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신평리에 가면 오리골(五里洞)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오리가 많았다고 해서 오리골이라 한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의 오리골과 보은군 삼승면 원남리의 오리골은 오리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보은군 수한면 오정리의 오리골은 골짜기 전체에 오리나무가 무성하게 자라서 '오리나무골' 이라 부르던 것이 줄어서 '오리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여 그 변이 과정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청주시 서원구 문의면 등동리와 흥덕구 옥산면 호죽리에는 오리나무골이라는 마을이 있고 보은군 산외면 문암리에는 오리나무들이라는 자연지명이 전해온다. 어쨌든 오리골이라는 지명이 오리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오리나무와 연관이 있는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다음과 같이 각지에 너무 많이 산재해 있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청주시의 서원구 남이면 척산리와 팔종리의 오리골을 비롯하여 흥덕구 강내면 월곡리, 상당구 미원면 가양리, 청원구 내수읍의 은곡리와 형동리에 '오리골'이 있으며 충주시의 주덕읍 신양리, 신니면 송암리, 소태면 덕은리, 제천시의 봉양읍 연박리, 괴산군의 청천면 귀만리, 사리면 사담리, 사리면 소매리, 옥천군의 이원면 개심리, 이원면 윤정리, 청성면 장연리, 옥천읍 매화리, 음성군의 음성읍 석인리, 삼성면 대야리, 영동군의 매곡면 공수리, 용산면 천작리, 심천면 길현리, 추풍령면 추풍령리, 보은군 산외면 오대리,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 등에 '오리골'이 있다. 오리는 작은 물가에 흔히 많이 있으므로 우리 조상들의 삶과 아주 친근한 동물이므로 오리가 많은 곳을 지명과 연결지었음직도 하며 오리나무 또한 우리 주변에 많이 볼 수 있는 나무이다. 그런데 '오리골'이라는 자연지명이 각 지역에 많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오리'가 단순히 동물인 '오리'나 '오리나무'를 가리키기 보다는 일반적으로 어디에나 흔히 존재하는 지형의 형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던 중에 고맙게도 다른 지역의 지명에서 그 단서를 발견하고는 너무 기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은군 탄부면 대양리에 '오리미'라는 지명이 있는데 산을 가리키는 지명으로서 산의 모양이 오리의 꼬리 같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전해지지만 '오리+미(뫼, 山)'의 형태이므로 '오리'는 산의 모양을 가리키는 말이 분명하며, 다음의 지명들에서 나의 짐작을 확실히 뒷받침해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보은군 탄부면 하장리의 동오리산은 높이 153m 정도의 나지막한 봉우리로 원앙들 복판에 있는 둥근산을 가리킨다고 전해지고 있고 단양군 매포읍 상괴리의 '딴동오리봉', 옥천군 군서면 상중리에는 안동오리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에서 대전광역시 중구 낭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동오리재라고 부른다. 그런데 동오리재를 '둥그넘이재'라고도 부르는 것을 보면 '동오리'는 '둥근 오리'의 의미이고 '오리'는 둥글다의 의미가 중첩된 '봉우리'의 의미인 것이다. 오늘날 '봉우리'는 말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봉오리'는 '아직 피지는 않고 망울만 맺혀 있는 꽃'을 가리키고 '봉우리'는 '산꼭대기의 뾰족하게 솟은 머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구분하여 쓰이지만 옛날에는 '오리'와 '우리'가 구분되지 않았던듯하다. 그 예로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에 봉오리라는 지명이 있고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에는 봉오리산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제주도에서 산을 '오름'이라 하는데 대한 언어학적 설명이 가능해진다고 할 것이다. 아무 생각이 없이 보면 '오름'은 산을 올라간다는 생각에서 '올라가다'의 명사형으로 언뜻 생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건강을 위해 산을 올라가는 대상으로 생각하지만 옛날에는 산이란 올라갈 필요가 전혀 없는, 단순히 눈에 높게 보이는 존재에 불과했을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쓰이던 '오리(산의 둥근 형태의 위부분)'의 변이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따라서 '오리골'이란 오리가 많아서 만들어지거나 아니면 오리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오늘날에 쓰이는 '봉우리'란 말처럼 '주변보다 높은 지대나 언덕에 있는 마을'을 가리키는 이름이며, 이러한 마을의 지형이야말로 따뜻한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마을이요 폭우와 습지의 피해 등 수해를 막을 수 있는 명당자리가 아니겠는가·
증평에서 괴산으로 가는 34번 국도를 가다 보면 사리를 지나자마자 바로 모래재가 나오는데 전에는 험한 고개를 숨가쁘게 넘어갔지만 지금은 고개를 넘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4차선 도로를 평지처럼 달려간다. 유평 터널에 들어서기 전에 괴산군 사리면 이곡리에서 좌회전해 533번 지방도로 들어서서 화산리를 지나면 길가에 고말귀라는 마을 유래비가 웅장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멈추게 한다. 마을 이름도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비석에 마을 유래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어 도대체 어떤 유래를 지닌 마을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마을 유래비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종 원년(1453)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할 목적으로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 김종서 등 단종의 충신들을 모조리 죽이고 군국 대권을 장악하였으나 허후한 사람은 평소부터 아끼는 마음이 간절해 처음에는 죽음을 면했다. 그러나 정난(靖難) 성공을 자축하는 연회에서 황보인, 김종서 등의 무죄를 주장하고 정난(靖難)이 잘못됐음을 간(諫)하다가 수양대군의 노여움을 사서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향후 10대(300년) 동안 등용하지 않는다는 처벌을 받았다. 세조 2년(1456) 영월로 귀양간 단종을 모시기 위한 사육신 사건으로 허후의 아들 손자 등 삼부자가 모두 처형됐는데 셋째 손자는 출생한지 15일 미만이라 죽음을 면하고 이곳 괴산에서 살게 됐다. 허후가 죽은지 300년이 지난 영조 23년(1747)에야 억울한 누명을 벗고 관직이 회복됐다. 영조 42년(1766)에 정간(貞簡)의 시호를 내리고 왕명으로 일곱 고을의 관장(官長)에게 제사 지낼 것을 명했는데 중국의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하려 할 때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꼬삐를 잡고 그 부당함을 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었다는 고사를 비유해 말하기를 '허후는 청렴결백해 모든 언행이 자숙하며 진실된 말로 기탄없이 간함이 백이와 숙제에 뒤지지 아니하다. 백이와 숙제는 말고삐를 잡고 간하였고(叩馬而諫), 허후는 말고삐를 잡고 돌아가라(叩馬而歸) 했다.' 그래서 그 자손이 살아 온 곳을 '고마귀(叩馬歸)'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고말기'라고 부르게 됐다." 그러면 '고말기'라는 지명은 과연 '고마귀(叩馬歸)'에서 유래된 것일까? 지명이란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다른 지역과의 차별성이 있는 지형적 특성을 가지고 부르게 되는 것이므로 순수한 자연 지명이 먼저 만들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이나 풍수지리, 동양 철학, 교훈적 내용을 접목시키거나 또는 표기하는 사람의 이상이나 마을 이름을 미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변이가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고마귀, 고말기'에는 지명에서 흔히 쓰이는 '고마'라는 말이 주요 요소 즉 어근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마'는 지명에서 매우 빈번히 쓰이는 말로서 '크다'는 의미의 '곰, 감'이 그 뿌리이다. 충남 공주는 예로부터 금강 가에 물류 운송의 중심인 커다란 나루가 있어 고마나루(곰나루)라 한 것처럼 지명에서 '곰, 감, 고마, 가마, 감우, 개미' 등으로 변이돼 널리 분포돼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고말기'라는 지명에서 '기'가 어떤 의미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명사형 접미사로 붙어쓰이는 것으로 짐작이 되며 조선시대에도 이곳을 '고마(叩馬), 고마리(叩馬里)'라 기록한 것을 보면 의미가 없는 접미사이거나 아니면 예전에는 '고마리, 고말이'라 한 것 같다. 그러면 한자로 표기하기 전의 지명은 '고마리'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고마리'와 '고말이'는 음은 같으나 표기만 다를 뿐이며 한자로 표기하다보니 한자음의 '마(馬)'와 우리말의 '말'의 음이 달라지는 것과 후대에 허후의 후손이 이곳에 살게 되면서 역사적 사건의 기록인 '고마이귀(叩馬而歸)'와 연관짓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말기'는 '고마리, 고말이'가 그 원형으로서 다른 지역에서는 '가마리, 감골, 감나무골, 개미실'로 변이된 지역을 많이 볼 수가 있으며 '큰 마을'이라는 아주 일반적인 의미이지만 '크다'는 뜻을 가진 고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지명이라 하겠다. 