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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소풍길 - 한천팔경에서

능선을 따라 강물처럼 흐르는 자연의 미학

  • 웹출고시간2013.07.07 16:53:0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 홍대기
아침 햇살이 솔숲 사이로 찾아든다. 숲 속에서는 초록 나뭇잎들이 햇살을 받아 황홀하게 목욕을 하고 하늘은 의연히 솟은 아침산을 푸른 미소로 바라본다. 이른 새벽, 어디선가 꾀꼬리 우는 소리와 바람이 문풍지를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해오라기는 새하얀 깃털을 자랑하며 아침 햇살을 가로질러 날고 지난밤의 새까만 어둠도 환하고 맑은 기운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늘 그렇듯이 오늘도 티 없이 맑은 대자연의 싱그러움 앞에 겸손해지기 위해 하늘을 향해 마음속의 시린 상처를 토해낸다. 그리고 바로 그 빈자리에 싱싱한 햇살을 한 아름 집어삼킨다. 뒷산 솔숲 사이로 솟아오르는 태양과 그 태양의 햇살은 찬연하다 못해 너무 눈부셔 눈을 뜰 수 없다. 청개구리는 토란잎에 앉아 아침 햇살을 즐기고, 기어코 돌담을 타고 올라간 담쟁이도 한유롭다.

아카시아 꽃이 지고 밤꽃이 피면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다. 온 동네가 아카시아 꽃향기로 감미롭고 그윽하며 산천은 온통 젖빛 안개를 두른 듯 그리움의 마을이 된다. 아이들은 동산위에 올라 앉아 활짝 핀 꽃을 꺾어서 포도송이 따먹듯 먹어치웠다. 향긋하고 달콤한 맛에 넋을 잃은 것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밤꽃이 피는 날이면 온 동네가 젖냄새로 가득하다. 남편을 일찍 잃은 과부들은 비릿한 젖냄새에 잠을 못 이루고 청년들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팽나무 아래에 평상을 만들어 놓고 밤늦도록 술판을 벌였다. 헉헉 숨이 막히게 더운 날에는 낮이든 밤이든 족욕이나 등목을 하면 그만이다.

ⓒ 홍대기
시골길을 걷다보면 불현듯 옛 생각에 젖곤 한다. 이른 새벽에는 맑은 시냇가 빨래터에서 동네 아줌마들이 방망이질을 하며 수다 떠는 풍경이 좋았다. 여름밤에는 온 가족이 마당에 모여 앉아 감자와 옥수수를 쪄 먹으며 밤하늘의 별을 세지 않았던가. 아주까리기름을 사용했던 호롱불은 으스름하거나 어렴풋하게, 그렇지만 고요한 시골 밤을 더욱 정겹게 비추곤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호롱불이 지치도록 바느질을 하셨다. 한 땀 한 땀 사랑과 정성과 솜씨를 담아 조각보를 만들기도 했고, 찢어진 옷을 깁기도 했으며, 섬섬옥수 예쁜 옷을 만들기도 했다.

그날의 풍경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 우물가 펌프질에 등목 하는 소리, 서리하는 소년의 발자국 소리, 자근자근 옥수수 씹는 소리, 수박씨 발라먹는 소리, 시집 못간 늙은 고모의 달그림자와 한숨소리, 이웃집 아저씨의 술주정소리, 뻐꾸기 부엉이 우는 소리, 후투디의 파닥거리는 소리, 치열한 생존의 현장에서 노래하는 여치와 매미의 합창소리, 개골개골 와글와글 별빛소리와 맹꽁이소리…. 고향의 여름밤을 하얗게 수놓았던 아름다운 소리들이다.

