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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군, 이제 기록으로 남다 - 4선의원 신경식

양복에 자전거 탄 의원…명비서실장이 되다
정일권 전의장통해 정계입문…중용자세 배워
YS-이회창, 같은 듯 하면서 서로 다른 용인술
무욕과 절제가 7부 능선…그곳에는 적이 없어
총선맞수 오효진 전 군수에 늘 안타까운 마음

  • 웹출고시간2014.05.06 17:00:25
  • 최종수정2014.05.06 20:08:17
신경식(辛卿植) 전의원은 1938년 청원군 문의면 산덕리 125-9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주고(1957년)와 고려대(1963년)를 졸업했고, 1963년 대한일보에 입사해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1년 동안 기자생활을 하면서 주일특파원, 주월남특파원, 정치부기자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73년 당시 정일권 국회의장의 수석비서관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두 번 낙선한 끝에 청주 청원에서 13대(1988~1992·민정당), 14대(1992~1996·민자당), 15대(1996~2000·신한국당), 16대(2000~2004·한나라당) 의원에 내리 당선되는 등 4선 의원을 지냈다.

그는 4선의 의정생활 동안 문공위원장(1994)과 정부의 정무장관(1996), 그리고 한나라당 사무총장(1998)을 역임하는 등 국회, 당,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뿐만 아니라 정일권 국회의장, 김영삼 대통령, 이회창 대통령 후보 등 최고 정치지도자의 비서실장을 무려 다섯 번이나 맡는 등 국정 전반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는 1993년 3월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의 초대 총재비서실장에 임명됐다. 그러자 당시 경향신문은 이런 인물평을 썼다. 짧은 글이지만 그의 정치적 성장 동기와 과정, 그리고 성격과 성향이 잘 드러나 있다.

신경식 전의원은 정일권 전 국회의장을 통해 정계 입문, 중용의 자세를 배웠다.

'정치부기자 시절 신민당을 출입하면서 당시 원내총무를 맡고 있던 김영삼 대통령과 가깝게 지내면서 인연을 맺은 언론인 출신의 정치인. 정일권 전국회의장의 비서실장으로 정치에 입문했으며 두 차례의 낙선 끝에 13대에 처음 원내 진출한 재선의원으로 오랜 정치부 기자생활로 정·관계에 발이 넓고 소탈한 성격이라 친화력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당 합당후 김대통령과의 인연을 전해들은 노태우 전대통령의 천거로 김영삼 대표비서실장을 맡아 당시 김대표와 민정계의 가교 역할을 무난히 소화해내 신임을 쌓았다. 부인 최금녀씨는 지난 대선 때 영부인 손명순 여사와 전국을 몇차례 함께 돌 정도로 가깝다.'-<경향신문 1993년 3월 4일자>

김영삼 전대통령은 신경식 비서실장의 의견을 경청했고 수용했다. (왼쪽) 이회창 전 대선후보는 신경식 비서실장의 의견을 경청했으나 마지막 결정은 자신이 했다.

국회의원 4선은 임기 기간만 따져도 20년이 될 정도로 비교적 긴 시간이다. 그가 내리 4선 의원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지역 유권자들과의 '스킨십'이었다.

조선일보에 양복입고 자전거 타는 모습이 기사화됐다.(1993년 5월 8일자)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혼잡스러운 도심 교통환경 속에서 주례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자전거를 즐겨 이용했다. 국회의원이 양복을 입은 채 자전거를 타는 모습은 지역민들의 눈에도 별난 모습으로 비춰졌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자전거의원'이다. 조선일보 1993년 5월 8일자는 '지역구 관리… 일요일마다 기동력 발휘', '교통체증 주차난 없어', '청주시내 누비며 주례 2~3건', '주민들과 인사하기도 좋아 자전거 애용', '행사시간 지키기 최적', '몸도 정신도 상쾌해져', '자전거의원 별명' 등의 제목을 뽑았다.

회고록 '7부 능선엔 적이 없다' 표지.

그의 정치 여정은 회고록 '7부 능선엔 적이 없다'와 같이 더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를 7부 능선에 만족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무욕과 절저를 내용으로 하는 '중용'(中庸)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중용을 정일권 전 국회의장에서 배웠다고 했다.

'정 의장은 의장 임기 6년 동안 중용이라고 쓴 붓글씨 액자를 사무실에 걸어놓고 있었다. 그분의 화려한 경력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관운이 억세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한다.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본 나는 그분의 관운은 운이 아니라 끝없는 인내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되었다. 대화와 타협을 생활신조로 무리 없이 중용의 입장을 취하려는 노력이 관운의 길을 틔워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7부 능선엔 적이 없다' 232쪽>

그는 무욕의 정치인이라는 뜻에서 '신태공', 또 협상의 달인이라는 의미에서 미국 전 국무장관 키신저를 빗대 '신신저'라고 불렸다. 신 전의원은 2003년말 정계 은퇴를 한 후 현실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대신 출산, 육아, 교육 등을 다루는 '육아방송'(www.ugatv.net) 대표이사 회장으로서 전문채널 운영에 전념하고 있다. 다음은 회고록 '7부 능선엔 적이 없다' 중 궁금한 내용을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편의상 존칭은 생략한다.

