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옥천]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 이성산성이 5세기 신라시대 토성(土城)인 것으로 확인됐다.군에 따르면 문화재청으로부터 지난 9월 허가받아 (재)국강고고학연구소(소장 차재동)와 10월부터 이성산성을 발굴 중에 있다.이 조사는 훼손된 성벽의 일부구간에 대해 성곽의 축조방법과 시기를 파악해 정비계획을 세우기 위해 실시하고 있다.조사 구간은 전체 성곽에서 서벽에 해당되는 약 25m길이를 대상으로 했다.발굴팀(팀장 조인규)이 조사한 결과 이 산성은 신라시대의 판축기법으로 세운 토성이며, 둘레 1천140m, 면적 5만9천160㎡의 규모로 추정하며, 통일신라 이전 신라의 한강 진출과정 등 역사적 상황을 밝혀줄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특히 신라시대의 토성은 주로 경주 일원의 조사가 대부분이었으나 충청도 지역에서의 발굴 사례는 드물어 지방의 토성 축조방법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이 성에서는 선문(線文)이 새겨진 기와조각과, 고배대각(접시에 굽이 있는 식기(술잔)의 허리) 조각 등의 유물이 출토됐다.유물 연대 등으로 추정해 본 결과 보은의 삼년산성(石城. 신라 자비왕13년(470년))보다 이전의 성으로 조사됐다.또한, 성벽은 중심 토루(흙으
[충북일보] - 증도가자의 조작 판정에 대한 의견은?△ 남권희 교수가 '직지'보다 100년 이상 앞선 '증도가'를 인쇄한 활자 즉 '증도가자'라는 활자를 공개할 때 식견있는 사람들 중에는 '국제적 망신이다'라는 안타까움을 표명한 사람도 있었다. 이번 국과수가 발표한 증도가자가 진짜가 아니라는 증거는 '사필귀정'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적 검증으로 증도가자의 조작을 밝혀낸 점은 그간 증도가자 논란으로 인해 실추된 학계의 명예와 국가의 신뢰를 회복하게 된 것을 매우 다행으로 생각한다.- 처음부터 증도가자가 가짜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언제인가?△ 2010년 9월 2일 남 교수가 '증도가자'를 공개해 전국 주요 언론매체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나는 '역시 권위 있는 학자다운 대발견'이라 생각했다. 강의를 마치고 신문에 게재된 활자의 사진을 대조해보았다. 남 교수께서 '증도가'라는 책을 인쇄한 활자체와 증도가자라 주장하는 활자의 서체가 같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유심히 살펴본 결과 첫눈에 같지 않다는 판단을 했다. 그의 논리도 부당했다. 계속 대조해보았지만 분명 다른 글자였다. 그가 서체상으로 동일한 활자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나도 서체 서법적으로 같은
[충북일보=청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이 청주고인쇄박물관이 소장하던 증도가자(證道歌字)의 위조 가능성을 밝혀내면서 증도가자의 진위 논란이 재점화됐다.5년 전인 2010년 9월 김종춘 다보성고미술 대표와 남권희 경북대학교 교수가 다보성고미술이 소장한 활자 12개가 증도가자가 실물이라고 주장하면서 국내 학계가 발칵 뒤집혔었다.당시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인 증도가자의 등장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자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이었던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직지)의 위상도 크게 흔들렸다.증도가자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받으면 증도가자와 직지가 상호 보완적인 효과를 낼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지만 직지 상권은 전하지 않고 하권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어 직지가 간행됐던 장소인 흥덕사지만으로는 청주시가 직지의 위상을 지켜내기에는 힘들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고인쇄박물관이 소장하던 금속활자가 증도가자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면서 다보성고미술이 소장하는 증도가자도 가짜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문화재청은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 금속활자 7점은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신청 대상이 아니다"라며 "국과수의 조사결과를 지정 신청된 모든 금속활자로 확대해 해
[충북일보=청주] 국내 유일의 고인쇄전문박물관인 청주 고인쇄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고려시대 금속활자인 '증도가자(證道歌字)'가 인위적으로 조작된 '가짜'로 밝혀져 파문이 일고 있다. 증도가자는 고려 고종 26년(1239) 목판본으로 복각한 불교서적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보물 758호, 이하 증도가)'를 찍을 때 사용한 금속활자로, 현존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1377·直指心體要節·이하 직지)'보다 138년 이상 앞서고 있다.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은 지난 4월부터 고인쇄박물관이 소장하던 증도가자 7개와 국립중앙박물관이 보유하고 있는 1개를 검증한 결과 고인쇄박물관의 활자는 위조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국과수는 검증 결과를 담은 논문 '금속활자의 법과학적 분석방법 고찰'을 31일 충남 부여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열리는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국과수는 이번 조사에서 활자에 대한 3차원(3D) 금속 컴퓨터 단층촬영(CT) 결과 표면에 금속을 다시 덧씌운 흔적이 발견했다.마이크로 X선 형광분석 결과 활자의 표면과 내부의 성분 함량이 달랐으며 이는 주물로 만든 고려시대의 활자 제조법과 다르다는 결론
[충북일보] 세계최고 금속활자본 '직지' 보다 오래된 것이라고 주장해온 증도가자가 가짜로 밝혀졌다.지난 2010년 나타난 증도가자는 '직지'보다 138년 이상 앞섰다고 주장돼왔다.5년여간 이어진 진위 논란에 최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증도가자 등 고려시대 활자 7개에 대해 3차원 컴퓨터단층촬영을 실시한 결과 고려시대 전통적 주물 기법으로 만든 활자가 아니라 위조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왔다.