ⓒ 홍대기
영동군 황간면 초강천을 품고 있는 절경이 한천팔경인데 때묻지 않은 시골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우암 송시열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젖어 한천정사를 짓고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 화헌악, 용연동, 산양벽, 청학굴, 법존암, 사군봉, 냉천청, 월류봉의 여덟 경치를 한천팔경이라고 말한다. 이 중 으뜸은 월류봉이다. 달이 흐르는 봉우리라는 뜻일진데, 봉우리를 타고 오른 달이 능선을 따라 강물처럼 흐르듯 사라진다고 해서 월류봉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 한반도 하늘에 떠 있는 달이라고 해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느낌과 감동이 다를 것이다. 적어도 이곳의 달은 하늘과 강물과 숲속의 내밀함을 품고 있으니 나를 시심에 젖게 하고, 노래하는 가수로 만들며, 춤추는 나그네, 흥겨운 악동으로 만든다.

사실 말이 한천팔경이지 모든 것이 월류봉과 통한다. 화헌악은 봄꽃으로 불게 타오르는 산을, 용연동은 월류봉 아래의 깊은 계곡을, 산양벽은 월류봉의 깎아지른 절벽을, 청학굴은 월류봉 중간쯤에 있는 깊은 동굴을 말한다. 그리고 월류봉 풍경의 백미는 아래서 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펼쳐지는 풍광을 즐기는 것이다. 유장하게 흐르는 초강천과 심산유곡의 백화산 조망이 압권이다.

ⓒ 강호생
일찍이 퇴계 이황은 <활인심방>이라는 의학서에서 '좋은 마음과 반듯한 생활습관'을 건강과 장수의 비법으로 소개했다. 좋은 물, 좋은 차, 좋은 음식은 심신이 노곤해 진 사람들에게 당장의 기력을 줄 수 있지만 근본적인 처방은 아니다. 맑고 깨끗한 마음,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다스릴 수 있는 절제된 생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소서팔사(消暑八事)'를 더위를 쫓는 8가지 방법으로 꼽았다. 솔밭에서 활쏘기, 홰나무 밑에서 그네타기, 빈 누각에서 투호하기, 대자리 깔고 바둑 두기, 연못의 연꽃 구경, 숲 속 매미소리 듣기, 비 오는 날 시 짓기, 달밤에 탁족하기…. 이 얼마나 운치 있는 피서법인가.
ⓒ 홍대기
오르는 길에서 만나는 시골 풍경이 나그네의 발목을 잡는다. 호젓한 시골풍경, 쏟아지는 계곡, 유유히 흐르는 강물, 돌담과 논두렁 밭두렁, 소나무 숲과 느티나무 숲이 쏟아진다. 알알이 익어가는 포도송이 앞에서는 군침이 솟아나고 옥수수 밭을 지나려면 바람 소리가 바스락 거리며 나그네 발목을 잡는다. 계곡을 건너려면 구릿빛 촌로가 다슬기 잡이에 여념이 없다. 감자 캐는 아낙네, 낮잠 자는 낭만고양이 모두 오달지고 마뜩하다. 미루나무 백사장에서 잠시 신발을 벗자. 하얀 모래밭에 마음을 내려놓고 게으름뱅이가 되어보자. 아니, 한 알의 모래가 되고 하나의 미루나무 잎이 되고 한 뼘의 햇살이 되고 한 마리 새가 되면 또 어떠한가.

길 없는 길은 없다. 끝 없는 길도 없다. 나그네에게 그 길의 끝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한 바로 그 지점이 길의 끝인 것이다. 그리하여 한천팔경의 끝은 월류봉이다. 휘파람 불며, 콧노래를 부르며, 가끔씩 어깨춤이라도 추며 봉우리를 타고 넘으면 좋겠다. 월류정 앞을 스쳐 U자를 그리며 흐르는 하천을 품어보자. 산천은 말이 없지만 나그네는 맑은 기운으로 움튼다. 새 생명의 꽃이 피기 시작한다. 한천팔경 여행이 아름다운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글 변광섭(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에세이스트)

그림 강호생(화가·충북미술협회장)

사진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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