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문정희의 시는 솔직하고 대담하다. 원시적 야성의 세계가 펼쳐진다. 관능으로 들끓는 용암 같다. 그런데도 쉽고 재밌게 읽힌다. 메시지는 투명하다. 시인은 여성의 결핍된 몸을 당당하게 드러내어 남성 중심 사회의 억압의 언어에 저항한다. 반역과 위반의 상상력으로 억눌린 여성성의 원형을 회복하려 한다. 시집 『남자를 위하여』 시작노트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언어는 지고지순한 처녀이거나 잘난 지식인 여성을 원하지 않는다. 나의 언어는 포르노나 음흉한 악녀를 꿈꾸며 낯설고 버르장머리 없는 무법자가 되어 언제나 불새처럼 날고 싶다." 본능적 원시 세계를 갈망하는 시인의 이런 기질이 광기의 힘, 짐승과 불의 이미지를 낳는다. 짐승은 육체의 원초적 야성과 사랑의 갈망, 불은 딱딱하게 굳은 도덕적 관습과 남성 지배담론에 대한 분노를 대리하는 이미지다. 그녀가 여성의 몸과 관련된 시어들을 과감하게 사용하는 것은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 사랑에 대한 욕구를 솔직하게 표현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녀의 시는 시대의 폭압과 남성적 인습을 청산하는 주술이자 매장된 여성성을 되살려내는 곡비(哭婢)의 노래일 수 있다. 초기부터 줄곧 문정희의 시에서 여성은 소외되고 억눌린 존재, 죽음과 절망의 존재로 그려지곤 했다. 중요한 건 이런 비극적 여성인식이 자폐심리나 나르시시즘 시선 때문이 아니라 남성 세계의 권력과 성적 위악 때문에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남근 중심의 세계관이 지배하고 재단한 여성의 세계는 비극의 역사였던 것이다. 따라서 '여성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시인의 테제는 곧 '진정한 남성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사회적 질문으로 확장되며, 사마천 같은 인물은 시인이 지향하는 가장 바람직한 남성성의 현현일 것이다.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은 한나라 무제 때의 역사가다. 흉노족을 정벌하려다 패하여 흉노족에 투항한 장수 이릉(李陵)을 변호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이 언도된다. 당시 사형을 면하는 길은 두 가지, 금전 50만전을 내거나 궁형(宮刑)을 받는 것이다. 궁형은 거세를 뜻한다. 가난했던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 대를 이어 역사서를 집필해달라는 간곡한 유언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굴욕적인 궁형을 택한다. 그렇게 궁형을 당한 후에 감옥에서 사마천은 총 130권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역사서 《사기(史記)》를 집필해낸다. 시인은 이런 결기와 힘, 불굴의 삶을 보여준 사마천이라는 사내에게 매료된다. 남근이라는 물욕의 기둥을 자르고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진짜 사내가 된 사내, 굴욕과 고통을 이겨내고 천년의 시간을 얻은 대담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진정한 남성성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보라는 인간의 자존에 관한 문제 제기다. 이런 비판적 전언을 통해 시인은 여성과 남성의 세계를 대립과 투쟁이 아닌 화해와 포용의 관계, 여성의 몸을 생명을 낳고 신을 낳는 포괄적 우주로 보려 한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시 「남자를 위하여」 전문) / 함기석 시인 함기석의 생각하는 시 49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투옥당한 패장(敗將)을 양심과 정의에 따라 변호하다가 남근을 잘리는 치욕적인 궁형(宮刑)을 받고도 방대한 역사책 『사기(史記)』를 써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해 낸 사나이를 위한 노래 문정희(文貞姬 1947~ )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 더 튼튼하고 좀 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인다 ·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 끌 수 없는 제 속의 눈 천년의 역사에다 댕겨놓은 방화범이 있다 ·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 천년 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문정희의 시는 솔직하고 대담하다. 원시적 야성의 세계가 펼쳐진다. 관능으로 들끓는 용암 같다. 그런데도 쉽고 재밌게 읽힌다. 메시지는 투명하다. 시인은 여성의 결핍된 몸을 당당하게 드러내어 남성 중심 사회의 억압의 언어에 저항한다. 반역과 위반의 상상력으로 억눌린 여성성의 원형을 회복하려 한다. 시집 『남자를 위하여』 시작노트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언어는 지고지순한 처녀이거나 잘난 지식인 여성을 원하지 않는다. 나의 언어는 포르노나 음흉한 악녀를 꿈꾸며 낯설고 버르장머리 없는 무법자가 되어 언제나 불새처럼 날고 싶다." 본능적 원시 세계를 갈망하는 시인의 이런 기질이 광기의 힘, 짐승과 불의 이미지를 낳는다. 짐승은 육체의 원초적 야성과 사랑의 갈망, 불은 딱딱하게 굳은 도덕적 관습과 남성 지배담론에 대한 분노를 대리하는 이미지다. 그녀가 여성의 몸과 관련된 시어들을 과감하게 사용하는 것은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 사랑에 대한 욕구를 솔직하게 표현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녀의 시는 시대의 폭압과 남성적 인습을 청산하는 주술이자 매장된 여성성을 되살려내는 곡비(哭婢)의 노래일 수 있다. 초기부터 줄곧 문정희의 시에서 여성은 소외되고 억눌린 존재, 죽음과 절망의 존재로 그려지곤 했다. 중요한 건 이런 비극적 여성인식이 자폐심리나 나르시시즘 시선 때문이 아니라 남성 세계의 권력과 성적 위악 때문에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남근 중심의 세계관이 지배하고 재단한 여성의 세계는 비극의 역사였던 것이다. 따라서 '여성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시인의 테제는 곧 '진정한 남성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사회적 질문으로 확장되며, 사마천 같은 인물은 시인이 지향하는 가장 바람직한 남성성의 현현일 것이다.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은 한나라 무제 때의 역사가다. 흉노족을 정벌하려다 패하여 흉노족에 투항한 장수 이릉(李陵)을 변호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이 언도된다. 당시 사형을 면하는 길은 두 가지, 금전 50만전을 내거나 궁형(宮刑)을 받는 것이다. 궁형은 거세를 뜻한다. 가난했던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 대를 이어 역사서를 집필해달라는 간곡한 유언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굴욕적인 궁형을 택한다. 그렇게 궁형을 당한 후에 감옥에서 사마천은 총 130권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역사서 《사기(史記)》를 집필해낸다. 시인은 이런 결기와 힘, 불굴의 삶을 보여준 사마천이라는 사내에게 매료된다. 남근이라는 물욕의 기둥을 자르고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진짜 사내가 된 사내, 굴욕과 고통을 이겨내고 천년의 시간을 얻은 대담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진정한 남성성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보라는 인간의 자존에 관한 문제 제기다. 