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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의 한국문화답사 - 아라시야마(嵐山)Ⅰ

신라에서 직집 제작… 열도로 옮겼을 가능성
신라의 목공이 도일하여 제작하였을 경우도
일본 특산종 녹나무도 국내고분 등에서 발견
나무, 고대 한일교류의 주요 물자 중의 하나

  • 웹출고시간2015.10.15 18:01:52
  • 최종수정2015.11.11 14:49:54

전차 안에서 본 교류지(廣隆寺)의 남대문

[충북일보] 헤이안, 지금의 교토를 도읍으로 한 덴노는 간무(桓武; 781~806년 재위)이다. 784년 간무(桓武; 781~806년 재위)는 야마시로국(山背國)의 나가오카쿄(長岡京)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새로운 도읍의 건설은 신라계인 하타(秦)씨를 어머니로 하는 후지와라노다네쓰구(藤原種繼)를 중심으로 야마시로국을 비롯한 근방의 여러 지역의 부호들의 도움을 받으며 진행되었다.

누에(蠶) 신사. 3면에서 참배할 수 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나가오카교(長岡京)로의 천도에 제동이 걸린 것은 평성경의 궁궐문을 이건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기근이나 질병이 유행하면서 789년에는 간무의 모후(母后)인 다카노노니가사(高野新笠)가 사망하고, 790년 황후가 사망하게 된다. 간무는 마침내 수해를 입기 쉬자 지형에 위치한 나가오카쿄을 포기하고 794년(延曆 14년)에 도읍을 나가오카교보다 북쪽에 위치한 헤이안쿄(平安京)로 옮겼다. 예나 지금이나 천도는 대개 지배자의 확고한 의지에 의해 정치적 목적으로 시행되는 것이 상례이다.

710년 후지와라쿄에서 헤이조쿄로의 천도는 율령체제의 확립과 함께 관청과 관인의 수가 증가하자 이들이 거주할 새로운 공간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보다도 실은 아스카가 구호족의 중심지여서 중앙집권적인 새로운 정치를 하는데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794년의 헤이안 천도 역시 나라가 백제계인 후지와라씨 등 귀족과 도다이지로 대표되는 사원세력의 본거지로 이들 세력을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간무의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간무의 어머니인 다카노노니가사가 백제무령왕의 후손이었고, 무엇보다 간무를 황태자로 옹립한 것도 백제계 후지와라 세력이었기 때문에 천도 이후에도 백제계 후지와라세력의 영향력은 간무의 의도와 관계없이 지속되었다.

벚꽃이 막 피기 시작한 교류지의 정원

간무가 천도한 지역 일대는 가야계 신라 도래인 집단의 혈통을 이은 하타씨(秦氏)의 본거지이었다. 헤이안 천도 이전에 교토는 하타씨에 의해 개발이 진행되었는데, 특히 우즈마사(太秦)는 그 지명이 표시하는 것처럼 하타씨(秦氏)의 대종가의 근거지이었다. 우주마사에는 하타씨와 관련된 중요한 유적지로 교류지(廣隆寺)ㆍ누에신사(蠶の社)ㆍ헤비즈카(蛇塚)가 있다. 하타씨는 아라시야마(嵐山)일대의 가쯔라가와(桂川)에서 물을 끌어들여 우즈마사 일대의 수전을 개발하였다. 간무의 헤이안 천도는 자연히 이 지역의 재력가인 신라계 하타씨의 재력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교토역에서 전철을 타고 아라시야마를 가려면 중간에 우즈마사역에서 환승해야한다. 우주마사역에서 내리면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622년 창건된 교류지(廣隆寺)가 바로 앞에 나타난다. 헤이안쿄의 건립 이전에 교토에는 이미 유력 호족이 자기가문의 행운과 복을 비는 개인 절인 우지데라(氏寺)를 몇 개 건립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호코지(蜂岡寺)이었다. 호코지는 하타씨가 고국인 신라에 정착하였던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증거인데, 후에 이 호코지를 옮겨 건설한 것이 교류지이다. 교류지라는 절 이름도 창건자의 하타노 가와카쓰(秦河勝)의 실제 이름인 교류(廣隆)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교류지 남대문 옆에 게시된 일본 국보 1호인 목조미륵보살 반가사유상

교류지의 국보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되는 것은 아스카시대의 국보인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으로 이 반가사유상은 전후 일본의 국보 1호로 지정되었다. 원초의 반가의 형식은 인도에서 생겨난 것인데, 젊은 석가의 출가 이전, 즉 싯다르타태자라 불리던 때의 하나의 형식이다. 이것이 중국ㆍ북위를 거쳐 고구려ㆍ백제ㆍ신라에 들어오고 독자의 형식이 가미되어 미륵신앙 속에 반가사유상을 확립해 갔다. 이렇게 해서 6세기말부터 7세기초에 걸쳐서 조형미의 정점에 다다른 반가사유상이 출현하게 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교류사는 스이코 11년에 도래계 씨족인 하타 가와가쓰(秦河勝)가 쇼토쿠 태자에게서 불상을 받아 창건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 미륵상은 아스카시대에 해당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 불상이 적송으로 만들어졌다고 판명됨으로써 누가 어디에서 만들었는가가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었다. 문제가 된 이유는 아스카시대의 불상은 거의 대부분 녹나무로 만들어졌고 헤이안시대 이후가 되면 적송으로 만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 신라와 일본과의 본격적인 교류가 진행된 것이 덴무의 즉위 이후, 즉 7세기 후반 이후부터였다고 한다면, 이 불상은 아스카시대 이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타씨의 대종가의 근거지인 우즈마사(太秦)

