듯한 수채화를 지우고 지나간다. 문득 저 물결이 삶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채우고 담고 가두고 불리고 쌓기만 하는 우리네 속내를 자주 비우라고 넌지시 말하는 듯 하다. 또 출렁임 자체가 시련일수 있지만 극복하는 과정이 인생의 한 부분일 수 있고 한편으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을테니까. 물결이 일지않는 호수와 바다가 어디에도 없듯이 우리네 삶도 다 그렇게 흔들리고 지우고 돌이켜 보면서 사는 것 아닐까. 맑은 호수에 내려앉은 선명한 봄빛처럼 내 모습도 그렇게 비추려면 늘 물 같이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야 가능하겠지. 물결처럼 지우고 또 비춰볼 수 있다면 봄날의 수채화 처럼 세상의 맑은 빛으로 깊고 청초하게 인생을 색칠하고 싶다.
조연호의 시는 대체로 까다롭고 비밀스럽다. 시인이 객관적 사실과 의미를 담는데 치중하기보다 주관적 감각을 살려내는데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시인의 감정 흐름에 따라 이미지들이 연쇄적으로 호출되면서 시의 의미망이 복잡하게 형성된다. 주관성이 지나치게 강화될 때 그의 시는 자폐적 폐쇄성을 드러내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폐쇄성이 그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는 요인이 된다. 물론 시의 난해함과 소통부재가 시적 개성을 만든다는 말은 아니다. 그의 시의 난해성과 폐쇄성은 고대 문자와 사상에 대한 탐색, 사어(死語)와 폐어(廢語)의 복원 욕구, 신과 인간에 대한 탐구, 동양적 윤리 세계에 대한 공부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수반된 결과다. 밝은 빛의 세계보다 어둡고 음울한 음지의 세계로 기울어지는 시인의 생리적 기질 또한 시를 난해하게 하는 요인이다. 그는 양달보다 응달로 감정과 상상이 기울어지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런 걸까? 유년기의 아픈 경험들, 가난의 시간 속에서 형성된 상처들이 시작 과정에 돌발적으로 튀오나오기 때문일 것. 이 상처들이 사물, 인물, 풍경 속에 다양하게 투영되면서 합리적 사고로 설명할 수 없는 검은 광기의 세계, 고독과 폐허의 세계가 그려진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그에게 시는 자신과 세계와 우주를 앓는 아름다운 병이자 치료다. 동세대 많은 시인들과 달리 조연호는 유희나 놀이를 지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의미 중심으로 언어를 운용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에게 언어는 의미를 담는 그릇이기 이전에 시인의 감각과 주관을 담아내는 그릇이고, 시는 의미의 담지 공간이 아니라 감각적 인상의 창출공간에 가깝다. 따라서 그에게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나치는 사물의 순간, 풍경의 순간, 기억의 순간이 중요하다. 즉흥적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나 순간적으로 특정 장면을 포착하는 사진사처럼 그는 즉흥적 이미지들로 상징과 비의의 세계를 복사(複寫)한다. 주목되는 것은 독특하고 낯선 풍경들이 현실의 재현물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이 영사된 심리반영물이라는 점이다. 시인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갈망과 번민, 고독과 우울, 사랑과 상처의 감정들이 투사된 육체 풍경들이다. 즉 그의 시에서 풍경은 시인 자신의 기억과 상처를 복기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호환되는 대상들이다. 그의 시에서 투명한 의미보다 불투명한 정서, 의미의 명료한 집중보다 느낌의 불명료한 확산, 비의와 상징으로 가득 찬 낯선 세계가 그려지는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 다시 말해 풍경은 무수한 비밀과 상징을 숨긴 세계에서 자신의 어두운 감정, 상처, 사유, 상상 등을 추출하기 위한 일종의 여과장치 필터인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다분히 인상파 화가들의 작업과 흡사하며 동양적 비밀을 간직한 종교들과 내통한다. 인상의 세계에서는 대상 자체의 형태와 의미보다 대상에 대한 작가의 순간적 감각이나 느낌이 중요하고, 비밀종교에서는 천지창조의 과정이 신비화되고 신과 인간의 관계 또한 극도의 상징적 관계로 처리된다. 조연호 또한 반쯤은 지워진 불투명한 공간과 공간 속의 풍경들과 매우 집요하고 긴밀하게 관계한다. 그 과정 전반이 상징과 암시의 비밀 문장들로 채워진다. 문장과 문장 사이, 시와 시 사이에 시인의 사유와 의식이 섞여 들어가 시집 전체를 비밀의 베일에 싸이게 한다. 이 비의의 문장 태동과정에 퇴폐와 타락의 감정, 정신적 통증과 어지러움과 현기증, 거세에 대한 불안과 공포의 유아적 심리가 어두운 색으로 채색되기도 한다. 그 결과 시집은 비의와 암시로 점철된 세계의 상징 복사물이 된다. 우주가 음사(音寫)되고 음사(陰寫)된 세계, 천문(天文) 지문(地文) 인문(人文)이 하나의 몸인 시체(詩體)의 지도를 그린다. 「오월」은 첫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2004)에 수록된 어렵지 않은 시다. 슬픔과 암울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작품으로 시인의 감각적 수용과 표현이 돋보인다. 쥐들이 지붕을 타넘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 붉은 꽃잎에 방직공장 가는 먼지가 날아와 쌓이는 동네다. 엄마는 재봉틀을 돌리고 주말이면 동네 확성기에서 찬송이 울려나온다. 밤이 되어도 나는 등을 켜지 않는다. 불을 켜면 죽은 꽃과 비람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과 죽음 속에서 살아가는 동네 주민들, 특히 엄마들의 슬픔이 부각되면서 오월이라는 계절의 화려한 이면에 숨은 삶의 아픈 무늬들이 드러난다. 꽃빛 짙은 이 오월에 화자(시인)은 분노해야할 잃은 없는지 자문한다. 이 물음 속엔 시대와 사회에 대한 시인의 분노와 연민이 함께 스미어 있다. 때문에 시의 외적 배경인 비는 비극 속에서 살아가는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 흘리는 눈물로도 읽힌다. 비 갠 후, 맑은 오월의 하늘 아래를 느릿느릿 옮겨가는 달팽이와 그의 늙은 집, 달팽이 지나간 뒤에 남은 반짝거리는 것들이 모두 아프고 슬프고 아름답다. 함기석 시인