그리고 인근에 해발 539m의 보광산이 높이 솟아 있고, 마을 앞에는 설우산이라 불리는 산이 있지만 마을 뒤의 산은 해발 400~500m의 산줄기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데 특별히 부르는 이름이 없기에 중국 고사에 근거한 마을 유래에 맞춰 수양산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의 가산리(駕山里)와 남이면의 가마리(駕馬里)는 한자로 '駕'로 표기됐는데 남일면의 가중리(佳中里)와 남이면의 가좌리(佳佐里)는 '佳'로 표기됐다. 남일면의 가중리(佳中里)는 남일면의 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래 청주군 남일상면의 지역으로서 옛적에 큰 인물이 살았다해 '대감(大監)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감실'이라 했는데 '감실'에서 '가암실, 갬실, 개미실'로 변화됐다고 전해진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가서리(佳西里), 거치리, 하가리(下佳里) 일부를 병합해 가중리(佳中里)라 해 남일면에 편입됐다. 그런데 예로부터 한자로 가곡(佳谷)이라 표기한 것으로 보면 큰 인물이 살아서 '대감(大監)'의 '감'이 어원이 됐다고 하는 것은 글자의 음을 가지고 연상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중요한 것은 '감'이라는 어원이 보존돼 왔다는 것이다. 가중리의 자연 지명은 개미실이며 상당구 남일면 장암동 방죽말마을과 남일면 가중리의 개미실마을 사이의 골짜기를 '개미실들'로 불린다. '개미실'은 '개미'와 '실'로 분석된다. '개미'는 '가마'가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가마의 어원이 지명에서 '감', '검', '금', '가마', '가매', '고마', '가미', '가무'로 변이되고 나아가서 '거미, 개미, 개마, 개매' 등으로도 나타난다. 특히 '개미'의 경우 '감'에 조음소 '-이'가 붙어 '가미'가 되고, '가미'에 'ㅣ'가 첨가돼 '개미'로 실현된 것이다. 다른 지역의 지명에서 예를 들어보면 진천군 덕산면 인산리의 개미실(가미실), 단양군 영춘면 동대리의 거무실, 음성군 원남면 주봉리의 거미들, 음성군 감곡면의 가미실(감미곡),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의 가무실(玄谷), 경북 봉화군 명호면 고계리의 거무실(蛛谷), 경남 사천시 서포면 선전리의 거무실, 경북 김천시 지례면 거물리의 거무실(거물, 검울, 금곡), 충남 예산군 예산읍 산성리의 거무실(검곡리) 등을 들 수가 있다. 따라서 남일면 가중리의 '가'는 가미실(감실, 개미실)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으며 '가마리'와 같이 '큰 마을'이라는 의미인데 가미실과 가서리, 하가리 등의 중심되는 마을이라 해 '중'을 붙여서 '가중리'가 된 것이며 가서리는 개미실의 서쪽이기에 '가서리(佳西里)'라 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면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의 가좌리(佳佐里)는 어떤 의미를 가진 이름일까? 가좌리(佳佐里)는 본래 청주군 남이면의 지역으로서 가재가 많이 있으므로 가재울, 가재골 또는 가좌곡(佳佐谷)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당리(書堂里), 거치리(巨致里)와 정암리(亭岩里), 양촌리(陽村里), 공수동(公須洞)의 각 일부를 병합해 가좌리(佳佐里)라 했다. 가재가 많아서 가재골이라 했다고 전해지는 마을 유래를 받아들이기에는 전국에 가재울이라는 지명이 많이 존재하므로 공통되는 유래를 찾아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재울이라는 지명은 진천군 덕산면의 신척리를 비롯해 충남 논산시 상월면 석종리, 충남 홍성군 홍동면 금당리, 충남 예산군 삽교읍 신가리, 충남 홍성군 광천읍 상정리, 충남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 충남 서산시 해미면 석포리, 강원 횡성군 우천면 상하가리, 경기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 경기 포천시 가산면 마전리, 경기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 경기 화성시 팔탄면 가재리, 경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가재월리 등 많이 있는데 한결같이 '가재'라는 음을 따라서 가재와 연계시키고 있으나 한편으로 산에 둘러 싸인 지형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산줄기의 '가지(갖)'가 그 어원일 것으로 추정해볼 수가 있다. 실제로 남이면의 가좌리 인근에 있는 갈원리도 가지리(佳芝里)와 구미리(九尾里)를 병합해 지어진 이름이며 이곳 가지리 마을에 있는 가지뜰을 가재뜰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남이면 가좌리는 산줄기의 한 작은 능선을 산이 갈라진 작은 가지로 보아 '가지울'이라 했던 것이 가재울로 변이됐으며 가재울을 한자로 표기하다보니 가좌리(佳佐里)가 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와같이 남일면의 가중리(佳中里), 가산리(駕山里), 남이면의 가마리(駕馬里), 가좌리(佳佐里) 등에 쓰인 '가'는 같은 소리이지만 그 뿌리는 모두 다른 것이니 지형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그 의미를 쉽게 알 수가 있고 구분도 쉬우리라.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과 서원구 남이면은 이름 그대로 청주의 남쪽에 위치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남일면에는 가중리(佳中里), 가산리(駕山里)가 있고, 남이면에는 가마리(駕馬里)와 가좌리(佳佐里)가 있는 등 '가'자로 시작하는 지명이 많은데 모두가 인근에 있는 마을이어서 무슨 의미로 만들어진 지명인지, 한자 표기가 서로 달라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인지 매우 궁금증을 자아낸다. 우선 남이면 가마리는 고려 때 그릇을 굽는 가마가 있었으므로 가마동(駕馬洞)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에 따라 가남리(駕南里), 가북리(駕北里), 가서리(駕西里), 가중리(駕中里)를 병합해 가마리(駕馬里)라 된 것이다. 그런데 그릇을 굽는 가마가 있던 곳이라면 음성군 원남면 하로리의 가마골(釜谷), 강원도 원주군 강천면의 부평리(釜坪里),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부곡리의 가무실(釜谷), 경상남도 창녕군 거문리의 부곡(釜谷) 등에서처럼 한자로 '釜(가마 부)'로 표기해야 하는데 '駕馬(가마 - 사람을 태우는 수레)'로 표기한 것은 그릇을 구웠다는 사실적인 근거가 없이 '가마'라는 음만 가지고 연관지은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다만 '가마'라는 음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오고 있으므로 그 의미를 잃은 채 유지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가남리(駕南里), 가북리(駕北里), 가서리(駕西里), 가중리(駕中里)는 가마동(駕馬洞)을 중심으로 '가(駕)'에 그 위치에 따라 남(南), 북(北), 서(西), 중(中)을 붙여서 만든 이름임을 쉽게 알 수가 있다. '가마'는 '크다'나 '높다'를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충북의 지명에서 '가마-'로 이뤄진 지명을 찾아보면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의 가마실, 단양군 적성면 하리와 소야리의 가마골, 단양군 적성면 용곡리의 가마고개, 보은군 내북면 봉황리의 가마소들, 보은군 내북면 성암리의 가마소, 보은군 삼승면 달산리 와 천남리의 가마바위, 보은군 회남면 사음리와 남대문리의 가마골, 보은군 탄부면 장암리의 가마둠벙, 영동군 영동읍 동정리의 가마실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예가 아주 많이 나타난다. 청주시 북이면 광암리에 넓은 바위가 있으므로 너분바위를 한자로 광암(廣岩)으로 표기하면서 광암(廣岩)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듯이 이 마을 동쪽에 칼바위가 있어 검암이라고 한다. 칼처럼 생긴 바위라 해 한자로 검암(劍岩)으로 표기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은 옛날부터 '감바위, 검바위'로 불려왔으므로 '가마'로 변이되기 전의 음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검'을 '칼'로 생각해 '칼바위'란 말이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같이 '큰 바위'라는 의미에서 '검바위'라는 이름이 쓰여지다가 한자로 '검암'으로 표기됐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가마바위'로 변이 쓰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처럼 청주시 남이면 가마리의 원래 의미는 '큰 마을'인 것이다. 남일면 가산리(駕山里)는 본래 청주군 남일상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멍에처럼 생겼으므로 멍에미라고 부르고 이를 줄여서 머미라 했으며 한자로 가산(駕山)이라 표기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살구징이(杏亭里), 가서리(駕西里), 학산리(鶴山里), 가동리(駕東里), 가북리(駕北里), 가상리(駕上里), 원골(院洞), 지경리(地境里)'를 병합해 가산리(駕山里)라 해서 남일면에 편입됐다. 가산리(駕山里)는 가마리(駕馬里)와 마찬가지로 '가(駕)'로 표기하고 있다. 가마리(駕馬里)는 '크다'는 의미의 '검, 감'이 뿌리가 만들어진 '가마실, 가마골'이 오래 전해지다 보니 수레와 연관짓게 되고 한자로도 수레라는 의미의 '가마(駕馬)'로 표기된 것으로 보이지만, 가산리(駕山里)는 전해오는 자연 지명이 '멍에미, 머미'로서 가마리(駕馬里)와는 전혀 다르게 '멍에(駕)+미(山)'로 구성이 된 지명이다. 보은군 속리산면 삼가리의 '멍어목'과 단양군 단성면 벌천리의 '멍어티'라는 지명이 산의 고개의 모양이 멍에처럼 생겼다해 붙인 이름인 것처럼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금곡리의 멍에미와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의 멍에골도 인근에 멍에 모양의 고개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일면 가산리(駕山里)에도 '멍에'자가 붙은 고개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주변 지명을 찾아보니 멍에미에서 하가산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이 머리고개인데 아마도 그 어원이 '멍에미→멍어미→머미→머리'는 아닐까 하고 추정해 본다.
