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는 1990년대 자본주의 대중소비문화를 시로 적극 끌어들여 우리시의 영역을 확장한 시인이다. 무협지의 상상력으로 정치권력의 폭력성을 풍자한 점, 현대자본주의 소비문화 공간과 쾌락의 허구성을 성찰한 점, 영화의 전개방식을 차용하여 사회를 조명한 점, 금지된 문화와 교육의 억압성을 비판한 점 등은 그의 시의 주요 공적이다. 그는 키치 소비자 겸 반성자로서 당대의 대중문화를 읽고 흡수하는데, 대중문화의 폐해를 반성하고 비판하면서도 그것에 매혹되어 소비하고 누린다. 즉 유하 시의 주체는 대중문화에 물들어가는 현대인의 욕망을 풍자하면서도 대중문화가 주는 재미와 환각에 도취되어 그것을 소비하는 양가적 주체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화려한 삶과 병들어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반성적으로 바라보면서 시인은 도시 반대편에 위치한 자연세계를 그리워하고 동경한다. 그의 시는 대체로 자본주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풍자시와 자연을 배경으로 감정적 울림을 낳는 서정시로 대별되는데, 현실의 정치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다룰 때 풍자성이 강화되고 유년의 추억과 회상이 펼쳐질 때 서정성이 짙어진다. 즉 압구정동으로 대표되는 도시공간이 펼쳐질 때는 불 이미지, 속도의 빠름, 채움의 미학이 나타나고, 하나대라는 자연공간이 펼쳐질 때는 물 이미지, 속도의 느림, 비움의 미학이 나타난다. 압구정동이 현대인의 들끓는 물욕과 성욕이 분출되는 가면의 공간이라면 하나대는 타락한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훼손되지 않은 서정의 원형공간이다. 첫 시집 『무림일기』(1989)에서 시인은 자본과 권력의 암투가 벌어지는 현대사회를 무림의 세계로 패러디한다. 현대사회를 무림 고수들이 대결하여 생사를 결정하는 잔혹한 무림세계와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이런 시각은 「武力 18년에서 20년 사이-무림일기 1」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시는 1979년 10.26 대통령 시해사건부터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이르는 신군부의 권력찬탈 과정을 무협지 버전으로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무림패왕 천마대제 만박(박정희)이 금규(김재규)에 의해 척살되고, 권좌를 무력으로 쟁탈한 광두일귀(전두환)가 승룡(정승화)을 제압하고, 지옥십관훈련(삼청교육대)을 실시하고, 하남(광주) 땅에서 일어난 민초들의 항쟁(광주민주화운동)을 공수무극파천장(계엄공수부대)으로 제압하고, 형식적인 숭산의 영웅대회(통일주체국민회의)를 거쳐 권좌(대통령)에 오르고, 그걸 보고 동천존자(서정주)가 찬양한 일 등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비극의 역사와 그를 둘러싼 권력쟁탈의 음모를 무협지의 상상력으로 풀어낸 독특한 시다. 함기석 시인
'녹색평론'최근호의 좌담회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서강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학생들의 약 40%가 아버지한테 원하는 것은 오로지 돈뿐이란다. 서울대 학생들은 부모가 63세에 퇴직금만 남겨놓고 죽으면 좋겠다는 설문 답변이 가장 많았단다. 우리 세대에선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이런 일들이 요즘 학생들이다. 수많은 경쟁 속에서 단지 내 자식 하나만이라도 잘 키워보자고 열심히 일한 결과가 이렇다니 그 허탈감이야 오죽하겠냐만 그렇다고 성장 과정에서 간과해 온 인성교육의 부재를 부모들은 무책임하게 피해갈 수도 없다. 우리 가정도 예외는 아니기에 이러한 설문 결과에 대해서 나 역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이러한 문제와는 아주 거리가 먼 여고 시절의 한 친구를 얼마 전 시골에서 우연히 만났다. 졸업 후 처음 만난 그 친구는 너무도 행복해 보였고 그녀의 가족들도 그랬다. 그 친구의 친정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녀의 친정어머니는 "딸애 친구가 왔는데"하시며 손수 과일을 깎아주시는 모습이 참 인자해 보였다. 옆에 같이 있던 친구의 아들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어머니, 저는 세상에서 저의 부모님이 가장 존경스러워요. 저는 나중에 장가가서 아이를 낳고 키우게 되더라도 꼭 제 부모님처럼 내 자식을 키울 거예요. 저의 이 끝없는 자존감은 늘 어머니로부터 나오는 것 같아요. 어머니,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아, 이 얼마나 고맙고 감격스러운 말인가! 진심 어린 그 말에 뭔가 한방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랄까? 아마 자식들에게 듣는 최고의 찬사가 바로 이런 말이 아닐까 싶다. 가슴은 철렁했고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교육계에 종사하고 있다고 뱉어낸 내 말이 너무도 부끄럽고 초라했다. 도대체 어떠한 환경이 저토록 자존감을 드높여줬을까? 감탄을 연발하고 있는 내게 친구는, "나는 항상 아이들이 뭐든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늘 격려만 해주는 차원이었지. 난 매일 아이들에게 빠짐없이 해주었던 말이 있는데 '넌 뭐든지 할 수 있어', '사랑해', '고마워', '나는 네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해' 이런 말들을 매사에 생활화하려고 노력했어." 이런 말들의 중요성은 교육학이나 상담공부를 하면서도 종종 들었던 말이다. 난 이론 따로, 행동 따로 삶을 쭉 살아왔던 거였다. 바로 자녀의 성공을 일류대학의 간판이나 출세보다는 아이의 꿈과 행복에 초점을 두고 키우는 것, 교육학을 전공하지 않은 친구도 저렇게 잘하고 있는데 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 되는 순간, 난 지난날의 내 부모님과 나의 과거를 살짝 들춰보았다. "딸은 어차피 시집만 가면 끝인데 계집애가 대학은 가서 뭐해, 어디 부모 말에 꼬박꼬박 말대꾸냐"라고 나무라셨던 기억들…... '그런 부모님을 닮지 말아야지'하면서도 칭찬보다 질책을 먼저 받고 커온 나는 습관적으로 나와 타인의 실수를 쉽게 용납할 줄을 몰랐다. 첫아이한테는 대리만족을 요구하며 바로 연년생으로 둘째를 낳고 난 후부터는 다 큰애 취급을 하면서 키웠다. 지금 돌아보니 그 어린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까. 자책에 자책이 끝없이 이어지며 이 부끄러운 자녀교육의 상을 더이상 대물림하지 않겠노라 '사랑해, 소중해, 고마워'를 수없이 반복해 보았다. 인디언들의 속담인 '1만 번의 법칙'을 떠올리며…. 그 후, 스킨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들에게 종종 어깨도 툭툭 치고, 때때로 안아주기도 하며 '사랑해', '울 아들 쵝오', '난 네가 세상에서 젤로 좋아, 아들 짱 멋쪄'라고 종종 오버해서 표현을 해보았다. 처음에는 쑥스러워 멋쩍어하던 아들이 조금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해갔다. 그러더니 요즘은 엄마의 푼수 같은 표현들에 그냥 곧잘 웃어준다.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냥 무심코 지나치고 살 뻔했는데 삶에서 가장 소중한 이 사랑의 의미를 똑똑히 체감케 일깨워준 그 친구가 무척 고맙다.
