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리의 어원을 찾기 위한 힌트는 다음의 지명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미천리(美川里)는 이 곳의 산림(山林)이 울창하고 흐르는 계곡의 물이 너무나도 맑고 아름다워 '미래'라고 불렀는데, 언제부터인가 아름다운 내(川)가 흐르는 곳이라 하여 '미내(美川)', 즉 '미천(美川)'이라 개칭했다고 한다. '미천'이라는 말이 순우리말인 '미내', '미래'에서 온 것이라면 '미천의 '천(川)'은 '샘물이 흘러내리는 내'를 의미하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미'는 한자어가 아닌 순우리말 '미'의 소리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명에서 '미'는 '뫼(山)'의 변형으로 쓰이고 있으므로 '미내, 미래'란 '산에서 흘러나오는 내'의 의미이며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작은 옹달샘이나 작은 연못을 이루어 사람들이 유용한 생활용수로 사용하게 되고, 이곳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마을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지명으로서 이보다 더 유연성이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미래'라는 어원을 간직하고 있는 지명이 존재하는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충주시 엄정면에 미내리(美內里)가 있고 충남 강경읍에는 미내다리(渼奈橋)라 불리는 다리가 있는데 행정구역으로는 논산시 채운면 삼거리에 위치한다. 이 다리는 조선 영조 7년(1731)에 만든 것으로 미내천에 있어서 미내교라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석재를 사용한 3개의 아치형 돌다리로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높아서 충남 유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들 지명들이 모두 물이 흐르는 내(川)과 관련이 있어서 이들의 어원을 '산에서 흘러나오는 내'의 의미로 해석하는데 무리가 없어 보인다. 물과 연관이 있다 보니 '미'가 '물'을 의미하는 '무'로 표기된 지명도 있다. 영월군 영월읍 문산리의 무내리는 문산리의 본 마을로서 물내리라고도 부르며 마을 한가운데에서 풍부한 수량의 샘물이 솟아나므로 옛날부터 샘물이 항상 넘쳐흘러 내를 이룬다하여 '물내리→무내리'라고 하였고 한자 표기로 문천리(文川里)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강원도 철원군의 무내리, 강원도 정선읍 북동리의 무내리(水出洞) 등도 샘물이 흘러내린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라는 공통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경북 예천읍 대심리에 무리실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전해져오는 마을 지명 유래를 살펴보면 무리실(水谷, 茂里室)은 신라 때의 예천 이름인 수주(水酒)가 이 마을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무리실은 옛날에는 물이술로 불리어지다가 한자로 수주(水酒)라 표기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미내'에서 '미래, 무내, 무래, 무리' 등의 음운 변이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경기도 포천과 동두천의 경계를 이루는 왕방산에는 유명한 물어고개가 있는데 한자로 문례현((問禮峴)이라 표기하고 있다. '포천군지(1984)'에는 이 고개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고 한다. 고려 말엽에 해주, 충주 목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해당하는 시중(侍中)을 거쳐,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에까지 봉해졌던 성여완(成汝完)이라는 분이 난세를 피하여 이곳 '왕방산(王方山)' 아래에서 우거(寓居)하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등극하게 된 이성계가 이 고개를 넘어 예를 갖추어 이곳 성여완을 찾아와서 이씨 조정에 입조(入朝)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뒤부터 이 고개를 예를 갖추어 찾아온 고개라 하여 '문례현(問禮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무럭재'는 '문례현'의 와전(訛傳)이라 전해진다. 또 일설엔 근년에 '독곡'선생이란 분이 어느 날 '문례현'을 넘어 집으로 돌아가다가 '후유. 이 고개가 아직도 얼마나 남았을꼬. 아니 이 고개 이름이 무슨 고개인고' 하면서 자문을 했다고 하여 이 고개를 '물어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러한 전설이나 유래들은 다른 지명의 예와 마찬가지로 지명의 음과 유사한 말의 이미지나 한자 지명에서 한자의 훈을 가지고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지어낸 것들로 짐작된다. 여기에서 무럭재, 물어고개, 문례현 등은 모두 무리실에서 파생되어진 말들이며, 무리실은 '미내, 미래'를 어원으로 하는 지명으로서 문의의 미천리와 맥을 같이 하는 지명들임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문의면 소재지는 문의면 미천리(米川里)에 있다. '미천(米川)'이란 '쌀을 가꾸는 논에 물을 공급하는 내'를 의미하는 말이므로 참으로 좋은 의미이지만 행정구역 단위인 '리(里)'가 붙어 미천리(米川里)가 되매 발음할 때의 이미지가 좋지 않은 의미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소금 장수에서 일약 고구려 제15대 왕이 된 미천왕(美川王)은 왕이 된 후 낙랑을 점령하고 요동에 진출해 동북아의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훌륭한 왕이었으며 사후에 '미천왕'이라 부르게 된 것을 보면 '미천'이라는 말이 옛날에는 정말로 좋은 의미의 말로 쓰였음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좋은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도 미천리라는 지명이 어떤 의미에서 연유되어 어떤 변화를 거쳐 이렇게 부르게 되었는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미천리(米川里)는 본래 문의군(文義郡) 읍내면(邑內面)의 지역으로서 뒷산의 절에 중이 천여 명이 있어서 조석으로 쌀을 씻는 뜨물이 내를 덮었으므로 새미실, 또는 미천(米川)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대리(新垈里)와 덕은리(德隱里)를 병합하여 미천리라 해서 청주군 양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30년에 다시 문의면에 편입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펴낸 '고지도를 통해 본 충청지명연구'에 의하면 미천리(米川里)의 우리말 이름이 고지도에 새미실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미천리의 어원은 새미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음성군 대소면 태생리에 새미실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마을 앞에 큰 샘이 있었던 까닭에 처음에는 샘이슬이라 부르다가 훗날 샘이실, 새미실이라 하였다고 전해지며 한자로는 천곡(泉谷)으로 표기하고 있다. 울산광역시 북구 천곡동은 물맛이 좋은 샘이 있었다하여 천곡 또는 새미실이라 하였다고 하며,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천곡리도 뒷산에 샘이 많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자연부락명으로는 새미실이라고 부른다.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에는 옛날에 공동우물이 있어 주민들은 새미실이라고도 부른다. 그밖에도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천곡리(泉谷里),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천곡리, 경상남도 거제시 연초면 천곡리,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泉谷洞) 등이 좋은 샘이 있으므로 새미실이라 불리던 마을이름을 한자로 천곡(泉谷)이라 표기하였으며,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신지리,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평지리, 경남 진주시 문산면 상문리 등의 마을에는 아직도 새미실이라 불리는 지명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새미실'이란 공통적으로 '샘이 있는 마을'임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새미실이라 불리던 미천리는 '샘이 있던 마을'이므로 '천'은 '샘(泉)'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샘이 흐르는 '내(川)'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는 무슨 의미로 쓰였을까. 