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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옥

구연동화 강사·전 수필가

 여린 바람에도 흔들리는 코스모스 꽃길로 가을이 온다. 가을과 함께 추석 명절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추석 하면, 구부정한 등에 망태를 메고 차부(車部)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던 시아버님의 정다운 얼굴이 떠오른다.

 명절이 오면, 우리 아버님의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식들을 마중하시는 거였다. 아침부터 비어 있던 방에 군불을 넉넉히 때서 아랫목 윗목 없이 방바닥을 미리 후끈하게 달구어 놓으시고 저녁때나 되어야 돌아올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오정이 지나면서부터 차부 근처에서 서성이셨다. 긴 기다림 끝에 자식들이 차에서 내리면, 달려와 안기는 손자 손녀들에게 함박웃음을 날리시며 "배고프지?" "가방 이리 내라! 뭐가 이렇게 무거우냐?" 이렇듯 푸근한 말씀으로 자식들을 껴안듯 맞아 주셨다.

 그 모습은 망태기에다 사람의 마음을 끌어 담는 넉넉함이었다. 아버님의 마중을 받으면서 흩어져 살던 자식들이 모두 돌아오면, 고향 집은 금세 시끌시끌해졌다. 마루 밑에 누워 있던 누렁이가 달려와 꼬리 치며 반겨 주었고 뒤란 우물에서는 달고 시원한 생수를 퍼 올리는 소리가 소란스러웠다. 댓돌에 즐비하게 벗어 놓은 신발이 엎칠락 뒤칠락 하고 "하하하, 호호호, 까르르" 아들, 손자, 며느리의 웃음소리는 아름다운 하모니가 되어 담을 넘었다. 어머님의 손맛이 배어 있는 구수한 밥상이 들어오면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찌개 끓는 소리가 더없이 정겨웠다. 밤이 깊도록 명절 음식을 장만하면서 그간 하지 못했던 속말을 오순도순 풀어놓는 자식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절로 기분이 좋아지시던 아버님! 주고받는 고단한 사연을 덮어주듯 어둠은 조용히 고향 집을 덮어 주었다.

 유난히 휘늘어진 코스모스가 눈에 띈다. 그 사이로 어머니의 행주치마 자락이 보이는 듯하다. 가슴 밑바닥에서 그리움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제법 먼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돌아오는 길에는 삘기도 뽑고 찔레순도 꺾으며 낭창거리다 보면 늦기가 일쑤였다. 당번이 되어 청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더 늦어졌다.

 늦어지는 날은 들판으로 난 마차 길로 다녔는데 그날따라 조금이라도 빨리 갈 요량으로 질러가는 숲길을 택했다. 사방에는 이미 어둠이 깔리고 나와 친구의 가랑잎 밟는 소리만이 적막을 깨뜨렸다. 낮은 풀벌레 소리에도 화들짝 놀랐다. 하나둘 빛을 드러내는 별들도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온몸에는 땀이 흥건히 고였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가자니 더는 다리가 떨어지질 않는다. 울 수도 없는 절박한 순간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극도로 긴장하여 떨고 섰는데 '거기 누구냐? 영옥이냐?' 귀에 익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만 "엄마" 하며 주저앉아 버렸다. 어머니의 커다란 품이 참으로 포근하다고 느끼며 가물가물 정신을 잃었었다. 그날 이후론 저녁 밥상에 아이가 한둘 빈 날이면, 어머니는 설거지를 미루시고 누군가를 데리고 마중을 나가셨다. "뭐 하러 나왔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화들짝 반가웠던 시절이다. 우산을 받쳐 들고 마중을 나갔고, 흰 눈이 쌓인 길은 물론 어깨너머로 별똥 떨어지는 것을 보며 가족을 기다렸다.

 마중하는 일은 챙겨주는 마음이요, 너의 애씀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현이다. 또한 마중은 끊을 수 없는 끈끈한 정이요. 화수분 같은 사랑의 우러나옴이다.

 이제 코스모스가 지고 나면 겨울이 오겠지. 그렇게 해를 거듭하며 휘돌고 곱돌아 오늘 여기 섰다. 나도 시아버님처럼, 내 어머니처럼, 한 그루 나무 되어 품에서 빠져나간 자식들을 묵묵히 기다린다. 때마다 시(時)마다 그리움은 깊어가고 세월은 말없이 잘도 흐른다. 오늘도 내일도 된장 간장 묵어가듯 세월을 익히고 삭히며 그리움을 쌓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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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