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김승희는 야만의 원시세계와 참혹한 현실세계를 오가는 태양의 진자다. 그녀의 초기 시는 초현실적 이미지, 서구의 신화적 세계, 무녀의 힘이 지배한다. 1970년대 중후반 시인은 당대의 민족현실을 혐오하고 저주했는데 이런 현실인식이 역으로 서구 신화세계로의 몰입, 태양에 대한 상상력을 촉발했다. 즉 김승희의 초기 시에 나타나는 태양은 신화 속의 불에 대한 시인의 원초적 갈망과 암울한 현실에 내던져진 자신에 대한 부정과 파괴 욕구가 전이된 상징물이다. 빛, 불, 생명이 삼위일체 된 자유의지의 산물이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은 후 시인은 시집 『왼손을 위한 협주곡』(1983)을 발간한다. 이 시집을 통해 시인은 죽음에 대한 변환된 의식, 죽은 사람은 하나의 부재가 아니라 무수한 편재고 죽음의 세계는 추운 저승이 아니라 혼불들이 명멸하는 극광의 세계임을 드러낸다. 「아가가 있는 풍경」은 이 시집의 신비화음(2부)에 수록된 시다. 아가의 흰 기저귀가 나부끼는 곳은 어디든 반야의 나라, 순결한 천사의 나라, 성스러운 백야로 그려져 있다. 주목되는 건 흰 기저귀가 상징하는 순결성과 순수성이 잔악한 현실세계, 죄에 대한 회개가 없는 시대상과 극렬하게 대비된다는 점이다. 흰 기저귀에 자신의 죄 지은 손이 닿을 때마다 적막해진다는 시인의 반성적 고백이 잔잔한 울림을 준다. 빨간 옷을 입고 실로폰 치는 딸아이의 모습과 공중으로 퍼져가는 음악소리가 감각적으로 그려지는데, 이것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시인의 깊은 슬픔을 엿본다. 딸아기가 성장하면서 겪어나갈 비극과 고통의 현실을 예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시 「엄마의 발」을 보자. 딸아, 보아라,/ 엄마의 발은 크지,/ 대지의 입구처럼/ 지붕 아래 대들보처럼/ 엄마의 발은 크지.// 엄마의 발은 크지만/ 사랑의 노동처럼 크고 넓지만/ 딸아, 보았니,/ 엄마의 발은 안쪽으로 안쪽으로/ 근육이 밀려 꼽추의 혹처럼/ 문둥이의 콧잔등처럼/ 밉게 비틀려 뭉그러진 전족의/ 기형의 발// … // 열개의 발가락들이/ 도화선처럼 불꽃을 튕기며/ 아파아파 울고/ 부어부엉 후진국처럼 짓밟히어/ 평생을 몸살로 시름시름 앓고//…//딸아, 보아라,/ … / 네 키가 점점 커지면서/ 그림자도 점점 커지는 것처럼/ 그것은 점점 커지는 슬픔의 입구,// 세상의 딸들은 하늘을 박차는 날개를 가졌으나/ 세상의 여자들은 아무도 날지를 못하는구나,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김승희의 시는 비극의 세계에 방치된 여성 나아가 인간의 실존과 부활을 지향한다. 휴머니즘 태도를 취하면서 달걀 속에서 어떻게 껍질을 깨고 대자연의 대지로 나갈 것인지 몸부림친다. 당연과 물론의 세계에서 통념에 길들여진 모든 것과의 싸움을 통해 그녀는 다시 원시성의 세계, 유머의 세계로 진입한다. 냉소와 유머의 언어로 식민주의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타자들과의 연대의식을 드러낸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녀의 시는 통념적 가치와 문명의 규율로부터 벗어나려는 혹독한 시간의 기록물, 자기투쟁의 비밀일기다. /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고향을 떠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향에 가고 싶어 한다.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의 오후에 "택배요"소리에 나가보니 고향에 있는 6촌 동생이 보내온 대학 찰옥수수와 강에서 잡은 냉동된 물고기였다. 마당에서 옥수수 껍질을 벗기면서 유년시절의 고향 생각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내 고향은 괴산군 감물면 이담리 (잉어수)마을이다. 마을 옆으로 남한강 줄기인 목도 강이 흐르고 김별산과 상봉산 정기아래 넓은 평야가 이루워진 농촌 마을인데 전기가 괴산에서 제일 먼저 들어올 정도로 문화, 교육 마을로 손꼽혀 온 고장이다 마을 영산인 상봉산 기슭에는 수심이 3m이상 되었는데, 늘상 잉어 떼 들이 무리지어 유영하고 있어서 잉어수 마을이라 하였다고 한다. 유년시절 당시 평소 강폭이 200m 정도로서 아주 맑은 물이 흘러 동리사람들은 이강을 삶의 근원으로 삼아 물을 길어다 먹고 빨래도 하며 여름이면 낮이나 밤이나 멱을 감으며 더위를 식혔다. 나는 부농의 종손으로 태어나 어릴적 1950년대 당시 누구나 농촌에서는 빈곤의 연속으로 지게질, 농사일을 했지만, 나는 고생 없이 귀하게만 자라서 남들은 일하는데 강과 더불어 놀은 것이 지금 생각하면 미안스럽고 쑥스럽기까지 하다. 메기, 뱀장어, 꺽지. 빠가사리, 피라미, 모래모지, 등 여러 수종이 많이 서식해서 고기 잡는 재미가 10대의 일과였다. 그 시절에는 어항도 없어 세숫대야나 장독 뚜껑에 힌 보자기를 싸 구멍을 뚫어 안에 떡밥을 넣어 놓으면 피라미 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많이 잡혔다. 저녁이면 또래들과 헤엄 처서 강 건너 갔다 오기를 했고, 어느 때는 의기투합하여 홀딱 벗은 채로 강 건너 백사장에 심은 참외, 수박서리 해다가 배불리 먹었지만, 나는 수영을 잘못해 제일 꼴지로 돌아오곤 해서 몸 달았던 추억이 떠올랐다. 우리 집은 마을 한 가운데 있는데 앞마당과 밖에 마당이 학교 운동장만큼 컸다. 여기서 신파극, 1년에 한번 하는 영화도 하고, 배구, 축구도 하고. 황토 흙으로 구워 만든 구슬치기. 종이로 접은 딱지치기, 생강나무로 만든 자치기, 땅뺏기, 오징어 놀이로 밥 때도 잊고 재미잇게 놀던 생각을 하면서 가보면 그 옛적 그렇게 컸던 마당이 지금은 왜 그리 왜소해 보이는지. 갑자기 초등학교 동창생 얼굴들이 떠오른다. 몽당연필 두자루 넣고 광목보자기로 감싸 질끈 동여매고 짓궂은 장난치며 학교 가던 동창들. 제일 다정하고 임의로운 사이는 초등학교 동창생들이라 70이 넘어서도 이름을 부르는 허물없는 친구들이라 잊을 수가 없다. 생각해 보면 산과 강으로 이루어지고 큰 평야가 있는 내 고향은 전국의 농촌 마을로서 보기 드물게 향교가 있고, 교양대학이 있는 개화된 마을로 애국심과 교육열이 강한 마을이다. 특히 이담리(鯉潭)마을은 일찍이 우리나라를 세운 단군 성전을 짓고, 단군 영정을 모시고 성역화 한 곳이며 해마다 개천절 날은 이곳에서 전국의 유명인사가 참석하여 개천절 기념식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아울러 역대 대통령 비석과 나라를 빛낸 인물 비석을 즐비하게 세워 모든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고양케 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마을 주변에 댐을 건설한다는 계획이 있다 해서 큰 걱정이 앞선다. 내 고향 마을은 500년전 순흥順興 安氏 선조님이 이곳에 터를 잡아 15代를 이어오고 있으니 댐건설로 마을이 수몰된다면 아쉬움이 이루말 할 수 없다. 나 또한 종손으로서 마을 뒷동산 선영에 6대조부터 안장安葬된 묘소가 있는데 어찌해야 하는지... 부모님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언제나 고향에 가면 산과 강과 들녘은 변함없이 나를 포근히 반기고 있으며 고향 분 들을 보면 왜 그리 정감이 가는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 끌어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오늘도 고향산천과 더불어 지내온 자화상을 아련히 되살리면서 자연의 섭리와 시대에 순응하려고 하지만 댐 건설로 인하여 고향 마을을 아름다운 추억의 그림자로만 그리기에는 너무나 아쉬움이 저려온다. 지금 옥수수를 먹으면서, 유년시절 어두워지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풀을 태워 매운 연기로 모기를 쫓으며 할머니가 검은 솥에 맛있게 찐 감자와 옥수수를 대식구들이 먹으며 여름밤을 보낸 고운 추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작열하던 태양이 서산마루에 걸쳐있다. 오늘따라 고향에 대한 진한 향수를 느끼게 되니 자주 가보고 싶은 곳은 고향이지 싶다.
