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솝실(속마을)'을 한자로 '이리(裡里)'로 표기하거나 아니면 '속'은 음차로 하고 '마을'은 의차하여 '속리(俗里)'로 표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속리산의 어원을 찾는데도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전해오는 속리산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신라 선덕여왕 시절(784년)에 진표율사(眞表律師)라는 분이 이곳에 이르렀을 때, 밭 갈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느냐며 속세를 버리고 진표율사를 따라 입산수도하였는데, 여기에서 '속리'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고운 최치원이 법주사 일대의 암자를 돌아보고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나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세속을 멀리하지 않으나 세속이 산을 멀리한다' 하고 노래한 시의 구절에서 '속리'가 유래되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유래라기보다는 최치원이 속리산이란 산이름과 속리사라는 절이름에 있는 '속리(俗離)'의 의미에 대하여 자신의 소회를 쓴 것으로 보인다. 속리산은 신라 때는 속리악이라 불렀고 중사(中祀,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지낸 '대사' 다음 가는 제사)를 올린 곳이기도 하다. 속리산이라는 이름 외에도 에 따르면 속리산은 본래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어 구봉산(九峰山)이라고 하며,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고 불리었다 한다. 에는 '산세가 웅대하며 기묘한 석봉(石峯)들이 구름 위로 솟아 마치 옥부용(玉芙蓉)같이 보이므로 속칭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 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밖에도 '광명산(光明山), 지명산(智明山), 미지산(彌智山), 형제산(兄弟山), 자하산(紫霞山)' 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다. 한국 팔경(八景) 가운데 하나에 속하는 명산으로, 산중에는 1000년 고찰의 법주사(法住寺)가 있다. 3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지는 문장대에 서면 산 절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하늘 높이 치솟은 바위가 흰 구름과 맞닿는다 하여 문장대를 일명 운장대(雲藏帶)라고도 한다. 넓이는 3000명이 앉을 만하고, 대(臺) 위에 큰 구멍이 가마솥만 하게 뚫려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많아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뉘어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에 가서 달천이 되어 금천(한강)으로 들어간다. 1970년 3월 24일 주변 일대와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84년 인근의 화양동구곡(華陽洞九曲)과 선유동구곡(仙遊洞九曲), 그리고 쌍곡구곡(雙谷九曲)이 국립공원에 편입되었다. 「불우」조에는 속리사가 속리산 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속리산에서 속리사는 찾을 길이 없다. 다만 '달마암(達磨岩) 가에 등불 하나 밝았는데 문 열고 향 피우니 마음 다시 맑아라 혼자 깊은 밤에 잠 못 이루니'라는 고려 말기의 문신 김구용(金九容)의 시에서 절이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속리산의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때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창건한 것이며 이때는 이미 속리산이라는 지명이 정착된 이후였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 이미 속리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속리사라는 절의 이름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해발 1000m가 넘는 높은 산이므로 이 산줄기 골짜기에 있는 마을을 평지 지역에서는 '안골, 솝말, 솝리(속에 있는 마을)로 부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솝리에 있는 절'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향찰식 표기에 의하여 '속리(俗里)'가 되고 '속리'라는 음은 자연스럽게 불교에서 '속세를 떠난다'는 의미의 '속리(俗離)'를 연상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속리사(俗離寺)라는 절에서 이곳 마을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솝리'라는 마을에 있는 산도 속리산이 되지 않았을까? 보은군 탄부면 벽지리에 외솔들(바깥속리들)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큰 소나무가 외따로 있어 '외솔들'이라고도 하고 속리산 천황봉 물이 삼거리에서 내려와 그 물을 대는 논이라 '바깥속리들'이라 하였다고 진해지지만 실제로 '솝리'라는 마을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근거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속리산(俗離山)'이라는 지명은 속리사(俗離寺)라는 절과 연관지어 음은 그대로 둔채 불교 사상과 철학적 의미를 덧붙이기 위하여 '里'를 '離'로 바꾸어 '속리(俗離)'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의 석곡리, 석실리는 '솝실'에서 '속실'로 변이된 이후 '속'이 '석'으로 변화된 특수한 예에 해당하지만 대부분의 지명에서는 '속실'에서 'ㄱ'이 탈락돼 '소실'로 변했다. 보은군 속리산면 중판리와 괴산군 청천면 사기막리의 '소실티골'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의 '소실'을 비롯해 경북 군위군 우보면 모산리와 경북 군위군 우보면 문덕리의 '소실', 경남 함양군 함양읍 대덕리와 경북 울진군 매화면 갈면리의 '소실들', 전남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의 '소실당골',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의 '큰소실골' 등이 '소실'로 변이된 경우다. 그런데 '솝실'이 '속실, 석실, 이리(裡里)'로 변하기도 하지만 보은군 탄부면 벽지리의 '수반', 충주시 수안보면 고운리의 '숲안'은 숲의 안쪽이라고 설명하는데 '숲, 수'의 어원은 '숲(수풀)'이 아니라 '솝'으로 추정할 수 있는 흔적들이 많이 발견된다. 청주시 청원구 우암동의 '수반들'은 우암동과 내덕동에 접한 무심천의 안쪽에 있던 들을 가리킨다. 현재의 청주농고와 청원경찰서 일대를 말하는데 '수안들'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수반'과 '수안'이 함께 사용되는 것은 '수반'에서 'ㅂ'이 탈락돼 '수안'이 됐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실제로 '수반골'이라는 지명이 충남 공주시 태봉동,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하림리,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월송리,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화동리,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직원리, 전북 진안군 진안읍 가림리, 경남 거제시 일운면 와현리 등에 있으며, '수안골'이라는 지명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어암리의 수안골을 비롯해 경북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경북 구미시 장천면 오로리, 경북 영주시 이산면 지동리, 경북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전남 광양시 성황동, 전남 나주시 보산동, 경남 김해시 대동면 등에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1999~2005년 남북 공동 편찬사업에 의해 발간된 조선향토대백과에 의하면 평안남도 북창군 봉창리에도 '수안골(壽安-)'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골짜기가 깊고 험해 피난처로 이용하기 좋다는 데서 비롯된 지명이라고 전해진다. 이와 같이 '수반골'과 '수안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수반골'에서 '수안골'로 변이됐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수안들, 수반들'을 '숲안들'의 변형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것은 변이된 음과 비슷한 음으로 추정해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고, 그 뿌리를 '솝'으로 본다면 잃어버린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같은 의미를 중첩해 '솝안'이라 한 것이 되는 것이다. 중국어에서 "明明白白, 老老实实, 整整齐齐, 清清楚楚, 雪白雪白, 通红通红, 笔直笔直, 绿油油(짙푸르다, 시퍼렇다), 干巴巴(말라서 딱딱하다), 暖洋洋(따사롭다), 孤零零(고독하다), 热乎乎(뜨겁다, 뜨끈뜨끈하다), 冷冰冰(냉랭하다, 차디차다)" 등에서와 같이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글자를 중첩해 쓰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말에서도 '역전앞, 외갓집, 상갓집, 머그컵'과 같이 외래어로 유입된 말이거나 의미를 잃어버린 말들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의미가 중첩되는 말들이 쓰이는 것을 많이 볼 수가 있다. 