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은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인간의 절대고독을 탐색한 시인이다. 그는 명징하고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여 관념을 사물화하거나 반대로 사물을 관념화하는데 능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순수와 고독의 세계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자연과 인간의 동반자적 관계를 추구한다. 그의 시세계를 이루는 중심 주제는 역사와 현실인식, 자연과 사물의 견고성 탐구, 존재론적 고독, 초월과 구원의 문제 등으로 요약된다. 그의 시는 대체로 나뭇잎, 낙엽, 재 같은 삶의 무상함을 상징하는 이미지와 뿌리, 열매, 보석 같은 단단한 이미지가 대립하면서 갈등과 긴장을 유발한다. 김현승이 처음 시를 쓰던 1930년대는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같은 서구 모더니즘 문학이 유입되던 시기다. 일제의 탄압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상황에서 그는 식민정책에 무기력한 암울한 현실과 자연을 새롭게 노래한다. 이때 그는 시의 중심에 산, 강물, 나무, 바위, 바람 같은 자연물을 두지 않고 인간을 세워 민족감정을 표출한다. 당시 김현승은 누이동생과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함께 투옥되는데, 감옥에서 동생이 죽으면서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이를 계기로 그는 7~8년 정도 절필한다. 해방을 계기로 1949년부터 그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고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구한다. 그에게 1960년대는 신앙과 현실 사이의 갈등이 가장 고조된 시기였다. 종교에 대한 회의와 심리적 갈등이 깊어지면서 그는 신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빠져들었고 극심한 종교적 상실감 속에서 그는 절대고독을 체험한다. 신앙의 세계에서 방황하면서 인간에 대한 한계와 동정을 시로 표현한다. 이 시기에 그는 인간의 본질적인 생명을 고독으로 이해했으며, 근원적인 출구가 없는 절대고독의 세계에 탐닉한다. 그에게 절대고독은 감상적 허무의식(虛無意識)이 아니라 자신을 재발견하려는 인간 본질에 대한 추구의지 또는 자유의지가 낳은 절박한 결과였다. 결국 신의 무한성이나 영원성이 실재하지 않음을 그는 깨닫는데, 이는 무한이나 영원도 결국 생명과 함께 끝난다는 무신론적 세계관과 맞닿는다. 그러나 1973년 둘째 아들 결혼식장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그는 다시 기독교 신앙으로 귀의한다. 이후의 시기는 영혼과의 대화기, 생의 정리기였다. 심신이 모두 병약해진 그는 신앙의 심오한 세계를 체험하면서 지나온 삶들을 참회하여 순수한 신앙시를 쓴다. 절대고독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후 종교적 회의와 자기부정을 통해 그는 다시 신의 품으로 회귀한 것이다. 그는 고백한다. "생명을 거두는 날까지 나는 또 이러한 시를 쓸 것이다. 나의 생애에서 시를 빼어버리면 나의 일상생활은 빈 껍질과 같은 것들이다." '마지막 지상에서'는 김현승이 작고하기 두 달 전인 인 1975년 2월 '현대문학'에 발표된 시다. 지상에서의 삶을 정리하려는 시인의 평안한 마음이 긴 울음을 남기고 해가 진 지평선을 넘어가는 산까마귀 이미지로 그려져 있다. 죽음을 앞두고 겸허하게 세상과 자연을 수용하는 시인의 관조적 태도가 엿보이고, 삶을 되돌아보며 반성의 기도를 드리는 시인의 모습이 여백에 정제되어 있다. 그가 생의 마지막 시기에 쓴 시들은 신과 영혼의 묵언의 대화, 생명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나온 아픔이 스미어 있다. /함기석시인
휴일은 언제나 마음 놓고 즐겁게 쉴 수 있기 때문에 기다려지곤 한다. 예전에는 추운 겨울이면 따뜻한 아랫목이 최고였는데 지금은 어떤가. 아랫목은 점점 퇴화해가고 첨단 난방기기가 보급되어 예전처럼 정감은 오지 않는다. 난방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서 맘대로 난방을 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런저런 생각에 뒷산을 탐방해 보기로 하고 아들과 집을 나섰다. 이곳으로 이사와 주변이 궁금하기도 하거니와 낯선 곳을 적응하기 위해선 처음으로 산을 올라갔다. 크고 작은 바위며 나무들이 흰 눈을 덮어쓴 채로 마치 깊은 묵상에 잠겨있는 듯하다. 산은 언제나 푸근하다. 누구든 산을 오르고 나면 즐거움에 산행을 하고 싶어진다. 요즘은 산을 개간하기 위해서 아니면 높은 산은 임도를 개설하여 쉽게 편히 오를 수 있어 좋기도 하다. 낯선 이방인의 인기척에 놀란 개 사육장에서는 난리가 났다. 올겨울 눈이 제법 쌓인 게 처음이다 보니 초행길이라 불편함도 크다. 하얀 눈을 밟으며 아들이 즐거워하는 정감이 포근하다. 초입을 지나 서서히 숨이 차오른다. 어디나 그렇겠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숙연함 같은 것이 겨울 산에는 있다. 겨울 산은 봄과 여름 가을 산에서 느끼던 풍경과는 확연한 차이가 난다. 겨울잠은 얼마나 순도가 높은 것일까? 열반이라는 말의 의미의 한쪽은 저런 잠의 깊이와 절실한 순수성으로 형상을 드러내는 것일까. 겨울 산은 깊은 명상 속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계절이 변할 때마다 색다른 풍경의 아름다움을 동경했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아 많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늘 머릿속에는 상상의 풍경을 담아 보고 그린다. 지금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선 나무든 동물이든 몇 겹의 두툼한 옷으로 무장을 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그것은 우리네 삶과도 다르지 않다. 계절의 변화는 모든 생물은 생사고락인 것에 의미를 두며 살아간다. 삶이란 살다 보면 이러쿵저러쿵 온갖 핑계거리를 만들어 주위 시선을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볼품없는 외모로 중년에 접어들면서 더욱 메말라가는 몸짓이 볼수록 초라하기만 하다. 겨울 산은 바람처럼 나의 남루한 어깨를 감싸 안아 줬다. 난 아들과 난생처음으로 산을 오른다. 아들과의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던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나름으로 열심히 살다 보면 잘 풀리지 싶어서 일에만 몰두하며 지낸 것이 오히려 회한(悔恨)이 밀려든다. 고도가 높을수록 변화무쌍한 날씨에도 아들의 온기에 따듯함이 느껴진다. 나는 나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눈길을 헤치며 등선을 가르고 있다. 추운 날씨임에도 묵묵히 아비 뒤를 따라 발자국을 나란히 만들며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산을 오른다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낀다. 내가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 주는 의식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낯선 이 땅에 정착하기 위해 찾아온 야트막한 산이지만 그래도 마음을 내려놓고 정을 붙이면 이곳이 또한 고향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터전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직접 눈에 보이는 곳에서 느끼는 감정보다 생각만으로 느끼는 감정의 깊이가 더 깊은지도 모른다. 이 땅에서 피어나는 꽃향기를 마시고 초록의 새순을 맞이할 것이고, 앞뜰에 정원을 만들어 온갖 꽃을 심고 활짝 피어나게 할 것이다. 그동안 부자지간의 그리움을 이곳 새로운 터전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겠지. 우리가족은 지난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아내와 아들 그리고 나는 새로운 낯선 곳에서 정붙여 이곳에 새롭게 터를 가꾸련다. 지난날이야 어떻든 간에 새로운 마음으로 터를 일구고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많은 고통을 또 겪으며 살아야 하리라. 어느 만큼만 욕심을 덜어내야 마음이 행복해 지는 걸까. 인생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결코 삶이란 내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인생은 누구나가 눈길의 힘든 산을 오르듯 인생여정의 길을 걷는 것처럼그런 관념에서 벗어나기란 힘든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들을 가슴에 품고 보듬어 사는 것이 바람직한 인생의 참뜻이지 싶다. 묵묵히 겨울 산을 오르며 푸른빛이 머무는 인생의 봄을 향하여 희망의 나래를 펼쳐 본다.