[충북일보] 일본 정창원에 보관돼 있는 '제2 신라문서'는 과연 8세기 무렵에 지금의 충북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에서 작성된 것일까. 일제 강점기인 지난 1933년 일본 황실의 유물 보관창고인 정창원에서 8세기 무렵의 '제1 신라문서'(일명 신라장적)가 발견돼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특히 이 문서는 작성 장소가 청주 일대 어디인 것으로 추정돼 지역적인 관심을 증폭시킨 바 있다. 같은 해 정창원 남쪽 창고에서 유기 그릇의 일종인 '좌파리가반'(佐波理加盤)을 정리하던 중 포개진 그릇 사이에서 꼬깃꼬깃 접혀진 통일신라시대 공문서 2장이 발견되었고, '제2 신라문서'로 명명됐다. 그러나 제2 신라문서는 분량이 2장으로 적고 해독이 안 되는 문자로도 기록돼 있어, 소수의 구결 연구가를 제외하면 역사 전공자들도 그 존재를 아직 잘 모르고 있다. 현재까지 제2 신라문서 앞면에는 지역 진상물인 공물(貢物), 뒷면에는 관리 급여인 녹봉(祿俸)에 대한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대략적으로 파악되고 있다. 통일신라 때의 이같은 공문서가 바다건너 일본에 전래된 경위는 열도로 운송할 좌파리가반을 포장하는 과정에서 제2 신라문서가 충격 완화제로 사용됐기 때문이었다. 현재 국내 학
헤이안 수립 이전의 교토를 지배한 호족은 하타(秦)씨였다. 하타씨 세력의 강대함은 교토시 중경구에 위치한 헤이안창생관(平安京創生館)에 그려져 있는 하치오카데라(蜂岡寺) 조감도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하치오카데라는 헤이안 설립 이전의 사찰로 하타씨 가문의 우지데라(氏寺)로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고찰이다. 헤이안창생관에 그려져 있는 하치오카데라의 조감도를 보면, 흡사 나라에 있는 호류지(法隆寺)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장대하다. 이 하치오카데라를 후에 장소를 조금 바꿔 건설한 것이 지금의 교류지(廣隆寺)이다. 이 거대한 사찰을 건립한 하타노 가와카쓰(秦河勝)를 비롯한 하타씨 일족들은 아라시야마(嵐山)일대의 가쓰라가와(桂川)에서 물을 끌어들여 하타씨의 대종가의 본거지인 우즈마사(太秦) 일대의 수전을 개발하였다. 신라에서 온 하타씨들은 우즈마사 일대에 논을 만들기 위해 가쓰라가와 상류에 제방을 쌓기 시작하였다. 하타씨에게 있어서 가쓰라가와 상류에 제방을 쌓고 댐을 만드는 기술은 고국에서 익히 해보았던 토목공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고대 교토에 살았던 일본들에게 있어서는 한 번도 경험하거나 본적도 없었던 경이적인 기술이었다. 동아시아에서 강의 물줄기를 변경하는 대규
[충북일보=제천] 정연철 호담정책연구소 대표는 26일 제천시청 기자실에서 제천 10경중 제1경인 의림지의 보존과 활용을 위한 정책을 발표했다. 발표에 앞서 정 대표는 의림지 관련 정책 건의서를 제천시청에 제출했다.이번 건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저수지인 의림지에 대해 아직까지 그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규명이 이뤄지지 못한 현실에 대한 반성과 제천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중요한 자산인 의림지를 후대에까지 원형 그대로 물려주기를 바라는 제천시민들의 여망을 담은 것이다. 정 대표는 의림지가 약 2천년 전에 처음으로 축조된 저수지임에도 지금까지 전천후 관개수리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에 의림지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고 활용하기 위한 노력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정 대표가 발표한 의림지의 보존과 활용을 위한 정책 건의의 내용은 첫째로 의림지의 명확한 정체성 규명과 확립을 위한 활발한 연구·학술 활동이다. 둘째 의림지의 수리관개 기능을 지속시켜줄 것과 셋째, 의림지 지역은 농경문화 발상지로서의 연계사업을 추진할 것을, 넷째로는 의림지 주변 시설의 정비다.그는 의림지가 제천의 상징이지만 우리나라 농경문화의 대표적인 수리시설인 만큼 그 본래
[충북일보] 우덕순(禹德淳, 1876~1950)은 안중근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에 참여한 충북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국내에서 을사늑약 반대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이후에도 교육 및 의병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 충북 제천이 낳은 독립운동가 우덕순은 충북 제천 황석리에서 아버지 우시영(禹始映)과 어머니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단양이고, 독립운동 시기 우연준(禹連俊), 우홍(禹鴻) 등을 이명으로 사용하였다. 