산비탈 밭에 있는 농막에서 지내다 보면 무서운 것이 있다. 밤에 사람이 갑자기 찾아오는 것도 무섭다. 잡목 숲에서 짐승 뛰는 소리가 나면 멧돼지일까 봐 귀를 쫑긋 세운다. 고라니는 생긴 것은 예쁜데 그 우는 소리는 아기 소리 같아 괴이하다. 밤에 고요한 마음을 훔쳐 간다. 정말 무서운 것은 해 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깔따구다. 깔따구가 눈앞에서 이리저리 사방팔방으로 날면서 정신을 어지럽힌다. 귓속에 안식처를 찾았다는 듯이 귀 주변을 윙윙거리며 몸을 어지럽힌다. 낮에 일하면서 흘린 진한 땀 냄새가 깔따구의 식욕을 돋우는 것 같기도 하다. 질기게도 성가신 놈이다. 깔따구가 귀찮아서 손을 휘저으며 다니는 것을 이웃 밭의 형님이 보고 깔따구가 호랑이 눈을 빼먹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호랑이가 종일 온 산을 다니다가 해 질 무렵이 되자 숲속에 몸을 뉘어 쉬려고 하였다. 그때 깔따구가 호랑이에게 달려들었다. 호랑이는 깔따구를 쫓으려고 앞발로 휘젓다가 그만 자기 날카로운 발톱에 눈깔이 찔려 빠져버렸다고 한다. 나도 눈앞으로 날아다니는 깔따구를 쫓으려고 손을 휘젓다가 내 손에 내 눈이 찔릴 뻔한 적이 많다. 깔따구가 무섭게 달려들면 뛰어서 농막 안으로 들어간다. 따라오는 놈이 있으면 스프레이 살충제를 머리 주변에 뿌린다. 급하게 뿌리다가 눈과 귀에도 들어간다. 깔따구 쫓으려다가 살충제 세례를 받기도 한다. 오죽하면 호랑이도 무서워하는 깔따구이겠는가. 살다 보니 이 깔따구같이 귀찮은 것들이 많다. 호랑이같이 강하고 힘센 놈보다 깔따구같이 작지만 귀찮게 하는 것이 더 무섭다. 가톨릭에서 죄를 원죄(原罪)와 본죄(本罪)로 나누고 본죄를 대죄와 소죄로 나눈다. 대죄는 십계명 등 하느님의 법을 크게 어겨 은총을 완전히 잃게 되어 하느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소죄는 인간의 나약함과 결함으로 일상 속에서 범하는 사소한 죄이다. 하느님의 은총을 잃지 않을 정도의 죄이다. 소죄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기에 고해성사를 보지 않더라도 참회 행위를 통해 속죄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소죄라고 해도 대수롭지 않게 습관적으로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속담이 있다. 이 소죄가 나에게 꼭 깔따구 같다. 가톨릭 전례력에 특별히 중요한 신비를 경축하는 대축일이 있다. 대축일을 앞두고 의무적으로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 것을 판공성사라고 한다. 이 판공성사에는 부활판공과 성탄판공이 있다. 기뻐해야 할 때를 맞이하기 위해 회개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그때가 되면 고민이 깊어진다. 아내에게 "뭘 고백하지·"라고 어리석은 질문도 한다. 생각도 없이 지은 소죄를 잊고 산다. 매달 한 번은 고해성사를 보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소죄이니 다음에 성사를 봐도 된다는 유혹에 시간은 지나가고 죄라는 것도 잊어버린다. 고해성사를 보려고 성찰하면 지은 죄가 생각나지 않는다. 하느님이 이미 아는 내 죄를 내가 모른다. 그러다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판공성사 때가 되면 귀찮아한다. 해 질 무렵이면 무섭게 활동하는 깔따구도 해가 지고 찬 밤바람이 일면 믿기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사라진다. 마치 욕망이 일어나 끓다가 금방 사그라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다음 날 해 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깔따구의 활동이 다시 시작된다. 그 깔따구같이 귀찮은 소죄가 내 영혼의 눈을 파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황혼녘에 찾아오는 깔따구는 내 영혼이 쉬고 싶을 무렵이면 찾아오는 유혹과 같다. 때가 되면 일어나는 내 마음의 깔따구를 피해야 한다. 이에 맞서려고 하면 내 영혼의 눈알이 빠지고 말 것이다. 깔따구가 활동하면 농막 안으로 피하듯이 내 마음에 욕망이 일어나면 죄를 짓지 않도록 피해야 한다. 그 욕망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 맞서려다가 오히려 내 몸과 영혼을 상하게 할 수 있다. 귀찮은 깔따구가 내 눈알을 빼는 무서운 깔따구가 될 수 있다.
박정대의 시는 열렬한 고독의 음악이고 신열의 방랑일기다. 그는 몽상가고 사랑과 혁명을 갈구하는 낭만가객이다. 꿈꿀 자유가 없다면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시는 과거와 현재가 교차된 액자사진처럼 추억을 회상하는 방식, 꿈꾸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시인이 추억하는 곳은 대부분 모성과 슬픔이 담보되는 공간 즉 머나먼 섬 바다 초원 광야 사막 등 야성의 꿈과 사랑이 보존된 아련한 공간이다. 따라서 그에게 고향은 강원도 정선이라는 지리적 장소에 한정되지 않고 세상 무수한 곳에 편재한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도시의 환멸이 낳는 상처와 흉터가 그로 하여금 고향을 상실한 자의 존재론적 고독과 직면하게 했고 그로 인해 시적 자아들이 세상 곳곳을 정처 없이 떠돌고 방황한다는 점이다. 삶이 낳은 환멸이 낭만적 탈주를 낳은 것이다. 그에게 탈주는 몸의 내부세계로의 탈주와 몸 바깥세계로의 탈주,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몸의 내부세계로 탈주할 때 자아는 몽상과 꿈의 세계, 명상과 예술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의 시에 꿈꾸는 자의 도취된 시선, 명상적 아우라, 사색적 아포리즘 문장들, 외국 작가들과 영화감독과 음악가, 그들의 소설과 영화와 음악이 수시로 등장하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의 시는 술과 담배연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혼몽의 서사고 도취의 음악이고 촛불의 몽상이다. 이 탈주의 과정에서 시인은 압축의 언어 대신 잉여의 언어, 절제의 문장 대신 과잉의 문장을 택한다. 몸에서 벌어지는 온갖 상념과 상상을 억압하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려 한다. 탈주가 몸 바깥세계로 펼쳐질 때 시적 자아는 거침없이 대륙을 이동한다. 중국 대륙과 드넓은 몽골 초원을 달리고 사막을 지나 유럽대륙을 거쳐 극지의 얼음지대까지 내달린다. 그렇게 달리면서 그는 초원이 되고 사막이 되고 설원이 되고 비탄의 음악이 된다. 시와 혁명을 꿈꾸는 낭만적 악사(樂士)가 된다. 그만큼 박정대의 시에서 음악의 운동성은 매우 중요하다. 그의 시가 길고 어지러운데도 매혹적인 건 음악성 때문이다. 이때 음악은 혁명과 고독을 수반하는데, 그에게 혁명은 반체제적 전복이나 이데올로기의 승리가 아니라 감성과 영혼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사랑과 꿈의 복원성을 지닌다. 그러기에 원시림에서 마시는 뜨거운 수프 한 잔, 포르투갈 집시의 노래 한 소절, 머나먼 섬의 파도 한 자락, 사막에서 쓰는 시 한 줄, 사랑 후에 피우는 담배 한 개비 등등이 모두 그에겐 혁명이다. 그러나 그가 간절히 닿고자 하는 사랑과 혁명의 세계는 현존이 아니라 부재의 세계로 존재하며 연기될 뿐이다. 때문에 그의 시는 점점 비극으로 치닫고 시인은 점점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유폐된다. 그의 시가 단일한 이름을 거부하고 지상의 모든 이름들을 자신의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이런 비극과의 조우 때문이다. 그의 시 「음악들」을 감상하는 동안 나도 낭만적 몽상의 빠져든다. 바다의 문지방 같은 해안 방파제에 혼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인다. 한 손엔 흑맥주 캔을 들고 물안개 속에 떠있을 머나먼 섬,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를 떠올린다. 그곳은 바다의 눈동자고 고독의 음역(音域)이고 아련한 기억의 유배지다. 파도는 떠나간 여자의 주름진 치마처럼 다가와 내 아픈 발등을 적시고 나는 가슴에 쟁여둔 청춘의 속울음을 담배연기에 실어 허공에 토해낸다. 흑흑 흑맥주를 마시고 울면서 나의 너의 우리의 청춘은 저물었으니, 사랑이 일몰기의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 우리의 몸에 남는 것은 혹독한 그리움 그리고 견고한 생(生)이다. 공중을 떠돌며 지상에 안주하지 못하는 어린 눈발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점점 고독한 섬, 고독한 수평선이 되어간다. / 함기석 시인