[충북일보] 여름은 배롱나무 꽃과 함께 시작된다. 석 달 열흘 피고 지고, 지고 피는 나무, 목 백일홍, 배롱나무 꽃이 지면 여름도 끝난다. 내둔리 진입로에 배롱나무 꽃이 화르르 피어있다. 발가벗은 알몸에 간지럼을 태우면 까르르 꽃잎들이 웃으니 간지럼나무 라고도 한다. 위초리마다 붉은 색을 끝없이 토해내는 꽃들은 어딜 가나 웃고 있다. 무더운 여름 내내 눈을 맞추고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해 주는 꽃은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을 표식 하는 꽃으로 성삼문을 비롯 사육신의 무덤가에도 심은 꽃이기도 하다. 삼굿 같은 무더위도 저녁 무렵이면 제풀에 지쳐 그 기세를 멈추고 옅은 한숨을 내쉰다. 그 단내 나는 한숨에 몸을 떠는 베롱나무 꽃잎은 이 여름 나를 품에 안았다. 가녀린 허리를 흔들며 불꽃같은 추억을 간직한 그 꽃잎은 더워도 여운의 붉은 무희복을 벗지 아니했다. 그해 여름 그가 그렇게 빨리 떠나지만 않았어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많았을 것이다. 베롱나무 아래서 짧은 추억을 남기고 떠나간 그가 그리워 지금도 타오르는 지방(紙榜)처럼 재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 그리움에 이맘때가 되면 나는 근교에 있는 절간에 가고 싶어진다. 절간에 배롱나무 꽃이 많은 까닭은 스님들이 온다 간다는 하직 인사 없이 배낭 하나 걸머지고 홀연히 떠나가는 경우가 많다보니 말없이 떠난 도반을 그리워하며 텅 빈 마음으로 배롱나무 꽃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꽃말이 '떠나간 벗을 그리워함' 이던가, 늦은 오후, 절간에 도착하니 저녁 예불을 시작하는 목탁소리와 낮은 염불소리가 들려왔다. 절간 마당은 늙은 느티나무들이 사찰의 역사를 품고 있는 듯 병풍처럼 서 있다. 폭염이 절정을 이룬 산은 산이 낼 수 있는 모든 빛깔로 모자이크를 만들어 빛내고 있다. 음수대에서 바가지 한 가득 물을 받아 마셨다. 시원한 물 한 모금이 더위를 씻어주며 마음을 정화시켜주었다. 경내에는 지난해 보았던 배롱나무 꽃이 만발하여 절간 마당을 압도하고 있었다 세석평전에 앉아 배롱나무 꽃과 마주한다. 절간에서는 어느 것 하나도 성채를 보는듯한 신묘함이 있다. 수령이 기백 년 넘은 베롱나무는 몸통뼈와 가죽으로 뒤틀려 있어도 노거수답게 꿋꿋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실타래처럼 올라가는 곁가지는 수도를 하듯 느리게 뻗어가고 있다. 깡마른 북어 같은 몸통에서 맨발의 탁발 스님의 고행을 본다. 그 가지 끝에 달린 소담한 붉은 꽃은 성불로 깨달음의 실체인 양 성스럽기까지 하다. 요사채 앞에 어린 베롱나무 한그루도 예사롭지 않은 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꽃을 보고 있노라면 안드리아 보첼 리가 떠오른다. 그의 노래 중 'mai piu. cosilontano' 가 들려오는 듯하다. 선천적인 녹내장으로 12세 때 시력을 잃은 안드리아 보첼리의 달콤한 목소리에는 애수에 젖은 애련함으로 다가와 더욱 심금을 울린다. 그의 음악은 베롱나무 꽃의 전설과 오버랩 되어 절실한 그리움이 더욱 솟구치게 한다. 보첼리의 불꽃같은 두 눈이, 그의 심장이 여기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만 같다. 저녁 예불 이 끝날 무렵 내 의식에서 시류에 동행하지 못했던 혼란스러움이 잠잠해져왔다. 사람은 저마다 꽃을 피웠다가 진다. 누구는 한 여름 같은 화려한 삶을 살다가는 사람도 있고, 잠시 동안이지만 폭풍의 한가운데를 사는 사람도 있다. 화양연화였든, 상처투성인 사바의 세계였든, 피고 진다는 것은 일대기를 채워가는 각자의 운명이고 숙명이다. 다만 부끄럽지 않게 산다는 것이 아름다움 이라 생각한다. 배롱나무 꽃은 질 때도 제 색깔로 화려하게 진다. 기세등등하게 색깔을 내며 피를 토하듯 우르르 떨어진다. 이 모습을 나는 좋아한다. 인간은 시시각각 변하는 갈대와 같은 모순적인 존재이다. 그렇게 나약한 갈대 같지만, 그 모순 사이에 누군가에게 간절한 여운을 남길 수만 있다면 제 색깔을 가졌다 할 수 있지 않은가, 아직도 귓가에서 보첼리의 노래가 맴돈다. '이제 다시 헤어지지 말아요, 당신은 내가 필요로 하는 단 한사람 오직 당신입니다.' 안드리아 보첼리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가장 달콤한 꽃이다. 내려오는 길이 한 장 한 장 페이지가 넘어가듯 새로운 풍경에 공기마저 달다.'
