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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소풍길- 증평 도안에서

신새벽의 처녀성을 찾아 떠나는 5월의 노래

  • 웹출고시간2013.05.12 17:55:3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 강호생
오늘은 봄처녀가 먼저 마중 나왔다. 꽃샘추위 때문에 봄이 더디게 오는 것 같더니 너 참 곱게 차려 입고 내 곁으로 오는구나. 입 안에는 쑥 냄새가 가득하다. 볕은 보송보송하고 냇가의 버들강아지도 눈을 뜬다. 회색도시의 누더기 같은 삶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봄내음으로 가득하다.

아이들은 봄꽃을 한 움큼 입에 물고 해맑게 웃고 있다. 처녀들의 나폴거리는 치마 속에도 봄이 왔는지 그 하얀 속살이 붉게 물들고 있다. 아낙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냇가에 쪼그리고 앉아 냉이와 쑥을 뜯는다. 그들의 입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노래와 봄햇살이 눈부시다. 오종종 예쁘게 솟아오른 새 생명을 보며 여인들은 '어머, 봄이다'라며 외마디 탄성을 지른다.

ⓒ 홍대기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일을 씨앗이 움트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의 생명이 움트고, 동물의 생명이 움트고, 대자연의 생명이 움트는 순결하고 성스러운 일이 최고의 순간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 잎잎의 열어젖힘을 보며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을 노래하면 어떻고, 그 속에서 춤을 추면 어떠하며, 어슬렁어슬렁 자연의 시간에 기대에 졸음겨운 걸음을 내딛으면 또 어떠한가.

이처럼 자연의 시간에는 살기殺氣가 없다. 번뇌와 욕망으로 가득한 사람의 세계를 맑게 회복시킨다.

무엇이든 처음의 경험은 신새벽의 처녀성을 갖고 있다. 기억할 수 없는 탄생의 신비, 첫눈의 추억, 첫사랑의 애틋함, 첫 이별의 슬픔과 아픔, 그리고 대자연속에서 만나는 움트는 생명과의 첫 만남….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들은 내게 불꽃같은 열정과 불멸의 향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가슴 절절한 추억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첫 경험을 만들려고 하며, 신비하고 짜릿한 추억을 담으려 한다. 산모의 고통은 순간이지만 그 영혼의 부싯돌은 꺼지지 않는 생명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첫 경험이 잠자고 있는 나를 깨우고 새로운 삶의 마디를 만들기 때문이다.

ⓒ 홍대기
그래서 나는 오늘도 신새벽의 처녀성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부풀어 오른 봄, 절정의 봄을 온 몸으로 품고 싶었다. 논두렁 밭두렁에는 푸른 풀들이 무성하고 여기저기서 꽃망울 터지는 소리로 가득하다.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는다고 노래한 시인은 누구였던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닫혀있던 내 입술이 열리더니 어느덧 새봄의 휘파람을 불고 있다. 삿된 마음을 흐르는 물살에 던져 버리고 나니 쑥과 냉이와 봄나물이 발밑에서 노래를 한다.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나물 캐러 바구니 옆에 끼고서/달래 냉이 꽃다지 모두 캐보자/종다리도 봄이라 노래한다."

다랭이 논에서는 농부들의 써레질이 한창이다. 비릿한 흙내음으로 가득한 저 곳에 푸른 기운이 왕성하고 황금빛의 물결이 출렁인다. 밭에서는 고랑을 만들고 부풀어 오른 고랑에 오종종 여린 고추모를 심느라 하루해가 짧다. 어느덧 햇살에 반짝이며 바람에 나부끼는 비닐밭이 천지다. 봄비를 다디달게 마시고 햇볕을 품으며 심술궂은 바람을 벗 삼으면 잎과 줄기가 넌출넌출 자라고 꽃이 피며 아삭거리는 살찐 풋고추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붉게 물든 고추를 따서 마당이나 지붕위에 펼쳐놓고 이글거리는 태양과 합궁토록 하고 그날의 찬란했던 추억은 찰지게 남을 것이다.

