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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옥

구연동화 강사·전 수필가

『헨리에타는 아기 다람쥐예요. 엄마는 봄에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헨리에타를 낳느라 너무 힘이 들어서 그랬대요. 숲속엔 가을이 왔어요. 숲속 동물들은 열매들을 모으느라 바빴어요. '헨리에타야, 너도 열매를 모아 놓아야지. 겨울이 오면 먹을거리가 하나도 남지 않게 돼.' 하고 이웃들이 일러주었어요. 헨리에타는 땅을 파서 곳간을 만들고 열심히 열매들은 모아 곳간을 채웠지요. 그러나 비가 오자 곳간에 물이 차서 다 떠내려갔어요. 다시 곳간을 채웠지만, 이번에는 벌레들이 몽땅 먹어치웠지요. 추운 날씨에 또다시 열매를 모으러 다니는 헨리에타를 숲속 친구들이 도와주었어요. 곳간은 가득 찼어요. 헨리에타는 매우 기뻐서 친구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하네요. 친구들은 맛있게 먹고 오래 놀다가 돌아갔어요. 그런데 어쩌면 좋아요! 잔치하느라 열매를 남김없이 다 먹어버렸네요. 창밖엔 하얗게 눈이 덮여 숲속 어디에도 열매는 보이지 않았지요. 어떻게 하지· 헨리에타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네요. 그러나 한껏 배가 부르니 몰려오는 잠은 어쩔 수 없나 봐요. 깊은 잠에 빠졌지 뭐예요. 길고도 긴 겨울잠에 들어간 거죠. 그다음은 어떻게 됐느냐고요· 깨어나 창문을 여니 숲속엔 벌써 봄이 와 있었답니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어른들의 상식으로는 곳간에 채워진 열매를 잘 지키면서 겨우내 꺼내 먹으면 되었다. 한데 겨울 양식을 통틀어 잔치를 벌이다니! 이는 계산 없고 욕심 없는 동심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 동심의 세계에서는 현실 공간을 비유 공간으로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동화의 가장 큰 매력은 이야기 속에 판타지가 숨어있다는 데에 있다. 실컷 자고 나서 창문을 열자 봄이라는 세상이 펼쳐있었다. 여기서 창문이라는 매체는 판타지의 세계를 끌어내는 통로였다. 내가 사는 현실이라는 이 공간과 간절한 바람의 세계인 판타지, 어느 쪽이 더 진실한 세계일까. 시·공을 초월한 3차원의 꿈을 꾸게 하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가게 하는 판타지야말로 더 진솔하고 가치 있는 세계라고 생각하고 싶다. 이는 마음속에 옹색한 틀을 깨고 형이상학적인 보물창고를 지니게도 해주니 말이다.

내 유년은 가난했지만, 동화책이 옆에 있어서 언제나 부자였고 행복했다. 처음으로 선물 받은 안데르센 동화집은 내 보물 1호였다. 항상 들고 다녔고 잠잘 때도 머릿밑에 놓고 잤다. 상상의 나래를 펴고 훨훨 날게 하였고 곱고 행복한 꿈을 꾸게 했다.

저문 나이에 나는 아기다람쥐의 순수함을 마주하며 잃어버린 본질을 깨우는 심각한 질문을 해본다. 과연 나도 녀석처럼 단순해지고 가벼워질 수 있을까· 만약에 녀석이 나처럼 전전긍긍하며 끊임없이 곳간을 지켰다면 어찌 됐을까. 이미 오래전에 내게서 멀어진 순수를 불러내고 싶다.

아기다람쥐는 물이 차고 벌레가 먹어 곳간의 열매가 모두 사라지는 두 번의 통과의례를 거치는 동안에 삶의 방식이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없어질 열매인데 고마운 친구들에게 보답도 할 겸 즐거운 잔치를 벌이는 일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일이라고.'

무수히 거쳐 온 내 삶의 통과의례, 뼈아픈 상실이 이제 제구실을 하기를 기대해 본다. 이쯤에서 아기다람쥐의 방식에 눈을 뜨는 지혜를 배우고 싶다. 더러는 얻기도 하고, 더러는 나누기도 하며 오늘 이 순간을 누리고 싶다. 졸음이 밀려오면 떨쳐버리려고 안간힘을 쓰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잠을 자두는 거다.

잠에서 깨어 창을 열면 헨리에타에게 보여주었던 상큼한 새봄이 내 삶으로도 펼쳐지지 않을까. 흰 눈을 덮어쓴 채 밭고랑에 숨어서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보리 싹처럼 봄은 이미 내 마음속에서 파랗게 자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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