전국의 지명에서 '미천리'를 찾아보면 경상북도 의성군 구천면 미천리(美泉里)의 샘골 마을은 미천리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우물처럼 깊숙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며,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은 전설에 의하면 셋 고을(동향, 오방, 상미)로 흐르는 맑디맑은 거울 같은 세천(細川)이 뱀처럼 너울거려 흐르고 있어 지나가던 어느 스님이 사천(蛇川)이라 이름 지어 부르다가 뜻있는 선비들이 혐오감을 주는 사(蛇)를 버리고 아름다울 미(美) 자를 붙여 미천이라 칭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경상북도 의성군과 안동시를 흐르는 하천은 낙동가의 지류인데 물길이 안동시 일대를 흐를 때에는 여러 굽이를 이루어 그 모양이 마치 눈썹과 같다 하여 주민들이 '미천(眉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강원도 양양군 서면 미천리(米川里)는 깊은 계곡인 미천골과 그 계곡에 미천사(米川寺)가 있다 하여 마을 이름도 미천리(米川里)라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절이 있는 계곡에서 중이 먹는 쌀 뜨물로 뿌연 물이 흐른다는 유래는 문의의 미천리(米川里)와 같은데 이러한 이야기는 지명 유래나 전설에 많이 나오는 아주 일반적인 이야기 거리이므로 어원으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양성산(養性山)은 충북 청원군 문의면 미천리에 위치한 해발 297m의 나즈막한 산으로 큰 도시의 인근에 있어서 찾는 이가 많은 명산이다. 문의면의 진산으로서 여러 가지 역사유적과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랜 옛날부터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산이다. 산자락에 문화재단지가 조성되었고 맞은편에는 대통령 별장이었던 청남대도 있으며 산 아래 푸른 대청호가 펼쳐져 있어 조망도 매우 좋다. 양성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청소년수련원 좌측 능선으로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으므로 이곳을 출발하여 독수리 바위를 지나 정상에 있는 국태정(國泰亭)이라 현판이 붙어 있는 팔각정에 올라 막걸리 한 잔에 땀을 식히고 전망을 감상하고 내려와서는 양성산 정상을 다녀왔노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팔각정이 있는 봉우리는 양성산이 아니라 378봉이라 지칭하여 구분하고 있다. 현재 진짜 양성산은 주차장의 화장실 건물 옆으로 오르는 해발 297미터의 낮은 봉우리로 문의면사무소가 있는 미천리 마을 뒷봉우리를 말한다. 따라서 양성산은 상봉인 378봉과 주봉인 양성산을 잘 구별하지 않으면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이처럼 양성산은 이름에 대한 혼란이 많아서 '작두산'이 정확한 명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백제시대에 일모산(一牟山)이라 불리던 이곳에 신라가 자비왕 17년(474)에 일모산성(一牟山城)을 축성하였으며, 신라는 이 산을 연산(燕山)이라 부르다가 신라시대 화랑도 출신의 화은대사가 이 산을 보고 "중이 바리(鉢)을 들고 시주를 구하는 형세이니 중을 양성하기에 흠잡을 데가 없는 땅(養僧地)이로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승병 300명을 제자로 삼아 불경과 무예를 익히게 했다 하여 양승산(養僧山)이라 하였고 그 후로 양성산(壤城山)이 되었다가 양성산(養性山)으로 한자 표기가 바뀌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화은대사가 하늘의 계시를 받아 이곳에 판 우물을 대지(大池)라 하며 가뭄이 들 때 기우제를 올렸다고도 전해진다. 양성산은 불당골(주차장)을 중심으로 한바퀴 좌측으로 휘어지는 형세의 능선으로 되어있으며, 북쪽편의 해발 297m의 낮은 봉우리를 가리킨다. 이 능선에서 최고봉은 정상 서쪽의 378봉이며 국태정이란 2층으로 높게 지어진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좋아서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국태정이 있는 378봉에서 북쪽 방향으로 산불 감시 카메라가 보이는데 이곳이 378봉보다 더 높은 해발 430m의 작두봉(鵲頭峰)이다. 378봉에서 작두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봄이면 진달래가 무리를 지어 피어있으며 능선길이 아주 완만하고 걷기 좋아 산책하듯 여유있게 걸으면 되는 구간이어서 도시인들의 나들이 코스로 제격이다. 이곳에 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고문헌에 전혀 나타나지 않다가 일제 때의 고적 조사 자료에 북성과 남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성은 문의면 소재지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작두산 정상에는 있는 테뫼식의 작두산성(鵲頭山城)을 말하며 남성은 팔각정이 있는 378봉에 있는 석축의 성으로 연산진성지(燕山鎭城址)라 하였다. 이 두 성은 양성산성의 보조산성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작두봉(鵲頭山 430.9m)은 서양에서 사형수의 목을 자르는 작두가 연상되어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지만 생김새가 까치 머리와 같다하여 불리워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전국의 지명에 많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과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의 경계에도 작두봉이라 불리는 지명을 찾을 수가 있다. 작두봉은 지명에 많이 쓰이는 까치봉에서 파생되어 변이된 것으로 본다면 본래의 의미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옥천군 안내면 방하목리의 까치봉골,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방도리의 까치봉,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초부리의 까치봉, 전북 완주군 화산면 춘산리의 까치봉, 전북 정읍시 내장동의 까치봉 등에 나타나는 까치는 고유어 '갗'에서 파생된 말로 '작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문의지역의 양성산, 378봉, 작두봉을 통틀어 인근의 구룡산보다 낮은 '작은 봉우리들'을 지칭하는 까치봉, 까치산으로 불리다가 까치 머리라는 의미의 작두산으로 변이되었고 세 봉우리를 각각 구분할 필요에 의해서 이름이 지금처럼 나뉘어진 것으로 풀이해본다면 산이름에 대한 혼란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문의에 있는 청남대는 그동안 근접할 수 없었던 대통령의 별장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데 비하여 청남대의 관문인 문의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대청댐 공사로 인한 수몰로 피해를 입은 문의 지역으로서는 관광 산업의 활성화를 기대하고 있지만 기대한 만큼 효과를 얻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청주시민들에게는 건강을 위해 간단한 산행을 할 수 있는 양성산이 있고 문의 문화재단지라는 볼거리도 있으며 대청댐 공원을 가는 길목이라서 호반 도시라는 좋은 이미지를 품고 있다. 이곳 문의에는 양성산을 오르거나 문의문화단지를 관람하는 사람들을 위해 넓은 주차장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 골짜기를 예로부터 불당골이라 불렀고 지금도 인근 지역 사람들은 불당골이라고 해야 정확한 위치를 전할 수가 있다. 그런데 불당골이라는 지명은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불당골이라 전해지지만 같은 지명이 주변에 너무 많아서 혼란을 일으키게 되므로 원래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불당골이라는 지명은 청주시 지역에만 해도 낭성면 지산리의 불당골, 가덕면 내암리의 불당골, 가덕면 청용리의 불당골, 내수읍 국동리의 불당골, 내수읍 은곡리의 불당골, 미원면 용곡리의 불당골, 남이면 산막리의 불당골, 문의면 문산리의 불당골, 옥산면 신촌리의 불당골 들이 있으며 보은 지역에도 보은읍 노티리, 마로면 세중리, 산외면 아시리, 수한면 오정리, 수한면 율산리, 장안면 봉비리 등 거의 마을마다 불당골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그런데 전해지는 이야기대로라면 인근에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불교가 성했기로서니 절이 마을마다 있었다는 말은 믿기가 어렵다. 아마도 땅이름의 음이 '불당'과 비슷하여 절에 있는 불당을 연상하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연관짓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분명히 다른 어원이 존재하리라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전국의 지명들을 찾아 보면 불당골이라는 지명이 너무나 많이 존재하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는 불당골의 어원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기도 하다. '불당골의 어원은 불안골이다. 불안골의 '불'은 남자의 사타구니를 일컫고, '안'은 안쪽을 뜻하는 말로, '남자의 사타구니 안쪽 골짜기'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불안골은 다산을 최대의 미덕으로 여겼던 사람들이 지은 땅이름이기도 하고, 그 생김새가 사타구니 안처럼 빽빽한 숲이 우거진 외진 곳이어서 붙은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안골'이 '불당골'로 음운 변이되었다고 설명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어 보여 수긍이 가지 않던 중에 다음 지명의 예에서 지명 변이 과정의 힌트를 얻을 수가 있었다. 괴산군 사리면 방축리의 불당골은 '붓돌'이라고도 하며 한자로 부석(浮石)이라 표기하고 있고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문산리의 불당골 인근을 '부수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보은읍 노티리 불당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부새골고개'라 부른다. 이들 지명의 예에서 보면 불당골의 '불'의 어원이 '붓, 붇'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붓,붇'이라는 어원을 그대로 간직해온 지명이 아직 남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전국의 지명에서 '붓당골'을 찾아보니,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의 붓당골,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송문리의 붓당골, 충남의 붓당골, 전남 화순군 화순읍 이십곡리의 붓당골, 전남 화순군 도곡면 원화리의 붓당골 들이 있으며 충북에서 계곡의 이름으로 남아있는 곳에도 충주시 주덕읍 덕련리의 붓당골, 충주시 소태면 야동리의 붓당골,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내암리의 붓당골 들이 있었다., 또는 '부당골'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는 곳도 전국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일반명사로 흔하게 많이 쓰이던 말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따라서 불당골이란 '산부리, 뿔, 뿌리, 붓다' 들로 파생되어 쓰이는 '붓, 붇'이라는 말에 '안골(안쪽 골짜기)'이 붙어 '붇(붓)+안골→붓당골(부당골)→불당골'의 과정으로 변이되었으며 '산 능선, 산 부리의 안쪽 골짜기'란 의미를 나타내던 말로 풀이해 보면 지명으로서의 유연성이나 음운 변이 과정에서의 모든 궁금증이 시원하게 풀리게 되는 것이다.