세상이 연록 색으로 변하며 하얀 꽃, 빨간 꽃, 노란 꽃으로 산천을 물들이고 남녘의 봄바람이 내 영혼을 들로 산으로 끌어 낼 때, 내게 세 송이의 꽃이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한 송이의 꽃만으로도 설레고 행복한 마음으로 가슴이 가득 찰 텐데 세 송이의 꽃이 한꺼번에 봄바람과 함께 실려와 일생의 기쁨으로 영원히 간직할 행복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한 송이. 68세에 인연을 맺은 수필과 창작 수업을 들으며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고, 매력에 빠져 수필 세계를 열심히 여행하였다. 수필과 창작 수업 한 학기 수업을 들으며 35편의 글을 써 올렸다. 미약하지만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격려의 뜻으로 지도 교수님과 심사위원님들의 배려로 수필이 당선되어 수필 작가로 등단을 하게 되었다. 내게는 요원한 꿈이 이루어졌고 무척이나 큰 기쁨으로 커다란 꽃다발을 받은 느낌이다. 살아온 세월의 흔적들이 새삼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슬프고, 힘겹고, 기쁘고, 행복했던 모든 일들이 값진 보석으로 다가오며 소중한 보람이 되어서 꽃다발로 가슴에 안겨온다. 두 송이. 서너 번의 특허 출원이 무산되고 특허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갖지 않고 있을 때, 1년 전에 특허 출원하였던 특허가 등록결정이 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1년을 기다려 심사를 받고 1회의 보정을 거쳐서 등록 결정이 났다. 나름 자부심을 가질 정도의 특허라 기쁨은 더 크고 자랑스럽다. 특허가 등록이 결정되니 다시금 의욕이 생기고 욕심이 생겨난다. 요즈음 새로운 용어로 욜디락스 라는 용어가 있다. 욜디락스(Yoldilocks) 는 욜드 세대가 주도하는 이상적인 경제 부활을 뜻하며 우리말로는 '청로(靑老) 경제'로 쓸 수 있다. 욜드(YOLD : young old)는 65세에서 79세 사이의 젊은 노인 인구를 뜻한다. 이들은 건강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생산과 소비생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며 경제에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욜디락스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욜드 세대가 주도하는 이상적인 경제 부활을 의미한다고한다. 아직 늙지 않은 젊은 노인으로 연금에 의존하며 여행이나 다니고, 등산이나 다니며 세월을 허비하는 노인으로 주저앉지 않고 욜디락스에 동참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이들과 함께 경제부흥을 이루자는 것이다. 3억 이상 투자되어야 했던 콘크리트 회사를 단돈 1천만원과 젊은 패기로 설립하였던 경험을 되살려 아직은 남아있는 열정을 욜드락스에 바쳐야 되겠다. 세 송이. 약 2개월 전에 샘터문학상 공모전 시부분에 5편의 시를 응모하였다. 공모전에 당선되어 시집에 실리고 시인으로 등단을 하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평소에 서툰 글로 조금씩 써 보았던 시가 시인으로서의 가망이 있어 보였는지 심사위원님들이 당선을 시켜 주셨다. 평소에 시에 대한 관심으로 시를 접하고, 시를 즐겨 읽은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나보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찾아내서 어두운 그늘 속에서 헤어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한줄기 시원한 봄비 같은 희망을 주는 그런 시인이 되고 싶다. 시인으로서의 소임을 다 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 하는 시인이 되려고 한다. 나의 글 한 줄이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이며 나 또한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더 열심히 정진을 하여야겠다. 수필작가, 시인, 발명가로서 욜디락스에 참여하는 젊은 노인이 되어 활발한 경제 활동에 다시 참여하여야 되겠다. 69세의 봄은 내 인생의 꽃이 피는 희망의 봄으로 다가왔다. 춘삼월에 찾아온 세 송이의 꽃이 나의 남은 인생을 아름답고, 행복하고, 보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약속해주는 희망의 꽃이 되었다. -------------
[충북일보] 유종인은 일상의 사물들을 섬세한 눈길로 관찰하여 생의 슬픔을 발견해내는 시인이다. 그에게 시와 삶은 천천히 우는 슬픔의 행위다. 슬픔이 천천히 그의 몸을 적시는 동안 세상도 맨발로 그의 몸속에 스민다. 그렇게 그는 세상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삶의 의미, 영혼의 실체, 원죄 의식에 대해 사색한다. 그는 종종 사물과 풍경의 기원을 과거에서 찾는다. 그의 시에 고고학적 상상력, 계보학적 추적, 고전적 취향이 나타나는 건 근원에 대한 회고적 욕망 때문이다. 옛것에 대한 사색과 성찰을 통해 그는 삶과 죽음, 자연과 인간에 내재하는 생명에너지를 발견하고 우리 삶에 편재한 슬픔들을 서정의 묵화(墨·)로 그려낸다. 때문에 그는 도시 공간, 인공 언어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자연에 몸을 섞어 조응한다. 그의 시에 인간의 감각기관 중 눈과 관련된 빛의 일렁임, 귀와 관련된 소리의 미세한 진동, 고요 속의 격동 등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적극적 포용 때문이다. 크게 보면 그의 시는 시인과 사물들 사이의 감각적 조응이고 아름다운 교향(交響)이다. 사물과 사물에 대한 시인의 마음과 몸짓이 비빔밥처럼 잘 어우러져 섞인다. 큰 것과 작은 것, 복잡한 것과 단순한 것, 엉킨 마음과 텅 빈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어 함께 움직인다. 그렇게 그는 고통과 상처, 슬픔과 환멸에 대한 이미지들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삶을 따뜻하게 끌어안는다. 때론 광기와 열정을 통해 삶과 비판적으로 마주하기도 하고, 서(書) 화(畵)를 넘나드는 고전적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시적 산수화를 그리기도 한다. 오늘 소개하는 「돌확 속의 생」은 세 번째 시집 『수수밭 전별기』(2007)에 수록된 단아한 작품이다. 작고 아담한 절의 장독대에 놓인 돌확, 팔 할 쯤 빗물이 고인 그 돌확에 하늘과 구름이 비친다. 그런데 이 평범한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이 평범치 않다. 빗물이 고요의 힘으로 모셔져 있고 보기 때문이다. 