특히 지명에서는 오랫동안 사용돼 오던 지명이 그 어휘의 의미가 변해 정확한 의미를 전할 수가 없을 경우에 '수리치고개(수리+고개+고개), 말티고개(큰+고개+고개), 잣고개(고개+고개), 무너미재(산+고개+고개), 매산(산+산), 박달산(높은+산+산), 잔달미(작은+산+산)' 등과 같이 동일한 의미를 지닌 말로서 그 당시 쓰이는 말을 뒤에 중첩해 의미를 분명히 했던 것이다. 더욱이 '안골'이라는 지명이 '안쪽에 있는 마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명이 많이 쓰여 왔으며,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하호리의 수반,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상호리의 숲거리를 안골 또는 안터골이라고도 하는 등 지명에서 '수, 숲'의 의미가 '안쪽'을 의미하는 말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수'가 '안쪽'이라는 의미의 '솝'이 변이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또 있다.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원통리의 수내리(藪內里)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藪內洞)의 한자 표기를 보면 '숲안'에서 '안'은 한자 '내(內)'로 뜻을 표기했지만 '숲'은 음차를 하면서 '수(藪)'로 표기했다, 그런데 '수(藪)'란 '늪, 구석진 깊숙한 곳'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안쪽'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숲안, 수반, 수안, 수골'과 같은 지명에서 '숲, 수'의 어원은 '솝'으로서 '안쪽'을 의미하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의 석곡리, 석실리는 그 어원을 '솝실'에서 찾을 수 있는데, '솝실'이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솝'이 '속, 또는 안쪽'의 의미임을 알게 해주는 지명이 바로 전라북도 익산시의 전이름인 '이리(裡里)'인 것이다. 지금은 익산시(益山市)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이리'라고 하면 이리역 폭발 사고를 생각나게 한다. 전북 익산시는 1995년까지 이리시(裡里市)로 불리었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익산보다는 이리라는 이름을 익숙하게 생각한다. 목천포 북쪽 10여 가구의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던 '솝리'가 이리(裡里, 속마을)로 바뀐 것은 호남선 철도가 놓인 뒤라고 한다. 1912년 호남선과 군산선의 개통과 함께 익산군청을 비롯한 관공서가 금마에서 이리역 주변으로 옮겨왔다. 호남선이 대전~익산에 이어 익산~김제 등 철도를 잇달아 개설하고, 1914년 1월 대전~목포(256.3㎞) 전 구간을 완성한다. 전주의 유지들은 지맥이 끊기고 지반이 흔들려 도시가 몰락한다는 이유로 호남선 전주 통과를 극구 반대했었다. 익산에 호남~군산선이 개통되고 근대문명의 경이를 목도하고 나서야 뒤늦게 철도를 유치, 1914년 12월 익산~전주 전라선 첫 구간을 폭 좁은 협궤철도로 놓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호남선이 익산의 시골 마을을 오늘의 익산(이리)이라는 큰 도시로 탄생시키게 되었으며, 만약 호남선이 일찍부터 공주와 전주를 통과할 수 있었다면 경부선은 천안에서 청주를 거쳐 '구미~상주~대구~부산'으로 가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장 빠른 경로인 '광주~이천~충주~상주~대구~부산'의 경로를 거쳤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조치원과 대전이라는 도시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충북이 크게 발전하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참으로 무상하다. 하여튼 사람과 물자가 폭주하는 솝리 일대는 1931년에 읍으로 승격했고, 같은 해 이리(裡里)로 공식 개명이 이뤄졌다. 1947년 시로 승격한 이리는 고속도로 개통 이전 승객 3위의 국내 철도 요충이었고 1977년 11월 11일 저녁 9시 이리역 폭발사고로 초토화되는 아픔을 겪은 이후 1995년 익산군을 통합, 익산시로 이름을 환원하며 인구 33만의 호남 3위권 도시가 되었던 것이다. 본래 익산 시내는 솜리, 솜니로 불렸다. 이리(裡里)는 이곳의 순우리말 옛 지명인 솜리, 솜니(솝리)를 한자로 옮긴 것이며 '속(솝)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렇듯 솜리는 작은 촌락이었는데 조선총독부가 만경~김제평야에서 수탈한 쌀의 수송을 위해 호남선을 부설하고 익산역(당시는 이리역)을 세우면서 급격히 외형을 달리하게 되었다. 호남선(서울특별시~목포시)과 전라선(전주시~이리~군산시)이 교차하는 철도 교통의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백제 이후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익산 지역의 중심은 미륵산 근처의 금마와 호남대로의 길목인 여산이었는데 백제 시절의 시가지로 추정되는 곳과는 다른 위치에 있는 시골 마을에 인위적으로 익산 시가지(이리)가 건설되면서 덕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백제 역사 유적 지구로 등재된 미륵사지나 왕궁리 유적 등이 보존된 측면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호남선 이리역이 들어서면서 일제는 익산군의 전통적인 중심지인 금마 지역 대신 새로운 중심지가 된 이리 지역을 '익산면'으로 명명하고, 1931년 '익산읍'으로 승격했다가 곧바로 '이리읍'으로 개칭했다. '이리'라는 지명은 '속마을'이라는 뜻으로 '솝리, 솜리로 불려왔는데, 일제에 의하여 '이리(裡里)'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일제가 굳이 '익산'을 '이리(裡里)'로 개명한 것은 '이리(狼)'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연상케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리라는 지명이 일제가 민족말살을 목적으로 정한 이름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을 통합할 때 통합시 명칭을 역사적으로 이 지역의 오랜 이름인 익산시로 한 것은 개명이라고 하기보다 우리 조상들이 사용해온 원이름을 되찾은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한자로 의차하여 만든 이름이지만 일제가 아닌 우리 조상들이 한자로 표기하였다면 어떻게 표기하였을까? 향찰이나, 이두에서 보듯이 우리 조상들이 순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는 방식에 의하면 '속마을'에서 '속'은 음차로 하고 '마을'은 의차하여 '속리(俗里)'로 표기한다면 속리산의 어원을 찾는데도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에는 석곡리, 석판리, 석실리가 있는데 모두 '석'으로 시작하므로 외지인들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청주시의 3차 우회도로에 석곡 IC에 이어 석판 IC가 바로 옆에 생기면서 정확한 위치를 알리는데 혼란을 주고 있어 그 어원을 확실하게 밝힘으로서 지역을 구분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우선 석실리(石室里)는 본래 청주군 남차이면(南次二面)의 지역으로서 팔봉산(八峯山)밑의 속 골짜기가 되므로 '솝실, 속실'이라 하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석실'로 변이되었다. 이후에 인근에 있는 동편말, 벌터, 산너머라는 마을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할 때에 '석실'의 '석'을 근간으로 하여 방향에 따라 석동리(石東里), 석서리(石西里), 석남리(石南里)라 표기하게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창리(司倉里), 석남리(石南里), 석서리(石西里), 석동리(石東里), 덕현리(德峴里)를 병합하여 석실리(石室里)라 하여 남이면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석곡리(石谷里)는 석실리(石室里)의 아래쪽이라 하여 석곡(石谷)이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실'과 '골'은 골짜기나 마을을 지칭하는 같은 의미의 말이므로 석실의 인근에 있는 골짜기에 새로 생긴 마을을 처음에는 모두 석실로 불리었으나 주민이 점차 늘어나서 지역이 나누어짐에 따라 서로 구분할 필요에 의하여 석곡이라 부른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런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석곡(中石谷), 하석곡(下石谷), 공례리(公禮里), 북리(北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석곡리라 하여 남이면에 편입하다 보니 이름은 비슷한데 전혀 다른 마을의 지명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면 석판리(石坂里)는 어느 말에서 온 것일까? 석판리는 본래 청주군 남차이면(南次二面)의 지역으로서 돌너더리가 있으므로 '돌노도리, 돌노돌'이라 불리어왔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석판(石坂)'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검북리(劒北里)를 병합하여 석판리(石坂里)라 하여 남이면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전국의 산에 있는 돌너더리 지형이 지명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보면 계곡이나 골짜기, 산능선을 가리킬 때는 아직도 '너더리, 돌너덜'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지역이 있다.