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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군 이젠 기록으로 남다 - 김상호씨 69년 인생

청원군과 같은 해·같은 달에 태어난 '청원둥이'
청주고 자퇴… '또래 학생'을 먼발치서 바라봐
주경야독으로 '대한민국 면서기' 봉급 20만원
박봉에 집에서 누에치기 겸업, 아내 봉제 공장
먼길 돌아와 연 중개소…오창 깨복쟁이 사랑방

  • 웹출고시간2014.05.19 15:34:31
  • 최종수정2014.05.19 15:34:31

김상호 씨(1946년 6월 2일생).

청원군은 행정적으로 1946년 6월 1일 출범했다. 김상호(金相虎) 씨는 그보다 하루 늦은 1946년 6월 2일 청원군 오창면 복현리 162에서 아버지 김석영과 어머니 변정임 사이에서 2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말 그대로 '청원둥이'인 셈이다.

청주중 학생증(1959년).

유년시절을 줄곧 오창에서 보낸 그는 1959년 청주 영동에 있는 '청주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오창초등에서 7명이 응시해 김씨 혼자만 합격했다.

현재도 보관돼 있는 당시 학생증을 보면 그는 '1학년 4반'이었고, 교장은 '김춘근'으로 기록돼 있다. 학생증(사진) 역시 그의 출생일을 '단기 4292년 6월 2일'로 기록했다.

당시 청원 오창면과 청주중이 위치한 청주 영동 구간에는 속칭 완행버스가 운행, 통학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완행버스를 놓칠 경우 오근장까지 걸어간 후 거기서 기차를 타고 오창의 집으로 와야 했다.

◇청주고 2학년 수료, 학력의 전부
그는 1964년 명문 '청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중학교 때와 달리 오창에서 청주 서부지역 변두리에 있는 청주고를 통학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아침 6시에 일어나 오창집-장대리(면소재지)-청주합동정류장(구 고속터미널) 구간을 중학교 시절처럼 완행버스를 이용해 통학했다.

이후가 문제였다. 청주합동정류장에서 청주고까지는 버스가 없기 때문에 도보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때 키가 크지 않았던 그에게 '내수동 고개'(지금의 사직동 시계탑 고개)는 높다란 산처럼 느껴졌다.

그 같은 고생도 중도에서 그만둬야 했다. 오창면은 충북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의 하나로 들이 넓은 편이다. 그러나 그의 집은 논 3마지기(6백평), 밭 7백평 정도를 소유한 빈농이었다.

학비가 연체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학교측의 납부 독촉이 계속 되자 그는 어찌하는 수 없이 2학년 때 자퇴를 했다. '청주고 2학년 수료.' 그의 이력서에 적혀 있는 최종 학력이다.

자퇴생 김상호는 또래 학생들의 등하교 모습을 먼발치서 바라보면서 부모 농삿일을 도와야 했다. 그러나 농토가 워낙 적었기 때문에 빈농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는 생각 끝에 호구지책의 방편으로 공무원 시험준비를 시작했다. 이른바 '생계형' 시험준비였다.

그는 종전처럼 낮에는 부모 농삿일을 돕고, 밤에 농촌지도소 직원이 빌려준 문제집을 푸는 방법으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당시 오창면내에서 3명이 응시, 그만 유일하게 '농업직 면서기'에 합격했다. 그의 말을 빌자면 농촌지도소 직원이 빌려준 참고서에서 운이 좋았던지 문제가 많이 출제됐다.

◇대한민국 농업직 면서기가 되다

1966년 2월 1일. 그가 대한민국의 농업직 공무원으로 처음 발령을 받은 곳과 직책은 괴산군 불정면사무소의 산업계였다.