이런 비판적 전언을 통해 시인은 여성과 남성의 세계를 대립과 투쟁이 아닌 화해와 포용의 관계, 여성의 몸을 생명을 낳고 신을 낳는 포괄적 우주로 보려 한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시 「남자를 위하여」 전문)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봄의 계절은 몸단장으로 연둣빛 열정을 알알이 매달고, 조르르 피어난 벚꽃의 향긋한 냄새가 산사를 뒤덮는다. 연연히 찾아와 내 몸에 나이테를 남기는 봄의 흔적들 속에서 산새들의 지저귐은 봄꽃과 같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온 가족이 산사로 봄나들이를 갔다. 손자들은 모처럼 걸어보는 산길이 신기한 듯 앞질러 뛰어간다. 숲속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푸드득' 소리가 났다. 예쁜 깃털에 아주 작은 산새다. 참 아름다웠다. 나의 발걸음 소리에 놀란 어미 새가 등지에서 땅바닥으로 뛰어내린다. 어미 새는 날개를 펼쳐야 날 수 있을 텐데 날개를 반은 접고 뒤뚱 거리며 걸어간다. 짹짹거리며 애달프게 운다. 남편은 나뭇가지에다 지은 새 둥지 안을 들여다보며 새끼가 다섯 마리 있다고 한다. 그때다. 어미 새는 아예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다. 새끼는 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알몸이었다. 솜털도 하나 없는 새끼는 어미의 위험 신호를 알아들었는지 움직이지도 않고·죽은듯이 가만히 숨죽이고 있다. 그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마음이 애잔하다. 까치처럼 높은 미루나무에다가 알을 낳아 놓으면 동물이나·뱀, 뻐꾸기 같은 힘센 적들의 피해를 보지 않겠지만, 작은 산새는 야트막한 나뭇가지 위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다. 알둥지를 발견하면 누구나 손만 뻗으면 알을 꺼낼 수가 있다. 그렇게 위험한 곳에서 어미는 집을 짓고 사명을 다한다. 불리한 조건에서도 해마다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모습이 가히 대견스럽다. 어미 새는 우리 일행을 뒤돌아보며 말은 못하지만, 새끼가 있는 둥지로 가지 말고 나를 잡으라고 손짓, 발짓 다 해가며 울부짖는다. 어미 새의 모성이 대단하다.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우리 젊은이들은 아이를 하나만 낳아 기르면서도 힘들다 하고,· 아예 낳지 않는 부부도 있다. 저 작은 새의 삶을 보며 모성을 본받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새끼를 살리기 위해 어미새는 잡힐지도 모르고 위험을 감내하며 나의 시선을 돌려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 내가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저렇게 할 수 있었을까. 예전에 어른들이 무엇을 하려다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으면 새대가리인가.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하늘과 산하를 모두 하나로 품어 안아 보아도 산새의 영리한 머리에 미치지 못 할 것 같다. 따뜻한 봄 햇살 속에서 산새들의 지저귐은 봄꽃과 같이·마음을 들뜨게 하는 계절이다. 봄은 생동감 넘치는 활력소를 뿜어낸다. 새로이 꽃을 피워내고, 새들은 알을 품어 여러 마리의 새끼들을 작은 한 몸으로 지켜내는 모습은 가히 찬탄할만하다. 나는 봄을 좋아한다. 나는 온갖 벌, 나비들이 모여들어 봄의 축제를 여는 시골 마을에서 성장했다. 어릴 때는 살생이 무엇인지 몰랐다. 산속 숲의 새둥지에서 인정사정없이 꿩 알, 뜸부기 알, 콩새 알, 참새 알, 작은 산새 알까지 동구리에다 주워 다가 먹었다. 새알을 깨지지 않게 나뭇잎으로 싸서 잿불에 구워먹었다. 그때는·동심에 젖어 즐거움만 알았지 들새들의 고통은 몰랐다. 돌이켜 보면 어미 새가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 지 생각조차 못했다. 어릴 때 모르고 저지른 살생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새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죄를 저질렀다. 이제는 멀리 바라다 보이는 나무줄기 가지에 새둥지가 있어도 조심스럽게 피해 다닌다. 빛바랜 추억들이 알알이 영글어가던 어릴 적 일이지만 마음속의 죄를 새들에게 용서 받고 싶다.
[충북일보] 현재 축산 농가에서는 보통 생각하는 송아지의 개념은 생후 12개월 이내로 송아지의 몸무게는 150kg 미만의 소를 송아지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지난 농경사회에서는 농가마다 소를 길렀고 또한 이 소는 농가의 큰 재산이었으며 소중히 생각했다. 더욱이 1가구 2마리의 소를 기르는 농가에서는 그야말로 부자 중의 부자였다. 열 마리만 길러도 그 고을에서 최고의 재력가로 호칭되었다. 여기에 논과 밭이 더 있으면 그 부자 집은 '금송아지 집'으로 통했다. 그만큼 '금송아지 집'은 재력 및 권력가로 행세했으며 많은 인부 들을 거느리고 살았으며 또한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한국 씨름협회 주관 전국 천하장사 씨름대회에서는 해마다 최종 우승자에게 금으로 만든 금송아지 형태의 트로피를 준다. 물론 수상자는 가마를 타고 관중이 뿌려주는 오색찬란한 꽃가루를 맞으며 우승의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요즘 국제 금 가격이 상당히 유동적이지만 순금기준은 약 17만 원 정도로 송아지만한 금덩이라면 가격이 대략 1405억 원이 넘는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금 조형물은 함평의 '황금 박쥐 상(162Kg)'으로 27억여 원을 투입하여 세계적 희귀동물인 황금박쥐의 생태환경보전을 드높이고 있다. 여기서 잠시 종교적인 측면으로 살펴보면 가나안에 정착하여 유목민 생활을 했던 헤브라이인들은 야훼(Yahweh) 숭배를 대중적인 소 숭배의식과 결합시켰다. 그들이 유목민에서 농업 전문가로 변천하면서 그들의 소 숭배의식도 힘센 황소의 이미지로 옮겨갔으며, 신자들 역시 금송아지를 우상으로 섬겼다. 나는 정년퇴직 후 사회 곳곳에서 봉사 활동을 하면서 가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어 씁쓸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용인 즉 "저 사람 과거에 내가 데리고 있던 사람이야" "내가 00 장(長)할 때 내 밑에서 뭐 했던 사람 이야" "그 사람 내 밑에 있을 때 내가 키워준 사람이야"라고 자랑삼아 말하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된다. 다시 말해 과거에 "우리 집에 금송아지가 있었다"라는 금송아지 생각을 펼치는 사람들이다. 참으로 한심한 사람이다.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뭐가 그리 대단한 사람이기에 저런 말을 하는지?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본다. 이어서 금송아지 생각을 펼치는 당사자의 경력을 잠시 살펴보면 그리 대단한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저렇게 유난을 떨고 다니는 지.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현직에 있을 때는 그 조직을 경영하기 위해서 상하관계가 있기 마련이지만, 일단 정년을 하게 되면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또한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으며 오로지 "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다만 퇴직 후에는 건강하고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돈과 올바른 정신만 있으면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옛날의 금송아지 생각은 허상이요, 무용지물이다. 그 금송아지 생각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 좋은 친구도 많이 생기고 갈 곳도 오라는 곳도 있게 마련이다. 부디 금송아지 생각 버리고 좋은 친구는 물론 아름다운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다운 삶으로 인정을 나누는 사회를 만들어 가기를 바란다.
