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이른 아침 남쪽 창을 열면 'ㄴ'자로 시원한 아스팔트 도로 앞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일층 한옥과 이층양옥집, 그리고 한가롭게 보이는 삼층 상가 옥상 넘어 우암산 정상에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이 아름답다. 남쪽 창문 아래 텃밭의 콩잎은 나풀거리며 밝은 햇살이 새로운 힘을 청하는 모양이다. 무성한 호박 넝쿨도 뻗어나갈 힘을 얻기 위해 햇볕을 만끽하고 있다. 노란 적삼을 입은 후덕한 아낙네 모습의 호박꽃 옆에 숨어 있는 애호박들, 반들반들하게 빛을 발하며 매일 아침 볼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은 자연의 오묘함을 느끼게 한다. 아내의 평소 소원이 늙어서는 텃밭이 딸린 전원주택에서 일하며 조용히 살아가고 싶다고 버릇처럼 이야기했었다. 칠 년 전 일이다. 내 나이 일흔다섯, 망설인 끝에 백여 평의 밭에 건평 38평의 이층집을 지어 파란 청기와를 올렸다. 대문 위에는 장미꽃으로 아치를 만들고 앞뒤 옆 텃밭을 아내가 불편 없이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동남쪽에는 팔십여 평의 텃밭이 좁고 길게 놓여있다. 대파 한 두둑, 참깨 다섯 두둑, 경계 둑엔 키다리 옥수수가 길 따라 심겨 있고 그 밑엔 강낭콩의 어여쁜 꽃망울이 바람에 흔들리며 웃고 있다. 현관문을 열면 부드러운 햇살 아래 펼쳐진 넓은 들녘이 보이고 하루에 즐거움을 준다. 푸른 쥐똥나무 담장 아래 보름 전 이앙기가 논바닥을 오고 가곤 했다. 모는 벌써 땅 냄새를 맡아 파란 물결을 일으킨다. 저 멀리 우암산으로 이어지는 새티재, 이티재 그리고 애잔한 전설을 담고 있는 구녀성이 선명하게 보인다. 철길 옆에는 작은 남새밭이 있다. 취나물, 상추, 아욱 등을 길러 자식들은 물론 이웃들과 나누는 재미로 아내의 취미 생활 장소이다. 텃밭 바로 옆은 충북선 철로가 놓여있어 오늘도 변함없이 기차는 옛 추억을 싣고 달려온다. 멀리서 들려오는 힘찬 기적소리에 책가방을 허리에 끼고 정거장으로 달려가 화물을 운반하는 곡간 차(車)지만 불평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학생들 속에서 재잘거리던 기차 통학 시절이 그리워진다. 육교 아래로 흐르는 석화촌 옆 넓은 논은 파란 창공에 맞닿아 있고, 한 쌍의 백로는 벼 포기 사이로 성큼성큼 발을 옮기며 먹이를 찾고 있다. 텃밭에서 삽과 괭이로 이랑을 만들고, 아내는 씨를 뿌려 채소밭은 물론 꽃밭을 만들기 위해 땀을 흘리는 즐거움에 힘 드는 줄 모른다. 무릎이 아파서 잘 걷지 못하며 쉴 수 있는 여유 시간도 아까워서 몸에 밴 일을 떼어내지 못하고 허리 굽혀 부지런히 호미질하는 아내 모습은 푸른 새싹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어떠리' 라는 옛글이 생각난다. 풍광 좋은 전원(田園)에서 새벽에 한 시간, 오후에 한 시간 반, 햇빛과 친구 되어 텃밭에서 열심히 일하며 전립선, 뇌졸중, 파킨슨병과 투병하며 오 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눌해졌던 언어가 정상에 가까워지고 오른쪽 손 떨림도 덜해 붓을 잡고 서예를 하며 보내는 시간은 커다란 행복이다. 찬란한 태양의 빛이 가득한 넓은 전원에서 아내와 같이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모든 지인들이 늘 보살펴 주신 덕분에 만사 자족(自足)하며 산수(傘壽)를 지나 미수(米壽)를 바라볼 수 있음은 진정 감사할 뿐이다. 파종을 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참깨와 옥수수는 내 키보다 더 커가고 방긋 웃던 강낭콩꽃은 열매가 되어 주렁주렁 매달렸다. 무성한 호박넝쿨이 한없이 뻗어나가는 것을 보며 미소를 지어 본다.
[충북일보] 어디선가 그윽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와 코끝을 자극한다. 고개를 들어보니 푸른 나뭇잎 사이로 수줍은 듯 환한 미소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며 인사를 한다. 백옥 같이 만개한 꽃에 매료되어 발걸음을 멈추었다. 늘어진 가지 위에 핀 꽃을 코에 살며시 대어 보니 그윽한 향기에 가슴까지 뻥 뚫린 느낌에 황홀 하다. 오육년 전 지리산 칠선 계곡을 산행하던 길에 만난 크고 하얀 꽃은 물길 따라 다소곳이 피어있다. 보면 볼수록 우아하고 아름다운데 흔하게 보는 꽃이 아니라서 몹시 궁금하고 반가웠었다. 함박꽃 나무란다. 산목련(山木蓮)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본디 나무(木)에 피는 연(蓮)꽃이라 하여 줄기는 곧게 자라고 열매는 붉은 씨앗이 두 개씩 달린단다. 막 피어오르는 꽃망울은 붓을 닮았다 하여 목필(木筆)이라 불렀고 꽃이 옥돌처럼 우아하고 아름답다 하여 옥수(玉樹)라고도 불렸다는데, 만개한 꽃은 꽃잎 한 조각 한 조각이 향기의 덩어리라 하여 향린(香鱗)이라 했단다. 또한 꽃의 향기가 얼마나 맑고 청아하면 난초처럼 아름다운 나무라 하여 목란(木蘭)이라 부르기도 하고, 꽃은 옥과 같고 향기는 난초처럼 그윽하다 하여 옥란(玉蘭)으로 부르기도 했단다. 산행 중에 뜻밖의 행운의 꽃을 만나 두고두고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깊은 산속에 숨어 피는 꽃으로는 향기뿐만 아니라 아름답기로는 지금까지 산속에서 보아온 꽃중에 단연 으뜸이다. 야생화인데도 정원이나 공원의 화려한 꽃들처럼 크고 아름답다. 산행을 하다 보면 가끔 이름 모를 꽃들이 반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풍겨오는 향기는 산행의 즐거움에 배가된다. 오늘처럼 산속 깊은 계곡에서 이런 함박꽃을 만나면 마음이 좋아지다가도 한편으론 애잔해 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세상 밖으로 들어내지 않고 계곡물이 맑게 흐르는 깊은 계곡 저편에서 외로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 있는 듯하다. 순백색의 꽃잎 속 붉은 수술은 너무나 아름다워 표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선명하다. 슬픈 사연을 간직한 여인의 눈동자와 같다고나 할까. 백목련이나 벚꽃처럼 잎이 피어나기 전에 한 번에 꽃만 활짝 피었다가 어느 순간 낙화하여 허망하고 쓸쓸하기 그지없어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내게 하지만 산목련은 잎이 먼저 싹을 티우고 푸르러지면 꽃은 순차적으로 몇 송이씩 피고, 먼저 핀 꽃이 지기 전에 또 다른 몇 송이가 꽃망울을 터트린다. 하나의 나무에서 꽃망울이 생기고 만개해서 꽃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동시에 보는 꽃이 흔하지 않으리라. 만개한 꽃은 벌과 나비들에게 아낌없이 꿀과 꽃가루를 골고루 나누어주고 산들거리며 힘없이 땅으로 내려앉은 하얀 꽃잎 조차 개미나 미생물들에게 마지막까지 사랑을 베풀고 있다. 공해에 무수히 찌들고 도시 생활에 지친 모든 이들에게 보듬어 주며 위로하고 안식처를 제공하는 함박꽃이 손짓을 하는 이곳에서 하룻밤이라도 머무르고 싶다. 이러한 숲속에서는 외롭지 않으리라. 낮에는 따사로운 햇빛과 아낌없이 주는 함박꽃의 향기로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뒤돌아볼 틈도 없이 숨막히듯 살아온 삶의 무게를 모두 내려놓는다. 상념(想念)에 잠기면 조용히 어둠은 찾아오고 이름 모를 풀벌레와 새들의 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오리라. 마음을 열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함박꽃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서 달과 벗하며 별을 노래하고 싶다. 높은 산 맑은 물이 흐르는 깊은 계곡에서 자생하는 함박꽃나무, 밭 뚝이나 야산 언저리에 서식하였다면 맑고 청아한 꽃이 피기도 전에 사람들의 욕심에 의해 모두 없어졌을 텐데 무척이나 다행이다 싶다. 보통은 꽃이 화려하면 향기가 부족하고, 작고 보잘것없는 꽃일수록 향기는 그윽하고 멀리 간다. 그러나 산목련의 꽃은 순백의 자태가 고결하여 화려하고 향기 또한 으뜸이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우리 인생도 산목련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향기 가득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지인이 딸네 집에서 생일을 맞았다며 푸짐하게 차려진 생일상을 SNS에 올려놓았다. 