호반의 도시 문의(文義)에 가면 유명한 시인 고은의 '문의 마을에 가서'라는 명시가 생각이 난다. 1967년 당시 승려이자 시인이었던 고은 선생이 신동문 시인의 고향인 문의면 산덕리에 문상을 와서 장례를 주관하면서 문의를 배경으로 한 편의 시를 쓰게 되는데 이 시가 고은의 네 번째 시집 '문의(文義)마을에 가서(1974)'의 표제시다. 문의(文義)라는 지명은 붓끝같이 생겼다는 문필봉에서 나온 것으로 '의(義)를 위하여 글을 쓴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항상 궁금했던 것은 문의(文義)라는 지명의 한자 표기는 너무나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오랜 옛날에 원래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한자 지명이란 어느 유학자가 사람의 이름을 짓듯이 좋은 의미의 한자를 조합하여 하루 아침에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한자를 모르던 그 옛날부터 사람들이 이곳을 다른 지역과 구분하기 위하여 그 지역의 특이한 지형을 토대로 부르던 명칭(주로 고유어)을 바탕으로 하여 역사적 사건에 연관된 전설 등이 가미되어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을 문의(文義)라 표기하게 된 원래의 고유 명칭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 지역의 의 지명에 대한 유래와 자연지명을 하나하나 분석해 보았다. 문의 지역은 삼한시대에 마한에 속했으며 삼국시대에는 세 나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삼각지점의 가운데 위치하게 되어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본래 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이었는데 신라 자비왕 17년에 현 양성산에 성을 쌓고 일모산성(一牟山城)이라 하였으나 백제가 이곳을 점령해서는 일모산군을 설치하자 신라가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연산군(燕山郡)으로 고치는 등 이곳에서 일진일퇴하였던 것이며 고려 태조와 후백제군이 격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때 청주에 소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년) 감무를 두었으며 1259년(고종 46년) 위사공신(衛社功臣) 박희실(朴希實)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문의현으로 승격시키고 현령을 두었다. 현재의 문의면, 가덕면, 현도면, 부용면을 아우르는 큰 고을로서 관아를 도당산 밑에 배치하였으며 충렬왕 때 가림(嘉林: 지금의 부여군 임천면)에 병합하였다가 곧 복구하였다. 임진왜란 때 청주에 속하였다가 1597년(선조 30년) 현으로 복구하였으며 1895년(고종 32년)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청주에 병합되었다. 1946년 청주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청원군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문의면은 본래 문의군(文義郡)의 읍내가 되므로 읍내면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문의군이 청주군에 병합되자 읍내면은 양성산(養性山)의 이름을 따서 양성면(養性面)이라 하였다. 1930년 9월에 양성면(養性面)과 용흥면(龍興面)을 병합하여 문의군(文義郡)의 이름을 따라 문의면(文義面)이 되었으니 문의라는 이름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면면히 이어져온 이름인 것이다. 전국의 지명에서 문의는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의 문의미골이 있고 남해군 설천면 문의마을이라는 곳이 있을 뿐이다. 문의마을은 서당 많고 선비 많은 마을이라 '문의(文義)'라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옛날에는 '무내'라 불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문의'의 어원을 '무내'에서 찾아본다면 일반적으로 지명에 많이 나타나는 '무내미, 무네미'와 같은 종류의 지명으로서 '물이 넘는 언덕'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한자로는 '수유(水踰)' 또는 '수월(水越)'로 표기하고 있는데 문의 지역에도 예전에 이곳에서 청주로 물이 넘어갔다고 하여 새미실에서 남계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무네미고개라 부르고 있는 곳이 있어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고려 시대 유명한 스님이 이 지역을 가리켜 사방의 정기가 이르고 물길과 물길이 사방팔방으로 통하니 장차 이곳에 문(文)과 의(義)가 크게 일어날 곳이며 숭상받을 곳이라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 전설에서 우리 조상들이 이곳에 대청댐이 생길 것을 예언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물길에 대한 내용을 보면 이 전설은 이곳 지명인 '무네미'와 연관지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으므로 문의라는 지명은 '무네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증평에서 괴산을 가는 길에는 터널이 뚫리고 4차선의 포장도로가 생겨 빠르고 쉽게 갈 수가 있지만 이 길이 생기기 전에는 그야말로 괴산이 산골 마을임을 알게 하려는 듯 산굽이를 돌고 돌아서 높은 재를 넘어가는 험로를 가야만 했다. 이 길이 비포장도로인 시절에 시외버스를 타고 가노라면 초행길인 사람들에게 가장 혼란을 주는 곳이 바로 사리와 대사리였다. 증평을 출발하여 한참을 가다보면 첫 번째 버스가 정류하는 곳이 사리이다. 사리를 출발하여 달리다보면 버스가 뒤로 미끄러질 것만 같은 험한 모래재를 힘겹게 넘어 굽이굽이 돌아 내려가면, 괴산 종점에는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았는데 괴산에 다 왔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는 곳이 바로 대사리라는 곳이다. 괴산중학교와 괴산고등학교를 가려면 사리에서 내리지 말고 대사리에서 내려야 한다는 충고를 여러 번 듣고도 초행자들은 아무 생각없이 사리에서 내렸다가 다음 차를 기다려 다시 가야 하는 수고를 겪게 되는 경우가 빈번했던 것이다. 이렇게 혼란을 야기하는 사리와 대사리라는 지명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만들어진 이름인지 이곳을 지날 때마다 항상 궁금하게 생각해 왔고 또 그런 사람들이 많으리라 생각되어 그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한다. 언뜻 보면 대사리는 사리의 앞에 '대(大)'자가 붙어서, 사리라는 마을보다 더 큰 마을이라는 의미로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 '사리'라는 지명을 찾아보면 경기 평택시 서탄면 사리(寺里), 전남 신안군 흑산면 사리(沙里), 경북 영양군 청기면 사리(寺里), 경북 영천시 임고면 사리(寺里) 등 '절골'을 한자로 표기한 사리(寺里)와 '모래'의 의미를 지닌 사리(沙里)로 크게 나뉘어진다. 경남 창녕군 계성면 사리(舍里)는 신라시대부터 大興寺(대흥사)를 비롯한 절이 많았으므로 寺里(사리)→舍里(사리)라 불렸다고 전해지는 것로 보아 '사리(寺里)'계로 볼 수 있으며, 경남 합천군 묘산면 봉곡리는 본래 합천군 심묘면 지역으로서 지형이 새처럼 생겼다고 하여 새골 또는 봉곡, 사동, 사아촌이라 하였다가 1914년 일제 강점기 때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리(寺里)로 묘산면에 편입되었다가 2012년 7월 25일 일제시대 이전 자연마을 이름인 봉곡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므로 역시 '절골'의 한자 표기인 '사리(寺里)'로 볼 수가 있다. 경북 청도군 각남면의 사리(沙里)는 대구에 속한 각초동면의 사외(沙外)동이 지방행정 개편시 동명이 바뀐 마을이며 내사(來舍), 외사(外沙), 상사(上沙), 하사(下沙) 등 동명은 시대에 따라 바뀌어도 사(沙)자는 꼭 붙어 다녔다. 그런데 '모래'의 의미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 원래 이름은 싸리골로서 싸리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싸리를 '사(沙)'로 음만 따서 표기한 것이므로 다른 지역의 '사리'와는 다른 '싸리골'이라는 지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絲里)는 골짜기가 실처럼 길고 가늘다고 하여 실골이라 하다가 한자로 표기할 때 사리(絲里)가 되었다고 전해지므로 '사리'의 일반적인 지명과는 거리가 있다고 할 것이다. 