[충북일보] 천양희의 초기 시는 삶의 벼랑에서 마주했던 뼈아픈 시간들에 대한 아픈 기록이다. 당시 그녀는 자신의 삶을 '암매장된 생'으로 표현한다. 이는 고통과 절망이 봄꽃처럼 피어나는 암울한 미로 세계에서의 길 찾기 또는 빛 찾기가 곧 그녀의 시작(詩作)이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그녀의 초기 시에는 고독과 허무, 나르시시즘, 소외된 자아를 응시하는 자기애가 자주 나타난다. 자기애는 외부의 대상물을 향하던 사랑이나 기대가 무참히 짓밟히거나 거부될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형성되는 방어기제다. 자아는 외부세계와 차단막을 치는 비사회적 태도를 취하는데, 그녀의 초기 시에 자아의 처절한 유폐와 절망적 소외감이 나타나는 것은 이런 방어심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집 『마음의 수수밭』을 상재하면서 그녀는 나르시시즘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긍정의 세계로 진입한다. 한(恨) 맺힌 비극의 생을 통과하여 역설적 긍정의 삶에 도달한다. 삶이 가져다준 분노와 절망, 회한과 슬픔, 우울과 공포, 무수한 고통의 감정들을 뼛속 깊이 발효시켜 시를 낳는데, 물이 중요 소재로 사용된다. 물의 순환을 통해 삶의 생장과 소멸, 비움과 재생의 순환성을 그린다. 그녀에게 삶은 물방울 같이 환하고 둥근 수궁(水宮) 세계, 물속의 환한 화엄 세계로 그려진다. 왜 삶에 대한 시선이 바뀐 걸까· 물은 흔히 재생, 정화, 속죄, 생명 등의 상징으로 쓰인다. 어두운 물이 오욕과 고통의 삶을 상징한다면, 밝은 물은 정화된 긍정적 삶을 표상한다. 시인이 목마른 삶의 어둠 속에서 물의 소중함과 가치를 뼈저리게 느꼈고 그 자각이 환한 물 이미지로 낳았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물의 형상이 삼각이나 사각처럼 각지지 않고 둥근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는 세상을 둥글게 품어 안으려는 무의식의 반영이며, 자신의 삶 또한 그렇게 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의 표출일 것이다. 후기로 접어들면서 천양희의 시는 한결 품이 넓어진다. 상실과 고통의 세계에서 희망과 화해의 세계로 이주한다. 대극적 요소들이 하나로 일체화하는 불교적 불이(不二)의식, 모성지향 의식이 시의 저변에 자리 잡는다. 모성애에 대한 추구는 삶의 고통을 품어 안으려는 대지의 대승적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시인 스스로 죽음을 근사체험 함으로써 삶의 바닥에서 슬픔과 고통을 몸으로 실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중기 이후의 시는 혹독함과 아름다움, 어둠과 빛이 공존한다. 이 동시성 때문에 삶의 잿빛 허무와 고독이 시 저변에 짙게 깔리면서도 그 비극의 문양과 색채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녀는 시를 쓰는 자신을 성찰하고 작은 생명들에게서도 눈부신 빛을 발견한다. 수행자처럼 뾰족한 마음을 깎아내어 새와 바람, 병과 강물, 아이들의 세계를 맑고 유순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사물들이 상호 넘나들며 상생하고 호흡하는 자연의 보편적 세계, 아름다운 농담의 세계로 진입한다. 이런 고백의 시선과 애틋한 마음 때문에 시어들은 진솔한 공감을 낳고 고목의 뿌리처럼 묵직한 울림을 준다. '오래된 농담'은 시인의 이런 맑고 순수한 사랑을 애잔하게 보여주는 시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아름답고 아픈 풍경화다. 시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을 헌신과 배려, 이타적 사랑이 느껴진다. 서로 대비되는 다른 것들의 대승적 수용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웃음과 울음이 같은 音이란 걸 어둠과 빛이/ 다른 色이 아니란 걸 알고 난 뒤/ 내 音色이 달라졌다// 빛이란 이따금 어둠을 지불해야 쐴 수 있다는 생각" /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산은 인생의 스승이다. 아름다운 자연은 인류의 생명을 지키는 재산이고, 인간의 문화는 나무에서부터 이룩되었다. 우리의 삶은 한 포기 풀잎에서 한 그루의 나무에서 지식을 얻고, 숲에서부터 과학을 창조해 내기도 한다. 자연은 인간지식의 샘이요, 학문의 길잡이기도 하다. 산은 자연의 무궁한 지식을 담고 있는 과학의 응결체이다. 산은 언제 보아도 요염하지도 않고 의젓하다. 얕은 산은 얕은 대로 높은 산은 높다고 뽐내거나 자랑하려 들지도 않는다. 산은 말이 없다. 산은 너그럽고 인자스런 모습으로 돌아앉아 있기도 하고 누워 있기도 한다. 산은 인생의 어머니다. 산에게는 미운 사람도 고운 사람도 없다. 모두 평등하게 받아준다. 산은 살아있는 생명을 보살피기도 하지만 마지막 인간의 시신을 품안에서 영원히 잠들게도 한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더욱 산을 좋아하고 산행을 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오르고 또 오르건만 싫지가 않다. 우리는 산을 사랑한다. 헐벗은 산보다는 숲이 울창한 산을 더욱 그리워한다. 산은 높다하여 귀한 것이 아니고 나무가 있어서 귀한 것(山高故不貴 以有樹爲貴)이라고, 선인들도 말했다. 산에는 나무가 가득히 자라고 있기에 산다운 풍치를 지니며 많은 생명을 보듬어주고 있어 귀하게 여긴다. 산에 나무가 들어 서 있지 않는다면 쓸모없는 불모지에 불과하여 탐내지도 않을 것이다. 산에는 아름다운 숲이 있기 때문에 산으로서 경제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정신적 가치로 깊은 의미를·지니고 있음에 더 소중함이다.산은 화사하면서도 순수하다. 산은 예술가 앞에서는 소재가 되기도 하고, 의사 앞에서는 의약이 되기도 한다. 산은 우리들에게 한없는 새로운 인생을 가르치기도 한다. 숲은 겉으로 봐서는 평화로운 듯 보이지만 자연의 경쟁을 느끼게 된다. 자연도 그늘에서 견디며 살아 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식물이 있는가 하면, 메마른 토양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는 생명력을 이어가는 끈기를 지닌 종류도 있다. 암석의 틈 사이에서 뿌리를 내려 생명을 버티며 모질게 살아가는·삶. 우리는 이러한 식물로부터 또 다른 인생의 삶을 배우려고 산을 오르는지도 모른다. 식물들의 생활상에서 생사고락의 이치를 터득하며 나무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자연으로부터 깨닫는다. 오늘도 산을 오르며 생각한다. 나무 같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천연림처럼 그런 이웃들로 조성되어 서로가 사람답게 사는 사회로 만들어져 다 같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논어에 보면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고, 예로부터·어진사람은 세세청청(世世靑靑)한·숲이 좋아 산에서 묻혀 산 같은 인생을 배우며 수도를 하였던 것이 아닌가. 물과 산은 만남으로 생명을 낳고 기르는 덕행을 가르쳐주고 있다. 진작에 이 깊은 교훈을 깨닫지를 못했을까. 인생살이란 산 너머 산이 있게 마련이고, 착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어려움이 따른다 해도 인자하게 산심(山心)으로 처신한다. 산은 오늘도 나에게 산심으로 살아가라고 일러주건만 마음은 욕심에 가리어 그렇게 살지를 못한다. 산은 춘하추동 사계절을 통하여 세월의 의미를 수목의 몸짓으로 알려주고 있건만 받아들일 줄을 모른다. 산은 언제고 푸른 청춘이다. 녹음에 덮인 숲속을 거닐면 무한한 희망을 불러 일으켜 주기도 하고, 낙엽이 쌓인 산길은 사색을 낳게 하는 철학의 산이 되기도 한다. 산은 말한다. 진정한 삶을 모르는 사람은 자연의 숨소리를 들어보고, 인생을 모르거든 산행을 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산은 억만겁의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 산은 멀리서 바라보는 즐거움보다는 오르는 기쁨이 더 좋고, 산을 오르는 기쁨보다는 자연을 가꾸고 산을 관리하는 마음이 더 즐겁다. 오직 산을 관리하는·사람만이 진실한 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리라.산! 산을 오르며 자신의 인생을 살찌우는 산 같은 사람으로 살아감이 어떨까. 인생살이가 외로우면 산을 오르고, 슬픈 마음이 생겨나면 나무를 심고, 보람을 얻고 싶으면 숲을 가꿔보라. 세월이 가고나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으면 자연히 그 가운 대에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금년은 어떤 나무를 심을까. 유실수 아니면 약용이 되는 산수유나무, 마가목, 모과나무 중에서 선택하여 심어야겠다. 오늘도 푸른 소나무 숲을 걸으며 아름다운 솔바람 소리를 듣는 시간은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충북일보] 오탁번의 시는 섬세한 언어 조탁, 명징한 이미지, 풍자와 해학의 유머의식 등이 주요 특징이다. 