꼭 106년 전 오늘 안중근의사는 하얼빈역(哈爾濱驛)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였다. 이 때 하얼빈역 바로 전 역인 채가구역(蔡家溝驛)에도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대기한 독립운동가가 있었으니, 그가 우덕순이다. 그런데 안중근의 동지인 우덕순이 충북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오히려 그가 서울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서울 국립현충원에 있는 그의 묘비에도 서울 출신이라고 적혀있어서, 이러한 오해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이러한 오해의 시작은 우덕순이 하얼빈 의거 이후 첫 조사를 받을 때 출생지를 서울이라고 답변한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첫 조사에 대한 진술은 안중근, 우덕순 모두 거
[충북일보=청주] 청주 명암동 출토 '단산오옥명 고려 먹(丹山烏玉銘 高麗 墨)'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880호로 지정됐다.문방사우의 하나로 우리나라 기록문화 발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먹이 국가지정문화재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문화재청은 '단산오옥명 고려 먹(丹山烏玉銘 高麗 墨)'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려 먹으로 주요 먹 생산지와 고려시대 먹 기술 및 발전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보물 지정 이유를 밝혔다.이 먹은 지난 1998년 청주시 동부우회도로 건설공사 중 명암동 1지구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목관묘에서 출토됐다. 길이는 11.2㎝에 너비 4㎝, 두께는 0.9㎝로 먹의 머리를 둥글린 비석 형태로 돼 있다.앞면에는 먹의 이름을 써넣은 규각형의 공간이 있고 가장자리에는 물결무늬(파상문)가 중첩돼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용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우아한 곡선으로 새긴 비룡문(飛龍文)이 있다.첫 발견 당시 무덤 주인의 머리맡 부근에 있던 철제가위 위에 반으로 조각난 채 놓여 있었으며, 단산오(丹山烏)라는 글자가 세로로 쓰인 면이 위쪽을 향해 있었다.'오'(烏)자 아래는 '옥'(玉)자로 추정되는 '일'(一)자만 남아 있었는데, 이는 '옥(玉
[충북일보] 구한말 조국의 어려운 시절인 1906년 4월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한 보은 회인지역 주민들이 뜻을 모아 보은군에서 최초로 설립한 사립 진명학교를 개교해 현재까지 1만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보은 회인초등학교(교장 조영애). 지난 역사가 말해주듯 시련과 고통을 모두 극복하고 한 세기를 굽이쳐 돌아온 회인초등학교의 역사는 보은인의 긍지와 자존이 서린 향토사인 동시에 1906년4월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성찰이며 또 다른 100년을 향한 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 회인초의 역사회인초등학교의 전신인 진명학교는 우정순씨가 설립했고 초대교장으로는 정태로씨가 임명됐다. 회인초의 초대 졸업자는 우종준씨 부부로 학교역사에 남아있다. 당시 이들 졸업자의 사진은 회인초 역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단기 4239년(1906년) 4월1일 김두석 등 보은지역 유지들이 발기해 회인군 읍내면 마근동(현 중앙1리)에 사립진명학교를 설립하고 개교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2일 학교유지비가 부족하면서 폐교했다가 1909년 5월 회인군수였던 권병필씨가 주도하고 우정순씨 등 지역 유지들이 협력해 진명학교를 교동 명륜당에 재 개설해 개교했다. 1909년 11월 진명학교는 읍내리 평창면
[충북일보] 충북도가 '치매·당뇨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한 '14회 오송국제바이오심포지엄'을 22일 오송C&V센터 2층 대강당에서 열렀다.23일까지 이틀간 열리는 이번 심포지엄에는 미국, 호주, 중국, 일본 등 국내외 관련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했다.첫날인 22일에는 22일에는 국내외 당뇨병 예방관리 현황과 기술기반을 비롯해 새로운 당뇨 접근, 당뇨병 신약개발 현황 등이 3개 세션으로 나눠 소개됐다. 당뇨병 세계적 권위자인 메릴랜드 의과대학 마이클 콴(Michael J. Quon) 교수와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셔먼(Arthur S. Sherman) 박사가 주요연사로 참여했고 LG생명과학, 유한양행 등 제약회사 전문가가 참여해 신약개발 현황을 발표했다.23일에는 한·중·일 치매관리체계와 알츠하이머병, 치매예방에 대한 연구 등이 2개 세션으로 나눠 열린다. 하이핑 펭(Haiping Peng) 교수, 카이렌스(Cairns) 박사 등이 참여해 치매관리체계와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발표할 예정이다.도의 한 관계자는 "이번 심포지엄은 당뇨와 치매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교류하고 전략적 협력방안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최범규기자 calguksu@