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수산리의 '너더리'를 비롯하여 대전 동구 판암동, 전북 완주군 화산면 화월리, 전북 남원시 아영면 청계리, 경남 산청군 차황면 양곡리, 경남 창녕군 대합면 장기리, 경북 영덕군 지품면 오천리, 전남 장성군 동화면 구룡리, 전남 해남군 문내면 용암리,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만정리,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암산리, 충남 예산군 신양면 가지리, 충남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 충남 공주시 송선동, 충남 공주시 유구읍 유구리 등에 '너더리'라는 지명이 있다. 이러한 지형에 마을이 생기면 마을의 이름을 한자로 기록할 필요가 있으므로 다음과 같이 표기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제천시 송학면 시곡리의 너더리는 '너다리, 널다리'로 불리다가 한자로 '판교(板橋)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널'을 널빤지라는 의미로 보아 '판(板)'으로, '다리'는 글자의 의미 그대로 '교(橋)'로 표기한 것이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의 옛 우리말 이름이 '너더리'였고,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운남리의 '너더리', 충남 아산시 용화동의 '너더리', 충남 아산시 선장면 죽산리의 '너더리' 등이 '판교(板橋)'로 표기하고 있으며 충남 서산시 오남동의 너더리는 '널문다리'로 보아 '판문교(板門橋)'로 표기하고 있는데 현재 정전회담장소로 쓰고 있는 판문점의 옛 지명이 널문다리였으며 이곳에 널문다리주막이 있었다하여 판문점((板門店)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석판리의 어원은 '돌너더리'이므로 석판의 '석'은 '돌'의 의미하는 것이고, 석곡리와 석실리는 '솝실, 속실'로서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므로 '속에 있는 마을'이란 의미인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전라북도 익산시의 옛 이름이었던 '이리'가 '솝실'을 그대로 한자로 표기하여 '裡(속 리), 里(마을 리)'가 된 것을 볼 때 이와 같은 맥락에서 속리산(俗離山)의 '속리'의 어원을 추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에 '다마내'라 불리는 지명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양파의 일본어인 '다마내기'라는 말이 우리말처럼 굳어져서 지금도 이 말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다마내'라 하면 '다마내기'가 떠오르거나 '담 안에'라는 의미가 연상이 된다. 영동군 영동읍 회동리에도 '다마내'라는 지명이 있는데 냇가 벌판에 위치하여 옛날에 담을 둘러싸고 살았다고 하여 '담안이' 또는 한자로 '장내동(墻內洞)' 표기하고 있다. 보은군 장안면 장내리(帳內里),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서산리(鋤山里)의 '다마내',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의 장내리,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5동의 장내동, 경기도 광주시 광남동의 장내동,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의 장내리(長內里) 등에서 '다마내'라는 자연 지명이 '담의 안쪽'이라는 의미로 보아 '장내'로 표기되었다. 경남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는 고려동유적지가 있는데 고려가 망한 후 고려 유민들이 터전을 일궈 자급자족했기에 고려동(高麗洞), 고려촌(高麗村)이라 불러왔으며 또한 이곳을 사람들은 다마내라 하고 한자로 장내동(牆內洞)이라 표기하였다. (사)평화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조선향토대백과'에 의하면 황해북도 토산군 월성리에도 장내동이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전국적으로 '다마내'라는 지명이 많이 존재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다마내'라 전해오는 지역은 대부분 한자로 '장내동(牆內洞), 장내리(牆內里)'이라 표기하거나 한자는 다르더라도 '담의 안쪽'의 의미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다마내'를 소리나는 대로 '담안에'의 의미로 본 것인데 담이란 읍성이나 큰 성의 성책의 안쪽을 말할 때는 담의 안쪽에 마을이 존재할 수 있으나 그러한 지역은 큰 도시로 발전한 일부 지역이고, 읍성이 존재하지 않았던 산골짜기에도 이러한 지명이 산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담이란 개인의 집집마다 경계 표시나 도둑을 막는 등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기 위하여 설치한 울타리이므로 담 안에 마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담'이라는 말이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닐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담'이란 '집이나 일정한 공간을 둘러막기 위하여 흙, 돌, 벽돌 따위로 쌓아 올린 것을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담은 순우리말이며, 우리말과 한자가 합쳐진 말로는 담장이라고도 한다. 경미한 재료로 만들어지거나 안이 보이게 만들어진 것을 울, 울타리, 바자울, 울짱, 책, 장리라 한다. 그런데 충주시 소태면 구룡리의 사이담이란 지명은 구룡의 서남쪽에 있는 마을을 말하며 중간말, 간촌이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보아 '담'이 '울타리'의 의미를 가진 '담(墻)'이 아니라 '마을'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지명에 쓰인 '담'의 기원적 의미는 '듬, 둠'으로서 '圓'(원) 또는 '四圍'(사위)이다. 지금도 우리가 쓰고 있는 말 중에 '사람이 둥글게 모여 앉은 그룹'을 가리켜 '모둠'이라고 하듯이 '原'의 의미를 지니는 '듬'이 적용 범위를 넓혀 그러한 특징적 모양을 하고 있는 대상에 적용된 것이 마을 이름으로서의 '듬'이다. 마을 이름으로서의 '듬'은 '한 동네 안에서 몇 집씩 따로 한데 모여 있는 구역'을 가리킨다. 특히, 산이나 골짜기와 같은 큰 자연물로 둘려 있는 둥근 분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을 '듬, 뜸'이라 한다. 이것이 지역에 따라 '듬, 담, 땀, 떰, c, 뚬, 더미, 두미 ,대미, 드메' 등으로 다양하게 변형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국어사전에서 '뜸'의 의미를 찾아보면 '한 동네 안에서 몇 집씩 따로 모여 있는 구역'이라 설명하고 있듯이 아직도 '듬'이 변이된 '뜸'의 의미가 남아있으며 지명에도 다음과 같이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양촌리의 '양지뜸'이 있고, 청주시 청원구 우암동의 네모배기샘 동편에 있는 마을이 '양지뜸'이며 북쪽의 음지쪽에 있는 마을이 '음지뜸'이다. 충주시 소태면 구룡리의 양지땀은 양지말이라는 마을을 가리키며, 단양군 가곡면 대대리 섬땀, 옥천군 이원면 강청리의 벌땀과 봉땀, 청주시 상당구 영운동에 생이뜸이라는 마을이 있다. 또한 청주시 상당구 금천동의 '벌뜸'은 영운동 동사무소 앞들인 벌뜰에 있던 마을인데 '벌'은 '벌판'의 뜻이고, '뜸'은 '작은 마을'의 뜻이다. 따라서 '벌뜸'은 '벌판에 있는 작은 마을'로 해석되며 집이 벌판에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다마내'란 '집 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을 가리키거나 '작은 마을의 안쪽에 있는 어떤 구역'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유목민들이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던 아시아 지역에 벼농사가 시작되면서 주민들이 정착하게 되고 땅을 지키기 위한 부족 국가가 생겨나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재배 볍씨가 발견된 소로리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인정을 받을 만큼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소로리라는 지명과 쌀농사와는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 그 어원을 찾아 보기로 하였다. 우선 다른 지역의 동일 지명을 찾아보니 유일하게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에 소로리(小魯里)가 있는데 한자 표기도 동일하였다. 부족국가시대에 소라국(召羅國)이 있었다는 유래로 보아 소로리(小魯里)의 '로(魯)'를 중국의 노나라와 연관지은 것은 중국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선비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 음차한 것에 불과한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소로, 소라'의 의미는 무엇일까? 영동군 황간면은 본래 신라 시대에는 소라현(召羅縣)이었는데 이 지역에 '소계(小溪), 실티'와 같은 지명이 있으며,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소로리(小魯里)에 '가는골(細谷)'이라는 지명은 좁은 길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소로리 서남쪽에 '가늠자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전에 가늠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가람절골'의 변화형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가늠자골'은 '가는잣골'의 변형이며 '좁은 산골짜기'의 의미라고 본다면 '소로, 소라'의 '솔(가늘다, 작다)'과 '가늘다'라는 의미의 지명과는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해볼 수가 있다. 