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부터 비가 오지 않아 가뭄으로 농작물이 성장을 멈추게 하였다. 오늘은 비가 촉촉이 내리었다. 애타던 농민들의 한숨소리가 웃음으로 바뀌었다. 단비에 작물을 보살피느라 농민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다. 매년 6월이면 찾아오는 아련한 마음이 오늘도 여전히 하늘을 쳐다보게 하였다. 산야는 조용했다. 그 어떤 포성도 분명 들리지 않았다. 허나 적탄에 부상을 당한 처절한 군인의 땅에 끌리는 군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6·25 전투에서 실종되어 육십칠 년 동안 갈 곳을 잃고 구천을 헤매던 국군 용사 귀환의 모습이 아련히 산기슭에 어린다. 얼마나 치열했던 전투 이었나 직접 격지는 않았지만 참전 용사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자주 들어왔기에 그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2대 독신이라는 것을 개의치 않으셨단다. 오로지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일념이었다고 하였다. 후퇴를 거듭하는 국군 병사들 틈에 끼어 낙동강까지 피난을 하여야 했다. 이제는 더 이상 나 하나만의 안위를 생각할 때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단다. 현지에서 국군에 자원입대를 신청을 하였다고 한다. 간단한 제식훈련과 소총을 다루는 기술을 익히고 곧 바로 전장으로 투입 되었다.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의 발판으로 국군의 강력한 반격은 다시 북으로 북으로 진격을 하였다. 총알이 빗발치고 귀청을 찢는 포성이 울리는 철원 전쟁터였다. 공격과 후퇴를 반복하던 때에 인민군이 쏜 포탄의 파편이 허벅지에 박혀 현장에서 쓰러졌다. 전투복을 붉은 피로 물들이고 정신이 몽롱할 때 전우에 발견되었다. 위생병의 손에 이끌려 군 야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셨단다. 사단 병력이 거의 다 전사하고 불과 십여 명만이 살아남았단다. 만약 그 때 아버지께서 잘못 되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사람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태어난 나에게 6·25 사변 이야기를 자주 해주었다. 함께 전투를 하시다가 운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영혼에 정말로 고개 숙여 감사함과 불멸의 정신을 이어 받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을 하시었다. 6·25 전쟁은 한반도에 한민족을 사상이 다른 공산당 북한 도적떼들이 자유 대한민국을 공산화 할 목적으로 남침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을 남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전쟁이었다. 남·북간 이득은 없고 잃은 것만 어마어마하다. 막대한 재산상의 손실은 물론이요 인재의 손실은 가히 돈으로 환산을 할 수 없다. 또한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일천만 이산가족은 양산한 것이다. 가족, 친척 간에 서로 생사를 모르고 육십여 년을 지내오고 있다. 오래전 KBS 방송국에서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으로 가족을 만난 사람들도 있지만 찾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찾았다 하더라도 남북으로 다시 헤어져 기약 없는 이별을 눈물과 함께 하얀 손수건에 묻어 두었다. 6·25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휴정협정으로 잠시 전쟁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북한은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3대 독재 정권이 북한 주민들을 험학한 통제수단으로 다스리고 있다. 호시탐탐 자유 대한민국을 공산화 통일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미사일이니 핵폭탄이니 하면서 유엔 안보리 규정을 어겨 가면서 도발을 자행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는 요원한 것인가? 남북은 서로 통일을 하자고는 하지만 과연 어떤 통일을 원하고 있는가? 나는 자유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로 통일을 원하고 있다. 북한의 공산 3대 독재 정권의 체제로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낮에는 내가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저녁이면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갖고자 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살고 싶다. 사천오백 년 유구한 역사를 지켜온 한민족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갈라지거나 합치곤 했다. 아직도 갈라져 있는 한반도를 하나로 묶는 자유평화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이 일은 한민족 모두에게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겨진 상태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마음 자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나 깊이 생각을 할 때이다. 어떠한 어려움에 처한다 해도 물러서지 않고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굳건해야 한다. 아버지가 피 흘려 지켜온 조국, 이제는 내가 지키련다. 푸르고 푸른 6월, 한반도 산야는 평화롭다. 삼면의 푸른 파도는 불의를 용서치 않을 게다. 오!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리라.
[충북일보] 딸을 출가시키게 됐다며 기뻐하던 친구의 혼사에 가려고 봉투에 '축 화혼'이라고 썼다. 인쇄 돼 나오는 축의금 봉투도 있고 스탬프로 대신 찍어도 좋으련만, 나는 시대를 거스르듯 굳이 손 글씨를 고집한다. 손 글씨를 쓸 때 마다 어머니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초대장을 보내온 이를 떠올리며 나름대로 정성을 담고자 하는 뜻에서다. 나의 손 글씨는 빼어나게 잘 쓴 게 아니라서 막상 결혼식장 접수대에 봉투를 내놓을 때면, 세련된 컴퓨터 글씨에 주눅이 들지만 동글동글한 내 손 글씨가 좋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펜글씨를 쓰기 시작할 때다. 아버지께서는 "글씨는 그 사람의 마음이고 얼굴이다"고 하시며 또박또박 천천히 쓰는 습관을 기르면 좋은 글씨체가 된다고 하셨다. 신기 하게도 육남매 중 외동딸인 나를 제외한 우리 형제들의 필체는 곧은 정자체로 모두 비슷하다.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어 명필소리를 듣던 식구들의 닮은꼴 글씨를 보면 글씨에도 집안 내력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다. 필체가 좋으시던 아버지는 내가 결혼한 후에도 종종 편지를 보내주셨다. 그 덕분에 가끔 글쓰기를 해보는 습관이 길러졌다. 어머니의 글씨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학교라곤 다녀 본적도 없고 어깨너머로 간신히 한글을 터득하여 문맹소리를 면하셨던 어머니의 글씨는 당연히 난필이었다. 그때 본 어머니의 글씨가 아직도 눈에 가물거린다. 해병대에 입대했던 셋째오빠가 월남전에 파병 되었다.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고 잠 못 이루며 우시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슬픈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마음도 슬프고 아팠다. 당시는 통신 수단이래야 라디오로 베트남의 전쟁소식과 한국군의 치적을 듣는 것 외에 가끔 편지를 주고받을 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청룡부대에 같이 갔던 남주동 사람 김 병장이 전사 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러던 중에 오빠한테서도 연락이 끊기자 살아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우리가족들은 식구수대로 편지를 쓰기로 했다. 글씨는 전혀 쓸 줄 모르시던 어머니께서도 애타는 모정을 글로 띄워 보내기로 하고 하루는 온 가족이 안방에 모여 편지를 썼다. 철부지 나는 배를 깔고 방바닥에 누워 어머니 곁에서 글을 썼다. 겨우 안부를 물어보는 글 이었을 텐데 누가 볼세라 손으로 가려가며 진지하던 기억이 추억의 모퉁이로 돌아간다. 아버지께서는 제일 먼저 편지를 써 놓으시고 어머니의 글씨를 도와 주셨다. 나이 쉰에 처음 연필을 잡은 어머니의 손이 떨린다. 애 끓는 심정을 아는지 짤막한 몽당연필도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파르르 떤다. 처음 보는 어머니의 글씨에 내 마음도 두근거리며 덩달아 떨렸다. 누런 갱지위에 서두로 "아들 아"자를 쓰기로 하신 어머니는 연필 끝에 수없이 침을 바르시며 한참 시간을 끌다가 이응자를 간신히 그렸다. 자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발발 떠시며 한참을 머뭇거리셨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아들을 위해 결코 포기 하지 않으시던 어머니의 표정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한나절쯤 지나서야 어머니의 편지는 완성 되었다. 진액을 쏟은 어머니의 글씨가 누런 공책에서 상형문자처럼 춤을 춘다. "아들 아…." 아버지가 불러 주시는 대로 한자 한자 혼신을 다해 겨우 쓴 어머니의 그림 글씨는 당연히 둔필이었지만 어머니의 편지 덕분인지 오빠에게서 살아있다는 답장이 왔다. 어머니는 얼마나 기쁘셨던지 1학년짜리 내동생의 국어책을 놓고 밤마다 아버지와 글씨연습을 하셨다. 호롱불아래 어머니의 글씨연습을 위해 운을 띄우듯 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들리는듯하다. 마침내 오빠가 귀국하고 무사히 군복무를 마칠 때까지 느리고도 힘에 겨운 어머니의손 편지는 계속 써 보내셨다. 글꼴이야 서툴렀지만 어느덧 어머니의 필체도 동글동글 무르익어 갔다. 지금의 내 글씨체가 아마도 어머니의 글씨체를 많이 닮은듯한데 내 딸아이들의 필체 또한 나와 비슷한걸 보면 글씨도 유전이 되나보다. 글씨도 나처럼 나이를 먹는지 써놓고 보면 예전만 못 하다. 습작을 한답시고 초고를 써놓고 보면 내 필체는 정갈하고 예쁜 글씨로 시작했다가 마지막엔 나도 모르게 악필이 된다. 그럴 때마다 또박또박 편지를 쓰시던 어머니 모습과 식구들 풍경이 떠올려진다. 둔필승총(鈍筆勝聰)이라고 가르쳐 주시던 아버지의 따듯하던 마음과 어머니의 또렷한 손 글씨가 아로새겨진다.