괴산군의 사리면은 본래 괴산군 서면이었는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서면의 소재지인 사장리(沙場里)와 북상면의 소재지인 이곡리(梨谷里)의 이름을 따서 '사리면(沙梨面)'이라 한 것이다. 따라서 한자 표기에 '모래(沙)'가 들어간 것은 '사담(沙潭)'이라는 곳에서 연유가 된 것이다 그러나 대사리(大寺里)는 본래 괴산군 일도면의 지역으로서 큰 절이 있었으므로 옛날부터 한절골이라 불리어 오던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사리(大寺里)'가 된 것이다. 사리는 '모래못(沙潭)'에서 연유된 '사리(沙里)'이고 대사리(大寺里)는 지명에 널리 쓰이는 '사리(寺里)'에 '대(大)'가 붙은 형태의 지명으로서 '큰절골, 한절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잣골 < 절골'의 변이 과정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름으로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대사리란 '큰 절이 있는 지역의 마을'이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겠으나 다른 지역에 많이 나타나는 '절골'과 마찬가지로 '큰 산골에 있는 마을'의 의미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괴산읍 제월리(霽月里)에는 괴탄과 동진천이 둘러싸고 있는 높이 210m의 작은 동산이 있는데 경치가 뛰어나게 아름다우므로 조선 선조 때 서경 유근(柳根)이라는 분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만송정이라 하였으며 후에 고산정(孤山亭)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의 아름다운 경관을 각각 만송정, 황니판, 관어대, 은병(隱屛), 제월대(霽月臺), 창벽, 영객령, 영화담, 고산정사(孤山亭舍)라 이름짓고 고산구경(孤山九景)이라 하였다. 이곳 제월리(霽月里)에 저드레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저드레는 제월리의 고산정(孤山亭) 너머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고산정에서 놀이하는 원님들의 풍악소리가 이곳까지 들렸다 해서 생긴 이름이라 전해지며 그러한 의미로 이 마을의 이름을 한자로 '문저(聞笛)'로 표기하고 있다. 지명을 이렇게 표기한 것을 보노라면 우리 조상들의 풍부한 상상력과 시적인 표현력에 감탄이 절로 나올 뿐이다. 하지만 지명으로서의 '저드레'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진 말일까. 우연히 청풍의 자드락길을 걸으면서 두 지명의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쳤다. '청풍호 자드락길'하면 어감이 참으로 좋게 들린다. 발음하기에 부드러운 데다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행동한다는 '사부작거리다'는 의미와도 연관되어 왠지 걷기 편한 트레킹 코스일 거란 예감이 들게 한다. 자드락길이란 '나지막한 산기슭의 비탈진 땅에 난 좁은 길'을 일컫는 말이다. 청풍호를 둘러싼 산간마을을 중심으로 길이 이어지는데 이 길을 따라 걷노라면 산행이라고 하기 보다는 산책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힘들지 않게 걸을 수가 있다. 청풍호를 바라보며 수려한 경관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이와 같은 천혜의 산책길이 또 있을까. 1985년 충주댐으로 내륙의 바다가 된 청풍호(淸風湖)를 중심으로 금수산, 비봉산, 대덕산, 동산, 신선봉, 가은산, 옥순봉, 구담봉 등의 명산에 둘러싸인 청풍호반에 수려한 풍광을 따라 걷는 청풍호 자드락길을 조성하게 되었다. 행정안전부의 '2011년 친환경 생활공간 조성사업'으로 선정된 청풍호 자드락길 조성사업은 2011년 3월에 기본 및 실시 설계를 하고, 5월에 공사 착공을 하여 2012년 3월에 정식으로 준공식을 가지면서 개통하게 되었다. 청풍호 자드락길은 조성 공사를 하면서 설계 변경으로 구간의 명칭이 변경되어 다음과 같이 7개구간 58km를 최종적으로 조성하게 되었다. 제1길은 19.7km로 청풍 만남의 광장에서 출발하여 청풍면 교리, 학현리, 도화리를 경유하는데 작은 동산을 경유하므로 작은동산길이라 부른다. 제2길은 1.6km로 비교적 짧은 코스로서 능강교에서 출발하여 정방사를 돌아오는 길로서 정방사길이라 부른다. 제3길은 5.4km로 능강교에서 출발하여 얼음골을 돌아오는 길이며 얼음골 생태길이라 한다. 제4길은 7.3km로 능강 야생화단지에서 출발하여 상천 민속마을을 거쳐 수산면 능강리, 하천리, 상천리를 경유하는데 야생화 단지와 푸른 들판길을 경유하므로 녹색마을길이라 이름지었다. 제5길은 5.2km로 상천민속마을을 출발하여 옥순대교를 건너 수산면 상천리로 내려가는데 단양 팔경의 백미인 옥순봉을 바라보며 걷는다 하여 옥순봉길이라 한다. 제6길은 9.9km로 옥순대교에서 수산면 지곡리을 돌아 괴곡리로 내려온다고 하여 괴곡성벽길이라 하였으며, 제7길은 8.9km로 수산면 지곡리, 도전리, 서곡리, 율지리를 경유하는데 걷기만 해도 건강이 절로 좋아질 것만 같은 약초길이라 이름 지었으니 그 이름만 들어도 자드락길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지 않는가. 그러면 자드락길의 어원은 무엇일까. 자드락길의 의미로 보아 '잣+들+ㄱ(관형사형 어미)+길' 로 분석해본다면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 즉 산자락에 있는 길'의 의미를 가진 말이 '자드락길'로 변이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괴산 제월리의 '저드레'도 '잣들(자드라)'와 같은 어원을 가진 말로 볼 때 '저드레'는 '산자락에 있는 마을'을 의미하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지명인 것이니 그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잘 지켜가야 할 것이다.
제월리(霽月里)는 괴산읍 동부에 위치하는 농촌마을이다. 본래 괴산군 이도면(二道面)의 지역으로서 둥근 산이 갯가에 외따로 떨어져 있으므로 개다리라 하였는데 이를 한자로 제월(霽月)이라 표기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산수가 아름답다고 하여 산수동이라고도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덕리(大德里) 일부를 병합하여 제월리라 하여 괴산읍에 편입되었다. 자연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는 조상들의 지혜를 보면 유머와 위트가 넘쳐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개다리'라는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는데 있어서 '다리'는 '달'의 의미로 보아 '월(月)'로 표기하였으나 '개'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가 없어 고심을 한 듯하다. '개'를 '견(犬)'으로 의역하기도 곤란하고 그렇다고 '개'라는 음을 그대로 두고 음역한다면 아무리 좋은 의미의 한자를 쓴들 입에서 부르는 음은 '개'이므로 '날씨가 개다, 비나 눈이 그치다'라는 의미의 '제(霽)'로 표기함으로서 날이 개어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제월(霽月)'이 되었으니 얼마나 시적이고 재미있는 표현인가· 그러면 '개다리'라는 이름은 원래 무슨 의미를 가진 말일까· 황해남도 배천군 향정리 개울 기슭 다리목에 있는 마을 이름이 '개다리'인데 '개'와 '다리(橋)'가 전혀 관련이 없으므로 개울물에 사는 게를 연상하여 하여 한자로 '게의 다리 마을'의 의미로 해교동(蟹橋洞)으로 표기하였다. 옛날에 많이 쓰던 개다리 소반(---小盤)은 상다리 모양이 개의 다리처럼 휜 작은 상을 말하는데 개상소반(-床小盤), 구족소반(狗足盤)이라 표기하는 등 개의 다리의 의미로 널리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개다리 소반은 글자 그대로 작은 상을 가리키는 것이며 상이 작다 보니 상의 다리도 작아서 원래는 '작다, 좋지 않다'는 의미의 '개'가 접두사로 붙어 쓰인 '개다리'인데 '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개의 다리'의 모양을 연상하게 된 것이다. 소설가 박경리가 쓴 대하소설 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개다리 출신이긴 해도 양반은 양반 아니가. 그 꼴 좀 보지· 이 마을에서 쓸개 빠진 놈 아니믄 그 사람을 양반 대접할 놈 하낫도 없다. 와 그렇노· 돈이 없인께 그렇지." 여기에서 개다리 출신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국어 사전에 보면 '예전에 총 쏘는 기술로 무과에 급제한 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라 설명하고 있으며 '개다리'라는 말이 다음과 같이 부정적인 말로 많이 쓰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개다리상제'는 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되지 못한 상제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며, '개다리질'은 방정맞고 얄밉게 하는 발길질이나 체신없고 얄미운 짓을 이르는 말이다. '개다리 참봉'은 돈으로 능관직인 참봉 벼슬을 사서 되지 못하게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오늘날 많이 쓰이는'개다리 춤'이란 말에는 '개의 다리'의 의미도 있겠으나 '막 추는 춤'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도 들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개'가 '개(犬)'과 음이 같아서 부정적인 말로, 나아가서는 상스러운 욕으로까지 의미가 변하게 되었으나 사실은 '작다, 조금 못하다'는 의미로 쓰이던 순수한 우리말인 것이다. 괴산의 '개다리'는 '제월(霽月)'이라는 이름으로 승화되어 재탄생하였지만 '개'를 그대로 두고 '다리'만 '월(月)'로 표기된 지명도 경기 화성시 양감면 대양리의 '개월', 충남 홍성군 홍동면 월현리의 '개월', 제주도 제주시 봉개동의 '개월이오름', 경남 창원시 성산구 사파동의 '개월촌' 등을 들 수가 있다. '개다리'의 '다리'가 '교(橋)로 표기하지 않고 '월(月)'로 표기한 이유는 괴산의 제월리에서 찾을 수 있다. 