투명하고 명징한 이미지를 살려내기 위해 그는 보석 세공사처럼 섬세한 언어조탁에 공을 들이고 비유와 상징을 사용한다. 그 결과 이국적인 정조와 감각적인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면서 독특한 시의 분위기가 창출된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그는 비유적 언어사용을 줄이고 시대상황에 대한 분노와 울분을 직접적으로 토로한다. 타락한 현실의 타락한 인간, 타락한 문단을 아유하고 질타한다. 흥미로운 건 현실의 음지와 어둠을 정반대로 굴절시켜 유머의 해학으로 역설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시 '폭설', '굴비', '동치미' 등에는 시인의 이런 풍자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오탁번의 시는 크게 보아 죽음과 생명 사이, 타락과 순수 사이,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발아한다.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는 시, 현실을 비틀어서 풍자하고 비판하는 시, 에로티시즘의 세계를 추구하는 장난기 넘치는 시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근원을 탐색하는 시들은 주로 생명의 탄생과 죽음,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신비감, 사랑의 대상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을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시인의 내적 갈망의 뿌리에 어머니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육친의 대상을 넘어서서 생명의 토대이자 발원지라는 상징적 의미에서의 어머니, 즉 그의 시의 발아 탯줄이자 성장의 자궁이다. 그에게 어머니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의 처소이자, 자연의 생명적 근원지인 셈이다. 그가 모국어의 질감과 날것의 육감을 추구하는 것은 이러한 모성지향 의식이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모성의 언어를 통해 그는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고 삶과 죽음을 사색한다. 이런 시선 때문에 죽음에 대한 사색은 미움과 눈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고 인간의 본능과 자연스럽게 연계된다. 육체적 관능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에 대한 모성적 관심이 여성성 나아가 인간의 육체성 전체로 확장된다. 시인의 말대로 인간은 누구나 "파도에 휩쓸리는 갸울은 목숨" 아닐까. 세모에 링거를 꼽고 병실에 누워 있었을 화자(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죽음과 생명 사이를,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갔을 시인의 불안한 눈동자가 떠오른다. 어둠의 시간이 지나고 어둠 속에서 터오는 한 줄기 관능의 빛을 통해 그는 자신이 꿈꾸던 순수한 사랑, 생명의 신비를 살려내려 했을 것이다. 죽음과 관능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에서, 아픈 육체에서 싹트는 관능의 촉은 결국 사랑의 근원에 가 닿으려는 시인의 애절한 몸짓일 것이다. /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평창 동계 올림픽이 시작되었다. 올림픽은 월드컵 축구와 함께 세계인들을 감동 시키는 가장 큰 스포츠 행사다. 근대 올림픽의 기원인 1894년 이래 올림픽 경기는 정치적 격변과 종교적, 인종적 차별 속에서도 '세계평화' 라는 큰 이상을 이루어 왔다. 스포츠를 통해 이루어 온 상호 이해와 협력의 성과는 국제사회의 갈등을 풀고 세계 평화에 이바지 하고 있다. 우리는 1988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고 30년 만에 동계 올림픽 까지 개최한 스포츠 강국이 되었다. 지구상에 하계 동계 올림픽을 모두 개최한 나라는 미국 캐나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가 8번째다. 평창 올림픽을 유치한 공로자들은 지금 대부분 곤경(困境)에 처해 있고, 올림픽을 개최하고 운영하며 함박 웃음띤 주역들을 보며 인생무상을 느끼게 된다. 참가를 거부한 북한 선수단을 초대해 함께 올림픽을 개최하는 과정에 정치적으로 국민들 간에 갈등은 있지만 성공적으로 대회를 마쳐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느닷없이 평창 올림픽이 평양 올림픽, 평화 올림픽으로 국내 매스컴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평창 평양 평화 올림픽이 인터넷 검색 창에서 순위경쟁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져 국민들을 당황스럽게 하고 있었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 선진국인 우리나라에서 역시 3류 정치인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올림픽을 앞두고 지하철 광고판에 대통령 생일 축하가 올라 있었다. 이어서 대통령 열성 지지자들이 뉴욕 맨해튼 '타임 스퀘어' 에 대통령 생일 축하 광고를 실었다. 독재나 왕조 국가도 아닌 선진화된 민주국가에서 한 나라의 대통령 생일 축하를 광고하는 나라가 있는지 모르겠고, 저와 같은 광경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볼 지도 궁금하다. 북한이 우리가 개최하는 올림픽을 훼방 놓지 않고, 함께 참가해 평화 올림픽을 치르게 되었다. 그래서 대통령 생일 선물로 '평화올림픽'을 인터넷에 올린 게 발단이 되었다. 불참을 고집하던 북한의 갑작스런 올림픽 참가로 상황이 만이 바뀌었다. 올림픽 꽃이라는 입장식에 개최국 우리의 태극기가 보이지 않고, 오랜 기간 경기를 준비해 온 아이스 학키의 팀워크도 깨지게 되었다. 올림픽 선수 몇 십 명에 응원단, 예술단, 태권도단, 정치인들, 수백 명이 입국해 국내 매스컴의 포커스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공연장 사전 답사를 나온 예술 단장이라는 한 여인을 칙사 대접하듯 굽실대며 따라 다니는 관계자들의 저자세를 바라보며 국민들 자존심도 상했다.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를 부정적으로 보는 국민감정이 들끓었던 것도 사실 이다. 대통령 생일 선물로 '평화 올림픽' 이라고 선전을 하니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들이나 야권에서는 맞대응하기 위해 '평양 올림픽' 이라고 비아냥거림 성 인터넷 글을 올려 검색 순위 경쟁을 벌렸던 것이다. 현지 주민들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창이 아닌 금강산에서 올림픽 전야제를 열려 했고, 북한의 마식령 스키장에서 남북한 공동 훈련을 하였다. 그러니 평양 올림픽이라고 딱지를 붙여 조롱선 글을 올렸고, 남북한이 공동 개최한 올림픽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평창 올림픽이 평화 올림픽이니 평양 올림픽이니 하는 논쟁이나 다툼은 백해무익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개최하는 동계 올림픽이 순수한 의미에서 평화 올림픽인 것은 맞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 의견에 수긍되는 점 도 많다. 우리나라만의 축제가 아닌 평화를 상징하는 올림픽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평양 올림픽으로 조롱까지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는 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기 때문에 2002년 월드컵도 유치할 수 있었고, 국제포럼, 엑스포, G20 등 국직 국직한 국제 행사를 치룰 수 있었다. 만약 북한이 평창 올림픽 기간 동안 도발해서 올림픽이 중단되거나 축소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우리나라는 두 번 다시 국제대회를 열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올림픽의 이상은 스포츠에 의한 인간의 완성과, 경기를 통한 국제평화의 증진에 있다. 근대 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탱은 '올림픽 대회의 의의는 승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하는 것' 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동계 올림픽이 순탄하게 진행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평창 올림픽을 바라보며 권력만 보고 싸움질만 하는 우리나라 저질 정치꾼들이 개탄스럽다는 생각뿐이다.