꽃들이 화사하게 피는 아름다운 봄날이다. 글쓰기 시간에 김 팀장님이 '아내 생일날'을 낭독하는 소리를 들었다. 부부의 따뜻한 사랑이 밀물되어 저마다의 가슴으로 밀려와 "참 부럽다", "좋네요" 칭찬의 소리가 이구동성이다. 부부란…. 내 생일 날이기에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나는 직장에 다니면서 평생 홀로 사신 시모님이 어려워 말 못하고 살았지만 시모님이 챙겨주셔서 생일날은 미역국, 생선, 나물로 따뜻이 먹었었다. 지난 일요일 자식들이 모여 생일축하 점심을 같이 했다. 그러나 실제 생일날인 오늘 아침엔 미역국도 못 먹고 점심엔 혼자 밥 먹고, 저녁은 빵과 음료수를 들고 와 혼자 먹으니 눈물이 맺힌다. 부부래야 그 흔한 '축하한다', '사랑한다' 말 한마디 들어 본일 없고, 몇 년 전 점심엔 잡채밥 두 번 사준일 밖엔 기억이 없다. 그래서 난 가슴의 한을 말 못하고 혼자 속상하고 눈물지으며 속을 썩이다가 지쳐 머리도 빠지고 쭈글쭈글 주름진 황혼의 인생이 되지 않았나. 평생 동안 직장의 중책을 맡으며 연구 노력해 앞서가는 사회생활로 지도자의 길을 걷던 남편이었다. 오늘은 문학 행사로, 내일은 시 낭송으로, 학생교육 연구학교 발표활동으로 밤낮으로 많은 노력을 했다. 결혼하고 월급봉투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다. 한 달에 100만 원씩 37년을 주고 아이들 대학등록금, 서울 생활로 방 얻어 주고, 결혼시켜 전세 방 얻어주고, 집을 살 때도 난 혼자 살아야 했다. 맨날 불평불만 흉을 보며 자기 혼자만의 명예와 욕망을 생활하며 잘못된 것은 전부 아내 탓이었다.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상부상조하며 아껴주고, 잘못은 감싸주고 덮어주며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나도 잘 한 것이 없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주어진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며 많은 눈물을 감추고 자식을 위하고 가정을 지키며 오늘까지 노력했다. 앞으로 어떤 삶이 닥쳐올지 두렵다. 큰 소리치고 남모르게 많은 속을 썩이던 당신이지만 지난날을 생각하니 그것은 당신의 무언의 사랑이었다. 우리 부부의 사랑이요, 삶인 것을…. 젊었을 때는 내가 남편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살았으나 나이가 들면서 남편은 "여보"하며 아내의 도움을 받으며, 인생의 덕망을 쌓으며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서로를 향해 '여보', '당신'이라고 다정하게 부른다. '여보(如寶)'라는 말은 '보배와 같다'는 말이고, '당신(當身)'은 '내 몸과 같다'는 말이다. 마누라는 '마주보고 누워라'의 준말이고, 여편네는 '옆에 누워 있네'에서 왔다고 한다. 세월이 가면 어릴 적 친구와 이웃도 친척들도 다 곁을 떠나게 된다. 마지막까지 내 곁을 지켜줄 사람은 자녀들이고, 남편이고 아내다.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며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한 평생 사노라면, 걷다 달리다 넘어지고 칠전팔기로 살아오지 않았나. 반백년 삶이 영상으로 흘러온다. 세월을 쌓으며 가는 것이 부부가 아닌가. 오늘도 내일도 밟히는 이름 없는 그림자 되어 함께 걸어가는 것이 가족이고 부부다. 세월 따라 인생길 따라 어느 멋지고 푸르른 날 사랑하는 자식들과 당신과 영원히 행복하길…. 아름다움이 숨어 수없이 펼쳐 황혼이 내려앉았다. 또 아름다운 내일이 오겠지. 매년 5월 21일은 부부의 날이다. 21일은 둘이 하나 되어 평생을 살라는 뜻이란다. 부부관계가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서로가 평등하고 민주적인 부부 문화를 퍼지게 하고, 건전한 가족 문화를 정착 시키며 가족 해체를 예방하기 위해 부부의 날이 제정되었다고 한다. 세월의 때가 묻은 낡고 누런 책들이 책꽂이에 꽂혀 있다. 살아오는 동안 무언으로 사랑 했던 당신 불타는 정열들을 다시 일깨우고 싶다. 부부는 행복을 만들어가는 일심동체다. 나는 당신의 아내, 당신은 나의 남편. "여보" 우리는 푸른 5월의 부부임을…. 그래도 긴긴 세월 가정을 지켜온 당신의 고생과 희생도 많았다. 부부일체란 말이 생각난다. 노을빛 물든 황혼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충북일보] 임화는 1930년대 전후의 대표적 카프(KAPF) 시인이자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다. 김기진과 함께 카프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면서 한국문학사의 계급주의 문학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의 계급주의 문학은 사상적 이데올로기에 치우쳐 예술성을 소홀히 하였다는 부정적 평가와 일제의 식민통치 속에서 태동된 저항문학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특히 신경향파 시의 과격한 폭로와 거친 구호성 문장들을 극복하고 계급주의 사상을 기조로 한 정치적 신념을 감동적 서사로 형상화한다는 점이 높게 평가된다. 식민화와 현대화가 동시에 진행되던 우리 민족의 특수한 상황을 성찰한 점,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신랄하게 비판한 점, 사회주의 사상으로 인민대중을 계몽하려한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는 시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면서도 문학성을 살리기 위해 표현과 구조를 적극적으로 탐구했다. 미적 거리 확보를 위해 비유적 이미지와 상징적 기법들도 다양하게 사용했다. 주관성을 강화시켜 대상과의 거리를 없애려 했고, 대화와 서술적 담화를 사용해 극적 이야기를 제시했다. 그는 일생 동안 100여 편의 시를 남기는데, 1926년부터 1928년까지의 초기 시에는 소년 임화의 다양한 세계관과 방황의 편력이 나타난다. 감상적 허무주의와 생경한 프롤레타리아 사상이 나타나고 다다이즘의 아방가르드 실험도 나타난다. 이 시기 동안 임화가 보여준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미래주의 정신은 당대 우리 시의 감상성을 극복하는 미적 책략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29년에서 1933년까지는 시인이 스스로를 전투적 프롤레타리아트로 생각하던 시기로 민중의 투쟁적 삶을 '네거리의 순이(順伊)', '우리 오빠와 화로(火爐)' 같은 단편서사시로 발현한다. 이후 카프 2차 검거가 이루어진 1934년부터 1939년까지는 고난의 시기로 임화가 가장 왕성하게 시를 발표하던 시기다. 자학적 실존의 고투와 좌절, 역사적 전망의 부재 등 밤의 이미지로 짙게 나타난다. 이후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그의 시는 혁명적 낭만주의로 변화된다. '너 어느 곳에 있느냐'는 6·25 전쟁 중 애절하게 딸을 찾는 시인의 절규가 울리는 시다. 낙동강 전선에서 패한 인민군이 북으로 퇴각할 때 임화는 첫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딸(혜란)을 남쪽에 두고 떠난다. 압록강 중류의 자강도에 머물면서 두고 온 딸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가슴 저린 아픔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데 이 시를 두고 논쟁적 비판이 쏟아진다. 카프 시절부터 정치노선과 문학이념의 차이로 갈등을 겪어왔던 반대파들로부터 심각한 공격을 받는다. 북한군의 전의를 상실하게 해 인민에게 비통함을 안겨주었고 감상적 톤의 목소리가 투쟁적 전의를 상실케 했다는 것이다. 이후 남로당계의 몰락과 함께 임화는 미(美)제국주의의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1953년 12월에 사형된다. 임화의 문학은 지금도 논쟁적이다. 카프 시절의 아나키즘 논쟁, 대중화 논쟁, 볼셰비키 논쟁, 김기림과의 시론 논쟁, 해방 후의 민족문학 논쟁 등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주요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때문에 그의 문학작품 또한 보는 방향과 시각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며칠 전 살던 집이 계약만료 되어 바로 옆 동네로 이사를 했다. 아침부터 서둘렀는데도 살아오면서 하나둘씩 늘어난 살림살이가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사실은 2년 전 이사할 때 직장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내가 도맡아 했었다. 