유홍준의 시는 고통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기억의 문장들이다. 생의 아픈 체험들이 남기는 독과 상처가 사실적 그로테스크 미학을 낳는다. 그의 시는 우리 일상의 삶 속에 내재된 다양한 죽음의 사건들, 삶의 통증과 비애를 수반하는 사태들로 채워진다. 그의 시에는 죽음을 환기시키는 상황과 생의 통증을 유발하는 장소들, 육질만 남은 야수적 인간과 인간의 모습을 한 사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생의 소멸과 고통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며 대부분 시인 자신의 체험 장소, 직업현장에서 호출된다. 이는 시인에게 지나온 삶이 생산의 공간이 아니라 마모의 공간, 아름다운 온기의 공간이 아니라 차가운 상처의 공간이었음을 암시한다. 물론 기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선택과 배제의 과정을 거쳐 재구성된다. 과거의 것이지만 그 과거를 바라보는 시인의 현재의 몸과 의식, 주체의 욕망에 의해 기억은 왜곡되고 변형된다. 유홍준의 경우 많은 기억들이 고통과 비애, 분노와 참혹을 수반하는데 주로 아버지-어머니-나의 가족 삼각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아버지는 생의 가혹함을 낳는 폭력적 주체, 어머니는 그 혹독함을 견디며 속울음으로 일생을 앓는 자,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속으로 울고 분노하고 자학하는 자로 그려진다. 집 떠난 아버지와 화상을 입은 채 굶주림과 가난을 견뎌야 하는 어머니가 대립관계에 놓이고, 그 사이에서 나는 어머니를 연민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공포를 드러낸다. 유홍준의 시가 삶의 불구적 장면들을 그로테스크 이미지로 드러내는 것은 이런 가족사적 배경 때문일 것이다. 그런 어머니가 일흔넷의 나이에 자궁을 드러내는 수술을 한다. 연로하신 어머니를 간병하던 시인의 모습도 떠오르고, 스텐그릇에 담아온 어머니의 자궁을 바라보는 시인의 참담했을 마음도 충분히 짐작된다. 마음이 참 지랄 같았다는 표현, 이런 상황에서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이 있을까. 이런 비애와 고통의 상황에서도 끼니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게 우리네 삶이고 현실이다. 이처럼 유홍준의 시는 사실적 체험과 관찰을 충격적 상황으로 제시하여 우리 삶의 세목들을 혹독하게 응시하게 한다. 그의 시는 검은 공포의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얼룩진 기억들을 되살려내면서 시인이 마주한 삶의 참혹과 위악을 우리 또한 마주하게 한다. 독자 각자의 심부 바닥 깊숙이 가라앉은 기억의 침전물들을 떠오르게 하여 생의 근원과 죽음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의 시에 등장하는 낯선 장소, 인물, 사물 들은 단순히 현실을 재현하고 지시하기 위한 도구적 기표라기보다 삶의 핍진함과 참혹함을 드러내기 위한 해석적 기표에 가깝다. 상상에 의한 허구적 기표나 환상의 결과물이 아니라 시인의 절실한 몸의 파편들이고 상처의 흔적들이다. / 함기석 시인
죽음으로 가는 길이 점점 무섭고 외롭게 다가온다. 임종 실이라는 독방에서 홀로 죽음을 기다리는 어르신들을 간호하며 느끼는 감정이다. 인간은 수많은 인연과 관계를 맺으며 산다. 마지막 가는 길에는, 숨이 넘어 가는 변화를 알기 위해 들락거리는 간호사가 안식처가 되고, 살을 맞대며 케어를 해준 사람들이 주는 따뜻한 마음으로 위안을 받는다. 임종 실 방 이름은 세상에 은혜를 입고 가는 방이라고 하여 은혜 방이다. 평상시는 비어 있다. 며칠 전에 가신 분은, 말기 암 진단을 받은 어르신으로 시한부 선고 1개월 받고 요양원으로 오셨다. 배속에 바위덩어리 같은 암 덩어리는 어르신이 이기기에는 너무나 벅찬 상대다. 그것들이 치받아 식사 때마다 헉헉 거리며 호흡을 몰아쉬고, 소변색은 붉은 선홍색으로, 망가지고 있는 몸 상태를 여실히 보여줬다. 너무 아파 갈 때가 된 것 같다고, 이렇게 아플 수는 없는 거라고 하시지만, 어르신은 죽음에 대해 그렇게 수용적이지 않았다. 어르신은 정신력으로 잘 버티는 듯이 보였지만, 식사시간에 호흡이 되지 않아 입술색이 새파랗게 변하면서 은혜 방으로 전실 되었다. 인지가 분명한 어르신은 두려움에 불안정한 모습으로 두리번거리셨지만, 왜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직접 물어보지 않았다. 찬송가를 은은하게 흐르게 하여,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드리지만, 얼마나 위로가 될까. 침상머리를 올려라 내려라 반복하시며. 답답증에 이불을 덮어라 치워라, 다리에 베개를 넣어라 빼라고 하시며, 어떻게 해도 편하지 않은 작고 마른 몸을 바글바글 태우셨다. 단단한 암 덩어리 때문에 숨이 목까지 차올라, 간신히 들이 쉰 들숨을 몸을 흔들어 후 후 하며 내 뿜으며, "왜 이리 답답한지 모르것다."라며 괴로워 하셨다. 끝나지 않은 생에 대한 애착이 통증을 물리칠 것처럼. 새파랗게 변해가는 혀를 길게 빼고, 그 위에 죽을 떠 넣으면, 몸 안의 산소가 턱없이 부족하여 헉헉거리며 삼키시는 모습은 너무나 처절하여 가슴이 저며 왔다. "그만 드실까요." 하고 물으면, "아직 남았다"며 바닥을 보고 나서야 "그만 됐다" 라며 상을 물리게 했다. 그 상황에서도 이를 닦고, 틀니를 빼서 손수 닦아 끼시고, 약을 달래서 드셨다.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산소포화도 검사하는 기구를 빼지 말라고 하셨다. 혈압 체크하느라 팔에 두른 거프를 풀지 말라고 하셨다. 산소호흡기 줄이 비뚤어질까 손으로 바르게 꽂으시기도 했다. 그것들이 유일한 위안인 어르신은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없는 외롭고 무섭고 힘겨운 싸움에 지쳐가고 있었다. 선명한 총기가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있을까. 죽음이라는 공포감에 흔들리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멀찍이서 훔쳐 본 다음 가까이 갔다. 수치를 확인하고, 한 번씩 끌어안아 보기도 하고,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문질러 드리기도 한다. 탱탱하게 부어오른 다리와 발을 조금 옮겨 드리며, 편안하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깊게 몰아쉬는 숨은 느려지고, 죽음의 그림자는 서서히 어머니를 향해 오는 날 저녁에 내일 만나자고 인사하고 퇴근했다. 사려 깊고, 똑똑한 어르신은 수고했다고, 고마웠다고 가서 자고 오라고 하셨다. 그날 밤에, 우리 선생님에게도 잘 해줘서 고마웠다고 수고했다고 말씀하시고 가셨다 한다. 요양원이라는 곳이 죽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되돌려 생각하면 살 만큼 살았다는 증거도 된다. 살 만큼 살았으니 욕심 다 내려놓고, 이 안에서 우리끼리 살아내야 하는 법을 터득해야 할 것 같다. 인연의 끈을 서서히 놓아주고. 정을 세월에 희석시키면서, 요양원이라는 곳에서 애지중지 하는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사는 노년도 서럽지만은 않게 말이다. 그래서 죽으러 왔다는 굴레에서 해방하고, 새로운 인생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사실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잘 살다 간다고 인사하며 헤어지면 좋겠다.