진천군 덕산면 화상리에 가면 지미실이라는 마을이 있다.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상고리, 습지리, 화성리, 산정면의 옥동리, 상구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면서 화성과 상고의 이름을 따서 화상리라 했다. 자연마을로는 화상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인 '고재'가 있는데 산에 진달래와 철쭉꽃이 매우 많아 꽃재라 부르던 것이 바뀌어 고재, 고척, 곶재, 화성으로도 불렸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어원은 '돋아 나온 언덕'이라는 의미의 '곶잣'인데 '잣'이 '고개'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흔히 '재'로 변이가 되므로 '곶재, 고재'가 되고, '자(잣)'를 음차인 '척(尺)'으로 쓰면 '고척'이 되며, '곶'을 발음이 비슷한 '꽃'으로 해석하면 '꽃재'가 되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 '화성(花城)'이 되는 등 '곶잣'의 음운 변이 과정이 지명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어 매우 흥미로운 지역이다. 화성리의 습지(濕池), 상고(上古), 하고(下古) 3개 마을은 한천 인근에 있으며 3개 마을 가운데 북쪽에 위치한 습지마을을 '지미실'이라 불러왔다. 이 마을은 주민들이 논농사를 주로 하는 전형적인 시골부락으로 옛날에 농부들이 농작물을 거둬 들일 때 비가 조금만 와도 땅이 너무 질어 짐을 잘 메어때렸다 해서 지미실이라 했다고 전해지며 지금은 습지마을로 불린다. 지미실과 습지와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아마도 '습기가 많아서 땅이 질다'는 의미의 '질다'의 어근인 '지'와 '지미실'의 '지'를 관련짓고 '메어때렸다'는 말과 '미'를 연관지었지만, 원래의 지미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의 지명을 찾아서 비교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미실이란 지명은 음성군 맹동면 쌍정리 기미실골, 진천군 이월면 사당리의 관지미, 충남 논산군 광석면 중리의 지미실, 경북 의성군 안평면 도옥리의 지미기, 경남 창녕군 성산면 냉천리의 뒤지미골 등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 '지미실'보다는 '기미실'이라는 지명이 더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봤을 때 '지미실'은 '기미실'이 구개음화해 변이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기미실은 단양군 영춘면 사이곡리의 달기미고개, 달기미산, 영동군 상촌면 돈대리의 기미죽은골을 비롯해 경남 합천군 쌍책면 기미골, 경남 거창군 신원면 와룡리 기미골,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사정리의 기미골, 경북 경주시 내남면 월산리의 기미골, 경북 포항시 남구 장가면 정천리의 기미골 등이 있으며,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의 기미골은 지미골과 혼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미실'이 '기미실'에서 온 것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기미'란 무슨 의미일까?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에 있는 석병산은 동쪽 절골과 황지미골 등 두 개의 큰 계곡을 거느리고 있으며 산지 전체가 석회암으로 이뤄졌다는 것으로 보아 황지미골(한지미골)은 큰 골짜기이므로 '한'은 '크다'는 의미요, '지미'는 골짜기라는 의미임을 짐작해볼 수가 있다. 그리고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구미동이 있는데 구미라는 이름은 탄천이 굽이져 흐르는 곳에 마을이 위치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성남시지'에 보면 구미동은 원래 아홉 성씨가 각각 부락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구성리(九姓里)라 했는데 그 성씨들이 모두 음(音)이 다르므로 구음리(九音里)라 불렀고 거북이처럼 생간 산의 밑의 마을이므로 거북이 그늘이라는 의미로 구음(龜陰)부르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구성리(九姓里)'는 '구석리(구석에 있는 마을)'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고, '구음'이라는 음을 고집한 이유는 '구미, 굼'이라는 소리가 지명에 남아 있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굼, 구무'란 '구멍, 동굴'이라는 의미의 옛말인데 물이 흘러오는 산골짜기의 계곡이 동굴처럼 보이므로 '굼'이라 했을 것이며 '구음(九音), 구음(龜陰)'은 '굼'의 차음(借音)으로 보여진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의 자연지명을 보면 골안, 넘말, 가운데구미(中九美), 낭떠러지말, 뒷구미(後九美), 앞구미(前九美), 잣골 등이 있는데 골짜기를 중심으로 그 위치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구미'는 '골짜기'라는 의미로 쓰인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진천군 덕산면 화상리의 '지미실'은 '큰 골짜기 인근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서 '굼실, 구미실'로 부르다가 '기미실'로 변이되고 이것이 다시 구개음화에 의해 '지미실'이 된 것으로 골짜기 아래에 있으므로 항상 습해 습지마을이라 한 것으로 추정되며 상고(上古), 하고(下古) 마을은 '고재'를 중심으로 해 '위곶(위 능선의 마을), 아래곶(아래 능선의 마을)'의 의미인 것이다.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와 괴산군 사리면 소매리의 경계에 있는 백마산은 청주에서 음성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백마령 고개가 굽이 굽이 험해 백마령 휴게소에서 쉬어가곤 했는데 지금은 백마령 터널이 생겨 눈깜짝할 사이에 통과하지만 터널을 나오자마자 날씨가 달라짐을 느낄 정도로 충북의 남부와 북부의 날씨 경계선이 되는 산이다. 백마령 터널 입구를 들어서다 보면 오른쪽에 백마상이 세워져 있다. 크기는 좀 작지만 깨끗하고 힘찬 기상을 느끼게 해준다. 음성 지역은 특별한 관광지나 사적지가 적어서 음성의 옛 이름인 설성(雪城), 수정산, 가섭산, 6·25 전승지인 감우재 등을 내세우긴 하는데 특산물인 고추, 인삼, 수박, 복숭아 등과 연계하지 못해 외지인들에게 뚜렷하게 어필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 이 백마상은 음성을 상징할 수 있는 천혜의 캐릭터라 생각된다. 특히 음성이라는 지명은 듣는 사람에게 특별한 이미지를 주고 있지 못하지만 '백마(白馬)'라면 말의 힘찬 기상이 군민의 열정과 단합을 과시할 수 있고 백색은 순결함과 고귀함을 나타내며, 특히 청결 고추를 비롯한 친환경 농산물 등 각종 특산물 판매 홍보와 연계한다면 백마 캐릭터에서 얻을 수 있는 엄청난 메리트와 시너지 효과가 클 것으로 생각된다. 백마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에 괴산군 사리면 매바위에 있는 윤씨 가문에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3일 후 아기가 밖으로 나갔다가 닭이 울기 전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생각해 다음날 아기 뒤를 쫓아가니 큰 둥구나무를 훌훌 뛰어넘어 다녔다. 어머니가 아이의 겨드랑이를 보니 날개가 있어 이 애를 내버려두면 후환이 두려울 것 같아 날개를 떼어 내니 아이가 죽고 말았다. 그러자 이 산 동굴에서 백마가 태어나 뛰어내려와 펄펄 뛰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백마가 태어난 산이라고 해 이 산을 백마산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이 전설을 보면 음성 지역은 훌륭한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명당이며 백마산 줄기에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님이 태어나신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음성 지역에서 이 전설을 정신적인 토대로 해 군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세계적인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활동에 좀더 힘을 기울인다면 교육 문화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는 엄청난 호재가 되지 않을까? 백마산이라는 지명은 전국에 널리 퍼져 있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쌍동리의 '백마산(白馬山)', 광주 서구 매월동의 '백마산(白馬山)', 경남 밀양시 단장면 고례리의 '백마산(白馬山)', 경북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의 '백마산(白馬山)' 등 한결같이 '白馬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박말', '박마', '박마산' 등의 지명이 각 지역에 아직도 남아서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백마'와 '박마'는 같은 어원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우리말 중 산을 뜻하는 말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박'이라는 말이다. '박'은 '받'에서 나온 말로서 '박치기'처럼 머리를 뜻하는 데도 쓰이나 지형적으로는 '산, 또는 높은 지형'을 뜻하는 말로 '박달재, 박달산, 박석고개' 등의 지명에 남아 있다. 