점심때가 지난 줄도 모르고 아내와 둘이서 이방 저 방을 정리하다 보니 동생네 가족이 부모님을 모시고 들어왔다. 동네 음식점에 부탁한 식사가 배달되어 먹으려 하는데 아버지가 보이질 않았다. 분명히 인사도 드렸었는데…. 어머니와 동생네 가족들께 먼저 식사를 하라고 하고 밖으로 나가 아파트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버지가 등나무 아래 홀로앉아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깜짝 놀라 무슨 일 있으시냐고 물어보니 아버지는 눈물을 훔치시며 "애비야. 니가 이사를 한다니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나는 하나도 기쁘지가 않구나!"라고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 왜그러세요. 저번에 살던 집보다 교통도 좋고 햇볕도 잘 들어 저는 좋은데요. 집사람도 이 집이 마음에 든다고 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고 부자(父子)는 그렇게 한참을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이 오십이 넘어 집 한 채 없이 이리저리 떠돌며 사는 큰 자식이 안쓰러워 그러신다는 것을, 큰 자식 이사하는 날, 돈이라도 보태주질 못하시는 심정을 토로하신다. 돌아보니 아버지의 삶도 참 고단했다. 30대에 홀로되신 할머니 대신 몇 마지기 안 되는 농사일 도맡아 하시면서 동생들 돌보느라 정신없이 사셨다. 지금도 아버지의 손마디는 한여름 가뭄의 논바닥처럼 갈라져 있고, 젊어서 지게질을 많이 한 탓에 등은 고갯마루처럼 굽어도 너무 많이 굽었다. 가끔씩 아버지 손을 잡으면 그동안 살아온 인생의 고초와 나이가 그대로 새겨져 있는 것 같아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농사일 밖에 몰랐다. 그러다 보니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단순한 진리와 흘린 땀의 정직함만 알았지 세상 살아가는 지혜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사셨다. 우암산 관음사 주지스님의 소개로 어머니를 만나 삼남매를 낳았다. 아이들 학교걱정, 먹고 살 걱정에 청주로 나와 연초공장에서 정년퇴임을 하셨다. 우리가족이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수동 달동네 조그마한 판자집이었다. 어머니는 절에 가서 하루 종일 일을 하셨고, 아버지는 연초공장을 다니셨다. 가끔씩은 아버지가 오징어 한 짝을 들고 집에 오는 날이 있었다. 어머니가 웬거냐고 물으면 아버지는 씁쓸한 표정으로 이번 달 월급이라며 건네시던 모습이 낡은 내 기억 속에 아직도 남아 있다. 한밤중에 깨어보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아버지는 마당 귀퉁이에서 담배를 물고 오래도록 서계셨다. 행여, 약주라도 드시고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온 가족은 비상이었다. 저 멀리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가족과 세상을 모두 잃고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린 패잔병 같았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이로다." 집에 오셔서도 아버지는 이 노래를 밤새도록 부르다가 잠이 들곤 하셨다. 정년퇴임 하시던 날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함께 연초공장을 찾았다. 다른 분들은 훈장과 상장을 한 아름씩 받아들고 기뻐하는데, 기능공이었던 아버지는 하회탈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상장하나 받지 못하는 아버지를 위해 청장님께서 특별히 마련하신 선물이었다. 아버지 퇴직한지 20여년이 지났지만 하회탈은 지금도 이사할 때마다 제일먼저 챙기는 내 삶의 가보(家寶)가 되었다. 그 속에는 아버지의 젊음이 있고 뜨겁게 살아오신 인생이 담겨져 있기에…. 가족을 위해 모진 삶을 사셨음에도 그저 웃음만 짓고 계시던 아버지의 그때 모습이 바로 어제 같은데 내일 모레면 팔순이다. 살아오면서 나는 아버지 우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내 기억 속에 아버지는 울지 않으셨지만 한 사내는 평생을 울었다. 힘들어 논밭에 쓰러져서도 울었고, 아내의 가슴에 파묻혀서도 울었다. 자식들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울었고, 등에 짊어진 무게가 힘겨워서도 울었다. 아버지 나이 쉰에는 내 나이 쉰 보다 더 크게 울었다는 것을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았다.
[충북일보] 고은의 시편들은 삶의 편력만큼 굴곡이 심하고 다채롭다. 시공간이 방대하게 열려 있고 등장인물 또한 매우 다양하다. 어떤 시는 높은 바위산이고 어떤 시는 낭떠러지 계곡이다. 어떤 시는 핏물이 스민 대나무고 어떤 시는 칼바람에 유연히 몸을 휘는 갈대다. 어떤 시는 태양이 이글거리는 여름이고 어떤 시는 눈보라 몰아치는 혹한의 겨울이다. 어떤 시는 잔잔한 물결이고 어떤 시는 격류다. 어떤 시에서는 뒷골목 만취한 부랑자의 고함소리가 들리고, 어떤 시에는 격랑의 시대를 헤쳐 나가는 검푸른 파도소리가 들린다, 그에게 현실의 질곡과 시의 질곡은 하나다. 시는 역사의 산물이기에 시가 죽으면 역사의 진실이 죽는 것이다. 초기 시에는 이런 역사의식보다 허무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 시기의 허무적 비애감은 만물은 소멸한다는 죽음의식에 기초한다. 이 죽음의식이 지상의 삶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낳고 기행(奇行)과 자학적 일탈을 낳는다. 만물의 근원에 대한 천착과 최초의 시간에 대한 갈망을 낳는다. 중기로 접어들면서부터 그의 시는 역사와 현실에 대해 날카롭게 눈뜨기 시작한다. 10년 동안의 승려생활을 마감하고 환속한 그는 1970년대 참여문학 대열에 합류한다. 삼선개헌 반대운동에 참여하면서 사회와 정치에 눈을 돌리고, 민족의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과 민중적 역사의식을 싹틔운다. 불의의 시대, 폭압의 정치권력에 맞서 격렬히 투쟁한다. 이때부터 체포와 구금이 반복되고 초기의 허무주의와 탐미주의 시적 자아는 자취를 감춘다. 후기로 접어들면서 그는 현실과 역사를 다면적으로 응시하여 그것을 서사적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시공간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역사 속 민중들의 삶의 세목들을 반복과 중첩의 미학으로 형상화한다. 선(禪)적 사유와 리얼리즘 시각을 결합하여 짧은 선시도 쓰고, 필생의 작업으로 생각했던 『백두산』(전7권)과 『만인보』(전30권)를 집필해 나간다.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는 1967년 신동문(辛東門, 1928~1993) 시인의 모친상을 주관하기 위해 충청북도 문의 마을에 갔을 때의 사색적 경험을 담은 시다. 눈 내리는 겨울날의 문의 마을이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서정적 공간으로 그려져 있다. 죽음만큼 적막한 길, 마을의 모습이 애잔한 이미지로 떠오른다. 휘날리는 눈에게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고 묻는 시인의 마음 또한 백자 항아리처럼 차고 서늘하다. 삶의 길과 죽음의 길을 사색하면서 시인은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느낀다. 마을의 길과 들판을 덮는 눈은 주검을 덮는 흰 수의를 닮았기에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를 촉발하는 숙명적 소재로 사용된다. 결국 눈이 마을 전체를 하얗게 뒤덮어가는 과정은 죽음이 삶을 껴안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의식(儀式)인 셈이다. 그렇게 삶과 죽음은 하나가 되고 있다. /함기석시인