[충북일보] 유교 사상이 뿌리 깊이 박혀있는 가정에서는 해가 갈수록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해마다 추석을 맞아 연례행사로 치르는 금초하는 일이 친족 간에 마찰을 빗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몇 년 전부터 간간이 이야기가 되어 왔지만 금년에는 더 강하게 어필이 되어 종친 간에 회의가 열리었다. 금초작업이 끝나고 식사 자리에서 연세가 아흔을 바라보는 집안 어른들에게 힘드시지요? 하고 여쭈었더니 '그래 이제 힘들어서 못 하겠다' 하시는 것이다. 올해도 예년과 별반 차이 없이 육십 오세 이상 되는 일가들만 금초 작업에 참여를 했다. 젊은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참여를 하지 않는다. 때는 이때다 생각하고 말을 이어갔다. "어떻게 하면 어렵지 않을까요?" 되물었다. "글쎄다" 고민을 하시는 모습이 안면에 여실히 나타났다. 대여섯 분이 그런 반응을 보였다. "방법이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상황으로 천년이 흘러간다면 관리를 할 산소의 수가 몇 개가 될까요? 지금도 젊은 사람들 참석을 하지 않는데 어르신들 돌아가시면 누가 산소 관리를 할까요?" 그 어려움은 얼마나 눈덩이처럼 불어날까? 눈앞이 캄캄하다. 제안을 했다. "조상 모시는 일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고 여러 조상들의 산소를 한 곳으로 그리고 작게 만들어 표시정도 나게 하면 작업하는 양이 혁혁히 줄어들어 관리에 어려움이 없겠지요? 그리고 산소가 있던 자리에 창고를 짓거나, 여분의 땅을 팔아 시내에 건물을 지어 상가 임대를 하면 수익이 생겨 그 수익금으로 조상 모시는 행사에도 시용하고 일가 간에 단합하는 행사에 사용한다면 어떨까요?" 어른들은 이구동성으로 한 마디씩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에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이 일들을 하신다면 후손들이 두고두고 칭찬을 할 것입니다. 평생을 조상님들 모시는 일에 지극정성으로 하시더니 돌아가시기 전에 자손들 고생 안 시키고 조상 모시라고 이렇게 하시었구나 하고 얼마나 좋아들 할까요?, 현재대로 그대로 하자고 하시면 두고두고 후손들이 뭐라고 할까요? "아저씨들 다 돌아가시면 바로 우리들이 나서서 그 축소 작업을 하겠습니다." 은근(慇懃)슬쩍 압력을 넣었다. 하고는 싶은데 선뜻 그렇게 하자고 먼저 말을 꺼내지는 못하는 눈치다. 오늘 결정하시기 어려우면 종회를 바로 열어 회의에 붙이자고 제안을 하였다. 한 아저씨가 나섰다. 회의는 무슨 회의 여기 거의 다 모였는데 여기서 찬반을 물어보자 하셨다. 종중 회장과 총무를 맡으신 분들이 진행을 하시도록 했다. 결과는 한 아저씨는 여러 사람이 그렇게 하자면 따라 가야지 별 수 있나 하셨다. 내심은 반대를 하고 싶은데 거의 다 찬성을 하니 슬그머니 꽁지를 빼는 눈치다. 이래서 묘지 크기를 대폭 축소하고 한 장소로 모아 모시는 일과 창고를 지어 임대를 하자는 의견이 통과를 시켰다. 산소 작업은 금년 겨울 오기 전에 마무리 하고, 창고 짓는 일은 겨우내 사업 관련 행정 절차를 밟아 내년 봄에 건축을 하는 것으로 정했다.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면 친족들이 다들 좋아할 것이다. 앞으로 진행되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획기적으로 변화를 가져오도록 방향을 잘 잡아 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 진다면 가까운 지손이나 주변 분들에 전파되기를 바란다. 전 산야에 산재되어 있는 산소들이 많이 없어져 자연을 되살리는 효과와 산소 관리를 하는데 따른 시간과 노력, 비용이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미래 세대들에게 좋은 선례를 남기게 될 것이다. 유교 문화의 혁명적 변화를 기대를 해본다.
