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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군, 이제 기록으로 남다 - 현도 보성오씨 11대 종부 강을기 할머니

"맏며느리 얻은 후 처음으로 외출 경험"
자칫 위안부로 끌려갈 뻔 부랴부랴 결혼
남편 15살 연상으로 34살 '노총각 한량'
손님접대·제사·길쌈 모두 강할머니 몫
이제서야 자유 큰딸있는 미국 4번 방문

  • 웹출고시간2014.06.02 17:58:13
  • 최종수정2014.06.02 20:46:27
보성오씨 시조인 오현필(吳賢弼)은 1175년(고려 명종 5)에 출생하여 1195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화순군사(和順郡事)를 지냈다. 1216년 두 형과 함께 거란군의 침입을 토벌한 공으로 '보성군'에 훈봉되었다. 이후 후손들은 '보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청원군 현도면의 보성오씨 입향조는 9세 오숙동(吳叔仝)이다. 그는 태종 말엽에 해안지역에 왜구가 빈번히 출몰하자 이를 피해 보성서 신탄진을 거쳐 오늘날의 현도면 양지리 월대촌으로 들어왔다. 당시 그는 양지리에 살고 있는 원계종(元繼宗)의 집에 의지하였고, 이후 그의 사위가 되어 청원에 정착하였다.

오숙동은 양지리에 정착한 후 장남 오인정(吳仁政), 차남 오인헌(吳仁憲), 삼남 오인후(吳仁厚) 등 4남1녀를 두었다. 이중 오인후는 소위장군 부사과를 지내고 증직으로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오른 인물로, 그의 후손들이 '삼기문중'(三岐門中)이다. 여기서 다시 통정공 장사랑파(將仕郞派·오상익)가 분기됐다.

◇ 부강에 사는 대고모가 중매

강을기 할머니(1926년생).

1926년생인 강을기(康乙基) 할머니는 현도 보성오씨 통정공 장사랑파의 11대 종부(宗婦)로, 그의 나이 19살 때 충남 연기군 남면 고정리(높은댕이)에서 지금의 주소지인 현도면 중삼리 양달말 마을로 시집왔다.

강할머니의 친정 조모는 19살에 혼자돼 친정 아버지 강병도를 양자로 맞았다. 친정 아버지는 늦도록 자식을 두지 못하다가 30살 늦은 나이에 강을기 할머니를 얻었다. 강할머니의 친정 아버지는 늦게 얻은 외동딸이 너무 귀여운 까닭에 혼기가 차도록 출가를 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1940년대 접어들면서 태평양전쟁이 격화됐다. 일제는 조선처녀를 전장으로 보내기 위한 '공출'(供出) 작업을 충청도 지역에서도 추진했다. 일제는 지금까지도 위안부(慰安婦) 강제 동원은 없었다고 강변하고 있으나 강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일제는 분명히 위안부 강제 동원을 시도했다.

일제가 위안부 강제 공출을 시작하자 친정 아버지는 딸(강할머니)의 혼처를 부랴부랴 모색했다. 그렇게 해서 만남 남편이 청원 현도면 중삼리 양달말에 사는 오동균(吳東均·1911년생)이었다.

연기와 현도는 다소 먼 거리임에도 결혼이 성사된 된 것은 부강에 사는 대고모가 "결혼을 안 하면 일본으로 끌려간다"며 중매에 적극 나섰기 때문이었다. 오동균은 강할머니보다 15살 연상으로 34살의 노총각이었다. 그럼에도 친정집이 노총각 오동균을 사위로 낙점한 것은 "나이가 너무 많아 군대에 안 가도 됐고, 그러면 전쟁터에서 죽은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손님접대, 일상화된 집안일


남편 오동균은 자유당 시절에 면의회희장을 지낼 정도의 지식인으로 논 25마지기, 밭 4천평 규모의 농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는 현도면 중삼리 일대에서 최고 부자에 해당하는 경작 규모였다. 그러나 남편은 머슴 2명에게 떠넘긴 채 농삿일을 아예 거들떠보지 않았다. 대신 하루가 멀다하고 손님을 데리고 왔다.

접객 대상은 남편의 손님만이 아니었다. 시아버지와 시할아버지의 손님도 만만치 않았다. 강할머니는 손님 밥상을 차려내는 일이 종부로서의 주업이 됐다. 접객수가 워낙 많다보니 종가에서는 접대용 닭을 항상 1백마리 안팎 정도로 사육했다. 아울러 손님접대와 제사에 사용될 과일을 얻기 위해 집주변에 대추, 밤, 감, 은행, 호두나무 등 유실수를 다양하게 심었다.

"손님들이 오면 보통은 닭백숙을 요리해 대접했지요. 그러다가 특별한 손님이 오면 인삼이 들어간 백숙을 올리곤 했지요."

11대 종부인 까닭에 제삿장도 부단하게 준비해야 했다. 4대 봉사의 제사횟수는 1년에 총 11번으로 이중 3번은 같은 달에 속했다.

◇ 친정교육 그대로 '남편은 하늘'

강할머니 회갑 때 남편과 함께 한 모습.

집안 남자들의 나들이용 옷을 만드는 것도 강할머니 몫이었다. 강할머니는 베, 누에길쌈, 목화 등에서 얻은 옷감을 밤마다 바느질을 하며 옷을 만들었다. 옷 완성후 뒤따르는 풀먹이기, 다리미질 등도 강할머니 몫이었다.

강할머니는 시집오기 전 친정에서의 교육받은 대로 남편을 '하늘'로 여겼다. 여기에 나이차이가 워낙 많이 나다보니 부부 사이의 대화시간도 많지 않았다. 둘 사이에 형진, 덕진, 웅진(이상 男), 을진, 옥희, 선희, 복진, 갑순 등 3남5녀의 자녀가 태어났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1976년 장손 오인영이 태어나는 등 18명의 친손을 봤다.

◇ 첫 외출 장소는 신탄진시장

강할머니와 맏며느리 임양순 씨.

1994년 장남 형진이 성장해 결혼하면서 맏며느리(임양순)를 얻었다. 강할머니는 그때서야 신탄진 5일장을 처음으로 가봤고, 그것은 결혼 후 첫 '외출'이었다.

'그해 늦가을이 됐는데 집에서 심은 배차(배추)에 꼬갱이(배추속)가 앉이 않았어. 그래 맏며느리 하고 배차를 사러 강 건너 신탄진장을 처음 가봤지. 그게 시집온 후 첫 외출이었어."

남편 오동균은 시조창 대회에 나갈 정도로 풍류를 즐겼다.

남편 오동균은 1994년 청주에서 열린 시조창 대회에 나가는 등 풍류를 즐기는 것과 함께 '전통시대 선비'의 모습을 끝까지 간직했다. 그런 남편이 77세로 떠났다. 강 할머니는 이런 남편을 "남편은 항상 하늘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게다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 살가운 대화는 많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남편과의 사별은 분명 불행이었으나 강할머니에게는 '역설'도 찾아왔다. 2014년 현재 시집간 맏딸은 목사인 사위를 따라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강할머니는 맏딸의 초정으로 미국을 지난 1990년대 말이후 모두 4번 방문했다.

오경세 전 청원문화원장에게 강할머니는 질부가 된다.

강할머니는 11대 종부의 고단함을 벗고 이제 뒤늦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 강할머니의 이번 인터뷰에는 오경세(1937년생) 전 청원문화원장이 중간에서 도움을 많이 줬다. 오 전 원장에게 강할머니는 나이는 많지만 질부(조카 며느리)가 된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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