신석정은 흔히 동양적 전원시인으로 불린다. 전원에 귀의하는 시세계를 지속적으로 추구했고 시의 소재들을 자연에서 가져와 목가적 사색과 성찰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목가풍의 낭만적 세계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다. 산, 꽃, 달, 나무, 강물, 호수 등 전원의 소재들을 많이 사용한 건 사실이지만 그것들을 통해 낭만적 관조의 세계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그의 여러 시편에는 절망적인 현실을 직시하는 시선, 혼탁한 사회를 고발하는 참여의식이 나타난다. 이는 그의 이상향(理想鄕) 추구가 시대의 어둠과 현실의 고통에서 발원한 것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신석정 초기 시의 핵심 키워드인 '임'과 '어머니'를 축소해석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임'은 사랑하는 연인이라는 인간 차원을 넘어서서 시인 자신이 숭배하는 자연이나 사회, 나아가 어떤 절대적 존재일 수 있다. 은행잎, 햇볕, 호수, 해, 달 등의 소재들은 자연과 시적 자아를 연결하는 매개물 역할을 하고, '어머니' 또한 이상세계로의 안내자내지 매개자 역할을 한다. 시적 자아는 계속 어머니를 부르며 전원의 이상향으로 가게 해달라고 열망한다. 신적정의 시에 신비하고 낭만적인 서정,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분리가 자주 나타나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바다에게 주는 시'는 세 번째 시집 '빙하(永河)'에 수록된 시다. 관찰대상을 이전의 시들과는 다소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다. 동심과 서정이 물씬 느껴지는 작품으로 시인의 천진하고 장난스런 동심의 상상력이 잘 드러나 있다. 1연에서는 바다와 바위의 관계가 재미있고 독특하게 설정된다. 바다는 파도소리, 물새소리, 뱃소리 등을 통해 날이면 날마다 바위에게 귀가 따가울 정도로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로, 바위는 바다의 그런 수다에 지쳐서 베토벤처럼 귀가 먹은 존재로 그려진다. 마치 오래된 부부나 토라진 연인처럼 정겨우면서도 우스꽝스런 사물들의 관계다. 2연에서는 지구가 등장한다. 지구도 수다스런 바다가 성가시고 싫었으면 벌써 엎질렀을 거라고 시인은 말한다. 이 역설적인 말 이면에는 지구 또한 언제나 바다를 품어 안는 따뜻한 존재라는 전언이 숨어 있다. 3연은 그런 바다를 보며 언덕에서 동백꽃이 웃는 장면이다. 그것도 파란 이파리 사이에 숨어서 아이처럼 웃는다. 그렇게 자꾸만 웃는 동백꽃을 바라보며 시인은 동백꽃 그 빨간 입술이 예뻐 죽겠다고 말한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마음이 따뜻해지고 입가에 환한 미소가 돋는다. 암울한 현실 인식, 비극적 시대상 반영 등이 여러 시편에서 나타나지만 신석정 시 전반에 걸쳐 도드라지는 가장 큰 주제는 이상향 세계에 대한 추구다. 초기에 나타나는 이상향이 절망적 현실의 도피적 세계였다면, 그 이후에 나타나는 이상향은 절망적 현실에 대한 직시와 사회 고발이 낳은 대안적 세계라 할 수 있다. 그가 추구했던 전원적 목가풍의 이상향 세계는 시인의 동경의식이 반영된 가상의 공간, 순수의 공간, 열망의 공간이다. 그만큼 시인은 고통스런 현실 저 너머의 평화로운 전원세계를 진심으로 그리워했다. /함기석 시인
어릴 적 여름이면 소를 뜯기러 마을 앞으로 흐르는 미호천 냇가로 나갔다. 순한 어미 소는 여유롭게 홀로 강둑을 오가며 풀을 뜯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물에 들어가 멱도 감고 맨손으로 고기도 잡았다. 물속 풀뿌리 사이를 손으로 더듬어 물고기를 움키어냈다. 가끔은 한 뼘이나 되는 큰 붕어도 잡았다. 잡은 물고기를 바랭이 풀 꽃대에 아가미를 꿰어 가지고 집으로 향하였다. 해 질녘 한 손으로는 소고삐를 잡고, 또 한손으로는 물고기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가는 길은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 하였다. 할아버지는 물고기 매운탕을 무척 좋아하셨다. 할아버지께서 맛있게 잡수실 것을 생각하면 절로 신바람이 났다. 야트막한 산 아래 동네 초가집들 굴뚝에서는 저녁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도 저녁밥을 지으시느라 아궁이 앞에서 매콤한 연기에 흐르는 눈물을 앞치마로 훔치고 게시겠지· 저녁 무렵이면 더위가 가셔 시원한 바람이 불어 상쾌 하였다. 좁은 논밭 둑을 따라 일 열로 친구들과 함께 소들을 몰고 집으로 향했다. 날파리를 쫒는 소들이 목덜미를 좌우로 흔들어 대니 워낭이 땡그랑 땡그랑 박자를 맞추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을 한다. 지금도 그 모습이 꿈속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가장 먼저 반겨주는 이는 할머니와 어머니였다. 할머니는 어린 손주가 어떻게 물고기를 이리도 많이 잡아왔느냐고 하면서 무척 대견해하셨다. 어머니는 금세 저녁 밥상에 짜글짜글 매운탕으로 끓여 내놓으셨다. 매운탕을 맛있게 잡수시면서도 할아버지께서는 자주 말씀하셨다. "앞으로 물고기는 그만 잡고 그 시간에 공부를 더 열심히 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나중에 성공했을 때 시장에서 더 맛있는 고기를 사 오너라." 할아버지는 그리도 맛나게 잡수시는 매운탕보다도 손자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일을 더 바라셨다. 그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할아버지는 건강이 좋지를 않아 십여 년의 투병 생활을 하시었다. 아버지의 극진한 봉양에도 한계가 있었는지 내가 중학교 삼학년 때 세상을 뜨셨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 맛있는 고기를 사다드릴 기회가 오기도 전에 할아버지께서는 환갑도 못 넘기신 채 돌아가셨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후 교편을 잡고 있었다. 할아버지께 다하지 못한 효도를 할머니께 해드려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객지에서 가끔 집에 오면 연로하신 할머니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때로는 머리도 손톱 발톱도 깎아 드렸다. 어느 토요일 날이었다. 청주에 도착을 하여 시내버스로 갈아타는 길가에 잉어를 파는 아저씨를 만났다. 할머니 생각이 났다. 연로하신 할머니께 보양식이라도 해드려야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가격을 물어 보니 삼천 원이란다. 그 당시는 삼천 원이 적지 않은 돈이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돈이 모자랐다. "아저씨 작은형 집이 십분만 걸어가면 있는데 같이 가주시면 잉어를 사겠습니다." 고 했다. 아저씨는 쾌히 승낙을 하시었다. 사정을 설명하며 작은 형수에게 돈 삼천 원만 빌려 달라고 했다. 형수는 이미 늦었다고 하면서 할머님께서는 지금 아무것도 드시질 못한다고 한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인가. 연세는 드셨지만 지난번 때까지만 해도 식사도 잘 하셨는데…. 아저씨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니, 효성스러운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며 이해를 해주시었다. 안방에는 할머니가 누워 게시고 같은 동네에 사시는 친척 어른들 몇 분이 침묵으로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아버지가 셋째 손자가 왔다고 큰 소리로 할머니 귓가에 바짝 대고 말씀을 드렸다. 할머니는 힘겹게 눈을 가늘게 뜨셨다. 아버지의 요청으로 숟가락으로 미지근한 물을 떠 넣어 드렸다. 할머님께서는 힘겹게 물 한 모금을 넘기시었다. 효행록에 전하여 오는 왕상의 고사가 생각이나 더욱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옛날 중국에 왕상이라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병을 앓으면서 겨울에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왕상이 옷을 벗고 강의 얼음을 깨고 들어가려 하였더니, 갑자기 얼음이 깨지면서 잉어 두 마리가 얼음 속에서 뛰쳐나왔다고 한다. 잉어를 먹은 왕상의 어머니 병이 나았다 한다. 진작에 할머님께 잉어를 사다 과드렸으면 기운을 차리시고 더 살아계셨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그날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셨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어느덧 나도 칠십을 바라보는 노년에 접어들고 있다. 얼마 전에는 아버지께서도 돌아가시고 이제 구순이 넘어 홀로 되신 어머니만 생존해 계신다. 내일은 시간을 내어 어머니를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겠다.