따라서 '소로리'의 뿌리를 '솔올, 솔골'로 본다면 이러한 지명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곳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찾아보니 강원도 강릉시 교동에 '솔올'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디지털강릉문화대전'에 의하면 '소나무가 많이 있는 고을'이란 뜻의 '솔골'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솔골'이라는 지명은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가양리의 '솔골',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달계리의 '솔골', 괴산군 칠성면 송동리의 '솔골' 등이 있으며 '솔'이 '소리, 수리'로 변형되어 쓰이는 지명이 더 많이 보인다. 영동군 황간면 금계리의 소리골, 영동군 황간면 용암리의 소리골, 보은군 내북면 도원리의 소리골이 있으며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후곡리의 '소리절', 충주시 수안보면 온천리의 '소리봉', 보은군 산외면 마시리의 '소리목',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의 '소리실', 보은군 내북면 창리의 '소리골,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의 '소리목', 보은군 회인면 건천리의 '수리티',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의 '수리골', 영동군 심천면 장동리의 '수리실' 등이 보인다. 괴산군 연풍면 유하리의 '오수'는 다섯 내가 모여 흐른다고 하여 '오수'라 하였다고 하고,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영티리의 '오소리골', 보은군 마로면 한중리의 '오소리밭골'은 오소리가 많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전해지는데 그보다는 '작다'는 의미가 겹쳐서 쓰인 '오솔길'의 '오솔'의 의미가 아닐까· 옥천군 이원면 이원리는 원래 옥천군 이내면의 '현리(縣里)'와 '역리(驛里)'가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인데 기록에 의하면 '현리(縣里)'의 신라초기 이름이 '소리산현(所利山縣)'이었다하니 역시 '솔'계의 지명이었던 것이다. 소리쟁이라는 식물이 있는데 바람이 불 때 요란한 소리가 난다고 하여 소리쟁이라고 한다고 하지만 19세초 '물명고(物名考)'에 보면 '솔오소이', '솔오쟝'으로부터 전화한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솔오'와 '소이(쟝)'의 합성어인 '솔오소이(쟝)'가 '소루장이'를 거쳐 '소리쟁이'가 된 것이다. 소리쟁이의의 구조로 보아 꽃울조각의 가장자리가 가늘고 작아서 '솔울, 솔옷'이라 하던 말에서 변이된 것으로 추정해 본다면 역시 '솔-'계의 지명과 같은 범주의 음운 변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소로리'의 '소로'는 '솔골→솔올→솔오→소로'의 변화 과정을 추정해 볼 때 '솔오'는 '작다'는 의미가 중첩되어 쓰이는 '오솔'과도 연관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소로리'의 어원에 따른 의미는 '작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서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미호천 변의 풍부한 물을 이용하여 벼농사를 지으며 대대로 살아온 행복한 마을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소로리는 본래 청주군(淸州郡) 서강외이하면(西江外二下面) 지역이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 구역 통폐합 정책에 따라 창리(倉里)와 소로리(小魯里) 일부를 병합하여, 소로리(小魯里)라 명명하고 옥산면(玉山面)에 편입되었으며 에도 '소로(小魯)'로 기록되어있다. · 소로리는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와 오창과학단지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서 미호천을 바라보며 드넓은 들녘을 지닌 소로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약 1만 5천년 전) '볍씨'가 출토된 유적지로서 의미가 깊은 마을이기도 하다. 소로리 볍씨는 충북대와 단국대 합동 발굴팀이 1997년과 2001년 오창과학산업단지 조성을 앞두고 옥산면 소로리 일대 발굴 조사를 하면서 1998년에 찾아낸 고대 벼 18톨, 유사벼 109톨을 말한다. 이때 출토된 볍씨는 서울대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과 미국 지오크론 연구실 측정에서 1만 3천~1만 5천년 전의 것으로 추정됐다. 이어 미국 애리조나대 측정에선 1만 7천년 전의 것으로 추정됐다. 학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 후난성 볍씨를 넘어서는 세계 최고의 볍씨로 인증했던 것이다. 이에 청주시는 소로리 볍씨를 본 따 '생명'과 '창조'를 지역 상징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시의 상징물도 씨앗 모양이다. 소로리 볍씨의 발굴은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지식을 한꺼번에 뒤집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전까지는 중국 후난성 유적지 볍씨가 1만 2천년 전의 것으로 인류 최초라고 알려져 왔으며 소로리의 구석기 유적지에서 재배 벼가 발견된 흥미로운 사실은 벼농사가 중국 양쯔강 유역에서 발원해서 아시아로 퍼졌다는 기존의 경로설을 뒤집었으며 이미 1만 5천년 전에 한반도에 농경사회가 정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로리 볍씨는 지난 2003년 10월 영국 BBC가 '중국 후난성 출토 볍씨보다 약 4천년이 앞선다'고 소개했고, 2004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문화유산회의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서의 등재가치가 충분하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으며, 4년마다 개정판을 발간하는 세계적인 고고학개론서인 '고고학(Archaeology)'에는 2004년 이전에는 BC 9천000년쯤 중국 후난성에서 출토된 볍씨를 쌀의 기원으로 기술했지만 최신 개정판에서는 쌀의 기원지를 한국으로, 연대는 BC 1만3천000년 전으로 바꿨다. 고고학자 '콜린 렌프류'와 '폴 반'이 공동 저술한 이 책은 2016년 7판까지 출간됐다. 국내에는 '현대 고고학의 이해'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됐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고고학 입문서로 알려져 있다. 청주시가 260억 원을 들여 조성한 오창 미래지(米來池) 농촌테마공원이 오창읍 용두리와 성산리 오창저수지 일원 39만 7천243㎡ 부지에 조성하여 2015년 10월에 준공하였는데 이곳에서는 해마다 청원생명축제가 열리고 있다. 이 공원은 농특산물체험관, 연꽃습지원, 벼 전시체험관, 쌀 주제 체험장, 벼 미로 숲 등을 갖춘 농촌테마공원으로서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인 소로리 볍씨가 출토된 곳에 만들어진 농촌테마공원이어서 그 의미가 크다. 현재 소로리에는 마을회관이 있는 '벌뜸'을 비롯하여 1, 2리 모든 자연마을을 통틀어 '소로(小魯)라고 하는데, 두 가지 지명 전설이 전해진다. 어느 날 세조(世祖)가 속리산을 거쳐 온양 온천으로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 때마침 마을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공자(孔子)가 태어난 노나라(魯)와 비슷하다고 해서 '소로(小魯)'란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조선 선조(宣祖) 때 학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 1517~1578)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강 건너 산에서 이 마을을 보고 '등동산이망견소로(登東山而望見小魯)' 라는 공자 말씀을 인용하여 쓴 글에 '소로(小魯)'라는 구절로 표현했다고 하여 '소로(小魯)'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불무골이라는 지명이 자연 지명이기에 마을을 가리킬 때는 주로 '야동(冶洞)'이라 기록한 지역이 많지만 계곡을 지칭할 때는 구전으로만 전해질 뿐 기록을 남기지 못한 지역이 또한 많다. 