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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5.10.22 17:08:53
  • 최종수정2015.10.29 15:27:10

보은 회인초등학교 전경

[충북일보] 구한말 조국의 어려운 시절인 1906년 4월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한 보은 회인지역 주민들이 뜻을 모아 보은군에서 최초로 설립한 사립 진명학교를 개교해 현재까지 1만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보은 회인초등학교(교장 조영애).

지난 역사가 말해주듯 시련과 고통을 모두 극복하고 한 세기를 굽이쳐 돌아온 회인초등학교의 역사는 보은인의 긍지와 자존이 서린 향토사인 동시에 1906년4월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성찰이며 또 다른 100년을 향한 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 회인초의 역사

회인초등학교의 전신인 진명학교는 우정순씨가 설립했고 초대교장으로는 정태로씨가 임명됐다.

진명학교(회인초) 설립자 우정순(사진 왼쪽)·초대교장 정태로

회인초의 초대 졸업자는 우종준씨 부부로 학교역사에 남아있다. 당시 이들 졸업자의 사진은 회인초 역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단기 4239년(1906년) 4월1일 김두석 등 보은지역 유지들이 발기해 회인군 읍내면 마근동(현 중앙1리)에 사립진명학교를 설립하고 개교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2일 학교유지비가 부족하면서 폐교했다가 1909년 5월 회인군수였던 권병필씨가 주도하고 우정순씨 등 지역 유지들이 협력해 진명학교를 교동 명륜당에 재 개설해 개교했다.

1909년 11월 진명학교는 읍내리 평창면(현 중앙리) 구 객사로 이전했다.

7명의 학생으로 출발한 진명학교는 1911년4월 인가를 얻어 사립회인보통학교로 개칭해 운영되다가 1912년 3월 회인공립보통학교로 전환했다.

회인초등학교 생활기록부 기재방식 변천사

회인초등학교의 뿌리는 설립자인 우정순씨가 향교의 직원으로 당시 향교 유생이었던 학생 7명으로 진명학교로 설립한점과 명륜학교서 재 개교한 점, 학교부지의 성립과정으로 보아 회인향교에 근거했다.

△ 청년 훈련소

일제는 1938년 2월 '육군특별지원병령'에 기초를 한 '제국신민인 조선인' 가운데 보통학교 졸업 또는 그와 같은 학력을 보증받은 17세이상의 젊은이가 지원병의 기본 자격자였다.

군경과 행정관서가 나서서 이들을 모집하고 다녔다.

황민화 정도에 믿음을 갖지 못한 까닭에 훈련소의 국민교육은 필수조건이었다. 일제는 청년훈련소 특별훈련양성소 등 강제교육기관을 설치하면서 징병할 자원을 양성하고 그 결과 야학의 기능도 박탈했다.

회인초에서도 이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교육은 군인과 교원이 담당했다. 국어습득, 체위향상, 일본식 생활수련은 교육의 필수과목이었다. 1년동안 600시간의 교육을 실시했다.

회인초에는 1941년 4월1일 공립보통국민학교로 개칭되면서 1943년 4월 회인공립청년특별연성소와 1944년 4월 회인공립여자연성소가 설치돼 징병을 위한 학생들의 훈련을 담당했다.

일제는 1945년 5월22일 전시교육령을 공초해 일본에서의 결전에 대비해 교직원 및 학도에 의한 학도대를 조직하도록 했다. 학교에 남아있는 학생들은 조···상 교육학습을 중시하고 학도근무보국대에 나가 각종 작업장에서 노동을 제공했다.

결과 학교교육은 공백상태에 놓인 채 진정한 교육은 존재하지 않고 일본을 위한 교육만 진행됐다.

△ 회인의 유래

회인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비

회인은 백제의 미곡현으로 신라 경덕왕 때 먀곡으로 고쳐 연산군(현 문의면)의 영현으롯 ···았고 고려초에 회인으로 개칭하다가 현종 9년에 청주목에 내속했다.

후에 회덕 감무가 겸무되었다가 우왕 9년(1383년)에 별도의 감무를 설치했다가 조선 태종 13년에 현으로 개칭됐다가 고종 32년에 군으로 승격했다.

당초 회인군은 읍내면 동면 서면 남면 강외면 북면 등 6개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재의 청주시 가덕면 일부와 대전의 대덕구 일부, 회남면과 회북면 내북면 일부, 수한면 일부가 회인군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균 폐합으로 동서면 남서면 일부를 병합해 회북면느로 불리웠다.

△ 피반령과 수리티

'여지도서'에 의하면 회인에서 다른지역으로 통하는 도로는 다섯갈래였다.

먼저 노령대로는 보은에서 가는 길로 관문에서 동쪽으로 16리에 있다. 먹티대로는 문의에서 들어오는 길로 관문에서 서쪽으로 15리에 있다. 남쪽 소로는 청주 경계로 가는 길로 관문에서 32리에 있었고 피반령대로는 청주에서 오는 길로 관문에서 서북쪽으로 29리에 있었다. 북쪽소로는 청산으로 가는 길로 관문에서 29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피반령과 수리티에는 전해오는 설화가 있다.

1949년 문교부 편수국에 제출한 회인공립국민학교 교가(검정본, 원본)

오리 이원대감이 경주 목사가 돼 부임길에 올랐다. 한양을 떠나 청주에 도착하니 경주호장이 사인교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신임 사또인 오리 대감은 청주부터 사인교를 타고 임지인 경주로 향하게 됐다.