돈다발과 떡케잌, 갈비찜, 잡채, 문어회, 쌈, 생선, 동그랑땡, 샐러드, 나물, 김치류 등. 요즘은 흔히 접할 수 있는 음식들이지만, 그래도 생일상을 받은 이가 부럽긴 하다. 어린 시절의 아쉬운 기억과 아직 미혼의 자식을 둔 나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못꿀 처지라 그런지 나도 모르게 자꾸 생일상에 시선이 쏠린다. 내 생일은 음력으로 모내기가 한창인 4월 중순이다. 하필 년 중 가장 바쁜 시기라 엄마는 내 생일을 깜빡하기가 일쑤였다. 지금도 생각난다. 생일날, 다른 때와 달리 자반고등어나 내가 좋아하는 김, 달걀부침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평소와 별반 다름없는 밥상에 그나마 좋아하는 멸치 반찬 하나로 위안을 삼으며, "어? 엄마, 그래도 내 생일 잊지 않았네?", "아이고! 오늘 아침이 니생일이나? 깜짝 잊어버렸데이. 아따, 이게 고기다. 이거라도 먹어라." 엄마는 미안함과 멋쩍은 웃음으로 어제 모내기하다가 남은 멸치볶음 한 접시를 내 앞으로 내미셨다. 그것도 양이 모자라 어른들과 남자들 앞쪽에만 놓아두었던 것을. 멸치 반찬 하나도 넉넉하게 먹어 본 적이 없어서 무늬만 고기인 멸치를 입에 물고 난 겨우 나오는 미소와 슬픔을 꾸역꾸역 삼켰다. 내 생일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소리에 가슴 한구석에선 사랑의 돌덩이 하나가 '쿵'하며 내려앉는다. 밥상에 올려진 멸치 새끼처럼 두 눈만 멀뚱거리고 겨우 멸치의 신세보다 조금 나은 것에 만족하려 애썼다. 생일이면 늘 팥고물이 든 몽실몽실한 하얀 찐빵이 그리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생일이 다가오면 동그란 찐빵을 녹음테이프 돌리듯 반복하지만, 엄마는 통 요동이 없으시다. 하지만 오빠 생일에는 마치 신의 계시라도 내린 듯, 엄마는 주문 없는 찐빵을 만드시느라 갑자기 분주해진다. 우리는 어쩌다 반죽째 가마솥에 넣어 쪄낸 빵이나 한번 맛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내 생일엔 그마저도 없다. 그러니 어찌 오빠만 이뻐한다고 투정을 부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지금 생각하니 농번기에 태어난 내가 제대로 된 생일상을 받기는 애초에 욕심인 것을. 결혼 후, 맏며느리란 존재는 집안의 대소사에 있어 항상 시댁 우선의 법칙이다. 내가 태어난 날은 시아버님이 나신 바로 다음 날이다. 아버님의 생신 하루 전날엔 시댁엘 가서 온종일 음식을 장만하고 생신 날은 큰댁과 작은댁의 친척분들을 초대하여 아침상에, 점심상까지 마무릴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몸은 완전 녹초가 된다. 이튿날 내 생일은 피곤이 쌓여 깜빡하거나, 가끔 미안해진 남편의 쇠고기 없는 미역국과 저녁 외식으로 대충 마무리한다. 미역국은 꼭 챙겨 먹으라는 시어머님의 사랑의 전화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바쁜 직장생활에서 내 생일은 그렇게 축복의 날이라는 감각을 잊게 했다. 환갑을 맞은 지인과의 생일 저녁은 몇몇 친구들과 술 한잔 기우는 것으로 끝냈다. 머잖아 우리 부부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예전 우리 시부모님은 동네 어르신들을 다 모셔다 놓고 넓은 예식홀에서 회갑 잔치를 해드렸는데…. 그런 와중에 며느리의 생일을 으뜸으로 챙기는 아는 언니를 보았다. 낯선 집에 시집와서 사느라 고생한다고, 며느리의 생일엔 두 부부가 케잌을 사 들고 아들네로 가서는 미역국도 끓여주고, 손자들도 봐주며, 용돈도 주며 여행도 보내준단다. 페미니즘을 부르짖는 시대지만 그런 틀을 깨기가 쉽지 않은데,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모습을 내세우지 않는 모습이 보기 좋다. 이제 며느리는 항상 가족에게 봉사하는 존재라는 인식은 아마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 아닐까 한다. 며칠 후면 내 생일이다. 여전히 엄마의 생일상이 그립지만, 엄마는 가고 상처받은 내 어린 영혼만 남았다. 이제는 성숙해진 또 하나의 내가 친정엄마를 대신해야겠다. 갓 지은 쌀밥에 생선 한 조각, 달걀부침과 들기름으로 방금 구운 김, 생각만 해도 고소한 향기가 난다. 쇠고기가 들어간 뽀얀 미역국에 솜사탕처럼 살살 녹는 찐빵도 한 접시 놓고. 낳으시느라 고생하신 엄마께도 술한잔 올리고, 내 안의 어린 나를 부탁해보자. 기분이 흐뭇하다. 가족들에게 기억될만한 추억을 남기는 일은 좋은 일이다. 당분간 힘이 들더라도 엄마의 손맛이 들어간 생일상은 더 챙겨야겠다.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는 생일보다는 미소로 남는 생일이라면 후회는 덜하겠지? 올해는 여느 생일 때보다 더 충만하고 축복받는 생일이 되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에 나오는 말이다. 화폐 제도는 인간 생활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제도다. 사람을 위해 돈을 만들었는데 돈에 너무 집착을 하다 보니 인간이 돈의 노예가 된 듯한 세상이다. 누에는 제 창자에서 실을 뽑아 누에꼬치 집을 짓고 열흘을 살다가 그 집을 버린다. 제비는 자기 침을 뱉어 만든 흙으로 집을 짓고 반년을 살다가 그 집에서 나간다. 까치는 볏짚을 물어 오느라 입이 헐고 꼬리가 빠져도 그 집에서 한 해만 살고 그 집을 떠나간다. 이렇게 곤충과 날짐승도 혼신의 힘을 다해 집을 짓고 살지만, 시절이 바뀌면 어김없이 집을 버리고 떠나간다. 그런데 인간은 끝까지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다가 종내는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의미'의 노예가 되고 불행한 신세가 되는 것 같다. 인간에게 완전한 소유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더구나 위대한 자연을 완전히 소유하는 생명체는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다. 태어난 생명체는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자연에서 모든 것을 빌려 쓰다가 떠나가는 나그네 신세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진정으로 소유해야 하는 것은 결코 물질이 아니고 '아름다운 마음'일 것이다. 마음속에서 얻는 것이 진정으로 인간의 귀중한 소유물이다. 현대인들은 많은 것을 옆에 두고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죽어 가는 불쌍한 존재 같다. 미래의 노후대책을 세워야 한다며 오늘의 소중한 행복을 미처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늘 내 곁에 가까이 있는 행복을 보지 못하고 헤매고 찾아다니다가 지쳐 버리는 현대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욕심 버리고 내가 가진 것 남과 나눌 수 있는 생각이 '아름다운 마음' 아닐까? 지금 내가 소유한 것 다 쓰지 못하고도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을 갖고 세상을 살아간다. 인간이 무언가를 바라고 얻고자 하는 마음이 욕심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도 확실한 것 같다. 지나친 욕심을 부리면 마음이 괴로워진다는 것이다. 마음이 지금 괴롭다면 그것은 내가 지나친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지나친 욕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지나친 욕심은 스트레스로 나타나고, 스트레스로 인해 사람은 몸과 마음이 병들어 간다. 사람이 과욕을 부리는 것은 현재의 삶에 대한 불만족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주어진 현실을 수용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진 상태다. '내가 갖지 못한 것만 보면서 남과 비교하며 자신의 모습을 한탄한다.' 이것이 바로 과욕을 의미하고 부정적인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욕심은 부정적인 마음의 상태이고, 순수하고 정직한 노력에 의한 결심이 아니다. 