전국의 지명에서 기록에 나오는 것만 들어보아도 경상북도에 김천시 어모면 옥계리의 불무골을 비롯한 20개 지역, 전라남도에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의 불무골을 비롯한 16개 지역, 전라북도에 진안군 진안읍 반월리의 불무골을 비롯한 10개 지역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언급하기가 어려울 정도인데 한결같이 발음으로 나타나는 '불무'의 의미로 해석하여 '대장간이 있던 마을' 또는 '불무 모양의 마을'이라고 그 유래를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철이 귀하던 옛날에 골짜기마다 대장간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으므로 처음에는 대장간의 불무가 아닌 다른 의미를 가진 말의 소리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불무'로 변이되어 왔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불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불을 피울 때에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인 풀무의 옛말로서 충청도, 전라도, 경기도의 방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풀무'의 고어는 '불무'인데 오늘날 변이음인 '풀무'를 표준말로 정함으로서 '불무'를 그대로 사용하는 지역은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불무골'을 '풀무골'로도 부르는 지역이 많은 것은 '불무'가 '풀무'로 변이된 것이므로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으며 원래의 어원은 '불무골'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무골'을 '불무의 모양을 지닌 마을'이라고 전해지는 유래는 마을의 지형이 '불을 피울 때에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인 풀무의 모양을 지녔다는 것인데 그러한 형상은 상상을 할 수가 없으므로 글자 풀이에 그친 궁색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야동이라는 지명의 인근에는 불당골이라는 자연 지명이 있는 곳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당골'과 '불무골'에서 '불'의 어원이 동일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따라서 '불당골'의 어원인 '붇안골(돋아나온 언덕의 안쪽 고을)'의 '붇'이 불무의 '불'의 어원으로 본다면 '불'은 '붇(돋아 나온 언덕)'으로 추정이 된다. 그렇다면 '불무골'에서 '무'의 어원은 무엇일까· 경상도와 제주도의 방언에서는 '풀무'를 '불미'라고도 하며 제주도에서는 대장간을 '불미왕', 대장장이를 '불미대장'이라 한다. 또한 경상남도와 제주도 방언에서는 '풀무'를 '불매'라 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무'가 '미, 매'로 변이되는 것은 지명에서 '산(山)'의 순수한 우리말인 '뫼'의 변이와 유사하므로 '무'는 '뫼(山)'의 변이음으로 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앞에 있는 '불'이 '돋아나오다'의 의미를 가진 말로서 '무'를 수식하고 있는 말이므로 돋아나온 지형은 바로 '산(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한 지형이란 '뫼'의 형태에 따라 달라지기에 지명에서 '뫼'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어 왔으며 '미,매, 무'로 변이되는 지명의 예를 다음과 같이 찾아볼 수가 있다. 청주시 오송읍 만수리의 '당미(堂山)',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의 '성미(城山)', 음성군 대소면 오산리의 '오미(梧山)',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매봉리를 비롯하여 각지에 산재한 '매봉, 매봉산, 매봉재, 매산' 등이 있고, 괴산군 사리면 소매리의 '소매산', 괴산군 청안면 장암리의 '통매(通山)', 단양군 가곡면 여천리의 '시루매산', 청주시 상당구 쌍이리의 '쌀매',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부용외천리의 '옥매, 유매' 등이 있으며 '뫼넘이'가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호죽리, 청주시 문의면 남계리,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 충주시 금가면 사암리,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에는 '무너미'로 변이되었으며, 음성군 원남면 문암리는 '무넘→무남→문암'으로 단양군 가곡면 대대리의 '매남, 매남고개, 매남재, 매남티, 매나미재', 단양군 대강면 금곡리의 '매나미재' 등의 지명에서 '뫼'가 '무, 미, 매'등으로 변이되어 쓰이는 예를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불무골'을 '돋아나온 산이나 언덕에 있는 마을'의 의미로 해석해 본다면 지형의 모양이나 특성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지명의 생성 과정으로 보거나, 지명 명명의 유연성으로 보아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며, 불무골이란 지명이 전국의 많은 지역에 분포하게 되는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충북에는 '조천'이라 불리는 지명이 여러 군데에 있고 전국의 각 지역에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충북의 청주시와 마주하고 있는 세종특별자치시의 조치원읍도 원래 '조천(鳥川)'이었는데 인위적으로 조치원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조천'의 어원을 찾기 위하여 조치원이라는 지명이 형성되어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치원은 충북의 중심부를 흐르는 미호천 가에 둠벙과 갈대가 많아 많은 새가 무리지어 날아드는 벌판이었다. 일제에 의하여 철도가 놓여 지면서 도시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조선 말기에는 이곳이 충청남도 연기현 북일면(北一面) 지역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경부선 철도는 1901년 8월 20일에 서울 영등포에서, 같은 해 9월 21일에 부산 초량에서 일본 자본의 회사인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의해 기공되어 4년 후인 1904년 12월 27일 완공되었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 체제 구축이 철도 부설 및 채광권 획득에서 비롯되었던 많은 사례에서처럼 경부선의 부설은 일제의 우리나라 침략 정책 수행의 구체적 발판이었다. 1894년 '한일잠정합동조관(韓日暫定合同條款)'으로 경부선 철도 건설에 관한 문제가 조약 문서상에 나타나고, 1898년 '경부철도합동조약(京釜鐵道合同條約)'으로 경부철도의 부설권이 일본인 회사에 강압적으로 넘어가기까지 일제는 민간인을 앞세워 비밀리에 그 기초 공작을 진행하였다. 일본인 마쓰다(松田行藏) 등이 1885년(고종 22)에 내한하여 4년에 걸쳐 전 국토를 돌아다니며 지세, 교통, 민정 및 경제 상황을 은밀히 조사하였으며, 이어 내한한 일본인 철도기사 고노(河野天端) 등도 당시 부산 주재 일본 총영사 무로다(室田義文)의 비호 아래 사냥꾼으로 가장하고 경부선 철도 부설 예상 지역을 면밀히 답사한 뒤 측량 도면과 함께 보고서를 작성하여 1892년에 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 원래 서울∼부산 간에는 전라가도, 경상가도, 삼남가도 등의 교통로가 있어 처음 노선 계획의 기준이 되었으나, 이들 중 어느 한 도로를 따라 건설하는 것은 지세 등의 제약 조건 때문에 어려웠고,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제적 조건을 중시한 데다 경쟁 철도의 출현을 피한다는 입장에서 서울에서 충청도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절충 노선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1901년 9월에 조치원 지역에 경부선 철도주식회사의 건설사무소를 두고 철도 개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1904년 준공을 본 후 이곳에 역이 설치되면서 조치원리(鳥致院里)가 신설되었고, 1911년 연기에 있던 연기군청이 조치원리로 이전하였으며, 1917년에는 조치원리가 조치원면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1931년 4월 1일에 읍 설정에 의하여 조치원읍이 신설되었으며, 그 후로 지금까지 읍으로 존재하고 있다. 신라의 최치원이 이곳에 와서 살면서 보를 쌓아 농사를 장려하고, 시장을 개설하여 최치원 시장이라 하다가 성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 하여 조치원(鳥致院)이라 개칭하였다는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한낱 지어낸 전설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최치원은 신라 말기의 학자이고, 조치원은 일제 초기에 만들어진 도시이다. 그러므로 최치원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면,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지명이 전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조치원의 원 지명은「새내」였다. 이곳이 갈대와 늪이 많아 새가 많이 날아드는 냇가라는 뜻에서 새내라 부른 것이다. 일제는 경부선 가설권을 따내고 역사명(驛舍名)을 짓는데, 이곳의 지명을 따서 처음에는 조천원(鳥川院)이라 지었다. 이것을 조선총독부에서 승인하는 과정에서 개명을 명령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조천원(鳥川院)'은 일본식 발음이 '조오센인'이라 발음되므로 잘못하면 이곳을 '조선역'이라 부를 것을 염려하여 개명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이곳 사람들은 철도 공사로 인하여 반일감정이 심하였으므로 그러한 이유로 조천역을 조치원으로 개명한 것이 알려진다면 또 다른 혼란이 있을 수 있다 하여 일본인들이 생각해낸 것이 최치원을 끌어들여 조치원의 지명유래를 조작하기 시작했으며, 우리는 그것이 정설인양 불러온 것이다. 