ⓒ 홍대기
이처럼 농부들은 정직하다. 아니, 언제나 처녀성을 갖고 있다. 삶의 마디마디가, 순간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래서 농부들은 어제의 기억보다는 내일의 소망을 간직한다. 늘 무엇인가를 심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오늘도 씨앗을 땅에 묻는다. 욕망 때문이라는 말을 하지 말자. 도시사람들의 행위는 하나같이 크고 작은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농부들의 그것은 땅이 있기 때문에, 씨앗을 땅에 묻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무엇인가를 심는 것이다. 도시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동에 대해 마뜩찮을 경우 울화통이 폭발하고 분노가 목젖까지 치밀어 오르지만, 농부들은 구차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돋아나는 싹을 보고, 꽃이 피고 열매맺는 것을 들여다 볼 뿐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봄에 인간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땅에 씨앗을 묻는 것이라고 했다. 무슨 씨앗이든 상관없다. 얼었던 그곳에 싹이 돋고 꽃이 피며 열매 맺으면 그날 우리는 맑은 미소를 품으며 감사의 기도를 하리라.

ⓒ 홍대기
증평 도안은 참으로 오래된 농경의 마을이다. 복사꽃은 연지곤지를 찍은 듯 발그레 상기돼 있고, 봄 햇살을 품은 버들개지가 눈부시다. 버들개지는 버드나무의 꽃이다. 회초리같던 나무줄기에 푸른 기운이 가득하다. 임어당은 "버들은 날씬한 가인佳人을 연상케 한다"고 했고, 청나라 문장가 장조張潮는 "꽃같은 얼굴, 새 같은 목소리, 달의 혼, 눈 같은 하얀 피부, 버들가지 같은 몸매"라며 버드나무를 여인의 나무라고 예찬했다. 맑은 햇살이 버들개지에 초롱초롱 매달려 있다.

선가의 "살아도 온몸으로 살고 죽어도 온몸으로 죽어라"라는 말처럼 대지는 정직하고 거침없고 뒤끝이 없으며 늘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는 것처럼, 물살이 흘러가도 하천은 변함이 없는 것처럼, 산새 들새가 오가는 그 곳에는 푸른 햇살과 자유로운 생명이 꿈틀댄다.

동쪽으로는 괴산군 사리면이, 서쪽으로는 진천군 초평면이, 그리고 북쪽으로는 음성군 원남면이 도안을 감싸고 있으니 이곳 사람들은 어머니의 마음처럼 따뜻하고 느슨하며 온건함이 묻어있다. 논길 들길을 따라, 냇가와 언덕길을 따라 거닐다보면 수백년을 살아온 고목을 만나고, 돌담을 만나며, 구릿빛 농부들이 방랑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송정리고인돌, 광덕리선돌 등 선사유적은 오래된 역사성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이성산성, 두타산성의 성곽은 이 마을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 홍대기
화려하거나 호사스럽지 않지만 한국의 서정성을 엿볼 수 있는 곳도 처처에 자리하고 있다. 불심 가득한 광덕사와 석조여래입상, 충효예의 정신을 담고 있는 구암서원, 그리고 효자와 열녀와 고부간의 사랑이야기 등도 쉽지 않게 만날 수 있으니 만화방창 5월 어느 날, 무거운 짐 내려놓고 시골길을 걸으면 어떨까. 겨우내 야위었던 마음에 미나리빛깔 새살 돋는 소리를 온 몸으로 품으면 어떨까. 청량한 바람에 내 마음 상처받으면 또 어떠한가. 큰 욕심 없이 살아가는,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누릴 것만 누리는 생활의 지혜를 만나면 좋겠다.
글 변광섭(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에세이스트)

그림 강호생(화가·충북미술협회장)

사진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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