[충북일보=세종] 세종시가 최근 LH(토지주택공사)에서 인수한 '초려역사공원(어진동 새만금개발청 옆)'이 어린이 인성교육 및 시민 교양교육 공간으로 활용된다.시는 22일 "앞으로 공원에서 고전학 강좌·인문지리학교 등과 함께 어린이 인성교육을 위한 서당·서예교실을 연중, 충효교실·선비체험 등의 프로그램은 방학 기간 중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통혼례나 칠순잔치 등 공원 조성 목적에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시민들에게 일부 시설을 대관하는 방안도 검토키로 했다.시와 국립민속박물관이 공동 주관하는 '2016년 세종민속문화의 해' 프로그램 중 일부도 이곳에서 진행할 계획이다. 이에 앞서 오는 26일에는 공원에서 박재희 교수(포스코 전략대학 석좌교수)를 초청, '고전에서 배우는 인문학적 삶'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열 예정이다. 이어 11월 3일부터 12월 23일까지 매주 화·수요일(총 16회) 고전학 강좌를 연다. 초려역사공원은 세종호수공원에서도 1.5km 떨어진 곳에 위치,앞으로 세종시를 찾는 외지 관광객들에게도 인기를 끌 전망이다.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1607~1684) : 조선 효종 때 기호사림을 대표하는 개혁적 경세 사상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충북일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의 가장 가까운 혈육인 가네코 타카시(金子敬·1944년생) 씨가 한국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 도움으로 지난 16일 세종시 부강면을 찾았다.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여인으로 잘 알려진 가네코 후미코는 1912~1919년까지 7년 동안 부강에 거주한 바 있다. 그녀는 1919년 일본으로 귀국한 후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가 됐고, 여기에는 부강에서의 조선인 탄압과 3.1운동 목격 등도 큰 영향을 미쳤다. 타카시 씨는 후미코의 외가쪽 친조카로 현재 야마나시현 소구마치에서 후미코의 생가와 시비를 관리하고 있다. 타카시 씨는 먼저 세종시 부강초등학교(교장 민방식)를 방문해 곽창록 씨로부터 후미코가 다녔던 부강심상학교와 그녀의 학창시절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어 후미코의 자전 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원제: 何が私をかうさせたか)에 등장하는 부강파출소(당시 일본 헌병대 자리)를 방문, 일대를 둘러봤다. 후미코의 수기에는 조선인이 매질을 당하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서술돼 있다. '그중에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헌병대 건물이었다. 카키색 제복을 입은 헌병이 마당으로 조선인을 끌어내 옷을 벗기고 알몸이 된
이광(李光, 1879~1966)은 충북 청주 출신으로 망국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외교관련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3.1운동 이후에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20년대에는 이회영과 교류하면서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폭탄의거를 지원하기도 했으며, 광복 후에는 중국에서 한교선무단의 단장으로 교민보호에 앞장섰다. 1948년 귀국하여 충북도지사, 감찰위원장, 체신부장관을 역임했다. ◇신민회 동지들과 망명길에 오르다 이광의 호는 성암(星巖), 본관은 전주로 1879년 9월 30일에 충북 청주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범형(範珩), 어머니는 경주 김씨이다. 이광은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본격 나섰다. 이 시기 대한제국은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다. 1905년 11월 17일에는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되어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갔고, 설상가상으로 2년 뒤인 1907년에는 헤이그특사를 계기로 광무황제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하는 동시에 군대마저 해산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광이 가입한 신민회는 양기탁(梁起鐸), 안창호(安昌浩)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든 독립운동단체였다. 1909년 양기탁