그 빗물이 하늘과 구름을 모셔와 제 가슴에 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돌확의 물에 말벌이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익사 직전의 위급한 상황에서 시인은 물에 비친 구름이 섬이었으면 하고 상상한다. 왜 그럴까· 돌확의 작은 물이 말벌에게는 망망대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바다에 빠져 익사 직전일 때 바로 곁에 섬이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시인은 지금 죽음 직전에 놓인 말벌을 마치 자기 자신인 것처럼 대하고 있다. 구름이 섬이길 바라는 이 부분에서 시인의 섬세한 마음과 미물에 대한 존중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구름은 섬일 수 없으니 시인은 얼른 떡갈나무 잎을 가져와 말벌을 구해준다. 그 다음 장면부터 시는 좀 더 깊은 사색에 뼈져든다. 참 오랫동안 몸과 마음을 닦아 고요해진 물, 아슬아슬했던 말벌이 살아난 후 돌확 속엔 죽음의 수위(水位)가 모셔진다. 말벌 한 마리가 떠났다고 해서 물의 수위가 크게 달라질 리는 없다. 그러나 말벌의 생사가 교차한 순간의 시간이었기에 이 비유적 수위는 매우 중요하다. 또한 추녀 밑에 매달린 쇠 물고기 모양의 풍경은 바람에 흔들리며 아름답고 은은한 풍경소리를 내는데, 이 장면을 시인은 물고기풍경이 자기 몸의 소리를 허공에 모셔 내간다고 표현한다. 무엇이든 모셔지던 절의 추녀 밑 공간이 보시(布施)와 자비의 배품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이 시 전반에서 시인은 자신을 낮추고 사물들, 돌확과 빗물과 말벌과 떡갈나무 잎과 물고기풍경 등을 공손히 떠받들고 있다. 이런 겸양과 배려의 미덕은 유종인 시인의 평소 인품과 성심을 그대로 드러낸다. 절간의 소소한 풍경으로 나를 사색에 잠기게 하는 아름다운 적요(寂寥)의 시다. /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옛 고갯길로 더 잘 알려진, 나는 새도 쉬어 넘어간다는 새재(鳥嶺)의 조령산 정상에 올랐다. 때 마침 불어오는 마파람이 온몸을 감싸며 반겨준다. 심호흡을 크게 반복하며 오월의 조령산 정기를 들이킨다.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듯 후련하다. 이어서 사방을 천천히 조망하며 자연의 신비함을 감상한다. 시선을 북쪽으로 향하니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는 기암괴석의 신선암봉이 위용을 뽐내며 바로 눈앞에 서있다. 그 뒤로 주흘산과 마패봉,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월악산의 능선이 마치 한 폭의 병풍처럼 다가오고. 남쪽으론 백화산과 희양산, 속리산의 명산들이 어슴푸레 굽이굽이 이어져 있다. 구름과 하늘과 맞닿은 능선의 모습이 천상을 연결하는 다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든다. 아내도 "아 좋다!"하면서 손을 치켜들고 숨을 깊게 들이킨다. "그러네, 미세먼지도 없고 좋은 날씨네. 경치도 장관이고." 보일 듯 말 듯 한 속리산을 가리키며 아내의 감탄사에 화답했다. "날씨 말구, 당신하고 이렇게 등산 다니는 거. 한 20년만 더 다녔으면 좋겠다." "꿈도 야무지네. 20년은 욕심 아녀 혹 10년이라면 몰라두." 40대 후반, 간경변으로 투병을 했던 때의 일이 스쳐간다. 몸이 이상해서 동네병원을 찾았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간에 종양이 있으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종양이 암으로 판명나면 고칠 수 있을까. 살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내가 죽으면 아내는 어찌되나. 자식들이 홀로서기를 하려면 10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아니 대학졸업 할 때까지 5년만이라도 제발…. 종합병원에서 검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온갖 상상과 걱정으로 번민을 했었다. 다행히 악성종양이 아닌 혈관종으로 판명되어 암의 두려움에선 벗어났으나 황달과 함께 진행된 간경변으로 장기간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병원생활은 많은 생각과 지난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름 열심히 살면서이제 좀 여유가 생겼는데 병을 얻었다는 억울함에 눈물이 나왔다. 이게 다 내 운명이려니 체념도 했다. 혹, 잘못 살아온 것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난 과거에 대한 회한이 밀려왔었다. 같은 병실의 환자가 갑자기 숨을 거두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인생의 무상함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길고 짧음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인데, 왜 사람들은, 아니 나부터가 천년만년 살 것처럼 그리 욕심이 많을까 회의(懷疑)하고 반성했다. 천명대로 살려면 과로와 스트레스를 피하라는 의사선생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돈 욕심, 자식 욕심, 출세 욕심 모두 버리자고 마음을 다잡았었다. 그 당시엔 건강만 되찾는다면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는데…. 15년이 지난 지금, 건강을 회복하여 이렇게 아내와 함께 등산을 다닌다는 게 꿈만 같다. 10년만 아니 5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빌 때를 생각하면 더없이 감사하고 과분할 뿐이다. 그 때에 비하면 분명 욕심인 것 같은데 남 것 빼앗아 오는 것도,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까 꿈이든 욕심이든 앞으로 20년을 더 등산하자고 아내와 손을 맞잡았다. 어린 시절 나는 요즘 아이들 같이 하고 싶은 꿈을 갖지 못했다. 선생님이 되고 싶기도 했었으나 가정형편으로 겨우 실업계고등학교를 근근이 다녔고 꿈도 포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꿈이 있었다고 한다면 장남으로서 빨리 돈을 벌어 살림에 쪼들리는 아버지를 도와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은퇴 후 시간이 많아지고 건강이 좋아지니 어린 시절 갖지 못했던 꿈, 투병을 하면서 접었던하고 싶은 일들이 마음 속에 꿈틀댄다. 황혼의 꿈이 일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본다. 우선 좋은 수필을 쓰고 싶다. 내가 쓴 책이 서점에 진열되고 찾는 이가 있다면, 정말 보람 있는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10년 20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하며 무엇보다 곱게 늙어가고 싶다. 젊은 시절 하지 못했던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고집과 아집으로 일그러진 노인이 아니라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의 지적이고 교양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나와 함께 명산을 둘러보고 전국의 둘레길을 걷고 싶은 아내의 꿈도 버킷리스트에 포함시킬 것이다. 이 모든 바람은 꿈일까 욕심일까.