[충북일보] 김용택은 풀과 바람, 흙과 나무, 강물과 햇빛으로 시를 경작한다는 점에서 농부의 피와 심성을 지닌 시인이다. 그는 자연을 삶 속으로 끌어들여 사람살이의 애환과 슬픔을 서정의 언어로 발현한다. 산업화가 가져온 황폐화된 농촌 현실을 주목하여 현대문명이 낳은 야만적 그늘들을 상세히 드러낸다. 그는 흔히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는데, 그에게 섬진강은 시의 젖줄이자 생활의 원천적 토대다. 농경적 삶의 아픈 기억들이 보관된 곳으로 우리 근현대사의 격변이 남겨놓은 수많은 상처들을 대리하는 시적 대명사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섬진강을 노래한다는 것은 섬진강의 풍광을 통해 그 풍광이 품고 있는 역사 속 민초들의 삶, 그들의 끈질기고 강인한 생명력, 그들의 상처와 고통을 어루만진다는 의미를 띤다. 그의 시 전반에 낭만주의적 분위기가 나타나면서도 낭만적 정조 이면에 민중들의 비애와 굴곡진 그림자가 짙게 깔리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중층적 시선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시 저변에 지하수처럼 도도히 흐르는 낭만적 세계인식을 서구의 낭만주의와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결코 안 된다. 대다수 서구 낭만주의 시가 현실과 동떨어진 도피적 이상공간을 설정하는 반면에, 그의 시는 현실 속에 머물면서 사람살이의 아픔을 번민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의 첫 시집 '섬진강'이 출간된 건 1985년이다. 1980년대에 그의 시 세계는 대체로 3단계 과정을 거치며 변화한다. 초기의 낭만적 현실인식 과정을 지나, 중기의 농촌 현실을 구체적으로 살려내는 과정을 거쳐, 후기에는 다시 초기의 관념적 대상세계로 돌아간다. 초기 시에는 부재와 결핍의 현실이 환기시키는 대리공간으로 나아가려는 시적 자아의 낭만적 지향성이 자주 나타난다. 누이, 여자, 봄, 집 같은 이미지들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주로 시적 자아의 상실감이나 그리움을 낳는 질료로 사용된다. 이후 그는 농촌의 열악한 현실과 구조적 모순을 구체적으로 직시하여 피상적 대상인식을 극복한다. 이 변화 과정이 1시집 섬진강과 2시집 '맑은 날'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특히 섬진강 연작에는 농민들의 애환서린 삶, 산업화 속에서 농촌이 겪는 고통과 상처, 인간의 물신화 현상에 대한 시인의 비판의식이 밀도 높게 나타나 있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농촌의 구체적 실상을 서정성 짙게 드러내면서,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드러낸다. 그의 초기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난과 고통의 삶을 산 사람들이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는 6.25전쟁 때 죽고, 아버지는 전쟁 때 포탄을 나르며 농군으로 살다 죽고, 어머니는 홀몸으로 억척스럽게 생활을 이어 가고, 누나는 빨치산이 된 남편을 기다리고, 동생은 어려서 죽는 등 인물들 대부분이 어둠과 슬픔에 놓여 있다. 시인은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현실의 부조리와 실체를 부각시키면서 현실에 대해 분노하고 절규한다. 참담해진 농촌의 상황을 문명사회 전반으로 확장하면서, 공동체의식을 통해 농촌의 전통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김용택의 시는 날카로운 비판의 날이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듬감 넘치는 감미로운 서정시로만 읽히는 경향이 있다. 시인의 비판적 전언이 섬진강 물처럼 맑고 투명한 풍경들 속에 녹아들고 그것이 시의 외형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민초들 삶의 아픈 육성이 민요풍의 구성진 음악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는 그의 서정적 풍경 뒤에 가려진 민초들의 무수한 희생과 고통의 무늬들을 섬세하게 눈여겨보아야 하며, 구성진 말의 가락 뒤에 가려진 한(恨)의 시간들을 생각해봐야 한다. 섬진강 연작을 다시 읽어보자. /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노향림은 1970년대 우리 시단에서 이미지 중심의 모더니즘을 깊이 있게 탐색한 시인이다. 김광균, 김종삼, 김춘수의 이미지 미학을 승계한 묘사의 달인, 시간 속의 풍경을 포착해 풍경 속의 시간을 이미지로 그려내는 감각파 시인이다. 그녀는 독자를 향해 어떤 주장도 계몽도 설교도 하지 않으며, 사물과 풍경을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내는 즉물적 언어를 구사한다. 시인의 몸은 이미지 변환장치이자 혼합 진공관인 셈이다. 그 결과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울리고, 지붕 위에서 남자가 켜는 바이올린 소리는 하늘 멀리 날아가 한 점 가오리연이 된다. 노향림 시에 나타나는 이미지의 주요 특징은 대략 3가지다. 첫째는 시인 자신이 이미지 속에 철저히 가려진다는 점이다. 시인은 풍경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숨은 채 풍경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통해 마음을 드러낸다. 둘째는 사물들이 시의 주체로 등극하면서 정작 시인은 지독한 고독 속에 놓인다는 점이다. 시속의 이미지는 시인의 고독과 자의식이 반영된 심리적 치환물이기도 한 것이다. 셋째는 비인간적이라 할 만큼 냉정한 시선으로 이미지를 병치시키거나 병렬시킨다는 점이다. 이미지가 의미에 종속되지 않도록 의미를 배제하면서 건조하게 풍경을 그리는데 이런 객관적 묘사를 통해 삶에 드리워진 불안과 고독, 허무와 절망, 고통과 꿈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압해도는 전남 신안군에 있는 다도해 중 하나로 목포에 가장 가까이 위치한 섬이다. 개펄이 많아서 갯것이 많은 곳으로 시인의 유년 시절 그리움이 농도 짙게 배어있는 공간이다. 시인의 꿈과 동경, 아픔과 슬픔이 함께 자리하는 신화적 원형공간이다. 어린 시절 시인이 목포시 산정동에 살 때 마을 야산 기슭에서 바라보던 건너편 압해도, 섬 주변의 개펄과 파도와 바람은 시인의 기억들이 아로새겨진 이미지 파편물들이다. 개펄, 바람, 바닷물 등이 낭만적 서정으로만 채색되지 않고 비애와 질곡의 시간을 품은 비극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바람에 살이 하얗게 깎인 파도나, 등이 굽고 관절이 깎인 채 개펄을 기는 바람은 자연의 풍경이면서도 개펄을 제 살처럼 끌어안고 살아가는 바닷가 아낙들의 모습으로 읽힌다. 풍경이 곧 사람인 비극의 이미지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이처럼 노향림 시 전반에 나타나는 풍경엔 풍경과 함께 살을 섞고 살아가는 자들의 비애와 아픔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 슬픔에 젖은 눈으로 인간의 아픈 생애와 낮은 곳을 바라보는 시인의 비극적 시선이 느껴지는 시다. /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나는 며칠 전 교육삼락회 사무실에 할 일이 있어 승용차를 가지고 갔다. 그런데 사무실 출입구에 승용차 한 대가 주차가 되어 있어 진입을 할 수가 없었다. 삼십분을 넘도록 기다렸는데도 그 차의 주인이 오지를 않았다. 마침 주변 도로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빠져 나가기에 얼른 그곳에 주차를 하고 사무실에 들어가 일을 보고 바로 나왔다. 며칠이 지나자 불법주차 단속에 걸려 과태료를 내라는 딱지가 날라 왔다. 너무 황당했다. 아니 억울했다. 다른 사람의 불법주차로 내가 불법주차가 되어 과태료를 내야 하다니! 구청에 전화로 사정을 이야기 하였더니 뒷면에 의견서를 쓰는 난이 있으니 작성하여 팩스로 신청을 하란다. 그러나 받아들여질지는 자기도 모른단다. 위원회에서 결정하는 일이란다. 시키는 대로 하고 기다렸다. 며칠이 지났다. 핸드폰 메시지로 억울함이 받아지지 않았으니 과태료를 내라는 것이다. 억울하지만 결정에 따라 바로 과태료를 납부했다. 산업이나 문명을 발달하면 새롭게 발생하는 문제 꺼리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사회구조는 여기에 맞추어 변하게 되어 있다. 사회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조례나 법률을 현 실정에 맡게 바꾸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지방행정이나 국가에서 관리 감독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후약방문 격이 되어 뒷북만 치는 행정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 이면 도로에는 낮이고 밤이고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다. 그 이유는 주차시설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차 한 대가 필요한 주차 공간을 생각해 보자. 운전자가 집에 있을 때, 직장에 나가 있을 때, 여행을 갔을 때, 외식을 하러 갔을 때 기타 등등 다양한 곳에 주차 시설이 필요하다. 사람이 모이는 모든 공간은 수용 인원수에 맞추어 주차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요즈음 주변 사람들이나 나의 가정을 보면 한 가구에 차를 아마도 평균 두 대는 될 것이다. 현 조례에는 가구 수의 팔십퍼센트만 주차 공간을 확보를 하면 건축허가가 난다. 주차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니 밤마다 주차 공간을 찾느라 차들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 대로변에도 불법 주차를 한다. 오후 여섯시가 지나면 주차 단속을 하지 않는다. 공무원 근무 시간이 아니면 주차 단속을 하지 않아 휴일이나 밤이면 불법주차들로 교통이 혼잡해진다. 내가 사는 집 주변에는 원룸 이백 세대가 넘는 대형 아파트가 두 동이 있다. 저녁이면 늦게 퇴근을 한 사람들은 주차 공간을 찾느라 이리 저리 헤매는 것을 많이 목격 한다. 때로는 우리 집 차고에도 잠시 비어 있으면 몰래 주차를 하고 사라진다. 연락처가 있으면 연락을 하여 차를 빼라고 하는데 연락처도 없으면 난감하다. 경찰서에 전화를 하여도 별 도리가 없다. 함부로 타인의 차를 견인을 하다 차에 손상이라도 나면 역으로 당하는 수가 있단다. 언젠가는 내 차를 뺄 수가 없어서 불법 주차 차량의 차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다 출근 시간이 늦어 택시로 출근한 적이 있다. 근무교가 멀어 택시비가 많이 나왔다. 이 또한 황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법적으로 주차 공간이 부족한데 더 부채질하는 사례도 있다. 건물을 새로 지으려면 법적 주차 공간을 확보를 해야 하는데, 준공 검사가나면 주차 공간을 불법 개조를 한다. 돈을 벌기 위해 상가를 만들어 활용하는 것이다. 하루 빨리 법적 주차 공간 법률을 개정하여야 한다. 또한 주차 공간을 불법 개조하여 다른 용도로 활용하는 것을 단속하여 원상 복귀를 시켜야 한다. 그것이 시민을 위한 행정이 아니겠는가· 사무실에서 펜대만 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을 직접 찾아 확인하고 조치하는 공무원들의 근무 자세가 절실히 요구된다. 쾌적한 도시에서 타인과 주차 다툼이 없는 편안한 세상에 행복한 마음으로 살고 싶다.