제월리에 '갯들'이라 불리는 들판이 있는데 한자로 개평(開坪)이라 표기한다. '들'의 의미는 분명하므로 '평(坪)'으로 표기하였으나 '개'는 의미를 알 수가 없어 음만 표기한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갯들'의 옛 이름이 '개다리(개달이)'였고 '달'의 음을 의역하여 '월(月)'로 표기되었으나 '다리(달)'의 의미가 '들판(坪)'이었음을 '갯들'이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월리(霽月里)와 '개다리'와 '갯들'은 '작은 들판'의 의미로서 결국 같은 곳을 지칭하는 같은 의미의 이름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서울의 '밤섬(栗島)'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홍길동전에 보면 홍길동이 세운 이상향의 이름도 율도국이라 부른다. 이와 같이 지명에 많이 쓰이는 '율리(栗里)'나 도연명의 이상향인 '율리(栗里)' 들에서 공통적으로 쓰이고 있는 '율(栗, 밤)'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홍길동이 국왕이 되어 다스렸다는 율도국은 오키나와에 있다는 설이 있으나 조선왕조실록과 연산군일기에는 홍길동이라는 강도가 있었고 그를 체포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홍길동이 탈옥해서 조선을 빠져나와 율도국을 세웠다는 등의 기록은 없다. 소설 홍길동전이 쓰여진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오키나와에 실재했던 호족 오야케아카하치가 홍길동과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에 대한민국과 일본의 오키나와 현지에서는 이 주장을 정설로 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1997년 오키나와의 구미도에서 홍길동 자료 전시전을 개최하고자 하니 관련 자료를 보내달라는 협조를 장성군청에 정식으로 요청한 적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5세기에 홍길동이라는 도적이 나라의 골칫거리였고 그들을 도왔던 관리가 문초를 받는 사료까지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홍길동 세력은 알려진 것보다는 규모가 컸던 것 같다. 그 후에 홍길동이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는지 아니면 탈옥하여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행동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처벌이 두려운 세력들이 국외탈출을 계획했을 거란 추론은 어렵지 않다. 오키나와에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로서 홍길동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민속놀이, 축성술, 의술, 신품종 볍씨 등을 들 수가 있으며 홍길동의 부인 '고을노'는 당시 그 곳의 안남미(安南米)가 남방계의 쌀이어서 질이 좋지 않으므로 미질이 좋은 조선의 볍씨를 가져가 신품종의 볍씨(쌀)를 전파함으로써 오키나와의 야에야마(八重山)지역에서는 풍요의 여인으로 추앙받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에 의하면, 허균의 홍길동전은 상당 부분 사실에 근간을 둔 소설임이 드러난다. 홍길동이 조선을 떠나고 100여년이 흘러 백성들의 마음에서 잊혀갈 즈음 적서차별에 불만을 품고 있던 허균이 홍길동의 전기를 기반으로 소설화시킨 것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홍길동이 다스렸다고 하는 율도국과 오키나와는 분명히 어떤 관련이 있어 보인다. 텔레비전 방송에서도 이 내용을 관심있게 다룬 적이 있었지만 이제라도 오키나와현의 협조를 받아 학자들이 공동으로 연구를 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연구에는 다양한 과학적인 접근 방법이 필요하겠지만 지명을 통한 어원적 접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되어 '율-'계의 지명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우리나라의 섬의 이름에도 '밤섬(율도)'이 많이 보인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의 밤섬(栗島), 전남 신안군 지도읍 태천리의 밤섬(栗島), 경남 고성군 삼산면 삼봉리의 밤섬(栗島), 제주도 서귀포시의 밤섬(栗島) 등이 있으며, 전남 여수시 돌산읍 율림리 밤섬(栗島)은 가까이에 있는 건너편 육지에 대율, 소율, 율림리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밤(栗)'과 서로 연관성을 가진 지명임을 알 수가 있다. 허균(許筠)이 홍길동전에서 꿈꾸었던 '율도국'의 실제 모델로 거론되는 섬은 고슴도치를 닮았다하여 '고슴도치 위(蝟)'자를 써서 그 이름이 붙은 '위도(蝟島)'라고 이야기하는 학자들이 있다. 고려시대부터 유배지로 이용되었던 이 섬은 연암 박지원이 에서 표현한 이상국가인 율려국의 모델이기도 한데 이 율려국도 홍길동전의 율도국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라면 또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율'의 의미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율려국은 '밤(栗)'이 아니라 '음악(律)'을 가리키는 것으로 음은 같으나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율(律)'은 '율동(律動)'이요, '려(呂)'는 '여정(呂靜)으로 모두 조절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둘을 합친 율려(律呂)는 예로부터 음악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율려(律呂)'는 불평등하고 파란곡절이 끊이지 않는 인간 세상을 구원할 최고의 가치로 알려져 왔으며 율려가 충만한 땅이 바로 태평천국이며 무릉도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연명의 이상향인 '율리(栗里)'도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지명에 쓰인 '밤(栗)'과는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지명에 많이 쓰인 '밤'이 '율(栗), 야(夜), 사(巳)'로 표기된 것은 어원이 되는 '배미'가 '뱅이, 뱀이, 밤이, 방이' 등으로 변이되어 그 음을 표기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명에 많이 쓰인 '밤(栗)'에 대하여 생각하다 보면 지금은 세상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지만 서울의 여의도 앞에 있는 '밤섬'이라는 곳이 떠오른다. 밤섬이란 이름은 섬이 밤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지만「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巧)」에는 율주(栗州) 또는 가산(駕山)이라 했으며 길이가 7리(里), 서울에서 10 리 되는 곳, 마포 남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국지명총람」에는 "순조 때까지는 뽕나무를 심었고 고려 때에는 죄인을 귀양 보내던 섬으로 이용되었으며 도선장으로 백사장을 건너 인천으로 가는 간로(間路)가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1968년 폭파되어 사라지기 전까지 이곳에는 부군신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어 17대를 살아온 62가구 443명이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 어업과 도선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5백여 년 전부터 배를 만드는 기술자들이 이곳에 정착, 조선업에 종사하기도 했었다. 이곳 주민들은 마(馬)씨, 판(判)씨, 석(石)씨, 선(宣)씨 등 희성의 소유자들로 한강물을 그대로 마시며 거의 원시공동사회 체제 속에서 생활을 영위했다. 「대동지지」에 "밤섬은 서강 남쪽에 있는 한 섬인데 섬 전체가 모래로 되어있으며 주민들은 부유하고 매우 번창한 편이다"라 기술하고 있으며 「한경지략」에도 "마포 남쪽에 있는 밤섬은 약초 모종을 내고 뽕나무를 재배하는 곳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조선후기 순조 연간까지도 이곳에는 약초밭과 뽕나무밭이 계속 남아있었던 것 같다. 「용재총화」권 10에 "밤섬에는 많은 뽕나무를 심어서 해마다 누에 철이 되면 잎을 따서 누에를 쳤다. 옛날에 서울 장안에 일부 대감집에서만 누에를 쳤지만 지금에 와서는 대감집뿐 아니라 가난한 집에서도 누에를 치지 않는 집이 없기 때문에 뽕잎 값이 뛰어오르고 비싸서 뽕나무를 심어 이득을 보는 사람이 매우 많다"고 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율도정(栗島町)이라 했고 해방 후에는 서강 서부동회에 속했었으나 서울시가 여의도를 개발하면서 한강하구를 넓혀 물길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 1968년 2월10일 돌산으로 된 밤섬을 폭파함으로써 서호팔경(西湖八景) 중「율도명사(栗島明沙)」라 불렸던 밤섬의 강모래 벌판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1960년대 들어 서울시가 여의도 개발 계획을 세우면서 여의도를 매립하려 할 즈음 1966년 서울의 대홍수로 물난리를 겪으면서 정부(건설부)에서는 서울시의 계획안에 대해 "여의도를 매립할 시 한강 흐름이 나빠지며, 대홍수에 대비할 수가 없다"며 제동을 걸었다. 서울시와 건설부는 협의 끝에 건설부의 주장대로 한강 폭을 넓혀 대홍수 시의 유수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밤섬을 폭파하여 없애기로 결정한 것이다. 또한 밤섬 폭파는 서울시의 바닥난 재정 상황에서 여의도 윤중제의 자재를 조달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이기도 했다. 