[충북일보] 아침 일찍 운동을 하러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보니 마스크 챙기는 걸 깜박 잊었다. 집에 돌아 가 마스크를 쓰고 나와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대로 전철을 탔다. 귀찮은 생각에 그대로 차를 탄 게 잘못이었다. 지하철 안 승객들을 바라보며 깜짝 놀라고 당황했다. 전동차 안의 모든 승객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앉을 자리는 있었지만 출입문 옆 벽면(壁面) 쪽으로 가 서서 가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흉을 보는 것 같아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느낌이 왔다. '마스크 외계인'이 된 듯 불안하고 초조한 기분으로 목적지에서 차를 내렸다. 유채꽃이 한창인 제주도 에서는 여러 대의 트랙터로 꽃밭을 갈아엎었다. 예년처럼 넘치는 상춘객이 두려워서 취한 조치다. 서울시는 벚꽃 명소인 여의도 윤중로 입구를 차단했다. 벚꽃 구경나온 상춘객들 입장을 막기 위해서다. 군데군데 캠퍼스의 아름다운 꽃구경을 하지 못하도록 '꽃놀이 오지 마세요' 써 붙이고 대학교 정문을 잠가 버렸다. 봄이 무르익어가고 있지만 봄 같지 않은 계절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온 나라에 코로나 역병이 침투하여 국민들이 수난을 겪는 동토(凍土)의 계절만 같다. 요즈음 우리는 '사회적 거리'라는 낯선 말을 자주 쓰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하기 위하여 가능하면 사람끼리 만나지 말고 거리를 두라고 하는 것이다. 꼭 만나야 할 경우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라고 한다. 사회적 거리란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이 소개한 개념이다. 사람끼리의 공간은 인간관계에 따라 4가지로 구분한다. 가족이나 연인 사이처럼 숨결이 닿을 듯 '친밀한 거리'(0-46㎝), 친구나 가까운 사이에 격식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개인적인 거리'(46-120㎝), 사회생활 하며 업무상 만나는 사람들과 지키는 '사회적 거리'(120-360㎝), 무대공연이나 연설 등에서 무대와 관객이 떨어져 있는 '공적인 거리'(360㎝ 이상)인 것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밀폐된 실내의 가까운 거리에서 감염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사회적 거리가 주목을 받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날라 가 흐트러지는 거리가 2 미터 정도라고 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인간(人間) 이라는 글자가 사람끼리의 간격과 거리를 상징하는 것 같다. 사람끼리는 관계가 가까울수록 거리도 가까워진다. 뱃속에서 나온 아기는 엄마의 젓을 물고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두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없는 셈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뜨거운 사랑이 있는 사이다. 사랑하는 연인끼리의 거리는 어떨까. 사랑하는 남녀끼리는 사랑이 뜨거워질수록 사이가 가까워지고 끝내는 거리를 없애려고 안달이 나게 마련이다. 친밀한 거리나 개인적인 거리가 따뜻한 사랑의 관계라면 사회적 거리나 공적인 거리는 냉정하고 차가운 거리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끼리 어떤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을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가까운 거리를 두어야 할 사람이 있고, 더 먼 거리를 유지해야 할 사람이 있다. 사람끼리 거리 조절의 잘못은 인간관계의 실패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인간관계 거리 조절은 인생의 성공 여부를 결정지을 수도 있다. '고슴도치 소원'이라는 동화가 있다. 가까워지면 아프고 멀어지면 얼어 죽는 고슴도치의 딜레마를 이야기 한 것이다. "외롭지만 혼자 있고 싶고, 혼자이고 싶지만 외로운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로 선진국을 비롯하여 지구촌이 아비규환(阿鼻叫喚)이다. 우리나라는 코로나19 확산세가 다소 진정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방역 체계로 전환할 것을 검토한다고 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무한정 계속하면 일상생활과 경제활동이 침체의 늪에 빠진다. 생활방역 체계는 일상생활과 경제활동이 방역조치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조치다. 역병 난국을 극복해도 코로나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른 세상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어쩌면 예전 일상으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바이러스 방역 못지않게 코로나 세상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심리적 방역도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충북일보] 고영민은 온건하고 부드러운 시정(詩情)을 지닌 시인이다. 그는 슬픔의 무늬들이 배어 있는 대상들을 푸근하고 따듯한 가슴으로 감싸 안는다. 타자와의 소통을 욕망하고 가족적 유대감을 지향하기 때문에 그의 시는 전반적으로 따듯하고 포근한 분위기를 띤다. 그의 시에 나오는 특정 장소, 사물, 인물 들은 대부분 기억의 공간에서 호출된 것들이다. 사실적 관찰과 응시, 반성적 사유와 성찰, 형이상학적 질문과 사색을 통해 시인은 지나온 시간대에서 기억의 앙금들을 건져 올린다. 이 건짐의 과정에서 발견한 생에 서린 비애, 연민, 아름다움, 유머 등이 자연스럽게 시에 스민다. 