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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군 이제 기록으로 남다 - 새마을 성공사례 1호 하사용

"농촌의 등불…하사용 정신이면 성공할 수 있다"
박 전대통령 목에 훈장 걸어주며 '감동의 눈시울'
움막에서 신혼 시작…창호지 하우스로 富 일궈내
'한국의 새마을운동 성공사례 1호' 중국에도 소개

  • 웹출고시간2014.07.21 18:46:28
  • 최종수정2014.07.21 18:46:28
하사용 씨는 1930년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의 미호천 제방 옆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 일대를 애장터 또는 떼집거리 등으로 불렸다. 지명 그대로 일대는 버려진 황무지에 집 없는 사람들이 움막이나 떼집을 짓고 기거하던 빈민촌이었다. 하 씨의 사진에 움막집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움막집은 말이 집이지 방바닥은 짚으로 만든 가마니를 깔았고, 흙이 덕지덕지 붙여진 벽틈에로는 빈대들이 낮에도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하씨는 부모를 졸라 어렵게 강외보통학교에 들어갔지만 2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중퇴했다. 밀린 월사금(수업료)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의 학력은 여기서 멈췄다.

경찰지서 소사에 넝마주의까지


그런 사용은 10살 되던 해 이웃 아저씨의 배려로 면단위 경찰지서인 주재소의 소사(심부름꾼)로 취직했으나 이것 역시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의 배고픔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가족과 자신의 연명을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했다. 그는 이번에는 넝마주이를 했다.

그 시절에는 버리는 것이 많지 않아 주워 모을 것도 별반 없었다. 마을 어귀를 돌고, 조치원 읍내를 돌아다니며 종이, 철사, 유리조각, 헌 고무신, 버려진 기저귀 등 고물을 빈 자루에 주워 모아 고물상에 갖다 주고 좁쌀 한 줌 정도를 사왔다.

이 일도 쉽지 않았다. 고물을 줍는 또래의 아이들로부터 몰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야외 겨울을 추울 뿐만 아니라, 눈이라도 내리면 고물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겨울에는 넝마주이를 하지 못했다.

대신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해다 팔았다. 그러나 나무 한 짐을 하기 위하여 숲속으로 10리 이상을 들어가야 했고, 또 나무를 하다가 산림순시원이나 산 주인에게 들키면 낫과 나무지게 등을 팽개치고 도망쳐야 했다. 그들에게 잡히는 날이면 주재소까지 끌려가는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젖먹은 힘을 다해 도망쳐야 했다.

그래서 다시 찾은 직업이 엿장수였다. 엿장수는 큰 밑천이 드는 장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 해볼만 했다. 그는 조치원 읍내 엿공장에 가서 엿을 받아 지게에 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엿을 팔았다. 그가 무쇠 엿가위 소리를 내며 마을을 지나칠 때면 어린 아이들이나 아주머니들이 못쓰게 된 삼베옷 걸레, 찢어진 고무신짝, 부러진 숟가락, 담뱃대, 깨진 보습 등을 들고 나와 엿으로 바꿔갔다.

머슴살이 3년을 밑천으로

하씨가 17세가 되던 해에 해방이 됐다. 그리고 그는 현역으로 입대, 6.25 때 양구지구 전투에 참전을 했다가 부상으로 의병 제대를 해야 했다. 제대해 고향으로 돌아는 그는 고향 정중리서 50리 떨어진 오창면 상평리의 신경복 처녀와 냉수 한 그릇 떠놓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찢어지는 가난 등 변한 것은 별반 없었다.

그는 머슴살이를 결심하고 걸식을 하면서 머슴구하는 집을 찾아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해서 당도한 곳이 강원도 춘천의 어느 부잣집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1년에 쌀 4가마니를 받고 3년간 머슴살이를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이자 3가마니를 더하여 15가마의 쌀을 모았다.

'15가마니의 쌀로 어떡하든 원수 같은 가난을 몰아내리라.'

고향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소식도 없는 자신을 3년이나 기다려준 아내가 한없이 고마웠다. 그는 15가마니의 쌀로 하천부지에 속한 밭을 2백70평 가량 살 수 있었다.

하사용 씨와 부인이 신혼 때 찍은 모습으로, 신혼생활은 움막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한쪽에 어릴 적과 같은 모습의 움막을 짓고 늦은 신혼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사진) 이제는 부러울 것이 없다. 열심히 일만 하면 됐다.

하사용 부부는 그렇게 하고 싶던 채소농사를 시작했다. 밤이 어둡도록 모래밭으로 흙을 날라 토양개량을 했고 새벽이면 조치원 읍내에 가서 인분을 가져왔다. 당시만 해도 인분이 채소에게는 최고의 비료였다.그러나 인분을 푸다가 매를 맞기도 하고, 인분 통이 박살이 나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래도 하사용은 모래밭을 개량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모래밭이 점차 옥토로 변해갔다.

하씨는 농사를 시작하면서 '사람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몇 가지를 결심했다. 첫째, 일원 한 장 함부로 쓰지 않고 수입 범위 안에서 지출한다. 둘째, 남이 놀거나 화투를 쳐도 나는 일을 한다. 셋째, 항상 남보다 일을 더 한다. 넷째, 돈의 규모를 막론하고 최대한 저축을 한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목표를 세웠다. '내 땅 만평을 가질 때까지….'