박목월 시의 바탕을 이루는 기본 정서는 그리움과 향수, 고독과 비애감이다. 박목월은 향토색 짙은 그리움을 서정적 시어로 형상화한 시인, 한국적 자연을 동양화 기법으로 처리해 농촌의 적막함과 외로움을 격조 높게 승화시킨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는 흔히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불린다. 이들 청록파의 공통점은 자연을 소재로 인간의 본성과 가치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청록파 중에서도 박목월의 시는 전통적 민요조 가락과 애잔한 비애감이 도드라지는데, 그의 시를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의 주요 배경이 되는 전원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전원이 시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1930년대다. 당시의 전원시는 서구사조의 무비판적 모방에 대한 반성의식, 일제 군국주의의 압박에 대한 저항의식, 나아가 억압에 대항할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부재의식에서 발아한다. 현실의 대립개념 또는 고통을 치유하려는 위안의 공간으로 전원이 등장한 것이다. 삶의 제반 여건들이 위기에 봉착하고 괴로움이 점차 깊어지면서 시인들은 각자의 유년의 전원으로 숨어들거나 회귀했던 것이다. 박목월의 시에 유년의 고향산천에 의탁하고자 하는 동심의 자아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런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 훗날(1959년) 박목월은 이렇게 술회한다. "그 시대의 절망적인 환경이 나를 향토적인 세계로 몰아넣고 그것에 깊은 애착을 갖게 하였으며, 그 세계 안에서 나를 길러준 것"이라고. 즉 시대적 억압이 시인의 불화와 좌절감을 낳고 그런 시인의 주관적 감정들이 시 속에 고독한 전원, 비애가 서린 자연을 낳았던 것이다. 이처럼 박목월은 초기에 전원을 관찰자 입장에서 주관적 동심의 눈길로 바라본다. 그러나 후기로 접어들면서 전원은 사회현실로 대체된다. 주관적 관찰자에서 객관적 비판자로 변모한다. 당연히 소재는 자연에서 일상생활로 바뀌고, 표현은 스케치풍의 묘사 중심에서 비판적 통찰 중심으로 바뀐다. 특히 6·25 전쟁을 겪으면서 초기에 보여주었던 아름다운 운율과 시각적 이미지는 약화되고, 일상의 경험에서 얻은 생활인의 아픔과 고달픔을 진술 형식으로 풀어낸다. 박목월에게 세상은 온통 갈등과 괴로움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그 런 참담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침마다 착한 사람이 되고자 다짐한다. 웃는 얼굴, 환한 얼굴로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자 다짐한다. 박목월 시의 감동과 울림은 이런 아름다운 시심(詩心), 자기희생적 사랑과 세상 사람들을 향한 정겨운 눈길에서 우러나온다. /함기석 시인
법수(法水)란 말은 불법(佛法)이 중생의 번뇌를 깨끗하게 씻음을, 물에 비유하여 일컫는 말이다. 부정 비리, 정치 투쟁, 불법 시위 등 끝없이 이어지는 사회 불안에 대한 언론 보도는 갑갑한 소식뿐이다. 어디가면 법수를 만나 이 불안한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낼 수 있을는지. 불도의 중심이 되는 사찰도 시위 뉴스에 초점이 되고, 불도를 닦는 스님도 불법시위 폭력군중의 일원으로 TV에 비치니 청정한 세상은 없는 것인가. 성경을 각론 하는 신부도 학생을 선도하는 교사까지 난장판 시위에 참가했다니 오염되지 않은 법수는 어디에서 흐르는가. 어두운 세상 갑갑한 마음을 정결하게 씻어주는 청정한 법수(法水)가 그리운 세상이다. 막막한 심정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청주 남성합창단 정기 연주회에 초대를 받았다. 기쁜 마음으로 참가했다. 달빛 떨림인가. 마음을 흔드는 정감의 화음이 가슴을 조용조용히 흔들기 시작한다. 여기가 별유천지, 법수의 고장인가. 미풍에 실려 오는 꽃향기인 듯, 신비한 음색에 젖어드는 환희를 느낀다. 온기의 율동이 음률을 탄다. 들릴 듯 말 듯 한 아름다운 소리의 근원은 눈빛과 마주치는 사랑의 선율이리. 일목요연한 정결한 몸태에서 발산하는 서정의 파동이리라. 꿈꾸는 듯 듣고, 바라보는 남성합창단이 월하(月下)의 죽림(竹林)처럼 미끈미끈하게 서서 조명에도, 반주에도 곱게 흔들린다. 아! 청순한 소리바람이여! 아름다운 심정 내부의 소릿결이여! 상상의 나래를 펴고 환상의 세계로 떠나는 꿈을 꾸며 듣는다. 여린 음색, 작은 떨림이 무게를 더하며 밀려오더니 청산을 흔드는 우렁찬 뇌성으로 변하고, 다시 메아리 공명으로 울려 퍼져 멀어진다. 바위섬을 때리는 풍파의 파돗소리더니, 고요한 정적, 파도의 끝자락이 모래톱에서 잦아지는 여운을 남긴다. 세심(洗心)의 경지로 인도하는 법수청산의 물소리가 분명하다. 마음 속 때를 씻어 청정 세계로 인도하는 법수의 흐름이 저러하리라. 오감을 열어젖히고 가슴에 안기는 화음 공명이 파도로 달려와 감성을 흔들어 댄다. 그것이 남성합창의 기맥(氣脈)이요, 예술의 정명(淨命)인가보다. 울림으로 다가와 울림으로 가슴에 머무는 비단결 같은 미성(美聲)이 구세주를 친견하고 내려 받는 복음이 아닐는지. 심신에 낀 때를 씻어낸 듯 후련하다. 음악은 감성을 지배하는 군주요, 삶을 사랑하는 연인의 역할을 동시에 하나보다. 따뜻한 연정 같은 생활 속에서 동행하는 심정의 보배가 음악이 아니던가. 희비애락의 감성을 정화시키고 씻어내는 법수(法水)가 분명하다. 합창을 들으니 생기가 솟는다. 기맥의 충전이요, 열기의 돋움이다. 용맹을 떨치도록 정열을 전도한다. 섬세하고 우렁찬 화음의 조화가 가물던 대지에 단비를 뿌리는 듯, 어두운 세상사에 지쳐있는 의욕을 일깨워준다. 경쟁하는 일터로 달려가는 꿈을 꾸며, 군중의 일원인 자기 존재를 확인 시킨다. 용기를 쥐어주는 친구의 역할이다. 에너지를 충전하는 재산 상속이요, 감흥의 이전이며, 생활 속 정착하는 보배가 음악이 아니던가. 감성의 떨림으로 전해오는 혼성합창에 매료되더니, 나이 들어 늙어가면서 깊은 울림이 있는 남성합창에 빠지게 되었다. 감성도 식성도 많이 변했나보다. 음악을 생활화 하면 인생의 환희는 스스로 내 것이 되리. 그것이 마음을 씻는 법수청산이 아니던가. 합창단은 화음 선정(禪定)의 세상을 노래로 만들어간다.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가 부분으로 흡수되어 아름다운 평화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화음의 소리가 전율로 다가와 마음을 흔들더니, 와락 가슴에 안기어 열정을 쏟아낸다. 너와나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는 합창의 울립이다. 합창울림은 세상을 정화하는 법수의 물결이다. 생각에 생각을 더하며 청음 경전에 심취해 있는데, 박수 열광으로 꿈에서 깬다. 가슴에 열기를 느끼며 청향 만리(萬里), 낙원을 꿈꾸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와 환호에 동참한다. 법수 청산이 여기에 있다고…….