그러니까 시인은 기억 속의 사건이나 사실을 단순 조합하는 게 아니라 기억들을 통해 인간 존재론을 펼치고 그 안에 내재된 슬픔의 근원을 추적하려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고영민의 시는 과거의 사라진 시간과 상처를 현재의 몸으로 끌어안아 되살려내는 기억의 심폐소생술이자 사랑의 현상학이라 할 수 있다. 시인에게 기억은 결핍된 타자들을 사랑으로 보듬어 육체 깊숙이 가라앉은 상처의 앙금들을 건져 올리는 행위다. 아픈 기억을 시각적 영상으로 되살려내면서 시인은 고통과 환희, 냉기와 온기,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체험한다. 그래서 사랑이 펼쳐질수록 시적 자아는 대상들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멀어진다. 기억을 통한 시인의 사랑의 발현 행위가 종종 자기 부재와 환멸을 낳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인의 몸은 지나온 사랑의 기억들이 아프게 채록된 아픈 책, 숨 쉬는 시집과 같다. 그의 시가 따듯하고 재밌으면서도 비극의 메타포로 읽히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고영민의 시는 환멸의 서정과 향수의 서정을 동시에 지닌다. 첫 시집 『악어』(2005)에서 그는 주로 도시의 환멸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도시는 생존을 위한 악어들의 먹이 전쟁터로 그려지고 이런 삭막함의 이면에 유년에 대한 짙은 향수가 짙게 깔린다. 이 향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고향에 사는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유년에 대한 기억이 펼쳐질 때 고영민의 경우 대체로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하나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사물에 대한 열린 감수성이다. 즉 그의 시는 환멸과 향수 사이, 도시와 시골 사이, 현재와 과거 사이, 개인과 가족 사이, 인공성과 감수성 사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발생한다. 중요한 점은 이 향수의식이 죽음과 연계되어 생의 유한성 혹은 죽음의 향(香)을 발산한다는 점이다. 이때 주로 사용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사물과 인간의 등치(等値)다. 새, 갈대, 나무 등 자연세계의 사물들이 등장하여 시인의 생각과 속마음을 담아낸다. 사물과 시인의 동일화는 독자를 시인의 사유세계 안으로 끌어들이는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둘째는 이질적인 사물간의 결합 또는 콜라주다. 어떤 물리적 관계나 상관성이 없는 사물과 사물, 사물과 사람, 물질과 관념 등이 결합하여 하나의 몸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낯선 인식을 낳는다. 이런 유쾌한 층격을 통해 시인은 생에 숨겨진 또 다른 비의들을 벗겨낸다. 이 두 가지 방법이 결합된 시가 「출산」이다. 이 시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화장 장면을 다루고 있다. 화장(火葬)이 끝나고 뼈만 남은 어머니가 화구에서 나오는 장면, 분쇄사의 손을 거쳐 가루가 된 어머니가 유골함에 담기는 장면, 그것이 시인의 품에 전달되는 순간의 정적과 온기, 유골함을 받아 안는 시인의 슬픔이 내면화되는 모습이 순차적으로 나타난다. 장황한 수사나 설명 없이 행을 줄여 감정을 줄였고 행간을 넓혀 울림을 넓혔다. 인상적인 점은 죽음에 대한 통찰과 역설적 인식이다. 화구를 빠져나온 어머니는 자궁에서 산도(産道)를 빠져나온 아기로 치환되고, 아기는 시인의 품에 안겨 응애 하고 생의 첫 울음을 터트린다. 이 역치된 상상과 동일화가 뼈아픈 감동을 낳는다. 한 생명의 죽음이 새로운 생의 시작이라는 역설적 해석이 가능한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시인의 일원론적 세계관 때문일 것이다. 시인에게 생사는 업(業)에 따라 육도(六道)의 세상에서 생사를 거듭하는 윤회(輪廻)의 고리,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 원형의 세계다. /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봄비가 소리 없이 내렸다. 모든 자연의 환호성이 울려 퍼진다. 야트막한 산자락 기슭마다 잎눈 꽃눈이 피어나는 생명의 소리가 경이롭다. 이목구비(耳目口鼻)로 느껴오는 아침 산책길이 즐겁다. 귀로 들려오는 꽃피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리고 아름다움은 눈을 현란하게 한다. 입으로는 감탄이 절로 나고 향기로운 봄 향기는 마음으로 다 담을 수가 없다. 살아있다는 생명의 몸짓은 감동스러움을 다 말할 수는 없으나 온몸으로 느껴온다. 쌓인 낙엽사이로 솟아오른 파란 새싹들이며. 개나리, 진달래, 살구꽃, 벚꽃이 피어 봄바람에 흩날린다. 모든 허상의 잎들을 다 떨구어버리고 나상으로 기도하던 상수리나무도 살며시 눈을 뜬다. 백년을 늙었어도 항상 푸른빛을 잃지 않고 청청하고 늠름하게 서있는 소나무는 마치 산주인처럼 당당하다. 푸른 대나무는 누가 옮겨다 심었는지 한겨울 추위에도 그 절개를 꺾일 줄 모른 채 푸르고 푸르다. 한 폭의 대나무 수묵화를 바라보는 듯하다. 묵죽도(墨竹圖) 여백에 담겨있는 화제의 '죽보평안(竹報平安)' '죽보삼다(竹報三多)' 글귀가 생각난다. 의미는 대나무그림을 보게 되면 편안해지고, 대나무는 세 가지가 많음을 알린다고 되어있다. 삼다(三多)란 무엇을 의미함일까. 중국어 사전을 통하여 다복(多福), 다수(多數), 다남자(多男子)임을 알게 되었다. 대나무의 삼다에 대한 의미는 고고하고 청빈한 선비의 정신과 지조와, 여인의 정절(貞節)과 절개(節槪)를 상징하여 왔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예로부터 선비의 집 뒤뜰에는 대나무를 가꾸어 왔으며, 혼례식 초례청에는 반듯이 대나무를 꺾어다 상위에 올려 놓았었다. 대나무처럼 부부의 절개를 지켜 백년해로의 기약을 뜻함이다. 대나무는 언제 보아도 친근감이 있어 가까이 하고 싶다. 예전 사람들은 대나무에 다복, 다수, 다남자의 상징을 두게 되었을까. 대나무는 생태적으로 두 달이면 다 자라고 만다. 식물 중에서 제일 빨리 크는 수종은 대나무다. 또한 대나무는 용도가 다양하여 복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꽃은 보통 백년에 한번 핀다고 함에 대나무꽃을 보고나면 죽는다는 속설까지 있다. 그만큼 오래 살았다는 수명이 길었음의 의미가 담겨져 있음에서가 아니었을까. 다남자의 의미는 대나무의 번성함에서 일게다. 씨앗보다 뿌리번식으로 해마다 마디마다 싹이 돋아 올라와 자란다. 대나무 뿌리처럼 많은 자손을 얻음으로 씨족의 번창을 바라는 뜻함에서 이었으리라. 