[충북일보] 신록이 우거진 싱그러운 바람도 쐬고 입맛을 돋우는 아욱국이나 끓여 먹어보려고 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건새우를 사러 건어물 가게로 갔다. 가게 안주인은 얌전하게 가게에 앉아 있고 바깥 사장님이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놓고 건새우를 팔고 있다. "싱싱한 새우사세요. 눈을 감았다 떴다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눈알은 동글 동굴하고 까만 눈동자는 반짝반짝 팔딱팔딱 뛰는 새우 사세요." 라고 한다. "사장님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는 새우 주세요." 네 여기 있습니다. "어디요? 이거는 허리를 구부리고만 있네요. 폈다 구부리진 않는데요?" 이때 가게 안에서 여사장님이 나오더니 화를 버럭 내면서 "우리 집 양반이나 손님이나 똑같군요. 어떻게 죽은 새우가 허리를 폈다 구부렸다 합니까?" 재빠른 손놀림으로 비호같이 카세트를 꺼버리고는 남편에게 쓸데없이 거짓말 하지 말고 장사를 제대로 하라고 한다. 웃자고 농담으로 한 마디 한 게 화근이 되었다. 가게 안주인이 너무 단순하다. 나 같으면 "뱃살이 통통하고 펄떡펄떡 뛰는 새우사세요." 라고 하며 한마디 더 거들었을 것 같다. 어차피 건어물 가게인데 웃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었던가. 멀쩡한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발길을 멈춰지고 말았었다. 기왕에 장사를 하여 먹고 살기위해 남자 분은 손님을 불러들이려고 선의의 거짓말을 했을 뿐이다. 반짝반짝 그 익살스러운 재미에 지나가던 아주머니들이 발길을 멈추고 손님들이 모여들었는데,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는 익살이 없으니 모였던 사람들이 싱거워서 뿔뿔이 흩어진다. 아주머니들이 건 새우를 사러 왔다가 그냥 가버린다. 할 수 없이 내가 "사장님 카세트 틀어 놓으세요. 웃자고 하는 말이지 죽은 새우가 어떻게 펄떡펄떡 뛰겠어요." 라며 한마디 하고는, "까만 눈동자가 반짝반짝하는 새우하고, 펄떡펄떡 뛰는 멸치 한 근 주세요." 라고 했다. 주인아저씨는 싱글 벙글하며, 건 새우와 멸치를 봉지에 담아서 건네주며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숙인다. 이를 받아들고 시장을 한 바퀴 돌아 집으로 오면서도 건새우 파는 아저씨의 멀쩡한 거짓말이 밉지가 않았다. 나도 한 때 저런 거짓말을 하면서 장사를 하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오래된 기억 속에 부산 국제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는 고모님 댁에서 장사를 배웠다. 그때의 거짓말은 뚱뚱한 손님이 오면 이 옷을 입으면 날씬해 보인다고 했다. 키가 작은 사람이오면 이 옷은 걸쳐만 봐도 키가 커 보인다며 콧소리를 냈다. 멀쩡한 그 거짓말 보다는 그래도 손님의 마음을 살피며 심리를 이용하여 상술을 짜냈다. 어느 때는 손님들은 속아 넘어가고, 기분 좋아서 한 가지만 사러 왔다가 두개 세 개씩 사들고 가면 고모가 대번 눈빛이 달라졌다. 그날은 점심 식사도 백반에서 곰탕으로 품격이 달라진다. 손님이 오면 그럴싸한 거짓말을 잘 하느냐에 따라서 하루에 매상이 달라졌다. 판매를 많이 하게 되면 고모한테 잘한다고 칭찬도 받았다. 멀쩡한 거짓말에 손님도 기분이 좋고, 장사하는 사람은 돈 벌어서 좋다. 거짓말을 한다 해도 손님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지를 않는다. 아무래도 손님이 마음을 읽고 옷의 디자인이나 색감, 느껴지는 정감이 있을 때 권하게 된다. 때로는 장사를 할여면 필요에 따라 거짓말이 아니라 허풍스러움을 떨게 된다. 1960년대 그때는 사람들이 순진해서 허풍을 떨어도 정말로 믿기 때문에 장사를 해도 정이 담겼고, 선의의 거짓말을 해도 서로가 이해를 하며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멀쩡한 거짓말 같은 상술에 손님들은 잘도 속아 넘어 갔다. 그 시절 본의 아니게 허풍이 담긴 말을 해서 미안스럽다. 그러나 멀쩡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요즘 우리는 경제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서민 일수록 더욱 힘들게 살아간다. 그래도 옛 시장에 가보면 고유의 전통문화를 지키며 살아가는 지난날의 정감에 푹 빠져 살맛이 난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해도 재래시장은 세월이 가지 않고 삶의 옛정서가 그대로 남아 머무르고 있다. 이럴수록 서로 서로가 가난을 극복해 가는 우리의 문화를 느끼는 재래시장에서 인정을 쏟으며 함께 정을 나누며 살아갔으면….
[충북일보] 정호승은 비극적 현실세계를 투시하여 현대인이 잃어버린 사랑을 농밀한 서정으로 노래하는 시인이다. 특히 1970∼1980년대 초기 작품들은 비극을 낳는 시대의 압제와 어둠을 직시하여 민중들이 처한 삶의 질곡과 상처를 결 고운 서정으로 풀어냈다. 시편마다 민초들을 위로하고 연민하는 시인의 눈길이 애잔하게 스미어 있어서 공감과 울림을 자아낸다. 이데올로기와 정치세력에 희생되는 민초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포용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시인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연민하고 아파한다. 초기의 대표작 「서울의 예수」에서 시인은 민중들이 겪고 있는 삶의 애환을 가슴 깊이 아파하면서 그들의 상처 난 영혼을 위무하고 달랜다.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해 서대문 구치소에 기대어 울고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된 서울의 예수는 그 시대의 자화상이다. 서대문 형무소는 시대의 비극을 대리하는 상징 공간이며,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른 예수는 사막화된 도시에서 잃어버린 사랑을 갈망하고 사람다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내면 초상이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하는 자책과 반성은 정치권력과 물적 자본에 의해 우상화된 신성(神性)에 대한 인간적 고백으로 들린다. 압제와 고통의 시대를 지나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정호승의 시세계는 인생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유, 삶과 존재에 대한 성찰적 사색이 우세해진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외롭고 고독하며, 이 결핍과 부재 때문에 인간은 영원히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미완으로 유예된다. 이 사랑의 불가능성 때문에 인간은 더욱 고독해지고 허무의 세계, 죽음의 심연으로 기울어진다. 인간은 누구나 홀로 핀 수선화 같은 존재, 불모의 사랑을 앓는 존재임을 자각한다. 그러나 시인은 사람 사는 세상에 서린 슬픔, 인간의 외로움을 따듯한 서정의 색조로 담아낸다. 시 「수선화에게」에서 그는 노래한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김신용의 시는 아프고 눈물겹다. 버려진 자들의 황량한 삶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한겨울에 지하도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부랑자, 매혈로 끼니를 이어가는 자, 감방에서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일부러 범죄를 저지르는 자, 부모 없는 고아나 지게꾼 등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야 하는 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을 통해 시인은 삶이 남기는 가혹한 상처의 무늬들을 섬뜩하리만큼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놀라운 건 이런 혹독한 체험 대부분이 시인 자신의 실제 체험이라는 점이다. 