[충북일보] 충북대 역사학과 교수들은 16일 "역사를 정쟁의 도구로 삼으려는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한다"고 주장했다.이들은 이날 성명을 내고 "정부는 역사가들에게 자신들이 제시한 기준에 맞춰 역사를 서술하고 이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게 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며 "이는 역사를 현재의 정치를 대변하는 도구로 사용하겠다는 의도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이어 "어떤 정부든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역사교과서의 서술을 좌우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이들은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다양한 가치를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후세에게 획일적으로 재단된 역사적 가치 기준을 물려줄 수는 없다"며 "국정교과서 집필, 제작, 검토, 감수 등 일체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겠다"고 강조했다./ 성홍규기자
[충북일보] 헤이안, 지금의 교토를 도읍으로 한 덴노는 간무(桓武; 781~806년 재위)이다. 784년 간무(桓武; 781~806년 재위)는 야마시로국(山背國)의 나가오카쿄(長岡京)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새로운 도읍의 건설은 신라계인 하타(秦)씨를 어머니로 하는 후지와라노다네쓰구(藤原種繼)를 중심으로 야마시로국을 비롯한 근방의 여러 지역의 부호들의 도움을 받으며 진행되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나가오카교(長岡京)로의 천도에 제동이 걸린 것은 평성경의 궁궐문을 이건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기근이나 질병이 유행하면서 789년에는 간무의 모후(母后)인 다카노노니가사(高野新笠)가 사망하고, 790년 황후가 사망하게 된다. 간무는 마침내 수해를 입기 쉬자 지형에 위치한 나가오카쿄을 포기하고 794년(延曆 14년)에 도읍을 나가오카교보다 북쪽에 위치한 헤이안쿄(平安京)로 옮겼다. 예나 지금이나 천도는 대개 지배자의 확고한 의지에 의해 정치적 목적으로 시행되는 것이 상례이다. 710년 후지와라쿄에서 헤이조쿄로의 천도는 율령체제의 확립과 함께 관청과 관인의 수가 증가하자 이들이 거주할 새로운 공간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보다도 실은 아스카가 구호족의 중심지여
[충북일보] 보재 이상설 선생의 기념관 건립이 확정됐다.충북도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심의위원회가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관을 현충시설 건립지원 대상 사업으로 선정했다고 15일 밝혔다.도는 이상설 선생 생가 일원인 진천읍 산척리에 87억원을 투자해 부지면적 2만5천㎡, 연면적 1천917㎡ 규모의 기념관과 부대시설을 오는 2018년까지 조성할 방침이다.이를 위해 앞으로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회, 국회의원, 진천군 등과 공조해 국비예산을 확보하는 등 기념관 건립에 적극적으로 나서 충북의 대표적인 현충시설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보재 이상설 선생은 항일 독립운동사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한국 근대 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충북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다.1870년 진천에서 태어나 1906년 북간도에 민족 최초의 항일 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1907년 고종황제의 밀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돼 이준, 이휘종 선생과 함께 대한 독립의 당위성을 세계에 알렸다.권석규 도 보건복지국장은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관 건립은 충북 도민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매우 뜻깊고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최범규기자 calguksu@naver.com