이형기는 우리 시사(詩史)에서 허무와 소멸의 미학을 수준 높게 구현한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실존적 존재 탐구와 삶에 대한 장엄한 인식이 깔려 있다. 그는 인간을 이 세계에 내던져진 비극적 존재로 받아들여 절망의 문제를 실존주의 시각에서 탐구한다. 인간 존재와 삶의 허무를 종말론적 세계로 그리지 않고 달관과 긍정의 세계로 그려낸다. 비극적 존재인 인간 앞에는 늘 벽들이 서 있고, 시인은 이 벽들의 한계상황에 맞서 극복하려 한다. 그의 시에 분수, 파도, 민들레, 새 등 허무와 대결하는 작은 존재들에 대한 역설적 인식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새가 벽을 넘어서는 삶의 장엄함과 아름다움, 영원에 대한 시인의 갈망을 보여주는 소재라면, 꽃은 청춘의 상징으로 쓰이면서 삶의 쇠락과 허무를 사랑으로 극복하게 하는 자기희생적 존재로 등장한다. 어떤 소재가 등장하든 그의 시 밑바탕에는 허무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초기의 허무가 자연의 순환원리를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면, 후기의 허무는 실존적 자기인식을 낳는 반성적 촉매제 역할을 한다. 특히 초기에 시인은 자연의 대상물에 감정을 담아 노래하는 전통적 서정의 세계를 펼치는데, 이때의 자연은 실재하는 외부의 풍경이 아니라 시인의 주관에 의해 만들어진 관념적 풍경에 가깝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실재하는 자연에서 괴리된 채 자연에 적극적으로 동화되지는 않는다. 이 점이 청록파 중심의 전통 서정시와 이형기 초기시의 차이점이다. 관념적 풍경들을 통해 자아의 고독과 폐쇄성, 엘리트 의식 또한 드러내며, 쇠락과 소멸을 인간의 운명으로 수긍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특징은 초기의 대표작 '낙화'에 잘 드러나 있다. 시인은 가야할 때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을 지극한 아름다움으로 묘사한다. 꽃이 피고 지는 자연현상처럼 사랑을 이별과 축복의 관점에서 응시한다. 꽃의 짐이 열매를 위한 아름다움 죽음이기에 이별의 슬픔은 환희로 반전된다. 이런 역설과 승화의 시각에서 시인은 사랑에 수반되는 고통과 비애를 인간의 영혼을 성숙시키는 밑거름으로 보는 것이다. 여름의 짙은 녹음과 곧 다가올 가을의 열매를 위해 아름다운 자신의 존재를 기꺼이 쇠락의 땅으로 던져버리는 봄꽃의 운명을 자신과 동일화한다. 또한 시인은 은유의 절제, 감정의 통제, 대상에게로의 투사 등을 통해 삶의 비애와 절망을 수행자처럼 몸 안으로 체화하려 한다. 삶에 대한 이런 포용적 성찰과 반성이 시의 울림을 낳는다. 초기를 지나면서 이형기의 시는 점차 변화한다. 삶을 긍정하고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초기의 전통서정시 세계에서 벗어난다. 날카로운 감성과 새로운 언어 미학을 강조한 중기의 주지주의 세계를 거쳐, 생태학적 고발과 도시공간의 폐해를 직시하는 후기의 문명비판 세계로 계속 변화해간다. / 함기석 시인
박두진의 시는 주로 산과 강, 해와 달 같은 자연물을 토대로 삼는다. 그러나 김소월의 한(恨)의 자연, 김영랑과 정지용의 감각적 자연과는 확연히 다르다. 또한 청록파(靑鹿派)로 함께 활동한 박목월, 조지훈의 자연과도 다르다. 박목월은 향토적 자연풍경과 정서를 전통의 가락에 실어 상징의 차원으로 끌어올렸고, 조지훈은 고전적이고 동양적인 자연을 아름답고 격조 높게 재창조했다. 간결한 표현과 외형률을 중시한 이들과 달리 박두진은 자유로운 산문시를 추구하여 밝고 힘찬 상승(上昇)의 시학을 펼친다. 박두진 시의 소재들 중에서 밝음과 희망을 구현하는 중심 심상은 해다. 일몰과 어둠이 부정적인 현실을 나타내는 절망의 이미지로 사용되는 반면에, 해는 어두운 절망을 뚫고나오는 희망의 기표로 사용된다. 시인에게 해는 고난에 처한 개인 나아가 민족과 시대의 암흑을 몰아내는 희망의 상징물이자 순수 열망의 투사물이다. 이처럼 박두진의 시에서 해를 포함한 자연은 절망과 고통에 빠진 자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메시아 역할을 한다. 즉 박두진의 시에서 자연은 종교성을 짙게 띤 자연이다. 구약성서의 신화적 요소들이 투영된 자연이고 신과 조화를 이루는 자연이다. 전쟁과 살육을 끝낸 화해의 자연, 인간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신의 마음이 내포된 자연이다. 이런 관점에서 해방 이듬해인 1946년 5월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 '해'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 시에서 해는 수많은 상징으로 사용된다. 일제강점기의 어둠을 과감하게 몰아내는 새 역사의 시작, 절망의 상황을 끝내려는 빛의 이글거림, 전쟁을 종식시키는 평화의 서곡, 인류의 구원을 위한 광명의 신호탄 등 매우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독자들이 놓치기 쉬운 점은 시인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반복하며 외치는 상황이 짙은 어둠 속이라는 사실이다. 달밤조차 싫다고 반복해 외치며 시인은 음지를 벗어나 양지로 가고 싶어 한다. 사슴을 따라 밝은 빛의 세계로 가고 싶어 한다. 그만큼 시인은 새와 꽃과 짐승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노는 빛의 세계를 갈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바람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바람이라는 점에서 이 시의 역설적 슬픔은 깊어진다. 