즉 그의 시에 나타나는 공간과 인물은 상상적 허구가 아니라 기억 속의 실제 공간과 인물 들이다. 그만큼 고통은 삶 전체를 지배하는 강력한 물줄기고, 시는 그 악마적 고통을 되비추는 잔혹한 물의 거울이다. 시 「환상통」에는 시인의 이런 고통스런 기억이 새와 나무 이미지로 나타나 있다.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서울역 일대에서 쉼 없이 지게를 져야 했던 시인, 지게는 사물이 아니라 자신의 등에 접골된 등뼈였다는 고백은 눈물겹다. 지게는 시인의 삶을 간당간당 유지시켜준 생존의 마지막 도구이면서도 끝없이 고통과 슬픔을 환기시키는 소재다. 얼마나 지긋지긋했을 것인가. 그 한 맺힌 지게를 돌로 때려 부수고 다시는 지지 않겠다고 맹세했을 시인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시인은 아직도 그 지게가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간 몸의 일부로 느끼며 환상통을 앓는다. 주목되는 건 시인의 고통이 새가 떠난 후 가늘게 흔들리는 나무로 대체되어 내면화된 점이다. 대상과 자아를 일체화하여 고통조차도 아름답고 슬픈 서정의 풍경으로 치환한 점이다. 자신의 몸에 접골되어 있던 지게가 사라져버린 후의 빈 몸, 그 상처 자리에서 고통은 계속 흘러나올 것이다. 시인은 지게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많은 사물들에게서 고통과 비애를 보고 그것이 자신의 육체와 닮았다고 느낄 것이다. 통증을 수반하는 기억은 유효기간이 없으니까.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의 시는 말의 차원, 관념의 차원을 넘어서서 몸이 내지르는 묵언의 절규고 아픈 사랑이다. 그의 시가 혹독한 비애를 간직함에도 감정적 비탄으로 흐르지 않고 고요한 서정의 물결로 채워지는 것은 세상 밑바닥을 사는 자들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삶이 생존을 위한 치열한 사투의 격전지였다면, 시는 그 격전지에서 피어난 사랑의 풀꽃이다. /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한 달 전 미국 워싱턴 덜래스 공항을 빠져 나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내가 어느 한 농촌 도시를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의 수도가 농촌 같다니? 내 눈을 의심 하며 이게 사실인가· 믿기지가 않았다. 거대 국가를 움직이는 정부청사 공공건물도 8층을 넘어서지 않은 것 같다. 아주 오래전 프랑스사람이 피에르 랑팡이 도시 설계를 했다 한다. 그 설계대로 그린벨트가 섞인 도시를 건설 하고는 엄격한 규제를 가하여 건물도 절대 겉모양을 바꾸지 못한다고 한다. 높은 빌딩도 없다. 국회의사당 보다 건물을 높게 지어서는 안 된다는 법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만물은 모든 것이 78대 22라는 법칙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 78대 22 이것은 지구 대기의 질소대 산소의 비율이기도 하다. 정사각형을 그려놓고 그 안을 꽉 차게 원을 그려 넣으면 원의 넓이는 78이고 그 나머지는 22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도시주변을 푸르게 가꾸는 것이다. 그 법칙을 우리나라는 지키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엄청난 불행을 초래 할 것이다. 버지니아주 에넨넬은 도시이지만 숲속에 파묻혀 주택가도 옆 건물은 보이지만, 다른 건물은 보이지를 않는다. 오직 상가가 밀집한 곳만 앞이 조금 보인다. 상가 밀집 지역에서 그곳 주민에게 여기에 아파트는 없나 보네요· 하니 저게 아파트라 하며 방향을 손으로 가르쳐 준다. 연립주택 수준인 4층 이였다. 주택 건물은 3층 이상이 없다. 울창한 숲속나무엔 새들만 부산 하게 왔다 간다 한다. 호텔에서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보니 그 상쾌한 공기는 너무나 기분을 좋게 한다. · 내가 짧은 기간 이지만 이번 미국과 카나다를 다니면서 가장 부러워했던 것은 그들의 마천루가 아니라 도시의 환경 이었다. 맑은 공기는 식물에게도 활력을 불어 넣어 식물의 잎은 윤기가 흐르며 태양빛을 받으니 거울처럼 반짝 인다. 국민들은 그 좋은 환경 덕에 아토피 환자도 없다고 들었다, 그 비싼 뉴욕의 한복판에 대형 인공섬을 만들고 시민들은 그 위에서 각종 포즈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으며 아이들은 소풍을 오고 어른들은 그 좋은 환경을 만끽하고 있었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천혜의 땅 대한 민국이다. 태백준령을 모체로 발달한 우리나라의 지형은 강원도 동쪽과 경상도 동쪽이 붙어 태백준령을 이루며 서쪽으로 가지를 치며 만들어진 아주 기묘한 토끼 모양의 대륙의 끝에 붙어있는 반도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발전 축은 서쪽이 주류를 이룬다. 지구상에서 많은 혜택을 받은 아름다운 나라이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외국에 가서 본 것도 아마 내가 본 것과 비슷했으리라 본다. 외국을 방문하고 느낀 것은 절실한 푸른 도시였을 것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그린벨트이다.·그린피스는 물론 유렵 국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린벨트정책을 박정희 대통령의 재직시 업적 중에서 가장 좋은 성공한 정책이라고 평가 했었다. 그 좋은 성공 작 그린벨트를, 어느 날 정치인들이 그린벨트 해제를 약속 하면서 그린벨트는 무너지기 시작 했다. 전국의 그린벨트가 5%도 안 남은 것 같다.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은 내 자손들의 만대를 질병에 처넣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토피가 만연을 시작 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정치인들이 알까· 아토피에서 자식을 구하고자 어려움을 자초하며 황토흙이 있는 시골이나 환경이 좋은 곳으로 이사까지도 감행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환경을 살린다며 숲을 훼손하여 태양광 발전을 한다니 소가 웃을 일이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인데 왜· 그 바다를 사용하려 하지 않는가· 산은 인간을 보호 하는데 일등 공신이며 잘 관리하면 그게 보물이다. 우리가 가꾼 숲은 우리를 보호하고 건강을 선물할 것이다. 지금 이라도 숲을 더 이상 훼손 하지 말고 가꾸는데 온 힘을 기울여 후손에게 아름다운 강산을 물려줘야 할 것이다. 그린벨트를 훼손한 위정자들에게 나는 유감을 표시한다.
