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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6.06.16 15:17:41
  • 최종수정2016.06.30 14:39:10

김규원

충북학연구소장

청주시청 노인 관련 부서의 어떤 사람은 관련 단체에 반말, 막말로 유명하다고 한다. 2000년 5월쯤, 민주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던 세르비아에는 오트포르 즉 저항이라는 구호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밀로세비치 독재정권이 위기에 빠졌으나 북쪽의 작은 도시 수보티차는 민주화운동의 영향이 전무했단다. 그 이유는 이반이라는 이름의 폭력 경찰 때문이었다고 한다.

작은 동네이다 보니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에 대한 내막을 속속들이 아는 상황에다가 2m가 넘는 무지막지한 덩치, 야구 글로브만한 주먹, 무표정 등등에 사람들이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반의 부인이 다니는 미용실 유리창에 이반의 사진과 나쁜 놈이라는 글귀가 적힌 포스터가 붙었다고 한다. 이른바 망신주기였다고 한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상상한대로 민주화의 확산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렇듯 공포경찰 이반의 갑은 부인이었던 것이다. 왜 이반이 부인에게 만큼은 겁을 먹고 순한 양 혹은 을이 되었을지는 상상에 맞기겠다. 예전 천하장사 출신 씨름선수의 사생활 얘기만큼이나 재미있으니 후속을 기약하고, 아무튼 시청 공무원의 남편도 뒷통수가 따가울 듯 싶다.

조선시대 수도권 거주 양반(경반)들 중 요즘 공무원 직급으로 중앙정부 국장급(정삼품 홍문관 부제학)인 이맹현의 경우 1494년에 작성된 그의 분재기에는 전국 팔도 70군현에 거주하는 752명, 무려 752명이나 노비가 있었다고 한다. 750명의 생사여탈권을 한사람이 쥐고 있는 사회라니 상상하기도 어렵다. 아무튼 조선중기인 16세기에는 전인구의 30~50%가 노비였다고 한다. 일본 나라 정창원에 소장된 자료에 따르면 9세기 통일신라 당시 청주 인근의 네 군데 마을 인구 중 대략 10% 정도가 노비였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대략 500여년의 시간의 흐른 뒤 노비의 비율이 증가한 것일까. 아마도 조선 초기 對奴婢 정책과 변란에서 패자의 가족은 노비가 되는 탓이 아니었을까. 단군왕검의 자손임을 강조하는 즉 한민족끼리 노비를 삼는 것은 그 노비가 서양의 노예와는 다르게 자유롭게 행동을 했다고 해도 이해가 안된다고도 어떤 이는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양반 등등 신분제 국가에서 전 국민이 하나로 뭉치기는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우리 자신이 양반을 자처한다면 노비를 상대적으로 떠올려야하고 따라서 이렇게 본다면 접촉사고가 날 때 상대방 운전자에 대한 첫마디가 '눈을 어디 두고 운전하나 이 양반아'같은 문장에서 양반은 빼야할 듯하다. 양반들이 지녔던 품성이나 행동거지는 물론 지향적, 목적적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관련 전문가들이 연구를 하고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른바 요즘 자주 대하는 갑(甲)질이라는 것이 단순히 오늘날 갑작스럽게 나타난 현상은 아니라는 점에서 양반문화에서 부정적인, 지배하고 통제하고 불신하고 불통하는 모습은 제거되어야 하지 않을까?

식당 주인이 손님에 대해서 갑일 수 있으며(혹은 반대거나) 어느 비오는 날, 세상 탐험을 나섰다가 말라 비틀어져 버린 지렁이에 대해서는 개미들이 갑이다. 이렇듯이 갑 또한 누군가에게는 혹은 어떤 상황에서는 을이 될 수 있는 것이 역동적인 생태계가 아니랴. 갑과 을을 나누는 세상에 대한 섭섭함, 분노는 잠시 내려놓고 생각해보자.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비였던, 특히도 같은 민족, 국민을 노비로 삼았던 나라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선적으로 갑질STOP을 위한 문화체질을 바꾸는 것이 아닐까. 나이 어리다고, 여성이라고, 부하나 후배라고, 산하 단체라고 반말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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