사람이 본래 남을 속이고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능력 이상의 것을 얻으려는 생각은 탐욕이고 마약과 같은 것이다. 과욕은 끝내 도둑놈 심보와도 연결되는 불행한 사태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을 잘 다스려 지나친 욕심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줄 알아야 한다. 스스로 괴로움에 빠져 짜증과 화가 날 때면 무엇인가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마음의 실체를 알고 나면 괴로운 생각이 서서히 줄어들고 현실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욕심의 심리는 원래 순수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능력 이상의 것을 얻으려고 하니 과욕이 생긴다. 주어진 삶에 만족할 줄 모르면 불행하고, 주어진 삶에 만족할 줄 알면 그것은 행복이다. 욕심을 부리면 고통이 시작되고 마음을 비우면 행복해진다. 욕심 많은 사람은 불행의 친구다. 내 욕심 버리고 남과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 은 행복의 근원이다
나래초등학교로 첫 출근! 두근두근 마음을 진정시키며 학교 정문을 들어섰다. 오늘의 다짐, 그리고 올 한 해의 다짐은 '카멜레온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바뀌는 상황에 따라 바로 바로 환경에 적응하는 맞춤형 선생님의 모습 말이다. 저학년(1학년 2개반, 2학년 2개반)이다 보니 개성이 다 제각각이라 언제 어는 곳에서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상황에 맞게 대체를 잘 해나가는 선생님의 모습이고 싶다. 바로 카멜레온 선생님…. 첫째 시간은 2학년 1반이었다. 담임선생님과 약속을 잘 해서인지 진지한 모습으로 수업에 참여해 주었다. 봄이어서 아이들 옷도 알록달록 참으로 예뻤다. 교실 안에 봄이 한껏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2교시는 2학년 2반이었다. 특수반 아동이 있었다. 도우미 선생님이 계셨지만 '사랑'으로 보듬어줘야겠다. 그리고 친구들과 의사소통이 잘 되도록 이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4교시는 1학년 1반이었다. 천진난만하고 아직 유치원생의 모습을 벗지 않은 천사들이었다. 나는 고학년에 익숙해서 질문을 하면 아이들에게 바로 바로 즉각적인 대답을 요했다. 그러나 저학년 아이들은 달랐다. 선생님의 질문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많이 필요로 했다. 첫째 시간이라 이러저러한 당부의 말을 하고자 했으나, 아이들은 몸만 교실에 있지 마음은 모두 운동장이나 집에 가 있는 듯 집중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당부의 말은 접어두고 손유희 활동과 아름다운 가사가 담긴 노래를 먼저 불렀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분위기 환기가 되었는지 조금씩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3교시를 마치고 점심식사를 했다. '급식실에서의 예절'을 배워서인지 질서 있게 '거리두기'를 하면서 급식실로 향했다. 식사를 시작해서 마스크를 벗자 아이들은 식사에만 열중할 뿐 아이들과 떠들지 않았다. 대견해 보였다. 4교시가 시작되자 또 아이들은 몸만 교실에 있을 뿐 마음은 딴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노래를 한 곡 부르고 수업을 시작했다. '급식실에서의 예절' 다음으로 '보건실에서의 예절', '실내 생활에서의 규칙'을 공부했다. 질문을 하면 몇 몇 아이들이 발표를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행동에만 집중할 뿐 다른 친구의 발표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질문에 답변하기 전 친구의 이름도 외우고 주의집중도 할 겸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바로 발표 전 "○○를 보세요"하면 아이들은 똑같이 "○○를 보세요"라고 말하게 했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발표하는 친구를 바라보면서 조금씩 집중력을 높여나갔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또 하나 주의집중을 높이기 위해 오늘은 '곰 잡으러 갑시다' 라는 손유희 활동을 했는데, 다음 시간에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손뼉 박수치기 활동을 활용해야겠다. 바로 '찌개 박수'이다. "지글지글 짝짝, 보글보글 짝짝 / 지글짝 보글짝 / 지글보글 짝짝"으로 구성된 박수이다. 저학년은 집중 시간이 짧으니 게임이나 손유희 활동을 많이 계발해서 즐거운 수업이 되도록 해야겠다. 수업 중간 중간 조금은 당황되고 안쓰던 두뇌활동을 해서인지 두통이 찾아왔다. 퇴근 후 차에서 잠시 휴식을 가졌다. 클래식 음악을 잔잔히 틀어놓고 심호흡을 했다. '오늘 수업 잘했어~ 내일 좀 더 나은 수업을 해보자~'하고 다짐했다. 올 1년 천사들과 즐겁고 유익하고 아름다운 수업을 위해 화이팅 해야겠다. 사랑한다. 나래초 1, 2학년 어린이들아…. * 나래초에서의 나의 역할 : 1주일에 3일(월, 수, 금) 출근하며, 하루 4시간씩 수업함. 업무가 많으신 부장 선생님들의 수업 경감 차원의 시간 강사 역할임.
서덕출은 자연의 모든 사물들이 긴밀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 시인이다. 그의 동시에는 세상에 대한 희망과 편견 없는 따뜻한 시선이 들어 있다. 다섯 살 때 그는 대청마루에서 놀다가 미끄러져 왼쪽 다리를 다치는데 염증이 척추까지 번져 안타깝게도 장애인이 된다. 유년의 이 뼈아픈 고통과 상처는 훗날 세상의 사물들을 바라볼 때 무의식적으로 투영되게 된다. 그럼에도 그의 동시는 감상적 슬픔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고 얕은 동심천사주의로 흐르지도 않는다. 또한 정치적 목적의식에 사로잡힌 카프(KAPF) 경향의 동요로부터도 벗어나 있다. 주목되는 특징은 「봉선화」등에 나타나는 동화적 환상성이다. 아이들은 흔히 환상을 통해 자신의 결핍된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 어른들의 합리적 세계에서 벗어나 환상 속에서 대상의 새로움을 발견하고 경이로움을 체험한다. 서덕출의 동시에 깃든 환상성은 주로 시적 주체가 객관적 대상을 환상의 세계로 이끄는 방식이다. 왜 이런 환상이 펼쳐지는 걸까· 비참한 현실과 불구의 자아를 극복하려는 시인의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되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에게 환상의 체험은 현실의 고통을 견디고 치유하고 극복하게 해주는 정신의 힘이자 약인 셈이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우리의 동시 시단에 확장되고 있는 환상의 상상력은 최근에 갑작스레 부상한 게 아니란 오래 전부터 태동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환상의 성격과 갈래, 색채와 무늬가 다원화되었다는 점은 다르지만 환상의 근본적 발아토대는 같고 그 연원은 매우 오래되었다. 서덕출의 동시는 내용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꼬부랑 두던」「울냄이 삘냄이」처럼 현실의 어려움과 아이들 놀이를 노래한 작품들로 일제강점기의 힘겨운 현실에서 까불며 노는 아이들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둘째는 「버들 피리」「봄맞이」 「여름」 「단풍」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작품들로 서정적 감수성과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잘 스미어 있다. 셋째는 「꽁지 빠진 새」 「눈 뜨는 가을」「봄 편지」「산 넘어 저 쪽」처럼 장애인이었던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담아내고 나아가 마음속의 꿈과 동경을 노래한 작품들이다. 