[충북일보]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안눌(李安訥·1571-1637)이 있다.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이다. 서울 남산 아래 살았던 그는 18세에 진사시에 수석 합격을 하나 동료의 모함을 받아 정거(停擧)를 당하였다. 정거는 일정기간 과거에 응시하는 자격을 박탈하는 것을 일컫는다.그는 가학(家學)을 하면서 문학을 집중적으로 연마하였고, 이 시기에 그 유명한 동악시단(東岳詩壇)이 형성된다. 동악시단은 이안눌이 주축이 돼 결성된 일종의 시(詩) 동호인회로, 정철(鄭澈)의 제자였던 권필, 선배인 유근수, 평생의 맞수였던 이호민·홍서봉·이정구 등이 참여하였다.그가 끝까지 출사(벼슬살이)를 마다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29세 되던 해인 1599년(선조 32) 다시 과거 시험을 봐 문과에 급제하였고, 32세 되던 해에 우리고장 청풍부의 경시관(京試官) 임무를 부여받았다.조선 조정은 지방에서 치뤄지는 향시(鄕試)를 감독하기 위해 시험 감독관을 지방의 과거 시험장에 종종 파견하였고, 이를 경시관이라고 불렀다.시험 감독관으로 파견되는 만큼 현지 체류 기간은 길지 않았다. 아안눌의 청풍 체류기간도 길지 않았으나, 이때 〈호서록〉(湖西錄·동악집 제 4권)이라는 연작…
[충북일보] 정운경(鄭雲慶, 1861~1939)은 제천 유력가문 출신으로 영춘에 살면서, 을미의병기 호좌의진 참여를 시작으로 을사의병기에는 원용팔에 이어 단양에서 의거를 주도한 인물이다. 그의 의거는 유학을 공부하면서 단순히 현실의 묵수나 과거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성리학적 이상을 지키며 유학자로서 민족이 처한 위난을 극복하려는 충절에서 비롯된 지행합일의 실천이었다.◇ 제천의 명문가문에서 태어나다 정운경은 1861년(철종12) 2월 9일 제천의 월림(月林)에서 정희원(鄭羲源)과 원주 원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 자는 화백(和百), 호는 송운(松雲)이다. 그의 집안은 송강 정철의 후손으로 정보연(鄭普衍) 때 제천에 터전을 잡은 이후 정보연의 손자인 정익하(鄭益河)가 나라로부터 불천위를 인정받으며 지역사회의 명문으로 번성하며, 인근의 유력 문중과 연이은 혼인관계를 통하여 향촌 내에 기반을 굳혔다. 정운경은 고향에서 재종숙 정일원(鄭一源)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타고난 재질로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는 24세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하고 그 다음해에 부인인 한산 이씨가 두 딸을 남기고 일찍 타계하는 슬픔을 겪었다.
[충북일보] 9일이 제 569주년 한글날인 가운데, 구한말 조선을 정탐한 일본인이 한글을 '서양의 알파벳을 능가한다'고 평가,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일본인은 '팔도의 말 가운데 충주의 말이 가장 격조있고 온하하다'고 평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일본인 첩자 혼마 규스케(本間九介·1869~1919)는 지난 1893년 조선에 파견되어 1년 동안 팔도 구석구석을 정탐하였다.그리고 일본 도쿄로 되돌아가 1894년 4월 17일부터 1백54편의 조선 정탐글을 '이륙신보'(二六新報)에 연재했다.해당 글은 최혜주 박사가 지난 2008년 '일본인의 조선 정탐록 조선잡기'(김영사 간)라는 책명으로 출간한 바 있다.그러나 그동안 구한말의 조선풍속만 주로 인용됐고 언어와 문자와 관련된 내용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정탐꾼 혼마는 한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구한말의 조선풍속만 주로 인용됐고 언어와 문자와 관련된 내용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정탐꾼 혼마는 한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 구조는 일본글과 같다. 교묘한 것이 서양의 알파벳을 능가한다. 한인(韓人)은 실로 이와 같이 교묘한 문자를 가지고, 왜 고생스럽게 일상의 서간문까
[충북일보] 나라에 가서 도다이지(동대사)를 보지 않으면 나라를 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사카에 가서 오사카성을 보지 않으면 오사카를 갔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오사카성은 오사카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필자는 몇 차례에 걸쳐 오사카성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굳이 답사가 아니더라도 오사카를 여행하게 되면 오사카성의의 외곽이라도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의 도시인 오사카는 운하가 많다. 