바위섬이었던 밤섬은 폭파하는 즉시 석재로 사용할 수 있었고 남은 토사도 퍼다가 매립하는 데에 부어버렸다.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아예 여의도 공사 현장에 간이 막사를 짓고 이동식 시장실을 설치하여 공사를 지휘하였고 인부들이 3교대로 투입되어 불과 110일만에 여의도의 윤중제 공사가 완료되었다고 한다. 원주민은 마포구 창전동과 우산 산중턱으로 집단 이주하여 섬이 사라지게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강물에 의하여 퇴적물이 쌓여 다시 섬이 생기고, 여기에 억새, 갯버들 등 친수식물이 자생하면서 1990년대에 들어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도심 속의 '철새도래지'로 부각되자 1999년 8월 10일 서울시가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고시하여 특별 보전해오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밤섬은 아주 특이한 섬이었던 같다. 「명조실록」11년 4월에 나타난 밤섬 주민의 생활상을 보면 이곳의 한강물이 워낙 깨끗하여 식수로 직접 마시며, 한양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외부로의 왕래가 뜸해 남의 이목을 덜 의식한 듯 섬주민의 생활방식이 대체로 자유 분방하여, 남녀가 서로 업고 업히고 정답게 강을 건너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아 동성동본이고 반상이고 따지지 않고 사는 모습이 당시 한양에서는 충분히 이야기거리가 됨직하다. 또한 이처럼 현실을 떠난 상상 속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도연명이 살았다는 이상향인 '율리(栗里)'를 떠올리게 함으로서 '밤섬(栗島)'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전국의 '밤-'계의 지명들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괴산군 증평읍 율리의 부점촌과 청주시 미원면 화원리의 삼흥을 잇는 방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지금은 임도가 잘 닦여 있고 원래의 고갯길은 아니지만 포장도로가 생겨 승용차 통행이 가능하지만 원래는 율치(栗峙, 해발 360m)라고 부르는 '밤고개'였다. 이곳 밤고개 밑에는 밤티라는 마을이 있는데 인조반정 때의 공신인 김치의 후손들이 정착하면서 이룬 마을이라고 한다. 김치의 아들인 백곡 김득신 문학길이 조성되어 있으며 뒷산인 좌구산에 휴양림이 생기고 천문대도 설치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명소가 되었다. 음성군 감곡면 단평리의 뱅고개는 '밤고개, 율현(栗峴)'이라고도 하며, 음성군 삼성면 용대리의 방개울은 한자로 '방가동(方佳洞), 율리(栗里)'로 표기한다. 단양군 단성면 외중방리의 밤실, 괴산군 장연면 송덕리의 방고개,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의 밤밭도 밤나무밭이 있어 생긴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단양군 영춘면 율곡리는 본래 영춘군 가야면의 지역으로서 왕계산 및 골짜기에 밤나무가 많아 밤실 또는 율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외촌, 이곡, 도화동을 병합하여 율곡리라 해서 단양군 어상천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같이 지명에는 '밤'이 쓰인 곳이 많이 있는데 밤나무가 있다는 이유로 '밤골, 밤실, 밤고개'라고 지명을 정했다고 보기에는 부족함이 있어 보인다. 중국의 도연명이 자연으로 돌아가 거처한 마을이 '율리(栗里)'인데 이때 율리(栗里)는 밤나무(栗)의 의미를 나타내기 보다는 질서와 예의가 지켜지는 '율(律)'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명에서의 '밤'은 원래는 다른 의미의 말이 음의 유사함으로 유추 해석하여 변이를 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중국의 도연명이 거처하는 이상향을 '율리(栗里)'라고 한 것과 결부시켜 내가 사는 마을을 이상향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명에 쓰인 '밤(栗)'이 '밤(栗)'의 의미가 아니라 다른 어원에서 비롯된 말이라 추정하는 근거는 지명에서 쉽게 찾아 볼 수가 있다. 음성군 맹동면 쌍정리에 율리(栗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전해오는 이름이 '배미, 배미들'이었으며,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는 내수천 가에 큰 배미가 있으므로 대배미, 대야미(大夜味), 대율(大栗)이라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밤'의 어원은 '배미'인 것이다. 배미란 구분된 논을 세는 단위로 쓰이는 말인데 수 관형사 뒤에서 의존적 용법으로 쓰여, 다른 논과 구분되어 있는 논의 한 구역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한 배미, 두 배미, 세 배미' 와 같이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큰 배미, 작은 배미, 윗 배미, 아랫 배미, 높은 배미'처럼 논의 모양이나 위치를 나타내는 형용사가 수식어로 앞에 붙어 쓰이기도 하였다.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라는 지명에서 '큰 배미'라 불리던 이름을 '대야미(大夜味), 대율(大栗)'로 표기한 것은 '배미'의 음만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괴산군 사리면 이곡리의 뱀골(白田)은 뱀처럼 길게 생긴 골짜기라 하여 붙여졌다고 전해지지만 한자로 '백(白)'이라 표기한 것으로 보아 '뱀(蛇)'과는 관련이 없고 '배미골'이 어원이며, 충주시 소태면 구룡리의 뱅골,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의 뱅골 등에서 뱀골이 '뱅골'로 변이되어 의미를 잃은 채 오랫동안 불리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임억준의 장편소설에『서근배미 사람들』이라는 작품이 있다. 유소년의 나이로 한국전쟁을 체험한 저자가 전쟁의 실상을 묘사하고 있는데 제목에 쓰인 '서근 배미'가 토속적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추정리에 '썩은 배미'라는 작은 들판이 있는데 의미가 별로 좋지 않아서 이곳에 새로 생겨난 마을의 주민들은 이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도에는 '작은 배미'라 표기되어 있지만 이 이름도 좋은 이미지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결국 '참솔마을'이라는 마을 이름을 새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 제목을 보면서 '아! 썩은 배미가 아니라 서근 배미였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서근 배미'라는 지명이 전국에 많이 존재한다는 것은 작은 중량을 의미하는 '서근'이라는 말이 '배미' 앞에 붙어서 '작은 논 배미'를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쓰여 왔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이며 이곳의 지명이 '썩은 배미, 작은 배미'로 불리게 된 이유가 속 시원히 밝혀지는 것이다.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가산리(駕山里)는 본래 청주군 남일상면의 지역으로서 산이 멍에처럼 생겼다하여 멍에미라 하였는데 멍에미가 줄어져서 멍어미, 머미라 부르다가 한자로 가산(駕山)이라 표기하고 있다.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의 멍에골은 하관평 서북쪽 2㎞ 지점에 있는데 소의 멍에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지명에 '멍에'가 쓰이는 곳이 많이 있는데 과연 소의 멍에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일까· 국어 사전에 찾아보면 '멍에'란 '쟁기질 할 때에 소 목덜미에 얹어서 사용하는 굽은 나무, 마소가 달구지나 쟁기를 끌 때 목에 거는 나무'라 설명하고 있는데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나 억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의 의미로도 쓰이므로 좋은 이미지를 주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멍에는 지역별로 '멍에, 멍아, 멍이, 몽에, 멍지, 멍'들로 쓰이는데 '소'가 결합되어 '소몽에, 세멍에, 쉐멍에' 들로 쓰이기도 한다. 가수 김수희의 히트곡 중에 '멍에'라는 노래가 있다. '사랑의 기로에 서서/ 슬픔을 갖지 말아요/ 어차피 헤어져야 할 거면/ 미련을 두지 말아요……/ 아무리 아름다운 추억도/ 괴로운 이야기로/ 사랑의 상처를 남기네……/그래도 내게는 / 소중했던 그날들이 / 한동안 떠나지 않으리' 라는 노랫말 속에 보면 애절한 이별과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별의 상처를 한마디로 '멍에'라 표현하여 노래 제목으로 삼고 있는데 이 말은 노랫말 내용 전체로 보아 핵심을 콕 집어 지칭하는 말로서 정말로 기가 막힌 표현이 아닌가·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농기계가 나오면서 소나 말이 멍에를 벗게 되었지만 그동안 우리 조상들이 수천년 동안을 농사를 짓기 위하여 소를 부리면서 멍에를 씌울 때마다 미안함과 측은함을 느꼈을 것을 생각하니 닳고 닳아 빤질빤질해진 멍에 속에 조상들의 피와 땀이 어리고, 희로애락의 감정과 삶의 의욕, 희망이 녹아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런데 멍에는 생김새가 일자형이거나 또는 약간 굽은 형태여서 쉽게 벗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사용할 때 왜 소의 목에 단단히 고정시키지 않을까하는 궁금증이 항상 있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조상들의 심오한 지혜가 숨어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험한 길에서 달구지가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질 경우 멍에가 저절로 벗겨져서 소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라니 동물을 사람 대하듯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감동적인가! 