형식면에서 대부분 정형시 율격을 띤다. 주로 4·4조, 7·5조의 음수율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시인이 동시가 노래로 만들어져 불리길 바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징적인 점은 4음보 한 행을 두 행으로 나누는 행갈이를 시도한다는 점이다. 한 행의 2음보를 띄어쓰기 없이 한 음보로 처리함으로써 3음보를 이룬다. 이는 그가 일제강점기 당시의 관습적인 창작동요 형식에서 탈피하고자 고민했음을 암시한다. 「꼬부랑 두던」은 도련님과 황소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과 생활상을 드러내고 있다. 해가 뜨는 아른 아침부터 어두컴컴한 저녁까지 온종일 땔감으로 쓸 나무를 지게와 소로 져 나르는 일상의 모습이 감각적으로 그려져 있다. 나무지게를 지고 아장아장 걷는 도련님과 목에 은방울을 매단 누런 황소의 순차적 배치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율격 면에서도 4·4·5의 자수 배치를 반복하면서 자연스러운 리듬을 형성한다. 등에 나뭇짐을 잔뜩 짊어지고 꼬불꼬불 비탈길을 걸어가며 콧김을 푹푹 내쉬는 황소의 모습이 눈이 선하다. / 함기석 시인
오은의 시는 발랄하고 경쾌하다. 권위적인 치장을 하지 않고 고상한 내숭도 떨지 않으며 겉치레 폼도 잡지 않는다. 장난기 많은 영리한 아이가 장난감 퍼즐을 갖고 노는 것처럼 말을 가지고 까불까불 수다스럽게 장난을 친다. 말로 말 비틀기, 연상으로 말 이어가기, 속담이나 관용구 삽입하기. 끝말잇기, 말과 말 충돌시키기 등 운용 측면에서 보면 오은의 시는 쾌락의 욕망을 토대로 펼쳐지는 말놀이 공연, 말놀이 애드리브에 가깝다. 말 자체에 내재된 물성과 소리, 말에 대한 즉흥적 감각과 반응에 따라 시가 예측불허의 방향으로 전개된다. 첫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2009)은 다양한 말놀이 유희가 펼쳐지는 무대다. 음악, 영화, 철학, 수학, 과학 등 다양한 장르가 꽈배기처럼 뒤섞이면서 현대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을 희롱하고 욕망에 굶주린 자본문명 속의 현대인들을 식충들로 묘사한다. 말이 구성하는 사회적 조건과 가치를 의심하는 이런 시선은 두 번째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2013)에서도 이어진다. 블랙유머가 깃든 장난스런 말들로 문명사회의 모순과 위악을 비판한다. 세 번째 시집 '유에서 유'(2016)에서는 말놀이의 위트와 농담은 다소 옅어지고 부조리 의식이 짙어진다. 현대도시를 살벌한 서바이벌 게임이 벌어지는 생존 사냥터로 보면서 현대사회의 절대적 수직구조, 그것의 폐허를 주목한다. 오늘 소개하는 '스프링'은 첫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맨 앞에 수록된 시다. 음성연상을 통해 더블린, 텀블링, 마블링, 고블린 등으로 옮겨가면서 아이들과 해바라기가 호환되는데, 아이들의 튀어 오름 행위가 존재의 근원, 시간의 기원, 빛의 기원을 향한 운동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불가능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가능한 세계로의 가벼운 도약이 꽈배기 한 입에서 시작되었다는 상상력도 재미있다. 또한 가능 세계로의 이행이 방과 후 학습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시각은 정규시간의 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적 상상을 촉발한다. 그럼 시인은 왜 말들을 장난감처럼 운용할까? 부조리한 세계를 모반하는 힘은 말의 쇄신에서 비롯되고 말의 기능과 역할, 말의 사용 방법과 배치 방식, 의미의 산출 프로세스 등이 바뀌면 기존의 무겁고 심각한 세계 해석들과 다르게 현실을 재인식하고 통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유아적 말장난을 통해 정반대편의 세계, 규격화되고 질서정연한 어른들의 세계를 희화화하고 비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곧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순수의 세계, 자기 존재의 근원에 닿으려는 시인의 사색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함기석 시인
작은 애가 공부하러 떠나고 집안이 적적하다고 생각했는지 서울서 회사에 다니며 늘 바쁘다던 큰딸 아이가 오랜만에 집에 내려왔다. 장미 조화 한 다발을 사 들고 와, 별 말없이 식탁에 꽂아 놓는다. 봉오리 지거나 연하고 약간 붉은 꽃들이 소담하게 피어, 보기에 여간 좋은 게 아니다. 방금 꽃밭에서 꺾어 온 듯, 아무리 봐도 영락없는 생화다. 짤막히 늘어진 하얀 레이스 식탁보와도 잘 어울렸다. 검박하던 작은 부엌이 일시에 환해졌다. 상기된 철부지처럼 나는 마냥 싱그레, 싱그레했다. 딸아이는 내 모습을 보며 말없이 가만한 미소를 짓는다. 기쁨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제주도 연수 갔을 때, 아주 훌륭한 분재원에 들린 적이 있다. 아버지와 함께 대를 이어 이십여 년 넘게, 오로지 나무만을 가꾸고 있다는 젊은 분재가의 설명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왜 꽃을 선사할까요? 꽃은 활짝 피어 벌 나비를 오게 하더군요. 꽤 지나 저는 알아냈어요. 그것은 아마도 꽃처럼 마음의 문을 열라는 말 아니겠어요?"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숙연하니 머릿속이 환해짐을 느꼈다. 문!.... 꽉꽉 닫아 건 문, 열까 말까 재는 문, 언제든 닫을 태세로 빼꼼히 열고 고개만 내민 문, 연 둥 만 둥한 문, 필요에 따라 열렸다 닫혔다 하는 문 등 사람들의 갖가지 마음의 문.... 꽃은 있는 힘을 다해 뿌리를 쫙쫙 뻗으며 물을 길어 올리고, 햇볕을 끌어 모으고 모아, 자신의 마음을 크게, 보다 크게 열려고 했을 것이다. 밤낮 없이 일념으로 준비했지만, 정작 먹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꿀과 정성을 다한 그윽한 향내로, 가능한 한 활짝! 그러면 벌과 나비들은 진정 편안한 마음으로 찾아오고 아니, 저절로 꽃에게로 날갯짓을 향하게 될 것이고 화기애애한 대화들이 자연스레 오고 가리라. 그것이 다다. 그것이 끝이고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꽃처럼 아름 가득한 최선의 마음을, 그것도 연다는 마음 없이 활짝 연다면 그 앞에선 혹 삿되거나 굳어있던 그 누구라도 가랑비에 옷 젖듯 아슴아슴 순수에로 젖어들며 부드러워질 것이다. 온 마음을 다한 자리에는 내면의 맑음과 평온을 갈구하는, 퍽이나 고운 사람들이 모여들게 될 것이다. 맑음이 맑음을 부르고 참이 차오르는 따듯한 장이 만들어질 것이다. 벌 나비가 다녀간 자리엔 융숭하니 탱탱한 열매가 남지 않았는가. 그것이 꽃에겐 축복이리라. 생각지 않게 얻는 소소한 덤에도 사람들은 얼마나 기뻐하던가. 마음을 활짝 여는 사이, 자연스레 영글어 가는 삶은 그저 편안하고 여유로우며, 활기차고 넉넉하리라. 모처럼만에 집에 온 어여쁜 딸아이에게 무엇을 해줄까 마음이 즐겁다. 주섬주섬 돌멩이로 칸살 지른, 조막만 한 채마밭은 밥상을 풍성하게 하는데, 끝물로 만들어 뒀던 장아찌용 토마토는 꼭 짜 무치고, 벌꿀에 재운 아카시아 꽃 효소는 무엇과 어울릴까 머뭇거리기도 한다. 죽순은 담백하게 볶고, 분이 많은 감자는 갈아 메밀가루와 섞어 부침개로 부치고, 갓 따온 깻잎, 당귀 잎, 차조기 잎엔 너덧 첨 구운 고기를 곁들이는 등... 부산스레 움직였다. 꽃 한 다발이 놓인 식탁은 소박하나 풍성하고 화사하였다. 딸아이가 연방 "음-음-"하며 달게 먹는 것을 보니 나도 오늘따라 더 맛있다. 작은애 얘기며 회사얘기며 두런두런 주고받는 가운데 마음을 연 꽃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되새김 하는 듯 곰 삭이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꽃을 바라본다. 아마도 딸애는 여느 때와는 다른, 새로운 꽃을 마음속에 심었으리라. 진심으로 마음을 활짝 열고 그것으로 끝인 아름다운 꽃을 눈에 넣었으리라. 작은애가 즐겨 마시던 야생화 꽃차를 우려 들며 눈이 마주치자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 눈웃음을 함박 지었다. 내 눈에 비친 그 애는 한 송이 환한 꽃이었다.