여느 시골풍경이 다 그러하듯이 내 고향 시골집 뒤뜰에도 조그만 텃밭이 있다. 이 텃밭에는 식물이 자랄 수 없는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채소가 항상 자라고 있다. 겨울은 지난 해 늦가을에 파종해 놓은 마늘이 땅속에서 싹 틔울 준비를 하고 있으니 일년 내내 밭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어머니께서는 그 조그만 텃밭을 누구보다 잘 활용하셨다. 1년 동안 파종계획을 세우셨는지 절기에 따라 필요한 채소 종류를 정확하고도 적당한 양으로 심고 가꾸시었다. 무엇을 얼마만금 언제 파종할지는 전적으로 어머니가 결정하셨다. 거름 주고 물주고 가꾸는 일은 어머니 지휘하에 육남매 자식들의 역할이었다. 파종할 때 옹골찬 씨앗을 심지 않고 가뭄에 물주기를 게을리 하고, 잡초제거를 제때 해주지 않으면 훈계하고 엄하게 꾸짖으셨다. 잘 가꾼 텃밭의 채소는 아침저녁으로 매일 한 번씩은 들러 수확하였다. 그때마다 싱싱한 채소는 맛난 반찬으로 식구들을 만족시켰다. 지금이야 텃밭에 채소를 가꾸는 것을 취미삼아 하지만 내 어릴 적 텃밭은 어머니에게는 생계이었을 것이다. 이런 텃밭이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선조 때부터 살아오던 낡은 집을 허물고 새집을 짓게 되었다. 자식들은 모두가 건축가인양 나름 아이디어를 가지고 논의를 하였다. 그중 뒤뜰 텃밭 쪽으로 집을 짓고 앞마당을 넓게 쓰자는 의견이 다수였다. 이 계획을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께서는 "텃밭은 지금 그대로 그냥 두어라"하시고 아무런 말씀도 없이 상기된 얼굴을 하시고 조용히 자리를 피하셨다. 한참 새집 구상에 들떠있던 형제들은 어머니의 말씀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 자식들이 장성한 후론 평상시는 당신 의견은 좀처럼 표현하지 않으시다 오늘은 완고하게 반대를 하셨다. 뭔가 잘못 되었구나 싶어 아버지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텃밭은 과거에는 새색시 시절 고단한 시집살이에 친정생각나면 찾아가서 위로를 받던 곳이다. 맛난 반찬으로 가족들 건강유지를 시켜 주는 근원지이었고, 부족한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는 곳이었다. 노년에는 자식들 모두 도회로 보내고 조그만 텃밭에서 소일삼아 매일 직장에 출근하듯이 찾는 곳이란다. 그곳에서 과거도 회상하고 위로도 받는 그런 귀한 장소다." 아버지 말씀을 듣고 나니 자식들은 마당 넓은 집만 생각하고 가끔 오는 자식들 위주로 판단했고, 새로 지은 고향 집에서 노년을 보내야 하는 어머니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텃밭이 없어지는 것보다 자식들이 당신을 배려해 주지 않는 것에 더 서운해 하셨을 게다. 이를 어찌하나. 텃밭이야 남겨두고 앞마당을 좀 작게 사용하면 되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서운하게 해드린 게 죄만스럽다. 자식들이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에 대한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 결국 텃밭은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어머니께서는 조그만 텃밭을 친구삼아 더 알뜰히 가꾸시고, 자식들이 고향방문 할 때면 어김없이 텃밭의 싱싱한 채소로 밥상을 차려주셨다. 이게 어머니 밥상이구나. 이후로 자식들은 고향집에 가면 너나 할 것 없이 텃밭에 인사라도 하듯 꼭 들러보는 장소가 되었다. 한동안은 텃밭이 제 역할을 넘칠 정도로 충분히 해내었다. 그러나 수년 전 어머니께서 낙상사고를 당하시고 오랫동안 병원생활을 하시면서 텃밭의 풍경은 순식간에 달라졌다. 빠르게 자라는 잡초는 누가보아도 눈살을 찌푸리기에 충분했다. 어머니의 친구 같은 텃밭이 돌보는 사람이 없어 무성한 잡초로 변해가는 것을 보시면서 텃밭과 당신의 신세를 동일시하게 여기셨다. 텃밭을 바라보는 불편한 어머니의 마음도 살피고, 철따라 고향방문도 자주 하겠다는 굳은 마음을 합하여 대추나무를 심었다. 건강이 회복되면 예전처럼 쑥갓도 심고 마늘도 심을 수 있게 그냥 두는 게 좋겠다는 어머니 말씀을 이번엔 따르지 않았다. 회복이 어렵다는 의사의 진단을 어머니께서는 알지 못하신다. 지난해에는 게으르기도 하고 이런 저런 여러 가지의 일로 대추나무를 돌보지 않아 어머니께 또 다른 걱정을 드렸다. 올해는 텃밭에 대한 어머니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정성을 다해 가꾸어 잘 익은 대추만큼 어머니 건강도 좋아지셨으면 한다. 아니 그보다 올봄은 어머니께서 회복하시어 예전처럼 자식에게 맛난 '어머니 밥상'을 차려줄 수 있으셨으면 …….