[충북일보] 최승자의 시는 세계에 대한 절망과 도저한 부정에서 발아한다. 폭압적 시대상황과 남성지배 사회구조 속에서 억눌린 여성의 내면무의식이 파멸과 죽음의 언어로 표출된다. 주목되는 것은 바깥세계에 대한 시인의 적의와 분노가 바깥으로 향하지 않고 안으로 향하여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는 점이다. 이 혹독한 자기싸움 과정에서 자학적 비명, 절규에 가까운 아우성, 죽음의 이미지들이 쏟아져 나와 시에 흩뿌려진다. 그러니까 그녀의 시는 억압과 착취의 세계에서 해방되고픈 자아의 간절한 욕망의 기표이자 그 억압체계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음에 고통스러워하는 절망의 몸짓이다. 시인은 왜 이런 자기 공격적 진술을 행하는 걸까· 극렬한 자기부정, 자기연민, 자기분노를 통해 그런 존재를 낳는 이 세계가 썩고 위선으로 가득 차 있음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세계는 거짓투성이고 피로 물든 고아원임을 반어적으로 고발하기 위함이다. 위악의 세계를 경멸하고 모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런 세계 속의 자신을 혐오하고 자기 존재를 루머로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죽음의 발화로 죽음을 폭로하여 죽음으로 물든 세계의 실상을 똑똑히 보라는 반어적 경고다. 이런 모멸과 죽음의 발화는 초기작인 「일찍이 나는」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시인은 빵에 핀 곰팡이나 벽에 지린 오줌자국,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등으로 자신을 비하하여 소외된 존재, 죽음을 반복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아무것도 아닌 자로 스스로를 규정하여 존재 자체를 루머로 추락시킨다.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폐기하여 자아의 존재 토대인 세계가 절망과 폐허를 낳는 곳임을 통렬히 비판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그녀의 시가 줄기차게 죽음으로 흐를 때 반대로 시인은 줄기차게 사랑을 갈구하고, 절망과 고통이 깊어질수록 시인의 사랑에 대한 갈구는 더 간절하고 깊어질 것이다. 죽은 세계 속에서 죽은 자신의 시신을 으깨지도록 끌어안고 비통하게 우는 시인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죽음의 장면들은 그녀의 시 전반에 나타난다. 특히 초기 시에는 잔혹하리만큼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폐허의 이미지들이 등장하여 삶 자체를 죽음을 낳는 과정으로 그리곤 한다. 아이러니컬한 건 죽음의 발원지가 여성의 몸속 자궁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그만큼 시인의 눈에 여성의 몸은 이미 여성성을 상실한 폐허의 몸, 남성 지배구조 속에서 식민화된 절망의 몸인 것이다. 죽음을 생산하는 불모의 공간이자 오염된 바다, 불구자나 죽은 아이를 낳는 사산(死産)의 공간인 것이다. 최승자 시에서 이 땅의 여성들이 몸속에 무덤을 하나씩 지닌 불운의 존재로 그려지는 것은 절망적 시대인식, 비극적 세계인식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비극적 자궁을 통해 여성과 여성성의 문제, 사회의 부조리와 불화들, 삶 속에 은폐된 죽음들을 재성찰한다. 그녀의 시가 남성적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대항담론으로 승격되는 것은 남성 중심의 역사가 낳은 수많은 위악과 폭력을 비판적으로 폭로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성들에 의해 미화되고 치장된 여성의 몸을 철저하게 유린되고 파멸된 비극의 영토로 환원시켜 사실적으로 재성찰하기 때문이다. 이런 반성적 모색과 열린 페미니즘 시각이 대모(大母)의 상상력, 우주의 상상력을 낳는다. 그리하려 시인은 이제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항대립의 세계를 하나의 우주적 육체로 끌어안고 우주의 모든 존재를 연인들로 받아들인다. 결국 모멸과 악의, 죽음과 절망으로 가득 찬 그녀의 시는 세상을 향한 뼈아픈 사랑이자 갈망이 낳은 숨결들인 셈이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늘 역설과 반어의 시 아니던가. /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승객 여러분! 청주 시에서는 버스노선을 개편하고 있습니다. 개편에 필요하오니 시내버스에서 내리실 때는 꼭 교통카드를 하차 태그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노라면 서너 승강장을 거칠 때마다, 차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여자 아나운서의 고운 목소리다. '하차 태그'란 시내버스를 어느 승강장에서 갈아타고, 목적지에 가려면 뒷문서 내릴 때 단말기에 환승을 위하여 교통카드를 찍는다. 잘 생각해보니 환승을 안 할지라도, 내릴 때는 카드를 단말기에 찍어 달라는 것임을 알았다. 나는 생각했다. '머지않아 시청에서 버스노선을 조정할 때, 어느 노선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지 파악해서, 노선개편 뿐만이 아니라, 버스 배차량도 조절할 모양이구나.'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어디를 갔다가 귀가할 때, 환승이 필요치 않아도 꼭 단말기에 카드를 찍고 내렸다. 시내버스노선 개편을 위한 차내 방송이 시작된 지 거의 석 달이 지나갈 때다. 청주에서는 '육거리시장'이 제일 커서, 그 승강장에서 내리거나 타는 손님이 다른 승강장에 비해 많은 편이다. 하루는 버스를 타고 육거리시장을 지나는데 그곳 승강장서 내리는 손님을 보다가 '하차 태그'를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세어보았다. 그날따라 열한 명 정도가 뒷문으로 내리는데 단말기에 교통카드를 찍는 사람은 세 명 정도 밖에 없었다. 글쎄, 그 세 명도 시장서 볼일을 마치고, 돌아가려고 환승을 찍은 사람들이라면, 거의 모든 사람이 버스 방송 안내에 따르지 않는 셈이다. 물론 꼭 그렇지는 않을 테지만 어쩐지 마음이 씁쓸했다. 어느 날이었다. 아내와 같이 시내버스를 타고, 한 좌석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아 가고 있었다. 그날도 버스에서는 내릴 때, 꼭 '하차 태그'를 해 달라 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여보, 내릴 때는 꼭 교통카드를 찍고 내려요."라고 말했더니 "나는 카드를 주머니에 넣었는데 귀찮게 뭘 또 꺼내요."라고 아내가 말한다. 그러자 나는 내 손에 쥐고 있는 카드를 보이며, "앞으로는 주머니에 도로 넣지 말고 쥐고 있다가 환승이 아니라도 꼭 찍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정부나 관할 행정기관의 시책에 적극 협조하는 성숙된 시민 정신이 없이는,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없다고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목적지의 승강장에서 내리게 되자, 아내는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어, 단말기에 찍으며 내렸다. 내가 사는 곳엔 자동차들이 끊임없이 다니는 큰 도로가 있다. 그중에 우리 아파트에서 가까운 곳의 승강장을 나는 이용한다. 그런데 그 앞엔 하수구 뚜껑이 있다. 그것은 도로의 가장자리에 붙어 있지 않고, 무슨 연유인지 길의 중앙 쪽으로 얼마 쯤 나가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시내버스가 서면, 그 뚜껑 위에 앞바퀴가 얹혀 있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어느 날 그 뚜껑을 보러갔다. 철사다리 모양의 하수구 뚜껑의 중심축이 안으로 깊이 들어가 있지 않은가? 자칫하면 정차하는 버스의 앞바퀴가 그곳에 빠지거나, 달리는 차량의 바퀴가 그곳에 끼어 큰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즉시 핸드폰을 꺼내서 114에 우리 주민센터의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그곳에 신고를 했다. 며칠이 지나 확인을 해보니, 매우 두꺼운 바둑판 모양의 철판으로 튼튼하게 덮어 놨다. 우리 행정의 발 빠른 조치와, 나의 신고로 버스길이 안전하게 된 것에 흐뭇함을 느꼈다. 나는 어떤 경우, 급할 때는 신호를 무시하고 건널목을 뛰어 건너가, 떠나려는 버스를 타는 등, 위험한 행동을 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또한 걸어가다가 무심코 길거리에 가래침을 뱉을 때도 여러 번 있었다. 우리들 각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든 시민이 법을 지키고, 질서를 지키고, 나라의 시책에 보이지 않는 양심적 협조가 따를 때, 우리지역은 살기 좋은 고장이 될 것이며, 우리나라는 작지만 큰 나라가 될 것이다.