며칠 전 중. 고등학교 동기생 친구 S군이 또 타계를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친구들이 하나 둘 씩 세상을 떠나가고 있다. 친구(親舊)란 오래도록 사귀어 온 사람을 의미한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인생은 즐기면서 살다가 웃으면서 또 만나기를 바라는 관계여야 하는데 현실은 그게 아닌 것 같다. 살아가면서 욕심이 있다면 친구에 대한 욕심이 아닐까 싶다. 인간 수명이 늘어나 장수시대가 된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백세 인생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의 백년 인생 여행에서 언젠가는 혼자가 될 때가 온다. 친구가 귀해지는 은퇴시기에는 함께 이야기 할 상대가 더욱 필요하고 소중하다. 그리스의 어느 철학자는 이야기 했다. '한 사람이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친구'라고. 주어진 삶을 한평생 멋지게 엮어 가는 가장 큰 지혜는 우정(友情)이다. 그러기에 우정은 영원한 것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인간이 혼자서는 행복을 누릴 수 없도록 만든 건 신의 섭리일 것이다. 행복은 친구가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부모와 자식, 친구, 스승과 제자 등 '사람끼리 인연' 속에서 인생의 운명은 결정 된다. 운명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통한 선택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일깨우고 운명을 개척한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위기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고 한다. '좁은 문' 작가 앙드레 지드는 말했다. 늙기는 쉽지만 아름답게 늙기는 어렵다고. 인간은 누구나 늙게 마련이다. 아무리 인간 수명이 늘어나 장수시대가 됐다고 해도 늙지 않는 사람은 없다. 젊은이들은 흡사 늙지 않을 것처럼 살지만 그들도 역시 늙게 된다. 인간이 늙는다는 것은 보편적인 자연현상이지만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은 선택적인 것 같다. 아름답게 늙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단한 노력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을 살펴봐도 그냥 늙어가는 사람은 많아도 아름답게 늙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아름답게 늙어 가면 그 삶의 질은 윤택해 지고 남이 보기에도 좋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내 주위 사람들은 하나하나 떠나기 마련이다. 일상생활이 외로워지고 고독할수록 가장 곁에 두고 싶고, 가장 그리운 게 친구가 아닐까 싶다. 노년에 친구가 많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행복이다. 좋은 친구들과 함께라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즐겁게 갈 수가 있다. 이별이 점점 많아져 가는 고적한 인생길에서 서로 안부라도 전하며 종종 만나야 한다. 빈대떡에 막걸리 잔이라도 부딪치며 회포를 풀고 격려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게 행복한 노년의 삶을 구축하는 데 크나 큰 활력이 될 것이다. 노년의 친구는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나에겐 소중한 보물과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노년의 친구에게는 내 속내를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다.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해도 편안한 사이다. 노년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스스로의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 마치 잔액이 두둑한 예금통장을 쥐고 있는 것처럼. 어디선가 읽은 적 있던 글이 새삼 떠오른다. 꽃잎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세월이더라. 차창 바람 서늘해 '가을인가' 했더니 그리움이더라. 그리움 이 녀석! '와락 껴안았더니' 노년의 눈물이더라. 세월 안고 '눈물 흘렸더니' 어느덧 노년의 아쉬움이더라. 나이 들어가면서 친구는 귀중한 자산이다. 인생의 삶에 활력을 주는 원기소 같은 존재다. 많은 친구들과 만나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며 서로 소통하고 위로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 삶을 토론하고 인생을 논 할 수 있는 노년의 친구는 행복한 여생의 동반자다. 야속한 코로나 역병은 노년의 친구들에게도 시련을 안기고 있다. 일 년이 넘도록 노인정의 문을 굳게 잠가 놓고 친구들 만남을 방해하고 있는 코로나가 저주스럽다. 어서 노인정 문이 열려 노년의 친구들에게 활력이 넘치는 시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경주의 시는 여행자의 애상과 기억을 담고 흔들리는 몽환적 유리병 같다. 음악적 감각, 미적 자극과 울림, 시간에 대한 사유가 결합하여 아름답고 슬픈 서정의 세계를 창출한다. 그의 시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전통적 서정의 세계를 탐색하는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반서정의 감각으로 장르 미상의 예술적 미지를 탐색하는 계열이다. 전자의 세계에서는 시적 자아의 낭만적 방황과 세계를 떠도는 표류의식이 두드러진다. 광기에 가까운 낭만적 도취와 폭포처럼 쏟아지는 광휘의 수사들이 나타난다. 후자의 세계에서는 기존 예술에 대한 부정의식이 나타난다. 연극, 미술, 음악, 영화를 넘나드는 다매체 문법과 형식, 탈규범적 언어와 시간에 대한 다차원적 탐색을 통해 새롭고 낯선 시의 세계를 탐험한다. 후자의 낯선 실험을 대표하는 시집이 '기담'(2008)이라면, 전자의 낭만적 서정을 대표하는 시집이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6)이다. 이 첫 시집은 우주의 영원성에 대한 시인 특유의 감각과 상상, 아름다운 서정의 그림들이 유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시인 특유의 방랑의 정서가 독자의 심리 저층을 건드려 근원적 향수와 애련의 감정들을 자아낸다. 특히 우주의 신비와 시간에 관한 기억들이 펼쳐질 때 정서적 울림은 깊어진다. 그의 초기 시에서 특히 주목해야 하는 어휘가 '우주'와 '시차'다. 우주는 그에게 아주 신비롭고 아름다운 원형적 공간이다. 실체가 포착되지 않는 바람, 악, 절대의 색(色), 빛깔, 어둠, 시간 등 신비감으로 채색되는 곳이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바람, 열, 음악, 잠, 휘파람 등이 떠도는 곳이다. 시인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기억의 파편들, 잠의 부유물들, 무형의 아픔들이 떠도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우주는 시인 자신의 몸이자 방이기도 하다. 그 외로운 방에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편지를 쓰는 행위는 곧 자아에의 침잠이고 죽음과의 대면이고 생에 서린 무량한 고독과 사랑을 음미하는 일이다. 방에서 방을 밀고 우주로 나아간다는 시인의 상상에는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인의 마음과 기억의 상흔이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우주라는 방은 곧 기억의 미로고 몽상의 지도다. 시간이 직선으로 흐르지 않고 둥글게 회전하면서 분산되고 확산되는 곳, 끝없이 시차가 발생하는 곳이다. 이 시차에 대한 사유를 통해 시인은 자신이 속한 현재와는 다른 시간대, 무한한 기억의 지층 속으로 음악처럼 아련히 스며들곤 한다. 시간, 기억, 이미지, 통증, 음악 등이 하나의 물결처럼 파동을 만들며 움직이고 이 미묘한 율동에 따라 현실의 문양과 색채가 낯설게 변한다. 즉 그에게 세계는 낯선 시차(視差)의 공간이고 끝없이 시차(時差)가 발행하는 틈이자 구멍이다. 시차는 주로 여행과 기억에서 발생하는데 여행은 떠나기 위한 것이 아닌 돌아오기 위한 행위에 가깝다. 자주 여행을 떠나는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돌아왔을 때의 여진" 즉 시차에 의한 여독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차(時差)를 겪고 나면 시차(視差)가 생김으로써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시차는 망각과 상처를 낳는 시간의 차이이자 이질적 풍경의 결합을 낳는 시각의 차이다. 그에게 세상은 아직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을 찾아 떠나야할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이 미지의 여행에서 그는 현재의 시간에서 까마득히 먼 과거의 시간을 체험하기도 하고 까마득히 먼 미래의 죽음의 시간을 미리 체험하여 멀미를 느끼기도 한다. 이 시차의 견딤을 통해 우리 또한 삶과 죽음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인간인 나는 언제나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현실은 늘 시차를 낳는 곳이고 그 불가항력이 인간인 우리를 외롭게 만든다. 그런 인간들을 위한 위로의 노래, 그것이 그의 시다. 달력에 없는 시간과 지도에 없는 공간을 떠돌던 여행자의 지독한 여독, 그것이 그의 시다. 그러기에 여행 후 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도 아픈 일은 고독 속에서 여독을 달래며 시차의 눈을 달래는 일일 것이다. / 함기석 시인