그렇다면 지명에 쓰인 '멍에'는 지형이 높은 산이나 고개가 아니라 멍에의 생김처럼 약간 솟은 언덕이나 낮은 고개를 가리키는 의미일까· 생각해보면 단순하게 지형의 모양을 나타내는 의미로만 쓰였다고 보기에는 지명으로서의 유연성이 좀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짐을 지고 힘들게 넘어다니는 고갯길을 소가 쟁기나 짐을 실은 달구지를 끌 때의 힘들고 어려움을 멍에와 연관지어 지명으로 삼았다고 하면 그 연관성이 더욱 긴밀하면서도 심오하고 문학적인 의미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른 지역의 지명을 살펴보면 멍에라는 지명이 단순히 모양만을 보고 붙여진 이름이라기보다는 다른 어원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또 다른 추측이 가능해진다. 괴산군 소수면 몽촌리에는 멍뎅이라 불리는 들판이 있는데, 들판이 넓어서 '멍석들'이라 의미로 해석하고 한자로는 명덕(明德)이라 표기하고 있다. 단양군 단성면 벌천리에는 멍기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모녀재. 모녀티. 독기재, 독여티, 머너티, 멍어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단양군 어상천면 석교리의 '멍앗'은 한자로 '가전동(駕田洞)'으로 표기하여 '멍앗'이 원래는 '멍에밭'이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그런데 보은군 속리산면 삼가리의 '멍어목'을 보면 '멍에'와 '목'과의 연관성을 나타내고 있어, '멍에'는 지형에서 '목'의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볼 수가 있다. '목'이란 척추동물의 '몸통을 잇는 잘록한 부분'을 가리키는 말로서 지형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말일 뿐만 아니라 언어학적으로도 '목 + ㆁㅔ(명사형 접미사) < 멍에'의 변이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타당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멍에미'라는 지명은 산줄기를 잇는 잘록한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 지명으로서 유연성이 매우 높아지고 마소의 목에 지는 멍에도 같은 의미로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에 '고모치' 또는 '고모령'이라 부르는 고개가 있다. 옛날에 곰이 있었다고 하여 고미재라 전해오지만 흘러간 옛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에 나오는 고모령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그 어원을 추리해 보고자 한다. '비 내리는 고모령'이라는 노래는 가수 현인의 대표곡이다. 이 노래비가 서있는 망우당 공원은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 부엉새가 울만한 높은 고개'도 아니고 '가랑잎이 휘날리던 산마루'도 찾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이 노래에 나오는 고모령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데 2군사령부 영내에 위치하므로 노래비를 망우당 공원에 설치했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1949년 당시 미리 곡을 만들어 두었던 작곡가 박시춘의 가사 독촉에 시달리던 유 호씨가 지도에서 우연히 고모역(顧母驛)이라는 역 이름을 보고는 고모(顧母)라는 말이 '돌아보는 어머니'의 뜻이므로 고모령에서 애절하게 이별하는 슬픈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고모령에 전해오는 전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사라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 전설은 다음과 같다. "일제시대에 경산에 있는 작은 마을에 사는 여인이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면서 살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두 아들이 왜놈에게 잡혀서 대구 감옥에 갇히게 되자 어머니는 시간만 나면 감옥으로 면회를 가곤 하였다. 아들을 면회하고 돌아가는 길에 고모령 고갯길을 넘게 되었는데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서러움으로 고모령을 넘어오던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경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고개를 넘어야 하고 그 고개를 넘으면 더 이상 대구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 고개는 고개를 돌려서 돌아본다는 '고(顧)'와 어머니 '모(母)'를 붙여서 고모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에 의하면 이 고개는 한 맺힌 이별의 고개이며 눈물어린 인생 고개인 것이다. 이 전설을 바탕으로 가사가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노래가 만들어진 후에 전설이 꾸며진 것인지는 정확하게 밝히기가 어렵지만 이 전설의 시대적 배경이 너무 최근의 일이라 고모령의 글자 의미와 연관지어 꾸며진 전설로 추정되며 고모령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유래로 보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렇다면 다른 지역의 지명에서 '고모령'과 '고모리'들을 비교해 보면 그 뿌리를 찾는 실마리를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고모령이라는 지명은 대구 외에는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의 '고모령'이 유일하지만 '고모리'는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의 고모리(古毛里),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의 고모리,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의 고모리' 등을 들 수가 있는데 이들에서 전해오는 유래나 '고모리'의 한자 표기로 볼 때는 특별히 어원을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고모'라는 말은 크다는 의미의 '감' '검' '곰' 등이 '가마, 거미, 고모, 검은' 등의 의미로 변이되었으므로 '가마-'계의 지명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가 있다. 가마리'나 '가마령'은 전국에 산재해 있어서 단양군 영춘면 동대리의 거무실, 음성군 원남면 주봉리 거미들, 청원군 남이면의 가마리, 청주시 북이면 금암리(琴岩里)의 거문바위,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의 가마실(玄谷), 보은군 수한면 거현리의 가무재고개(巨峴), 보은군 회남면 거교리의 가마성, 보은군 수한면 소계리와 제천시 봉양면 명암리의 가막재, 가막현, 제천시 백운면 운학리의 거문골(금곡), 제천시 금성면 명지리의 검암(儉岩), 금바우( 검은바위), 제천시 금성면 양화리의 거문바우(거미처럼 생겼다함), 음성군 소이면 후미리의 거문골, 음성군 감곡면의 가미실(개미실, 감미곡), 음성군 원남면 문암리의 검부리, 음성군 원남면 하로리의 가마골(부곡) 등을 비롯하여 타시도에도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부곡리의 가무실(釜谷里), 경상북도 청송군 명호면 고계리의 거무실(蛛谷),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의 거무실, 경상남도 사천시 서포면 선전리의 거무실, 경북 김천시 지례면 거물리의 거무실(거물, 검울, 금곡), 충남 예산군 예산읍 산성리의 거무실(검곡리) 등에서 '크다'는 의미로 쓰여온 것을 볼 때 '고모치', '고모령'은 큰 고개를 의미하는 말이고 '고모리'는 '가마리'와 마찬가지로는 '큰 마을'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다가 그 의미를 잃게 되면서 한자 표기를 할 때 원래의 의미를 반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충주시의 소태면(蘇台面)은『해동지도』에 '성태양면(省台陽面)'으로 표기되어 있고,『조선지형도』에는 '소태면(蘇台面)'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지역에 '소댕이골'이라는 자연부락이 있는데 '소뎅이, 소댕이' 또는 '소탱이골'라고 불려지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소태양면(蘇台陽面), 소태면으로 변화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마도 '뎅이, 댕이, 탱이'라는 음을 한자로 '台陽(대양, 태양)'으로 표기하여 '소태양면(蘇台陽面)' 만들어지고 이를 줄여서 오늘의 '소태면(蘇台面)'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소태면이라는 지명의 뿌리가 된 소댕이는 어떠한 의미를 가진 이름일까· 음성군 금왕읍 내송리에 '소댕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소댕이는 내송2리의 서쪽 지역에 위치한 자연 마을로서 본래 충주군 금목면 송당리 지역이었으나 1906년 음성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내송리에 포함되었다. 동쪽으로는 내송1리의 자연 마을인 '비성거리'와 맞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내송2리의 자연 마을인 '갓바위'와 접하고 있다. 