삼다는 이런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지 않나 생각되었다. 봉황새는 대나무 씨만 먹고, 천년의 소리를 지니며 살아가는 오동나무에다 집을 짓고 산다고 하지 않던가. 이런 연유에서 대나무를 더욱 사랑하지 않았을까. 수목학 시간에 배워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자라고 있는 대나무 종류는 4속 14종이 된단다. 나는 이중에 조릿대, 신이대, 오죽, 솜대, 왕대뿐이 모른다. 지구상에는 12속 500여 종이 자란다고 발표되어 있다. 어떻게 그 특징을 찾아 분류를 하였을까. 감탄스럽다. 대나무야, 대나무야, 어찌도 네 모습은 여절여차(如切如磋)하고, 여탁여마(如琢如磨) 이더냐. 한 계단을 밟고 오르며 여절여차, 또 한발자국을 떼며 여절여차 하면서 산을 오른다. 자른 듯 갈은 듯 쪼고 갈고 닦은 듯, 대나무의 마음으로 산을 오른다. 그동안 배워 알고 있는 지식이래야 무엇이 있는가. 여절여차 부끄럽기 만하다. 또 한발자국 떼어 걸으며 여절여차, 여절여차. 숨이 차오른다. 내 어찌 갈고 닦을 줄은 모르고 게을리 살아왔나. 이 어찌 무정한 세월만 탓하고 있는가. 숨을 고르며 또 한 계단을 오르며 여탁여마, 여탁여마. 그동안 인생을 살아오면서 무엇을 쪼고 갈고 닦았는가. 돌이켜보니 후회스럽기만 하다. 이제서 절차탁마, 절차탁마를 외워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절차(切磋)는 학문을 익힘이요, 탁마(琢磨)는 자기 스스로를 닦음이라고 하였는데 배우고 익혀서 자신의 덕을 닦는 것이 곧 절차탁마(切磋琢磨)라 하지 않았던가. 일찍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오며 뒤늦게 뜻을 되뇌니 한숨에 젖을 뿐이다. 여절여차 여탁여마. 아침 해가 높이 솟아올랐다.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어떻게 사는 게 인생인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충북일보] 김참은 현실/환상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환(幻)의 상상력을 통해 기계적 인과법칙이 파괴된 몽유의 세계를 노래해온 시인이다. 꿈의 채색화가이자 환상의 이미지를 찾아 떠도는 여행자 시인이다. 초현실적 풍경과 서사를 통해 그는 상식과 고정관념이 파괴된 이상하고 낯선 꿈의 세계를 그린다. 그의 시에는 유년의 기억들, 현실의 삶이 주는 결핍과 상처가 몽환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현실의 결핍과 부재를 무한 증식하는 이미지들로 보충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욕망의 언어 페인팅인 셈이다. 그는 세계를 매우 복잡하고 혼란한 미로,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 속의 거울 등으로 표현하곤 한다. 그의 시가 몽환적 분위기를 띠면서도 복잡한 중층의 서사구조를 띠는 건 이런 세계인식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물고기는 강과 바다를 헤엄치며 산다. 사람이 느끼는 세계는 물고기나 새들이 느끼는 세계와는 다르며, 나무와 풀, 돼지나 고양이들이 느끼는 세계와 다르다. 우리는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박쥐들에게는 박쥐들의 세계가 있고, 풍뎅이에게는 풍뎅이들의 세계가 있다. 우리가 새와 물고기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듯, 새나 물고기도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알지 못하고, 무당벌레와 심해어들은 서로의 존재를 모를 수도 있다. 나의 시가 세계를 그려내는 작업이라면 이 작업은 끝이 없는 여행이며 모험이다. 때로는 길을 잃고 미로 속을 헤매지만 나는 나의 여행을 사랑한다." 그가 환(幻)의 세계로 진입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감각이 시각이다. 현실에서 환상으로 이동할 때 자주 사용하는 통로는 거울, 미로, 그림, 신기루, 사다리, 아파트, 계단 등이다. 그의 시는 외관상 현실을 소외시킨 채 자아의 분열과 카오스, 자폐적 몽상과 환각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자아도취의 시, 유아적 공상의 시 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주의 시가 포착하지 못하는 현실의 비현실적 측면들을 서정적 환상으로 드러낸다는 점, 논리적 인과성이 지배하는 현실의 은폐된 이면을 초현실적 이미지로 파고든다는 점, 인간의 무의식에 균열을 내어 기존의 관습적 시 문법을 파괴하여 낯선 시의 문법을 탄생시킨다는 점 등에서 의의가 있다. 그럼 시인은 왜 현실과 꿈, 실재와 환상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걸까· 현실이 은폐하는 초현실성에 대한 인식, 현실에 대한 혐오와 환멸 때문이다. 시인 스스로 인위적이고 공작(工作)적인 인공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성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적 세계관에 대한 전복 의지, 논리와 분석이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반항성 때문이다. 시는 예술이고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아름다움은 꿈과 환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꿈을 꾸고 나면 꿈을 적어 두었다가 시로 썼다고 한다. 김참은 시를 쓸 때 일종의 백일몽 상태에 빠져든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백일몽 상태란 현실과 꿈의 세계에 동시에 기거하는 자각몽 상태를 말한다. 꿈을 꾸고 있다는 점에서는 잠이고, 꿈을 자각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각성 상태다. 즉 시를 쓰는 행위는 곧 수면이면서 불면을 동시에 경험하는 행위다. 꿈속을 거닐면서 자신이 거니는 곳이 꿈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상황과 흡사하다. 그 백일몽 세계가 그에게는 현실과 초(超)현실이 공존하는 몽환의 세계고 그림자들의 세계고 빵집을 비추는 볼록거울의 세계고 그림 속의 인물이 또 다른 그림을 그리는 세계다. 「시간이 멈추자」는 첫 시집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1999) 가장 앞에 수록된 작품으로 시간이 사라진 세계, 탈(脫)인과성의 환상 세계를 회화적으로 그리고 있다. 시간의 반대편으로 걸어 들어간 화자가 도착한 곳은 시간의 반대편 세계다. 그곳은 달과 별이 있고 검은 치마 입은 눈도 입도 코도 없는 처녀들과 개들이 사는 곳이다. 나뭇가지에 사람 머리통이 주렁주렁 매달려 붉게 익어가는 곳이다. 