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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옥

구연동화 강사·전 수필가

 소나무와 모래를 보니 '아, 내 고향 대청도에 왔구나.'라는 느낌이 든다. 솔 향을 따라 가르마처럼 나 있는 소나무 숲길로 들어섰다. 얼마를 걸었을까. 눈앞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뻗은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고향 뒷산에 100살도 넘었음직한 크고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살고 있는지 몰랐다. 내가 떠나있던 반백년이란 세월이 이렇듯 멋스럽게 잘 키웠구나. 적송의 멋스러움만치나 그 향기의 그윽함이 나의 마음을 빼앗는다. 순간, 바다 쪽에서 해무가 밀려오니 신선이라도 나올 것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소나무에 등을 대고 서보았다. 아래로 꼬불꼬불 길게 누워있는 길 하나가 보인다. 숨 가쁘게 내가 올라온 길이다. 저 길 맨 끝은 어릴 적 내가 송진 껌을 만들던 솔숲에 닿아 있다. 푸른 바다, 파란 하늘, 짙푸른 소나무 숲, 온통 푸른색의 섬 그래서 이름도 대청도(大靑島)인가.
 내 기억 속의 대청도 솔숲엔 송진 껌이 따라다닌다. 그때에는 껌이 매우 귀해 밀 이삭을 비벼 알맹이를 껌이라고 씹었고 송진으로 껌을 만들기도 했다. 송진 껌을 만들려면 먼저 송진을 따 담은 깡통을 불에 올려놓아 바글바글 끓였다. 찬물을 담은 양재기에 헝겊을 얹고 끓는 송진을 부으면 찌꺼기를 걸러낸 송진이 물에서 식는다. 그걸 송진 껌이라고 했다.
 어느 소풍날이었다. 소풍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누가 그러자고 말한 것도 아닌데 산길로 접어들었다. "야 여기 송진 있다." 우리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송진을 따 모았다. 의외로 수확이 많아지자 그 산속에서 작업이 시작됐다. 알루미늄 도시락에다 송진을 담고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웠다. 불꽃이 잘 일지 않아 입으로 후후 부니 매운 연기가 올라와 저절로 나오는 눈물 콧물을 닦아가며 열중했다.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날은 점점 어두워 가는 데 드디어 끓기 시작하자 경자는 도시락을 들고 물을 뜨러 가고 나와 동수는 끓는 송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불씨가 옆으로 조금씩 번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물 뜨러 갔던 경자가 저만치서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불길이 연기와 함께 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는데 동수는 옷을 벗어 그걸로 불을 막 때린다. 나는 나무꾼이 흘리고 간 청솔가지를 주워들고 죽을힘을 다해 불을 따라다니며 때렸다.
 날이 저물었는데 소풍 간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자 마중 나오신 어른들이 이 광경을 보고 뛰어들어 불을 껐다. 얼굴은 검댕으로 그림이 그려졌고 옷은 그을려서 탄내가 진동했다. 거기에 껌을 만들던 맨 도시락은 하나씩 들었으니 그 모습을 보면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어른들도 웃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사립문 안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눈물이 줄줄 나도록 어머니한테 꾸중 들었다. 방으로 불려 들어가서는 아버지께도 꾸중을 들었다.
 그날 밤 나는 요에다 커다란 지도를 그렸다. 어머니는 어제 너무 많이 혼내서 그랬나 싶어서인지 별로 꾸중은 안 하셨지만 "그 봐라. 불장난하면 오줌을 싼단다."고 하셨다.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렇게 좋아하던 껌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됐다.
 멀고도 먼 옛날이야기이다. 그때는 그 일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싫었었다. 한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때 진한 추억이 알싸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은총은 망각이라고 하더니 세월이 지나면 괴로웠던 순간도 그리워지는 건 망각의 여울을 지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나는 텅 빈 소나무 숲길을 걸으며 비어서 가득 찬 충만함에 마냥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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