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6·25전쟁 73주년 특집] 계급도 군번도 없던 '북파공작원' 이었다

박노흥씨, 참전 당시 만 17세
15명 동기들과 北 침투 훈련

중상 입고 강제 전역 당한 후
60여년간 신분 숨기며 살다
지난 2012년 아들 도움으로
특수임무유공자로 인정받아

  • 웹출고시간2023.06.22 21:17:12
  • 최종수정2023.06.22 21:17:12

박노흥(89)씨가 자신의 특수임무유공자증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임성민기자
[충북일보] 올해로 6·25전쟁 발발 73주년이 됐다. 충북도내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조국의 평화를 위해 6·25전쟁에 참전해 피를 흘렸다. 이들 가운데 박노흥(89)씨의 경우는 독특하다. 당시 육군첩보부대원(HID)로 활동하며 6·25전쟁에 참전한 박 씨는 전후 60여년만에 특수임무유공자로 정부로부터 뒤늦게 인정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계급도 군번도 없던 '북파공작원'이었다. 그래서 일반 병과 참전용사들과는 6·25에 대한 감회가 남다르다.

박씨는 "내가 한국군 물색관에 의해 육군첩보부대로 옮겨져 활동했던 나이가 만 17세였다"고 운을 뗐다.

박씨를 포함한 15명의 동기들은 북한에 침투하기 위해 강원도의 한 야산에서 도피 및 탈출·사살·납치·교란·사격술 등의 훈련과 공작에 필요한 훈련과 정신교육 등을 훈련받았다.

그는 "훈련은 매우 고되고 생사를 넘나드는 경우도 빈번했다. 특히 산악 훈련의 경우 산에 올라가 정해진 시간 안으로 주둔지에 도착하지 못하면 몽둥이로 몹시 맞았다"며 "하산하다가 절벽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나무에 부딪혀 머리에 피가 나는 상태로 하산한 적도 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박노흥씨가 자신이 유공자로 인정받아 수여된 인증패들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 임성민기자
6·25 전쟁 당시 4863 육군첩보부대 7지대 소속이었던 박씨는 첩보 수집 임무 등을 수행했다.

그의 임무는 북한군의 동태와 진지의 위치, 북한군이 지닌 무기의 종류 등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박씨는 "북한군 옷을 입고 밤에 총격전이 이뤄지는 틈을 타 침투를 시도했다"며 "발각되면 사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마음이 공존했었다. 침투하는 과정에서 많은 목숨이 희생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씨는 북에 침투하기 위해 평화의 댐에서 보트를 타고 침입을 시도하던 중 북한군에게 발각돼 총격을 받았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그는 미군에게 구조돼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중상을 입고 임무 수행을 할 수 없었던 그는 병원에서 한 달가량 치료를 받은 후 강제 전역했다.

그는 "첩보부대는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의 업무수행이 관례여서 전역식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며 "적에게 발각돼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강제 전역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사회로 복귀했지만 박씨는 막막했다. 취직을 위해 군 복무 증명을 받고자 했지만 군 기록 어디에도 그가 군 복무를 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활동했던 육군첩보부대는 부대 특성상 계급도 군번도 없이 활동해 신원을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사회에서 첩보부대원으로 활동했다는 신분을 밝히면 간첩 소리를 들을까 수십 년간 가슴 속에 묻고 살았고, 심지어 아들을 제외한 가족들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박노흥씨가 6.25 70주년 감사 메달을 들고 웃고 있다.

ⓒ 임성민기자
그렇게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살아온 지 60여 년. 박씨는 아들의 도움으로 지난 2012년 정부에 의해 특수임무유공자로 인정받고 명예회복을 했다.

정부는 박씨에게 1억2천여만 원의 보상금과 함께 6·25 참전 유공자, 특수임무 유공자 증명서를 수여했다.

그는 "나를 포함한 첩보원들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기억해주지도 못하는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왔다"며 "전쟁 당시 내가 조국을 위해 희생했었다는 것들을 인정받게 되니 만감이 교차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6·25 같은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되는 비극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아직 종전 국가가 아닌 휴전 국가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그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수도 있다는 점을 꼭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 임성민기자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충북기업 돋보기 5.장부식 씨엔에이바이오텍㈜ 대표

[충북일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 국내 시장에 '콜라겐'이라는 이름 조차 생소하던 시절 장부식(60) 씨엔에이바이오텍㈜ 대표는 콜라겐에 푹 빠져버렸다. 장 대표가 처음 콜라겐을 접하게 된 건 첫 직장이었던 경기화학의 신사업 파견을 통해서였다. 국내에 생소한 사업분야였던 만큼 일본의 선진기업에 방문하게 된 장 대표는 콜라겐 제조과정을 보고 '푹 빠져버렸다'고 이야기한다. 화학공학을 전공한 그에게 해당 분야의 첨단 기술이자 생명공학이 접목된 콜라겐 기술은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분야였다. 회사에 기술 혁신을 위한 보고서를 일주일에 5건 이상 작성할 정도로 열정을 불태웠던 장 대표는 "당시 선진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일본 기업으로 선진 견학을 갔다. 정작 기술 유출을 우려해 공장 견학만 하루에 한 번 시켜주고 일본어로만 이야기하니 잘 알아듣기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공장 견학 때 눈으로 감각적인 치수로 재고 기억해 화장실에 앉아서 그 기억을 다시 복기했다"며 "나갈 때 짐 검사로 뺏길까봐 원문을 모두 쪼개서 가져왔다"고 회상했다. 어렵게 가져온 만큼 성과는 성공적이었다. 견학 다녀온 지 2~3개월만에 기존 한 달 생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