[충북일보] 함성호의 시는 20세기 현대문명의 박제된 삶과 인간의 환멸을 그린 우울한 지도다. 화려한 빛깔의 빌딩숲은 죽음의 유적지, 환각과 약물이 만연하는 비만한 성지(聖地)로 그려진다. 그의 시는 삶과 죽음, 헛것과 실재, 신화와 현실, 빈집과 무덤이 뒤섞인 건축구조물이다. 혼종성과 복잡성, 종교와 신화의 상상, 불교의 공(空)과 윤회사상 등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 그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 종교, 철학, 미학을 다채롭게 콜라주하여 재구성한다. 건축학적 상상, 종교적 상상, 신화적 상상을 뒤섞어 현대문명의 폐허들을 전위적 해체의 방식으로 형식화한다. 이를 통해 권위적 모더니즘 예술을 전복시키는 반(反)모더니티의 세계, 반(反)건축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런 그의 파괴 시학은 시집 『聖 타즈마할』과 『너무 아름다운 병』 에 잘 드러나 있다. 고대 무굴제국 왕비의 묘지인 타지마할을 시인은 죽음의 집에서 광기가 낳은 탐미주의 공간, 야만적 죽음의 욕망으로 채워진 허상의 위조공간임을 드러낸다. 이런 부정과 파괴의 정신이 안으로 깊어져 내면화된 것이 병(病)이고 이 치유 불가능한 병은 현대문명에 대한 시인의 분노, 욕망,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이 깊고 아픈 병을 통해 시인은 황량한 인간 내면의 폐허를 목격하고 자신 또한 영원한 시간 속의 찰나적 존재고 꿈의 환영(幻影)임을 뼈아프게 자각한다. 그러니 병은 자아의 존재와 세계의 실상을 자각케 하는 아름다운 병이다. 이 불치의 병의 번뇌에 사로잡힌 채 시인이 도착하는 곳은 속초 바다다. 함성호 시의 파괴공학 반대편에 어머니로 표상되는 가난한 유년과 고향집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고향 또한 폐허로 그려진다. 이 폐허의 바다에서 그는 몽환적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고 그곳이 세상의 끝, 죽음의 귀착지라는 절망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이 죽음의 폐허지에서 그는 생명의 물소리를 듣고, 다시 잉태의 성지로 재탄생시킨다. 즉 함성호 시에서 공간은 계속 공간을 바뀌어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집은 몸을 바꾸어 새로운 집으로 환생한다. 하나의 상처 공간이 또 다른 색깔과 문양의 상처 공간으로 변주된다. 언젠가 그는 말했다. "모든 집은 상처였다"고. 집과 무덤은 주거공간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산 자의 집과 죽은 자의 집, 세계는 늘 집과 무덤의 동거지고 이 혼종의 공간에서 시인은 죽음을 자연의 신성한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삶은 죽음을 반복한다. 이 생 사의 윤회는 꼬리를 입에 문 뱀처럼 끝없이 반복 순환된다. 이 징그러운 윤회의 원운동이 그의 시 저변에서 공허와 아픔과 사색을 낳는다. 세계는 처음부터 텅 비어 있고 나는 본디 혼자라는 뼈아픈 자각, 그런 부재와 고독 속에서 만물은 흐른다. 인간도 인간의 육체도 사랑도 번뇌도 꿈도 시도 흐른다. 그의 말처럼 자연에는 본디 예(禮)가 없고, 인간은 모두 가설적 존재인지 모른다. 너는 나의, 나는 너의, 상상 또는 환몽 아닐까. 함기석 시인
나희덕의 시는 화려한 수사나 기교가 거의 없다. 구조 또한 복잡하지 않고 단아한 시의 표준규범 안에서 펼쳐진다. 그런데도 슬픔의 감정을 낳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왜 그런 걸까? 사물이나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 연민의 감정이 실려 있고 그것이 과잉되지 않은 절제된 문장으로 선명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나무, 재가 되어 사라진 집처럼 지금은 부재중이지만 계속해서 시인의 몸을 맴도는 어떤 것들을 시적 대상으로 택하기 때문이다. 즉 그녀의 시는 부재하는 풍경들에 대한 시인의 사유응집체이자 시인 자신의 또 다른 육체이다. 그렇게 풍경의 세계는 시인의 몸과 섞여 슬픔을 자아내는 장소가 되고 시간이 된다. 이는 그녀의 시가 사라진 존재들, 부재하는 대상들로부터 눈물과 모성으로 건져 올린 서정의 언어임을 암시한다. 그녀에게 서정은 인간에 대한 공감이며 삶에 대한 물음인 셈이다. 서정은 나무속의 물기와 같다. 어떤 사물, 어떤 사람, 어떤 시간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시인의 몸과 마음에 더욱 생생하게 물기를 띤 존재로 살아난다. 즉 대상의 소멸은 사라짐이 아니라 시인의 육체 안으로 깊어져 시의 풍경을 이루게 된다. 죽음, 부재, 망각 등의 주제를 다루는 시에서조차 생명에 대한 희망과 따뜻한 물의 기운이 잔잔히 흐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또한 모성은 나희덕 시의 존재 기반이다. 삶의 근저고 심연이고 쉽사리 가 닿을 수 없는 자하의 샘과 같다. 이 모성의 물줄기를 지상으로 뽑아 올리는 자가 시의 화자들이다. 여성의 몸을 지닌 이 화자들은 노출과 은폐, 의식과 무의식, 생명과 죽음, 말과 침묵 사이에서 끊임없이 출렁이며 움직이고 길항한다. 그 과정이 곧 시인의 사랑이고, 이런 모성의 사랑은 시 「누에」에 잘 드러나 있다. 작은 누에에 비유된 어미의 굽은 육체,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뽑아내고 빈 고치가 된 누에의 몸은 슬픔 그 자체다. 비단실 두 가닥으로 표현된 두 딸이 어미인 빈 누에고치를 감싸는 모습은 짠한 감동과 울림을 낳는다. 그들의 모습을 나(시인이자 화자)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있는데, 나의 몸은 곧 아기를 출산할 만삭이다. 두 자매와 어미가 다가올수록 그들과의 거리는 점점 없어지고 결국은 그들과 나는 일체화된다. 이 서정적 동일화를 시인은 두 비단실에 휘감겨 따라간다고 말한다. 이는 시인이 두 자매의 어미에서 자신의 어미를 떠올리고 자신의 어미 또한 자식들을 위해 몸 속의 실을 다 뽑아내고 빈 누에고치가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어미의 희생이 낳는 죽음의 쇠락 속에서 또 다른 생명의 시작을 읽어내고, 자신 또한 언젠가는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빈 누에고치가 될 것임을 예감하는 시인의 눈길이 울림을 낳고 있다. 모성이 낳는 사랑과 희생이 세상을 순환시키는 아름다운 힘임을 보여주는 감동의 시다. 함기석 시인
퇴근길에 신호등도 없는 큰길에서 앞차가 가지를 않는다.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머리를 오른쪽 앞으로 내밀어 본다. 할머니 한 분이 빈 박스 몇 개를 실은 유모차에 의지하여 길을 건너고 있다. 다리가 꼬부랑꼬부랑 휘어져 고꾸라질 것 같으면서도 천천히 느긋하게 건너신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앞만 보고 건너시는 것을 보니 찻길을 가로질러 가는 것도 할머니의 당연한 권리라고 느껴진다. 할머니의 걸음걸이를 보니 나의 안짱다리가 생각났다. 초등학교 때 나는 앵고다리(안짱다리의 경상도 방언)라고 놀림을 받았다. 저학년 때는 십 오리 길로 학교 갈 때에 자주 넘어져서 형이 내 가방을 들어다 주었다. 비 오는 날 미끄러운 논둑길을 가다가 넘어지면 형은 내가 메기를 잡았다고 놀렸다. 신발은 항상 뒤쪽 바깥 부분이 닳아 구멍이 났다. 중학교 때는 친구들 보기가 낯부끄러워 걸음걸이를 바르게 하려고 애써 팔자걸음을 하였다. 사람마다 얼굴이나 성격이 천차만별이듯이 걸음걸이도 각양각색이다. 마음이 편하고 느긋한 사람은 신발을 질질 끌며 걷고, 매사에 자신 있는 사람은 뒤꿈치로 쿵쿵거리며 걷고, 자상하고 조용한 사람은 앞발로 사뿐사뿐 걷고, 기쁘고 활기찬 사람은 토끼같이 껑충껑충 걸으며, 고집이 센 사람은 발을 벌리고 팔자걸음으로 걷는다. 