[충북일보] 김명인의 시는 기억의 흑백사진이고 눈물의 판화다. 짙은 슬픔과 상실감이 시의 바닥에 진흙처럼 깔려 있다. 그의 시에는 삶의 변방을 떠도는 자들, 목적지를 잃고 떠도는 상처투성이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표류하는 곳은 주로 비애의 공간이다. 거기서 살과 살이 끌어안고 아파하면서 흐르고 흐르면서 부서진다. 그것이 물과 모래 이미지로 나타난다. 물이라는 액체와 모래라는 고체, 즉 생명과 죽음이 혼색되어 나타난다. 기억을 재생할 때 시인은 관념으로 제시하지 않고 사건을 낳은 공간과 상황을 구체적으로 제사한다. 주관적 감정 배출을 줄이고 말들이 서정적 사색의 결을 살려내도록 돕는다. 이 말의 직조 과정에 삶의 우물 바닥을 꿰뚫어보는 직관적 통찰이 스민다. 사람살이의 비애와 분노, 허망과 눈물이 스민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그의 시는 새벽안개 속으로 사라진 아픈 사람들, 그들 가슴 속의 상처 난 길을 찾아나서는 쓸쓸한 시간여행이다. 초기 시에는 실존의 절규와 세상에 대한 비판이 공존한다. 자기 안으로 파고드는 구심력과 바깥세상으로 나가려는 원심력이 충돌하며 길항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시를 못마땅해 한다. 사람의 가슴을 적시는 감화력과 절실함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반성을 계기로 그는 좀 더 간절하고 내밀한 자기고백을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작품이 첫 시집에 수록된 '동두천' 연작이다. 당시 동두천은 미군과 양공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의 울음이 메아리치던 곳이다. 돈 많은 아메리카에서 태어나지 못한 혼혈아들에게 외로움과 배고픔을 주는 곳, 춥고 시린 삶이 가득한 상처의 공간이다. 그곳에서 시인은 고등학교 교사로 일한 적이 있다. 그때 만났던 혼혈아들의 눈물과 설움을 시로 풀어낸다. 시 '동두천'에 관해 그는 말한다. "한 삶이 갖는 고유성은 간절히 희구하고 진정으로 애쓰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룩되는 게 아니겠는가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아마 이 시도 그런 것일 겁니다. 저는 제 시로나마 제가 간절히 원했던 것,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세계를 담고자 애썼습니다." 김명인의 시는 결핍과 상처, 울분과 연민이 사슬처럼 이어져 있다. 개인의 고통에서 출발하여 사회 전반으로 시의 파장이 확장된다. 개인의 불우한 가족사와 민족의 불우한 정치현실이 맞물려 시대의 아픔을 낳는다. 을 비롯하여 초기의 대표작들인 '켄터키의 집', '베트남', '아우시비쯔', '영동행각嶺東行脚', '머나먼 곳 스와니' 등에는 이런 특질이 잘 드러나 있다. /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온종일 녹우(綠雨)가 흩뿌린다. 창밖에 부딪히는 빗방울을 무심코 바라보노라니 아파트 마당에 삼삼오오 무리지어 등교하는 아이들 모습이 눈에 띈다. 먼발치서 봐도 초등학교 1, 2학년 또래의 어린이들이다. 어린이들이 쓰고 있는 빨강, 주황, 노랑, 초록색 우산이 정원의 푸르른 신록과 조화를 이루어 마치 봄꽃처럼 곱다. 요즘은 우산도 패션의 도구인듯 고급 제품이 생산된다. 실용 및 미적 감각의 제품들을 선호하는 소비자 취향 때문일 것이다. 고운 색상의 우산을 바라보노라니 문득 어린 날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싸아 하다. 초등학교 2학년, 봄비가 세차게 쏟아지던 어느 봄날이었다. 수업을 마친 후 친구랑 함께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설 때이다. 학교 정문 앞에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 걸음에 달려갔다. 어머닌 화안한 웃음을 입가에 지으며 당신이 쓰고 온 우산을 내게 건네었다. 그리곤 당신은 머리에 흰 무명수건 만 쓴 채 비를 맞으며 빗속을 걸었다. 그런 어머니가 안쓰러워 우산을 같이 쓰자고 말했지만 어머닌, "네 한 몸 가리기도 부족한데 나까지 쓸 수 없다."라고 하며 한사코 함께 우산 쓰기를 거절하였다.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며 왜· 우리 집은 늘 우산이 부족할까· 의아했다. 뿐만 아니라 그날 어머니는 비를 맞아도 어른이라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으니 얼마나 철부지였던가. 그 때 쏟아지는 차디찬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묵묵히 걷는 어머니의 몸에서 젖은 옷을 뚫고 피어오르는 훈김을 오히려 신기하게 바라보지 않았던가. 학교서 집까지 2키로 남짓한 길을 걸으며 싸늘한 빗줄기를 온 몸으로 맞았던 어머니는 얼마나 심한 한기를 느꼈을까· 어느 여름날 새벽 부엌에서 어머니의 밥 짓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잠자리서 일어나 부엌으로 난 소창(小窓)을 열었다. 어머닌 아궁이에서 내뿜는 매캐한 연기가 매운 듯 연신 주먹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리곤 한 쪽 발로 아궁이에 땔감을 밀어 넣고 한 쪽 손으론 자배기에 보리쌀을 씻고 있었다. 그 날 아침 밥상엔 전에 없던 호박잎에 싸서 구운 고등어구이도 올랐다. 어디 이뿐이랴. 상추 겉절이도 올라왔다. 전 날 어머니께서 남의 혼수 이불을 바느질 해주고 받은 삯으로 사온 양식과 반찬이었다. 매끼니 밥상을 대할 때마다 어머니 손길만 닿으면 무엇이든 맛난 음식으로 둔갑 하는 줄로만 알았다. 밥상이라고 해야 새카만 꽁보리밥, 혹은 멀건 죽, 된장찌개, 열무김치, 나물 반찬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시절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위에 올랐던 반찬들은 나의 솜씨로는 그 맛을 재현할 수 없는 구수한 맛인 추억의 음식들이다. 상추 및 배추 겉절이만 하여도 그렇다. 어머닌 어떻게 그리 입에 착착 감기는 맛의 상추와 배추 겉절이를 만들 수 있었을까. 풍족하지 못한 집안 살림 탓에 변변한 양념도 없었다. 단내 나는 먹물 같은 간장, 고춧가루, 마늘 몇 조각 으깨어 넣은 게 양념의 전부이련만 어머니가 해주는 상추와 배추 겉절이 한 가지 만으로도 밥 한 공기 너끈히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어머니는 열무김치를 담근다. 텃밭에서 뽑은 열무를 다듬어 풋내나지 않게 씻은 후 풋고추 몇 개 송송 썰어 넣고 보리쌀 물과 밀가루 풀물을 섞어 어머닌 열무김치를 담그곤 하였다. 나는 어떤가. 양파, 배, 붉은 고추, 생강, 마늘, 파프리카 등의 김치 맛을 극대화 시킨다는 온갖 재료들을 믹서에 갈아, 다시마 우려낸 물로 쑨 밀가루 풀물로 열무김치를 담그곤 한다. 하지만 내가 담근 김치 맛은 어머니의 손맛을 도저히 따를 수가 없다. 요즘처럼 제대로 된 조리기구도 구비된 양념도 또한 양식도 귀했던 그 시절, 어머닌 어떻게 무슨 비법으로 그리 맛난 음식을 우리에게 요리해주었는지…. 우린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을 먹으며 심신을 키웠다. 또한 어머닌 독서를 습관화 시켜 우리의 영혼도 살찌우려 하였다. 양식은 못 구해도 우리에게 동화책은 사주던 어머니다. 이 때 평소 책 읽기를 게을리 한다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어린 마음엔 참으로 야속하기만 하였다. 책 속에서 얻는 간접 경험이 인생을 완성 시킨다는 진리를 어머닌 우리들로 하여금 독서를 통하여 얻길 바람 했던 것을 그 때는 몰랐다. 지난날 어머니는 당신의 안위보다 자식을 더 걱정하였고, 당신의 헌신과 희생으로 자식들을 양육하는 것을 삶의 보람이요, 기쁨으로 여겼다.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을 나는 세 딸의 어미가 된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으니 이제야 뒤늦게 철이 드나보다.