따라서 시의 의미 이전에 시인을 둘러싼 비극적 현실, 암흑의 당대를 냉정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절망적 시대상황 속에서 시인은 해를 통해 밝고 희망찬 세상이 오길 염원했던 것이다. 이글거리는 해를 통해 지구상의 모든 동물과 식물, 나아가 모든 생명체들이 아름답게 상생하는 평화의 세상이 도래하길 간절히 기도한 것이다. 이처럼 박두진의 시, 특히 광복 이후의 작품에는 기독교적 지향성이 짙게 나타난다. 창세기, 누가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 같은 성서의 신화 모티프를 바탕으로 삼은 작품들이 많다. 종교적 상상력을 통해 시인은 고통과 절망에 처한 민족의 아픔을 달래고 어둠으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한 것이다. 즉 그에게 신(神)은 인간의 마음속에서만 사는 특별한 우상의 존재가 아니라 역사의 질곡에서 평화와 사랑을 낳는 실천가였던 것이다. 박두진의 시에서 등장인물들이 자주 신을 대리하는 사제 역할을 하는 것은 이런 종교적 세계관 때문이다. 박두진이 '해'를 쓰던 해방기의 시대상황과 현재의 시대상황은 문양과 색채가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국가가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지 못하고 절망과 고통을 안기는 비극의 시대라는 점은 공통점일 것이다. 짙은 어둠을 맹수처럼 뚫고 나와 참된 희망의 빛을 선사할 아름다운 해의 출현이 기다려지는 새해다. /함기석 시인
옛날 이야기지만 농부가 밭을 갈고 거름과 농산물을 운반하는 농사일은 소의 힘을 이용했다. 그래서 소 없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소와 농부는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고, 영농의 중심에는 일소의 존재가치가 높았다. 나는 유년시절 소가 고달프게 일하는 것을 측은한 마음으로 보았다, 일을 심하게 하여 소가 병이 나면 할아버지는 소 침쟁이를 불러 긴 침으로 인정사정없이 찔러대고 약초를 갈아 큰 병에다 넣어 강제로 먹이는 치료가 잔인 하게 느껴졌다. 병난 소에게는 잘 먹는 풀을 베어다주고, 겨울에는 벼 짚을 썰어 콩깍지와 콩을 약간 넣고 쌀겨도 넣어 소죽을 쑤어준다. 외양간도 깨끗이 치고 볏짚을 깔아주는 등 할아버지는 소를 사랑하고 아끼는 정성이 지극했다. 송아지가 태어났다. 엄마의 젖을 먹고 자유롭게 뒤노는 모습이 아주 귀엽고 행복해 보였다. 한 살쯤 크면 할아버지는 송아지를 외양간에 붙들어 매고 코를 뚫었다. 그 비명 소리에 놀라 나는 벌벌 덜었다. 얼마나 아플까, 이제는 한평생 소고삐에 매여 고달픈 일생을 일만해야 되는 소의 운명이 시작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고 측은 했다. 6·25동란 때 일지만 추운 겨울날이었다. 갑자기 산속에 숨은 공비 토별을 한다고 군인들이 들이 닥쳤다. 숨겨놓은 소가 발각되어 애지중지 기르던 소를 군인들이 끌고 갔다. 할아버지는 소고삐를 잡고 따라가면서 애원했다. 나는 할아버지 뒤를 다르며 울면서 "소 없이 농사를 어찌 지으라고"하며 사정했으나 총칼을 든 위협에 어쩔 수가 없었다. 옛날 달구지에 짐을 가득 싣고 비탈길을 오르는 소를 보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입에 거품을 물고 등에 땀이 흠뻑 젓도록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참아 눈뜨고 볼 수 없었다. 힘겨워 앞발은 땅에 끓고 엎드린 소에게 주인의 채찍이 사정없이 가해졌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의 잔인함, 지나친 과욕이 죄 없는 순박한 소에게 가해지는 비정함을 지금까지도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농사일에 힘든 일을 하는 동물은 소 밖에는 없다. 그 일하는 모습에서 근면한 감동을 준다. 뚜벅 뚜벅 일터로 가는 모습에서 군자다운 근엄함을 느낄 수 있다. 두리번거리는 큰 눈은 순박한 아기의 눈망울 보는 것 같고 풀밭에 조용히 풀을 뜯는 모습에 어찌나 평화스러운 운치가 넘쳐나는지…. 밭을 가는 모습을 보면 '이랴! 하고 고삐를 채면 쟁기를 끌고 천천히 움직이고, 힘들어서 멈추면 여지없이 주인의 채찍이 가해진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 다해도 태산 같은 움직임에 감동을 준다. 우보천리(牛步千里)란 말도 이런 소의 근면하고 신중한 모습에서 생긴 것이 아닐까. 이제는 그와 같은 소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기계문명의 발달로 소가하던 힘든 일을 모두 기계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소는 자취를 감추고 고기소사육이 영농의 중심이 되고 있다. 한미 농산물교역 즉 한미 FTA에서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이 걸린다는 유언비어에 온 국민의 촛불시위가 서울 밤을 밝혔던 기억을 되새김해본다. 오늘의 촛불을 든 시민들의 평화행진 시위는 광우병시위와 어떻게 다를까. 그때는 질병 우려로 한미 무역협정을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국가 최고 통치의 공명정대한 치도를 상실했기 때문이 아닌가. 소처럼 일하는 근로자, 밤낮없이 뛰는 공직자들! 가족을 위하여 국민의 안녕질서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국민을 바라보면 옛날 일소가 일하는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오늘도 백만 촛불시민을 순직한 소의 큰 눈망울이 두리번거리며 지켜보는 것 같다.
