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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소풍길 Ⅶ - 괴산 왕소나무마을에서

소나무의 맑음과 솟음과 의연함에 세월의 미학, 무위한 아름다움에 젖다

  • 웹출고시간2013.03.31 17:44:33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 강호생(화가·충북미술협회장)
꽃들의 만찬이 시작되었다. 남녘에서 벚꽃과 매화와 목련이 물결치더니 이곳 충청도에도 산수유와 개나리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며 봄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어 진달래와 찔레꽃이 잎잎의 열어젖힘을 준비하고 있으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꽃구경에 하루해가 짧다. 그리하여 봄은 생명이 움트는 계절이며 꽃들의 잔치, 춤추는 악동의 낙원이다. 꽃의 신비를 통해 삶의 신비를 보려하고, 은은히 번지는 꽃들의 물결을 통해 생명의 향기를 맡고 희망의 향기를 맡는다. 이 봄, 나만의 꽃 한송이, 나만의 푸른 숲, 나만의 드높은 하늘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나는 소나무 숲으로 유명한 괴산의 삼송리를 향해 달렸다. 산도 계곡도 하늘도 모두 깊디깊다. 그 사이로 펼쳐진 다랭이 논과 밭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밭가는 농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한국의 시골풍경을 "한 폭의 서예족자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산 속에 갇혀있는 논밭의 풍경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이곳에는 인위적인 경계가 없다. 아파트 짓듯이 획일적인 잣대로 규정지은 그 무엇도 찾을 수 없다. 강줄기와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면서 생긴 우연한 곡선으로 논길을 만들고 밭길을 만들었으며, 마을의 돌담도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쌓아 올렸다. 그러니 이곳에 무슨 다툼이 있겠는가. 설령 내게 욕심같은 것이 있다 해도 잠시 묻어두고 그저 자연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농심만 따르면 된다. 모판을 만들어 씨를 뿌리고, 산속에서 내려온 물을 가둬 써레질을 하며, 촘촘히 모를 심은 뒤 때때로 김을 매고 잡초를 뽑아주고, 붉게 익은 가을 어느 날엔 수확을 하는 순박한 농부의 마음이 그대로 배어 있다.

논두렁길을 따라 새참을 나르는 아낙의 치맛자락이 봄바람에 춤을 춘다. 소나무 그늘 밑에서 모판 나르는 가족들을 향해 노래를 한다. "얼랑 오셔유, 새참 잡숩고 하셔유." 아,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정겨운 풍경인가. 검게 그을린 농부는 써레질을 멈추고 소나무 그늘 아래로 몸을 맡긴다. 코뚜레가 꿰어있는 소는 두터운 혀로 논두렁의 풀을 뜯어 먹는다. 달려가고 싶다. 저 소의 등이라도 긁어 주고 싶다. 저 큰 눈에 있는 눈꺼풀이라도 닦아주고 싶고, 미루나무 그늘에 앉아 농부와 아낙과 함께 새참을 먹고 싶다. 그곳에서 곡선의 추억을 만나고 싶고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핀 언덕에서 들숨을 쉬며 어지럽고 시끄럽던 머리를 식히고 싶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100점 중 99점이 소나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국의 사계四季와 한국인의 마음을 소나무만큼 잘 표현하고 있는 자연이 없기 때문이다.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나 소나무로 불 지펴 밥을 해 먹고, 소나무로 만든 관 속에 들어가 한 줌의 흙이 되고, 무덤 옆에는 항상 소나무가 무성한 우리의 삶을 생각하면 소나무를 찾아 떠나는 이번 여행은 어쩌면 내 삶의 근원과 본질을 찾으려는 열망 때문일 것이다.

삼송리는 마을 이름 그대로 소나무 숲이 많다. 첩첩산중에 계곡과 시냇물과 농경의 마을이 한 폭의 그림처럼 낮은 자세로 펼쳐져 있는데 처처에 늙은 소나무와 소나무숲이 자연의 시간을, 마을의 역사를, 불멸의 향기를 이야기 하고 있다. 소나무가 먼저 자리를 잡은 뒤 사람들이 그 숲을 따라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이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면서 소나무를 심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마을의 가장 소중한 벗이자 삶의 휴식처는 소나무였다. 마을마다 주민들의 쉼터 기능을 하는 숲이 있는데 대개가 느티나무 아니면 소나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을 사람들은 시시각각 그 숲으로 모여 수다를 떨고 정을 나누며 그들만의 놀이문화를 만들었는데, 이 마을은 소나무가 주인이고 벗이다.