속어에서 '학교'를 '핵교'로 발음하고 '한길'을 '행길'로 발음하는 경우와 같이 'ㅏ' 모음은 쉽게 'ㅐ'로 ㅣ모음 역행동화현상이 나타나므로 '백두산. 백운산, 태백산, 소백산, 함백산' 등에서처럼 '박'이 '백'으로 변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말'은 크다는 의미의 수식어로서 '말무덤, 말바우, 말개울, 말샘'의 예처럼 지명에서도 많이 쓰여왔다. 따라서 '높고 큰 산'이라는 의미의 '박말산'으로 부르다가 '박말산'이 '백말산'으로 변이되고 '백말산'을 한자로 '백마산(白馬山)'으로 표기하게 된 것으로 유추해 본다면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충남 부여에 가면 유명한 백마강이 있다. 백마강은 거대한 금강 줄기의 일부이지만 백제가 멸망할 때 삼천궁녀가 꽃처럼 떨어져 죽은 낙화암이 있고,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백마의 전설이 깃들여있어 더욱 유명하다. 그런데 금강(錦江)은 '주변 경치가 비단처럼 아름다운 강'이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하지만 '크다'는 의미의 '감, 금'의 수식어가 붙어 이뤄진 것으로도 볼 수가 있고, 백마강 또한 '높다, 크다'의 의미인 '박(백), 말'이라는 수식어가 중첩해 쓰인 것으로 볼 수가 있으므로 백마강과 백마산의 '백마'는 결국 '크다'는 의미의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말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보은군 산외면에 백석리(白石里)라는 곳이 있다. 하얀 돌이 많이 있으므로 '흰돌'이라 하던 것이 변해 '흔들'이 되고 한자로 '백석(白石)'이라 표기했다고 전해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갑리의 일부를 병합해 백석리가 됐다. 흰돌은 밝고 청결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마을 이름으로서 더할 수 없이 좋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도 깊은 뜻을 지닌 특별한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곳 지명을 처음 만들어 쓴 조상들은 어떤 의미로 이 이름을 지었을까? 이 마을에 흰돌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흔들바위가 있어서인지 정말로 궁금하다. 어떤 것이든 지명이 만들어지는 뿌리가 될 수는 있지만 지명이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끊임없이 변이되기 때문에 현재의 소리가 가진 의미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다른 지역에서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지명이나 또는 비슷한 음으로 변이된 지명들의 변이 과정을 비교 분석하면 통계적으로 더 타당하고 유의미한 뿌리를 찾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인근에 비슷한 이름을 가진 백현리(栢峴里)라는 마을이 있다. 성산(城山)의 밑이 되므로 잣고개라 했는데 한자로 백현(栢峴)이라 표기했으며 옛날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으로 이곳 인근에 성(城)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명에서 성(城)의 인근에 있는 고개를 잣고개라 하는데 '성(城)'의 의미인 '잣'을 잣나무의 열매인 '잣(栢)'으로 보아 대부분 한자로 '백현(栢峴)'으로 표기됐다. 이와같은 지명이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백현리와 경북 구미시 산동면 백현리 등이 있고, 진천군 백곡면의 백곡(栢谷), 제천과 원주의 백곡산(栢谷山), 경남 밀양시 용평리의 백곡(栢谷) 등에 쓰인 '백(栢)'도 어원은 다를지라도 '잣'과 연관지어 '백(栢)'으로 표기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렇다면 '백석(白石)'이라는 지명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백석'과 비슷한 음을 지닌 지명에 '박석고개'라는 지명이 있다. 충주시 수안보면 안보리의 박석고개를 비롯해 영동군 가동리에서 남전리로 넘어가는 험한 고갯길에도 박석고개가 있으며, 보은에 있는 말티고개도 옛날에 박석고개라 불렸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밖에도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의 박석고개, 충남 홍성군 홍동면 신기리의 박석고개,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정금리의 박석고개,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의 박석고개, 경기도 양주시 남면 상수리의 박석고개, 경기도 이천시 장록동의 박석고개,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이포리의 박석고개,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의 박석고개 등 여러 지역에 많이 분포돼 있다. 이들 지명들의 한자 표기는 공통적으로 '박석(礡石)'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한자의 의미로 보아 작은 돌과 연관지어 유래나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박석고개라는 지명이 이렇게 전국에 많이 산재해 있다는 것은 '박석'이라고 표기된 말의 어원이 옛날에 일반적으로 지명에 널리 쓰이던 말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박석(薄石)'이란 '얇고 넓적한 돌'을 의미하는데 고개란 비가 오면 땅이 질어서 고개를 넘는데 어려움이 있어 자갈을 깔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고개 이름과 연관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어느 고개나 같으므로 고개의 차별성을 표시해야만 하는 지명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박석'으로 표기하기 전의 원래의 순우리말로 된 자연 지명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해 볼 수가 있다. '박석'의 어원이 되는 우리말을 찾는 실마리는 다음의 지명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인천시 구월동에 백석말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백석'이란 '박달'의 다른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오랜 옛날에 흔히 사용하던 '박달'이라는 말에서 '박'이 '백'으로 변이되는 것은 지명에서 그 예가 아주 많이 나타나며, '달'을 음이 비슷한 '돌'로 보아 한자로 표기하면 '석(石)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박석고개는 결국 '박달재, 박달고개'에서 나온 것으로 '높은 고개'라는 의미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가 있으며 '박달산'이 '높은 산'의 의미라면 '백석말'은 '산지의 높은 지역에 있는 마을'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백현리란 예전에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던 순수한 우리말 지명으로는 잣고개일 것이고, 백석리는 박달말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잊혀졌지만 백석리 인근에 박석고개, 또는 박달재라 불리던 고개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청주시 흥덕구 남촌동에 삽다리라는 자연 지명이 있다. 2순환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왕암을 지난 뒤 남촌길로 우회전하면 바로 남촌동이 되는데, 이 마을 북쪽 1.5㎞ 지점에 있는 들을 삽다리라고 부른다. 남촌동은 원래 청주군 서강내일면(西江內一面) 지역으로 소래울의 남쪽 마을이라 하여 남촌이라 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시행된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청주군 강서면(江西面) 남촌리가 되었다가 1946년 청주군이 청주시(淸州市)와 청원군(淸原郡)으로 분리될 때 청원군 강서면 관할이 됐고, 1983년 이 마을이 청원군에서 청주시로 편입됨에 따라 남촌동(南村洞)으로 개칭되어 현재는 청주시의 행정동인 강서2동 관할의 법정동이 됐다. 삽다리라 하면 그 의미가 궁금증을 자아내면서도 그동안 너무 익숙하게 들어온 지명이다. 우선 라디오가 유일한 대중매체였던 1960년대 말, 온 국민을 라디오 앞으로 모이게 했던 불후의 연속극 '삽다리 총각'이 떠오른다. 삽교 과수원집 일꾼을 모델로 해서 충남 예산지역이 무대가 된 40여 년전 라디오 연속극 '삽다리 총각'의 주제가인 '삽다리 총각'이라는 노래도 당시에 크게 유행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바로 그날 서거하셨으므로 마지막 공식적인 행사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삽교천 방조제는 아산만방조제가 완공되고 6년 후에 완공됐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총력을 기울인 공사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 서울과 인천, 수원에서 충청남도 서해안을 가려면 천안을 거쳐 아산으로 해서 50㎞이상을 우회해야 했지만 두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혁신적인 교통 변혁이 일어나게 됐던 것이다. 본래 이 지역은 염해와 농업용수 부족으로 인한 한해(旱害)를 해마다 겪어왔는데 이러한 자연재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강의 하구에 방조제를 축조한 것이다. 그 결과 충남도 당진, 아산, 예산, 홍성 등의 4개 시군 22개 읍면 지역이 전천후 농토로 변모되었으며, 삽교호는 관광 휴양지로도 개발됐다. 