초현실적 사물과 사건들이 등장하는 그의 많은 시처럼 이 시 또한 서사 자체는 논리적 구조를 띠고 있다. 그러나 이 시가 매혹적인 건 구조의 완결성보다 '끝없는 꿈꾸기'를 가능하게 하고 시간의 억압과 해방을 동시에 맛보게 한다는 점이다. 이 시를 통해 어떤 이는 유희와 상상의 서사놀이를 즐길 것이고, 어떤 이는 시간의 속박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쓸쓸한 내면풍경을 엿볼 것이고. 어떤 이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환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 함기석 시인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신 후 그동안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아련한 추억에 늘 사로잡혀 있었다. 금년에는 설 명절을 쇠며 웬일인지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간절하게 떠올랐다. 아버지란 존재가 무엇일까. 전통적인 대가족 제도에서는 아버지의 위상이 절대적인 존재였었다. 가장으로서 온 가족을 이끌고 가정경제를 책임지며 가족들 안위(安危)를 책임져야만 했다. 세월 가며 산업사회가 되고 도시생활과 핵가족제도가 정착하며 아버지의 위상은 초라한 존재가 되었다. 대부분 가정의 경제권은 어머니들 차지하고 있다. 자녀교육을 비롯한 가정의 운영권이 어머니에게 넘어간 것이다. 아버지의의 역할이 줄어들고 초라한 존재가 되어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맞고 있다. 새벽에 집을 나가 일터로 가면 저녁에 들어와서 자식들 얼굴 마주하기가 힘든 세상이 되었고, '기러기 아빠' 로 처자식들과 떨어져 사는 아버지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식들 결혼하고 독립하면 아버지의 존재는 더욱 희미해진다. 그 집 아버지의 서열이 반려견(伴侶犬) 보다 못하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아버지가 있다. 어릴 적 내가 세월가면 어느새 아버지가 되고, 내 자식이 아버지가 되었을 때 나는 늙은 할아버지가 되는 게 세상 살아가는 이치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입시에 낙방을 했을 때다. 대학교 진학은 꼭 서울로 가야겠다는 야심에 차있던 시절이다. 집안 어른들은 명문대학이 아니면 서울로 유학은 안 된다고 하셨다. 마음의 갈등을 느끼며 서울로 가 대학입학 시험을 치렀다. 초조하게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던 날 아침이었다. 밥상머리에서 아버지는 내게 '대학 갈 생각 말고 취직이나 하라' 며 역정을 내시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아버지를 만류하시며 자초지종을 듣자고 하셨다. 아버지는 합격자 발표 전날 내가 낙방한 걸 확인 하셨다고 했다. 낙담하신 아버지는 허탈하고 서글픈 표정에 눈가에 물기가 일었던 것 같다. 나는 울며 밖으로 나와 어디론가 한 없이 걸었다. 일제 치하에서 아버지는 지금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전신인 '수원고농'을 졸업하시고 공무원으로 근무 하고 계셨다. 우리나라 인구의 80-90%가 농민이던 시절이다. 아버지는 그 학교에 합격하기 위해 몸무게가 주는 줄도 모르고 밤을 새워 공부했다며 나를 격려 하셨다. 자식의 명문대학 입시 낙방이 아버지께는 자존심 상하고 한이 맺히셨을 것이다. '근면 정직 성실' 이라는 우리 집안 가훈을 지키며 한평생을 살다 가신 아버지시다. 농촌사회 대농가에서 생활하시며 모범 공무원으로 대통령 훈장을 받으셨다. 옛날에 분뇨(糞尿)를 퇴비로 사용하던 시절이다. 인분을 담아 지게로 지고 논밭으로 옮기는 운반수단인 '똥장군'이 있었다. "똥장군을 지는 도청 과장"이라는 세상 사람들 칭찬하는 이야기도 들으셨다. 농민들과 뜻을 함께 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세상을 사셨다. 내가 대학을 다니다가 학보로 입대하여 군 생활을 하던 때다. 병영으로 매달 월간지 '사상계'를 보내시고 책머리에는 늘 '안전보장 규정엄수'라고 쓰셨다. 부대장에게도 몇 차례 격려의 편지를 보내셨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가 살다 가신 것처럼 세상을 정직하고 근면하며 성실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 세월 따라 세상 살아가는 모습도 바뀐다지만 아버지의 훌륭했던 삶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든다. 나의 대학 입시 낙방으로 소란스러웠던 그날 할아버지 앞에서 흘리시던 아버지의 눈물을 생각하면 내 눈시울도 축축해진다. 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고 서운하게 해 드린 불효(不孝)는 내 평생 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금년 설 차례에서 아버지께 무언의 사죄를 드렸다.
강정은 말을 토해내는 시인이다. 그에게 몸은 폭발하는 화산이고 문장은 흐르는 용암과 같다. 몸의 견딜 수 없는 에너지가 폭발하여 튀어나온 말들의 잔해가 그의 시다. 그래서 불편하고 낯설다. 그의 시에는 문법의 혼돈, 불연속적인 삶의 파편들이 무질서하게 등장한다. 그는 삶의 불안과 공포를 정리하여 병렬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 상상, 꿈, 기억들을 질서정연하게 병렬하지 않는다. 그에게 삶은 완결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는 대다수가 생각하는 일반적 방향과 반대로 나아간다. 이 역류의 정신이 강정 특유의 모반의 시, 반역의 예술을 낳는다. 특히 강정의 초기 시는 록음악처럼 강렬한 에너지를 분출한다. 본능적으로 분출된 말들임에도 불구하고 정제된 관념과 철학적 사유가 스미어 있다. 이는 어지럽고 현란한 시의 외관과 달리 시의 내부에서 시인 스스로 말과 삶과 세계에 대해 염결하게 고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고투는 주로 삶과 사랑, 죽음과 연관된다. 강정의 시에서 매우 중요한 테마가 죽음이다. 그는 끈질기고 줄기차게 죽음에 집착하여 시의 화두로 삼아왔다. 자신의 핏줄 속에 숨은 바람을 뽑아 하늘로 되돌려 보내려는 듯 죽음을 보여주고, 주술에 걸린 자처럼 죽음을 살아내겠다고 고백한다. 그는 시를 '끝없이 변전하는, 죽은 자의 무덤의 단 한 차례의 묘비명'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는 삶 속에서 수시로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으로 인해 삶의 의미와 가치가 송두리째 지워지는 걸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한 천착은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집착과 애착 때문인 것이다. 