이후 그는 오창면사무소(1967년)-36개월 만기 군복무-옥산면사무소 복직 등을 거친 끝에 고향 오창면사무소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농업직 면서기'로 출발했기 때문에 현장 출장이 잦은 산업계에서 주로 근무했다. 그는 영농현장을 찾아 볍씨소독, 퇴비증산, 정조식 이앙(못줄띄우기), 보리 광파재배(넓은 이랑 재배) 등의 방법을 농민들에게 설명하고 시범을 보였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바람이 거세게 일어났다. 정부는 순수 영농만으로는 농가소득을 향상시킬 수 없다고 판단, 이른바 농한기 부업을 대대적으로 장려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가마니 치기, 새끼 치기, 꺼치 치기 등이었다.

70년대 후반 그는 오토바이를 구입했다.

현장 출장이 잦았던 그는 자전거 이상의 교통수단이 필요했다. 그는 기동력을 높이기 위해 1970년대 후반 오토바이를 자비로 구입했다.(사진 참조) 그러나 당시 오토바이는 어느 정도 대중화된 편으로 그리 고가는 아니었다.

또래 학생의 등하교 모습을 먼발치서 바라봐야 했던 그는 이쯤해서 극빈의 굴레는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박봉의 월급으로 가정경제를 꾸려가는 것은 여전히 벅찼다.

1983년 4월 봉급표.

그는 1983년 4월의 봉급으로 27만1천87원을 받았다. 이는 전체 지급액 37만6천원(본봉 28만1천원+수당 9만5천원)에서 10만4천9백13원(갑근세+주민세+기여금+공제회비+동방보험+대한보험+재형저축+방위세+의료보험)을 공제한 값이었다.(그림 참조)

◇부업으로 양잠, 아내는 봉제공장으로

그는 25살 때인 1971년 홍영숙(당시 22살)과 결혼해 홍룡, 광룡 등 2남을 얻었다. 그는 당시 박정희 정부가 정관수술 사업을 강력히 실시하자 공무원 신분으로 동참, 단산했다. (사진 참조)

두 아이가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면서기 봉급만으로는 가계수입이 부족했기 때문에 사랑방을 이용해 누에치기(양잠)를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뽕밭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둑방이나 밭뚝의 뽕나무에서 자연산 뽕잎을 채취, 누에먹이로 공급했다. 그는 공무원 신분으로 1975년부터 5년간 양잠을 했다.

이것으로도 경제적 여유가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러자 부인 홍씨가 봉젯일을 자원했다. 그녀는 청주 내덕, 사천동의 교복 만드는 공장에서 무려 20년 가까이 바느질을 했다.

그 결과, 그는 40대 후반 무렵에 어느 정도 목돈을 쥘 수 있었다. 그는 이 목돈으로 5백여평의 밭을 매입했다. 그러나 그때 마침 친형(상봉·2002년 작고)이 운수업을 하다 거액의 부채도를 냈다. 그는 모른 채 할 수 없어 5백여평의 밭은 고스란히 되팔아 "빚을 갚으라"며 형에게 건네줬다.

◇정년후 연 부동산중개소 '오창 깨복쟁이 사랑방'

김상호씨 가족사진(70년대).

그는 사무관으로 승급하지 못하고 이른바 '57세 정년'에 걸려 2003년 6월 30일 '농업주사'로 청원군청 공무원직을 퇴임했다.

그의 고향 오창 사랑은 남다른 면이 있었다. 그는 오창면지를 만들기 위해 사진기술을 익혔고, 이것은 나중에 오창에서 디지털 사진관을 경영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또 오창면사무소에 근무하면서 재가한 어머니의 주민등록을 추적, 모자가 상봉토록 했다. 이밖에 폐기되지 않은 오창 장정들의 6.25참전 병적부를 발견, 면지에 수록하기도 했다.

2014년 현재 그는 오창읍 창리에서 부동산 중개소업을 하고 있다. 부동산중개업소이기는 하나 그의 사무실은 깨복쟁이들로 붐비면서 '오창면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다.

깨복쟁이는 옷을 다 벗고 하천에서 멱을 감던 또래들로,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함께 자란 허물없는 친구를 의미하고 있다.

/ 조혁연 대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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