ⓒ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삼송1리의 하천변에 있는 솔밭이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수백 년 된 소나무만 2백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솔밭이니 사람들은 이곳에서 봄의 소리를 듣고 여름의 더위를 식히고 가을의 소소함을 달래며 겨울의 북풍을 피하는 안식처다. 특히 한 여름에는 이곳에 모여 낮잠을 자고 늦은 밤까지 사랑방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하여 이 마을 사람들 몸에서는 분명 소나무 향이 끼쳐올 것이며 사람들의 삶 또한 소나무를 닮아 아파도 쓰러지지 않고 강건할 것이다. 하천을 따라 경북 상주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곳곳에 늙은 소나무가 정처 없는 나그네를 두 팔 벌려 반긴다. 오래된 마을 어귀에는 으레 느티나무 풍경이 끼쳐오는데 이곳은 유독 소나무가 많고 그 맑음과 돋음과 솟음이 의연하다 못해 숙연해진다.

이 마을 노송의 백미는 마을 끝자락에 있는 소나무숲이다. 꿈틀거리는 줄기가 승천하려는 용의 모습을 닮아 용송龍松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중 으뜸인 수령 600년 된 왕소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90호로 지정돼 있다. 높이가 13.5m, 둘레가 4.91m에 달하고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형상을 닮아 오래전부터 마을의 당산나무로 융숭한 대접을 받아왔다. 그런데 요즘 첩첩산중의 이 왕소나무가 세간의 화제다. 지난해 태풍으로 뿌리째 뽑혀 쓰러지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일찍이 세종은 '용비어천가'에서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뽑히지 아니하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고 했는데 600년을 모진 풍랑과 전쟁과 외로움과 슬픔에 젖어 여기까지 왔는데 어처구니 없는 비보에 마을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자연은 죄가 없고 오직 인간이 부덕하기 때문이라며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다.

ⓒ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쓰러져 있는 소나무는 아프다는 말 한 마디 없다. 북풍한설의 기나긴 세월에도, 천둥번개 몰아치는 공포의 순간에도, 총과 칼을 들고 달려오는 전쟁속에서도, 도끼자루 들고 오가는 나무꾼과 개발업자의 매서운 눈초리도, 느닷없이 살갗을 때리는 샛바람에도 굳세게 이 땅에 뿌리내리고 하늘을 향해 푸른 기운을 멈추지 않았거늘 어찌 쓰러졌다는 이유만으로 눈물을 흘릴 수 있겠는가. 누워서도 살아보겠다며 한 마디 없이 발버둥치는 저 깊디깊은 생명 앞에 서는 순간 나그네는 먹먹해진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여 너는 그 누군가에게 가슴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가.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나 솔잎과 송홧가루를 먹으며 솔밭을 뛰어다니고 소나무로 짠 관속에 묻힐 것인데, 사람들은 소나무를 위해 해 준 것이 없다. 삿된 생각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내가 부끄러울 뿐이다.

왕소나무 주변에 있는 아름드리 노송들이 세월의 미학을 보여준다. 자세히 그 내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니 마디마디의 아픔이 붉은 핏빛으로 빛나고 있다. 그 마디의 끝에 푸르고 가는 솔잎이 무성하다. 햇살과 바람과 구름이 솔잎 사이에서 소꿉놀이를 하는지 내 눈이 간지럽다. 송홧가루가 날리기 시작하면 화선지에 물감 번지듯 노란 안개로 피어올라 산과 내와 마을을 두리둥실 떠다닐 것이다.

만물이 무상하다. 조촘조촘 땅거미가 잦아들고 뉘엿뉘엿지는 석양이 마을에 내려 앉아 노송들의 아픔을 보듬는다. 밤에는 입술을 비집고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지 마을 사람들도 밤잠을 설친단다. 이처럼 삶이란 한 없이 깊은 오지일 뿐이다. 그러니 얄팍한 지식의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지 말고 가슴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것들과 만나고 보듬으며 사랑하고 싶다. 그 무위한 아름다움들이 거친 내 삶을 매만져 주면 좋겠다.
글 변광섭(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에세이스트)

그림 강호생(화가·충북미술협회장)

사진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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