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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옥

구연동화 강사·전 수필가

은빛 머리카락 날리며 나들잇길에 올랐다. 알록달록 고운 옷자락 위에 이름표를 걸고 삼삼오오 화기애애한 모습이 따뜻하고 평화롭다. 걸음걸이는 민달팽이를 닮았지만, 마음은 비행기보다 더 빠르게 달린다. 구부정한 어깨를 한껏 펴고 달곰하고 짭조름한 제주 공기를 들이마시는 얼굴마다 복사꽃 웃음이 가득하다.

꽃을 보듯 아기를 보듯 정다운 시선으로 보아주는 돕는 이들의 손길이 살뜰하다. 작은 소리, 지나가는 말에도 관심과 사랑으로 귀 기울여 준다. 훈장처럼 패인 주름진 얼굴에 카메라 초점을 맞춘다. 더없이 존경스럽고 중요한 인물을 대하듯 공손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렌즈를 누른다. 처음에는 민망하고 쑥스러워 몸을 숨겼지만, 나중에는 가는 곳마다 포즈를 잡고 카메라맨이 오기를 기다렸다.

제주는 화산의 섬이요 자연의 섬이다. 태고의 신비와 아름다움이 가득한 섬 제주는 하늘과 바다와 땅의 합작품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나의 선조가 솟아올랐다는 삼성혈 앞에 서게 되었다. 이렇듯 신비로운 곳에 나의 뿌리가 있었구나! 여기에서 태어난 고을나가 이 땅에 왕이 되었다고 하니 그의 후예인 나는 당연히 공주가 아니던가. 자부심이 솟는다. 그렇지 않아도 공주처럼 사랑과 보살핌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데…. 행복지수가 팍팍 올라간다. 그동안 살면서 겪어온 수고와 고생을 다 보상받는 느낌이다. 임금님 수라상에 버금가는 맛깔스러운 밥상에 호사스러운 잠자리가 거북스럽고 송구하지만,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한다. 정령 주연의 자리에 오른 느낌이다.

나이가 들면서는 내가 주인공인 내 인생에서마저도 주연이 되는 것이 꺼리어지는 초라한 모습에 주눅이 들곤 했다. 귀 기울여 주는 이 없는 이야기를 공허하게 내뱉는 느낌이 들어 슬며시 입을 다물어 버린 게 몇몇 번이든가. 못다 피운 꿈이 사그라져 가는 데도 속절없이 바라만 보아야 하는 무력함에 시린 가슴만 쓸어내리곤 했다. 새벽 강가를 홀로 나는 새처럼, 외로움에 몸을 떨면서도 도도한 몸짓을 해보는 허세를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허접한 주변 인물이 아니라 당당하게 주연으로 섰다.

알고 보면 태어난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주연의 대접을 받아 마땅한 게 우리 인간이다. 난자 1개, 정자 60억 개, 60억의 경쟁률을 뚫고 태어난 게 당신이요 나다. 상상을 초월하는 단위의 우주적 확률을 충족한 결과물이다. 태어날 때, 결혼할 때는 물론 일의 성과나 행사에서 주인공이 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그러나 한번 주인공이 되었다고 끝까지 주연일 수는 없는 일이다. 배우들이 그렇듯 인생 역시 무대에 올랐으면 언젠가는 내려와야 한다. 주연에서 조연으로 바뀌는 과정도 피할 수 없다. 끝까지 멋진 인생을 살고 싶다면 아우르는 지혜가 필요하다. 역할 변화에 잘 적응해서 주연과 조연의 자리를 모두 잘 소화해내는 인생임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바닷물에는 보통 3% 정도의 염분이 있다 한다. 3이라는 염분이 소금이 되려면, 97의 물이 증발해 줄 때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듯 97의 희생을 딛고 만들어진 귀한 소금이지만, 기꺼이 자신을 녹여 맛깔스러운 음식으로 거듭나지 않던가.

은빛 나들이란 검은 머리가 은빛이 되도록 수고한 어른들을 치하하는 의미로 좋은 교회에서 마련하는 효도 여행이다. 이번 제주도 은빛 나들이를 통하여 주연의 자리를 다시금 경험하면서 그동안 고갈되었던 에너지가 충전 된 느낌이다. 이제, 스포트라이트가 나를 비껴간다고 하여도 담담해지는 편안한 마음을 소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어진 자리에서 드러내지 않고 열정을 녹여내며 주위를 조화롭게 어우르는 소금과 같은 역할이 나에게 걸맞은 아름다움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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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우 충북도체육회장, "재정 자율화 최우선 과제"

[충북일보] 윤현우 충북도체육회장은 "도체육회의 자립을 위해서는 재정자율화가 최우선 과제"라고 밝혔다. 윤 회장은 9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3년 간 민선 초대 도체육회장을 지내며 느낀 가장 시급한 일로 '재정자율화'를 꼽았다. "지난 2019년 민선 체육회장시대가 열렸음에도 그동안에는 각 사업마다 충북지사나 충북도에 예산 배정을 사정해야하는 상황이 이어져왔다"는 것이 윤 회장은 설명이다. 윤 회장이 '재정자율화'를 주창하는 이유는 충북지역 각 경기선수단의 경기력 하락을 우려해서다. 도체육회가 자체적으로 중장기 사업을 계획하고 예산을 집행할 수 없다보니 단순 행사성 예산만 도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선수단을 새로 창단한다거나 유망선수 육성을 위한 인프라 마련 등은 요원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달 울산에서 열린 103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충북은 종합순위 6위를 목표로 했지만 대구에게 자리를 내주며 7위에 그쳤다. 이같은 배경에는 체육회의 예산차이와 선수풀의 부족 등이 주요했다는 것이 윤 회장의 시각이다. 현재 충북도체육회에 한 해에 지원되는 예산은 110억 원으로, 올해 초 기준 전국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