[충북일보] 하얀 목련 꽃잎이 화사하게 핀 골목길을 돌아서니 어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어머니. 이렇게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 이름 언제나 그리운 친정어머님이 다. 둘째 동생 내외가 누나 생일 축하한다며 만나자고 전화가 왔다. 동생의 마음이 고맙다. 올케가 선물을 드린다며 손수건에 싼 물건을 건네준다. 하얀 불로치와 땅콩만한 연한 옥비취색 알들이 고무줄에 꿰어 있는 늘어났다 줄어드는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팔찌였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팔찌다. 올케가 버리지 않고 지금껏 간직하고 있었다니 고맙고 놀라웠다. 어머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클 것 같아 보관하였다가 준다고 한다. 불로치와 고무줄에 매달린 팔찌를 차보니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져 온다. 팔찌가 오죽 차고 싶었으면 자식들에게 사 달라는 말을 못 하시고, 시장 길거리 노점상에서 파는 싸구려를 샀을까· 어느 날 친정엘 들렸더니 "얘, 이 팔찌 예쁘지" 하시며 자랑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무심코 지나친 일이었다. 어머니! 순간 울컥 목이 메여온다. 구십 오세의 노쇠한 몸인데도 여자이기에 그렇게 팔찌와 불로치를 갖고 싶어 하시었는데…. 옷가게에서 이삼 십만 원하는 재킷을 외상으로 사 오셔 입어 보시면서 "어때 색도 잘 어울리지" 하시면 "엄마, 며느리 들이 돈도 없는데 외상이라니 욕해요." 하며, 어머니를 무시하였다.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기억들이 어렴풋이 되살아나며 가슴이 아프다. 그 흔한 귀금속이나 패물도, 고가의 옷들도 오직 자식들 시집 장가보내야하는 엄마로 책임을 다하는 것만 생각했었다. 나도 유행도 멋도 모르고 근검 절약정신으로 살아왔다. 액세서리들, 다이아몬드, 반지, 금팔찌, 귀걸이 같은 사치를 모르고 살아왔었다. 내 자식만 생각했지, 어머님의 마음을 헤아려 본적이 없었다. 어머니도 여자라 얼마나 갖고 싶고 사고 싶으셨을까. 돈도 없으시면서 외상으로 사시는 마음을…. 자식들 중 나는 어머니의 아픈 생이 손가락이었다. 항상 엄한 시어머님 모시고 무관심한 남편 내조하며, 자식교육과 직장의 장으로 바빠서 배부르게 먹지도 못하고 출퇴근 했었다. 머리가 다 빠지도록 밤낮 없이 동분서주하는 딸이 늘 불쌍하다고, 어머니는 항상 걱정이 태산이셨다. 사직동 분수대 옆 도로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해 생사의 갈림길의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며 고통을 받았을 때도, 학교에서 갑자기 어지러워 쓰러져 병원에 실려 왔을 때도, 눈을 떠 보면 손잡고 눈물지으시던 어머님. 근심어려 바라보시던 어머니 얼굴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힘들지, 고생했다" 하시며 "자식 생각하여 건강하게 살아야지, 많이 먹어라" 하며 숟가락을 쥐어 주시던 어머님이시다. 어머니께 전화를 걸면 딸이 안쓰러워 걱정하며 "밥은 제때 먹고 다녀라. 일찍 자거라" 하시면 "내가 애기야" 하며 어머니께 딴청을 부리던 딸이었다. 날이 갈수록 쪼그라들고 걷기도 힘들었던 허리보다 더 아픈 어머님의 가슴속에는 미운 우리 새끼들마저 아픈 손가락들이었다. 죽음 앞에 멈춰버린 어머님의 인생 시계를 다시 돌려드리지 못했다. 심장 소리가 손 마차 바퀴 돌아가듯 드르륵 푸드드륵 푹, 가래 끓는 거친 숨소리. 생기 잃은 어머니에게 딸은 폭풍의 잔소리만을 했었다. 여기 아프다, 저기 아프다, 절이다 쑤시다 말하면, 냉정히 대하던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직장에 다니고 바쁘다는 핑계로 돈만 몇 푼 드리며 병원 가보시라고 퉁명스럽게 말씀 드렸었다. 어머니의 아픈 몸을 주물러 드리고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상냥하게 사랑으로 보살펴 드리지 못 했다. "어머니를, 하늘나라 아버지께 고통 없이 데려가 달라고 부탁해요." 라고 말씀드렸던 불효한 말들이 하나하나 가시가 되어 되새김질하며 가슴을 아프게 한다.·이제 봄꽃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세월이 가면 잊힐 줄 알았는데 어머님의 향기도 기억나지 않고 얼굴과 마음도 점점 잊혀 져 간다. 어머니의 유품 선물들을 받고 만져보니 더욱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 어머니가 그립던 날, 친정집이 있었던 성안길 옛집을 찾아가 텅 빈 흔적들만 바라보며 퇴색된 대문 시멘트 기둥을 더듬더듬 만져보았다.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짊어 지셨던 무거운 짐과 무심했던 미안함과 감사했던 지난날들…. 자신의 모든 것 다 내어주고 더 줄 것이 없어서 미안해하시며 늘 남편 몫의 그림자로 살아가시던 어머님. 세월과 추억이 쌓인 어머니의 자상하신 모습은 이 가슴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어머니의 유품 팔찌와 불로치를 손 안에 감싸니 사랑에 가슴이 뭉클 해진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충북일보] 김남주의 시에는 울부짖음과 비탄, 피 끓는 분노가 서려 있다. 그에게 시는 삶이 흘린 혹독한 피였고 목숨이었고 사랑이었다. 그는 시를 통해 독재지배의 폭압과 허위를 신랄하게 폭로했고, 비인간적인 노동과 착취 속에서 쓰러져간 수많은 노동자들의 뼈아픈 삶을 격정적으로 담아냈다. 그렇게 그는 목숨을 걸고 시대의 불의에 맞선 투쟁가였다. 암흑의 공포 속에서 끝없이 빛과 진실을 되찾으려 했던 행동가였다. 그에게 시인이란 책상머리에 앉아 유려한 문장을 조탁하는 자가 아니라 민중들이 불의와 폭력에 맞서 싸우도록 그들의 가슴에 둥둥 북을 울리는 자였고, 전투의 시작 나팔을 울리는 선봉자였고, 살인과 고문을 자행하는 압제자의 가슴에 창을 꽂는 전사였다. 1980년대 김남주의 시 정신은 1960년대의 신동엽과 김수영, 1970년대 김지하의 저항정신을 승계한다. 그러나 시의 숨결과 리듬, 격정과 기백이 다르고 감정 노출 방식과 비판의 기법 또한 다르다. 「학살」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자행한 참혹한 진압과정을 극사실적으로 재구성한 그의 대표작이다. 압축된 문장의 속도감 높은 전개, 점층적 반복과 극도의 긴장감 조성으로 당시의 참혹했던 현장을 매우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있다. 극한의 공포에 휩싸인 채 울부짖는 무고한 시민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당시 신군부의 행동을 시민학살로 규정하면서 그 역사적 비극현장을 중개한다. 게르니카의 학살보다 더 처참한 광주의 학살이 악마의 어떤 음모보다도 계획적이었고 조직적이었음을 고발한다. 이를 위해 시인은 시공간을 혼용한다. 공간은 1980년 광주를 그대로 재현했지만, 시간은 밤 12시로 응축하여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자행되는 학살의 만행을 극대화한다. 공포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는 도망치는 사람들, 이미 죽어 널브러진 사람들,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사체들 등등. 5.18은 우리 현대사의 크나큰 상처고 비극이다. 김남주는 이 역사의 현장을 우회의 서사가 아닌 정공법의 시로 직파한다. 김남주의 시를 접하면서 많은 독자들이 놓치는 안타까운 점이 한 가지 있다. 핏발선 분노 이면에 아이의 눈빛 닮은 애잔한 서정, 세상을 온몸으로 끌어안으려는 순박한 사랑, 버려진 작은 것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이 뿌리 깊게 숨어 있다는 점이다. 5월이다. 녹음으로 우겨진 산과 들, 하늘의 구름도 산천의 꽃들도 다시 5월이다. / 함기석 시인