삽다리는 충남 예산군 삽교읍에서 수덕사 방면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다리 이름이기도 한데 다른 지역의 지명에도 '삽다리'가 많이 나타난다.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용계리의 삽다리를 비롯하여 충남 논산시 노성면 효죽리의 삽다리, 충남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의 삽다리,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장능리의 삽다리, 강원도 춘천시 남면 추곡리의 삽다리,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물로리의 삽다리,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조교리의 삽다리, 전북 남원시 천거동의 삽다리, 전남 무안군 현경면 오류리의 삽다리 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 '삽다리'란 무슨 의미로 만들어진 이름일까? '삽다리'는 '삽'과 '다리'로 분석된다. '삽'은 '섶'의 변화형으로 볼 수 있다. '섶'은 '섶나무'의 준말로 '잎나무, 물거리, 풋나무 등의 총칭'을 가리킨다. 지역에 따라서는 '삽다리'와 '신교(薪橋)'가, '삽실'과 '섶실, 신곡(薪谷)'이 함께 쓰이고 있어 이런 추정을 뒷받침해 주고 있으며 삽다리로 변이되지 않고 아직도 '섶다리'라고 불리는 지명이 존재하고 있다. 경북 청송군 청송읍 덕리의 '섶다리'는 청송 심씨 시조묘에 강물이 불으면 관원(官員)과 자손들이 건너지 못할까 걱정해 섶나무를 엮어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1996년에 청송군에서 옛모습의 섶다리를 설치한 바 있다.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옥천리의 자연마을에도 '섶다리'가 있는데 예전에 섶다리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이와같이 실제로 물을 건너기 위한 '섶다리'가 '삽다리'로 변이된 지명도 존재할 수 있으나 그보다는 다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 들판을 '삽다리'라 부르는 지명이 여러 지역에 존재하므로 지명에서의 '다리'는 물을 건너는 '다리(橋)'가 아닌 다른 말에서 변이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명에서의 '다리'는 '들(野')의 변화형이다. 지명에서 '들'은 '달, 덜, 돌, 뜰, 틀' 등으로 나타나는데, '달'에 접미사 '-이'가 붙어 '다리'로 실현된 지역이 아주 많다. 따라서 '삽다리'는 '섶들'에서 비롯된 것으로, '섶이 무성한 들'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보은군 속리산면 삼가리에 '멍어목'이라는 자연 지명이 있다. 글자 그대로 '멍어'는 '멍에'에서 온 말이고 '멍에'는 지형에서 '목'의 의미를 지닌 것이며 '목'의 의미와 중첩되어 쓰인 것으로 추측해 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멍에미'라는 지명은 산줄기를 잇는 잘록한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 지명으로서 유연성이 매우 높아지고 마소의 멍에도 목에 지는 것이기에 멍에와 목이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멍어목'이라는 하나의 지명을 가지고 '멍에'와 '목'을 연관지은 것은 지나친 추리라고 생각된다. 그냥 단순하게 '멍에'의 의미로 보는 것이 어쩌면 더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여러 지역에 전해지는 '멍어-'계의 자연 지명들이 대부분 멍에와 연관짓고 있고 또한 '멍에'의 어원을 살펴보면 '멍에'의 원래 의미가 지형적 특성을 나타내는 지명과의 유연성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우선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가산리의 멍에미는 마을 뒷산의 지형이 멍에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며 '머미'라 변이되어 불리다가 한자로 가산(駕山)이라 기록되었다.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의 멍에골은 소 멍에(소의 목 뒤에 걸쳐서 쟁기를 끌거나 수레를 끌 때 사용하는 기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며, 단양군 단성면 벌천리의 모녀재라는 고개도 '멍어티→ 머너티→모녀티'의 변이과정으로 유추하여 볼 때 멍어티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밖에도 전국의 지명에서 찾아보면 강원도 안변군 삼성리의 멍어지골, 강원도 창도군 신성리 멍어소산,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도천리의 멍어리바우, 경남 사천시 동서동에 있는 신수도라는 섬의 멍에치,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加南面) 금곡리의 멍에미 등이 있다. 옛날에 만들어진 돌다리에는 반드시 멍에석이라는 돌이 교각을 연결시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서울의 살곶이다리는 행당동 한양대 뒤편에서 뚝섬(성수동) 사이에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조선 성종 14년(1848년)에 완공되었으며 세종2년(1402년) 상왕인 태종의 명으로 공사를 시작하여 성종 대에 완공되었다. 돌로 된 교각 4개를 일정 간격으로 세우고 그 위에 상판석을 깔았으며 교각과 상판 사이에는 멍에석과 귀틀석을 놓아 흐르는 물에 잠겨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독특한 조형미를 표현하였다. 옛날에 청주의 남쪽 관문이 되는 대표적인 다리의 이름이 남석교였다. 1920년대 일제가 이 일대 물줄기를 메워 도로를 내는 과정에서 매몰함으로써 지금은 청주시 석교동 육거리시장 인근 지하에 100년 가까이 묻혀 있다.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귀중한 문화유산이지만 햇빛을 보지 못하다 보니 문화재로도 등록되지 못하였다. 현재 육거리 시장 인근의 아스팔트 노면 바로 밑에 묻혀 있으며 하수구 맨홀로 들어가면 남석교의 일부 멍에석, 장귀틀 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복원은 어렵더라도 일부의 모습만이라도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한다면 청주의 문화유산의 발굴 보존과 함께 육거리 시장과 연계하여 관광자원으로 개발할 수도 있지 않을까? 국어 사전에 보면 멍에란 마소의 목에 얹어 수레나 쟁기를 끌게 하는 '∧' 모양의 막대라 풀이되어 있으며 학계에서도 멍에는 ㅅ자로 구부러진 모양으로서 '굽다[曲]'가 그 어원으로 보고 있다. 즉 '굽다'에서 '구부러지다, 굽이'등이 파생되고 음절 도치에 의하여 '불거지다, 보그, 버게'가 파생되었으며 '보그'는 'ㅂ탈락'으로 '오그리다. 오그러지다'로 변이되고 '버게'는 '버게→머게→멍게→멍에'로 변이되었다. '그 변이 과정에 있는 '멍게'가 경상북도의 방언에 남아서 '멍에'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그 근거로 들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멍에'가 '∧' 모양으로 굽은 것을 나타내기에 지명에서 산이나 고개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많이 쓰인 것으로 짐작이 된다. 돌다리를 만드는데 꼭 필요한 멍에석은 '∧' 모양의 돌이라는 의미도 되겠지만, 두 교각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다리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고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멍에'의 비유적 의미인 '쉽게 벗어날 수 없도록 얽매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의 의미로 교각을 서로 움직이지 않도록 얽매는 의미에서 멍에석이라 했다면 지명에서의 '멍에'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말로 보인다.
청주에서 충주로 가는 36번 국도를 가다 보면 증평을 지나 도안면 화성리라는 곳에 '울어바위'라고 유난히 크게 새긴 마을 표지석을 볼 수가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며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도 마을 이름이 이상해서 한번 더 쳐다보게 되는데 정작 마을에 들러 살펴보면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울어바위는 찾을 수 없고, 거대한 울어바위 마을 표지석이 마치 자신이 울어바위인 것처럼 마을 입구에 덩그러니 서 있다. 이 울어바위라는 마을 이름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울어바위 마을은 한자로 명암(鳴巖)이라 표기하고 있으며 본래 청안군 북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성도리(城都里), 구화리(九花里), 상작리(上作里), 행화정리(杏花亭里), 칠곡리(七谷里), 하작리(下作里), 명암리(鳴巖里), 비석리(碑石里) 일부를 병합하여 구화(九花)와 성도(城都)의 이름을 따서 화성리라 하여 괴산군 도안면에 편입되었다. 1990년 괴산군 증평읍, 도안면을 관할하는 충청북도 증평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2003년 증평읍이 증평군으로 승격되면서 도안면이 괴산군에서 분리되어 증평군에 소속하게 되었다. 