원래 이름은 소당리였는데 음이 변하여 소댕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지며 한자로는 '소'를 '소나무'와 연관지어 '송당(松堂)'으로 표기함으로써 '내동(內洞)'과 '송당(松堂)'의 첫 글자를 따서 '내송리'라는 행정구역명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음성군 대소면 소석리에도 '소댕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한자로 '소당(韶堂)'으로 표기하고 있어 음의 변화가 없이 '소당이'를 '소댕이'라 불리어 온 것으로 보인다. 소석리는 본래 충주군 대조면(大鳥面) 의 지역인데 고종 광무 10년(1906)에 음성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소당'과 '석격'의 이름을 따서 소석리라 해서 대소면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도 뒷들 북쪽의 들을 소뎅이라 부르고 있으며 그밖에도 전국에 소댕이라는 자연부락을 찾아보면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 금당리의 소댕이,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당촌리의 소댕이, 충남 보령시 청라면 황룡리의 소댕이, 충남 서산시 운산면 가좌리의 소댕이, 충남 서산시 오남동의 소댕이, 충남 아산시 선장면 선창리의 소댕이, 인천시 서구 왕길동의 소댕이, 전남 여수시 율촌면 봉전리의 소댕이 등 각지에 많이 산재해 있어 특별한 지역의 특수 지형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던 말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는데 그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었다.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송남리의 소댕이는 송남리에서 제일 큰 마을로 지형이 솥뚜껑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며 한자로는 '송당리(松堂里)'로 표기하고 있다.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의 소댕이는 빨래터로 소(沼)가 져 있다고 하여 '소덩이(沼가 있는 목)'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인천시 영종도의 소댕이는 옛날에 살다가 자주 이사를 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는 소뎅이의 뜻을 가마솥의 밥을 다 지은 상태를 뜻하는 토속어로 보고 있으며 임시로 터전을 삼아 살아가다가 어느 정도 살림이 안정을 찾아 이사를 갈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의 소댕이는 한자로 '소당(蘇堂)'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중국 송나라의 유명한 문인 소동파(蘇)의 글을 현판에 걸어놓은 집(堂)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는 한자의 의미에 따라 지어낸 말로 추정된다. '소댕이'의 의미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솥뚜껑에 부침개를 만들 때의 단위'. '주물로 만든 쇠솥을 덮는 쇠뚜껑', '솟대가 있던 곳을 이르는 지명', '주물을 만들기 위한 틀을 바조리 또는 소댕이라 한다'라 설명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솟대가 있던 곳을 이르는 지명'의 의미로서 '솟당, 소당'이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로 많이 쓰여 오던 '소댕이'라는 의미와 연관지어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전북 무안군 일로읍 구정리의 소댕이는 매봉산 너머에 소당이 있어 소댕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지며 충주시 용관동에 용관동 산성이 있는 소댕이산이 있는데 국사봉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국사봉이라면 나라의 안녕을 위한 제를 지내는 봉우리이므로 제를 지내는 소당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소당이 있는 산이라 하여 '소댕이산'이라 불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전국에 산재해 있는 '소댕이'라는 지명은 제사를 지내던 '솟당, 소당'이 있던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수안보면 화천리, 찬물내기라 불리던 사시마을을 지나 고개를 넘어 왼쪽으로 들어서면 연풍 레포츠 공원의 넓은 광장을 지나 새재를 넘는 고갯길이 시작된다. 이곳에 있는 마을이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의 고사리 마을인데 고사리라는 이름과 걸맞게 이화여자대학교 고사리 수련관을 비롯하여 고사리 산장, 고사리 교회, 고사리 식당 들이 늘어서 있고 길 옆에는 마른 고사리를 파는 장사꾼들이 많아서 은연 중에 이곳이 고사리가 많아서 지명도 고사리라는 암시를 주는 것 같다. 박문수 어사가 쉬어가셨다고 전해지는 350년 된 소나무도 이 마을의 자랑거리 중 하나이다. 지금은 연풍면 원풍리의 작은 자연마을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수안보 지역을 중심으로 연풍군 고사리면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안보 지역은 중원군 상모면으로, 고사리 마을은 연풍면 원풍리에 편입되었다. 그러면 고사리라는 이름은 정말로 고사리가 많아서 만들어진 이름일까?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의 고사리골을 비롯하여 상당구 남일면 두산리의 고사리골, 단양군 영춘면 유암리의 고사리작골,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리의 고사리밭골, 보은군 속리산면 만수리의 고사리골, 경남 사천시 곤양면 무고리의 고사리재 들이 모두 고사리가 많아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옥천군 안남면 종미리의 미산리 마을은 마을위의 산이 낮고 고사리같이 퍼져 있다 하여 처음에는 고사리 궐(蕨)자를 써서 궐산리라 부르다가 음이 좋지 않다하여 고사리 미(薇)자를 써서 미산리(薇山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늑구리의 고사리에는 고사리역이라는 기차역도 있는데 고사리가 많이 나는 곳이라서 붙인 이름이란 설과 마을 앞산에서 옛날 전쟁 중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여 '고살(古殺)'에서 유래되어 고사리란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전국의 산재한 고사리라는 마을들이 대부분 고사리라는 식물과 연관짓고 있지만 그것은 음이 같기 때문이며 원래의 지명이 생겨난 뿌리는 따로 있다는 것을 다음의 지명들에서 알 수가 있다.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의 고사리는 고새울, 또는 고사촌(古沙村), 고사동(古沙洞)이라 하며,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고사리(姑寺里)도 고사촌, 고사동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사'라는 말에 행정구역단위가 뒤에 붙어 쓰였다. 따라서 행정구역 단위가 '리(里)'가 되면서 '고사리'가 되어 식물인 고사리와 음이 같게 되므로 서로 연관을 짓게 되었던 것이다. 전남 담양군 담양읍의 백동3리는 현재 '신기'마을이라고 불리는데 이 이름은 1930년대 일본인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본래 이름은 '고사리등'이었다고 하며 고사리등을 한문으로 풀이하면, 높을 고(高), 선비 사(士), 관리 리(吏), 오를 등(登)으로 '높은 선비와 관리들이 많이 등용되었다'는 뜻이 된다. 즉 이 고을에서 인재가 많이 났다는 의미가 되므로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과거에 장원급제해 높은 자리에 오른 세 대신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들 모두 관직에 있으면서 단 한 번도 웃음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이들을 지켜봐온 윗사람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어느 날 잔치를 베풀어 초대하여 웃지 못하는 가슴 아픈 사연을 듣고는 '그대들이 웃지 않는 까닭을 오늘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며 위로했다고 한다." 이 전설 역시 지명의 한자 표기에 따른 의미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꾸며낸 것으로 볼 수가 있는데 식물인 '고사리'와는 연관이 없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고사리라는 말의 어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명이 생겨나게 되는 과정을 생각하면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지명이란 땅의 위치를 구분하기 위하여 그 지역만의 특징을 다른 지형과 비교하여 나타내는 이름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지형을 표현하는 우리말 중에서 '고사'와 음이 유사한 것을 찾아보면 '고샅'이라는 말이 있다. '고샅'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촌락의 좁은 골목길' 또는 '좁은 골짜기의 사이'라 설명하고 있으며 '고샅길', '고샅마을', '고샅으로 접어들다'와 같이 흔히 쓰이던 말이었다. 그러므로 '고샅마을'을 행정구역 단위를 붙여 '고샅리'라 하고 한자로 표기하다보니 '고사리(姑寺里,古寺里)가 되어 식물 '고사리'와 같은 음이 만들어져 의미의 혼란이 생긴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으며 '고사리'란 '좁은 골짜기의 사이에 있는 마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