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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의 한국문화답사 - 오사카성

유럽으로 수출되면서 일본열도에 엄청난 富 안겨
오사카성 본래 절터… 히데요시가 요새로 재건축
3년에 걸쳐 수 만명 동원…신분별로 거주지 구획
천수각 본래 금빛… 현재 콘크리트 건물에 승강기

  • 웹출고시간2015.10.07 17:47:18
  • 최종수정2015.10.07 17:47:18
[충북일보] 나라에 가서 도다이지(동대사)를 보지 않으면 나라를 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사카에 가서 오사카성을 보지 않으면 오사카를 갔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오사카성은 오사카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필자는 몇 차례에 걸쳐 오사카성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굳이 답사가 아니더라도 오사카를 여행하게 되면 오사카성의의 외곽이라도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의 도시인 오사카는 운하가 많다.

오사카에는 오사카의 운하를 운행하는 배가 있는데, 특히 배를 타고 바라보는 오사카성의 모습은 환상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운 오사카성은 고대도성 나니와궁 옆에 위치하고 있다. 히데요시가 오사카성을 세우기 전에 이곳은 원래 이시야마의 혼간지(本願寺)라는 사찰터였다. 전국 무장들이 최후의 승부를 향해 치닫던 시점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사원과 잇키를 대상으로 전쟁을 선포한다.

방대한 규모의 해자

노부나가에 의해 사원세력과 잇키가 차례대로 진압되고 남은 세력은 승려와 촌민이 결합된 혼간지였다. 전국을 사실상 통일한 통일국가의 권력을 대표하는 노부나가도 강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인 혼간지를 쉽게 공략하지 못하였지만, 혼가지가 계속 버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결국 돌산 위에 위치한 혼간지도 마침내 강화라는 형식으로 항복을 한다.

승려들이 떠나자 노부나가는 오랜 세월 자신을 괴롭혔던 혼간지를 모조리 불태우고 폐허로 만들었다. 오다노부나가의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폐허로 만든 돌산의 가치를 알아보고 이 난공불락의 요새에 자신의 성을 건축하였다.

축성은 1583년부터 85년까지 3년이 걸렸으며 전국의 다이묘로부터 수만의 인력이 동원되었다. 벽은 이중으로 둘러지고 내성과 외성 사이에는 도시민의 거주시설과 상가가 들어섰다. 거주지는 직업별, 신분별로 세밀하게 구획되었다. 이른 바 근세도시인 죠카마치(城下町)가 성립된 것이었다.

오사카성의 최대 특징은 거대한 도랑(해자)과 성벽이다. 외성문을 두른 성벽의 높이가 15미터 이상이고 도랑은 폭이 3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지금 오사카성에 남아있는 안도랑은 내성에 둘러싸인 것으로 남아 있는 내성의 성벽과 안도랑 만으로도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느낌을 주는 웅장한 규모인데, 오사카성의 복원도를 보면 외성의 바깥도랑은 이보다 규모가 큰 것으로 되어 있다.

치마자락처럼 흘러내리는 성벽의 모서리

현재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오사카성의 성벽과 도랑의 크기는 일본의 그 어떤 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웅장하다. 성문의 기초석도 특별히 거대한 것을 사용하였다. 오사카성의 성문의 기초석은 하나의 무게가 100~130톤에 달하는 것이 적지 않은데, 가장 무게가 나가는 성벽의 기초석은 하나의 무게가 140톤에 달한다. 축성에 수많은 다이묘들이 동원되었는데, 작업의 효율과 책임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돌에 기호를 새겼다. 성벽의 모서리의 돌은 특별히 크고 치맛자락처럼 흘러내린다. 성벽을 치맛자락처럼 휘게 만드는 비법은 성벽의 석재 안쪽을 깎아서 끼우거나 석재 중앙에 홈을 만들고 쇠파이프를 박아 서로 맞물리게 하는 것이다.

히데요시는 아들이 죽고 나서 이복누이의 아들인 히데쓰구를 양자로 삼아 관백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런데, 1593년 당시 57세였던 히데요시가 젊은 측실 요도도노로부터 그만 아들을 얻게 되었다. 결국 히데요시는 그가 관백으로 앉힌 히데쓰구와 그의 가족 38명을 교토의 가모가와에서 살해하고 자신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세운다.

이후 히데요리는 이에야스의 아들이자 도쿠가와 막부의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장녀 센히메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물론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가문을 멸망시키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드디어 1614년 10월, 소위 방광사(方廣寺) 종명사건을 일으켜 히데요시의 거성인 오사카성을 공격하였다. 도쿠가와는 20만 군대로 오사카성을 포위하고 두 달 간 전투를 벌였는데 강화에 성공한다.

130톤에 달하는 성벽의 기초석이다. 필자의 키가 왜소해 보인다.

이에야스군은 성을 포위하고 포격을 퍼부었지만 거대한 도랑과 두터운 성벽은 난공불락이었고 결코 이에야스군의 돌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강화회담 때에 히데요리는 오사카성의 바깥도랑을 메운다는 조건에 동의하였다. 1615년 5월 도쿠가와 군은 다시 오사카성을 침공하였다.

이때 이미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난 히데요리는 끝까지 분전하였지만, 이미 바깥도랑도 메워지고 전황이 기울어지자 절망한 그는 천수각을 바치는 축대 아래의 성안에서 자결하였다.

