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즐거운 소풍길Ⅱ - 정북토성길에서 (下)

세월을 다듬어 마음의 빛을 담다

  • 웹출고시간2013.02.24 18:01:27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 홍대기
소나무였다. 토성에 쌓인 눈길 사이로 부풀어 오른 붉은 흙의 유혹을 뿌리치며 달아나려는 내게 손을 내민 것은 뜻밖에도 한 그루의 소나무였다. 여느 소나무와 달리 솔방울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무슨 슬픔과 아픈 사연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소나무를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솔방울이 쏟아질 것 같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다. 소나무야, 나 어쩌란 말이냐. 어찌 살란 말이냐. 소나무는 죽을 때가 되면 종족번식 본능으로 솔방울을 많이 만든다던데 그간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으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떠나려 하는지 아픔이 밀려왔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지에서 그린 '세한도'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친구처럼 나란히 서 있다. 사람하나 없어 고독하고 쓸쓸한 내음이 끼쳐오는데 가슴이 철렁할 정도다. 학자들은 귀양살이의 외로움을 표현한 당대 최고의 작품이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그 그림 왼편의 "추운 겨울이 지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있음을 안다"는 글이 압권이다. 칠십 평생 벼루 열 개가 닳아 구멍이 낳고, 붓 천 자루가 몽당붓이 되었다는 그의 삶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 홍대기
멀리서 겨울철새들이 군무를 펼치기 시작한다. 산과 들을 지나 회색도시의 아픔을 품고 달려온 미호천은 기꺼이 철새들을 위해 자신의 속살까지 드러내며 사랑을 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억새도 바람을 따라 흔들리면서 사르륵 사르륵 햇살처럼 빛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먹먹한 가슴을 움켜쥐고 동쪽의 토성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마을의 좁은 골목길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차갑고 메마른 들녘의 공기를 마시며, 그토록 찬연하던 낙엽은 지고 욕망의 옷을 훌훌 벗어버린 나목을 바라보며, 조물조물 정겨운 다람쥐와 산새 들새의 신명나는 합창소리를 들으며, 맑은 햇살과 바람과 구름을 벗 삼아 무심한 세월을 이끼처럼 지내온 골목길을 돌면서 사색에 젖는다.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한 해가 왔는데 그간 나의 발걸음은 무익하지 않았는지, 행여나 나의 욕망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구린내 나고 구차하며 막막한 일상의 연속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 강호생
토성마을 끝자락의 이삿짐 나르는 풍경에 마음이 갔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었다. 놀랍게도 대한민국 명장인 소목장 이성준 선생이 이곳으로 이사를 와 짐을 펴고 있던 것이다. 경기도에서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된 영문이냐고 물었다. 선생은 마지막 여정을 청주에서 마무리하고 싶어 달려왔다며 당신이 그동안 창작활동을 해온 가구들을 하나 둘 소개하기 시작했다. 참죽과 오동나무로 빚은 책장, 소나무의 결을 그대로 살린 좌경, 느티나무 향기 그윽한 숭숭이 반닫이, 마디마디의 섬세한 손길과 정교한 재단이 돋보이는 약장 등 우리 고유의 삶과 얼과 미가 살아 숨 쉬는 가구들이 방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실용성과 예술의 가치가 공존하는 공예. 그 중에서도 소목장은 결과 향과 힘이 좋은 나무를 찾고 다듬고 말리며, 나무 고유의 생명력에 장인만의 혼과 기술과 예술의 가치를 접목시켜야 제대로 된 작품이 탄생된다. 자신의 삶보다 더 오래가고 귀한 심성을 담으려는 열정 없이는 제대로 된 가구를 만들 수 없기에 선생의 눈빛은 초롱초롱 빛나면서도 열락과 고독이 섞여 있었다.

ⓒ 홍대기
선생은 가구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빚는다고 했다. 가구를 빚는 일에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자연의 결을 살리기 위해서 두 눈 부릅뜨고 나무의 내밀함까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때로는 코로 냄새를 맡기도 하고, 나무가 무슨 소리를 내는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손끝에 강한 힘을 주면서도 노련하게 힘을 분배해야 하고, 간결하고 부드럽게 다듬고 짜 맞추는 순간은 성스럽다. 새로운 형태와 작품과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은 "나의 작업은 마른 나무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것, 나의 사랑을 담는 것, 나의 미래를 빚는 것"이라며 알듯 모를 듯 종교성 짙은 말을 토해냈다.