[충북일보] 어느 날 성당에 들어서니 검은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그 안에는 사람이 운명 했을 때 사용하는 관이 놓여 있었다. 신자들은 구슬픈 소리로 연도를 하고 있고 한쪽에서는 죽음 예행연습을 하기위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희망자는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차례가 되면 검은 관속에 누워 죽음을 체험 해 보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대열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웬지 초조해지며 가슴이 설레인다. 갑자기 죽음이 가까이 다가 선 듯 가슴이 철렁하고 기분도 썰렁하여 그만둘까 생각 하는데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한발 한발 제단으로 올라 관속에 앉자 손을 잡아 주어 똑바로 누웠다. 연도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우리는 그리스도 한 가족인 정베레나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게 하시옵니다. 언제나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너그러이 용서하는 하느님. 오늘 이 세상을 떠난 망자를 기억하시어 사탄의 손에 넘기지 마시고, 거루관 천사들에게 고향낙원으로 데려가게 하소서.' 관 뚜껑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다시 살아 밖으로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영원한 천상의 행복을 생각하고 기꺼이 죽음을 받아 드리게 해달라고 기도 한 다음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섬짓하고 두려움에 마음이 착잡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사는 동안 입으로만 걱정하고 입으로만 사랑한 사람들이 줄줄이 스쳐 지나갔다. 잘못 했던 일들이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참회의 눈물인가 죽음이 서러워서인지 나도 모르겠다. 내 장례식의 모습이 그려져 온다. 곁에서 흐느끼는 남편, 오열하는 아들 딸, 손주들 그리고 조문객을 상상해 봤다. 부질없는 망상이 구름처럼 연신 떠오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짐을 내려놓은 듯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었다. 웬 일일까· 이것이 바로 죽음이구나.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슬픔의 고통이 따르지만 죽음을 맞는 사람은 그믐달이 구름 속으로 스러지듯 가고 만다. 어느 인연으로 하여 마났다가 그 맺음이 다하면 헤어지는 게 바로 인생이 아니던가. 죽음이란 인생의 고해를 건너 영원한 안식을 찾아가는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 뚜껑이 열리며 "일어나세요" 한다. 잠깐 동안 이었지만 나를 성찰 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죽음에서 소생 한다면 무엇이 하고 싶은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나 에게 물어 본다. 때 묻은 심안을 털고 닦아서 맑게 하여 부끄러워 숨기고 싶은 것 들을 씻어내고 싶다. 매사에 욕심을 부리는 것도 중요 하지만 이제는 덜어 내는 공부를 할 때가 된 것 같다. 조금씩 덜어내고 흘려보내고 잊어버리면 몸과 마음이 얼마나 자유로울까· 생각하면 다 아는 이치인데 떼어 버릴 수 없고, 덜어낼 수 없는 것 들이 가슴 깊은 곳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인가. 못된 욕심을 한쪽 마음에 담아두고 있기 때문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버려지지가 않으니 안타깝다.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고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올수 있다. 애면글면 살아오면서 가진 것이 많아서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버거워 내 몸을 아프게 했고, 평생 내 주어진 시간도 모자란 듯 살아오는 바람에 내가 너무 힘이 들었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여유를 가지지 못했던 것, 자식들에게 엄친으로만 살아온 것. 자식들에게 잘했다고 항상 감사 하지 못한 것 들이 후회스럽다. 삶이란 세상에 대한 그윽한 사랑만이 사소한 불만과 불행한 마음을 녹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 보다, 곁에 있는 가족의 손을 한 번 더 잡아 보는 것이 더 값진 사랑임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따뜻하고 정다운 눈빛으로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하여 마음을 주자고 다짐해 본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마음속에서 탐욕이 꿈틀거리거나, 교만이나 증오심이 일어날 때, 번뇌 망상이 구름처럼 피어 날 때 관속에 누워 있는 자신을 생각해 보며 내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두고두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삶이되 죽음의 예행만이 아니기를 늘 반성하며 깨우치며 살리라.
[충북일보] 김지하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반체제 저항시인으로 민중시의 사회비판 기능을 가장 실천적으로 보여준 시인이다. 신랄한 풍자정신과 민요조 가락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시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초기 서정시 계열로 현실에 대한 강렬한 부정과 자유의식을 토대로 1960~70년대의 메마른 현실과 정치판을 반역적 감수성으로 노래한 시들이다. 시집 『황토』(1970)와 『타는 목마름으로』(1982)가 대표작으로 사회 현실에 대한 울분을 서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첫 시집 『황토』 서문에서 시인은 말한다. "이 작은 반도는 원귀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차 있다. 외침, 전쟁, 폭정, 반란, 악질(惡疾)과 굶주림으로 죽어간 숱한 인간들의 한에 찬 곡성으로 진동하고 있다." 둘째는 담시 계열로 우리의 전통적 민중문학 양식을 계승하여 1970년대의 정치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비판한 시들이다. 시집 『오적(五賊)』과 『비어(蜚語)』가 대표작으로, 판소리 가락과 난해한 한문을 차용해서 권력층의 비리와 부정부패를 통렬하게 풍자한다. 셋째는 서사시 계열로 1980년대의 생명사상에 따른 후천개벽(後天開闢)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0역사적 상상력을 펼친 시들이다. 대설(大說)이라 이름붙인 시집 『남(南)』(1982)과 최제우의 삶과 죽음을 판소리가락으로 풀어낸 서사시 『이 가문 날의 비구름』(1988)이 있다. 넷째는 후기 서정시 계열로 초기 서정시에서 보여주었던 직설적인 표현은 급격히 줄어들고 달관의 마음, 초월의 자세로 구도자적 정서를 펼친 시들이다. 여성에 대한 사랑을 그려 시적 전환점을 이룬 시집 『애린』(1987),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보다는 개인적인 내면의 독백과 자연에 대한 동화 등 서정적인 내용을 담아낸 시집 『별밭을 우러르며』(1989), 『중심의 괴로움』(1994) 등이 있다. 여기서 짚어봐야 할 점이 시인의 생명에 대한 관심 촉발 계기다. 김지하는 한일회담 반대 운동으로 투옥되면서 감옥생활을 시작한다. 수감 중이던 어느 날 그는 흙바람을 타고 날아든 식물 씨앗이 감옥의 시멘트 틈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꽃까지 피운 것을 본다. 그날 밤 그는 극심한 자책에 시달리며 서럽게 운다. 풀 같은 미물도 감방까지 날아와 시멘트 작은 틈에 꽃을 피우는데 '나는 무엇인가, 나는 풀만도 못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자기 비하와 연민에 울음이 복받친 것이다. 그날 그는 암흑의 갇힌 삶에도 봄이 오는 것은 틈, 그 작디작은 틈에 뿌리내린 채 꽃을 피우는 미물들의 생명의 힘 때문이란 걸 깨닫는다. 이런 한계상황에서의 실존적 체험은 훗날 그의 관심을 사회현실 이데올로기에서 점차 동양적 생명사상, 한울님 사상, 후천개벽 사상으로 전환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후 그는 점차 너와 나, 생물과 무생물, 천당과 지옥, 육체와 정신을 나누는 서구문화의 이분법적 사고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파괴와 분열을 낳았음을 깨닫고 이 악순환을 반복하는 역사를 넘어서서 상생적 일원론의 세계로 나아간다. 서양 기독교의 현세/내세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서 삶/죽음이 합일된 동양 불교의 연기론에 귀착한다. 시 「되먹임」은 시집 『화개(花開)』(2002)에 수록된 작품으로 시인의 이런 변화된 세계관과 생명사상을 반영한다. 나의 목숨이 먼 우주의 별에서 왔으며, 나의 존재가 숨 쉬며 살아가는 주변의 수많은 생명체들 덕분이라는 불교적 세계관이 내재되어 있다. 순환적 생명인식을 통해 세계가 하나의 꽃이고 먼지이고 그것이 전 우주라는 화엄의 세계관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니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으며, 살고 살아서 그 존재들에게 빚진 생명의 은혜를 되갚아야 하는 것이다. 이를 시인은 되먹임이라고 한다. 시인이 말하는 것은 결국 존재의 되먹임으로 자기희생을 통한 사랑의 확장, 타자들의 생명적 존귀와 가치 재인식, 그것의 전우주적 확산이라 할 수 있다. / 함기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