술 한 잔 마시고 온 세상이 내 것 인양 걷는 갈지자(之)걸음도 있다. 내 인생의 걸음걸이도 앵고다리 걸음처럼 많이 틀어졌다. 색약인 줄 모르고 기계 공고를 지원하여 낙방한 것은 내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고향에 가까운 대학을 두고도 객기로 동기 하나 없는 대학에 진학하고, 직장을 고향으로 옮기려다가도 그만두기도 한 것은 내가 선택한 길이지만 후회스러운 길이었다. 직장에서 원치도 않았던 전산화 사업을 맡아 밤낮없이 매달리기도 했던 것은 주어졌지만 거부할 수도 있었던 길이었다. 성질이 급해서 삶의 길을 잘못 택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편안한 길, 쉽게 가는 길, 표가 나는 길을 두고도, 어렵고 힘들게 둘러가는 길, 표시 나지 않은 길을 걸었다. 고향에 갔다가 안개가 자욱하여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은 깊은 밤에 대진 고속도로로 돌아온 적이 있다. 길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차의 속도계를 보지 않으면 속도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눈앞에 보이는 길만 따라 운전하였다. 그러다가 불빛이 환한 가로등이 나오면 나들목이었다. 갈림길을 알려주는 반가운 불빛이었다. 나들목으로 나가지 않아도 내가 바로 가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인생길과 같다고 생각했다. 앵고다리 걸음처럼 틀어진 내 인생을 바로 펴 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가수 한영애님의 '잠자는 하늘님이여… 조율 한번 해주세요.'라는 노래를 따라 어쭙잖게 내 인생을 조율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누구는 간절히 청하면 들어 주신다는 데, 나에게는 응답이 없었다. 그러면서 원하지 않는 틀어진 내 인생길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선택한 길을 후회할 때도 있었지만 악한 것도 선한 것으로 변화시켜주신다는 믿음으로 살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성경 말씀이 밤중 고속도로 나들목의 가로등처럼 다가왔다. 짧지도 않은 인생길을 걸으면서 재물과 명예를 추구하고, 일로 인정받으려 했다. 마음은 이것이 아닌데 하면서도 몸은 그렇게 향하고 있었으니 인생 걸음이 틀어진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빵을 청한 것이 아니라 돌을 청하였고, 생선을 청한 것이 아니라 뱀을 청하였다 는 것을 느꼈다. 쓸데없는 것들을 많이 지고 힘들게 가려 했다.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작은 것과 적은 것에 만족하며 살고 싶다. 이제야 내가 길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걸을 때는 올바른 자세로 걸어야 한다. 잘못 걸으면 이상하게 보이고, 신체의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며, 무릎관절, 골반이나 척추질환도 유발된다고 한다. 턱을 들어 올려 시선을 전방 30m 정도 앞을 보고 가슴, 등, 어깨를 곧게 펴고 걸어야 한다. 아내는 내가 걸을 때 어깨가 많이 수그러진다고 어깨를 쫙 펴고 걸으라고 충고한다. 전방을 바로보고 어깨를 펴고 걸어야겠다. 앞으로도 내가 선택해야 할 길이 많이 남았으리라. 꼬부라진 다리로 앞만 보고 가는 할머니처럼 어떤 길을 가더라도 당당하게 가야겠다.
거리거리에 사람의 물결이다.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인가. 정지 버튼이 없는 시간을 따라 모른 채 살아가는 이방인들이 흘러오고 흘러간다. 멀고 가까운 그 많은 사람들 사이사이에 벽이 있다. 당신과 나 사이, 이쪽과 저쪽의 경계다. 공존하되 완벽한 무관심 속에서 자기만의 방식대로 삶을 풀어가는 현대인. 바야흐로 혼자서도 외롭지 않은 세상이 도래했는가. 세대 간의 벽은 더욱 심각하다. 윗사람을 대하는 젊은이들의 냉시는 실버세대의 보편적 상실감을 확인사살한다. 지하철노인폭행사건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아이가 예쁘다고 쓰다듬는 할머니승객을 아이엄마가 폭행했다는 인터넷뉴스였다. 갑론을박으로 서울장안이 들끓었다. 그날 오후. 동네 슈퍼다. 삼십대 여인네 몇몇이 모여 있는데 칠십 중반쯤으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들어왔다. 여인네들을 의식한 할머니는 다짜고짜 노인폭행사건을 거론하며 웅변가처럼 언성을 높였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말세라고 탄식하던 할머니는 저희는 부모도 없느냐며 흥분하다가 오이 한 봉지 사들고 나갔다. 여인네들은 할머니의 퇴장을 기다렸다는 듯 즉각 반응을 보였다. 이구동성으로 폭행녀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키우는 자식인데 감히 불결한 노인이 만질 수 있느냐는 격앙된 목소리였다. 간만의 차이로 일촉즉발의 위기는 넘겼으나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세대 간의 불통이 살갗에 박힌 가시만 같았다. 소통이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새천년 이후 신구세대는 더더욱 보이지 않는 벽으로 극렬히 갈리고 있다. 무시와 편견과 불신이 철옹성벽을 쌓아올렸다. 젊은이들은 노인세대를 부정적으로 차별화하고 노인세대는 젊은 세대를 은근히 기피한다. 그러고 보니 남의 아기가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털끝하나 건드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세상은 급변하고 사람들의 사회적 의식도 약삭빠르게 진화한다.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실버세대는 우울하다.초등생아이가 하도 귀여워서 학교이름을 물었다가 '개인정보를 말할 수 없다' 는 대답에 어마뜩해져 물러났다는 할머니 이야기도 있다. 이렇듯 아이들에게마저 번지는 불신의 세태는 기성세대가 저지른 맹점이다. 어찌하면 아이들의 불안정한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으랴. 갈수록 당당한 여성이 대접 받는 한국사회다. 아들딸을 차별하지 않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니 그러지 못할 이유는 전무하다. 그러나 간혹 일부 젊은 여성들의 당돌한 언행으로 세상이 시끄러울 때면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내 자식들도 걱정스럽다. 사람은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다. 젊음이 아름다운 이면에는 노인의 생애가 배경이 되고 천년 살이 은행나무도 뿌리의 힘으로 버티어서있다. 함부로 상처를 주고받을 관계란 있을 수 없다. 제아무리 세상이 달라진다 해도 위아래를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인간의 근본 도리일진대 그 불변의 진리를 모르는 이야 있겠는가. 불통 불화의 거대한 벽. 보이지 않는 벽은 허물어져야한다. 세기를 넘어 존립하는 남북의 벽이 무너진다 해도 세대 간의 벽은 그대로일지 모른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젊은 세대를 키운 건 꼼짝없는 부모세대다. 부모와 자식은 최우선적으로 화합해야한다. 화합하지 못하는 집단이 어찌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겠는가. 그리운 건 옛날이다. 초가지붕에 박 넝쿨 오르고 욕심도 거짓마저도 순수했던 그 시절. 칼국수가 돌담을 넘던 어린 날의 추억으로 오늘의 소외감을 달래본다. 세월의 거름종이에 여과된 실버세대의 지혜가 대접받는 세상, 어디 없을까.