하여튼 조천(鳥川)의 어원인 '새내'가 유지 보존되어온 지역이 조치원이라는 데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충북에 '조천' 또는 '조촌'이라 불리는 지명은 옥천군 청성면 조천리(鳥川里), 충주시 앙성면 조천리(釣川里), 괴산군 청안면 조천리(釣川里),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助村里) 등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옥천군 청성면의 조천리는 본래 청산군 남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조곡리(鳥谷里)와 도천리(道川里), 영동군 북이면의 도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조곡과 도천의 이름을 따서 조천리라 하여 옥천군 청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29년 청성면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충주시 앙성면의 조천리는 한자로 '釣川里'라 표기하고 있다. 본래 중원군 북성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조대리와 벌천리, 비내, 사기점, 청산이골을 병합하여 조대와 벌천의 이름을 따서 조천리라 하여 앙성면에 편입되었다. 조대리(釣垈里)는 원래부터 '조터골'이라 불리어온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인데 여기에서 '조'가 '안터골, 새터골, 흔터골'에서처럼 '터'를 꾸미는 말로 쓰인 것이 분명하며 원래부터 한자의 '조(釣)'가 아닌 순우리말의 '조'일 것인데 그 의미는 추정하기가 어렵다. 벌천리(伐川里)는 원래 '비내'라 불리어왔는데 옛날에 나무를 많이 베어낸 곳이라 하여 '벌천(伐川)'이라 하였다고 전해지지만 다른 지역의 지명의 예를 보자면 '비껴 흐르는 내' '굽이 지게 흐르는 내'의 의미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괴산군 청안면 조천리(釣川里)는 본래 괴산군 청안군 읍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조강리(釣江里)와 연천리(燕川里)를 병합하여 그 이름을 따서 조천리(釣川里)라 하였다고 한다.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는 '助村里'라 표기하고 있으며 문헌을 살펴보면 에 '助村里自官門西南距四十里編戶 一百二十男一百九十四口女二百七口'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예로부터 '鳥川'이나 '鳥村'이 아니라 '助村'으로 표기가 시작된 듯하다. 무슨 의미로 이렇게 표기하였는지 알 수가 없으나 다른 지역의 '鳥川'이나 '鳥村'과는 그 어원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들의 표기가 모두 달라서 그 어원을 추정하기가 어려우므로 타시도의 지명 예를 찾아보니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조천리(槽川里)는 하천에 소구유(소죽통)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해서 소구유 '槽(조)' 자와 내 '川(천)'자를 써서 붙인 지명이라고 한다. 또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朝天里)는 옛 문헌에 따르면 '육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순한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며 조천관(朝天·)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약 800년 전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지며 14세기 초에는 조천관이 건립되었을 때에는 이미 마을 이름이 정착되어 있었으므로 그 마을 이름을 근거로 하여 조천관이라는 이름을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관에서 지은 건축물이므로 전해오는 마을 이름의 음을 바탕으로 하여 좋은 의미의 한자로 바꾸어 표기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위에서 볼 때 '조천'의 한자 표기가 제각각이고 그에 따라 유래도 다르지만 어원을 찾아 접근해보면 두 가지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옥천군 청성면의 조천리가 조곡리(鳥谷里)와 도천리(道川里)를 병합하여 조곡과 도천의 이름을 따서 조천리라 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조곡리는 마을 지형이 새처럼 생겼다고 전해지는 조천리의 중심 마을인 '새분이' 마을이름과 관련이 있으며 그 원형은 새로 생긴 마을을 의미하는 '새말' 또는 '새골'로 짐작된다. 여기에서 '새'를 '하늘을 나는 새(鳥)'와 연관짓다 보니 '鳥'로 표기하게 되었으며 '도천(道川)'이란 '道'로 표기하고 있지만 그 어원은 '마을을 돌아 흐르는 내'라는 의미의 '돌내, 도내'일 것이다. 그리고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의 원래 이름은 새내라고 전해진다. 미호천에 갈대와 늪이 많아 새가 무리지어 날아드는 벌판이므로 새내라고 불러 왔다고 하는데 이를 한자로 그대로 표기한 것이 '조천(鳥川)'인 것이다. 따라서 '조천'을 여러 가지의 한자로 표기하고 있지만 '새가 많이 날아드는 내' '홍수가 난 이후에 새로 생겨난 내'라는 의미로 생겨난 '새내'라는 지명이 여러 가지 이유로 하여 다르게 표기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미호천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을까? 음성군 삼성면 마이산 발원지부터 여러 지역을 지나며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 하던 하천이란 점에서 아름다운 하천인 '미호천(美湖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하천 이름을 갑자기 새로운 이름으로 만든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미호천을 이루는 각 하천의 이름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오근진은 고을 북쪽 20리에 있으며 청안현 번탄에서 흘러내려온다"는 구절이 있으며 '대동지지'에서는 "작천은 서북쪽 20리에 있는 청안의 번탄에서 서남방향으로 오근진, 작천, 진목탄, 망천, 부탄을 거쳐 흐르며 연기의 동진강에 이른다"고 돼 있다. 19세기에 간행된 '청주읍지'에서 "작천은 고을의 북쪽 20리에 있다. 각각 물줄기의 맥은 진천, 청안, 괴산, 회인의 경계에서 나와 작천으로 합류한다. 상류는 오근진이 되고 하류는 진목탄이 되어 연기와의 경계인 동진에 닿는다"고 되어 있다. 어느 기록에도 미호천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미호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 근거가 될 수 있는 유사한 이름의 하천명으로 청주시 강내면의 '미곶(미꾸지)'이 있는데 미호천의 가장 하류라는 위치로 보아 이 이름이 미호천이라는 이름을 만들어내는 뿌리가 되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이므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타당한 근거를 찾아보고자 한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대동여지도(1872년)를 보면 오늘날 청주시 오송읍 서평리와 동평리, 그리고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예양리 부근을 흐르는 하천을 '彌串(미곶)'이라 표기하고 있다. 주민들이 지금까지 미꾸지라 불러오는데 아마도 조선시대에도 미꾸지라 부르는 이름을 한자로 '彌串(미곶)'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미꾸지'란 무슨 의미일까? '뾰족한 지형이나 하천 아래 삼각주 지형'을 예로부터 '호미곶, 장산곶'과 같이 '곶'이라 불러 왔으며 지명에서 '고지, 꼬지, 꽃, 구지, 꾸지' 등으로 변이되어 쓰여 왔다. 따라서 '미꾸지'의 '꾸지'는 '곶(串)'의 의미임을 알았을 것이므로 쉽게 '곶(串)'으로 표기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미'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다. 우선 '용이라는 의미의 '미르'로 보아 물과의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지명에서는 '미'가 주로 '뫼'의 변이음으로 쓰이고 있으므로 '산(뫼)'의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뒤에 붙는 '꾸지(串)'가 산줄기가 뾰족하게 뻗어내려온 지형을 의미하며 양 옆으로 물이 흘러 삼각형 부분(삼각주)을 만들게 되므로 지형으로 보아 미꾸지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한 표현이며 지형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지명으로서의 유연성으로 보아 가장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왜 일제가 미곶천이라 하지 않고 미호천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을까? 한국말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으로서는 한자의 한국식 음과 일본식 음에 대해 혼란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串의 음은 곶인데 일본어의 호(湖)의 음이 고(ko)이므로 미곶강이라는 발음이 일본사람들에게는 미호강으로 표기하게 되므로 미호강으로 쓰게 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된다. 특히 일본의 돗토리현 서부에 위치하며 시마네현에 접하고 산인자방의 중앙부에 위치한 요나고 공항을 일본사람들은 다른 말로 미호비행장이라 부른다. 그리고 시가현에는 미호뮤지엄이 있는데, 이 곳은 '루브르 피라미드'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건축가 이오 밍 페이가 설계해 1997년 완공하였으며 들어가기에 앞서 지나는 터널 끝에 만개한 벚꽃과 햇빛이 어우러져 온통 분홍빛으로 물드는 장관이 연출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북한 지역에도 평안북·남도 경계에 흐르는 미호강이 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 하천의 이름으로 많이 쓰이는 이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이 미곶천을 미호천으로 표기하게 된 충분히 이유가 될 것으로 생각되며 미곶이 미호천이라는 이름의 뿌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지 않을까?