오장환은 암담한 식민지 현실에서 치열한 현실인식과 생명의 세계관을 보여준 리얼리스트 시인이다. 또한 서울의 병든 모습을 현대적 감각의 언어로 포착해낸 모더니스트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시에는 세 가지 세계가 공존한다. 척박한 향토적 삶을 배경으로 하는 순수서정과 생명의 세계, 계급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세계, 근대 도시의 비애와 퇴폐적 정서를 그린 모더니즘의 세계 등이다. 오장환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한 비판, 봉건적 인습에 대한 비판, 당대 농촌현실에 대한 통찰을 통해 1930년대 식민지 지배하의 농촌과 농민들의 비극적인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또한 근대도시 서울의 부패한 모습과 항구를 배회하는 보헤미안의 퇴폐적 모습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1945년까지 오장환은 한 편의 친일시도 쓰지 않고 어둡고 궁핍한 시대를 견디다가 병상에서 해방을 맞는다. 그때 그는 신장병을 앓고 있었다. 해방의 감격과 혼란,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한 꿈과 열정, 부끄러운 심정 등을 오장환은 5개월에 걸쳐 매일매일 일기처럼 기록해나간다. 이 기록을 정리해 묶은 것이 그의 대표시집 '병든 서울'이다. 19편이 묶여 있는 이 시집에는 남쪽에 홀로 두고 온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 고향에 대한 향수가 애절하게 묻어 있다. 시 '성탄제(聖誕祭)'에는 생명을 유린하는 문명에 대한 시인의 비판적 시선이 깔려 있다. 흰 눈과 그 위에 흘러내리는 사슴의 붉은 피가 강렬하게 대비되면서, 총에 맞은 채 사냥개에게 쫓기며 점점 죽음의 문턱에 다가서는 사슴을 통해 시인은 인간의 광기와 잔혹함을 폭로한다. 죽어가는 어미사슴을 샘물과 약초로 살려내고자 안타까워하는 어린 사슴이 생명의 순수성을 나타낸다면, 사냥꾼은 생명을 유린하고 살육하는 인간의 야만적 파괴본성을 나타낸다. 참혹한 생명의 멸절을 긴장감 높게 제시하여 역설적으로 생명의 존귀함을 부각시키려는 시인의 의도가 숨어 있는 시인데, 주목되는 것은 '죽은 이로 하여금 /죽는 이를 묻게 하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죽은 이가 어미사슴이라면 죽는 이는 어린 새끼사슴이다. 죽은 어미처럼 곧 죽게 될 어린 새끼의 비극적 운명, 어미가 새끼를 장사지내야만 하는 반윤리적 절망감이 역설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무자비한 생명 살생에 대한 시인의 날카로운 질타가 들어 있다. 이런 역설적 관점에서 보면 성탄제에 거리거리 울리는 아름다운 종소리는 인간의 야만적 살생과 폭력을 용서하라는 그리스도의 뼈아픈 사랑의 울음이기도 하다. /함기석 시인
맞아! 소설속의 장면이야. 월악산을 바라보며 주석(酒席)을 즐기던 자리에서 사슴 같이 청아한 눈빛과 순박한 행동을 보면서 아름다운 장면을 떠올렸다. 나다니엘 호손이 쓴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소설 '큰 바위 얼굴'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어니스트를 생각했다. 큰 바위의 얼굴과 똑같은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 천진한 어니스트의 얼굴이 저 청년과 닮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기암절벽의 아름다운 월악산경(月岳山景)을 바라보며 명산의 정기를 받아 어네스트 같은 품성이 길러지지 않았을까. 청년의 환한 행동에 동화된 나도 호손이 된 심정으로 월악산이 키우는 순박한 자연인을 떠올리며 그의 인상을 글 속에 담고 싶었다. 아름다운 삶을 꿈꾸는 소설의 주인공 같은 천진한 청년의 정겨운 모습들을…. 월악산을 다녀와서 산과 청년을 배경으로 글 몇 편 썼다. 청년은 어느새 내 가슴에 친구로 자리 잡는다. 삶의 길에 서로 도우며 사는 친구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가선다. 적막한 산속에 들꽃같이 아름다운 젊은 친구를 사귄 것은 산행의 횡재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마음을 가지고 싶었다. 하산하여 집에 도착하자 바로 쓴 글이 '월악산(月岳山) 월악가든'이다.월악산이 아름답고, 월악산 정경을 정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그의 사업장과 활동하는 그 정경이 눈에 선하여 마음 가는대로 쓴 글이다. 둥근 감자전 안주로 놓고/ 잔 가득 술을 채우면/ 달도 산도 술잔에 드는 집(家)//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면/ 월악산정을 가슴에 안고/ 음풍농월을 즐기는 옥(屋)// 평상에 앉아 영봉을 바라보며/ 동동주 그득 따라 한 잔 들면/ 산경 달빛에 취하는 당(堂)// 산새소리 같은 주인 몸놀림에/ 전설을 말하는 미륵불상도/ 슬며시 넘겨다보는 궁(宮)// 집(家)이요, 옥(屋)이고/ 당(堂)며 궁(宮)인,/ 산중 명소가「월악가든」이다// 정을 나누며/ 쉬어 가는/ 나그네의 별궁이다. 마음에 그리는 월악산 달빛이 그립다. 월악산에 뜨는 보름달 같은 청년에게 전화를 했다. 그와의 통화 장면을 글에 담아 「달빛 통신」이란 글을 쓰면서 환한 그의 얼굴을 떠올린다. 환한 달빛 정감이/ 그리움을 부르는 밤/ "월악산에 달떴소·" 물으면/ 산울림 같은 전화 답변// "월악산의 달을 보내오니,/ 창을 열고 받으세요."/ 사랑의 음색 달빛 전문/ 가슴에 실려와 더 곱다// 고운 마음에 싸서 보내는/ 월악진경(月岳珍景) 월악산의 달/ '왜 달만 보냈을까·'// '산은 와서 보라'는 숨긴 말/ 환한 달빛, 그의 얼굴이/ 고운 미소로 전해지고 있다. 달빛 같이 환한 사랑의 언어로 연서 같은 글을 쓰고 싶었다.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며 정겹게 사는 세상을 글 속에 그리고 싶다. 연서의 밀어(蜜語) 같은 언어를 시상(詩想)에 담고 싶다. 그러나 의욕과 마음뿐이지 잃어버린 청춘, 늙는 마음에 온기가 사라져 졸문이 되고 만다. 자연의 순리를 어찌하리. '살아있을 때 사랑하라.' '사랑하면서 살아가리.' 연문(戀文)의 편지를 누구에게 보낼까.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자연경(自然經)의 경문(經文)을 함께 듣고 싶은 사람이 어딘가에는 있으리. 마음 섞기가 힘든 세상이지만 사랑의 마음을 따르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는지. 프랑스 계몽기의 사상가이며, 작가이고, 프랑스혁명의 예언자 역할을 했던 룻소의 명언을 생각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가슴 속에 그리며 달빛 가득한 월악산을 떠올린다. 산정(山情)을 닮아가는 소설 속의 주인공 같은 청년을 안아보는 꿈을 꾼다. 그에게 이 글을 보내면 마음에 품어줄까….