[충북일보] 강은교의 시는 허무의 세계에 대한 통찰, 재생과 윤회의 동양적 상상력,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따뜻한 마음, 일상적 삶에 대한 포용과 긍정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자연스런 호흡과 리듬이 강조되는 그녀의 시는 허무와 고독의 세계에서 생명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거쳐 일상의 삶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죽음과 허무를 통하여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초기, 민중적이고 현실적인 시각에서 공동체와 역사 문제를 탐구하는 중기, 일상의 생활을 사유하고 성찰하는 후기 등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살펴본다. 1960년대에 시인은 죽음과 허무에 사로잡혀 존재를 탐구한다. 허무(虛無)는 초기부터 그녀의 시에 일관되게 흐르는 사유의 샘이다. 그녀는 존재에 깃든 허무를 응시하여 우리 삶의 본질을 허무라고 간주한다. 이때의 허무는 삶이 갖는 원초적 백지상태 또는 존재의 바닥을 의미한다. 이 허무의 심연에 접근하거나 벗어나는 과정이 주술적 제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녀의 초기 시에 물, 불, 피, 살, 뼈, 바람, 모래 등을 통한 주술적 무속세계, 비의적인 상징세계가 펼쳐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녀의 시는 다소 변한다. 병을 앓고 난 후부터 시인은 개인과 사회가 균열됨으로써 발생하는 비인간화 문제에 천착한다. 병마와 싸우는 동안 시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속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무속인의 운명이 고통과 신음 속에 놓인 자신의 삶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개인의 체험을 무속적 요소와 결합하여 비극적 이미지의 시들을 낳기 시작한다. 무속의 형식을 시에 적극적으로 접목시켜 울음 우는 자들의 아픈 몸과 혼을 어루만진다. 자식을 먼저 하늘로 보내야 했던 바리데기처럼 운명과 맞서 싸우며 운명과 화해한다. 무속을 통해 삶의 순환성을 수용하는 구도자의 자세를 취한다. 개개인의 고통과 애환들을 풀어내주는 강신무의 역할 을 시로 수행한다. 즉 죽음과 허무에 대한 치열한 탐구가 역으로 모성(母性)에 눈 뜨게 했고 생명에 대한 우주론적 인식을 싹틔운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삶과 죽음, 현상과 존재를 등가적 관계로 보고 사유한다. 이 시기의 시적 자아가 정착과 유목을 동시에 욕망하고, 삶과 죽음을 한 몸에 지닌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이런 변화 때문이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녀의 시는 일상의 삶을 사유하고 성찰하기 시작한다. 시집 『우리가 물이 되어』에는 이런 변화가 잘 나타나 있다. 너그럽고도 넓은 품으로 삶과 세상을 끌어안으려는 사랑의 태도가 드러난다. 이 시집의 표제작인 「우리가 물이 되어」에는 물과 불이 함께 등장하는데, 물은 현대사회의 고립된 개체들을 하나로 합일시키는 유동적 매개물이자 가뭄으로 메말라버린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을 부활시키는 희망의 존재물로 그려진다. 반면에 불은 세상을 불태우고 벌하는 파괴적 이미지로 그려진다. 병든 현대사회에 대한 시인의 진단이 드러나는데, 흥미로운 건 파괴와 죽음을 상징하는 불의 시간을 거친 후에 흐르는 물로 다시 만나자고 말하는 부분이다. 시각을 조금 달리하면 불은 이 세계를 병들게 하는 파괴적 죽음 이미지이면서도 이런 부정의 세계를 태워 없애는 역설적 이미지도 해석된다.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 병폐와 모순에 맞서는 시인의 열망이 깃든 역설적 이미지 말이다. 시인이 1연, 2연에서 가정법 언술을 구사한 것은 물을 불의 상흔을 겪어낸 대승적 물로 상승시키기 위함 아닐까. 불의 고통과 번뇌, 불의 파괴와 죽음을 넘어선 후에야 삶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고, 그대와 내가 물로 만나 진정한 하나가 될 수 있을 테니까. / 함기석 시인
2017년이 우리 곁을 떠나갔다. 힘겨웠던 한 해, 즐거운 추억보다는 안타까운 일들이 많았다. 세계 도처에서 있었던 테러와 자연재해, 로힝야족의 참상, 서로의 긴장과 갈등들…. 나라 안을 보아도 대통령 탄핵으로 시작해 핵과 미사일을 두고 벌어진 북미간의 신경전, 그로인해 우려와 불안이 이어졌었다. 서민들은 외줄을 타는 듯한 외교와 안보에 대한 걱정, 포항 지진과 여러 사고로 너무도 자주 가슴이 철렁했었다. 우리 지역도 수십 년만의 물난리와 제천 화재로 마음이 안타깝고 무거웠다. 어쩌면 닭의 해에 되록되록 눈알을 굴리며 불안에 쫒기는 닭처럼 우리가 살아왔는지 모른다. 본래 우리민족은 그렇지 않았다. 예의가 바르고 대의명분이 분명하며 체면을 중시했다. 품위를 잃지 않고 은근함이 있었다. 드러내 자랑하지 않았지만 재능이 우수하고 자기 일에 전문성이 있었다. 오천년을 유구히 이어온 우리의 역사와 선조들이 남긴 문화와 유적이 그것을 보여준다. 올 한 해는 우리 모두 선조들이 자랑스레 물려준 아름다운 전통을 활짝 꽃피우면 어떨까. 주변나라와도 사이가 좋아서 동맹인 미국과, 조심스런 이웃인 일본과, 늘 경계를 풀 수 없는 중국과 또 형제이며 적인 북한과도 잘 지내는 한 해가 되었으면…. 우리 충북은 국토의 중심일 뿐 아니라 나라를 대표할 만하다. 자연재해가 빈번하지 않은 지형에서 온화한 성품의 사람들이 젊잖게 살아왔다. 과격하지 않으나 선거 때면 혈연 지연 학연에 휩쓸리지 않아 어느 한 곳에 표를 몰아주지 않고 깊고 넓게 생각하고 언제나 민심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소로리 볍씨'가 인간 삶의 뿌리라면 최초의 금속활자'직지'는 인간 삶의 꽃이다. 곡식 중 으뜸인 벼농사가 행해지고 정신문화의 총화인 서적의 대량인쇄를 가능하게 한 곳이 청주이다. 양식이 넉넉하고 문화가 풍성하면 더 바랄 게 무언가. 새로 맞은 2018년에는 충북이 국토의 중심이라는 특성을 살려 다른 지역과 함께 힘차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서울은 크게 성장해 오래전에 포화상태가 되었다. 서울의 주변지역이 위성도시가 되고 서울처럼 되었다. 교통이 편리해지고 왕래시간이 짧아질수록 생활전반은 강한 문화권의 영향을 받는다. 충북이 서울이나 그 주변지역과 다른 자연과 문화를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이런 면에 강한 경쟁력을 갖기 위해 우리가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2018년은 '개'의 해다. 파헤치고 경계하고 위기에서 고개만 감추는 행동을 연상케 하는 게 2017년을 상징한'닭'이라면, 친근하고 살가우며 충직함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동물이'개'가 아닐까 싶다. 이웃과 이웃이, 노동자와 사용자가, 정치가들과 국민이 서로 친근하고 살갑고 도움이 될 수는 없을까. 