장석남의 시에는 늘 허기와 적막감이 맴돌고 상처와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상처는 주로 유년기의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시인이 그 기억의 공간 속으로 들어갈 때 나타난다. 반면에 아름다움은 그 상처들을 현재 시점에서 거리를 두고 회화적으로 바라볼 때 나타난다. 그는 어렸을 때 많은 시간을 혼자 보냈고, 부모와 형제들과 흩어져 살면서 내성적인 성격이 되었고, 문학에 관심이 많아졌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유년기의 이런 가족상실 체험은 시에서 내면 지향성, 모성에 대한 갈망, 여성적 서정의 표출 등으로 나타난다. 흥미로운 건 유년기의 아픈 체험이 삶의 바탕에 짙게 드리워진 시인들의 경우 대부분이 어둠의 서정을 구사하는데 그는 아픔을 말하면서도 빛이 드리워진 밝음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유년의 시간과 사라진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그는 서정의 풍경으로 시각화한다. 그는 이미지로 교감하고 사유하는 시인이다. 시에 철학적 성찰이나 초월적 사유가 들어갈 때도 그는 섣부른 진술로 설명하지 않고 이미지가 있는 풍경으로 대체한다. 사상에 의해 시의 심미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는 사라진 것들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데 현재에 없는 것들과 사라진 시간대에 애수의 향수를 느낀다. 나아가 말이 사라진 침묵의 세계를 동경한다. 즉 그에게 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고 침묵을 지향한다. 그의 시에 여백이 많고 그 여백이 울림을 낳는 공간이 되는 것은 말과 침묵, 자연과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이런 태도 때문 아닐까. 장석남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대상 중 하나가 집이다. 그에게 집은 유폐와 귀순의 욕망이 투사된 공간, 쓸쓸함과 적막을 낳는 고독의 공간이다. 일반적으로 집은 삶의 휴식처이자 피곤한 몸을 쉬게 하는 모성적 공간이다. 그런데 그의 시에 나타나는 집은 안락함과 온기를 간직한 존재의 처소이기보다는 소외의 공간, 유폐의 공간에 가깝다. 가족과 사회로부터의 격리감, 자아의 고립감을 드러내는 장소로 등장한다. 이는 시인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지속적으로 소외와 외로움을 느끼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런 쓸쓸함은 여러 편의 시에 자주 나타난다. "군불을 지핀다/ 숨 쉬는 집 /굴뚝 위로 집의 영혼이 날아간다/ 가출(家出)하여, 적막을 어루만지는 연기들"(시 「군불을 지피며 1」 부분). 이런 적막과 고독의 정서는 초기의 대표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에도 잘 드러나 있다. 찌르레기는 시골의 낮은 평야나 야산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식성 새다. 주로 곤충과 나무열매를 먹고 번식기 외에는 대부분 떼를 지어 다닌다. 시인은 이 찌르레기 새떼를 봄 하늘을 물어오는 존재로 인식하고, 이들의 울음소리를 쌀 씻어 안치는 소리로 감지한다. 관찰과 비유가 참신하다. 나아가 저문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 새떼 속에서 시인은 환한 봉분을 본다. 흩어졌다 모이는 새떼의 모양에서 둥근 봉분을 연상했거나 시인의 가슴에 자연스럽게 포착된 무덤 이미지일 것이다. 공중의 새떼에서 둥근 무덤을 연상하고 그 안에 누워 있는 누군가의 주검을 떠올리고, 나아가 언젠가 저 새들이 자신 또한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으로 데려갈 거라고 시인은 읊조린다.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에서 인간의 존재와 고독, 시간과 죽음을 사유하는 시인의 눈길이 쓸쓸하다. 그런데 정작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봉분 자체보다 망명이다. 환하고 둥근 죽음의 세계, 외로움과 눈물의 세계로 망명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 상태다. 이 아픈 마음이 시의 적막과 쓸쓸함을 깊게 한다. 그렇게 또 저녁은 깊어가고 찌르레기 떼는 떠나고, 시인의 가슴 속 시골집에서 누군가 쌀을 안칠 것이다. 아무도 없는데, 여전히 지금도, 아궁이 앞이 환하다. /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백무산은 철저한 리얼리즘 세계관을 바탕으로 욕망과 폭력에 억눌린 현실을 냉철하게 응시하고, 혁명의 그늘 속에서 싹트는 생명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그는 자본의 폭력과 노동의 소외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가 노동자의 정체성 문제, 지배 권력에 대한 대결의식, 역사 속 비극의 사건들, 민초들의 생생한 노동현장 등을 깊이 있게 조명한다. 그는 노사관계를 적대적 갈등관계로 보면서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의 당위성을 주창하는데 이때 그가 노동계급의 당파성을 분류하는 기준은 밥이다. 밥은 시적 은유이면서 생존권과 권력관계를 형성하는 물적 토대다. 밥을 통해 자본 권력의 횡포가 자행되고 억압과 피억압의 갑을관계가 형성되고 노예적 권력구조가 항구화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현실을 '피땀 어린 고귀한 생산자의 밥의 나라'와 '착취와 폭력의 수탈자의 밥의 나라' 즉 밥을 받는 계급과 밥을 주는 계급으로 양분하고 이 둘 사이의 대립적 갈등관계가 노사관계이며 이것이 자본권력의 기본구조라고 본다. 때문에 거대 자본과 권력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만국의 노동자는 형제가 되어 단결해야 한다고 그는 주창한다. 박노해, 백무산 등으로 대변되는 1980년대 노동 시편들은 민주화 열기의 고취, 분단체제 인식과 통일의식 함양, 리얼리즘 세계관의 적극적 개진, 노동해방 운동의 심층화, 서구 매판자본에 대한 비판의식 고취 등 긍정적 역할을 했다. 반면에 불구적 당대를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 대안세계를 제시하지 못한 점, 역사적 사회적 상상력의 확장에 따른 개인 감각의 획일화, 선전 선동에 치우진 시적 주제의 경직화, 이념과 사상의 강조에 따른 사적 욕망의 홀대, 언어 미학의 고갈 등 부정적 측면 또한 드러냈다. 이런 일장일단의 상황 속에서 백무산은 첫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1989)를 출간한다. 이 시집을 통해 그는 노동 계급의 정체성을 신랄하게 파헤치고 노동문학의 시각과 방향을 적극적으로 제시한다. 이 문제적 시집은 1980년대 파쇼적 군사정권 체제에서 유입된 마르크스 세계관의 시적 반영물이며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과 계급성을 자각케 하여 삶의 변혁을 추동한다. 이후 출간된 두 번째 시집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1990)에서는 1988년 말부터 1989년 초까지 약 4개월여에 걸쳐 진행된 울산 현대중공업 대파업투쟁을 다룬다. 이 두 권의 시집 출간 이후 백무산은 노동자들의 핍박받는 삶의 조건과 모순들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 문제, 인간 존재의 근원에까지 사유의 스펙트럼을 넓혀나간다. 그 결과가 세 번째 시집 '인간의 시간'(1996)이다. 이 시집을 통해 그는 인간과 자연과 노동의 새로운 조건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비판적 담론을 낳고 창조의 근본원리에 대해 재탐색한다. 위의 시 '인간의 시간'은 시인의 이런 시각과 사색, 전복적 사유가 진술된 표제작이다. 대지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을 거역하고 배반하고 이런 단절의 꿈이 역사를 추동하는 동력이 된다. /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겠노라고 선언을 했다. 내가 또 실수를 한 모양이다. 술을 마시고 좀 취하면 동네방네 전화하는 습관이 있다. 편안하다고 생각한 아들에게 전화를 해서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 어려운 점은 없는지 등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을 했는데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뒤이어 사회생활은 이렇게 해야한다. 직장동료들하고는 이렇게 지내야 된다는 등 사회생활 전반에 대하여 장황하게 훈계를 한 모양이다. 횡설수설 하면서 이야기를 했고, 급기야는 좋은 여자를 만나서 장가가라는 명령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참에 이런 식으로 전화를 할여면 앞으로 전화하지 말란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내가 뭘 어떻게 했길래 그저 사회생활을 원만하게하고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라는 뜻에서 충고 겸 조언을 해 주었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되었단 말인가. 