유난히도 무덥던 여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추위가 닥쳐왔다. 가을이 언제 왔다갔는지 모르겠다. 기상학자들 말대로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일까. 요즈음은 봄가을이 없고 더위와 추위만 있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어제 새벽은 평소처럼 운동을 하러 나갔다가 갑자기 몰아닥친 추위에 당황해야만 했었다. 방한복을 찾아보니 입을만한 게 보이지 않는다. 바람막이 옷을 한 벌 새로 사야겠다는 생각에 육거리 시장으로 나갔다. 서울서 아내가 내려와 함께 사도되겠지만 빨리 입고 싶은 조급한 마음이 앞서는 것이었다. 이런 걸 충동구매 심리라고 하는가보다. 복잡한 시장에 주차난을 피하려고 시내버스를 탔다. 오랜만에 타보는 시내버스가 무척 쾌적하고 즐거운 느낌을 주었다. 시장입구를 들어서니 역시 많은 인파가 붐빈다. 시장 상인들이나 골목을 오고가는 손님들이 활기차있어 보인다. 재래시장은 언제 보아도 삶의 활력이 넘치는 곳이다. 시장골목 한가운데로 길게 늘어선 가판대에는 생선 과일 각종 잡화 등 푸짐한 상품들이 쌓여있다. 호객을 하는 상인들의 목청이 한결 힘차게 들린다. 진열장의 화려한 물건들을 둘러보며 어린시절에 바라보던 시장 풍경이 아련히 떠오른다. 짚신, 달걀꾸러미, 호박, 검정고무신... 시장끝 무심천 뚝방위에는 땔 나무를 파는 지게꾼들 행렬도 늘어서 있었다. 세월이 가고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이 바뀌니 재래시장의 옛날 풍경도 이제는 보이지를 않는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아쉬운 기분이다. 어느 옷가게에 들리니 겨울용 방한복이 수북이 쌓여있다. 한 벌을 골라 들고 주인에게 가격을 물어보았다. 3만원 짜리인데 2천원을 감해준다고 한다. 그동안 마트나 쇼핑몰에서는 가격표만 보고 물건을 샀었다. 재래시장 물건값은 흥정하기에 따라 깎아준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좀더 깎아줄 수 없느냐고 하니 천원을 더 깎아준다고 한다. 쾌히 물건 값을 치르니 검정 비닐봉지에 옷을 담아 건네준다. 물건 값을 흥정하느라 잠깐동안 나눈 대화지만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끼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동판매기 앞에서 돈을 집어넣고 물건을 손에 쥐는 메마르고 허전한 상거래 보다는 한결 푸근한 기분이 들지 않는가. 재래시장은 사람의 숨결이 들리고, 인간 냄새도 나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다. 옷가게 주인과 인사를 나누고 시장골목을 천천히 걸으며 이리끼웃 저리끼웃 시장구경을 하였다. 시장골목을 나와 시내버스 정류장 근처에 도착하니 차를 기다리는 인파가 시장안 보다 많은 것 같다. 허름한 옷차림의 촌로들을 비롯 장을 보러왔던 사람들이 목을 길게 빼고 버스를 기다린다. 많은 노인들 가운데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가 어디선가 보일 것 같은 상념이 갑자기 떠오른다. 육거리 시장골목과 버스정류장, 이 거리는 우리 부모님께서도 오랜 세월동안 오가며 머무르시던 곳이다. 꼬부장한 어머니는 앉아계시고 아버지는 서서 차를 기다리던 모습을 몃 차례 보았었다. 내게도 잊혀 지질 않는 추억이 서린 곳이다. 버스가 왔지만 타지 않고 좀더 천천히 걸었다. 길 건너편 기름방앗간 집이 바라보인다. 서울서 내려오면 이맘때쯤 어머니는 텃밭에서 수확한 참깨 들깨를 가지고 기름을 짜러 가셨다. 깻자루를 승용차에서 내려 방앗간으로 옮기고 나는 먼저 떠나온다. 기름을 모두 짜고나면 방앗간 주인이 내게 전화를 건다. 참기름 들기름병을 차에 옮기고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왔다. 피곤하시겠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좋아하시는 걸 보며 나도 무척 흐뭇했었다. 빈 병에 기름을 이리 따르고 저리 나누고 계신다. 자식들에게 집집마다 골고루 보내시기 위해서 하는 일이셨다. 밤늦게까지 자식들 주려고 병에 기름을 따르시던 어머니 모습을 바라보던 이 아들은 행복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롭게 사시던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한 그 마음이 보람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늦가을 해가지고 어느새 날씨가 어둑어둑 해 진다. 버스를 내려 동네길을 걸으며 그치지 않는 옛추억이 오랫동안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그렇게 정겹고 그립기만 하던 고향도 어머니가 않계시니 이제는 허탈한 느낌이든다. 방한복 한 벌 사러갔던 육거리 시장에서 오랜 옛날 부모님 추억이 떠오른 하루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불을 켜니 오늘따라 집안이 유난히도 허전하다. 방한복 담은 검정 비닐봉지가 낯설어 보인다.
김수영은 참여적 리얼리스트 시인이다. 그의 시 전반에 흐르는 큰 주제는 자유(自由)다. 그에게 자유는 사랑, 혁명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특히 4·19혁명 후 5·16쿠데타에 의한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그에게 자유는 쟁취해야할 종국적 목표가 되었다. 적(敵)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낳는 원천이 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그가 그토록 갈구했던 자유가 압제와 고통의 현실, 자기연민과 탄식의 정서에 뒤섞여 시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즉 그에게 자유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현실적 몸이었다. 그가 자유 자체보다 자유가 실현되지 않는 사회적 상황, 정치적 상황, 역사적 상황, 가정적 상황 등을 비판적으로 성찰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는 시대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것, 미성숙한 사회와 부패한 현실을 예리하게 직시(直視)하는 것이 시인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미성숙은 곧 자유의 결여를 뜻하고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고착된 시대의 구습과 권위적 획일주의에서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근대정치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했고 무분별한 서구모방 세태를 풍자적으로 비꼬았다. 풍자(諷刺)와 해탈(解脫) 사이로 뚫린 길을 질주하며 그는 독재와 무지의 시대, 지식인의 허위와 속물근성을 사정없이 질타했다. 시대와의 이런 비타협적 불온성이 김수영 시의 반골미학(反骨美學)을 낳는다. 김수영의 전위성은 그의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에 잘 드러나 있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나가는 것이라 주장하면서 그는 자신의 몸속에 뿌리내린 도시 소시민의 허위의식을 신랄하게 까발린다.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자신의 소심함과 비겁함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렇게 자신의 속물적 삶을 성찰하면서 그는 당대를 지배하던 금기와 허위를 깨뜨린다. 그에게 시작(詩作)은 자신과 언어와 현실과의 힘겹고도 치열한 삼중의 싸움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유와 정의, 사랑과 평화, 행복을 얻기 위한 혁명에는 피와 고독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푸른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노고지리(종다리)의 비상(飛翔)이 자유로워서가 아니라 자유를 향한 비장한 몸부림임을, 역사의 변혁에는 언제나 능동적 자기희생과 투쟁적 실천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준엄한 현실 직시와 비판적 시대인식, 첨예한 도전과 끊임없는 자기갱신이 그를 영원한 청년시인으로 남게 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詩도 詩人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목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할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할 말, 그것을." 