'콩기름 창호지 하우스'을 개발하다

그 시절 마을사람 대부분은 부가가치가 낮은 곡식농사를 주로 짓고 있었으나 인근 화교(華僑)는 채소를 재배,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그는 화교를 벤치마킹했다. 그리고 곧 "채소는 일찍 수확해야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조기 재배에 따른 낮은 기온은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 시절에는 비닐하우스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창호지에 콩기름을 발라 덮개를 만든 일면 '콩기름 창호지 하우스'을 개발, 자신의 채소묘에 실험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일부 오이, 호박묘는 얼어 죽었지만 대부분은 남들보다 일찍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주었다. 일찍 수확한 채소들은 그에게 고소득을 안겨줬다. 그는 얼마안가 3-4평의 농경지를 더 살 수 있었다.

하씨가 오송농협 앞에 세워진 자신의 송덕비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박정희 정권은 제 1차 경제개발5개년이 끝나자 낙후된 농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67년부터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가 사는 강외면도 그 대상이 되면서 비닐하우스 시설채소단지가 대규모로 조성됐다. 하씨는 정부 융자금으로 비닐하우스 면적을 종전보다 더 확대했다.

이때부터 하씨는 비닐하우스 시설재배의 일인자라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는 조기재배, 촉성재배, 보온시설재배 등 시설재배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곧 입소문이 퍼저나갔다. 멀리서 개인 혹은 단체 단위로 견학겸 실습을 하러오는 농민들이 급증했다. 이때부터 전국 곳곳에서 비닐하우스를 쉽게 볼 수 있게 됐다.

그는 50년대 후반부터 매년 평균 20%씩 지속적으로 농경지를 확장, 70년에는 3천1백평을 소유하게 됐다. 그는 이 농경지에 비닐하우스를 집중적으로 운용, 10여간 매년 41%의 소득성장을 달성했다.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9년 겨울 3일 밤낮으로 눈이 내렸다. 하 사용 씨 부부는 밤을 새워가며 내리는 눈을 치웠다.

"저 눈이 쌓이면 비닐하우스가 내려앉고, 저 하우스가 내려앉으면 그 속에 가꾸어 놓은 채소는 다 얼어 죽고 빚만 남는다." 다른 사람들은 태연하게 잠을 잘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두 내외는 잠을 잘 수 없었다. 눈이 그쳤을 때는 인근 마을을 포함한 대부분의 하우스들이 폭싹 주저앉았으나 하씨의 비닐하우스만 온전했다.

꾸밈없는 연설 박 전대통령도 감동

박정희 정권은 1970년 농민들에게 영농기술 확산과 과학적인 영농의식을 높여주기 위하여 시·군, 도, 전국단위로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 경진대회를 개최했다. 하사용 씨는 농촌지도소의 추천으로 군 단위 경진대회에 나가 1등을 했고, 여세를 몰아 충청북도에서도 1등을 했다.

그는 난생 처음 전국단위 경진대회에 나가게 됐다. 이때 여러 가지 일화가 만들어졌다. 경진대회에 나가려면 우선 자기의 행적을 원고로 써서 사전심사를 받고, 여기서 통과를 해야 사례를 발표할 기회가 첨가자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하씨의 경우는 자신이 직접 원고를 쓴다는 것은 무리였다.

담당 공무원은 초등학교 2학년 중퇴를 졸업으로 하자고 했고, 또 넝마주이나 엿장수 경력을 빼자고 했다. 이밖에 복장도 양복에 구두를 갖춰야 한다고 독촉을 했다. 그러나 하사용 씨는 이 모든 주문을 거부했다.

그는 잠바 차림에 고무신을 신고 박 대통령과 3천여 명의 청중이 모인 단상에서 자기가 살아온 과정을 꾸밈없이 이야기했다. 그는 연설 도중 처절했던 가난을 되새기면서 설움에 받쳐 몇 번이나 목이 메이기도 했다.

그러자 3천여 명이 들어찬 청중석은 숙연해 졌다. 뿐만 아니라 후일담이지만 2층 특별석에 앉아 있던 박 대통령도 몇 번이나 눈시울을 적셨다.

발표가 끝나자 모든 청중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고, 단상으로 내려온 박 전 대통령은 그의 목에 동탑산업훈장을 걸어주며 "참으로 훌륭한 일을 했소"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도 감동한 것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이후 연설에서 준비해 온 치사를 접고 대신 "하사용씨 같은 분은 우리 농촌의 등불이요, 국민 모두의 스승이다. 우리나라 농촌의 빈곤도 하사용 씨 같은 정신만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하사용 씨의 농촌 성공담은 중국 책자에도 소개됐다.

박 전 대통령은 다음날 하씨 내외를 청와대로 초청, 특별 격려를 했다. 그는 이때도 역시 잠바와 고무신 차림이었다. 그의 성공 사례는 중국 책자에도 소개됐고 소설로도 작품화됐다. 동아일보 2007년 4월 19일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한국의 '마을운동 성공사례 1호'가 중국에서 소설로 출간돼 중국 전역의 농촌지도자에게 무료로 배포된다.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출판사(사장 리위안차오·李援朝)와 한국경제무역촉진협회(회장 조병인)는 18일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에서 한국의 새마을운동 성공사례를 바탕으로 쓴 소설 '쉰멍(尋夢·꿈을 찾아서)'의 출판기념 및 빈곤지역 무료 배포식을 가졌다.

'꿈을 찾아서'는 중국의 가난한 농민이 우연히 한국의 새마을운동에 관한 뉴스를 보고 한국에 직접 가서 새마을 교육을 받고 돌아와 중국 농촌을 부자 마을로 만든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소득증대 성공의 줄거리는 바로 1970년 고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산업동탑훈장을 받은 충북 청원군 강외면 하사용 씨가 그 주인공이다.'

/ 조혁연 대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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