박인환은 도시적 비애와 우수, 인생의 고뇌를 센티멘털한 감정으로 표출한 모더니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죽음의 세계로 떠난 자들에 대한 슬픈 감정을 술과 예술로 위로했던 시인이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지나친 주관성이나 낭만적 영탄을 지양하고 삶에 대해 지적 태도를 취한다. 웅변적 진술이나 이미지 묘사 대신 비장한 감정이 담긴 노래의 방식을 취한다. 음악적 리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시의 새로움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난해성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거꾸로 쓰기도 시도했고, 시를 끝 행부터 거꾸로 씀으로써 의식의 단절과 행간의 의미 비약에 따른 낯선 효과를 노리기도 했다. 즉 시대적 혼란기 속에서 그는 기성질서에 대한 반역과 도전을 꾀하며 자유를 향한 열망을 술과 사랑과 시로 풀어냈던 것이다. 때문에 지금도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전후의 황폐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청록파적 시 경향에 반발하여 전통 서정을 부정하고 새로운 모더니즘을 모색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는 반면에 한자어의 범람, 어휘의 빈곤, 경박한 멋 부리기, 산만한 이미지 등을 지적하는 부정적 평가도 공존한다. 6.25 이후의 한국문학은 전쟁의 비극적 체험, 삶에 대한 혼돈과 회의, 도시 문명화에 따른 비인간화 현상 등 허무적 경향이 짙다. 이 시기 동안 쓴 박인환의 시에도 허무의식과 센티멘털 감정이 짙게 드러난다. 전쟁의 참화와 비극, 폐허가 된 땅과 암담한 현실, 도시적 우수가 깃든 페이소스 등이 빈번하게 드러난다. 전후의 정신적 황폐와 불안감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동안 그에게 시는 생을 지탱하는 마지막 끈이었다. '한 줄기 눈물도 없이'는 박인환이 1951년 육군 소속 종군작가단으로 참전했던 경험을 토대로 쓴 시다. 자유를 위해 전쟁을 치르다 죽은 어느 젊은 병사의 죽음을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 제트기가 날아다니고 박격포 포탄이 터지고 수류탄이 터지는 전장에서 무참하게 죽은 병사의 주검 위로 음산한 잡초만 무성하고 비가 내린다. 생명에 대한 허무감, 시대에 대한 깊은 좌절감이 짙게 느껴진다. 이제는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이 주검이 널브러진 들판은 종전(終戰) 후 살아남은 자들의 내면이자 사회현실, 시인의 눈에 비친 조국의 현실이자 시대상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아프게 고백한다. "이 세대는 세계사가 그러한 것과 같이 참으로 기묘한 불안정한 그러한 연대였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해 온 그 어떠한 시대보다 혼란하였으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것이었다." /함기석 시인
김구용은 동양사상과 서구의 모더니즘을 혼합하여 독자적이고 파격적인 시세계를 개척한 시인이다. 그의 시를 논할 때 늘 따라다니는 지적이 난해성이다. 김구용 시가 난해한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추상명사와 한자어가 많이 사용되고 은유로 표현된다는 점, 둘째 전통서정시 양식을 지양하고 모더니즘의 형식과 발화를 취한다는 점, 셋째 이미지들이 복잡성을 띠며 비논리적으로 연결된다는 점, 넷째 결론부터 던져놓고 시가 출발되어 일반적 사고수순을 전복시킨다는 점, 다섯째 사유의 바탕에 불교와 노장 등 어려운 동양사상이 깔린다는 점, 여섯째 시의 분량이 길고 호흡이 숨차다는 점 등이다. '유리창'은 비교적 난해하지 않은 시다. 1950년 6·25전쟁의 상흔(傷痕)을 암울한 색채로 그려낸 작품이다. 시인이 커튼을 걷자 유리창 밖으로 도시가 나타난다. 공습전투기가 빠른 속도로 날아와서 검은 배를 드러내며 지나간다. 시인은 지금 유리창 안에서 유리창 밖의 풍경, 전투기들에 의해 폭격당하는 도시를 바라보고 있다. 포탄이 떨어져 도시는 쑥대밭이 되고 대공포는 계속 불을 뿜는다. 폭격 속에서 무너지는 건물들, 비명을 지르며 골목을 달리는 사람들,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모습들은 말 그대로 지옥이다. 전투기소리, 대공포소리,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저승의 아우성 소리'다. 그런데 이 끔찍한 공포의 장면들은 시인의 상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시인이 체험한 6.25전쟁의 생생한 기억이다. 무자비한 파괴와 학살이 자행되는 현장을 목격하며 시인의 가슴은 갈가리 찢어졌을 것이다. 전쟁의 현장 그리고 미래의 위치에 서 있는 시인에게 20세기는 전쟁과 살인의 시대, 광기와 도륙의 시대일 수밖에 없다. 이 비극의 세기와 함께 무너지는 도시와 함께 시인도 무너진다. 유리창 밖의 세계와 유리창 안의 세계가 동시에 무너진다. 결국 살아남은 자는 어디에도 없고 전쟁이 파괴한 도시엔 온통 백골들뿐이다. 여기서 주목해할 것이 현실과 초현실의 관계다. 현실의 참혹한 파괴와 죽음의 공포가 시인으로 하여금 초현실적 이미지를 낳게 했다는 사실이다. 즉 김구용 시에 나타나는 초현실적 이미지는 현실도피 욕망의 자폐적 산물이 아니라 전쟁의 고통이 낳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파편들이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20세기의 비극과 전쟁의 참상을 드러내려 했다는 점에서 김구용의 난해한 시작(詩作)은 귀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시인이 유리창을 통해 진정으로 보고 싶었던 것은 비극의 도시가 아니라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의 아름다운 들길이었을 것이다. 꽃들 사이로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나비와 낙엽 깔린 가을날의 고요였을 것이다. 그럴 때 시인에게 유리창은 한없이 맑고 투명한 존재,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로 다가온다. 이런 시인의 마음이 투영된 작품이 아래의 '나는 유리창을 나라고 생각한다'라는 시다. 이 시에서 유리창은 시인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분리할 수 없는 동일한 존재다. 나는 이 유리창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계절마다 가지가지로 변하는 벽화는 없을 것이다. 전등을 죽여도 해와 달과 별들이 창에 끓어올라 심심하지 않다. 당신이 날씨를 살피며 기다리던 사람이 오후의 길을 오는 것이 보이는 나는 이 유리창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러한 생각을 하느뇨. 암만하여도 나는 그 순수한 투명이 좋은가 보다. 아지랑이를 따라 꽃에서 꽃으로 날으는 나비의 기쁨도, 책상 너머 바깥에서 오랫동안 더위를 씻어주던 녹음綠陰이 낙엽지는 고요도, 잘 익은 과실나무 아래서 생각하던 사람이 부르는 목소리도, 다 그대로 전하여 주는 나는 이 유리창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둠을 차별하지 않기에 한 쌍의 제비가 단꿈 꾸는 그믐밤도 미워하지 않는다. 이 유리창과 나를 분리할 수는 없다. 눈보라 칠 때 유리는 추위가 방안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아주건만 방안의 나는 젊은 소경이 피리를 삐이삐이 불며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듣는 나를 슬퍼한다. 그러나 유리창이 맑음을 잃고 추위에 복잡한 꽃무늬로 동결凍結한 모양이 내 아름다운 슬픔의 형상임을 보기도 한다. /함기석 시인