'고초당초 맵다한들 사집보다 더 매울까? 세상의 모든 여인들이 하는 말로 시집살이는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잘해줘도 시집이고 시어머니라고 한다. 오죽하면 요즘 젊은 친구들은 '시'자가 들어가는 것은 시금치나물도 싫다고 한단다. 친정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정말 며느리에게 잘하며 사랑을 주는 시어머니라고 했다. 며느리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며느리가 다섯이나 되는 친정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해 본다. 며느리 못지않게 시어머니도 힘들지 않았을까? 내 속으로 낳은 자식도 마음대로 되지 않고 20만 넘으면 자기 의견을 주장하며 얼굴을 붉힐 때가 있는데 각기 다른 환경과 부모님 밑에서 자란 다섯 며느리들은 잘 하는 시어머니라도 어렵고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난 어렸을 때에도 성인이 되어서도 입버릇처럼 종갓집 맏며느리가 되겠다고 말했다. 물론 시어머니에 시할머니까지 계셔서 사랑을 듬뿍 받는 예쁜 며느리가 되고 싶었다. 아니 사랑이 아니면 모진 시집살이라도 당해보고 싶었는데, 시집살이도 사랑도 받지를 못했다. 시부모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면서 직장생활하며 아이들 키우느라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출근하여 하루 할 일을 정리하고 있는데 여직원들만 휴게실로 모이라고 연락이 왔다. 급한 일인가하여 쫓아갔다. 커다란 스텐 밥통을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무엇인가 하고 뚜껑을 열어보니 먹음직스러운 찰밥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며느리가 임신을 해서 찰밥을 잘 먹는다고 시어머니가 해주셨단다. 여러 가지 콩과 호두·은행·밤까지 듬뿍 넣어 만든 찰밥을 싸주시며 직원들과 나누어 먹으라고 하셨나보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너무 부러웠다. 모두들 맛있게 먹는데 울컥하여 한 숟갈도 먹지 못하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버스를 타고 아흔아홉 구비 천등산 달이재를 넘어 출근하던 때가 떠올랐다. 차멀미가 얼마나 심했는지 출근길에 중간에서 내려 간이주차장 의자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만 흘렸었다. 그때도 시어머니 생각이 지금처럼 간절하지는 않았다. 시어머님이 너무 그립고 보고 싶은 날이었다. 결혼하여 직장 생활하는 여자들은 시어머니가 있었으면 할까? 나는 시어머니가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때때로 했었다. 직장에 다니는 나를 대신하여 살림도 살아주고 아이들도 키워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시부모님이 아기를 키워주며 함께 사는 친구들이 많이 부러웠다. 남에게 아이를 맡기고 출근하며 날마다 미안해했다. 하루는 출근하는 길에 아기를 맡기려고 업고 갔더니 아이를 돌봐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건 무슨 말인가? 어제 저녁에도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지금 이야기를 하면 어쩌라는 것인지 머리가 하얘졌다. 아기를 업고 출근을 할 수도 없고 가까운 데는 친척도 없고 친정어머니는 오실 형편이 안 되니 난감했다. 아주머니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고 당황스럽기만 했었다. 처음으로 얼굴도 뵙지 못한 시어머니를 원망했었다. 아기를 업고 돌아서는 나는 덩그러니 세상 속에 아기와 함께 던져진 느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친구들은 시부모님이 안 계셔서 얼마나 좋으냐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아니다. 오히려 시부모님과 함께 살며 시어머니 시집살이를 이야기하는 친구들이 항상 부러웠다. 힘들게 자식을 낳으시고 키우시기만 하고 효도 한 번 받지 못하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고 아프다. 외출했다가 늦게 들어오는 며느리에게 일찍 들어오라고 꾸중도 하시고 가끔 냉장고를 들여다보고 절약하고 아끼며 살라고 해주셨으면 좋겠다. 남들은 그것이 시집살이에 잔소리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사랑의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 남편을 보면 알 수 있다. 시부모님들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냥 옆에 계시면서 즐거울 때 즐거워해 주시고 힘들 때 위로해 주시는 그런 분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착하게 순종하며 효도하려고 노력하는 며느리가 아니었을까? 찰밥을 싸준 시어머니가 부럽고 아기 키워주며 시집살이 시키는 시어머니는 더욱 부러웠다. 사랑받는 것보다 모진 시집살이 당하는 친구가 애잔하면서도 더 부러웠다. 단 하루라도 함께 살아보고 싶었다. 조용히 시부모님 사진을 꺼내어 본다. 인자하신 모습에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아버님, 어머님. 모든 것이 처음이라서 서툰 며느리입니다. 사랑보다 사랑이 담긴 매서운 시집살이라도 받고 싶었습니다. 꿈에서라 한 번 뵙고 싶습니다. 그때 만나면 우리 며느리 수고했다 한마디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사랑합니다."
김민정의 초기 시는 명랑한 그로테스크 미학을 통해 잔혹극 세계를 연출한다. 부조리한 사건 속에서 시의 화자들은 들끓는 욕망을 내보이며 거침없이 욕설들을 내뱉는다. 시인은 요설(饒舌) 혹은 장광설(長廣舌)의 랩 문체로 세계를 반어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왜 이런 희롱의 방식으로 시를 펼치는 걸까· 폭력의 희생물인 여성의 몸 깊은 곳에 자리한 고통과 고통의 실체를 직시하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어른들 세계의 위악적 현실을 폭로하고 냉소적으로 비판하기 위함이다. 김민정 시의 주요 특징은 화자의 복수(複數)성, 음성적 언어유희, 명랑한 유머감각, 그로테스크한 무대연출 등이다. 그녀의 시에 등장하는 나나는 나라는 존재의 이중성, 천사와 악녀라는 자아의 복수상태를 나타내며 심각한 폭력사건에 자주 휘말린다. 그런데 심각한 상황임에도 명랑만화 속의 여주인공처럼 장난스럽고 행동하고 유쾌하게 까분다. 유머의 코드와 말투로 현실의 허구적 가면을 폭로한다. 그래서 매우 충격적이고 끔찍한 장면임에도 독자는 픽픽 웃게 된다. 이때 발생하는 웃음은 반어적 인식의 결과물로 폭력의 실상을 희화화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반드시 주목하고 주의해야 할 점이 폭력의 주체 문제다. 김민정의 시에서 폭력의 발생 장소는 주로 가정이고 폭력의 주체는 아빠와 엄마다. 그들은 육친의 가족이 아니라 사회적 가부장제도 속의 권력을 상징하는 존재들이다. 시의 화자들은 이 어른들에 대항하여 맞서는데 이 과정에서 섬뜩하고 잔인한 이미지들이 출현한다. 원초적 배설의 문장들이 통제 없이 설사처럼 쏟아져 나온다. 이것은 잔혹극 무대를 통해 현실의 은폐된 치부와 썩은 살을 폭로하려는 시인의 의도된 장치들이다. 즉 폭력과 공포, 야만과 잔혹으로 상징되는 좀비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활보하고 있음을 똑똑히 확인하라는 무서운 경고다. 시인의 그로테스크 문장들의 목적이 여기에 있다. 첫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2005) 출간 이후 김민정의 시 세계는 점진적으로 변화 중이다. 거세고 공격적이던 세계 대응방식이 부드럽게 내면화되고 있다. 오늘 소개하는 시 「아름답고 쓸모없기를」는 세 번째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2016)의 표제작이다. 경북 울진에서 주워온 돌 이야기다. 돌을 발견하고 줍는 첫 장면이 재밌고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건 돌의 습득 장면 자체보다 돌을 달걀과 눈사람의 몸으로 생각하는 시인의 사물 수용태도다. 돌을 주어온 다음에는 돌을 대야에 담가놓고 오랫동안 사색하고 명상한다. 돌에 스민 색과 시간을 헤아리고 시간을 반으로 잘랐던 칼날이 바로 돌이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나아가 너와 나, 남성과 여성, 돌과 물의 관계로 사유를 확장시키면서 죽은 자의 마음과 아픔까지도 헤아린다. 돌이라는 사물을 대하는 시인의 섬세한 눈길, 세상과 사람에 대한 시인의 따듯한 사랑이 느껴지는 시다. / 함기석 시인