앞으로 만날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게다. 아버지를 안 보겠다는 것이다. 실수 했다고 할까. 아님 호통을 칠까라고 생각하다가 참기로 했다. 아들이 고등학교 삼학년 때다. 말 안 듣는다고 손이 올라갔다. 내리 치려는 순간, 내 손을 잡더니 "폭력은 아니 되옵니다" 하고 만약에 손찌검을 하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난리 피운 적이 생각났다.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며칠 후에 드디어 일이 터졌다. 카톡방, 페이스북, 밴드 등, 그동안 같이 대화하던 대화방을 모두 탈퇴하고 메시지 수신거부를 하였다. 이건 아닌데... 이제 아들 얼굴도 못보고 영영 헤어지면 어쩌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지엄한 아버지 말을 안 듣고 반항을 한 단 말인가.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난 여태까지 아버지한테 대드는 것은 죽음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아버지한테 반항한단 말인가. 부모님께서는 부모님 뵈러 고향에 오지 말라고 하셨다. 전화도 자주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니 전화도 안 드리고 고향집에도 자주가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건 아니라고 한다. 그건 자식이 힘들까봐 그렇게 하신 말씀이다. 오지 말라고 해도 뵈러 자주 가야되고 전화도 자주 드려야 하는 게 도리라고 한다. 난 부모님 말 잘 듣고 잘 따라하는 게 효도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나이를 먹으니 부모 말씀을 액면 그대로 들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요즈음은 오지말래도 간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면 항상 옆자리에 않으셔서 지시하곤 하신다. 왼쪽 오른 쪽 하면서 지시를 하신다. 말로 하면 좋겠는데 손가락을 움직여 명령을 하신다. 엄지손가락으로 왼쪽, 오른쪽으로 누이면 그 쪽으로 가야한다. 당연히 아버지 손가락을 힐끗 보면서 운전을 한다.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하루는 큰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네비는 왼쪽으로 가라하고, 아버지는 손가락을 오른쪽으로 누이셨다. 잠시 망설였다가 요즘 네비 괜찮으니깐 아버지의 판단력이 좀 시원찮으시니깐 하는 생각을 잠시하고 핸들을 왼쪽으로 틀었다. 그 순간 난리가 났다. 당신 말을 안 듣고 마음대로 내다는 것이다. 불호령과 함께 고성이 나고 난리가 났다. 뒤에 앉아 있던 와이프가 그럴 수 있지 않냐고 거들었는데,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어버렸다.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무시한다고 또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떻게 하겠는가. 둘이는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리셨던 모양이다. 그 후에 나를 보는 눈길이 예전과 다르다. 괘씸하다는 것이다. 암튼 아버지 말을 한번 안 들었다가 죽을 뻔했다. 아버지는 본인이 생각하시는 대로 판단하고 그렇게 밀어붙이시는 타입니다. 고지식하시고 타협이라고는 있을 수 없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으니 나 두 그런 습성이 있는 지도 모른다. 그게 아들한데 되물림 되어서 아들이 견디다 못해 뛰쳐나갔나 보다. 살아남으려면 환경을 탓하지 말고 자신을 환경에 적응 시키라고 알고 있다. 그러면 내 생각을 바꾸고 내 행동을 바꾸어야하는데 지금까지 60 평생 동안 만들어진 이 성격, 이 습성, 이 행동 패턴을 무슨 수로 바꾼다 말인가. 난감하다. 무릇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는데 이제라도 진지한 대화를 통하여 풀어야겠다. 술을 안 먹으면 얘기를 못하는 벙어리 인지라(이것도 아버지 닮았음) 술 먹고 이야기하다 보면 싸움 날 것이 뻔하다. 어찌할 건가· 데미안을 한 번 더 읽어야하나!
[충북일보] 함민복(1962~ )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타락한 자본주의 현실을 비판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자 세상을 인간적 연민으로 감싸 안는 포옹의 행위다. 그는 속악한 자본주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폭력과 부조리, 현대인의 소외와 타락을 예의주시하여 유머와 풍자의 언어로 처리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시인의 몸에 인간과 세계를 끌어안으려는 사랑과 온기의 피가 도도히 흐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 시인이란 세계의 암울한 그늘들을 직시하는 자이고, 은폐하거나 외면한 것들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드러내는 자이고, 자연과 인간이 간직한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게 상기시키는 자이다. 이런 정체되지 않는 생각이 그의 시세계의 변화를 낳는 근본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의 초기 시는 물신화된 자본주의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한다. 유머와 해학, 재치 있는 언어감각, 가볍고 장난스런 말놀이 등으로 현대사회의 병든 치부들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1시집 『우울氏의 一日』(1990)에서 시인은 소통 부재의 현실 때문에 밀폐된 공간 속에 은거하는 자아를 등장시켜 현실을 희롱하고, 2시집 『자본주의의 약속』(1993)에서 시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되어 가는 현대인들의 초상을 해학적으로 그려내어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폭로한다. 세계와 현실에 대한 시인의 회의적 태도는 3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1996)부터 변모한다. 이전 시들이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과 풍자, 세계와 대립의 각을 세웠다면 3시집부터는 대상과의 화해와 합일을 지향한다. 세계와 자아의 갈등이 아니라 일체화, 대립이 아니라 동일화를 욕망한다. 문명비평과 우울증을 떨쳐버리고 존재의 안쪽을 좀 더 내밀하게 들여다본다. 지독한 사랑의 길을 거친 자의 고통이 스미어 있는 시집인 셈이다. 이후 4시집 『말랑말랑한 힘』(2005)을 통해 그는 서정의 세계로 더욱 깊게 뿌리를 뻗는다. 강화도 생활이 토대가 된 강화도 생활보고서 성격의 시집인데 부드럽고 아름다운 서정의 온기를 물씬 느낄 수 있다. 강화도 동막리 사람들의 신산한 삶,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개펄에 대한 시인의 사유가 울림을 준다. 5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2013) 역시 부드러운 서정의 힘이 돋보이는 시집이다. 가난한 삶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지피며 시인은 타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꿈꾼다. 삶의 신산한 경험들이 낳은 실존론적 사유가 펼쳐지며 따뜻한 공감과 잔잔한 울림을 준다. 함민복의 시는 초기의 물질자본주의 비판에서 출발하여 그립고 눈물겨운 서정의 세계로 계속 변모해 가고 있다. 가난한 자들의 소외된 삶, 삶의 국면마다 스미어 있는 슬픔의 스냅사진들이 독자의 마음을 울컥하게 한다. 그의 시는 때로는 날카로운 비수 같고 때로는 재밌고 웃긴 풍자적 야담 같고 때로는 짓궂은 아이들 장난 같고 때로는 한없이 아프고 눈물겹다. 그의 시 밑바탕에는 봄비처럼 따스한 눈물과 슬픔, 시인 특유의 '선천성 그리움'이 배어 있다. 오늘 소개하는 시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도 그런 감동과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현실의 그늘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사실적으로 인화된 기록사진 같다. 만학도인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세방으로 이사하는 형님네 부부, 리어카에 실려 옮겨지는 그들의 가난한 세간들, 아기가 잠든 사이 밀가루 반죽으로 짜장면을 만들어 급히 배달을 나가는 시장 골목 중국집의 젊은 부부, 이들 삶의 분주한 모습 하나하나가 모두 인간적 연민과 희망, 감동과 반성을 자아낸다. 짜장면을 먹으며 이들을 바라보던 시인의 순수하고 여린 눈망울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했으리라. / 함기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