오사카에는 오사카의 운하를 운행하는 배가 있는데, 특히 배를 타고 바라보는 오사카성의 모습은 환상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운 오사카성은 고대도성 나니와궁 옆에 위치하고 있다. 히데요시가 오사카성을 세우기 전에 이곳은 원래 이시야마의 혼간지(本願寺)라는 사찰터였다. 전국 무장들이 최후의 승부를 향해 치닫던 시점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사원과 잇키를 대상으로 전쟁을 선포한다. 노부나가에 의해 사원세력과 잇키가 차례대로 진압되고 남은 세력은 승려와 촌민이 결합된 혼간지였다. 전국을 사실상 통일한 통일국가의 권력을 대표하는 노부나가도 강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인 혼간지를 쉽게 공략하지 못하였지만, 혼가지가 계속 버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결국 돌산 위에 위
[충북일보=충주] 세계 최고(最古)로 알려진 청주 '소로리 볍씨(1만7천년전)'와 신석기 시대 유적인 충주 '조동리 볍씨(6천300년전)'를 연계한 학술 및 교육 관광 자원화가 절실하다는 지적이다.6일오전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조동리 선사유적박물관'을 찾은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융조 박사와 일본의 큐슈대 가즈오 미야모토 교수, 중국의 수도(水稻)연구소 탕셍지앙 교수는 "세계 단립벼 재배 기원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인 소로리 볍씨와 고대인들의 생활상과 한국의 벼 재배 역사를 알수 있는 조동리 볍씨를 연계, 학생들의 체험교육 관광코스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미야모토 교수는 "소로리 볍씨가 한반도에 언제 벼가 들어 왔는지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라면 조동리 볍씨는 볍씨와 함께 집단 주거지가 발굴됨으로써 당시 생활상을 그려 볼수있는 중요한 유물로 가치가 있다"며 "일본 야요이시대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규슈지방으로 벼가 전파되고 사람이 이동한 역사를 유추해 볼 수있는 중요한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또 탕셍지앙 교수도 "조동리 선사유적박물관이 각 시기별로 풍부한 유물을 전시해 놓아 한반도는 물론 아시아의 벼 재배역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충북일보] 그동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의 지위를 놓고 중국 후난성볍씨와 치열한 학술 경쟁을 벌여온 청주 소로리볍씨가 중국 학자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다만 중국의 고고학자는 어느 볍씨가 더 오래된 것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탕 셍지앙 중국수도연구원 교수는 5일 청주예술의전당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지난 몇 년간 소로리볍씨는 중국의 고고학자와 벼 과학자들의 큰 관심을 받아 왔다"면서 "소로리볍씨는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고 벼의 기원, 순화, 분화 연구와 실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그는 다만 "소로리에서 발견된 18톨의 고대벼는 유사 벼와 한국과 중국에서 발견된 고대 인디카나 자포니카와도 다른 모습"이라며 "재배 벼의 기원으로 확정하기 위해 재배 벼의 조상이 고대 기원지에 존재했는지, 기후환경요인이 적합한지 등의 조건들을 만족하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최고(最古) 종자에 대한 말은 아꼈다.이날 회의에선 소로리볍씨를 청주의 대표적 브랜드로 삼자는 주장도 제기됐다.이융조 충북대 명예교수는 기조발표를 통해 "아시아 선사인들의 생명을 유지하고, 훌륭한
[충북일보] 안석경(安錫儆·1718-1774)은 전회 소개한 안중관과 고령박씨 사이에 태어났다. 그의 자는 숙화(叔華), 호는 삽교(·橋)이다. 그는 부친 안중관과 함께 충주 가흥촌에서 살다가 1740년 원주의 흥원(興原)으로 이주하였다.충주 가흥과 원주 흥원은 행정구역으로는 상당히 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그리 멀지 않은 상류와 하류이다. 그리고 흥원은 남한강과 그 지천인 섬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충주로 치면 남한강과 달천에 해당한다. 섬강은 정약용이 충주 하담과 남양주를 물길로 오르내릴 때마다 스쳐 지나갔던 곳으로, 강가의 풍광이 선계(仙界)처럼 다가왔다. '섬강 나루에 해가 뉘엿뉘엿 저무니 / 여기저기 흐르는 물 석양빛이 일렁인다. / 멀리 있는 일엽편주 술 실은 배이런가 / 오리 쌍쌍 날아가는 데가 어부의 집이라네. / 봄 지난 버들이 언덕머리 아직도 푸르게 하고 / 꽃이 지는 물에 비쳐 바위 얼굴 때때로 붉어지네. /…/.'- 섬강은 상업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영·정조 연간의 문인 정범조(丁範祖·1723-1801)는 (해좌집)라는 시에서 '밝은 등불 켜고 나무 끝 사이로 지나가니 / 아마도 한양에서 오는 배겠지. / 금년에는 소