김수영이 살았던 압제의 시대처럼 지금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 또한 자유를 향한 실천적 행동, 뚜렷한 지향점과 투쟁의식, 뜨거운 결단과 결집이다. 촛불 하나의 힘은 미약하지만 그 작은 불꽃들이 모이고 모여 두려운 횃불이 되고, 어떤 바람도 꺼트릴 수 없는 거대한 변혁의 불길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말자. /함기석 시인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보니 어둠이 아직 깔려있다. 동이 트려면 한참 있어야 할 시간이다. 산 중턱 산사에서 새날을 맞는 염불 목탁소리가 고요한 새벽의 허공을 흔든다. 덜 깬 잠을 깨우면서 차에 올라 농장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농장까지는 오 십리 길, 어린 시절 뛰놀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른 새벽에 가노라면 드문드문 부지런한 농부의 모습이 보인다. 차가 고향 어귀를 지날 때면 부모님의 고단한 일상이 떠오른다. 어느 날 깨우지 않아도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가면 어느새 아버지는 살포 들고 논에 가시고, 어머니는 가지런히 머리 빗어 쪽 지우고, 삼베적삼에 흰 고무신 신고 텃밭에 서성이셨다. 아침 반상은 고추 넣고 된장 끓이고 푸성귀로 상을 채우셨던 그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해동하여 밭을 갈아 씨를 뿌려 싹이 틀쯤이면 파릇파릇 고개를 들고 싹이 먼저 트는 것은 틀림없는 잡풀이다. 이런 잡풀을 뽑으려 하면 엉뚱하게도 심은 작물이 뽑히기도 한다. 뽑은 작물이 아깝고 몰라봐 미안하기도 하여 속도 상한다. 잡풀을 구분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모판의 벼 싹과 피를 구분할 줄 알면 수준급의 농부라 한다. 아무리 잡초라 해도 이 땅 산하에서 번식한 잡초는 눈에 익어 낯설지 않다. 그렇지 않고 낯 설은 새로운 품종의 잡초도 많다. 잡초뿐이랴. 온갖 잡새들이 날아와 뿌린 씨앗도 파먹고 새싹도 잘라먹는다. 작물이 자라는 과정에는 병충해에 많이 시달린다. 그때마다 방제약도 뿌려주어야 한다. 지난해는 병충해가 심하지 않아 수월하게 풍작을 맞을 수가 있었다. 씨 뿌리고 어느 날 보면 알게 모르게 하룻밤 사이에 잎도 피고 꽃피어 열매를 맺어 신이 났다. 실한 열매의 풍작을 즐기며 농부가 다 되었다 자부하며 뽐내 보기도 했다. 호사다마라 하지 않던가? 언제고 자만은 실패를 부른다. 올해는 어찌 된 일로 고추가 몸살을 한다. 수수, 토마토, 오이도 마찬가지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농약사와 선배 농민을 찾아다니며 진단을 해보지마는 발생한 병은 치료가 어렵다. 노련한 농부는 씨 뿌릴 시기와 김매는 방법, 목마르면 물주고 물이 많으면 빼주어 좋은 환경을 만들어준다. 병이 나면 고쳐주기도 한다. 어머니가 아기의 울음소리만 듣고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같이 농부는 작물의 잎의 상태를 보고 병충해의 유무를 알아야 한다. "곡식들은 주인의 발소리 듣고 자란다." 이는 어버이가 자식을 사랑으로 키우듯이 모든 작물도 사랑과 부지런함으로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옛사람들은 농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근본이 된다 하여 "농자천하지대본"이라 하며 농업을 중시하였다. 농산물은 생명의 원천인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 농사이고 농작물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먹을거리다. 힘이 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농사인데 농사일을 쉽게 생각하고 뛰어드는 귀농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귀농자 대개가 도시의 생활이 싫어 탈출하는 사람들이거나 퇴직자가 대부분이다. 막상 뛰어들어보니 어렵고 힘든 것이 농사일이다. 때론 농사일에 지쳐 백기를 들고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사람도 많다. 현대 농업은 철저한 관리로 양질의 농산물을 생산하여야 한다. 농부는 항상 작물과 무언의 대화를 할 줄 알아야 한다. 해야 할 의무사항을 잘 해내지 못하면 진정한 농부가 아니다. 형식만 갖춘 어설픈 농부다. 무슨 일이든 어설피 해서는 안 된다. 목적과 진행 과정을 중요시하여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한다. 두 주먹 불끈 쥐고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큰소리치며, "나는 진정한 농부다." 자부하는 농부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어설픈 농부가 아닌 진정한 농부로 좋은 먹을거리가 많이 생산되어 풍요한 농촌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신동엽은 시대의 어둠 속에서 생명이 싹트기를 염원하면서 폭력과 억압의 불평등사회가 평등사회로 변혁되길 꿈꾼 시인이다. 그에게 시작(詩作)은 이웃과 세상을 향한 사랑의 개안(開眼) 행위였다. 그의 시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비판, 민족적 역사의식과 저항적 민중의식에 뿌리내리고 있다. 동학혁명, 3·1만세운동, 4·19혁명 등 역사의 주요 사건들을 민요의 율격으로 펼칠 때 그의 민족의식은 가장 농도 짙게 드러난다. 민요의 가락에 민중들의 아픔과 상처, 분노와 열망이 사실적으로 담기기 때문이다. 그는 비참한 현실과 민중의 삶을 도외시한 당대의 모더니즘 문학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맹신적 서구문화 추종과 문화의식을 노골적으로 풍자하면서 문학인의 현실참여를 주장한다. 시인의 주체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사회 속에 세워야 하며, 자유를 되찾는 것이 문학인의 실천적 소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이런 문학관과 시적 태도는 일관되게 이어진다. 당시 그는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4.19혁명의 숭고성이 무자비하게 무너지고 자유가 또다시 찬탈되는 것을 뼈아프게 목격한다. 시대적 폭력과 악행에 맞선 언어적 분노와 저항, 그것이 그의 시다. '껍데기는 가라'는 신동엽의 대표작이다. 이 시에는 당대에 대한 시인의 현실인식과 역사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껍데기는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모든 겉치레와 허위들을 상징한다. 수많은 피와 목숨을 대가로 얻어낸 4·19혁명의 민주화가 5.16군사쿠데타로 퇴색해 가는 참담한 상황에서 혁명의 순수성이 퇴색되어 가는 현실을 시인은 안타까워한다. 그리하여 1894년 갑오동학혁명의 아우성과 1960년 4월 혁명의 순결성, 즉 알맹이만 남고 모든 가짜 쓰레기들은 없어지라고 비장하게 토로한다. 곰나루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웅진의 옛말이고, 아사달과 아사녀는 백제의 석공 부부로 외세에 물들지 않은 우리 민중을 상징한다. 좌우(左右) 냉전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초례청에서 전통혼례를 치르는 부부처럼 맞절을 하며 민족 전체가 한 가족이 되길 시인은 염원하고 있다. 신동엽은 충남 부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전주사범에 입학한 후 동맹휴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제적당했다. 이후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여 역사를 공부하면서 우리민족의 역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눈을 떴다. 6.25전쟁 때는 애국충정의 마음으로 국민방위군에 입대했으나 군인이 되어 그가 목격한 것은 부정과 비리에 물든 부패한 모습들이었다. 이것이 그의 시에 분노와 저항의식을 싹틔웠다. 권력자의 위정과 자본가의 횡포는 그가 살았던 당시와 오늘의 시대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국민이 국가의 악행(惡行)에 분노하고 집결하고 행동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일 수도 있다. /함기석 시인