강정의 시에 나타나는 죽음은 나르시스의 낭만적 죽음이 아니라 육체의 실체적 죽음이다.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시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라는 극단적 대상을 택하는 것이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수천 번 죽음을 노래했건만/내가 아직 살아 있는 게 이상하다"고 그는 고백한다. 이런 절망적 침잠은 초기 시부터 나타난다. 탐미적 언어로 죽음과 타락의 세계로 어둡게 침잠했던 첫 시집 『처형극장』(1996)을 시작으로,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존재의 탄생과 죽음의 풍경을 즉물적 언어로 형상화한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2005)을 거쳐, 적막한 카오스 언어로 인간과 삶의 슬픔을 사색한 시집 『활』(2011)을 지나, 최근에 상재한 시집 『그리고 나는 눈먼 자가 되었다』(2019)에 이르기까지 죽음은 반복적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결국 강정에게 시는 죽음과 환생을 반복하는 신기루의 노래고 꿈이고 시공간이다. 한 순간도 변신을 멈추지 않는 몸이고 우주다. 그러기에 자아, 언어, 세계는 하나의 점으로 응집된다. 세계의 변혁은 곧 언어의 변혁이고 자아의 변혁인 것이다. 그러기에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이 세계를 시인은 언어의 죽음, 자아의 죽음을 통해 접근한다. 강정에게 언어는 자아의 연인이자 동반자이면서도 살해자고 영원한 적이다. 그의 시가 세계에 대한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드러내는 것은 이런 상반성 때문이다. 그에게 하늘과 땅, 천국과 지옥은 하나의 쌍둥이 육체다. 「최초의 책」은 시집 『귀신』(2014)의 맨 끝에 수록된 작품이다. 흙과 빛은 고향을 대리하는 전통적 이미지들이다. 많은 선배 시인들이 대지와 빛을 통해 고향의 공간을 그렸고 이를 통해 삶을 회상하고 반성했다. 강정 또한 이 지점으로 진입하고 있다. 그러나 몸의 안식과 치유를 위한 물리적 회귀가 아니라 생의 근원을 되묻는 철학적 회귀라는 점이 다르다. 책갈피에서 떨어진 점 하나에서 달을 떠올리고 부식토 냄새를 맡고, 숲과 죽음과 우주를 상상하는 행위는 모두 모성과 연계된다. 생의 근원, 생명과 존재의 출발에 대한 시인의 존재론적 물음은 곧 자연과 우주에 대한 대승적 포용이다. 강정의 시는 이제 사랑의 샘, 최초의 시간의 우물을 찾아 떠나는 눈먼 자의 아픈 여정(旅程)이다. /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있다. 연일 속보로 방송되는 텔레비전뉴스를 보면서 불안감과 늘어나는 확진자의 숫자에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코로나가 우리생활 모든 것에 족쇄를 채워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들고, 사회, 경제, 정치 모든 것이 비정상으로 작동하고 있다. 언제쯤에나 암울한 상태를 벗어 날 수 있을까. 마스크를 몇 겹이나 한 것처럼 갑갑하고 앞이 캄캄하다. 방제사업을 하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코로나 발생 한 달 만에 업무에 과부하가 걸려 일을 할 수 없다고 며칠이라도 일손을 보태달란다. 친구 어려움을 몰라라 할 수 도 없어 직원을 추가로 채용하기 전까지 도와주기로 약속 했다. 몇 년 만에 출근인지라 조금은 긴장된 상태로 일찍 나섰다. 서로 인사도 나누기 전에 방제기 작동법과 방제요령을 설명 듣고 바로 현지로 출동했다. 처음 도착한 곳은 ○○기업체 직원사택으로 사용되고 있는 오층 아파트를 소독하는 일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라서 약통을 메고 오층을 오르락내리락 하여야 했다. 방제 복에 장갑, 모자로 무장한 상태로 계단을 수 없이 반복하다 보니 다리도 후들거리고 땀이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가 뻐근해지기 시작해 '이러다 하루도 못 버티는 거 아냐'하고 염려가 앞선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소독할 때면 땀을 흘리다, 이동을 위해 밖으로 나오면 찬바람에 한기가 섬뜩하다. 감기 걸리기 알맞은 환경이라 노심초사하며 마스크며 옷깃을 여며 건강을 조심했다. 더구나 감기 역시 코로나와 같은 바이러스가 원인이지 않은가. ○○기업체 출입은 통제가 심했다. 신분증검사는 물론이고, 비행기 탑승 때처럼 소지품검사도 하고 금속 탐지기를 통과해야 출입이 허용됐다. 회사 안으로 들어와서도 실험실이나 생산시설에 들어 갈 때는 추가로 방진복과 신발까지 갈아 신고 온몸을 소독 한 뒤에 출입할 수 있었다. 방제복과 약통을 무슨 높은 지위의 완장인양, 권력을 행사 하듯 맘대로 출입을 할 수 있었다. 화장실이라든가, 간부들 방이며 비밀 통제되는 방에도 서슴없이 들어가 소독약을 뿌려댔다. 언젠가 '완장'이란 소설에서 평범한 사람에게 완장을 채워주니 몇 배 되는 권력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며, 양민들을 괴롭히는 권력자로 변신한다는 내용이 생각났다. 나도 코로나19 박멸을 위한 커다란 권력을 얻은 것 같은 기분으로 미소를 지으며 약을 뿌렸다. 개인집이 아닌 기업체라 관리가 소홀한 곳이 많았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의실이나 휴게실, 화장실 구석에는 상대적으로 깨끗하지 못해 구석구석에 코로나가 숨어있다 나올 기회를 엿보는 듯 했다. 코로나가 얼굴을 내밀어 뛰어 나올 듯한, 곳에는 약을 집중적으로 뿌려 코로나가 얼씬도 못하게 막았다. 그나마 우리지방에는 심각할 정도로 확산되지 않는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여러 사람들의 수고가 있어 가능할 것이겠지만 방역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고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나 역시 코로나 확산 방지에 일부분 일조했다는 자부심으로 구석구석 한곳도 빠짐없이 책임감을 가지고 약을 뿌렸다. 혹시 내가 빠트린 곳에 코로나가 숨어 있다 나와 확산시키는 것은 아닐까하는 조바심으로 꼼꼼히 최선을 다했다. 며칠 동안이지만 종아리, 팔뚝근육이 뻐근하다. 밤늦게까지 소독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하여, 피곤을 달래며 코로나를 원망했다. 어려울 때일수록 단합해 위기를 탈출하는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믿으며, 하루빨리 위기를 벗어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