히데요시가 오사카성을 건립할 당시의 천수각은 처마와 지붕, 기와가 모두 금빛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여기에 들어가는 궁도 안으로 들어가면 금빛으로 가득하였고 건물 내부는 호화스런 조각과 그림으로 장식되었다. 그림은 주로 가노 에이토쿠(狩野永德)을 비롯한 가노파(狩野派)의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현재의 천수각은 콘크리트로 복원된 것으로 안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그 천수각의 용도는 히데요시의 일생과 센코쿠시대의 유물과 오사카성의 역사를 보여주는 역사박물관이다.

오사카성 내의 히데요리 자살처

바로 옆에 있는 오사카역사박물관에는 고대나니와시대와 근현대전시실이 있는데, 중세 센코쿠시대 부분이 없다. 바로 오사카성의 천수각이 중세 센코쿠시대의 역사박물관이기 때문이다. 천수각의 전시물 중 가장 뛰어난 것이 오사카성에서 벌어진 겨울전쟁과 여름전쟁, 즉 오사카성전투도이다. 오사카성전투도에는 오사카성을 향해 달려가는 공격군 속에 센히메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때 센히메는 오사카성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있었는데, 시어머니는 그녀의 자식인 히데요리가 할복한다는 소식을 듣고 히데요리에게로 달려가 자식과 함께 자살하고 센히메는 도쿠가와 진영으로 달려간다.

1592년 히데요시는 약 16만 명의 군대를 편성하여 조선을 침략할 것을 명령하였다. 침략당시 조선은 15세기의 과학기술을 계승·발전시키지 못하고 당쟁과 공리공론의 성리학, 중화사상으로 국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히데요시가 조선과 명을 침공하겠다는 발상은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이야기나 1940년대 초반 일본군 참모본부가 "소련을 타도하고 신중국을 건설하며 미국과 전쟁에 승리하여 전 세계를 지배"하겠다고 한 발상과 유사하다.

왜란의 결과 조선은 각 분야의 많은 전문기술자를 잃게 되었다. 특히 도공이 많이 납치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공주 계룡산 북동쪽 기슭에서 납치해온 이삼평(李參平)도 있었다. 이삼평은 아리타(有田)에 가마를 짓고 조선 전통에 따라 지금도 일본의 백화점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타도자기를 구웠다. 아리타 이외에도 일본열도에는 하기, 가라쓰, 사쓰마 등에서 도자기 문화가 꽃피었다.

이런 이유로 어떤 사람은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그때 마침 중국도 거듭된 왜구의 약탈과 왜란의 영향으로 전란이 발생하였다. 중국의 경덕진(景德鎭)의 청화자기를 대신하여 17세기에 일본의 아름다운 채색자기가 유럽시장을 장악하게 되자 일본열도에 엄청난 부가 밀려왔다. 납치된 사람이 3만 혹은 5만이라고 하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도자기를 비롯한 각 분야의 엄청난 인력과 새로운 첨단기술이 일본열도로 유출된 것이었다.

이 영향으로 일본에서는 에도, 오사카, 교토가 거대도시로 발달하는데, 여기에 각지의 죠카마치까지 합치면 17세기 에도시대의 도시인구가 거의 300만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17세기 일본은 이미 같은 시기의 유라시아의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강대국의 반열에 들어섰던 것이었다. 반면에 전 국토가 유린되고 각 분야의 최고의 기술자를 뺏긴 조선은 중계무역의 이점도 상실하고 겨우 인삼이나 판매해서 먹고사는 궁핍한 나라로 전락하였다. 임란이후 조선의 도시는 성장을 멈추었고, 시바료타로가 "작고 가난한 나라가…러시아에게 도전하여 승리해서 마침내 세계 5대강국으로 부상했다"고 자랑하는 '밝은 메이지유신'에 나오는 '작고 가난한 나라'로 전락된다.

가모가와에서 수습된 유골을 안치한 히데쓰구의 가족묘

임란을 겪은 조선은 왜적이 야기한 재난과 억울한 희생, 그리고 의병들의 충절이 전승되어 반일감정으로 이어졌다. 『고사기(古事記)』나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 근거한 고대일본은 일본중심의 중화사상의 세계관을 가졌다. 신화의 세계에 입각한 고대일본의 중화사상이 근대까지 이어져 이후 동아시아의 비극을 초래하였다고 한다면, 중국의 중화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일본을 야만국으로 보는 자국중심의 세계관을 가졌던 조선의 어두운 안목은 조선의 미래를 거의 절망적인 상태로 빠트렸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자신들이 주둔했던 남해안 지역에 여러 개의 성을 쌓았다. 일본군의 축성술은 수준 높은 경지를 이루었기 때문에 임란 후 조선의 지식인들은 당연히 이러한 왜성의 특징을 배워야했다. 임란 이후에도 늘 일본의 재침을 우려했고, 결국 한말에 다시 일본의 식민지화를 경험하는 나라지만, 왜란 이후 왜성에 대한 연구나 화승총에 대한 기술개발과 개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 국토가 유린당하는 참화를 겪고도 조선의 지도층들은 여전히 일본을 야만국으로 보는 자국중심의 세계관을 버리지 않고 어두운 현실을 외면하였다. 부국강병의 기초는 말할 것 없이 군사력이다. 임진왜란 이후 계속해서 조선이 일본의 만만한 침략 대상이 된 것은 부국강병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 임병덕(충북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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