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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소풍길Ⅴ- 괴산 제월대에서

낮고 작고 여린 곳에서부터 찾아오는 '봄봄봄'

  • 웹출고시간2013.03.17 16:15:54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 강호생(화가·충북미술협회장)
얼마나 기다렸던가. 유난히도 길고 더디고 질긴 겨울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빠져나오고 싶어 안달나지 않았던가. 그도 그럴 것이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춥고 바람도 거셌으며 눈발마저 사람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으니 햇살 가득한 봄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모든 이의 소망이자 새 날에 대한 열망의 몸부림이 아닐까.

그렇지만 무작정 기다린다고 봄이 내 품으로 달려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기다림은 목을 길게 빼고 앉아서 언제 올지 모를 소식에 애꿎은 가슴만 태우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걸어서 마중을 나갈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아랫목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 봄이 오는 소리를 따라 걸어가는 것이다.

ⓒ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그래서 나는 괴강의 물살을 따라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봄은 생각보다 아주 가까이 와 있었다. 잔설이 채 녹지 않은 논두렁 밭두렁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고 냉이와 청보리가 붉은 대지를 비집고 일어나 푸른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두 무릎을 꿇고 흐르는 물살 속을 쳐다보았다. 푸른 이끼와 조약돌 사이를 오가는 피라미들의 춤사위에 넋이 나갔다. 마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과 함께 왈츠를 추는 모습이다. 맑고 푸른 향기가 끼쳐오고 그토록 찬란한 햇볕이 물살에 쏟아지면서 때 묻지 않은 물고기들의 놀이는 절정을 이룬다.

그렇다. 봄은 이처럼 낮고 작고 여린 곳에서부터 오고 있었다. 길고 더디고 질긴 겨울의 끝자락을 붙잡고 찾아오기 시작한 봄은 이렇게 낮은 곳에서 작은 소리로, 여린 새 생명으로 움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봄처녀를 만난 총각처럼 달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아, 봄이구나!'라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 이제야 가슴에 와 닿는다.

ⓒ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어느덧 나는 제월대 정상에 올라 푸른 하늘과 소나무의 향기와 쏟아지는 햇살과 흐르는 물길을 품고 있다. 목련꽃이 피려는지 꽃봉우리가 잔뜩 부풀어 올랐다. 매화와 산유수도 꽃망울을 터뜨릴 채비가 끝났다. 일찍 피는 꽃들은 맹위를 떨치던 겨울의 한 복판에서 봄의 전령을 준비했다. 북풍한설에도 좌절하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고 새 순을 틔울 준비를 한 것이다. 미련한 인간들만 아무 준비 없이 봄이 오기를 기다릴 뿐이지 자연은 이미 그 깊디깊은 겨울 속에서 새 날을 준비하지 않았던가.

맑은 강물과 기암절벽이 있는 곳에는 으레 정자가 서 있다. 옛 사람들은 대자연의 풍광을 벗 삼아 책을 읽고 풍류를 즐겼으며 아픔을 달래고 새로운 꿈을 빚었던 것이다. 정자에도 품격이 있다는 것을 아시는가. 정자의 품격이란 첫째는 열림의 공간이요, 둘째는 단청의 미학이며, 셋째는 처마의 격조다. 대부분의 정자는 팔각형 또는 사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각 면마다 기둥이 있고 기둥 사이의 드넓은 풍경을 그대로 품고 있다. 자연은 각각의 기둥에 의해 분절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하게 되는데, 그것도 시간에 따라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른 멋과 맛과 향을 담고 있으니 살아있는 에콜로지가 아닐까.

대부분의 정자에는 한국적인 채색의 미학인 단청을 하고 있다. 자연에서 얻은 염료를 그대로 흩뿌린 듯한 맑은 기운이 담긴 단청은 봄과 동쪽을 나타내는 청색, 여름과 남쪽을 뜻하는 적색, 계절의 변화와 중앙을 나타내는 황색, 가을과 서쪽을 품고 있는 백색, 겨울과 북쪽을 의미하는 흑색으로 꾸며진다. 이는 꽃이 피고 녹음 우거지며, 단풍으로 붉게 타 오르고 온 몸을 벗어던진 대자연을 감싸안는 하얀 설경을 그대로 품고 있음을 의미한다.