마을 표지석에 보면 울어바위 마을의 유래와 전설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울어바위(鳴巖) 마을은 이성산 삼봉의 정기를 받고 보광천이 흐르는 청주-충주간 국도변 증평-도안 연계에 위치한 500여년 된 곡산 연(延)씨 세거지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을 지나던 어느 대사가 마을 동남쪽 안산 아래에 있는 넓고 큰 바위를 보고 신령한 바위라 하여 '鳴巖'이란 글자를 새기고 국가의 대란이 있을 때 이 바위가 울 것이라 예언한 뒤로 마을의 이름을 울어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바위가 큰 소리를 내어 울었다고 하며 당시 안음현감 연충수(延忠秀)께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사실이 동국여지승람에 전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10-1926년 36번 국도와 (구)충북선 철도가 놓이면서 바위는 매몰 파손되었고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1914년 인근 마을과 함께 화성리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는 역사의 기록에 근거하여 사실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전설은 전설일 뿐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울어바위라는 이름의 소리에 따른 의미와 역사적 사건을 잘 결부시키고 있지만 지명이란 지형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주변의 지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화성리의 이웃 마을인 연촌리는 해발 584m의 두타산 아래에 위치하므로 지형적으로 험한 벼랑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벼루재(硯峴), 안벼루재(內硯), 바깥벼루재(外硯), 연티리(硯峙里)' 등과 같은 지명들에 있는 '벼루'는 한자로 '硯(벼루 연)'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벼랑'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마을을 언제부터 울어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1970년에 한글학회에서 간행한 에 의하면 주민들이 '우러바위'라 하지 않고 '우래바위'라고 발음하므로 마을 이름을 '우뢰바위'로 기록하고 있다. 우뢰바위라는 이름은 벼락바위를 한자로 기록한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으며 벼락 바위는 벼랑바위가 변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마을이 이성산의 산자락에 있어 벼랑이 많은 지형이며 이 마을의 자연 지명에 '벼락골'이라는 이름이 아직도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이 마을에 있는 '큰파랑골, 작은 파랑골' 등의 자연 지명도 '벼랑골'에서 변이된 것이다. 지명에서 벼랑골의 변이형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와 소여리, 음성군 원남면 문암리, 음성군 감곡면 단평리 등에도 '벼락바위'가 있으며 보은군 내북면 성티리에는 '비재, 벼재, 별재, 성티(星峙)'로, 단양군 영춘면 별방리에는 '별왕골, 별방골, 별방리'로,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 '바랑골, 발산(鉢山)'으로 단양군 적성면 파랑리에는 '바랑골, 파랑곡'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마을이 이성산 아래에 위치하여 지형적으로 벼랑이 많은 지역에 속하기 때문에 '벼랑골'이라는 자연 지명이 일부는 '파랑골'로 변이되기는 하였지만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곳의 벼랑을 이루는 바위도 자연스럽게 벼랑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벼랑바위는 벼락바위로 불리게 되었고 이곳에 마을이 들어서면서 이 자연 지명이 마을이름이 된 것이다. 그런데 마을이름은 한자로 기록하여 조정에 보고해야 하였기에 '벼락바위'를 한자로 기록하다보니 '우뢰(雨雷)바위'가 된 것이며 이것이 음운 변이되어 '우뢰바위→우러바위→울어바위'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증평(曾坪)은 본래 청안군 근서면의 지역인데, 1914년 전국적인 행정구역의 폐합이 이루어질 때 증천(曾川)과 장평(莊坪)의 두 이름에서 하나씩의 글자를 떼어 붙여 증평면을 만들어 괴산군에 소속시키면서 생겨난 이름이다. 그 중 장평(莊坪)은 장뜰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본다면 증천(曾川)은 어디에서 비롯된 이름일까· 증평읍에 증천리(曾川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증평읍의 동남쪽 삼기천가에 위치하며 청안과 보은, 초정으로 갈라지는 길목에 있다. '증천'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유래는 증평의 도심지역 중 전답과 자연녹지가 제일 많은 곳이므로 중국의 사성인 증자를 상징하여 증천동이라 칭하였다고 전해진다. 옛 기록을 보면 현재의 증천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증자천리(曾子川里)가 있었다고 한다. 증자천 옆(또는 앞)에 있는 동리라 하여 증자천리로 불리운 것 같다. 이 증자천리가 증천리로 변화된 것으로 추정해볼 때 생략된 '자'는 의미의 중복이거나 아니면 별다른 의미가 없는 말이었을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증자천의 어원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 냇물의 다른 이름인 일명 '진지내'라고 하는 자연지명에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진지내의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전국의 지명에서 '진지-'형으로 구성된 이름을 찾아보았다. 강원도 영월군 북면 연덕리의 진지골,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도장리의 진지골,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좌항리의 진지골들, 경북 안동시 일직면 평팔리의 진지골, 전북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의 진지골, 경북 영천시 임고면 매호리의 진지골, 경북 영천시 임고면 수성리의 진지골, 경북 포항시 북구 기북면 탑정리의 진지골, 경북 영덕군 병곡면 아곡리의 진지골, 경북 청도군 청도읍 안인리의 진지골 등등 많이 나타나고 있다. 전남 고흥군 과역면 백일리의 진지도(陣地島)라는 섬은 고려 말엽에 수군만호가 이곳에 진지(陳地)를 설치하여 진지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진지를 설치하기 전부터 존재하던 자연지명이므로 '진지'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것은 진지(陳地)의 설치와 같은 역사적 사건과는 연관이 없는 것이며 "진지'는 지형의 특성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자연 지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에 있는 진지내골은 구장터 뒤에 있는 골로 골이 깊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며, 제천시 덕산면 도기리의 진장골은 '길다'는 의미의 '장'이 붙어 있다. 그리고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도장리의 진지골의 인근에 장평리가 있고 경북 영천시 임고면 매호리의 진지골도 인근에 골짜기의 길이가 약 4km나 되는 기다란 골짜기가 있다는 것으로 보아 '진지'는 '길다'라는 의미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북 영천시 북안면 서당리의 진내골, 경남 하동군 고전면 범아리의 진내골, 경남 하동군 고전면 전도리의 진내골,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비상리의 진골,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내암리의 진골, 음성군 대소면 수태리의 진골,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의 진골, 음성군 생극면 관성리의 진골, 증평군 증평읍 덕상리의 진골,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기암리(岐岩)의 진골, 괴산군 청안면 문당리의 진골, 보은군 수한면 율산리의 진골 등의 지명 예를 볼 때 산의 차별성은 높고 낮은 것이지만 골짜기는 길고 짧은 것으로 구별되므로 긴 골짜기를 가리킬 때 '진골'이라 했을 것이며 계곡에는 냇물이 흐르므로 '진내골'이라는 지명의 명명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기나긴, 잘디잔, 크나큰'과 같이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중첩해 쓰는 것처럼 길다는 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진지'와 같이 중첩한 것으로 볼 수가 있고 여기에서 중첩된 '지'는 쉽게 생략될 수 있으므로 '진지내'를 증자와 연관지어 '증자천'으로 표기했지만 그 의미를 알고 있던 시기에 중첩된 의미인 '자'를 생략하고 '증천'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따라서 장평(莊坪)과 증천(曾川)의 '장'과 '증'이 모두 '길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로서 '기다란 내'라는 의미의 '진지내'라는 이름에서 한자 표기인 '장천(長川)'이 생겨나고 그 아래 생성된 뜰을 장평(長坪)이라 했으며 '진지내'가 '증자천'을 거쳐 '증천(曾川)'이 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증평은 청주의 북쪽에 위치해 음성이나 충주, 제천을 갈 때는 이곳을 거쳐 가게 마련이다. 지명에 '증'자가 있는 예는 그리 많지 않으므로 증평을 지날 때마다 '증평'이라는 지명은 무슨 의미로 지어진 이름일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해 왔다. 지명에 '증'자가 들어 있는 곳을 찾아보면 대부분 '시루-'라는 지명을 한자로 표기한 경우다. 청주시 오송읍 상정리의 '시루봉',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쌍수리의 '시루봉, 시루바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구룡리의 '시루봉',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의 '시루봉', 단양군 대강면 남조리의 '시루봉', 단양군 영춘면 장발리의 '시루봉', 단양군 어상천면 임현리의 '시루산', 보은군 마로면 소여리의 '시루산' 등 각 지역에 두루 쓰이고 있는 '시루'는 고어 '술(높음·으뜸)'에서 온 말로 '술→수루→시루' 혹은 '술→수루→수리'의 과정으로 변이돼 온 것으로 볼 때 '시루'는 '수리'와 같은 어원을 가진 말로서 '주변에서 으뜸이 되는 높은 봉우리'를 '수리봉, 수리산, 시루봉, 시루산'이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중의 일부 '시루산, 시루봉' 지명에서 '시루'의 의미를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甑(시루 증-떡이나 쌀 따위를 찌는데 쓰이는 둥근 질그릇)'으로 보아 '증산(甑山)'으로 표기했으니 괴산군 소수면 고마리의 '시루미'를 증산(甑山)으로, 보은군 내북면 이원리의 '시루산'을 '증산(甑山)으로, 보은군 산외면 증티리의 시루산, 시루봉을 증산(甑山)으로 표기한 것들이 그 예이다. 