서정주의 시에는 우리의 토속적 민담과 전설, 동양고전의 세계, 서양의 문학과 사상들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불교와 기독교, 도교와 샤머니즘, 무속신앙과 상징주의 등이 융합되어 나타난다. 그는 초기에 보들레르의 퇴폐적 악(惡)과 부정성을 우리의 토속문화와 결합하여 새롭고 낯선 미(美)의 세계를 탐색한다. 성적 관능의 욕망을 과감한 이미지로 표출하는데, 중요한 것은 성(性) 자체가 아니라 그에게 성이 현실적인 제도와 관습, 식민지의 강압적인 질서를 부정하는 시적 도구였다는 점이다. 그만큼 그는 근대의 물질문명을 거부하고 동물적이고 원초적인 생명의 세계를 갈구했던 것이다. '화사(花蛇)'는 미당이 22살 되던 해에 발표한 초기 대표작으로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관능과 생명의 욕구를 뱀 이미지로 표출한 작품이다. 화사(花蛇)는 꽃뱀을 의미한다. 뱀은 서구 기독교의 시각에서 볼 때 이브를 유혹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게 한 원죄의 뿌리다. 주목되는 것은 뱀 자체가 아니라 뱀에 대한 시인의 이중적 태도다. 시인에게 뱀은 매혹과 공포, 아름다움과 징그러움을 동시에 낳는 이중적 존재인데, 이는 인간의 속성이기도 하다. 즉 시인에게 뱀은 인간의 내면성이 투사된 동일화된 존재이다. 초기의 탐미적 여정 이후 그는 한국의 토속정서를 육화하여 울림 깊은 시들을 써낸다. 시집 '귀촉도(歸蜀途)'를 통해 동양적 사유의 세계를 탐색하고, 시집 '동천(冬天)'을 통해 불교적 영생과 인연(因緣)의 순환적 세계를 노래하고, 시집 '질마재 신화(神話)'를 통해 고향의 토속생활과 원형적 설화를 형상화한다. 이처럼 그는 우리민족의 언어를 빼어나게 형상화하여 시의 맛과 품격을 한껏 드높였다. 그러나 이런 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비판은 끊이지 않고 있다. 그가 삶에서 보여준 기회주의적 행동, 현실인식 부족과 역사의식 결여 때문이다. 이런 비판들이 억압적 시대상황 속에서 인간의 본질과 예술의 탐구과정에서 그가 치른 어쩔 수 없는 대가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에 대한 비판을 무마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내게는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 서당 훈장을 하신 고조부께서 지어주신 지금의 내 이름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 출석부의 이름은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 아니었다. '도꾸야먀 니꼬엔'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리는 거였다. 어린 생각에 '왜 내 이름은 두 가지를 쓰는 것일까' 하는 의아한 생각은 더러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물어보지는 못했다. 영문을 알 수 없던 어릴 때 추억은 오랫동안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 다시 초등학교에 입학해 우리 말과 글을 배우고서야 내 이름이 두 개였던 이유를 알 게 됐다. 아버지가 교사로 계시던 고등학교 사택에서 살고 있던 시절이었다. 어느날 밤 아버지는 갑자기 짐을 싸고 가재도구를 대충 정리하더니 가족들을 데리고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어디론가 밤길을 가고는 있었지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있는 것 같았다. 사택 촌을 떠나 고향으로 가는 길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그날은 일본 천황이 미국에게 항복을 알리는 방송에 일본 사람들은 동요하고 어수선하던 때였다. 일본 사람들이 만이 살던 동네에서 혹시라도 흥분한 일본 사람들과 부디칠 염려 때문에 밤중에 고향을 향해 서둘러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그들 통치를 받던 시절에 나는 태어났다. 자라서 학교를 갔을 때도 이름은 일본식 이름으로 불렸고, 교실 정면 흑판 위에 걸려있는 국기는 지금의 붉은 일장기 였다. 수 백년 넘게 이어온 조상으로부터의 성(姓) 과 이름을 모두 일본식으로 바꿔 놓았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조선인에게는 취학, 취업이 금지되는 것은 물론이고 관청으로부터 각종 인허가가 나지 않았다. 학교에서 쫓겨날 뿐 아니라 날마다 군청에서 오라 하고, 경찰서에서 오라 가라하며 헌병대에 불려다닌 끝에 사상범으로 몰려 고통을 받게하는 등 잔학상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평생 햇볕을 보지 못하며 죄인으로 살아야만 했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욕이 '성을 갈 놈'이라고 했다.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에 조선인들은 강렬하게 저항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아예 호적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한 조선인은 성을 이누꼬(犬子·개새끼)라고 신고하니 읍장이 사연을 물었다는 것이다. 그 조선인은 '성을 바꾸면 개새끼, 소새끼로 불리는 데 내가 성을 바꾸었으니 개새끼가 된 것 아니냐' 고 대답 했단다. 우리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일본제국의 징병제도를 실시할 준비공작이었다는 게 역사학자들 견해다. 말과 글을 빼앗기고 성과 이름까지 바꾸게 됐으니 민족의 운명이 깊은 늪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실로 창씨개명 정책은 우리 민족의 족보와 이름을 영원히 없애려 했던 일제의 가장 무서운 흉계였던 것 같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지금은 우리 말과 글 뿐아니라 족보도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창씨개명과 관련 정치권에서 자주 거론되는 친일(親日), 반일(反日) 논쟁을 볼 때면 마음이 아프다. 전직 대통령의 창씨개명을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정치인들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창씨개명을 했다고 친일파고 하지 않았다고 일제에 저항한 애국 행위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민족의 대표적 저항시인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했고, 일제때 친일파 거두였던 박흥식(화신백화점사장) 한상용(중주원고문) 윤덕영(귀족원의원) 등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우리 나라는 일본에 의해 식민지배를 당했을 때, 국권만 빼앗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과 이름까지 빼앗겼다. 우리나라 거의 모든 사람들인 80%가 일제의 강제적인 압력에 의해 창씨개명을 했다.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의 앞잡이로 친일행위를 한 사람들은 허물을 가려내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대다수 국민들은 기본적인 생활의 권리를 누리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 창씨개명을 했다고 모두 반민족자가 아니듯,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게 무조건 애국도 아니지 않을까.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피를 흘리신 독립운동가들 덕분에 우리는 나라를 다시 찾았다. 해방 71년을 맞으며 창씨개명과 우리의 현실을 돌아본다. 창씨개명은 수치스럽고 슬픈 역사며,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다투게 하고 괴롭히는 다 낫지 않은 아픈 현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