어느 때부터인가는 몰라도 나이가 들어 세상을 알아가면서 제일 존경하고 좋아하는 직종이 남을 가르치는 교직이다. 내가 배워 아는 것을 남에게 가르쳐주고, 성장을 도와주고, 삶을 윤택하게 하고, 인류를 편히 살게 하는 것이 얼마나 존귀한 일인가· 그래서 선조들은 "스승에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 선생님들은 아이들 다루기가 무척이나 힘들다고 한다.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다. 문제를 일으켜 언론의 질타를 받는 경우도 때로는 있다. 어려운 여건에도 묵묵히 바른길로 학생들을 인도하시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셔서 교육이 바로 서고 있어 다행이다. 며칠 전 중학교 교장선생님의 퇴임식에 초청을 받아 가보았다. 교통이 막혀 조금 늦게 도착하였다. 퇴임식 장소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노는 강당이다. 황급히 강당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은은한 음악이 들린다. 학생들이 연주하는 곡이다. 음악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순간 마음이 정돈되며 엄숙해진다.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아 습관처럼 기도 했다. "어려운 길을 잘 통과하고 퇴임하는 선생님께 인간이 보상할 수 없는 공적을 하나님께서 보상하여 주세요."하는 기도였다. 시간이 되어 순서에 있는 대로 퇴임식이 진행되었다. 가슴에 꽃을 꽂은 선생님 내외분이 나란히 입장하였다. 순서가 막바지로 향하여 선생님의 고별사 순서다. 평소와 달리 떨리는 목소리로 교단에서의 마지막 고별사를 한다. 저의 교직 생활을 잘할 수 있게 도와준 여러분과 특히 어려운 가계를 잘 꾸려주어 가정을 바르게 이끌고 마음 놓고 후학을 가르치게 도와준 아내에게 감사합니다. 학생들에게는 덕담을 남기고 학생 여러분 사랑합니다. 라고 끝을 맺는다. 인사를 맺는 목이 멘 목소리가 옹벽 같은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박수를 받으며 퇴장하는 쓸쓸한 뒷모습을 보면서 황혼 길에 접어든 나의 뒷모습은 저보다 더하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선생님보다 나이가 더 많으니 오죽하랴,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였다. 퇴임하는 모든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선생님의 오늘 퇴임은 쓸쓸하지를 않고 보람이 넘친다. 잘 가르쳐 넓은 세상으로 내보낸 어린것들이 세상을 활개 치고 다녀 성공하여 사회에 공헌하는 인재가 되어 돌아온 제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 나가 자리를 잘 잡은 제자들이 찾아와 꽃다발로 감사를 표시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경이롭다. 얼마나 보람되고 가슴 벅찬 일인가 생각하니 부럽기만 하다. 이 시간 나도 나를 가르치고 감싸주신 스승을 생각해 본다.삐뚤어질 뻔한 어려운 시기를 바로잡아준 고마운 선생님이 계셨다. 그분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하여 사회에 나와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가정을 이루고 잘 살아가니 고맙고 감사하다. 스승에 은혜는 하늘 같다하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아 송구하고 후회스럽다. 아주 오래전 퇴근길에 복잡한 시내버스 승강장에서의 일이다. 버스를 타려고 내려오는 사람을 피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고등학교 은사이신 박 선생님께서 내려오신다. 졸업한 지도 오래되었고, 나와는 특별히 접촉한 사연도 없으며 더더욱 담임도 하지 않았다. 배정된 시간에 국어를 가르치신 분이시다. 학교 졸업한 지도 오래고 특별했던 내가 아니어서 나를 모르시겠지 하는 생각에 인사하지 않으려다 얼굴이 너무 가까이 마주쳐 "선생님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였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선생님께서 "어! 신 군 오랜만 일세. 지금 은행에 근무한다지?"하신다. 만일 내가 인사를 하지 않고 그냥 차에 올라갔다면 얼마나 마음이 서운하셨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민망스러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선생님들은 제자들 하나하나에 관심을 두셨기 때문에 모두를 기억하시나 보다. 나의 은사님들을 생각하면서 나를 초청한 은퇴하는 선생님을 목수라는 생각에 머물렀다. 목수는 이 산의 곧은 나무 저 산의 굽은 나무를 함께 모아 곧은 나무는 다듬어 기둥 삼고 굽은 나무는 다듬어 들보 삼고, 어린나무는 서까래로 쓴다. 목수는 어떤 나무도 버리지를 않는다. 목수는 집을 만들어 문을 달고, 연장을 챙기면서 그때야 이 집이 내 집이 아님을 안다.아직은 연장을 대장간에 보내지 마시구려. 그 연장으로 바빠서 손 못 댄 내 집 문도 달아보고…. 선생님은 어린 학생을 가르치고 보살피느라 진작 자기 집 관리에는 소홀하였으니 이젠 집안 관리도 하시고, 기회가 오면 남은 지식을 다른 이에게 나누는 일도 좋으리라. 바른 선생 바른 제자들이 많아 더 바른 사회와 나라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조지훈 시의 가장 큰 특징은 균형과 조화다. 그의 시는 전통적 소재들을 유장한 가락으로 리듬감 있게 표현하여 격조 높은 고전적 아름다움과 향기를 발산한다. 정지용은 조지훈의 시를 가리켜 '자연과 인공의 극치'라고 상찬했는데, 정지용이 말한 자연은 조지훈 시에 나타나는 복고적 풍물과 민족적 신화에 대한 모태의식을 가리키고, 인공은 그것들을 표현하는 언어의 조탁과 형식미를 가리킨다. 그 정도로 조지훈은 전통과 현대를 지조(志操)의 시학으로 승화시킨 시인이다. 조지훈은 흔히 박목월, 박두진과 더불어 청록파(靑鹿派)로 불리는데 청록파의 시풍은 도시적 서정이나 정치적 목적성을 배제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고전미의 회복과 순수서정의 회복으로 요약된다. 그리스도의 신앙을 바탕으로 자연에 대한 친화와 사랑을 읊은 박두진이나 향토적 서정으로 한국인의 전통적 삶을 민요풍으로 노래한 박목월과 달리 조지훈은 민족의 고유문화와 불교적 소재들을 관조와 선적 사유로 풀어냈다. 초기에 그는 주로 전통에의 향수와 불교적 선(禪)의 서정을 담았고, 6·25 전쟁 이후에는 역사적 현실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어떤 시기든 그의 시의 바탕은 자연이다. 그의 시 속에서 자연은 순수한 자연 자체로 나타나기도 하고, 전통문화나 민족정서로 나타나기도 하고, 불교적 아름다움의 세계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시인의 정신세계를 끊임없이 괴롭혀온 자아의 문제와 결합해서는 역사와 민족의 문제로 확대되기도 한다. 즉 시인의 자연에 대한 응시는 곧 자아에 대한 응시고, 자아에 대한 응시는 개인에서 나아가 인간에 대한 응시와 탐색으로 이어지고, 다시 민족과 역사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조지훈에게 자연은 자아 배후에 존재하는 거대한 근원적 질서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승무(僧舞)'는 조지훈의 대표작 중 하나다. 승무는 고깔을 쓰고 장삼을 입고 가사를 걸치고 추는 민속춤이다. 정적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시인은 법고 소리를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 표현되지 않은 침묵의 소리에 리듬을 맞추어 춤추는 이의 몸이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게 움직이고 있다. 만물이 숨을 죽인 고요 속에서 이루어지는 동작 하나하나가 극도로 예민하면서도 매우 정확하고 사실적이다. 언어의 생동감이 실제의 몸동작을 압도하는 형국이어서 오동나무 잎마다 달이 지는 밤에 이루어지는 춤은 그 자체로 짙은 동양적 신비감을 자아낸다. 먼 하늘 하나의 별에 시선을 모은 춤추는 이의 눈망울, 거기에 반짝거리는 별빛은 춤추는 이의 영원을 향한 간절한 소망일 것이다. 속세의 무수한 번뇌가 아름다운 별빛으로 승화되는 감동적인 장면인데, 시작에서 끝까지 춤의 동작이 아름다운 몸에만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깊고 근원적인 종교적 명상, 선(禪)적 침묵의 세계로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춤을 멈춘 그 순간의 자세는 곧 동양적 구도의 자세이자 천지인(天地人)이 하나가 된 침묵의 극치다. /함기석 시인