지명에서 '시루'를 '증'으로 표기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증'의 예를 찾기가 어렵기에 '시루산'과 아무 연관이 없는 증평이라는 지명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더해져만 갔다. 그러던 중 증평의 장뜰 시장을 지나면서 증평이라는 말이 '장뜰'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뜰시장은 증평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데 '장이 선다' 해 '장뜰'로 부르다가, 장터 이름도 장뜰시장이 됐다고 전해지지만 사실은 장이 서기 전부터 이곳의 땅이름이 장뜰이었으니 '장'의 음이 같은 것을 가지고 연관 지어 해석한 것이리라. '증평(曾坪)'은 본래 청안군 근서면의 지역인데, 1914년 전국적인 행정구역의 폐합이 이뤄질 때 청안군에 소속됐던 전체가 괴산군으로 합쳐지게 되자 청안군 남면의 26개리와 청안군 북면의 2개리, 청안군 읍내면의 회룡리, 청주군 산외2면의 초중리, 금대리의 일부와 월경, 청유 2개리를 병합해 증천(曾川)과 장평(莊坪)의 두 이름에서 하나씩의 글자를 떼어 붙여 증평면이라 이름해 괴산군 증평면이 됐으며, 1949년 8월 13일 인구 증가로 증평읍으로 승격됐다. 1990년 12월 31일 괴산군 증평읍, 도안면을 관할로 충청북도 증평출장소가 설치됐다가 2003년 8월 30일 괴산군에서 분리돼 군으로 승격한 증평군은 증평읍과 도안면의 1읍 1면으로 동해바다에 있는 울릉군을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가장 작은 군이다. 그러면 장평(莊坪)의 어원은 무엇일까? 장평(莊坪)이라는 한자 표기는 장뜰에서 온 것인데 장뜰이란 자연 지명을 유지해 온 지역은 증평읍 장동리에 있다. 증평이란 행정구역 명칭이 이에서 비롯될 만큼 한때 증평의 으뜸 마을이었다는 증평읍 장동리는 웃장뜰이라 불리우는 장동1리를 포함해 모두 7개 마을로 이뤄져 있다. 장동1리의 마을이름을 '웃장뜰'이라 해 장뜰에 웃(위)자가 붙게 된 것은 증평군청 앞 사거리에서 청안 방면의 592번 지방도를 중심으로 '아랫장뜰'인 신동리와 구분키 위해 부른데서 유래된다고 한다. 그러면 장뜰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증평읍 남차리에 예로부터 장내, 장천(長川)이라고 부르는 하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내에 해마다 홍수가 밀어닥쳐 농토의 피해가 많아 수살고사를 올려 이를 막아왔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렇다면 이 장천의 하류 지역에 장천이 만들어낸 들판을 가리켜 자연스럽게 '장뜰(장들)'이라 불러온 것으로 짐작이 된다. 따라서 장내, 장천이라 부르는 하천의 아래쪽에 생겨난 들판이 장뜰이요,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 이뤄진 마을 이름도 역시 장뜰로 부르다가 한자로 '장평(莊坪)'으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과 지동동에 걸쳐 있는 부모산은 해발 282m로서 우암산과 마주하여 우뚝 솟아서 청주시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전망 좋은 산이다. 이 산은 청주의 도심에 위치하여 산책로가 거미줄처럼 다양하게 얽혀 있어 시민들이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런데 부모산을 오르는 사람들마다 부모산이라는 이름이 다른 산이름과는 성격이 달라서 역사적으로 어떠한 전설이 깃들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특히 '부모'와 '산'과는 상호 연관성이 적으므로 그 의미와 유래에 대하여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이 산은 아양산(我養山)이라 불렀으나 몽고의 침입 때 이 지방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을 하였는데, 다행히 이 산에 항상 안개가 끼어 있어 산 밑에서 평지를 노략질하던 적군의 눈에 뜨이지 않아 공격을 받지 않았고 그 결과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부모산성에서 군인들이 적과 싸울 때 성 안의 물이 떨어져 사람과 말이 목말라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성 안에서 샘물이 솟아나 살았으므로 그 은혜가 부모와 같다고 하여 부모산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산의 정상에 부모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일부 발굴하여 보존하고 있으며 아래쪽에는 우물터가 남아 있어 이름에 대한 유래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전국의 지명에서 '부모산'이라는 이름은 이곳에만 있을 뿐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으므로 원래의 이 산의 지형적 특성을 나타내는 고유한 이름이 있었으나 중간에 변이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의 이름은 '부모'라는 음과 비슷한 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산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비슷한 지형과 이름을 가진 지명을 찾아보니 '불무골'이라는 이름이 여러 지역에서 아주 많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부모'는 '불모'의 변형으로 생각되고 '불모'는 또 '불무'의 변형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즉 불무산의 '불무'는 '풀무'를 뜻하는 중세국어의 '불무'에서 온 것으로 보는 것이다. 충주시 소태면 야동리라는 마을도 예로부터 '불무골, 풀무골'이라 불리던 마을이름을 한자로 기록할 때 '불무, 풀무'라는 말이 대장간의 불무와 같으므로 자연스럽게 '대장간, 불무'라는 의미의 '야(冶)'와 '고을 동(洞)'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밖에도 '불무골, 풀무골'이라는 자연 지명이 전해져 오는 지역을 충북에서 찾아보니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내암리의 불무골,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문박리의 불무골,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가양리의 불무골, 보은군 회남면 남대문리의 불무골, 보은군 보은읍 산성리의 불무골,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의 불무골, 영동군 양강면 지촌리의 불무골, 영동군 학산면 봉소리의 불무골 등 각 지역의 골짜기에 흩어져 있으며 전국에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부모산을 아양산(我養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흥덕구 신봉동에 있는 야양산(爺孃山)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부모산의 원래 어형인 불무산의 '불무'와 야양산의 '야(爺)'가 '야(冶)'로서 의미상 대응된다는 점에서 그 어원이 '불무산'임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준다고 하겠다. 아마도 부모산의 지명 전설을 참고하여 '야양'을 '아양(我養)'이라 표기함으로써 부모산과 아양산(我養山)을 의도적으로 연관지으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불무'는 무슨 의미일까. '불무'를 '대장간의 풀무'로 보는 것은 음이 상호 유사하기 때문이며 사실은 '붇뫼'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붇뫼'란 '돋아나온 산'의 의미이므로 지명으로서 그 유연성이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으며 '붇뫼→ 불뫼 → 불모 → 부모'의 변이 과정을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이와같이 산의 이름이 만들어질 때는 주변의 산과 구별하기 위한 지형적 특징을 나타내는 말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한번 밝혀 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 변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생소한 이름에 대하여 나름대로 해석해 보고 역사적인 사건과 연관지어 합리화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던 조상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이다. 이제 부모산을 오르는 모든 사람들이 조상들이 상상해 낸 전설상의 재미있는 의미와 함께 부모산의 은혜와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도 아울러 생각하는 산행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영동군 용산면 산저리(山底里)는 마을 주민들에게 '밑골, 산저, 밀골, 별골, 성곡'의 이름으로 불리어 왔는데 '성곡(星谷)'은 '별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벼랑 근처에 있는 골짜기나 마을'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여기에서 '밑골, 산저, 밀골'이 '저산리'의 어원을 찾는데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즉 '밀골'이란 '밑골'이 음운 변이된 것이고 '밑골'이 오랫동안 불리어 온 이 마을의 지명인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산의 밑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보아서 '산저(山底)'가 된 것이다. 