신용목은 바람과 햇살 사이를 떠도는 서정 시인이다. 그의 시는 풍경의 감각적 실감이 높고 눈길을 오래 머물게 하는 비유의 문장들이 많다. 시적 자아는 자주 상처와 어둠을 마주하는데 바람 또는 햇살에 섞여 나타나기 때문에 암울한 느낌만을 주지는 않는다. 그의 초기 시에서 바람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람은 주로 삶의 변화 주체로 등장하여 유동성, 운동성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일상의 정체된 시간들을 깨트리는 역할도 하고 고통과 슬픔의 대리물로도 사용된다. 바람의 발원지에 가 닿으려는 언어 표현은 근원을 추구하는 욕망의 몸짓이라는 점에서 그의 시는 기억으로의 회귀 시학, 성찰의 시학이라 할 수 있다. 간혹 바람이나 햇살과 대비되는 단단한 뼈 이미지들도 나타난다. 바람의 유동성과 뼈의 견고함이 하나의 몸으로 결합하여 미묘하고도 낯선 서정의 풍경이 태어난다. 바람 속에 꽉 박혀 허공을 깨무는 '바람의 어금니' 이미지가 그런 예에 해당된다. 이처럼 시인은 자연을 이질적 결합상태로 받아들인다. 이는 시인에게 자연이 감각의 결에 따라 매우 다양한 무늬로 변주되는 세계임을 암시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신용목의 시에서 기존의 서경(敍景)은 파괴된다. 자연에 속한 인간과 인간의 삶 또한 훼손된 존재다. 즉 그의 시세계 심층에는 자연과 융화되지 못하고 균열하는 자의식이 앙금처럼 깔려 있다. 이 불화의식 때문에 농부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을 착취하는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망한 자의 시선을 가졌노라'고 시인은 고백한 적이 있다. 그의 시에 일몰의 장면, 추수가 끝난 가을 들녘, 적막하고 고적한 겨울 산사, 갈대가 있는 강변 등의 풍경이 나타나는데 이는 자연을 대하는 시인의 시선 때문이며 이런 풍경들은 대부분 배후를 거느린다. 즉 대상과의 불화의식이 그의 시를 기존의 서정시와 다른 층위에 위치시킨다. 신용목의 시는 주체가 대상을 응시하는 과정(A), 그것을 언어적 풍경으로 재배열하는 과정(B), 재배치를 통해 삶을 성찰하고 사유하는 과정(C)을 단계적으로 거친다. 시각적 대상을 응시하는 과정은 대상과의 동화 또는 투사의 과정으로 시인은 대상이 품고 있는 기억과 상처, 통증과 연민 등을 섬세하게 읽어낸다. 표피적 관찰로 끝나지 않고 풍경의 배후까지 매우 면밀하게 탐색한다. 이 응시의 시선 속에 사회적 문제의식과 비판의식이 내재된다. 응시한 대상을 언어로 재배열하는 과정에서는 수사적 비유가 자주 사용되는데, 이 비유적 문장들 때문에 의미의 층은 넓어지고 감정의 세밀한 분화가 일어난다. 이런 의미의 확장과 감정의 분화가 시적 사유와 성찰을 유도한다. 그의 시는 망각된 시간 또는 기억으로의 회귀를 추구하며, 인간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추구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궁극적 귀환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시적 성찰의 공간으로 제시하여 그곳으로 모여드는 희망 잃은 자들의 실상을 목격하게 한다. 생 자체가 궁극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허기의 시간'임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그에게 생은 미완의 형식이자 비극적 은유고 점점 퍼져가는 안개의 숲이고 늪지다. 그의 시에서 비유의 결들이 복잡하게 나타나는 것은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복합적 시선 때문이다. 그의 눈에 갈대의 들판은 대대로 누추한 삶을 사는 자들의 가계(家系)이다. 그들은 모두 패배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는 연민의 대상들이다. 부모로부터 피를 이어 내려오는 이들의 몸속을 흐르는 어둠을 시인은 웅숭깊고 따뜻하게 응시한다. 그것이 아름답고도 슬픈 연민의 서정을 낳고 성찰의 시학을 낳는다. / 함기석 시인
술!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위대해지도록 만드는 묘약으로 술보다 더 멋진 것은 없는 것 같다.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시선을 의식하고 사는 동물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송과 칭찬을 받고 사랑받기를 바라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타인으로부터 멸시, 비하, 미움, 무관심의 대상이 되기 싫어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어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돈을 많이 벌려고 힘쓰며 학벌을 높이 쌓으려고 공을 들인다. 몸매를 가꾸고 멋을 내며, 회사 조직에서는 고위직에 오르려고 애를 쓴다. 그래야 주변에 찬양하는 사람들이 들끓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말해 남보다 위대해지면 되는 것이다. 사법고시에 합격을 하거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일약 스타가 된다. 유명한 연예인이 되거나 프로 축구, 프로 야구의 유명 선수가 되어 수 백 수천억 원의 연봉을 받으면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한 개인이 이렇게 소망을 이루고 위대해 지면 타인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찬란하고 위대한 시간은 영원할 수 없는 게 세상 사는 이치다. 언젠가는 초라하고 비참한 시간이 찾아온다. 한때 많은 이들로부터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도 비참한 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도 때가 되면 현실은 퇴락하고 그 누구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럴 때 우리는 쓸쓸하게 술잔을 들게 되는 것이다. 첫 잔은 현재의 초라한 모습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쓰디쓰지만, 한 잔 두 잔 들어가면 술은 어느 사이엔가 우리에게 위대했던 과거와 그 시절의 희열을 선사한다. 이처럼 술은 우리를 에덴동산처럼 아름다웠던 과거로 데리고 가는 최고의 묘약인 것이다. 술은 위대했던 과거를 찾아주는 묘약이지만 술에 대한 지나친 욕망이나 사랑, 즉 음주욕의 문제를 야기한다. 적당한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고 너무 지나치게 술을 찾을 때 과음이라는 도깨비를 만난다. 술꾼들의 궤변이 재미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고, 좀 취하면 술이 술을 먹고, 만취가 되면 술이 사람을 삼킨다"는 것이다. 음주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현재 자신에 대한 무기력과 패배의식 때문이라고 한다. 누구나 불행하고 비참한 현실을 깨끗이 잊고 싶어 한다. 내 과거 인생의 정점이었던 시절을 꿈꾸려고 한다. 과거 찬란했던 황금기를 찾아야 현재의 잿빛에서 그나마 숨통을 틀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술이라는 묘약으로 순간적이나마 한때의 정점을 향유했던 과거의 내가 불쑥 나타나 현재의 불우하고 보잘것없는 나를 잊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학교 동창회에 나갈 때가 있다. 술과 동창회 풍경에서도 영광스러웠던 과거와 초라해진 현실의 갈등을 엿볼 수가 있다. 사람은 현재 자신의 삶이 어려울수록 과거의 영광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한때는 반장이었고 공부도 잘 해서 다른 친구들의 부러움과 선생님의 칭찬 속에서 살았던 시절이 너무도 그리운 것이다. 과거에 자신보다 공부를 못했던 친구가 어느 사이엔가 판검사가 되어 있을 수도 있고, 박사 학위에 대학교수가 되어 명성을 떨칠 수도 있다. 물론 현재 잘 나가는 친구는 과거에 자신보다 잘 나갔던 친구 앞에서 뻐기고 싶은 심정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몰락했지만 과거 영광스러웠던 위치에 있던 사람과, 과거에는 불우한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존경받는 자리에 있는 사람 사이에서 동창회는 은연중 다툼으로 번지기도 한다. 과거의 왕과 현재의 왕 가운데 누가 동창회에서는 큰소리를 칠 것인가. 과거의 왕은 대취해서 화려했던 과거 시절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과거의 영광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대부분 친구들은 과거의 왕이 취했다며 조롱을 하고 현재의 왕 편을 드는 것이 세상인심이다. 술은 인간에게 과거와 현재의 부침(浮沈)에 대한 서글픈 보고서 같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이다' 어느 시인의 한 구절이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것 같다. 이황연 (2) - 겨울연가 술 술!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위대해지도록 만드는 묘약으로 술보다 더 멋진 것은 없는 것 같다.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시선을 의식하고 사는 동물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송과 칭찬을 받고 사랑받기를 바라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타인으로부터 멸시, 비하, 미움, 무관심의 대상이 되기 싫어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어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돈을 많이 벌려고 힘쓰며 학벌을 높이 쌓으려고 공을 들인다. 