미호천을 미호강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귀에는 미호천이 익숙하게 들리며 전국의 하천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 아닐까 생각된다. 음성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진천을 거쳐 흘러오다가 청주의 젖줄인 무심천과 합류하여 넓은 오창 들판을 적시고 금강으로 흘러가는 미호천은 청주시의 생명줄이며 충청북도에서는 매우 중요한 하천 중 하나이다. 미호천은 주변의 넓은 평야지대와 나지막한 구릉, 풍부한 산림으로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등 인간이 살기에 최적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미호천의 풍부한 강돌은 석기를 만드는 재료로 부족함이 없었기에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었던 환경을 제공해 주었으며 미호천변에 있는 청주시 옥산면 소로리에서 발견된 볍씨는 우리나라가 벼농사의 원류임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산이 되고 있다. 그런데 옛 청원군 강내면과 강외면에 있는 하천으로 여겨져 온 미호천을 음성, 진천, 청주 지역의 하천까지 그 범주에 포함시킴으로써 정부에서 하천 관리를 하는 데는 일관성이 있고 편리하겠지만 하천 주변 주민들로서는 원래의 하천 이름이 있는데 미호천이라 부른다고 하니까 혼란을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미호천이라 부르는 하천에서 40-50km 떨어진 음성군 삼성면 지역에서는 미호천의 발원지라는 명예를 얻은 덕분에 생소한 이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충북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 마이산에서 발원한 물길이 처음으로 '미호천'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는 곳은 삼성면 양덕리의 덕정저수지에서 1.5km 하류 지점이다. 동리천과 도치천이 흘러들어간 덕정저수지에서 1.5km를 내려오면 삼성면 대야리에서 흘러내려온 대야천과 만난다. 삼성면 덕정로 62번 길과 92번 길이 합류하는 이 지점부터 공식적으로 '미호천'이라는 지명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 '지방하천 미호천'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설치돼 있는데 표지판에는 '하천구간 시점은 음성군 삼성면, 종점은 청원군 강외면'이라 되어 있으며 하천연장은 15km, 유역면적은 133.27㎢로 되어 있다. 금왕읍 도청리에서 흘러오는 도청천을 발원지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도청천은 미호천의 지류로서 미호천의 상류를 형성하고 있는 하천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미호천이라는 지명은 삼성면 덕정리 대야천과 합류하는 지점부터 시작돼 증평 보강천과 합류하는 청주시 오창읍 여천리까지는 지방 하천, 그 아래 금강과 만나는 세종시 합강까지는 국가하천으로 분류돼 있다. 전체 길이 89km에 이르는 이 장구한 물줄기의 이름이 왜 '미호천'일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학계에서도 아직 분명하게 단정 짓지 못하고 있다. 국립청주박물관이 을 기획하며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미호천이 지나가는 마을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다르게 불려 왔다. 대동여지도, 동국여지도 등 18~19세기에 제작된 옛 지도를 보면 작은 하천들과의 합수머리 부근에 따라 상류부터 합강 부근까지 각각 번탄(磻灘), 오근진(梧根津 : 까치내인 작천 건너편 나루터), 작천(鵲川 : 현재 까치내로 불림), 진목탄(眞木灘 : 미호천과 병천천이 만나는 지점), 망천(輞川 : 현재의 석남천으로 추정), 부탄(浮灘 : 청주시 강내면 태성리 인근 동막천), 미곶(미호천과 조천이 만나는 부근), 동진(東津 : 금강과 만나는 합강머리 부근) 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작천(까치내)은 옛 지도 대부분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특히 작천의 현재 이름인 까치내는 청주시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무심천과 미호천이 만나는 지점으로 미호천 물줄기 중 가장 아름다운 곳에 속한다. 미호천이 하나의 하천으로 널리 사용되고 지도상에 미호천이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로 보인다."고 하면서 미호천이라는 이름이 일제 강점기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근거로서 미호천이라는 이름이 옛 책에 직접적으로 등장한 것이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 간행된 '조선지지자료 충청북도편 청주군'의 기록과 1923년 제작된 '조선지형도 청주편'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지형도 청주편'에서는 미호천이 무심천과 만나는 지점을 경계로 하류쪽은 작천, 상류쪽은 미호천이라 했으며 청주와 조치원을 잇는 다리의 명칭을 미호천교라 표시함으로써 당시 사용된 지명이 현재까지 이어져 하천명으로 굳어지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의 강촌 마을에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천곡(泉谷) 송상현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라는 사당이 있어 충청북도 지방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송상현(宋象賢) 묘소 아래 진입로 왼편에 신도비(神道碑)가 있어 1984년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되었다. 비문은 일부분이 훼손되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비의 제목은 이정영(李正英)이 전서(篆書)로 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금석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송상현은 1591년 동래부사로 부임했는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민이 더불어 혈전을 벌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마지막으로 고향에 있는 부친에게, '고성월휘(孤城月暉), 열진고침(列陣高枕), 군신의중(君臣義重), 부자은경(父子恩輕)' 즉 '외로운 성에 달무리 지니, 여러 군진은 높이 베개를 베고 잠자네.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중요한 것이며, 아버지와 아들간의 은혜는 가벼운 것입니다.'라는 절명사(絶命詞)를 남기고 장렬히 순국했다. 이에 왜적의 장수도 그의 절의에 탄복하여 그를 살해한 왜병을 참살한 뒤 송상현의 시신과 그의 첩(妾)인 한금섬(韓金蟾)의 시신을 동문 밖에 안장하고 나무로 표찰을 세웠다. 그리고 시를 짓고 제사를 지냈다." 또한 이곳에 있는 청주 송상현, 한금섬, 이소사 충렬문(淸州宋象賢韓金蟾李召史忠烈門)은 송상현(宋象賢), 한금섬(韓金蟾), 이소사(李召史) 등 3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한금섬과 이소사는 송상현의 소실로 남편이 죽고 난 뒤에도 정절을 지킨 인물이다. 한금섬은 송상현이 순절할 때 곁에서 시중을 들다 함께 잡혀 순절했으며, 이소사는 왜적에 잡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수청을 들 것을 강요받았으나 죽기를 각오하고 항거하여 풀려났다. 1595년(선조 28)에 송상현이 먼저 정려를 받고, 1704년(숙종 30)에 두 소실이 정려됨에 따라 정각을 짓고 함께 모시게 되었다. 정려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1704년에 건립하였고, 1954년에 중수하였다. 홑처마에 맞배지붕을 올렸고, 홍살문을 설치하지 않고 철책으로 주위를 둘렀다. 내부에는 중앙 기둥에 오른쪽부터 송상현, 한금섬, 이소사의 정려 편액을 차례로 달았다. 송상현의 편액은 다른 것들보다 조금 높게 달았으며, 위에 1954년에 성기운(成璣運)이 쓴 중수기 현판이 걸려 있다. 송상현 충렬사가 있는 이 마을을 강촌 마을이라 불리며 한자로 강촌(綱村), 강상촌(綱常村), 강상리(綱常里)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삼강오상(三綱五常)의 정문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강상촌(綱常村)'이라 줄여 부르다가 '강촌(綱村)'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전국에는 '강촌'이라는 지명이 널리 분포하고 있는데, 대부분 냇가나 강가에 접한 마을을 가르킨다. 그렇다면 이곳의 '강촌'도 '강촌(江村)'으로 이해해야 할 듯하며 '강상촌'의 '강'은 마을 서쪽으로 흐르는 '수석천(守石川)'을 가르키는 것으로 볼 수 있어 강의 위쪽을 의미하는 '강상(江上)'으로 보는 것이 원래의 지명일 것이라 생각된다. 다른 지역의 지명 예를 찾아 보면 경북 경산시 남산면 인흥리의 강상촌과 전북 순창군 동계면 내령리의 강촌, 강상촌 등이 냇가에 위치하여 생겨난 이름들이다. 조선말 신소설 작가인 최찬식의 이란 신소설이 있는데 '충주 목계 강상촌에 해뜨고 놀 지더니……'로 시작된다. 