대통령 탄핵으로 시국이 어수선하고 시끌시끌한 요즈음이다. 얼마전 국정농단 주범으로 구속된 최모 여인이 특검에 출두하는 장면이 TV에 생중계된 적이 있다. 그 여인이 특검이 있는 건물안으로 들어서며 갑자기 '억울하다' 며 큰 소리로 사설을 외쳤다. 때마침 건물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가 "염병 하네" 하면서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청소부 아주머니의 일침은 사람들에게 '사이다 발언' 이라고 화제가 되었다. 청소부 아주머니도 한때는 시민단체 운동권에서 활동했다는 후문도 있었다. 여하튼 "염병 하네" 하고 웨친 청소부 아줌마의 한마디가 많은 사람들 기분을 시원하게 했다고 해서 사이다 발언으로 회자가 되는 모양이다. '염병(染病)' 은 전염병과 같은 말이기도 하고, 전염병 가운데서도 장티부스를 속되게 이르는 표현이기도 하다. 전염병엔 콜레라.천연두 등도 있지만 장티부스가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옛날에는 예방과 치료제가 거의 없어 걸리면 사망에 이르기 십상인 무서운 질병이었다. 장티부스, 즉 염병이 전염성이 강하고 치료가 어려웠던 병인만큼 '염병 하네' 란 욕설 또한 독한 표현을 할 때 쓰이게 됐다. '염병을 떤다' 는 말이 쓰이기도 하는데 엉뚱하거나 나쁜 짓을 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염병 하네' 와 비슷한 욕으로 '지랄하네' 도 있다. '지랄' 은 간질병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지랄 염병하고 있네' 라고 한다면 더욱 심한 욕이 된다. "염병 하네" 로 일침을 가한 청소부 아주머니처럼 독한 표현이 때로는 속을 후련하게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을 무서운 질병에 비유하여 욕하는 건 지나친 표현인 것 같다. 최 여인에게 욕을 한 청소부 아주머니는 화가 나서 한 언행이었을 게다. 화는 사람에게 병을 불러드리는 가장 큰 원인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나무라면 젖 빨던 아이가 그 자리에서 생똥을 싼다고 했다. 아기 수유(授乳)를 위해 어머니는 정성 담긴 훌륭한 음식을 먹는다. 그 엄마가 사람들과 불화하면 아기가 먹는 것은 엄마사랑이 아닌 '엄마의 홧독' 이다. 젖을먹는 시기에 시름시름 앓는 아이, 잘 자라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가족관계를 살펴보라. 부부싸움이 잦거나 고부간 불화 등 가족 사이에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의 피는 그 맛이 대략 달고 짭짤하다고 한다. 그러나 애(五臟六腑)를 태우거나 화가 나면 홧김에 의해서 쓰고 떫은 흑갈색을 띤 강한 산성의 피로 변한다. 그러면 산성을 좋아하는 세균들이 혈액 안에 급속히 팽창한다. 그것들이 인체 중에서 가장 방비가 허술한 부위로 몰려들어 암 등 각종 병을 유발시킨다. 인간이 내는 화에 대해 독일에서 실험한 결과를 보면 너무 섬뜩한 기분이 든다. 사람이 극도로 화가 낫을 때 입에서 나오는 공기, 그러니까 홧김을 비닐에 받아 농축시켜 0.5cc의 노란 액체를 받았다. 이것을 돼지에게 주사했더니 돼지는 소리 지르며 즉사해 버리더란다. 홧김을 호박이나 오이같은 넝쿨의 생장점에 대고 불면 하루도 못가서 시들어 버린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가. 우리 속담에 '장맛이 나쁘면 집안이 기운다' 는 말이 있다. 메주를 담가서 새끼줄로 엮어 벽이나 천장에 걸어둔다. 집안의 온갖 미생물이 메주에 달라붙어 그것을 발효시킨다. 그런데 그 집안에서 가족간에 다툼이 잦으면 다툼의 홧김으로 인하여 메주 균이 죽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메주가 꺼멓게 변하고 결국 장맛이 고약해진다. 이렇듯 무서운 게 홧김인데, 잔뜩 화를 품고서 아기나 사람을 대하면 어찌 될까. 노여움과 증오, 화는 그 사람의 정신과 몸에 심한 타격을 입히며, 그 앞에서 꼼짝없이 분풀이 당하는 사람의 정신과 몸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히는 것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다. 서로간의 사랑과 극진한 보살핌에 힘입어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라고 주어진 빵인 것이다. 화는 내 욕망의 좌절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과거의 잘못에 대한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잘못은 지나간 것이라 하여 과오(過誤) 라 하지 않는가. 과거의 잘못은 '용서라는 큰 바다' 에 던지지 않고서는 없어지지 않는다. 자애(慈愛)처럼 훌륭한 교훈은 세상에 없다. 국가나 사회, 가정에 이르기까지 어느 조직에서나 사람끼리 어울려 살아가는 게 세상사는 이치다. 마주치고 부딪히는 사람끼리 화를 참고 용서하지 못하면 세상은 너무 삭막할 것이다. '평생토록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도 좋을 한 글자'를 묻는 제자에게 공자는 서(恕) 라고 하셨다.
입춘이 지났다. 봄이 문 앞에서 서성이다 노란 꽃 한 다발을 불쑥 내밀 것 같은 날씨다. 봄이 되려면 몇 번의 뒷걸음도 있겠지만, 봄은 언제나 꽃보다도 먼저 마음속에 들어와 있다. '봄'하면 부지런한 농부가 소를 앞세워 밭을 갈고 있는 풍경이 계절을 앞질러 머릿속에 그려지곤 한다. 그러나 게으른 울음을 운다던 실개천 가의 누렁소도, 너른 풀밭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송아지와 어미소도 구경하기 어렵게 된지 오래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 마음속에서 잊혀지고 있던 소가 요즘 텔레비전에 자주 오르내린다. 방송에서는 연일 구제역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조류독감에 연이은 바이러스의 습격에 긴장하며 애를 태우고 있는 중이다. 첫 발생지가 지척에 있는 곳이니만큼 신경도 많이 쓰이고 드나드는 일도 조심스럽다. 소가 개량이 되어 크고 빨리 자라는 대신 치명적인 병도 늘어났다. 타고난 수명이 20년이라는 요즘의 소는 제명도 다 못살고 기껏해야 3년을 산다. 하지만 구제역이 발생해 그나마도 제 명도 채우지 못하고 인간에 의해 흙에 파 묻혔다. 몇 해 전 구덩이 속에 생매장 되던 가축들을 방송으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어미를 부르던 송아지들과, 미처 새끼를 두고 죽을 수 없어 안락사 주사에도 반응하지 않던 어미 소의 얼굴에 흐르던 눈물과 쉰 울음소리는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다. 누구에게나 견디기 어려운 힘든 일이 있을 수 있다. 운이 좋을 때는 만사가 잘 풀리고 행복하지만, 뭘 해도 막히고 답답하고 안 될 때가 있다. 이렇듯 어려운 일이 생겨 힘 이들 때 우생마사(牛生馬死)의 지혜를 생각한다. '소는 살고 말은 죽는다.' 소와 말의 생사가 달라진 이유는 말과 소의 고난과 역경에 대한 대처방법의 차이에 있다. 헤엄을 잘 친다는 말은 강한 물살에서 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물살을 거스르는 방향이 문제이다. 거센 급류에서 물살의 역방향을 이기지 못하고 탈진해 익사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소는 물살을 거스르지 않고 흐름에 맡겨 서서히 강가로 이동해서 얕은 곳에 이르러 걸어 나온다고 한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도 일어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음을 인정해야 할 때가 있다, 가끔은 미련하게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과,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다면, 느려도 황소걸음처럼 한 발짝 한 발짝 뚜벅 걸음으로 천천히 가야한다는 것을…. 잘 견디는 것이 최선일 때가 있다. 오랫동안 소를 키우고 있지만, 해가 갈수록 소와 사람에 대한 감정의 경계가 모호해 진다. 모든 어린 것들이 다 그렇듯 송아지도 어린아이들과 비슷하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개구쟁이 짓을 하듯이, 송아지도 태어난 지 두 세 달만 되어도 또래 송아지들은 몰려다니며 놀기를 좋아한다. 사료포대를 물고 뛰어 다니기도 하고, 저희들이 먹어야 하는 건초더미에 올라가 쑥대밭을 만들어 놓기도 한다. 말썽을 피우고 돌아다니는 것은 건강하게 잘 크고 있다는 증거이다. 제집에 얌전히 누워 있는 송아지는 어디가 아파도 아픈 것이다. 아픈 송아지에게 약을 먹이고 주사도 놓아 치료 하는 남편 옆에서는 근심스런 눈을 한 어미소가 곁을 지키고 있다. 어미소와 소를 키우는 사람이 어린 송아지를 보는 눈은 똑같은 마음일 게다. 큰 소들도 송아지 못지않게 호기심이 많다. 작은 틈새로 머리를 집어넣어 빠지지 않아 애를 먹이는 일도, 엎드려 물통을 청소할 때 기다란 혀로 낼름 모자를 벗겨가 질겅질겅 씹고 있을 때도 왕성한 호기심이 발동했음이다. 모자를 쓰지 않고 물통청소를 하고 있으면 어느새 다가와 거친 혓바닥으로 머리를 쓰윽 핥는다. 깜짝 놀라 머리를 만져보면 끈적끈적한 침이 잔뜩 묻어있다. 물통 청소를 다 하도록 머리를 핥으려는 소와 실랑이를 해야 한다. 머리에 묻은 침이 마르고 나면 뻣뻣해진 머리카락은 무스를 바른 듯 위로 솟아 우스운 몰골이 되어있다. 친근함의 표현인지. 아님 새끼를 핥아주듯 자애로운 모성의 발동인지 알 수 없다. 소는 목장 주인의 성품을 그대로 닮는다고들 말한다. 느긋한 소들이 있는가하면, 작은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사람을 무서워하며 피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목장의 송아지들의 호기심 많은 성격은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 요즘처럼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에 앞에 서면 아무 일 없는 보통의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새삼 느낀다. 겨울날 목장의 하루는 짧다. 어느새 감나무 마른 가지에 걸린 해는 붉은 여운을 남기며 서쪽으로 숨는다. 목장에서 고된 하루를 보냈을 남편을 기다리며 식어버린 된장찌개에 다시 불을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