ⓒ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사람들은 중국의 형形, 일본의 색色, 그리고 한국의 선線을 대표적인 미라고 주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의 선의 정점은 용마루나 처마 끝의 부드러운 곡선에 있다. 그 속에는 하늘을 향한 염원이 담겨있고 땅을 억누르는 비장함도 있다. 그리고 하늘과 땅 모두를 품는 관용의 정신이 담겨 있다. 작은 정자 하나에도 자연의 숨결을 담고, 한국인의 철학과 정신을 품고자 했으니 절로 시심에 젖고 자연에 귀의하며 마음을 비우는데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던가.

나그네는 잠시 정자에 앉았다. 괴산읍 제월리의 제월대에 앉아 푸른 솔잎향을 들이마시며 흐르는 물살을 훔쳐보았다. 아찔하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을 군말 한 번 없이 저토록 맑게 흐르고 있는데 나는 늘 세상 탓만 하며 뒤돌아보고 있으니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조선 선조 때 유근이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 중 이곳을 지나는데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정자를 지었단다. 광해군때에는 이곳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니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싶고 자연 속에 묻히고 싶어 하는 것만은 변함이 없다. 정자에는 이원이 쓴 '孤山亭(고산정)이'라는 현판과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선조 39년 1606년에 쓴 '湖山勝集(호산승집)'이라는 편액이 세월의 깊이와 묵필의 심오함을 말해주고 있다.


이곳에서 풍류를 즐긴 사람은 누구일까. 때묻지 않은 대자연을 품으며 어떤 시심에 젖고 얼마나 많은 글을 잉태했을까. 이 고운 아픔을 겪으며 시인의 길을 걷고자 한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아니, 나는 왜 사람들이 이곳에서 풍류만 즐겼을 거라는 고착화된 생각에 빠져있는가. 돌이켜보면 벽초 홍명희와 그의 아버지 홍범식장군처럼 호연지기와 민족정신의 붉은 피를 토해 낸 사람도 있었는데 말이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1880~1968)는 인근의 인산리(동부리 450-1)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술국치 때 순국하신 부친 홍범식장군의 뜻을 받들어 평생을 민족의 자주 독립과 문화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제월대 입구에 있는 홍명희 문학비에는 "물 맑고 인정 두터운 이곳 괴산은 선생의 삶의 자취가 역력한 곳이요, 민족정신이 살아있는 역사의 고장이다. 삼가 옷깃을 여미고 선생의 뜻을 기리며 민족이 진정 하나가 되는 날을 소망하면서 여기 선생의 고향 땅에 작은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며 비문이 나그네의 발목을 잡는다.

벽초에 관한 사회적 문제는 그가 월북을 하고 북한의 부수상을 지냈으며, 김일성 주석과 가까웠다는 점 등으로 압축된다. 그렇지만 대하역사소설 '임꺽정'의 저자이자 독립운동가이고 언론인이었으며 교육자였던 홍명희는 해방공간인 1946년 '좌도 아니요 우도 아닌 중간적 존재'로 묘사되는 철저한 중도론자였다. 이념과 갈등과 대립이 없는 하나되는 세상, 아픔이 없는 삶, 강한 한국을 꿈꿨던 것이다. 그의 부친 역시 충남 군수로 있을 때, 경술국치의 아픔이 있던 그날 나라 잃은 슬픔에 고개를 들 수 없다며 자결을 하지 않았던가. 제월대 인근 동부리에 그의 생가가 있으니 잠시 들러 선생의 고귀한 민족정신을 만나는 것도 좋다. 고택의 숨결과 3·1만세운동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픔이 없는 아름다움이 어디 있겠는가. 하산하는 길은 몸도 마음도 천근만근이다. 아픔을 이기지 않고서는 아름다움을 잉태할 수 없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다래정' 식당에 들러 괴산의 깊은 계곡에서 들어 올린 자연산버섯 찌개를 먹으며 지친 마음을 달랜다.
글 변광섭(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에세이스트)

그림 강호생(화가·충북미술협회장)

사진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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