남한강 가에 위치한 충주 목계라는 지역에 강상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다는 것인데 소설이지만 배경이 된 마을은 실제로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충주시 엄정면에 목계동(牧溪洞)이 있는데 본래 산계(山溪) 또는 목계(牧溪)라 부르다가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창말, 웃말, 물밭골, 건너말을 병합하여 목계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강상촌은 이곳에 존재하였던 실제 마을이었는지 아니면 목계 나루 인근 마을을 강상(江上)에 있다하여 강상촌(江上村)이라 하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강상촌이 지명으로서 유연성이 크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송상현 충렬사가 있는 강상촌(綱常村)은 아마도 충렬사와 연관지어 한자를 표기하고 유래가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이 되며 본래의 이름은 강상촌(江上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임진왜란 개전 초 동래성을 수호하다가 전사한 송상현(宋象賢, 1551-1592)부사의 호가 천곡(泉谷)이며 전기집인 '천곡집(泉谷集)'을 남겼다. 그리고 조선 초의 문신 안성(安省)의 호도 역시 천곡(泉谷)인데 '천곡(泉谷)' 이란 '샘이 있는 골짜기, 샘이 있는 마을'이란 의미의 '새미실'이란 지명임이 분명하므로 처음부터 좋은 의미의 한자를 가지고 만들어낸 이름이 아니라 호를 지을 때 출신 지역을 나타내기 위하여 마을 이름을 이용한 것이다. 옛 선비들의 호를 보면 자신의 출신지나 성장한 지역 등 연고지의 지명을 호로 쓰는 예가 많이 있으므로 두 사람의 연고지가 '천곡(泉谷)' 즉 '새미실'임을 알 수가 있다. 송상현은 자는 덕구(德九). 호는 천곡(泉谷). 시호는 충렬(忠烈).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현감 복흥(復興)의 아들로 10세 때 에 이미 경사(經史)에 능통하였고 1576년(선조 9)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예조, 공조의 정랑(正郞)에 이어 사재감(司宰監), 군자감(軍資監)의 정(正)을 역임하였다. 당시 일본과 명(明)나라는 사이가 악화되어 전쟁 직전이었으므로 동래(東萊)는 군사적 요지로서 사람들은 죽음의 땅이라고 하여 부임하기를 꺼리었다. 상현은 간악한 무리들의 미움을 받고 있던 터이므로 전쟁 직전인 1591년(선조 24) 겉으로는 영전 같지만 실은 좌천되어 동래 부사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듬해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4일 부산진성을 침범한 왜군이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목패(木牌)를 세우자 동래 부사인 송상현이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는 글을 목패에 써서 항전할 뜻을 천명하였다. 이에 적군이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고 15일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군사를 이끌고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 당하자 조복(朝服)을 갑옷 위에 덮어 입고 단좌(端坐)한 채 순사하였다.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의 강상촌에 먹뱅이라는 자연 지명이 있는데 한자로는 묵방리라 표기하고 있다.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에도 묵방리가 있어 묵뱅이, 또는 먹뱅이라는 이름으로 구전되어 왔으며 먹을 만드는 먹방이 있었으므로 묵방(墨坊)이라고 하였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묵뱅이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묵'은 먹을 연상하였고 '뱅이'는 그 의미를 알기가 어려우므로 비슷한 발음과 함께 먹과 관련된 의미를 더하여 자연스럽게 묵방리(墨坊里)라 표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농촌에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농사를 포기하고 묵밭, 또는 묵은 논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기에 '묵은 배미'가 자연스럽게 땅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어 '묵뱅이'가 된 것이다. 이러한 예로는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성우리의 '먹방고개', 오창읍 양청리의 '먹방골', '먹방이' 청원군 미원면 내산리의 '묵방골', '묵방들'을 들 수 있다. 따라서 흥덕구 수의동 강상촌의 먹뱅이라는 지명도 '묵은 배미'의 의미인 것이다. 이 마을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라는 사당이 있어 충청북도 지방기념물 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을의 뒷산을 묵방산이라 부르는데 묵방산에 있는 송상현의 묘는 원래 동래에 있던 것으로 선조 28년(1595)에 이곳으로 묘소를 이장하고 광해군 2년(1610)에 사당을 창건하였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현종 원년(1659)에 건립한 충신문은 1980년에 중수하여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기와집으로 마당 앞에는 삼문을 세우고 주위에는 석축 담장을 쌓아 보호하고 있다. 묘소 주위에는 상석과 문인석 등이 세워져 있으며, 묘의 오른쪽에는 비석이 놓여 있다. 묘소 입구에는 신도비가 있는데,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쓴 것이다. 이 비문에 보면 '서원(西原)의 지역 가포곡(加布谷)의 묘원은 한 구릉 깊숙하여 만세(萬世) 동안 편안하리로다. 가포의 골짜기는 서원의 경계인데'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에서 송상현의 묘소가 가포곡에 있다고 하였는데 가포곡은 강촌 뒤에 있는 골짜기인 '가푸실'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영동군 영동읍에는 미선나무 자생지와 배밭으로 유명한 매천리(梅川里)라는 지명이 있다. 문의의 미천리는 '미'를 '美, 米' 등 좋은 의미의 한자로 표기하여도 소리가 좋지 않은 이미지를 연상하게 되므로 원래의 아름다운 의미를 되찾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어원을 밝혀본 바가 있다. 그에 비하여 매천리는 '매화(梅)'의 의미를 지닌 한자로 표기함으로서 듣는 사람에게 좋은 이미지를 연상하게 해 주는 훌륭한 지명임에 틀림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어원을 밝혀보면 미천리와 매천리는 결국 같은 말에서 나온 것이고 매천리라는 지명이 미천리의 어원을 찾아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 영동의 매천리는 본래 영동현 남남일면 마군천리(馬郡川里)였다가 1909년 영동군 군내면 매천리로 바뀌었고,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에 따라 매천리라 이름하고 영동면에 편입하였다. 이곳에는 자연마을인 매끄내와 밴드골(반곡동), 새심이(鳥心洞)가 있는데 밴드골은 굽지 않고 평평하며 반듯한 골짜기라 하여 불리워진 반드골이 밴드골로 변하였고 한자로는 반곡동(盤谷洞)으로 표기하였다. 여기에서 매천리는 원래 매끄내라 불리어 왔는데 매끄내란 용두봉 끝 냇가의 의미라고 한다. 즉 이를 풀이해 보면 '매'는 용두봉이라는 산을 의미하는 '뫼'가 '매'로 변이된 것이며, '끄'는 '끝'을 나타내고 '내'는 하천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자연 환경의 형태를 가지고 땅이름을 지은 전형적인 지명의 형태로 보인다. 매천(梅天)이라는 말은 여름을 달리 이르는 말인데 아름다운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한자 표기로는 다르지만 소리로는 같은 음을 가진 '매천'이 예로부터 선비들의 호로 많이 쓰였다. 매천(梅泉)은 조선 초기 명재상 황희 정승의 후손인 황현의 아호이며, 매천(梅川)은 조선 중기의 문신 신희복의 호이기도 하다. 매천(梅泉) 황현은 1910년 한일합병조약 체결 소식을 듣자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9월 10일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하였으며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남겼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은 6권 7책으로 된 필사본으로서 한말 위정자의 비리, 비행, 외세의 침략과정, 특히 일제의 만행, 우리 민족의 끈질긴 저항 등이 실려 있어 식민통치가 끝날 때까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저자도 죽을 때, 바깥 사람에게 보이지 말 것을 자손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부본(副本) 1부가 상하이(上海)에 망명해 있던 지우(知友) 김택영(金澤榮)에게 보내져, 김택영이 '한사계'에 내용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이와같이 선비들의 호에 쓰인 매천(梅泉)과 매천(梅川)을 보면 '泉, 川'이라는 한자가 지형지물을 나타내므로 출신지나 연고지인 지명을 호로 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예전에 '매천'이라는 지명이 여러 지역에 두루 쓰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금도 다른 지역에 남아 있는 매천리라는 지명을 찾아보면 대구광역시 북구에 매천동(梅川洞)이 있다. 조선 광해군때 송원기(宋遠器)가 폭정을 간하나 이를 듣지 않자 자신의 호를 '벙어리(언어 장애인)'이라는 뜻에서 '아헌(啞軒)'이라고 고치고 현재 매천동 지역에 내려와 매역서원(梅易書院)을 세워 후진을 양성했는데 여기에서 매남(梅南)이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매남, 못안'이라는 자연 지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매남이라는 지명은 일반적으로 '뫼넘이