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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소풍길 - 충주삼탄유원지

느리게 여무는 풍경, 그 속에 삶의 여백이 있다

  • 웹출고시간2013.09.22 15:57:27
  • 최종수정2013.09.22 15:57:27
ⓒ 강호생
신기하게도 똑같은 나무에서 자란 과일이지만 크기와 때깔과 맛이 제각각이다. 거름을 주고 가지치기와 솎아주기를 하며 골고루 농약을 주는데도 익어가는 게 다르다. 어떤 놈은 일찍, 그리고 야무지게 여무는데 어떤 놈은 천천히, 그리고 볼 폼 없게 익어간다. 같은 날 모내기를 했는데 어떤 논에서는 추석 전에 수확을 해 햅쌀을 먹고, 홍시 맛도 보며, 아삭아삭 햇밤 먹는 재미도 솔솔하다.

천고마비(天高馬肥)라고 했던가. 들녘의 곡식이 야무지게 여물어 감칠맛 나거나, 입안이 온통 싱그러움으로 가득한 저것들을 먹는 재미에 가을이 익고 세월이 저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놈은 찬 서리가 내려서야 겨우 열매가 익어가거나 제 명도 다하지 못하고 태풍이나 날짐승에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야 하는, 그리하여 시골 농부의 마음에 미련과 슬픔만 주고 가는 불행한 열매들도 있다.

한 가지에서 태어났는데, 바람에 흔들리고 햇볕의 충만함도 함께 맛보았는데 어쩌면 저토록 서로 다른 색깔과 모양, 게다가 맛까지 틀린지 신비롭기까지 하다. 지난 봄 꽁꽁 얼어붙은 땅을 힘겹게 박차고 올라온 꽃들도 피고 지는 것이 서로 달라 애간장을 태우더니 이 가을에도 내 가슴을 시리게 하고 있다. 나는 오직 하나, 자연이든 사람이든 모두가 함께 잘 먹고 잘 살며 잘 싸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낭만주의자이기 때문에 이처럼 사사로운 것에도 쉽게 상처를 받고 슬퍼한다.


특히 가을에는 누구나가 시인이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시리고 아프게 마련이다. 그러면서 성장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방황과 좌절의 늪에서 쉬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산과 계곡에 피고 지는 무수한 꽃들도, 논과 밭에서 자라는 곡식들도, 담장 사이로 엉거주춤 기어오르는 청개구리도, 들녘을 황금빛을 물든 가을볕도 흔들리지 않고 피어나는 것이 없으니 이 땅의 생명은 질기고 아름다운 것이다.

계절적 정서장애(SAD)라는 것이 있다. 일종의 우울증인데 9월경에 나타나기 시작해 이듬해 봄까지 지속된다. 이 기간 중에는 괜한 것에도 상처를 받고 상심하기 쉬우며 일생생활에 흥미를 잃거나 무기력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럴 때는 책을 읽거나 가까운 박물관 미술관 나들이를 하고 색다른 공연 이벤트를 즐기는 등 문화체험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게 좋다. 때로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통해 텅 빈 가슴을 채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음의 곳간에 무엇을 채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품격이 달라지는 법이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가을엔 고독해지기 쉽다. 따사로운 햇살을 온 몸으로, 가슴으로 호흡하고 지혜의 메타포를 찾는 투어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세상은 나름대로 질서와 원칙과 패턴을 갖고 있지만 각기 독창적이고 혁신적이며 개성미 넘치는 질서와 원칙과 패턴을 보여준다. 그 울타리 안에서 경계를 넘나들고 생각이 탄생하고 창의와 열정이 만들어지며 에너지가 샘솟는 것이다. 무용가 머스 커닝햄은 "나는 관습적인 춤의 패턴을 깨부수어 관객들로 하여금 새로운 패턴을 보고 느끼도록 했다"고 말했으며, 화가 모리츠 에셔는 "나의 작업은 예술이 아니라 놀이에 가깝다"고 말했다. 획일적인 삶, 관습적인 형태를 거부해야만 예술이 탄생되고 문화가 형성되며 미래가치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은 <생각의 탄생>을 통해 창조적 사고와 지식의 대통합을 통한 신르네상스를 강조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인슈타인, 피카소, 마르셀 뒤샹, 버지니아 울프 등 세계적인 과학자나 예술가 모두가 창조적인 사고와 행동, 그리고 지식의 대통합을 통해 새로운 결과물을 창출했음을 역설한다. 이들은 모두 마음의 눈으로 관찰하고, 머릿속으로 형상을 그리며, 모형을 만들고, 유추하여 통합적 통찰을 이끌어 냈다.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문학 예술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오늘과 같은 발전은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 홍대기
오래전부터 벼르던 길이었다. 서두르지 말고 느리게 여무는 가을 풍경을 담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의 삶도 보폭을 줄이고 속도를 늦춰가며 넉넉히 여무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배낭을 메고 기차를 탔다. 고속열차가 아니다. 언제 명맥이 끊길지 알 수 없는 충북선의 낡은 기차에 몸을 실었다. '칙칙폭폭, 덜컹 덜컹' 하천을 따라, 논길과 밭길을 따라, 고개를 넘고 산을 넘어, 황금들판을 가로질러 기적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생각했다. 길이 끝나는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기차역이 있겠지. 외로운 기차역 하나 알 수 없는 나그네를 기다리며 서 있겠지. 나그네는 삼탄역에서 내렸다.


낡고 오래된 건물, 정신 사납게 하던 도시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곳이다.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느낌이다. 추억과 낭만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한다. 아, 나그네의 마음이 아날로그 풍경에 젖어가고 있다. 삼탄역에서 아무 생각 없이 얼마를 걸었을까. 들길 물길 숲길을 따라 삼탄유원지가 두 팔을 벌려 반기고 있다.


삼탄강이라고도 하는 이곳은 원주 치악산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산줄기인 천등산, 지등산, 인등산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물줄기는 느리고 길게 흐른다. 삼탄이란 광천여울, 소나무여울, 산천초등학교 명서분교정 앞 따개비바위 여울이 합쳐 붙여진 지명인데 오래전부터 영화촬영지로, 청춘들이 꿈과 낭만을 빚는 공간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배우 설경구가 <박하사탕>에서 기찻길을 막고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던 곳이 아니던가.

산천은 적요하고 사람들의 발길도 뜸하다. 플랫폼은 아름다웠던 지난날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무심할 뿐이다. 기찻길에는 가을볕이 쏟아진다. 이따금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유롭고 평화로워 보인다. 누가 말했던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곳이 시인의 집이고, 시 속 풍경이며, 시처럼 살아가는 것이 진정 행복한 삶이라고. 지금 나는 가을의 시인, 낭만을 빚는 시인이 되고 싶다.

글 변광섭(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에세이스트)

그림 강호생(화가·충북미술협회장)

사진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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