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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3.10.06 15:29:55
  • 최종수정2013.10.06 15:29:55
ⓒ 강호생
사사로운 것에 상처받는 자,

떠나라. 생명의 숲, 역사의 숲으로

가을엔 낮은 길이 좋다.

정상이 분명한 높은 봉우리보다

휘파람 불며 걸을 수 있는 길이 더 좋다.

지난 여름은 얼마나 고단었던가

각다분한 삶속에서 상처받은 그 자리가

아물지 않고 고름이 생겼으니

길가의 쑥부쟁이에게 고름이나 짜 달라고 하면 좋겠다.

누군들 생에 대한 두려움이 없겠는가

고달픈 삶을 위로받고 싶지만

누내 곁에서 귓속말로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 하나 없는데

숲속 끝자락에 보이는 다랑이 논두렁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서성거리는 하늬바람에게

콧노래나 불러달라고 하면 좋겠다.

가을 숲에 들어가니

하나 둘 붉은 입술을 떨구고

내가 걷는 그 길에 가을꽃이 한바구니 햇살이 쏟아지고

호숫가 갈대도 파르르 온 몸 부서져라

나그네 마음을 흔들어 놓으니

그 길을 따라 구름이면 또 어떠한가.

날은 저물고

마른 풀잎도 지난날의 아픔과 미련 모두 접고

저렇게 곤히 잠들어 있는데

사사로운 것에 상처받는 나는

하얗게 쏟아지는 달빛에 등목을 하면 좋겠다.

가을볕을 따라 무작정 달렸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상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고 싶었고, 무위자연 속에 온 몸을 맡기고 싶었다. 차창밖에는 햇살이 쏟아지고, 맑은 바람이 끼쳐오며, 들과 숲과 호수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 홍대기
충주시 가금면 장미산성. 2900m의 포곡식 성곽이 역사의 상처를 품고 있다. 고구려의 침입과 백제의 육탄방어의 혈흔이 남아있는가. 그날의 함성과 절규와 노래와 슬픔이 밀려오는 것 같다. 성곽을 잠시 돌고 나면 산벚나무 소나무 참나무 같은 곧고 높은 나무와 단풍나무 아카시아나무처럼 작은 나무들이 깊고 푸른 숲을 만들었고 그 속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평화롭게 파닥파닥 거리니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답고 구순할 뿐이다. 그토록 뜨겁던 태양도 수목의 비린내를 맡으면서 얌전하고 온순한 햇살이 되고, 늙은 숲 어린 숲, 날짐승 들짐승 할 것 없이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있으니 발 닿는 곳마다, 눈길 마주치는 곳마다 새로움과 신선함으로 가득하다.

ⓒ 홍대기
그렇다. 숲의 또 다른 이름은 새로움이요 신선함이다. 그래서 숲 속의 모든 생명들에게 귀 기울이면 '수글 수글~' 혹은 '숙울 숙울~' 소리만 있을 뿐이다. 맑고 깨끗한 숲속의 나뭇잎들이 부딪히는 소리이며 새소리 바람소리인 것인데 이곳 사람들은 숲을 '수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숲은 사계절 생명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꽃들이 피고 지면 알알이 영근 열매들로 가득하다. 산딸기 깨금 머루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건강식이 아니던가.

산딸기는 숲속의 어느 오솔길을 다녀도 만날 수 있었던 여름철 바른 먹거리였다. 숲속을 헤매다가, 혹은 길을 가다가 작고 몽글한 붉은 열매가 가지 끝에 주렁주렁 매달린 것이 보이면 휘리릭 달려가서 톡 따먹는다. 먹을 것 앞에서는 어른도 동심으로 돌아간다. 탐심(貪心)에 빠져 온 몸이 산딸기 가시에 긁혀도 허겁지겁 먹기 바쁘다. 그 옛날, 숙기 많은 소년은 붉게 타 오르는 산딸기를 혼자 먹기 아까워 한 움큼 따서 옆집 처녀에게 건넸다. 처녀는 우윳빛 두 손으로 받아먹으면서 "어머, 색깔이 오고 있어, 색깔이…"라며 예쁜 비명을 질렀다. 그의 얼굴도 통통하고 붉게 익고 있었다. 처녀의 손등을 만지는 순간, 아침햇살 튕기는 소리가 났다. 이슬먹은 풀잎처럼, 찔레꽃 향기처럼, 하얀 솜사탕처럼 비릿하지만 달콤한 향기가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가슴이 떨리고 입에 침이 확 고였다.

ⓒ 홍대기
늦은 여름과 가을에는 깨금 따먹는 재미가 있다. 깨금은 개암나무과에 딸린 낙엽교목의 열매로 푸른 잎을 따내면 껍데기에 은행처럼 알맹이가 쌓여 있다. 깨물어 속살만을 골라 먹는데 젖빛의 그 맛은 밤맛이나 호두맛보다 더 고소하고 산뜻한 액즙까지 곁들여 일품이었다.

산 속으로 달려가면 머루 맛을 볼 수 있다. 지난 여름에 산기슭과 숲속을 헤매면서 머루나무가 자라는 곳을 확인해 둔 뒤 초록에서 붉은 색으로, 다시 탱탱하고 검붉게 익을 때를 기다린다. 잘 여물면 머루나무 한 그루에서 소쿠리로 하나 가득 수확할 수 있다. 진하게 달고 감칠맛 나는 머루를 그 자리에서 먹기도 하지만 송이째 따서 집에 가져가면 술을 담글 수 있다. 시골 사람들은 머루 더덕 오디 도라지 같은 자연의 숨결을 그대로 옹기에 담아 술을 빚었다. 겨울 농한기철에 두고두고 마시곤 했는데 이중에서 머루주는 달고 알싸한 맛 때문에 어른들 몰래 훔쳐 먹기 좋았다.

ⓒ 홍대기
숲 속의 생명들은 모두 아름답다. 그리고 늘 살아있는 영혼이 되어 내곁으로 다가온다. 고여 있거나 한 곳에 몰입돼 있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감싸 안으며 에너지를 만들어 준다. 들을 기름지게, 산을 청정하게, 계곡을 구순하게 지켜준다.

가을숲에 들어가면 어머니의 젖내음이 난다. 세상일에 빗장을 걸고 싶다. 문명으로부터 벗어나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대자연 속에서 밀월여행을 즐기고 싶다. 조촞조촘 땅거미가 잦아들고 있다. 이 가을이 지기 전에 무디어진 내 삶의 촉수를 되살릴 수 있는 여행을 하고 싶다.
글 변광섭(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에세이스트)

그림 강호생(화가·충북미술협회장)

사진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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