제작 연대의 문제를 떠나서 교류지의 목조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서울 중앙박물관의 83호와 78호의 금동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예술적형상과 조형미에 그대로 겹쳐진다. 더욱 교류지의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만들어졌을 때의 왜국에서는 이 상과 유사한 반가사유상이 만들어진 사례가 없다. 따라서 교류지의 목조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도 신라에서 만들어져 건너온 것이거나 아니면 신라에서 온 불사(佛師)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틀림없다.

교류지에서 전철로 한 정거장 떨어진 거리에 누에신사(蠶の社)가 위치하고 있다.

하타씨가 사가노(嵯峨野)지역에 정착한 것은 5세기 후반 무렵이었다. 하타씨는 토목기술이 뛰어나 교토를 수전으로 바꾸었는데, 하타씨는 토목기술만이 아니라 양잠에도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교토의 니시진(西陣)에는 오래된 비단 공방이 즐비하다. 여기에서 생산한 유젠조메(友禪染)는 화려한 채색으로 유명하며 니시진에서 생산된 화려하고 섬세한 문양의 기모노는 일본에서 가장 명성이 높다. 오늘날 교토가 자랑하는 니시진의 비단은 17세기말부터 생산된 것으로 동아시아의 교역체제가 낳은 세계적인 특산물이긴 하지만, 우즈마사의 하타씨가 뿌린 양잠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교토에 살면서 나의 숙제였던 헤비즈카(蛇塚)를 찾아 나선 것은 2009년 5월 21일이었다. 우즈마사역에 내려서 지도에 위치한 방향을 향해서 1시간쯤 헤맸던 것 같다. 천천히 걸으면서 목적지에 도달하면 비록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얻는 것도 많다. 무엇보다 차를 타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식으로는 유적지가 위치한 주변의 환경을 살펴보기 어렵다. 헤이안은 도성건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서쪽이 자주 홍수로 범람을 하면서 황폐해지고 우경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되면서 도시구조에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

본래 헤이안쿄 건설 당시 좌경을 낙양, 우경을 장안이라고 하였는데, 우경이 몰락하면서 장안이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낙양이 교토의 대명사가 되었다. 가쯔라가와 주변의 황폐화된 아라야시마는 우즈마사에서부터 가쯔라가와에 이르기까지에 비교적 최근의 택지개발에 의해 새로운 주택단지가 건설된 곳이 많다. 낙외(洛外), 즉 교외에서는 헤이안시대의 유적지가 일부 남아 있는데, 이곳은 낙외임에도 그 희미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뱀무덤 위에 녹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런데 좌경 쪽에 가까운 우즈마사는 교토에서도 아주 낙후된 지역으로 오히려 헤이안시대의 수로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헤이안시대의 수로의 흔적을 상상하면서 어느 골목 주택 골목길을 돌아서 무덤 앞에 도착하니 6세기말 부귀영화를 누리던 하타씨의 거대한 무덤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소가노 우미코의 무덤으로 아스카를 지배하던 소가씨의 권력을 상징하는 것이 아스카의 석무대라면, 뱀무덤은 교토를 지배하던 대호족 하타씨의 거대권력을 상징한다. 뱀무덤 위에는 녹나무(樟: 구스노키)가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 녹나무는 교토시와 교토대를 상징하는 나무이다. 늘 푸른 녹나무의 잎은 봄이 되면 새로운 잎이 돋아나면서 겨울을 보낸 잎이 노란 색으로 변한다.

뱀무덤(蛇塚) 원래는 전방후원분이었다.

노란 색으로 바뀐 잎사귀를 비비면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가 사방으로 퍼진다. 녹나무는 상록활엽수 교목으로 한반도에서는 남해안 일부 지역과 중국 남부지방, 일본에 분포하고 있다. 녹나무는 비교적 단단한 성질 때문에 물속에서 잘 썩지 않으므로 선박을 만드는 재료로 널리 사용됐으며 일본에서는 히코네성의 성문처럼 성문의 재료, 혹은 목조불상을 만드는 재료로도 사용되었다.

아울러 목재는 장뇌향(樟腦香, Camphor)이라는 일종의 방충제를 함유하고 있어 옷장 등 고급가구재 및 의약용으로도 활용되기도 하였다. 최근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81호) 중 제7호분에서 1천500년 된 거대한 녹나무 목관이 발견되었는데, 일본에서 수입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것은 무령왕릉의 목관이 일본에서만 자라는 금송과 삼나무 일부로 이뤄진 것과 비교된다. 나무도 고대 한일문화교류의 중요한 물자의 하나였다.

/ 임병덕(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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