목수들은 대목大木과 소목小木으로 구분하는데 대목은 집의 기둥과 건축가구부재 등 구조를 전담하는 목수이며, 소목은 가구제작과 수장 등 세부적인 일을 하는 목수다. 소목장이 섬세하고 기능미가 뛰어나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마을 초입에는 옻칠명장 김성호 선생의 공방이 있다. 이곳에 둥지를 마련한 지 올해로 5년째다. 옻칠 역시 좋은 재료에 정제된 옻을 수십 번, 수백 번 칠하고 자개로 상감을 해야 오랜 가치로 빛날 가구가 탄생된다. 기다림의 미학, 득도의 경지라고 해야 할까. 이처럼 한국의 가구는 천년을 산 것보다 많은 추억과 사랑과 애틋함을 간직하고 있다. 김성호 명장은 최근 한국공예관에서 특별전을 통해, 한중일 삼국의 옻칠명정 초대전을 통해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은 바 있다. 보석은 파고들어가 자신을 숨기려 할 때 가장 보석답다는 표현 그대로 장인의 처절한 자기희생이 없었다면 천년을 가도 변치 않는 작품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2층장, 3층장, 서랍장 등 그의 손길이 닿는 곳은 눈부시게 빛나고 아름답게 꽃을 핀다. 장미와 목련과 국화꽃이 피고 사슴과 학과 거북이가 뛰어 다닌다. 장인의 예술혼과 전통의 가치, 그리고 생활의 미학을 담고 있으니 온 몸이 화끈 달아오른다. 반가사유상 앞에서 나는 오르가즘을 느꼈다. 흙으로 본체를 조각한 후 그 위에 수십 번 옻을 칠한 뒤 본체를 빼내는 탈퇴기법, 그리고 모시와 옻칠로 살을 올린 다음 성형을 반복하는 고단한 노정 끝에 탄생한 반가사유상. 맑고 향기로움이 끼쳐온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눈으로 볼 수 없다는데, 이 작품 앞에 서 있으니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까지 내 마음 속으로 밀려온다. 앙가슴 뛰는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까. 조선시대의 나전과 옻칠기법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작가만의 영역을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놈이다.

누가 말했던가. 살아있는 것은 모든 것이 형태라고. 하나의 예술작품도 형태로 존재하고, 대자연의 숨쉬는 생명들도 각자의 형태를 갖고 있으며, 굽이치며 흐르는 여울의 물살조차 형태의 연속이다. 그리하여 나의 삶 자체도 형태라 할 것이니 아름다움을 향한 우리의 꿈과 도전이 계속되는 것도 나만의 형태와 자존을 갈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두 명장의 주름진 손등에서 경험의 백과사전을, 감동의 스토리텔러를 보았다. 그리고 진정한 아름다움은 형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통해 끝없이 변화하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있음을 감지했다. 정북토성이 그러했듯이 명장의 가구들도 그윽한 향기로 새로운 천년, 아름다운 천년을 살 것이다.

ⓒ 홍대기
해가 뉘엿뉘엿 지는 석양에 행인들이 무심히 토성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밤이 되면 하얗게 쏟아지는 달빛을 밟으며 토성에서 노래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달빛이 이천 년의 역사를 꿈결처럼 비출 것이니, 늙은 소나무 아래 내 마음의 불꽃을 켜고 밤의 축제에 묻히고 싶다. 때로는 하얗게, 때로는 푸르게, 때로는 연둣빛으로, 때로는 붉은 미소로 말이다.

시내에서 정북토성으로 가는 지금의 도로는 마뜩찮다. 바라건대 하천과 논길과 들길을 따라 토성으로 가는 소풍길을 만들고, 이 일대를 사계절 역사와 문화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 청주정신으로 물들면 좋겠다. 물길따라, 들길따라, 골목길따라 세상 사람들의 아픈 그곳을 치유할 수 있는 예쁜 그 무엇이 담기면 좋겠다.

글 변광섭(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에세이스트)

그림 강호생(화가·충북미술협회장)

사진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