자신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고 이해하는 한 해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개인적인 바람도 있다. 주변의 어른들, 그 중에서도 팔십 중반의 이모님과 장모님이 한 해 내내 더욱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가까이 하는 지인들도 하는 일들이 더 잘 되기를 소원한다. 나 자신이 긴 세월을 지지부진하게 살아왔다. 올 해라고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지만 스스로의 믿음과 가치관에 어긋나지 않게 퐁퐁 솟아나 졸졸 흐르는 산골 물처럼 시원함과 맑음을 간직하려 노력하련다. 또한 이제는 장성한 자녀들이 든든한 배필을 만나 좋은 가정을 이루고 제각기 독립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사회가 한과 미움을 더하지 않고 고백과 용서로 서로 치유하고 화합하는 성숙한 세상으로 나아가면 좋겠다. 만나는 사람마다 '복 많이 받으세요'하고 인사를 주고받는데 그 말이 조금은 추상적이다. 구체적으로 인간관계, 건강, 살림살이가 더 나아지고 개인의 성장과 꿈을 이루는데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는 한 해가 된다면 더욱 좋으리라. 새해 벽두에 했던 다짐과 결단이 올해의 마지막까지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한 해 동안, 우리나라의 큰 과제인 평창동계올림픽, 헌법 개정과 지방자치단체의 선거가 잘 치러지고, 개인과 우리 지역사회와 국가에 좋은 일들이 가득한 2018년이 되기를 내가 믿고 받드는 하나님께 날마다 기도하련다.
[충북일보] 박남수의 시는 절제된 함축, 비약에 의한 암시와 상징, 존재의 고독에 대한 형이상학적 상상력, 근원에 대한 반성적 탐구 등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 그의 시는 시어의 간결미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정지용, 김영랑과 연계되지만 언어의 암시성 비중이 더 크다는 점, 형이상학적 사유와 성찰을 통해 지적 깊이를 추구한다는 점, 대상을 아름다운 서정의 언어로 치장하지 않고 대상에 내재된 관념을 적확히 포착한다는 점 등이 다르다. 박남수의 시는 크게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초기 시에는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식민지 현실이 조명된다. 식민화된 땅에서 겪는 시인의 고통과 불안감이 상징적 시어들로 함축되어 나타난다. 주관적 감정이나 해석을 최소화하여 간결하고 정제된 문장을 추출하기 때문에 이미지는 비약적 암시성을 띠고 시의 밀도는 높아진다. 중기 시에는 6.25 전쟁의 참화가 낳은 비극적 상황과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암울한 절망 속에서 시인은 인간 존재에 대해 고뇌하고 회의하는 실존주의적 태도를 취하는데, 불안에 휩싸인 자아의 심리적 위기의식, 삶에 대한 허무의식이 짙게 나타난다. 박남수 시의 중요 소재인 새는 당시 전쟁의 참화 속에 놓여있던 시인 자신의 초상, 죽음과 허무의식이 드리워진 표상이다. 시인이 추구했던 순수의 본질적 요체로 그의 시의 핵심 소재라 할 수 있다. 이 새를 운동성을 통해 상승 후의 하강에 의해 새의 존재는 완성되고, 빛은 어둠 때문에 의미를 띠고, 삶은 죽음에 의해 완성된다는 자각에 다다른다. 후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시인 자신의 생활이나 신변과 연관된 시들이 많아진다. 초중기의 수사적인 표현, 절제된 언어는 다소 줄어들고 삶의 현장에서 느끼는 고독과 무상함을 직접적으로 표출한다. 죽음과 상실 속에서 보내는 시인의 유폐된 자아가 절실하고 안타깝게 드러나는데 특징적인 점은 삶과 죽음의 합일, 생성과 소멸의 동일화, 지상과 천상의 통합적 수용태도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새 이미지 또한 계속 등장하지만 후기에 접어들면서 상승 이미지보다 하강 또는 추락의 이미지가 우세해진다. 또한 고국을 떠나 먼 이국땅에서 살아온 유랑민으로서의 고독과 아픔도 시의 곳곳에 나타난다. 시 「훈련」은 후기의 시집 『그리고 그 이후』(1993)에 수록된 작품이다. 유랑의 삶을 함께 했던 아내의 죽음을 겪고 쓴 것으로 생전의 아내의 애절한 마음이 잘 묻어나 있다. 자신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질 남편을 근심하는 아내의 애틋한 속마음과 깊은 사랑이 가슴을 아프게 하는 시다. 이 시에서처럼 시인의 후기 시들 전반에 걸쳐 죽음에 대한 초월적 수용과 화해의 태도가 나타난다. 시인에게 인생은 아내와 함께 걸어온 아름다운 소로(小路)였고 그것이 곧 새의 길, 자궁에서 무덤에 이르는 고독의 길이자 쓸쓸한 유폐의 길이었던 것이다. /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이른 저녁 집으로 오는 길에 나무들 사이로 달이 비쳤다. 저물어가는 시간, 사물들이 제 빛깔을 잃어갈 즈음 내리막길 길섶 들풀사이에 있던 달덩이 같은 누런 호박이 눈에 들어왔다. 봄에 심은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 작년에 호박이 뒹굴던 자리에서 싹이 자란모양이다. 수없이 오고가던 길에서 이제야 눈에 띈 걸보니 너른 잎새 뒤에 숨어 가만가만 늙어왔나 보다. 귀뚜라미 우는 밤이면 커져가는 달을 보며 풍만한 몸으로 닮으려 했을 터, 후덕해진 달과 펑퍼짐한 호박은 남다른 연대감으로 끈끈한 우정을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호박을 끌어안고 돌아오며 흡사 달덩이이라도 안은 듯 뿌듯했다. 거실에 놓아보니 수더분한 모습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호박을 반으로 갈랐다. 달은 사람들의 그리움과 소망을 먹고 찬다지만, 도대체 이 호박은 무엇을 먹었기에 뱃속을 이리 실하게 채웠을까. 실핏줄처럼 연결된 탯줄을 부여잡고 알알이 통통한 것들이 어깨를 모으고 있는 불그레한 동굴, 사랑이라는 단어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이런 모습일까. 넓적한 잎사귀만큼 넉넉함으로 피어난 꽃이 어린호박에 사랑을 전하고 기꺼이 스러졌음이다. 그렇게 남겨진 호박은 달이 차고 기울기를 반복 하는 동안, 누런 껍데기 속에 붉은 마음을 감추고 이토록 야무진 꿈을 키워냈나 보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어둡고 내밀한 그곳에서 줄줄이 매달려 있는 하얀 씨앗들은 이미 넘치는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성급한 몇 개의 씨앗들은 호박동굴 속에서 싹을 내밀었고, 놀랍게도 몇몇은 뿌리까지 소복하게 자라있다. 어쩌자고 호박 속에서 뿌리를 키우고 있는가, 어찌하여 어미는 제 죽는 줄 모르고 뱃속에서 싹을 틔워 보듬고 있었을까. 어린 싹이 자라고, 하얀 실뿌리가 굵어지며 제 몸을 키울 때, 기꺼이 살을 내어주며 까마득한 신화를 전하려 했음인가. 순한 꽃송이로 피었을 적에 보았던 동굴 밖의 이야기를 가만가만 들려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으로 가른 호박에 손을 넣어 호박씨를 훑어냈다. 통통한 씨앗들이 탐스럽다. 싹이 나 삐죽거리는 씨앗과, 허연 실뿌리를 매단 씨앗들도 신문지 위에 주욱 펴 널었다. 호박 살점에 단단히 붙어있는 붉은 탯줄들은 잘 떨어지지 않는다. 