[충북일보] "환자 상당수가 신분증을 필수로 지참해야한다는 것을 몰라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습니다. 평일이라 내원 환자가 적어 우려했던 것만큼 큰 불편은 없었지만 주말은 걱정됩니다." 병원·의원 등 의료기관 진료 접수 시 반드시 신분증·의료보험증 등으로 신분 확인을 해야 하는 '요양기관 본인확인 강화 제도' 시행 첫날인 20일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의 한 의원 간호사 김씨는 "제도 시행을 잘 모르는 분들이 꽤 많았다. 특히 평일 의원을 찾는 환자는 노인층이 많아 변경 사항을 빠르게 알기 어려워 한다"며 "다행히 제도 취지를 설명하면 환자 다수가 납득해 큰 문제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날 본보가 청주지역 의료 현장을 확인한 결과 눈에 띄는 혼란은 없었다. 지역 유일 상급종합병원인 충북대병원부터 동네 병·의원까지 안내데스크 등 눈에 띄는 곳에 "진료 전 신분증을 꼭 제시해달라"는 내용을 포스터와 안내문 등으로 게시하고 있었고, 개별 병·의원에서 환자들에게 미리 신분증 지참을 당부한 덕분으로 보인다. 다만 만반의 준비에도 시행 첫날인 만큼 잡음이 없진 않았다. 청주시 청원구 우암동 한 내과 원무과 직원은 "신분증을 깜빡 잊은 다수의 환자의 스마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지나간 대경기 불황을 돌아봐도 지금처럼 현장의 일이 없었던 적은 처음입니다." 길어진 고금리 상황과 국제적 원자재 가격 인상,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넨싱(PF) 부실 위기 등의 악조건은 충북도내 건설경기를 더욱 얼어붙게 하고 있다. 건설 산업은 국가와 지역 경제를 지탱하는 주요한 기간 산업으로 해당 산업의 장기화되는 침체는 내수시장과 경기 부양을 저해시키는 요소가 된다. 2022년 하반기부터 국내 건설·부동산 시장에는 금융 조달의 어려움과 인건·자재비 인상으로 공사비 상승, 수요 위축 등 건설 경기 위기 요인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지난해 말부터 본격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한 도내 건설 경기는 올해 건설자재 원가 상승·출하량 감소, 공공·민간 발주 위축, 건설 관련 사업체 폐업 증가로 이어지는 상황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1분기 지역경제동향'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충북 건설 수주는 전년 동분기 대비 63.7% 감소했다. 건설수주 감소세는 최근 5분기 연속 진행 중이다. △2023년 1분기 -38.8% △2분기 -51.5% △3분기 -47.3% △4분기 -27.8% △2024년 1분기 -63.7%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22대 총선 당선인 인터뷰 - 증평·진천·음성 더불어민주당 임호선 "부족한 사람에게 다시 한번 중임을 맡겨주신 군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총선 승리는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약속드린 미래 비전을 군민들께서 선택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재선에 성공한 임호선(61)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증평·진천·음성)은 겸손한 자세로 소통하며 어려운 민생부터 확실히 챙겨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총선은 윤석열 정부에 대한 강력한 경고"라며 "서민경제를 살피지 못하고 국정운영을 독단적으로 하며 과거로 퇴행하려는 정부에 브레이크를 잡으라는 민심이다. 제1야당으로서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을 적극 따르며 민생해결과 지역발전에 책임감을 갖고 임하겠다"고 앞으로의 의정활동에 대해 설명했다. 22대 국회에서는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활동을 원하고 있다. 임 당선인은 "저는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왔고 현재도 농촌에 살고 있다"며 "지역적으로도 증평·진천·음성군이 농촌이기에 누구보다 농업농촌의 현실을 잘 이해하고 농민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농촌의 현실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임 당선인은 "농촌이 어렵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