그때가 음력으로 6월이라 더운 날씨에 가마를 메고가는 가마꾼들의 고통을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맨몸으로 가는 호장도 소나기라도 맞은 듯 옷이 땀에 절어 걷기조차 힘들었다. 청주를 떠나 한나절을 나아가니 크고 험한 고개가 나타났다. 호장이 사또를 보니 가마 위에서 천천히 부채질을 하면서 좌우의 산천을 바라보며 거드럭거리고 있는 지라 사또의 지혜를 시험해 볼 겸 한번 골려주기로 했다.

가마가 고개 밑에 이르자 호장은 가마를 멈추게 하고 사또 앞으로 나아가 허리를 조아리며 '사또, 이 고개는 삼남에서 가장 험한지라 가마를 타고 넘으실 경우 가마꾼들이 피곤하여 회인에 가서 3~4일은 유숙하여야 합니다'라는 호장의 말을 듣고 오리대감은 '걸어서 넘는다'며 가마에서 내려 걸었다.

오리대감이 조금 걷다가 뒤를 보니 호장이 웃으면서 따라오는 것을 보고 장난을 친줄 알고 호장을 불러 '내가 걸어가니 너는 마땅히 기어서 넘어야 한다'고 말해 호장은 양손과 무릎을 발 삼아 기어서 고개를 넘었다.

회인에서 하루를 쉬고 다음날 보은으로 가는 도중에 다시 험한 고개를 넘게 되었는데 호장은 신임사또가 걸어 넘으면서 자기보고는 기어서 넘으라고 할까봐 겁이나서 미리 나무를 베어 수레를 만든 후 수레위에 사인교를 태우고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그후부터 호장이 피발이 돼 고개를 넘었다고 해 '피발령', 수레로 넘었다 해서 '수리티'라고 불렀다. 한자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피발령은 '피반령(皮盤領)', 수리티는 '차령(車領)'으로 적었다고 한다.

피반령은 고려 공민왕도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으로 몽진 가면서 이 고개를 넘었고 세종대왕도 속리산에 가면서 이 고개를 넘었다. 지명은 심오한 철학이나 의미심장한 사건을 배경으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땅과 접촉을 시도한 그들의 눈에 비친 첫 인상이 지명으로 남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 회인 장터

1945년 회인초 33회 졸업기념 사진

회인자은 상설 점포가 많았던 것이 특징이다. 주변이 산으로 막혀있기 때문에 농산물을 내다 팔거나 생필품을 구입할 데가 회인장 밖에 없었다.

점포수도 보은장 보다 25개가 많았고 노점과 보부상을 함해 28명의 소상인이 장날을 맞아 상품을 팔았고 장꾼고 400여명이나 됐다. 회인장에서 거래되는 물품은 담배 면화 면포 종이 숯 한지 등이었다.

회인에서 한달동안 도축하는 소는 6마리, 그래서 소가죽은 6매가 나온다. 이 소가죽은 청주목의 공문서를 가진 사람이 매점한다. 소뼈는 약용으로 쓴다. 목화를 재배하는 200호의 농가는 모두 베틀을 보유해서 부녀자들이 가내 수공업으로 면포를 짠다. 한 농가가 1년동안 짠 면포는 6필이고 경내 전 지역에서는 1천200필을 짠다. 회인의 산물로는 오곡 소가죽 면화를 들수있다고 1887년 일본인들이 조사한 기록이 남아있다.

조영애 회인초 교장은 "회원초의 역사는 지역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며 "광복 70주년을 맞은 올해 회인초의 역사가 다시한번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김병학.성홍규기자

<인터뷰>보은 회인초 33회 졸업생 우충제씨

1945년 당시 회인초 6학년이었던 우충제(83·회인초 33회)씨는 회인초에서 20여년간 교사생활을 했다. 현재도 마을에서는 우 선생님으로 칭하고 있다.

우 옹은 "당시 월사금(수업료)은 백미로 두말을 냈다"며 "일본인 선생님이 공부를 하라고 초겨울에 찬물을 머리에 들어붓기도 했다. 당시에는 겨울이라 날씨도 추워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 소풍은 회남의 어부동과 문의에 있는 동굴, 신선바위까지 갔던 생각이 난다"며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학생들과 도시락을 같이 나눠먹던 생각이 난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학교를 다닐때는 짚신을 신고 다녔고 나무깨나 게다, 쏘리를 신고 다녔다"며 "라디오는 줄을 메서 귀에다 걸면 소리가 들리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해방 당시 교장이 해방이 됐는데도 '일본은 아직지지 않았다'라는 망언을 했다"며 "그 교장의 아들은 나와 친구였는데 학도병으로 가서 현지에서 죽었다. 동네주민들에 반역자라고 지명을 받아 숨어다니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학교에서 누에고치를 치지도 했다. 학교 건물 옆에 따로 만든 잠실에서 누에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며 "집안에 있는 녹쇠그릇을 가져오라고 하고 소나무 송진을 1인당 몇 관씩 따오라고 까지 했다"고 당시 시대상황을 떠올렸다.

또 "동쪽에 수목원이 있었다. 호완뎅이 있었는데 그 안에 칙어를 보관하고 있었다. 이것을 조회때마다 꺼내 학생들에게 절을 하라고 강요하기도 했다"고 기억을 또렷이 말했다.

"학교에는 일본인 선생과 한국인 선생이 절반씩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라며 "구구단을 못 외우거나 숙제를 해오지 않을 경우 나머지 공부를 시켰다. 교육과정의 운영보다는 개간사업에 근로동원이나 일본에 바칠 장작을 나르는 일에 동원이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기생충 약으로 해초를 끓여서 전교생이 복용하기도 했다"며 "일본인 교장은 일본이 전쟁에서 포로를 몇 명 잡았고 비행기를 몇 대 추락시켰다는 등 일본이 전과를 올리고 있다는 내용을 학생들에게 주입하기도 했다"고 학교생활을 소개했다.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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