숟가락으로 말끔하게 긁어내려다 그만 두었다. 호박 씨앗들도 어미와 이별은 쉽지 않은가보다. 껍질을 벗기려니 미끄러져 칼은 자주 빗겨나갔다. 늙은 호박의 단단한 껍질은 치열하게 희망을 지켜낸 흔적이다. 호박잎은 서리가 내리도록 차마 낙엽이 되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푸른 잎으로 남아있다. 된서리가 내리고 나서야 마지막까지 지켜낸 늙은 호박을 보듬어 안고 그제야 꿈을 꾼다. 이대로 한 계절이 지나가면 단단했던 껍질은 부스러져 스러지고 말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호박이 문드러진 그 자리엔 씨앗이 싹을 틔워 또 덩굴을 벋어내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겠지. 그러니, 이 호박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 뿌리까지 내민 호박씨는 생명을 유지하여 번식을 위함이다. 제 어미의 희생을 양분삼아 자라는 건 살아있는 것들의 숙명이거늘…. 매끈한 껍질을 벗기고 나니 주황빛 살이 두툼하다. 비릿한 단내가 풍기는 호박을 뚜걱 뚜걱 썰어 전기렌지 솥에 안쳤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솥에서는 솥뚜껑이 투레질을 하며 김을 뱉어낸다. 불을 줄여 뭉근하게 익도록 두고, 팥을 따로 삶았다. 팥 삶은 첫물을 버렸다. 안 그러면 떫은맛이 난다고 했던 어머니의 말씀이 기억나서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한 평생 팥의 첫물처럼 먹기엔 맛없고, 버리기엔 아쉬운 것들을 드셨는지 모른다. 푸욱 무른 호박을 국자로 으깨고 삶아놓은 팥과 갈아놓은 찹쌀을 넣어 눋지 않게 저어가며 끓였다. 푸욱 푹, 피식 픽, 솥 바닥에서부터 허튼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사이에 불을 줄이고 뚜껑을 덮어 뜸을 들였다. 한참을 기다려 뚜껑을 여니 노을 진 주황색바다에 검은 섬이 그리움처럼 콕콕 박혀있다. 노을빛의 너른 바다가 그랬던 것처럼, 호박죽이 먹음직스럽다. 푸울푸울 달빛을 풀어놓는 보름달이 그러했던 것처럼 빛깔이 곱다. 하얀 대접에 호박죽 한 그릇 넉넉히 담아내었다. 김이 모락모락 서리어 오른다. 호박죽을 싸들고 어머니께 달려가고 싶다. 어머니가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밥상에 마주 앉아 호박죽에 무김치 한 젓가락 집어 숟가락에 얹어 드리고 싶다.
[충북일보] 박용래의 시는 아름다운 서정과 음률, 언어의 정갈한 배치, 반복과 순환의 구조 등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 공간이 넓어 사색과 울림을 낳고 동양적 여백의 미(美)가 잘 살아난다. 이미지와 리듬이 조화를 이룬 고요한 적막의 세계, 동양적 수묵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박용래는 흔히 눈물의 시인, 정한(情恨)의 시인으로 불린다.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시 '그 봄비' 부분)' 이처럼 그에게 자연의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연민과 사랑, 눈물과 서정의 대상이다. 시집 '먼 바다'의 부록인 '박용래 약전(略傳)'에서 이문구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그의 눈물을 불렀다. 갸륵한 것, 어여쁜 것, 소박한 것, 조촐한 것, 조용한 것, 알뜰한 것, 인간의 손을 안탄 것, 문명의 때가 아니 묻은 것, 임자가 없는 것,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 갓 태어난 것, 저절로 묵은 것…. 그러기에 그는 한 떨기의 풀꽃, 한 그루의 다복솔, 고목의 까치둥지, 시래기 삶는 냄새, 오지굴뚝의 청솔 타는 연기, 보리누름철의 밭종다리 울음, 삘기 배동 오르는 논두렁의 미루나무 호드기 소리, 뒷간 지붕위의 호박넝쿨, 심지어는 찔레덤불에 낀 진딧물까지, 그는 누리의 온갖 생령(生靈)에서 천체의 흔적에 이르도록 사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사랑스러운 것들을 만날 적마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은 때가 없었다.' 위의 글에 나타나듯 박용래에게 자연은 풍경과 소리가 하나로 공존하는 식물성 공간이자 눈물의 샘인 것이다. 그는 중심부에서 밀려나 쓸모없이 버려진 것, 하찮고 비천한 것, 작은 식물이나 부러진 가재도구까지도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식구로 생각한다. 이는 시인이 주변의 하찮은 사물들조차 사람과 같은 존엄한 생명의 존재로 떠받들음을 의미한다. 자연과 인간이 수평적 조화를 이루는 이러한 대승적 포용과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이 그의 시를 낳는 원동력이다. 그의 시가 외관상 짧고 단순하면서도 내부로 들어가 보면 넓고 복합적인 큰 세계가 펼쳐지는 것은 이런 시인의 세계수용 태도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는 이미지가 다양하고 비유는 중층적이다. 대상에 대해 시인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지 않고 대상 자체를 정밀하게 관조하여 대상이 숨긴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는 주로 회화적 이미지를 제시하는데 이미지들을 각각의 점으로 배치하는 회화적 점묘법을 구사한다. 그의 시의 각 행들이 독립적 장면으로도 읽히는 것은 이런 구도적 배치 때문이다. 이런 배치와 구도 분할을 통해 그는 회화적 이미지와 음악적 리듬이 결합된 공감각의 세계, 인간과 자연이 상생하는 친화의 세계를 그려낸다. 시 '저녁 눈'은 시인의 회화적 묘사, 애상적 교감에서 나온 작품이다. 감정이나 주관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늦은 저녁 주막집의 눈 내리는 모습을 관조적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어둠이 서린 늦은 저녁, 어느 주막집에 도착한 한 나그네(시인), 탁주를 한 잔 걸치는 그의 눈길과 마음에 비친 아름답고 쓸쓸한 풍경이다. 시각과 청각이 뒤섞여 그려지고 있는데, 말집은 추녀가 사방으로 뺑 돌아가게 만든 집이다. 말집, 호롱불, 조랑말, 여물, 변두리 빈터 등이 순차적으로 나열되면서 근거리 풍경을 먼저 제시되고 점차 원거리 풍경으로 나아간다. 이런 공간 이동과 거리 늘이기는 매우 효과적이다. 가까운 곳의 말집과 호롱불, 조랑말 발굽과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던 눈발이 먼저 보이고 조금 먼 변두리 빈터로 시선이 옮겨지면서 이 시의 원근법이 형성되는데, 이때의 멀어짐은 눈발의 단순한 공간이동을 넘어서서 문명화에 따른 토속적 사물과 전통의 멀어짐으로도 읽힌다. 나아가 외래문물의 유입에 따라 점차 사라지고 멀어지는 우리말과 전통서정에 대한 시인의 안타까움의 표현으로도 읽힌다. 즉 주막집 풍경은 문명화로 점차 사라져간 우리의 전통과 토속의 세계를 암시하고, 그런 풍경에 붐비는 눈발은 시인의 슬프고 안타까운 그리움이 전이된 소재로 읽힌다. 우리 옛것의 사라짐에 대한 시인의 애잔한 마음과 눈길, 옛것에 대한 그리움이 찬 눈발처럼 느껴지는 시다. / 함기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