신 전의원은 이메일로 질문을 하자 자필 답변을 보내왔다.

- 정계 입문 동기는 '정일권 국무총리' 특종기사였다. 이후 한달에 한번씩 조용한 시간을 가졌다고 했는데, 정일권 국무총리와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눴나.

"당시 본인이 20대 젊은이고 J의장은 40대 중반이라 젊은이들의 생각과 진취적인 활동에 관심을 보였음."

- 11, 12대 낙선 끝에 13대 때 노태우 대통령의 추천으로 민정계로 당선됐다. 노대통령과 그 전에 어떤 인연이 있었나.

"전혀 얼굴은 대한 적도 없는 무인연이었는데 11대, 12대 출마한 사실과 주변의 인물평을 듣고 공천을 결정한 것 같음."

- 대선패배 후 2달간 구속될 일을 두고 "정치 보복"이라고 표현했는데, 어떤 배경을 의미할까.

"이기면 충신, 지면 역적이라는 옛말대로 이회창 후보가 패배하지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 당시 가장 요직이었던 서청원 선거대책위원장, 대선 본부장 김영일 총장, 대선기획단장 신경식, 3인을 구속하고 정치자금 유입 문제를 집중 추궁하였음."

- 구치소에 갔다 오니까 이회창 대표가 어떤 말로 위로를 했을까.

"구치소에 두 번 면회를 다녀갔고, 나오자 며칠후 이총재 내외분, 우리부부 4명이 남산에 있는 양식집에서 식사를 했는데 그저 웃은 얘기들만 했음."

- 주례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4선 성공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도시에서는 매스컴만 자주 타면 다음 선거가 쉽게 끝나는데 시골 군 단위는 뉴스 자주 탄다고 다선이 되지 않음. 주례, 상가 등 애경사에 늘 얼굴을 보여야 함. 13대 초선으로 등원하였다가 16대 당선되고 보니 처음 120여명 초선 중 4선까지 당선된 군단위 당선자는 남해·하동의 박희태 의원과 청원군의 신경식 뿐이었다. 그 외 6,7명은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 출신이었다."

- 한나라당에 몸담으면서 '신신저'라는 별명을 얻었다. 가장 인상에 남는 대야협상은 어느 것이었을까.

"이민우의원이 야당 총무 때 여야 갈등으로 국회가 공전되었다. 새벽에 내가 그댁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고 국회 정상화 방안을 제시하여 야당이 등원하고 국회가 정상화되었다. 이때부터 신신저라는 별명이 언론에 나왔다."

- 이른바 '비서실장 전문가'로서 솔직히 김영삼과 이회창 중 누가 모시기 편했나. 그리고 두 사람의 장단점은.

"두 분은 극명한 특징이 있었다. YS는 비서실장이 설명하고 방향을 건의하면 90%이상 그대로 따랐다. 이회창 총재는 경청을 하지만 결론은 본인이 단독으로 내렸다. YS는 열정적이고 이회창 총재는 이지적이었다."

- 정계를 은퇴하면서 '문인이 되고 싶다'는 속엣말도 털어 놓았다. 지금도 유효한가, 유효하다면 어느 장르일까.

"젊었을 때 꿈이었지만 늙어서 실천하기에는 너무 힘들다. 그저 단문이나 쓰면서 날을 보낸다. 새악이 체계화되질 않는다. 6.25 전후를 기한 소설을 한 편 쓰고 싶다."

- 사모님은 시인이고 따님은 영문학을 전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가족이 문학을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분위가가 항상 문예지를 쌓아놓고, TV도 문학관계를 많이 보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학 쪽으로 흐른 것 같다."

- 학창시절 은인인 송민효 교수님 근황은 어떻게 될까.

"타계하였음."(당시 송교수는 신 전의원과 동향으로, 고려대에서 시간강사를 하고 있었다. 신 전의원이 등록금을 못낼 처지에 놓이자 독일제 카메라를 전당포에 잡히고 등록금을 대준 바 있다. 회고록 18-20쪽)

- 종조부 신동문 시인에게서 정신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는데, 어떤 영향을 받았나.

"내가 문학에 꿈을 키우고, 지금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신동문 시인의 영향이다. 문학이 人生의 깊이를 깊게 해준자는 말을 늘 나에게 해주었다."

- '친화력은 돋보이지만 추진력은 약하다'라는 인물평이 공통적으로 있었다. 어떤 느낌이 들었나.

"강력한 추진력에는 늘 부작용이 따른다. 차라리 천천히 나가고 많이 못나가도 친화력을 바탕으로 사는 게 편하고 안전했다."

- 이제 오효진 군수에게는 어떤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은가.

"나 때문에 두 번이나 고배를 마셔 마음 속으로 늘 안타까웠다. 우리는 고려대학교언론대학원 동기 사이다.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뜻을 한 번 이루기를 바란다."

- 끝으로 민정계 소리가 더 좋은가, 신민주계라는 소리가 좋은가.

"두 계보가 다 하나로 뭉쳐 YS 때 신한국당인 된 것이다. 어느 쪽이 친하고 멀고가 없다."


/ 조혁연 대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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