그러나 지명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지형의 위치가 아래에 있다고 해서 '밑'이라는 말로 쓰인 지명의 예는 찾기가 어렵고 일반적인 지명의 유연성으로 볼 때에도 '밑골'의 '밑'은 '아래'의 의미로 보기보다는 '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밑골'은 '묏골(산에 있는 골짜기나 마을)'의 의미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저산리'의 지명이 만들어지게 된 '저산'은 산(山)이므로 오랜 옛날에 그냥 산이라는 의미의 '잣'이라고 불리다가 '잣'의 의미가 변이돼 그 의미가 명확히 전달되지 않으므로 그 당시 많이 쓰이던 '산'이라는 말을 뒤에 중첩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명에서 이러한 예는 너무나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음성군 원남면 덕정리에 '자작이', '자작이 고개', 충주시 소태면 중청동의 '자자기', 충주시 노은면 법동의 '자자기'가 있는데, 이들은 '잣'을 중첩해 '잣잣'이라 쓰고 지명으로 불러야 하기에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 '이'가 붙어서 '잣잣 → 잣작+이 → 자작이 → 자자기'의 변이 과정을 추정해 볼 수가 있다. 청주에서 진천을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가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의 잣고개인데 지금은 17번 국도를 4차선으로 확장하면서 진천 터널이 생겨 이 고개를 넘을 일이 없지만 예전에는 버스를 타고도 한참을 넘어야 하는 꽤 험한 고개로 기억이 된다. 충주시 노은면 법동의 자자기고개를 '자작현, 잣재'라 하는데 역시 '잣고개'이며 '잣'은 '산(山)'의 순수한 우리말로서 '산의 고개'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으며 '산(山)'이라는 한자어가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면서 '잣'의 의미가 불분명해지자 '고개'를 뒤에 중첩해 쓴 것이다. 그러면 '잣'이 '자, 작, 재'로 변이된 예는 많이 있는데 '저'로 변이된 예가 있을까? 이는 각 지역에 산재해 있는 '절골, 적골, 한적골'이라는 지명에서 찾을 수가 있다. 즉 '잣골 → 적골 → 절골'의 변이 과정으로 본다면 '저산'의 어원을 '잣산'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더욱 분명한 근거가 되는 것은 '저산'을 주민들이 '계산(鷄山)'이라고도 부른다는 것이다. 제천시 청풍면에 계산리[鷄山里]가 있는데 마을 뒷산인 비봉산(飛鳳山)의 산세가 닭의 형국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달리 '계장골, 계장곡(鷄場谷), 제장골'이라고도 불리고 있고, 충남 예산군 예산읍의 사리에도 저산리라는 자연 지명이 있는데 이곳 마을 이름을 계명(鷄鳴)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보아 '달기(닭,鷄)'와 '산'과의 연관성이 드러나고 있다. 지명에서 '계산'의 어원은 '달기산'이며 '달기'의 의미는 '산(山)'이므로 '저산'을 오랜 옛날에는 '달기산'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가 있는데 이러한 흔적이 남아 있다면 이를 찾아내는 것은 마을 주민들의 몫이 아닐까? 그러면 '은적산(恩積山)'이라는 이름의 어원이 궁금해진다. 지명이 전해져 온 역사를 통시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으므로 일반적인 지명들의 어원을 통계적으로 살펴서 추정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 '은적산'은 '온적산'에서 변이된 것으로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즉 '적산'이 '잣산'에서 온 말로 '저산'으로 변이된 것으로 볼 때 앞에 위치한 '은'은 '잣(山)'을 수식하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산의 형태를 표현하는 말일 것이니 일반적으로 지명에서 지형의 크기를 나타내는 '크다'는 의미로 '온'이 쓰이고 있다. 그리고 은적산이 해발 206m의 작은 산이지만 인근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며 정상에는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테뫼식 산성인 저산성(猪山城)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고려 시대의 봉수터가 남아 있어 복원됐고, 단군 성전이 또한 이곳에 있으며 해맞이 명소로 알려진 점 등을 미뤄 보면 주변에서는 크고 높은 산이므로 은적산의 어원을 '큰산'이라는 의미의 '온적산'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에 저산리(猪山里)라는 마을이 있다. 오늘날의 강서동과 일부 시내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은 조선시대에 서강내일면(西江內一面)이었고 서강(美湖川)의 안쪽의 두번째 면이 서강내이면(西江內二面)이었다. 저산리는 서강내이면(西江內二面) 지역이었는데 1909년에 서강내이상면(西江內二上面)과 서강내이하면(西江內二下面)으로 나뉘었다가 5년 뒤에 부군면(府郡面) 통폐합에 따라 강내면(江內面)으로 통합되었으며, 2014년 7월 1일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되면서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으로 변경되었다. 마을 인근에 저산(猪山)이라는 산이 있으므로 이 마을을 '저산(猪山)' 또는 '계산(鷄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백천리(白川里), 상저산리(上猪山里), 하저산리(下猪山里), 남차이면(南次二面)의 삼티리(三峙里) 일부를 병합하여 '저산리(猪山里)'라 하여 강내면에 편입된 것이다. 저산리(猪山里)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는 은적산(恩積山)에서 비롯된다. 마을 동쪽의 은적산(恩積山)의 다른 이름이 저산(猪山)인데 멧돼지가 출몰해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은적산 정상에는 단군 성전이 있으며 고려시대 봉수터도 남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은적산에 저산이라는 이름과 연관지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옛적에 어느 스님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밤에 나와 목욕을 하다가 괴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것은 산쪽에서 내리쬐는 온화한 빛이 들쪽에서 뻗치는 살기가 감도는 빛과 맹렬한 싸움을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부처님의 힘을 빌어 선이 악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다음날 마을사람들이 들판에 크게 파인 웅덩이에 가보니 커다란 흑구렁이가 비늘을 번득이며 죽어 있었다. 스님이 산길을 걸어가다가 피곤하여 잠시 소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산중턱에서 멧돼지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스님의 장삼 자락을 물고는 언덕 아래로 구르게 하였다. 그 순간 소나무 위에서 커다란 독사 한 마리가 뚝 떨어졌다. 멧돼지는 떨어진 독사를 죽이고는 다시 산속을 달려갔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스님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멧돼지의 행방을 찾아 산속으로 들어가는데 절벽 아래에 맑은 물이 흐르는 곳에 온화한 광채를 띤 멧돼지가 새끼들을 데리고 누워 있다가 스님을 보고는 경의를 표하였다. 이에 스님도 멧돼지에게 감사하며 산을 내려갔다. 그 후로 사람들은 이 산에 멧돼지가 살고 있다고 해서 '저산(猪山)'이라고 부르고, 멧돼지가 은혜를 갚았다고 해서 '은적산(恩積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산(猪山)'과 '돼지'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경남 통영시 도산면의 '저산리(猪山里)'라는 마을은 마을 동남쪽 산등성의 형세가 마치 돼지가 누워있는 것처럼 생겼다는 설과 옛날 인근 야산에 산돼지가 많이 서식했던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돼지와 연관지어 '저(猪)로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강내면 저산리(猪山里)와 유사하다. 그러나 충남 서천군 판교면의 저산리(苧山里), 전북 김제시 공덕면의 저산리(楮山里) 등을 볼 때 '저'를 '돼지'로 생각한 것은 임의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천자문과 명심보감 정도만 겨우 배운 수준인 당시 고을의 아전들이 매년 각 마을의 호구를 조사하여 보고할 때 '저산'이라 불리는 마을을 한자로 기록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저'라고 하면 '손오공의 저팔계', 고깃간의 '제육(猪 +ㅣ+肉)'이 떠오르고 또 산에는 으레 산돼지가 출몰하게 마련이니 '돼지'의 의미로 본 것이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리라. 하지만 '저산리'라는 지명들은 한자로 표기하기 전에 불리던 자연 지명이 '저산'이기 때문에 '저'의 어원은 한자어가 아닌 순수한 우리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청주시 남이면의 척산리(尺山里)는 '잣산 →자산'으로 변이된 후 '자'를 한자로 '척(尺, 자 척)'으로 표기한 것이다. '저산'의 다른 이름이 '은적산(恩積山)'인데 '은'을 제외하면 뒤에 있는 '적산'은 분명히 '저산'의 어원인 '잣산'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잣산 → 자산 → 저산'의 변이 과정을 유추해 볼 수가 있으며 후세에 '저산'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저'의 의미를 알 수가 없자 어느 산이나 흔하게 있는 산돼지와 연관지어 '저(猪, 돼지)'로 표기하게 되고 산돼지와 연관된 유래까지 만들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