몸매를 가꾸고 멋을 내며, 회사 조직에서는 고위직에 오르려고 애를 쓴다. 그래야 주변에 찬양하는 사람들이 들끓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말해 남보다 위대해지면 되는 것이다. 사법고시에 합격을 하거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일약 스타가 된다. 유명한 연예인이 되거나 프로 축구, 프로 야구의 유명 선수가 되어 수 백 수천억 원의 연봉을 받으면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한 개인이 이렇게 소망을 이루고 위대해 지면 타인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찬란하고 위대한 시간은 영원할 수 없는 게 세상 사는 이치다. 언젠가는 초라하고 비참한 시간이 찾아온다. 한때 많은 이들로부터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도 비참한 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도 때가 되면 현실은 퇴락하고 그 누구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럴 때 우리는 쓸쓸하게 술잔을 들게 되는 것이다. 첫 잔은 현재의 초라한 모습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쓰디쓰지만, 한 잔 두 잔 들어가면 술은 어느 사이엔가 우리에게 위대했던 과거와 그 시절의 희열을 선사한다. 이처럼 술은 우리를 에덴동산처럼 아름다웠던 과거로 데리고 가는 최고의 묘약인 것이다. 술은 위대했던 과거를 찾아주는 묘약이지만 술에 대한 지나친 욕망이나 사랑, 즉 음주욕의 문제를 야기한다. 적당한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고 너무 지나치게 술을 찾을 때 과음이라는 도깨비를 만난다. 술꾼들의 궤변이 재미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고, 좀 취하면 술이 술을 먹고, 만취가 되면 술이 사람을 삼킨다"는 것이다. 음주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현재 자신에 대한 무기력과 패배의식 때문이라고 한다. 누구나 불행하고 비참한 현실을 깨끗이 잊고 싶어 한다. 내 과거 인생의 정점이었던 시절을 꿈꾸려고 한다. 과거 찬란했던 황금기를 찾아야 현재의 잿빛에서 그나마 숨통을 틀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술이라는 묘약으로 순간적이나마 한때의 정점을 향유했던 과거의 내가 불쑥 나타나 현재의 불우하고 보잘것없는 나를 잊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학교 동창회에 나갈 때가 있다. 술과 동창회 풍경에서도 영광스러웠던 과거와 초라해진 현실의 갈등을 엿볼 수가 있다. 사람은 현재 자신의 삶이 어려울수록 과거의 영광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한때는 반장이었고 공부도 잘 해서 다른 친구들의 부러움과 선생님의 칭찬 속에서 살았던 시절이 너무도 그리운 것이다. 과거에 자신보다 공부를 못했던 친구가 어느 사이엔가 판검사가 되어 있을 수도 있고, 박사 학위에 대학교수가 되어 명성을 떨칠 수도 있다. 물론 현재 잘 나가는 친구는 과거에 자신보다 잘 나갔던 친구 앞에서 뻐기고 싶은 심정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몰락했지만 과거 영광스러웠던 위치에 있던 사람과, 과거에는 불우한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존경받는 자리에 있는 사람 사이에서 동창회는 은연중 다툼으로 번지기도 한다. 과거의 왕과 현재의 왕 가운데 누가 동창회에서는 큰소리를 칠 것인가. 과거의 왕은 대취해서 화려했던 과거 시절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과거의 영광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대부분 친구들은 과거의 왕이 취했다며 조롱을 하고 현재의 왕 편을 드는 것이 세상인심이다. 술은 인간에게 과거와 현재의 부침(浮沈)에 대한 서글픈 보고서 같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이다' 어느 시인의 한 구절이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것 같다. -------------------------- 이황연 푸른솔문학 신인상 푸른솔문인협회 회원 성균관 典人 저서: 「인생과 나의 삶」 「살아온 세월 」
김행숙은 촉각의 시인, 감각의 시인이다. 그녀의 시는 시간의 순간적 현현과 사라짐을 기리는 일종의 현상학적 제사(祭祀)다. 그녀는 시를 통해 대상의 근원이나 배후를 탐색하지 않으며 초월을 꿈꾸지도 않는다. 그래서 어휘와 문장은 구심력보다 원심력, 응집보다 발산을 지향한다. 기표와 기의의 경계선은 흐를 뿐 특정 가치나 신념에 종속되지 않는다. 당연히 시적 자아는 확정된 고체의 형상을 만들지 않는다. 코기토(cogito)는 해체되고 이데아(Idea)는 붕괴된다. 세계의 중심이 인간이라는 신성한 관념도 해체된다. 시인은 말이 무력해지는 지점, 말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다시 시를 시작한다. 인칭을 파괴하여 비(非)인칭 화자를 탄생시킨다. 인칭의 파괴는 김행숙 시의 독창성과 기묘함을 낳는 주요 원인이다. 1인칭과 2인칭 대신 1.5인칭을 쓰는데 내 안의 너, 내 안에 섞여 있는 타자들을 연상시킨다. 다성 화자도 등장하는데 많은 경우 5~6명 정도의 소녀 화자들이 왁자지껄 말들을 토해낸다. 사춘기 화자, 귀신 화자, 흔적 화자, 메아리 화자, 꿈 화자 등이 뒤섞여 어지럽게 발화한다. 또한 투명인간, 유령, 귀신 등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독백 투의 알 수 없는 말들을 쏟아놓기도 한다. 일부 평자들은 이들을 시인의 분열된 자아로 파악하는데 오진(誤診)에 가깝다. 이들은 자아의 감각적 창조물 또는 환상복제물인 클론(clone)들이다. 이 클론들이 각자의 시간을 살며 각자의 말과 기억을 쏟아놓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에게 인간은 호르몬의 물적 존재일 뿐이고 이런 존재 인식이 기체의 형상들을 낳는다. 기존의 얼굴을 몰락시키고 새로운 얼굴을 탄생시킨다. 중요한 것은 이 몰락 또는 사라짐이 자유와 연계된다는 점이다. 세계는 늘 붙잡아 놓으려는 구속의 공간이기에 시인은 시 쓰기를 통해 세계로부터 연기처럼 사라지려 한다. 이 욕구가 서정적 이별의 이미지로 채색된다. 즉 그녀에게 세계는 늘 이별이 진행 중인 공간,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둥근 무대, 사랑이 진행 중인 곳이다. 발전 진보하는 곳이 아니라 끝없이 대체되는 곳이다. 이런 세계 구조의 메커니즘이 시인 특유의 반복적 복제 시학과 질문들을 낳는다. 질문을 낳는 주요 어휘로는 아이, 귀신, 계단, 얼굴, 해변, 고양이, 키스, 발목, 손목, 목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주목해야 하는 어휘가 아이, 얼굴, 귀신, 해변, 키스 등이다. 오늘 소개하는 시 「숲 속의 키스」에서 주목되는 건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감정적 교감보다 시인의 건축학적 관찰력과 경쾌하고 낯선 공간 해석력이다. 현대시에서 키스는 너무도 많이 다루어진 테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달콤한 감정의 교류와 기억의 재현, 육체의 합일을 통한 상처의 치유 등으로 상상력을 확장시켜 나간다. 이 시에서도 그런 정서적 교감 측면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숲의 환상을 통해 낯선 에로티시즘의 세계를 펼친다. 두 사람은 두 그루 나무가 되어 하나의 육체를 이룬다. 손은 나뭇잎이 되어 날아오르고 물방울들은 가볍게 나뭇잎을 떠난다. 사람과 나무의 경계는 지워지고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이 뒤바뀐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한다. 육체의 촉각적 접촉을 통해 두 존재는 기존의 자신을 몰락시키고 새로운 존재로 부활한다. 숲 전체가 사랑의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이 시에서 키스는 단순한 육체 접촉의 차원을 넘어서서 존재의 변신과 재생을 위한 감각적 행위로 시인의 '의식의 지향성'을 반영한다. 대체로 인간에게 의식의 지향성은 '의식 그 너머 상태'인 무한 혹은 영원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 시의 궁극은 열려 있다. 이처럼 김행숙은 촉각의 느낌에 자주 매혹되는 시인이다. 얼굴 부위의 혀의 촉각적 느낌은 의식보다 앞서고 예고 없이 우리 몸 깊숙이 전달된다. 키스를 통한 얼굴의 재탄생, 몸의 재탄생은 진리의 재현 문제와 동궤다. 진리는 과연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시인은 키스 행위를 통해 상상한다. 이때 얼굴의 몰락은 진리의 몰락을 의미하기에 과연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불확정성 세계관이 부각된다. 이런 인식의 극적 전환이 혀의 감각, 육체의 환상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귀하다. / 함기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